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2 봄.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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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식민지 시대 노동자·민중의 각성을 이끌다

김성균 | 정책교육국장
지난 호까지 식민지 시대 노동자 농민의 열악한 삶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번 호는 그런 삶 속에서도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실천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안타깝게도 걸출한 성공을 그리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시대가 그만큼 엄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작은 전망이나마 그려보려 노력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민중의 삶을 꼭 맞게 표현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 노동자운동은 사회주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3·1운동은 목표했던 독립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사회주의의 확산이라는 거대한 성과를 남겼다. 특히 1920년대는 같은 책이어도 사회주의가 있어야 팔린다거나, 뭘 좀 배웠다고 말하고 다니려면 사회주의를 알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사회주의가 확산했던 시기였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구속되고, 건설한 조직이 파괴되는 상황 속에도 식민지 시대가 끝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이는 1945년 해방 직후인 8월 24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어 해방공간의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결실을 보았다. 공장관리운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된 것도 식민지 시대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식민지 시대 노동자운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3·1운동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가 확산하고 (사회주의) 지식인과 선진적 노동자들이 주도하여 노동단체 설립, 나아가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추진하던 192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다. 이 시기 운동은 조선공산당 건설로 결실을 보았다. 다음은 일본이 사회주의 운동을 주된 목표로 삼아 탄압을 시작한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의 시기다. 일본의 탄압으로 사회주의 세력의 노동자운동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사회주의 세력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방향 전환을 시도하는데,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대중을 조직하는 노선으로의 전환이 그것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시기의 운동을 살펴보도록 한다.
 

한일병합 이후, 자강운동과 근대소설의 출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자강운동의 흐름이 지식인을 중심으로 생겨난다. 자강운동은 민족의식 고취, 실력양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운동이 중심이었는데, 자강운동을 추구한 지식인층이 집결해 조직한 비밀결사체가 바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1907년에 결성되어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하기 전까지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신민회 내부에서도 총독부 설치 이후의 긴박한 조선 상황을 반영한 강경한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무장투쟁론이 그것이다, 당시 자강운동은 온건한 운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강경파로 불리기도 했다. 신민회가 해체된 이후 내부에 존재하던 두 흐름은 분화된다. 온건파(실력양성론)의 대표인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을 조직했고, 강경파(무장투쟁론)의 대표인 이동녕, 이회영 등은 만주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마찬가지로 강경파였던 이동휘는 동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건설하고 민족 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을 도모한다.

한편 한일병합 후 자강운동의 중요한 수단은 언론이었다. 언론을 통한 정치사상 선전을 통해 점진적인 민족의 계몽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소설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민족계몽이라는 정치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서사형식으로서 소설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즉 근대소설은 무지한 민중을 깨우쳐 민족의 앞날을 헤쳐 가는 지식인의 사명이라는 외적 계몽과, 인간이성에 기반한 개인적 주체의 자각이라는 내적 계몽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실망,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실력양성론과 무장투쟁론이 분화된 이후 국내외에서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 끊임없이 존재했다. 이 운동은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3·1운동이다. 그러나 운동의 목표였던 독립은 결국 단시일 내에 달성할 수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염상섭의 두 번째 창작집 『견우화』의 ‘자서’(自序)에서 밝힌 작가의 말에 따르면,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정신적 원인을 가즌 자가, 공상과 오뇌(뉘우쳐 한탄하고 번뇌함)가 극하야 육(체)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발광한 후에 비로소 몽환의 세계에서 자기의 미숙한 이상의 일부를 토함을” 그린 작품이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나’의 권태로움을 그려내면서 지식인의 실망을 표현하고, 그 끝에서 ‘나’가 어떤 깨달음에 이르는 것으로 끝맺는 작품이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화자인 ‘나’와 친구들이 김창억을 만나는 이야기다. 다른 한 부분은 김창억의 개인사로, 불의의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집안이 무너지고, 그 자신도 점차 정신을 놓아가는 와중에 3층 집을 짓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본 글에서는 화자인 ‘나’에 초점을 맞춰서 소설을 따라가 본다. ‘나’는 어떤 이유로 생의 권태를 느낀다.

무거운 기분의 침체와 한없이 늘어진 생의 권태는 나가지 않는 나의 발길을 남포까지 끌어 왔다.
귀성한 후 칠팔 개삭간의(개월간의) 불규칙한 생활은 나의 전신을 해면같이 짓두들겨 놓았을 뿐 아니라 나의 혼백가지 두식하였다.(좀이 슬었다.) 나의 몸의 어디를 두드리든지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취를 내뿜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피로하였다. 

이 작품 속에 3·1운동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설 집필 시기가 3·1운동의 직후라는 점, 작가가 1919년 3월 19일, 오사카 덴노지 공원에서 거사하기로 했으나 미수에 그쳐 검거된 적이 있었다는 점, 끝으로 작가가 “3·1운동 당시에는 이미 독립됐다는 소문부터 만세 부르면 독립된다는 소문까지 각종 루머가 뒤섞여 흘러 다녔으며, 1919년 4월까지도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에 불과했다”고 인식했을 정도로 운동의 전망을 낙관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보면 이 작품이 3·1운동 이후 작가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무섭게 앙분한 신경만은 잠자리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 두 홰, 세 홰 울 때까지 엎치락뒤치락거리다가 동이 번히 트는 것을 보고 겨우 눈을 붙이는 것이 일주일간이나 넘은 뒤에는 불을 끄고 드러눕지를 못하였다.
그 중에도 나의 머리에 교착하여 불을 끄고 누웠을 때나 조용히 앉았을 때마다 가혹히 나의 신경을 엄습해 오는 것은, 해부된 개구리가 사지에 핀을 박고 칠성판 위에 자빠진 형상이다.
내가 중학교 2년 시대에 박물 실험실에서 수염 텁석부리 선생이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차례차례로 끌어내서 자는 아기 누이듯이 주정병에 채운 후에 옹위하고 서서 있는 생도들을 돌아다보며 대발견이나 한 듯이,
“자 여러분, 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시오.”
하고 뾰죽한 바늘 끝으로 여기저기를 콕콕 찌르는 대로 오장을 빼앗긴 개구리는 진저리를 치며 사지에 못 박힌 채 벌떡벌떡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소설 속 ‘나’가 강박적으로 떠올리는 모습은 해부된 개구리가 사지에 핀을 박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저것 빼앗긴 채 살아있기는 하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개구리와, 답답한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술과 담배만 하고 있는 ‘나’는 비슷한 처지다. 다만 소설 속에서 왜 답답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3·1운동의 실패 후 일본의 감시 속에서 활동이 제약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권태를 느끼는 와중에 친구인 H에 이끌려 남포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남포에서 또 다른 친구인 Y와 A를 만나 남포의 광인(狂人) 김창억을 만난다. 김창억은 불의의 사건으로 4개월간 투옥되는데, 그 사이 아내가 도망간 것을 알고 점차 정신을 놓기 시작한다. 이후 유곽 근처에 3원 50전을 들여 3층 집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분부대로 동서양 모두가 친목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동서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자임한다. 

“아까 말씀한 것같이 성경이 가르치신 바 불의 심판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구주 대전(세계대전)의 그 참혹한 포연 탄우가 즉 불의 심판이외다그래. 그러나 이번 전쟁이 왜 일어났나요…. 이 세상은 물질 만능, 금전 만능의 시대라 인의예지도 없고, 오륜도 없고, 애도 없는 것은 이 물질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욕에 더럽혀진 까닭이 아닙니까…. 부자, 형제가 서로 반목 질시하고 부부가 불화하며 이웃과 이웃이, 한 마을과 마을이…. 그리하여 한 나라와 나라가 서로 다투는 것은 결국 물욕에 사람의 마음이 가리웠기 때문이 아니오니까.”

김창억은 세계대전이 금전만능의 시대라 사람의 마음이 더럽혀진 까닭이라고 연설한다. 이제는 세계대전도 끝났으니 동서가 친목할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하며 세계 평화와 인류애에 대해 강변한다. 사뭇 진지한 그의 연설 내용과 달리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그가 광인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선생님 그러면 금강산에는 언제 들어가실 텐가요?”
A가 놀렸다.
“한 전 다아 돌아다닌 후에 들어가야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합니까.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릴 수가 있습니까?”
“응….”
그는 눈을 뚱그렇게 뜨고 A를 바라보았다.
“아, 선생님 망령이 나셨나보구먼…. 금강산에 들어가시면 군수나 하나 시켜 주신다더니….”
일동은 박장대소를 하였다.
“응! 가기 전에 시켜 주지!”
그의 하는 말에는 조금도 농담이 없었다. 유창하게 연설 구조로 열변을 토할 때는 의심할 여지없는 어떠한 신념을 가진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금강산에 옥좌는 벌써 되었나요?”
Y는 웃으며 말하였다.
“예, 이 집이 낙성되던 날 벌써 꾸며 놓았답니다.”
하고 여러 사람의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성 중에 김씨가 제일 좋은 성이외다, 옥은 곤강에서 나지만도 금은 여수에서 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이 너는 김가니 산고수려한 금강산에 들어가서 옥좌에 올라앉아 세계의 평화를 누리게 하라고 하십디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옥좌에 앉아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겠다고 말하는 김창억이다. 김(金)자에 대해서도 사람 인(人)에 구슬 옥(玉)이니 사람구슬 금으로 읽어야 하며 사람구실을 위해서는 구슬 2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씨 여성은 어찌 된 것이냐는 친구들의 조롱에 자기 부인은 안(安)가 라면서 “여편네가 관을 썼다”고 웃는다. 이 밖에도 김창억은 말이 되지 않는 여러 이야기를 한다. 이를 들으며 ‘나’의 친구들은 김창억을 조롱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 생각한다. 

동서 친목회 회장…. 세계 평화론자…. 기이한 운명의 순난자…. 몽현(夢現)의 세계에서 상상과 환영의 감주(甘酒)에 취한 성신의 총아 오욕육구(다섯 가지 욕심과 버려야할 여섯 가지), 칠난팔고(불교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난[이변]과 여덟 가지 고통)에서 해탈하고 부세의 제연(덧없는 세상의 모든 인연)을 저버린 불타의 성도(석가모니의 제자)와, 조소에 더러운 입술로 우리는 작별의 인사를 바꾸고 울타리 밖으로 나왔다.
(…)
“3원 50전으로 삼층집을 짓고 유유자적하는 실신자를- 아니오, 아니오, 자유민을 이 눈앞에 놓고 볼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소. 현대의 모든 병적 다크사이드를 기름 가마에 몰아 놓고 전축하여(쌓아올려) 최후에 가마 밑에 졸아붙은 오뇌의 환약이 바지직바지직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의 욕구를 홀로 구현한 승리자 같기도 하여 보입디다…. 나는 암만 하여도 남의 일같이 생각할 수 없습디다.”

김창억을 만나고 난 뒤, ‘나’는 친구인 P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김창억의 모습을 남의 일 같이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나’는 나의 신념대로 살 수 없는 현실에 실망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반대로 김창억은 신념대로 살고 있으나 정신은 놓아버렸다. ‘나’는 정신을 유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은 미치지 않으면 신념을 지킬 수 없다는, 선택할 수 없는 양자택일 속에서 고뇌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창억에 대해 남의 일 같이 생각할 수 없음은 ‘나’도 김창억처럼 미쳐버릴 수 있다는 동질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Y에게 김창억이 3층 집을 불태우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는 그 장소를 찾아간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행할 만한 길 오른편 언덕에 거무스름하게 썩어서 문정문정하는(물러서 조금만 건드려도 끊어지는) 짚으로 에워싼 한 칸 집이 있고, 그 아래에는 비스듬하게 짓다가 둔 헛간 같은 것이 있다. 나는 늘 보았건만 그것이 본체가 무엇인지 아직껏 물어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삼층 양옥의 실화(失火) 사건의 통지를 받고는 새삼스럽게 눈여겨 보였다. 나는 두세 걸음 지나가다가 다시 돌쳐서서(돌아서서) 언덕으로 내려와서 사면팔방을 멍석으로 꼭 틀어막은 괴물 앞에 섰다.
나는 무슨 무서운 물건이나 만지듯이 입구에 드리운 멍석 조각을 가만히 쳐들고 컴컴한 속을 들여다보았다. 광선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속에서는 쌀쌀한 바람이 휙 끼칠 뿐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연히 마음이 선뜩하여 손에 쥐었던 거적문을 놓으려다가 다시-자세히 검사를 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기둥 두 개를 나란히 늘여 놓은 위에 나무 관 같은 것을 놓고 그 위에는 언젠지 대동강 변에서 본 봉황성 대가리 같은 단청한(옛날 집의 벽, 기둥 등에 여러 빛갈로 무늬를 그린) 목판짝이 얹혀 있었다. 나는 보지 못할 것을 본 것같이 꺼림하여 마른침을 탁 뱉고 돌아서 동둑 위로 올라왔다.
저녁 밥상을 받고 앉아서 주인더러 등 너머의 일간두옥(한 칸짜리 작은 집)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그것이 이 촌에서 천당에 올라가는 정거장이라우.”
하고 웃으며 동리에서 조직한 상계(장례를 위한 계)의 소유라고 설명하였다. 이 촌에서 난 사람은 누구나 조만간 그 곳을 거쳐야만 한다는 묵계가 있다는 그의 말에는 무슨 엄숙한 의미가 있는 것같이 들리었다. 나는 밥을 씹으며 저를 손에 든 채로 그 내력을 설명하는 젊은 주인의 생기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앉았었다. 그 순간에 나는 인생의 전 국면을 평면적으로 부감한(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것 같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동시에 무거운 공포가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그 날 밤에 나는 아무것도 할 용기가 없어서 몇몇 청년이 몰려와서 떠드는 속에 가만히 드러누웠었다. 어쩐지 공연히 울고 싶었다. 별로 김창억을 측은히 생각하여 그의 운명을 추측하여 보거나 삼층집 소화한 후의 행동을 알려는 호기심은 없었으나 지금쯤은 어디로 돌아다니나 하는 생각이 나는 동시에 작년 가을에 대동강 가에서 잠깐 본 장발객의 하얀 신경질적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과연 그가 그 후에 어디로 간 것은 아무도 몰랐다. 더구나 뱀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꺼리는 평양에 나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몽상 외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평양에 왔다. 그의 후취(두 번째 아내)의 본가가 있는 곳이다.
…… 일 년 열 두 달 열어 보는 일이 없이 꼭 닫은 보통 문밖에 보금자리 같은 짚더미 속에서 우물우물하기도 하고 혹은 그 앞 보통 강가로 돌아다니는 걸인은 오직 대동강 가의 장발객과 형제거나 다만 걸인으로 알 뿐이요, 동리에서도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개벽》, 1921.8.

다시 찾아간 김창억의 집은 마치 괴물처럼 새롭게 보인다. 그러면서 인생의 전 국면을 평면적으로 부감한 것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집이 불타버린 뒤 그것의 실체를 다시 인식했듯, 김창억을 자유인이라 인식했던 것도 실제로는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는 자유인이라는 의미를 가지지 않은, 그저 미쳐버린 사람인 장발객을 떠올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김창억의 말로를 설명하면서 소설을 마무리한다. 김창억은 그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걸인이 되었을 뿐이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나’는 실천의 어떤 가능성도 차단되어 있는 현실과 자신의 이상향의 괴리 속에서 고통받는 인물이다. ‘나’의 고통은 곧 작가의 고통이기도 했다. 작가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기 전에 집필한 「저수(樗樹, 가죽나무) 하(下)에서」라는 에세이에서도 그런 정신적 고통을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작품 속에는 ‘나’가 무언가를 지향하며 달려가고픈 생각을 표현한 내용이 한 구절 등장한다. 잠시 작품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하여간 이 방을 면하여야 하겠다.”
지긋지긋한 듯이 방 안을 휘익 둘러본 뒤에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디든지 여행을 하려는 생각은 벌써 수삭(개월) 전부터 계획이었지만 여름에 한 번 놀러 가 본 신흥사에도 간다는 말뿐이요, 이때껏 실현은 못 되었다.
“어디든지 가야겠다. 세계의 끝까지, 무한에, 영원히, 발끝 자라는 데까지, 무인도! 시베리아의 황량한 벌판! 몸에서 기름이 부지직부지직 타는 남양! 아아.”
나는 그림 엽서에서 본 울창한 산림, 야자수 밑에 앉은 나체의 만인을 생각하고 통쾌한 듯이 어개를 으쓱하여 보았다. 단 일 분의 정거도 아니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 있는 굳센 숨을 헐떡헐떡 쉬는 풀스피드의 기차로 영원히 달리고 싶다…. 만일 타면 현기가 나리라는 염려만 없었으면 비행기! 비행기! 하며 혼자 좋아하였을지도 몰랐었다.

‘나’는 그 수단을 찾지 못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나 어떤 지향점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현실을 뚫고 자신의 지향을 추구해 나가기를 원한다. 이 역시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리라. 염상섭은 허망함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이 작품을 쓰던 전후 시기부터 자신의 지향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것은 무엇이었나?

염상섭은 3·1운동 당시에도 오사카에서 ‘재(在)오사카한국노동자대표’라는 명의로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 사건을 준비할 당시 함께 했던 두 인물이 아나키즘적 경향이 있던 황석우와 사회주의로 기울고 있던 변희용이었다. 또 염상섭은 독립선언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피검되었다가 출옥한 후 요코하마 복음인쇄소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이미 노동운동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던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 그의 초기 3부작을 집필하던 전후의 시기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여기서 넓은 의미란 본격적으로 프로문학(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지향한 작가들의 사상과는 거리가 있지만, 염상섭 역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지지했다는 의미다. 이후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삼대』, 『무화과』 등의 작품에서는 ‘심퍼사이저’(sympathizer, 동조자)가 등장하는데, ‘동반자 없는 사회주의자’는 존재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 없는 동반자’는 그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지식인들은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지 못해 크게 실망했지만 운동의 실패 이후 곧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에서 일부 지식인이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전 사회적으로 사회주의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3·1운동의 진정한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즉 1920년대부터 활발히 벌어지는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적 위치에서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활동가가 3·1운동을 경험하면서 각성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등 전 민중적 차원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자 하는 집단적 조직과 운동의 필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확산하면서 특히 노동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노동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근대적 인식의 단초가 형성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이런 인식이 신문 지면에 실리고 전 사회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은 3·1운동 이후 사회주의가 확산하면서부터였다. 노동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노동과 자본의 대립과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 등에 대한 논의도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내용은 주로 진보적 지식층의 운동에 의한 것이었다. 1920년대 노동운동은 사회주의를 수용한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활동, 심훈의 『동방의 애인』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나가던 지식인과 그들이 설립한 단체들은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런 단체들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 단체들은 권력투쟁에 몰두하는 파벌이라는 통념이 존재한다. 이런 부정적 인식의 근원은 바로 일본의 고등경찰이었다. 식민지의 질서를 위협하는 자를 부도덕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일본 경찰의 수법이었다. 부정적 의미 부여는 냉전 시기 미국과 남한 정치학자에 의해 재생산되어 통념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이런 인식은 북한에서도 발견된다. 북한의 집권세력이 초기 사회주의 전통과 단절된, 그들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여러 단체의 대립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대립은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르쿠츠크파의 경우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진되는 것으로, 거칠게 말하자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민족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될 것으로 봤다. 상해파의 경우는 민족해방을 최소강령으로 제시하면서, 노동자·농민이 주체가 된 민족해방이 이뤄진 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혁명을 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두 계파의 분리는 조선 민중의 진정한 해방을 지향하는 데 있어 어떤 노선이 더 옳을 것인가라는 정치사상적 배경이 있었던 것으로, 단순한 파벌 싸움만은 아니었다. 여러 사회주의 단체 간의 이견은 대체로 이와 같은 노선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동휘였다. 이동휘는 신민회 출신 인사로 신민회 내부의 급진파(무장투쟁론)였다. 그는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갔다가 다시 러시아의 극동지역(바이칼 호~태평양에 이르는 러시아 영토)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1918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한다. 한인사회당은 한국 민족해방운동과 러시아 혁명운동 간의 국제적 연계를 목표로 하였다. 즉 러시아 노동계급과의 밀접한 연계를 통해 압박받는 한국의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인사회당의 활동은 길지 못했다.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한 시베리아 내전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의 소비에트 정부가 붕괴되고 이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이 불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인사회당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지도부는 가까스로 탈출해 근거지를 연해주로 옮겨 당을 재정비한다. 이곳에서 내부 논의 끝에 상해임시정부에 당 간부들의 참여를 허용하기로 결정하고 이동휘와 김립 등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 이동휘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김립은 국무원 비서장에 취임한다.

일본의 검열로 완성되지 못한 심훈의 『동방의 애인』은 사회주의자의 사랑과 투쟁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에는 박진, 김동렬, 강세정, 배영숙, X씨가 등장한다. 박진과 김동렬은 논자에 따라 해석이 다르나 박헌영을 모델로 하고 있고, 강세정은 주세죽을 모델로 하고 있다. X씨는 박진과 김동렬의 사회주의 활동을 지도하는 인물인데, 논자에 따라 그를 이동휘를 모델로 한 인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작가의 말
남녀간에 맺어지는 연애의 결과는 조그만 보금자리를 얽어 놓는 데 지나지 못하고, 어버이와 자녀간의 사랑은 핏줄을 이어 나아가는 한낱 정시로 간계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더 크고 깊고 변함이 없는 사랑 가운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민족과 같은 계급에 처한 남녀노소가 사랑에 겨워 껴안고 몸부림칠 만한 새로운 공통된 애인을 발견치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초조하게도 기다려지던 그는 우리와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 속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여러분에게 그의 정체를 보여드려야만 하는 의무와 감격을 아울러 느낀 것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공통된 애인”이란 바로 사회주의를 표상하는 것이다. 소설 속 동렬은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은 듣기만 해도 속이 상합니다. 가공적 민족주의! 환멸거리지요. 우리는 다른 길을 밟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세정에게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른 길 역시 사회주의 혁명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동렬이와 박진(본이름이 아니다)이는 고향은 다를망정 서울 어느 사립 중학교에서 사년 동안이나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동창생으로 막역한 사이였다. 동렬이는 박진의 불덩이같은 정열과 모험이 있는 것을 사랑하였고, 박진이는 무슨 일이든지 의지적이요 침착하여 함부로 덤비지 아니하는, 자기와 반대되는 성격을 동렬에게서 발견하고 너무 과격한 자기의 성질을 조화시키려는 생각이 그와 친근해진 원인의 하나였다. 그들은 흡사 동성연애나 하는 사람처럼 예산 없는 학비나마 내 것 네 것없이 나누어 쓰고 이불 한 채를 둘이 덮고 한겨울을 난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졸업하게 된 해가 바로 기미년! 당시의 의학생이요 그들이 형님이라 부르던 이경재는 자기 집 골방에서 ××공보의 원고를 쓰고, 동렬이는 등사판질을 하는 한편 진이는 밤을 타서 배달부 노릇을 하다가 그만 한 끈에 묶여서 경찰서를 거쳐 처음으로 감옥에 입학하였다. (…) 처음 타 보는 자동차 속에는 여학생 한 사람이 포박을 당한 채 먼저 타고 있었다. (…) 그는 ××학당의 학생으로 시위운동에 앞장을 서서 지휘하던 여자였는데, 한 끈에 묶이고 한 자동차로 같은 감옥문으로 출입한 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동렬이와 결혼까지 한 지금의 세정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박진, 동렬, 세정은 3·1운동에서 참여하다가 잡혀 투옥된 적이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1년이 넘는 형기를 마치고 나왔으나 그 고초는 그들로 하여금 도리어 참을성을 길러주고 의기를 돋우기에 귀중한 체험이 되었다. 

실제 모델인 박헌영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평생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존중했다. 3·1운동 당시 그는 격문을 쓰고 그것을 등사하는 역할을 했다. 다만 박헌영은 이 사건으로 구속되지는 않았다. 또 그 3·1운동을 계기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3·1운동이 자신을 공산주의자 진영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소설 속 박진과 동렬은 끓는 그 의지를 가지고 젊은 투사들이 모이는 상해로 건너간다. 그들은 상해에 어떤 연고도 없었으나 그들의 행색을 보아하니(허름한 옷가지의 조선인) 운동을 하러 왔을 것이라 짐작한 한윤식이라는 사람이 그들을 데려가 X씨를 소개시켜준다. X씨는 그들에게 “서북간도에서 마적에 붙잡혀갔던 이야기” “시베리아에서 전쟁하던 추억담”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실제 박헌영도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우여곡절 끝에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간다. 이곳에서 김단야를 비롯한 여러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한다. 이 무렵 상해에는 두 개의 공산당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이동휘가 만든 상해파 고려공산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었다. 박헌영, 김단야 등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둘 중 하나에 가입해야 했는데, 이동휘는 능력을 확인한 후에 가입시켜야 한다며 가입조건을 상대적으로 까다롭게 했다. 이에 박헌영은 큰 제한이 없던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한다.

가입한 뒤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를 조직한다. 박헌영은 비서직을 수행하면서 기관지 편집, 이론서 번역 및 출판, 지회결성 등 분주한 활동을 벌인다. 1921년에는 각 지역 고려공산청년단의 대표가 북경에 집결해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결성한다. 박헌영은 중앙위원에 선출된 동시에 최고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아닌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은 소설의 X씨가 이동휘를 모델로 했다는 해석과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기형은 “작가인 심훈이 박헌영의 행적을 서사의 골격으로 삼으면서도 혁명운동의 방향은 이동휘의 민족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했다”고 해석한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그렇게 X씨와 교류하며 상해에 자리를 잡아가던 중에 동렬은 세정에게 편지를 부친다. 세정은 편지를 받자마자 한걸음에 상해로 건너온다. 동렬은 반갑지만 고민된다.

상해까지 뛰어나와 이다지 고생을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 연애는 인생에게는 큰일인 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겨를도 없거니와 큰 일을 경륜하는 사람으로는 무엇보다도 여자가 금물이니 가장 큰 장애물이다. 도를 닦는 중과 같이 제몸을 간직하더라도 그 한 몸뚱이조차 의지할 곳이 바이없는 조선놈의 신세가 아닌가. 세정이가 오고 진이마저 그 여자와 관계가 깊어 간다면 우리 두 동지는 상해까지 연애를 하려고 원정을 나온 셈이다. 무슨 면목으로 다른 동지들을 대하겠는가? 변명할 도리조차 없다.
아아, 큰 일을 위하여는 이 육신을 산 제물로 바치려고 맹세한 우리로서 해외에 나와 첫 번으로 착수한 사업이 연애란 말이냐?
아니다. 안 된다! 우리는 여자와 관계를 맺을 자격이 없다. (…) “세정이는 이 ‘하아트’를 이해할 이성의 동지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세정이 도착하여 반가운 동렬이었다. 동렬과 박진, 세정은 함께 야학에 다니며 중국말을 공부한다. 그곳에서 영숙이를 만난다. 영숙이는 서울 기독교 장로의 무남독녀로 아버지를 따라 상해에 왔다가 아버지는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미국으로 갔고, 영숙은 홀로 남아 음악학교 봄 학기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친분을 쌓은 세정이는 영숙이네 숙소로 짐을 옮겨 함께 살게 된다. 함께 살며 세정은 책을 읽고(로자 룩셈부르크의 전기) 영숙이는 털실로 자켓을 짜면서 지낸다. 동렬과 세정, 박진과 영숙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감정이 얽혀간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그동안 동렬이와 진이는 X씨의 집을 출입하면서 시국에 대한 토론도 하고 장래에 취할 방책에 대한 논의도 했다. 그러면서 두 청년은 평소 해외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일시에 흥분되었던 기분에 들떠서 중구난방으로 날뛸 뿐이고, 좀 더 깊은 근본문제를 등한시했던 것을 깨닫는다.

X씨를 중심으로 동렬이와 진이와 그리고 그들의 동지들은 지난날의 모든 관념과 ‘삼천리 강토’니 ‘이천만 동포’니 하는 민족에 대한 전통적 애착심까지도 버리고 새로운 문제를 내걸었다. 그 문제 밑에서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듯 하여 몇 달을 두고 토론하였다.
“왜 우리는 이다지도 굶주리고 헐벗었느냐?”
하는 것이 그 문제의 큰 제목이었다. 전 세계의 무산대중이 짓밟히는 계급이 모두 이 문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치 못하고는 결정적 답안이 풀려나올 수가 없다 하였다. 따라서 이대로만 지내면 조선의 장래는 더욱 암담할 뿐이라 하였다.
“왜 XX를 받느냐?”
하는 문제는 “왜 굶주리느냐?”하는 문제와 비교하면 실로 문젯거리도 되지 않을 만한 제삼 제사의 지엽 문제요, 근본 문제가 해결됨을 따라서 자연히 소멸될 부칙(附則)과 같은 조목이라 하였다.

이처럼 무산대중에 주목하면서 무산대중이 짓밟히는 계급문제의 해결이 우선되지 않는 한 조선의 장래는 암담할 뿐이라고 인식한다. 이 굶주리는 문제가 해결되면 식민지의 문제도 자연히 소멸될 것이라 여겼다. 이후부터 동렬이, 진이와 세정이는 X씨가 지도하고 책임지고 있는 ○○당 ××부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동포’니 ‘형제자매’니 하는 말을 집어치우고 피차 동지라고만 불렀다. 그 뒤부터 X씨는 동렬이와 진이를 신임해 당의 중요한 일까지 맡겼다. 진이는 영숙이까지 동지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하여 그녀를 우리 그룹에 넣고야 말리라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또다시 흐르고 박진은 X씨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는 진이의 성향을 고려함과 동시에 “중국 학생들의 사상경향이 급격히 변해가는 때”인만큼 그들과 교류하고 그들 속으로 파고들어 훗날을 도모하라는 계획도 고려한 것이었다.

한편 동렬이는 세정과 함께 사랑을 속삭이는 광경을 X씨에게 들키고 만다. 동렬이는 무릎을 꿇고 X씨에게 용서를 빈다. 그러나 오히려 X씨는 둘의 사랑을 응원하고 둘의 결혼 예식을 약속한다.

실제 박헌영도 상해 시절에 첫 아내인 주세죽을 만났다. 함흥 출신으로 박헌영보다 두 살이 많았던 주세죽은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가해 한 달간 수감된 전력이 있었다. 석방 후 병원에서 근무하다 1921년에 상해로 건너와 허정숙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난다. 박헌영과 주세죽은 곧 연인 사이가 되고, 박헌영은 주세죽을 고려공청 사무실로 출근시킨다. 그녀의 주요 업무는 혁명운동에 관한 모든 기사와 자료를 모으고 세계 약소민족의 분포와 생산력, 생활상태 등에 관한 도표를 그리는 것이었다. (소설 속 세정이도 동렬이가 지시하여 “스크랩북에 무산계급운동에 관한 기사를 오려 붙이기도 하고 세계 약소민족의 분포와 생활상태며 지역을 따라 생산과 소비되는 비교표를 꾸”몄다.) 이 당시 생활은 무척 가난했는데, 이 때 도움을 준 것이 여운형이었다. 훗날 박헌영 부부의 결혼식을 열어주고 주례를 서준 이도 여운형이었다.

소설로 돌아가, 동렬과 세정이 결혼을 하고 박진과 영숙도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3년 뒤, 동렬과 세정은 여전히 상해에서 당의 업무를 수행한다. 

동렬이는 세정이와 여전히 상해를 지키고 X씨와 연락하여 뒷일을 보살피고 한 편으로는 어학을 계속하여 공부하였다. 그 동안에 새로이 출판되는 책을 뜯어 볼 만큼이나 늘었다. 그가 거처하는 방에는 맑스의 『자본론』을 위시하여 책이 들이쌓이고 신문잡지로 벽을 바르다시피 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렬이가 X씨의 대신으로 책임을 지고 지휘하는 당의 일은 그 세력이 내지(조선)에 까지 뻗치고, 그 곳의 청년당원만 하여도 오륙십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노력은 그동안 여러 파로 분열이 되어 서로 싸우는 중에도 그중의 대표적 존재로서 국제당의 인정을 받았다.
실제 박헌영의 고려공청은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에 의해 파벌로 간주되어 승인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국제공청의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승인받았다. 
그해 칠월 상순 어느 날, 동렬이와 그 밖에 두 동지(소설에 등장하지 않은 사람)는 모스크바를 향하여 비밀히 떠났다. 십여일 후에 그 곳에서 열리는 국제당 청년대회에 참여할 조선인 대표로 뽑혔던 것이다. (…) 오랫동안 동경하였던 모스크바 중앙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여러 날 같은 기차 속에서 기거를 하면서도 서로 모르고 있었던 다른 나라의 대표들도 십여명이나 함께 내렸다. 국제당 동양부에서는 환영의 기를 들고 나와서 그들을 맞았다. (…) 마중나온 사람 중에는 조선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 그 이튿날 제일 먼저 안내를 받은 곳은 레닌의 무덤이었다. (…) 안내자는 경건한 태도로 고인의 간단한 이력과 생시의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 (크렘린) 궁전의 광장을 나서려니 열두 시나 되었는데 공중에서 난데없는 노래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궁성의 높은 시계탑 위에서 종을 치는 대신에 기계장치로 인터네셔날이 울려나오는 것이었다. 일행은 그 맞은 편에 있는 국영상점을 위시하여 노동국농민 박물관 등을 참관하였다. (…) 오후에는 속칭 공산대학이라는 K.Y.T.B 대학으로 갔다. 기숙사까지 돌아 나오려니까 안내하던 일본말 강사인 조선사람이 “우리 동포도 오십여 명이나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 대회는 사흘 후 크레믈린 궁전 안에서 열렸다. (…) 그들은 (…) 그 나라 그 지방의 정세를 보고하고 장래의 방침과 전술에 관한 토론을 하느라고 사흘이나 보냈다. (…) 그리하여 일주일 후에 대회는 끝났다. 또 그리하여 십여 일 후에 동렬의 일행은 짧은 시일이나마 많은 실제의 견문을 얻고 상해로 돌아왔다. (미완)
《조선일보》 1930.10.21.~12.10.

동렬은 ‘국제당 청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다가 상해로 돌아온다. 소설은 여기서 미완으로 끝맺는다. 소설과 달리 박헌영이 소설의 ‘국제당 청년대회’에 해당하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헌영은 고려공청 중앙총국 책임비서 자격으로 대표자를 선정·파견했을 뿐이었다.

다만 박헌영도 러시아에 방문했던 적은 있다. 박헌영은 1925년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 출소한다. 이후 심신을 회복하던 박헌영, 주세죽 부부는 1928년 비밀리에 러시아로 망명한다. 망명 중에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다. 국제레닌학교는 코민테른이 운영하던 최고 간부 교육기관으로 입학이 매우 까다로웠으나 국제공청의 강력한 추천으로 입학하게 된다. 1929년 입학 후 1931년까지 박헌영은 경제학, 정치학 등에 대한 공부와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도 함께 했다. 그는 1932년 상해로 돌아오면서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
 

1920년대 노동자운동의 또 다른 주역인 선진노동자, 심훈의 『불사조』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조선 내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활동을 하는 동시에, 사상단체라는 합법 간판을 내걸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선전했다. 이는 일본의 이른바 ‘문화통치’ 기간을 배경으로 했다. 즉 일본이 사상단체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허용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개적으로 탄압할 수도 없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코민테른 역시 조선 내 활동에 개입했는데, 코민테른 산하 조선담당국인 코르뷰로(고려국)와 오르그뷰로(조직국)가 그 임무를 담당했다.

이 시기 운동을 주도한 계층은 지식인과 선진노동자 계층이었다. 선진노동자 계층에서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는 인쇄공이었다. 인쇄공은 업무의 특성상 글을 접할 수밖에 없었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화요회 활동가들과 함께 결성한 인쇄직공조합은 조선공산당의 핵심 구성부분이 되기도 했다.

심훈의 장편소설 『불사조』에는 선진적 노동자인 흥룡과 덕순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 역시 일본의 검열로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흥룡은 인쇄공, 덕순은 고무공장 여공이다. 흥룡은 경찰에 검거되지만 자백하지 않고 끝내 버텨내는 인물이다. 덕순은 노동단체의 명부를 경찰에 빼앗길 뻔한 상황에서 입으로 명부를 삼켜 극적으로 단체를 지켜내는 인물이다. 『불사조』는 김계훈과 독일 여성 주리아, 한국 여성 정희의 서사를 주된 내용으로 하면서 흥룡과 덕순의 이야기가 가미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번 호에서는 흥룡의 행적을 위주로 살펴보려 한다.

우선 소설의 주 서사인 김계훈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한다. 김계훈은 조선이 낳은 바이올린 천재로 독일로 유학을 간다. 그런데 그는 독일 유학 도중, 정희와 이미 혼인하여 아이까지 있음에도 이 사실을 숨기고 뛰어난 반주자였던 주리아와 결혼한다. 그러나 계훈은 결혼 전부터 주리아를 짝사랑하던 청년을 내치지 못하는 주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주리아가 그와 바람이 날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의심은 주변 친구들의 이간질도 한몫 했다. 계훈은 자신의 과오가 있는 만큼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은 영 찝찝한 일이었으나, 주리아가 다른 남자와 바람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계훈은 (주리아가 가 보고 싶어 하기도 했기에) 조선으로의 귀국을 서두른다. 귀국하기 얼마 전, 계훈은 집안에 연통하여 정희를 집에서 내쫓고 자신의 과오를 숨기려 한다. 그러나 이를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고, 결국 주리아에게 모든 사실을 들키고 만다. 주리아는 조선에 머무르던 스투핀이라는 독일 남자와 떠나가고, 분을 참지 못한 계훈은 이 둘을 쫓아가 총으로 쏴 죽이려 한다. 계훈과 이들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그 혼란 속에서 뜻하지 않게 계훈은 자신의 왼팔을 총으로 쏘고 만다. 이 부상으로 결국 바이올린을 켜지 못하는 몸이 된다. 엎친 데 덮쳐 부유했던 집안도 일본 브로커의 사기로 잘못된 땅 투기에 휘말려 파산에 이른다. 이러한 계훈의 서사가 주되게 펼쳐지는 속에서 흥룡과 덕순이 등장한다.

흥룡이는 한 달에 이십 원 남짓한 돈에 목을 매달고 인쇄소에 다니는 이름 없는 직공이다. 그러나 조합에 들어가서는 중요분자요 열렬한 투사였다. 어머니의 속을 해운 것이라고는 동맹파업에 앞장을 서다가 서너 번이나 유치장 신세를 진 것 밖에 없었다.

흥룡은 인쇄소에 다니다 조합에 가입해 열렬히 활동하는 선진적 노동자다. 이미 동맹파업으로 유치장 신세를 졌던 적이 있는 흥룡이는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음악회날 밤에 검속된 흥룡이는 다짜고짜로 유치장에다 집어넣고 덜커덩 잠가 버렸다. 유치장 출입이 한 두 번이 아니니까 새삼스레 겁이 날 것도 없고 음악회에서 ‘야지’(야유, 조롱)를 하다가 잡혀온 것쯤으로는 하루 밤만 재우면 내보내려니 하고 마음이 놓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강연회나 음악회에서 소리를 지르고 야유를 하는 것은 예사로 있는 일인데 하필 나 하나만 노리고 있다가 집어낸 까닭이 알 수 없었다.

계훈의 음악회 날, 흥룡은 기분이 좋지 않다며 앙코르 무대를 거절하는 계훈을 향해 큰 소리로 야유를 한다. 실상 음악회장에 있던 모든 이가 계훈에게 야유를 보냈으나 경찰은 흥룡을 찍어서 검거한다. 

계훈이를 공갈한 범인을 장충단에서 놓쳐버린 지 한 달이 넘도록 진범을 잡기는커녕 아무 단서도 얻지 못했다. 유일한 증거는 협박장 두 통밖에는 없다. (…) 그러다 음악회에 계훈이도 출연을 한다니까 혹시나 그런 장소에서 무슨 끄트머리를 옭아볼까 하고 구석구석 눈치 빠른 부하를 배치해놓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판에 흥룡이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계훈이와 무슨 까닭이 붙은 사람이 아니면 그다지 극성스럽게 야지를 할 리가 없으리라고 추측한 것이었다.

계훈은 정희와 관련한 일을 주리아에게 폭로하겠다는 익명의 협박편지를 받았다. 계훈은 아버지인 김장관에게 이 일을 해결해달라고 부탁하고, 김장관은 경찰에 협박범을 잡아줄 것을 요청한다. 협박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범인을 흥룡으로 지목하여 구속한 것이었다. 

“지금도 김장관댁 행랑에 살지?”
“네!”
흥룡이는 외면을 한 채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인쇄직공동맹에 관계하고 있지?”
“네!”
“소임은? 위원인가?”
“아니요. 그저 동맹원으로 있어요.”
“날마다 출근을 하다시피하고 제일 열심히 일을 본다는데 그 흔한 집행위원 하나 못 얻었어?”
삼정이(경찰)는 한 마디 빈정거리고 나서는
“원체 그런 단체란 흥룡이 같은 명예심 없는 투사가 실제 일을 하는 것이니까…” 이번에는 슬그머니 추켜올린다. 흥룡이는 묻는 말에 뿌리만 따서 대답을 하다가 속으로는 “네가 누구를”하고 삼정이를 흘낏 쳐다봤다.
 (…) 
흥룡이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앉았다. 삼정이는 제가 떠둘고 싶은 대로 떠들게 내버려 두고 조리 있게 묻는 말만 골라서 ‘예스’나 ‘노’ 두 가지로만 대답을 할 작정이다. “말이 말 같지 않은가? 왜 대답을 못해. 사람이면 남의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지.”
“난 그 집에 은혜 진 일도 신세를 갚을 일도 없는 걸요.”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훈계를 하는 데는 흥룡이도 비위가 틀려서 군소리하듯 대꾸를 하였다.
“뭐야? 신세진 일이 없으면 네 어미 애비는 누가 먹여 살렸느냐?”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집에 비부 노릇을 했지요. 남에게는 김장관댁 종놈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한평생 그 집의 구듭(귀찮고 힘든 남의 뒤치다꺼리)을 치고 간신히 얻어먹었을 뿐인데 신세란 무신 신세에요? 값싸게 부려먹었으니까 그 집에서 우리 부모의 신세를 진 셈이지요.”
흥룡이는 토론을 할 필요는 없다하면서도 “내게는 상전도 아랫사람도 있을 까닭이 없소이다. 내 몸뚱이를 움직여서 밥을 얻어먹는 노동자일 뿐이지요.”
삼정이는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고 앉아 있다가
“듣기 싫다. 너 같은 좌익병자는 보통 인간이 아니다. 주둥아리만 살았을 뿐이지 네까짓 것들이 무얼 한다고 날뛰느냐?”
 
삼정이(경찰)는 형사 세 명을 더 불러 계속해서 협박범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흥룡이를 고문한다. 그러나 홍룡이는 의지를 다질 뿐이다.

(흥룡이는) 다리팔을 척 늘어뜨리고 쓰러져있으면서도 만족한 웃음이 아직도 핏기가 돌지 못한 흥룡의 입모습을 새었다.
“사지를 각을 떠내는 한이 있더라도….”
하고는 허청대고 코웃음을 쳤다. 흥룡이는 고통을 참는 힘과 누구에게나 굽히지 않는 자신의 의지력을 믿었다. 생사람의 숨이 턱턱 막히고 당장에 맥이 끊어지게 되는데도 깜깜하고 정신을 잃은 그 순간까지 그 입은 무쇠병목과 같이 한 번 다문 채 벌리지를 않았다.
“아니다! 난 모른다!”
한 마디로 끝까지 버티어서 몇 번이나 면소가 되어 나온 어느 선배와, 법정에서 혀를 깨물고 공술을 거절한 어떤 동지의 얼굴을 눈앞에 그리면서 죽을 고비를 간신히 참아 넘겼던 것이다.
“그까짓 일답지 않은 일에 오장까지 쏟아놓을 양이면 정말 큰일을 당하면 어떻게 할꼬-”
“내 육신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의지만은, 정당하다고 믿는 신념만은 올가미를 씌울 수도 없고 칼끝도 총알도 건드리지를 못한다!”

그러나 경찰이 협박범을 잡는다는 것은 작은 명분일 뿐이었다. 

아래층 취조실은 밝은 날도 음침하였다. 실내에는 지난밤에 본 사람은 그림자조차 감추고 차석되는 사람이 흥룡이를 앞에 앉히고 지난 일은 모르는 듯한 태도로 취조를 개시한다. (…)  사건이 단순이 부호의 아들을 협박하였다는 데 그칠 것 같으면 유치기한이 열흘이나 되니까 잡도리를 해도 좋을 것이나 근래에 어떠한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는 정보를 빈빈히 접한 고등계원들은 오래간만에 일거리를 장만한 듯이 이왕 걸려든 김에 흥룡이같은 인물의 배후를 뒤지면 보다 큰 사건의 단서가 잡힐 것이라고 우두머리들의 혐의를 거듭하여 흥룡이를 닦달한 결과에 따라서 일제히 검거에 착수하려는 계획이다.

경찰은 협박범이라는 죄목으로 흥룡을 잡은 후, 고문을 통해 그가 속한 단체까지 엮어서 검거하려 한다. 그의 직업이 인쇄공이었기 때문에 그가 속한 단체는 인쇄공 조합 중 하나였을 것이다. 소설 속 여러 표현으로 미루어보면 배경이 서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은 1920년대 중반까지 인쇄업종에서 특히 활발한 노동운동이 벌어진 지역이었다. 조직률은 대략 16.7%였는데, 자본주의 발전이 훨씬 빠른 영국에서 1901년에 남성노동자의 10~15%정도, 독일에서는 1913년에 12% 정도로 추산되는 것과 비교하면, 이러한 조직률을 결코 낮은 수치라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서울이라는 배경과 연관해볼 때, 흥룡이가 속해있던 조합은 인쇄직공조합을 떠올리게 한다. 인쇄직공조합은 사상단체인 화요회와 긴밀히 연결된 조직이었다. 화요회는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 착안해 이름을 지은 단체였는데, 코민테른 코르뷰로(고려국)의 지도를 받는 유일한 국내단체이기도 했다. 화요회는 이 단체를 기반 삼아서 서울지역운동에 강력하게 개입했다.

경찰은 흥룡이를 통해 배후조직을 검거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하여간 다른 동지들이 잡혀온 눈치가 없는 것을 보아 명부가 드러나지 않은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흥룡이를 맡아서 취조하는 형사들도 나중에는 진력이 나서 손에 잡았던 것을 내던지며
“형사질 십 년에 너와 같이 독한 놈은 처음 보았다.”
하고 투덜거리며 내려서기를 몇 번이나 하였다.
(…)
신문기자는 들어서면서 무슨 큰 사건이나 발견한 듯
“강흥룡이가 오늘 넘어가지요? 서류는 벌써 검사국으로 보낸 것까지 알고 왔는데요. 자 이젠 사건의 내용을 발표하셔도 좋지 않습니까?”
넘겨짚는다고 어수룩하게 실정을 토할 주임도 아니지만 “그런 일 없소”하고 강경히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실상인즉 공무집행방해라는 얼토당토않은 죄명을 붙여 29일의 구류기한이 지나도록 취조가 예정돼도 끝이 나지 않으니 열흘 동안 유치로 돌려 먹이고 가진 수단을 다써가며 닦달질을 해봤건만 검사국으로 넘길만한 물적 증거도 잡지 못했거니와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버티고 나가는 피의자의 태도가 너무나 강경하여 이제는 더 손을 댈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심증(心證)이 나쁜 것만은 움직일 수 없고 그대로 석방하기에는 경찰의 체면과 주임개인의 위신상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더 오래 끼고 있을 수도 없어서
“피의자는 평소부터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사유제산제도를 부인하면서 자본주의사회의 ××을 몽상하며 동지자를 규합하여 잠행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혐의가 농후함으로 일층 엄밀한 취조를 희망한다”라는 의미의 의견서를 부쳐서 오늘 오후에 검사국으로 압송하기로 된 것이었다. 이제 와서는 공무집행방해를 했다던가 부호에게 협박장을 보냈다던가 하는 사소한 일은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일보》 1931.8.16.~12.29.

이후 흥룡은 감옥에 들어가고, 그곳에서도 좌익 동지들을 만나 교류한다. 흥룡이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은 덕분에 함께 활동하는 덕순 등의 동지들은 검속을 피해갈 수 있게 된다.

흥룡과 같은 선진노동자 계층과 지식인이 1920년대 초중반의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주도층의 구성상 특징으로 인해 노동단체는 단위노조가 발전하여 지역연맹이 되고, 지역연맹이 모여 전국적 결합체가 출현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먼저 상층의 노동단체를 건설한 뒤에 기층의 단위노조를 직접 설립하거나, 자생적으로 설립된 단위노조와 연계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둘을 연계하는 지역 연맹체가 건설되는 식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런 하향식 구조가 즉각적으로 활동가들이 노동자 대중과 동떨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노동단체에 속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고 노동대중의 의지와 활동을 대변했다. 사회주의 지식인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확산해있었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세력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매개하는 지역 연맹체가 없었음에도 전국적 결합체와 단위 노조의 연계가 큰 어려움 없이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건설과 붕괴

 
조선공산당은 조선 사회의 조건 속에서 건설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은 1920년대 중반까지 국내와 해외를 망라한 사회주의 운동의 일대 결실이었다.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2년, 국제공청에 고려공청 중앙 총국을 조선 국내로 이전할 것을 제안한다. 조선 내에서 직접 사회주의를 전파하고 여러 단체에 파고들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박헌영과 일행은 귀국과정에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22개월의 수감생활 뒤, 1924년 출옥하자마자 화요회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 건설을 궤도에 올린다.

1924년 말부터 화요파는 국내 여러 공산주의 그룹과 연합을 시도하고 1925년 4월 20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1925년 4월 15일~17일까지는 전조선기자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이 두 대회는 경찰의 이목을 분산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 틈을 타 대회 며칠 전인 4월 17일,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여러 진술을 종합할 때, 창당대회에는 박헌영, 조봉암, 김재봉 등을 포함해 19명이 참석했다. 김재봉이 조선공산당의 첫 책임비서를 맡았다. 그리고 하루 뒤인 4월 18일, 서울 박헌영의 집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표회가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고려공청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성립하는 최초의 공청대회로 간주한다는 의미에서 창립이라 이름 붙였다. 4월 20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시작 몇 시간 전 경찰의 불허로 실시되지 못한다. 이에 반발한 참가자 300여 명이 탑골공원에서 시위를 벌이고, 시위는 밤까지 이어져 200여 명이 붉은 기를 들고 시위를 벌인다. 이 시위에 수천의 군중이 모여 함께 한다. 이것이 이른바 ‘적기사건’인데, 이는 조선공산당 창당 이후 당의 지도 아래 운동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창당대회를 쫓기듯 치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강령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상해에서 발행된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에 수록된 「조선공산당 선언」이 강령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붕괴 가능성, 공산주의자들이 투쟁방침을 세워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민족혁명의 기초가 되는 것, 민족혁명 유일전선을 구축하는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공산당은 이런 노선에 입각해 활동을 벌였다. 고려공청도 여러 활동을 벌였는데, 청년조직을 결성해 청년층에 대한 사상교육을 수행했고, 코민테른에게 받은 자금으로 청년활동가의 모스크바 유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4차례에 걸친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당과 고려공청의 간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조직을 지키려 애썼지만, 실패한다. 탄압 과정에서 일본에 체포된 당원과 공청원은 수백 명에 이르고, 심문과정에서 사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검거되지 않은 조직원들은 당을 재건하여 4차 공산당에 이르지만 결국 1928년 자진해산하고 만다. (1925~1928년 시기 4차례에 걸쳐 이뤄진 조선공산당 재건을 종파주의로 매도하기 위해 각각이 마치 별개의 공산당인 것처럼 서술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해산한 이후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지하에서 면면히 이어졌다. 사회주의 세력의 노동자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받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상단체 위주의 운동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현장 속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구체화된 것이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이다. 그리고 혁명적 노동조합의 핵심적 과제가 조선공산당 재건, 노동조합의 설립이었다.

다음 호에서는 방향 전환 이후 현장으로 들어간 활동가(지식인)들의 모습과, 그들이 설립한 노동조합에 대해서 살펴본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이르러 거의 모든 활동이 막혀버린 어두운 시대의 사회주의 활동가의 모습을 돌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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