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2 가을. 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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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윌슨: 레닌의 민족해방론에 담긴 역사적 의의

임필수 | 정책교육실장
 
이 글은 ‘민족자결론’ 하면 떠오르는 또 한 명의 대표적 인물인,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913~1921년 재임)과 레닌을 비교, 평가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레닌의 민족자결론에 담긴 역사적 의의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고자 한다. 민족자결론은 레닌이나 윌슨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기의 전환기에 레닌(1870~1924년)과 윌슨(1856~1924년), 두 사람은 기존에 존재하던 민족자결론에 각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서 그 비전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앞에서 레닌의 입장과 실천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먼저 윌슨에 초점을 맞추어 보겠다.

윌슨은 1차 세계전쟁이 종전을 향해 가던 1918년 시점에, 그 유명한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서 자결권 담론을 국제적으로 널리 퍼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이 1917년 4월, 1차 세계전쟁 참전을 결정한 후,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8일, 의회 연설 형식으로 바로 이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14개조는 ‘자결’, 또는 ‘민족자결’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윌슨의 담론은 훗날 자결 개념이 제도화되고, 국제법으로 성문화될 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윌슨이 국제무대에서 자결이라는 표현을 직접 처음 쓴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후인 1918년 2월 11일, ‘4개 원칙’ 연설이었다. 이 역시 뒤에서 다룬다.) 

윌슨이 자결에 관해 언급할 당시는 1차 세계전쟁의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극심할 때였다. 미 행정부는 윌슨의 말이 정치선전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실제로 ‘공공정보에 관한 미국 위원회’의 수장은 윌슨의 전시 연설들이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 동기, 목적, 이상을 세계에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고, 그래서 우방국, 적대국, 중립국 모두가 미국이야말로 이기심이 없고 정의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보게 했다고 스스로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 도착했을 때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레닌이 민족자결에 대해 처음 언급할 때는 1917년 혁명 이전으로, 현실에서 민족자결을 결정할 정치적 힘이 전혀 없었다. 반면 윌슨은 처음 이를 언급할 때,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즉 레닌이 처음에는 심각한 의견 차이를 보인 마르크스주의 집단 내에서 동지들을 설득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면, 윌슨은 처음부터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레닌이 민족자결 문제의 이론적 해명에 집중했다면, 윌슨은 주로 전쟁과 관련된 실용적, 외교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췄다. 이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윌슨 14개조의 배경: 혁명 러시아와 이데올로기적 경쟁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1917년 12월, 연합국(협상국)의 전쟁 목적이 무엇인지, 민족자결에 대한 입장이 어떤지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 때 로버트 랜싱 미 국무장관은 볼셰비키의 자결 개념은 ‘국제적 무정부상태’를 초래할 뿐이므로, 여기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그렇지만 결국 윌슨의 연설은 볼셰비키의 문제제기에 대한 직접적 답변을 포함했다. 왜 그랬나. (윌슨의 14개조 연설은 그가 볼셰비키의 요청이 담긴 글의 영문 번역본을 받고 7일 뒤에 이뤄졌다.) 

첫째, 윌슨은 국무부가 보이는, 볼셰비키에 대한 맹렬한 적대감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1차 세계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행하던 비밀외교와 합병에 대해 볼셰비키가 반발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가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즉, 볼셰비키가 제시한 비판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볼셰비키가 유발할 수 있는 ‘무질서’를 우려했다. 

둘째, 그는 러시아가 연합국의 편에 남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했고, 1917년 12월에 시작된 혁명 러시아와 독일의 강화협상에 대해 우려했다. 따라서 볼셰비키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면서, 그들과 대화의 문을 열고 연합국 편에 남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셋째, 윌슨은 유럽대륙이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볼셰비키가 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 매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자결권 개념에 담긴 세계적 매력과 공개적으로 경쟁할 필요가 있었다. 즉, 세계의 관심을 볼셰비키의 비전으로부터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정치로 되돌리고자 했다. 
 
 

2. 14개조의 구체적 내용: 민족자결의 개념화  

 
 
14개조의 대부분은 전후 유럽의 영토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 기준은 윌슨의 자결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독립국가 폴란드는 “반박의 여지가 없게도 폴란드 주민이 거주하는” 영토를 소유한다(13조). 이탈리아의 국경은 “확실하게 인정될 수 있는 민족성의 경계선들에 따라” 재조정되어야 한다(9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 내의 인민(즉 민족)은 “자율적 발전의 기회”가 인정되어야 한다(10조, 12조). 발칸 국가들의 상호관계는 “역사적으로 확립된 충성심과 민족성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발칸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과 영토보전”이 보장을 받아야만 한다(11조). (여기서 영토보전[territorial integrity]이란 그 영토를 더는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영토적 ‘불가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4개조는 “식민지에서 주권과 같은 문제들을 결정할 때, 당사자인 주민들의 이해는 법적 권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정부의 정당한 청구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기반 위에서” 식민지의 요구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5조). 그리고 그는 “외국군이 러시아의 모든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며”(6조), 벨기에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하며(7조), “알자스-로렌 문제에 관해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부당 행위”는 시정되어야 한다고(13조) 주장했다.
 
또한 윌슨은 비밀조약이라는 관행을 종식해야 하고(1조), 항행의 자유와 자유무역을 보장해야 하며(2조와 3조), 군축을 실행해야 하고(4조), “강대국과 약소국 모두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하기 위해 “민족들의 총연합체”(general association of nations)를 수립해야 한다고(14조) 강조했다. 

이처럼 윌슨은 국가경계를 결정하는 지침으로서 민족성(nationality)을 언급함으로써, 자결이 ‘민족’을 기준으로 정의된 개념이라는 근거를 창출했다. 또한 벨기에나 프랑스에 관한 언급은 자결이 타국에 의한 점령과 병합의 종식 후, 국가주권의 재확보, 재확립과 연결되도록 했다. 

한편 러시아에 대한 언급은 당시 러시아에 대한 윌슨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또한 식민지의 요구를 ‘정부’, 즉 식민모국의 청구와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언급은 당시 볼셰비키가 자결을 ‘반제국주의’와 연결하려는 노력에 대해 윌슨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3. 윌슨의 4개 원칙: 자결론에 대한 직접적 언급   

 
 
한편 윌슨이 1918년 2월 11일에 행한 또 한 번의 의회 연설, ‘4개 원칙’은 자결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데, 이번 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분석하면서 ‘자결’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4개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럽 영토에 대한 조정은 오로지 “영구히 지속될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실행되어야 한다. 
둘째, 평화중재자는 작은 민족들과 지역들의 권리를 존중해야만 한다. 즉, “인민들과 지역들이 어떤 주권국에서 다른 주권국으로 물물교환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지역 주민의 이익이 강대국의 이익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즉 “이번 전쟁에 연루된 모든 영토문제의 합의는 당사자 주민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뤄져야 하며, 그저 경쟁국가 요구들의 조정이나 타협에 따라 이뤄져서는 안 된다.” 
넷째,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소집단은, 그들의 목적이 다른 집단과 분쟁을 발생시키면서 “불일치와 적대”를 자극하지 않는 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즉 이번 전쟁의 뿌리는 소규모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은 데 있으며, 따라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영토문제가 당사자 주민의 이해에 따라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윌슨은 전후 평화로운 질서를 보장하기 위해서 불안정성에 대한 치료제로서 민족 ‘자결’을 제시한다. “민족적 열망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 인민은 이제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고, 그들 자신의 동의에 따라 통치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자결이라는 원리를 무시하는 정치인은 곧 위험에 부딪칠 것이다.
 
 

4. 민족자결 이론에서 나타나는 윌슨과 레닌의 차이: 민족자결론의 탈급진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윌슨이 국제적 관심사를 반영하여 민족자결의 논리를 일정하게 수용하면서도, 이를 레닌의 민족자결론과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다는 데 있다. 레닌의 민족자결은 단순히 지배, 종속, 불평등을 비판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억압, 착취라는 형태를 취하는 인민에 대한 간섭(interference)을 비판했다. 반면, 윌슨은 자결을 평화와 질서,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 즉 대표적으로 항행과 무역의 자유와 연결시키고자 했다. 윌슨과 레닌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레닌이 민족자결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근본적 평등으로서 자유’라면, 윌슨의 근거는 ‘평화로서의 자유’였다. 간단히 말해, 레닌이 민족 간의 근본적 평등을 강조했다면, 윌슨은 민족 간의 평화를 중시했다. 따라서 강대국 간 평화를 위해서 식민지 민족의 평등은 때때로 무시될 수도 있다는 함의를 지녔다. 

둘째, 윌슨은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불간섭, 즉 항행과 무역의 자유를 중시했는데, 이를 곧 ‘자유로운 민족들의 자유’(freedom of free nations)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유주의야말로 평화를 보장한다고 보았다. 물론 윌슨이 강조했던 민족국가 간의 평화로운 자유무역은 당시의 노골적인 식민주의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즉, 국가 간 부의 불평등한 이전)는 자유무역 시스템을 통해서도 작동할 수 있다. 

셋째, 윌슨의 자결 담론은 ‘아래로부터의’ 인민주권이라는 관념과 거리가 멀다. 즉, 인민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관념을 옹호하기보다는, 인민의 의지를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륜이 있는 지도자에 초점을 맞춘다. 실제로 윌슨은 인민들이 위험스러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고, 그럼으로써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윌슨은 자신이 “제퍼슨과 같은 민주주의자이지만, 귀족적 취향을 지녔다”고 말했다.) 

실제로 윌슨은 자결이라는 표현과 ‘통치를 받는 자들의 동의’(the consent of governed)라는 표현을 종종 구별 없이 사용하며, 특히 후자의 표현을 훨씬 더 많이 쓴다. ‘통치를 받는 자들의 동의’에서 인민은 정치적 위계구조의 최하층부에 있으면서 수동적이고 통치를 받는 단위로 인식된다. 이러한 통념에서 인민은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나, 통치와 입법의 원천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종합해보면, 윌슨의 자결 담론은 이데올로기적 대결이 격렬하던 1차 세계전쟁 시점에서 볼셰비키의 권위를 잠식하는 효과를 발휘하고자 했다. 즉, 윌슨은 세계적으로 호소력이 있던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자신의 방식대로 흡수하면서 급진적 함의를 벗겨내고, 그 자신의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관념과 연결시켰다.
 
 

5. 윌슨의 자결 이론이 보인 결정적 한계: 파리 강화회의와 식민지배의 영속화 

 
 
레닌은 자결을 식민지 해방 및 반제국주의와 결합했다. 반면, 연합국은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고 훨씬 더 팽창하기를 원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 식민지 인민의 독립을 보장할 계획이 전혀 없었고, 진작부터 윌슨의 제안에 의구심을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미국이 민족자결을 장려하는 태도는 미국과 연합국의 관계를 어려움에 빠뜨릴 수 있었다. 

결국 1918년 가을, 미국 관리는 윌슨의 14개조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보유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러한 보장을 받고서야 다른 연합국들은 14개조와 그 후 윌슨이 발표한 여러 연설문에 제시한 원칙에 따라 강화회의를 여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윌슨이 제시한 원칙은 민족자결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다른 연합국들은 식민지의 해방을 함의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민족자결 담론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19년 1월부터 시작된 파리 강화회의 당시, 윌슨의 자결 담론은 놀랍게도 식민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다. 윌슨은 질서, 평화, 국가의 불간섭(항행과 무역의 자유)과 같은 가치를 계속 강조했지만, 연합국들의 식민지배는 이러한 가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듯이 식민지배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파리 강화회의가 실제로는 식민주의를 영속화하면서, 강대국의 민족적 이익에 따라 영토문제를 처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1차 세계전쟁 동안 세계 인민은 윌슨이 민족자결의 화신이라고 보았고, 윌슨에게 서한이나 면담, 청원을 통해서 자신의 자결 요구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그러한 집단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행하지 않았다. 즉,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보편적 행동원리로 삼지 않았다. 왜 그랬나. 윌슨 본인의 민족자결 담론이 전달하고자 했던 바와, 세계인이 그것을 해석했던 바 사이에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6. 파리 강화회의와 승전국 식민지 문제: 한국 사례  

 
 
윌슨의 민족자결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패전국 식민지에 한정되었고, 승전국 식민지 문제는 의제로도 상정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승전국 식민지에 속한 민족들도 파리 강화회의에 각종 청원서를 제출하고,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파리 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한 민족은 모두 30여 개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승전국 식민지와 패전국 식민지, 또는 승전국·패전국과 무관한 민족이 모두 포함되었다. 즉, 발트해 북부의 올란드 제도(Åland), 오스트리아, 벨기에, 중국, 한국, 베트남, 이집트, 스페인, 조지아, 그리스, 온두라스, 헝가리, 아일랜드, 이탈리아, 유태인, 발트3국, 라트비아, 레바논, 리투아니아, 몬테네그로, 스칸디나비아 3국, 폴란드, 포르투갈, 세르비아,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청원서를 제출했다. (강조 표시를 한 것은 윌슨이 14개조에서 독립을 보장한 민족이다.) 

파리 강화회의와 관련된 한국의 청원서는 △여운형의 청원서, △이승만과 정한경의 위임통치 청원서, △국내 유림이 작성한 ‘파리장서’, △김규식이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1919년 4월에 보낸 청원서, △김규식이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대표단 명의로 보낸 청원서가 있다. 이중에서 강화회의에 최종 제출된 청원서와 비망록은 김규식이 작성한 것뿐이다. 김규식이 임시정부 대표단 명의로 보낸 청원서의 요지는, “한국민족은 1910년 8월 22일 기만과 폭력에 의해 강제 체결한 ‘합병조약’의 영구폐기를 요구한다”라는 것이었다. (김규식이 4월에 신한청년당 대표로서 보낸 청원서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안한 반면, 5월에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보낸 청원서에는 위임통치 제안이 빠진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룬다.)

한국 대표단은 일본이 승전국의 지위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족자결 문제가 회의에 상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표단은 파리 강화회의가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세계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승전국들의 냉정한 태도에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7. 국제연맹 창설과 위임통치제도: 패전국 식민지의 분할  

 
 
훗날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 당시 강력히 독립을 청원하던 아일랜드 대표들과의 회견이 그를 매우 화나게 했고, 그들에게 ‘지옥에나 가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윌슨은 아일랜드가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의 지배에 동의하지 않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윌슨은 자신이 제시한 자결에 관한 원론적 입장이 현실 정책으로 구체화될 때, 오로지 충분히 ‘계몽된’ 민족만이 평등한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윌슨의 표현에 따르면 ‘평화롭게 법을 준수할 수 있는 성숙성을 보인 민족들’에게만 평등이 적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처럼 법을 어기며 폭력을 행사하는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은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며, 따라서 민족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정당화했다.

이처럼 윌슨은 ‘자격이 없는’ 민족이 무조건적으로 국가를 창설하고 평등한 대우를 받는 정책을 부정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1918년 말에 이르러 위임통치 제도(mandate system)가 질서있는 통치를 위한 안전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위임통치 제도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이 가장 힘주어 강조한 정책이 되었다. 국제연맹 규약이 최종으로 성안될 때, 위임통치 제도는 과거 러시아, 오스만, 함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인민들에 대한 ‘최종처분권’을 국제연맹에 부여했고, 국제연맹에 속한 특정 국가가 각 위임통치국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윌슨이 감탄한 위임통치 제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얀 스뫼츠 총리가 제안했다. 1918년 말에 제시된 ‘스뫼츠 플랜’에 따르면, 서양 문명국은 자기통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 통치 능력을 보유하도록 그들을 육성할 특별한 책임을 져야 했다. 윌슨은 스뫼츠 플랜을 읽자마자 위임통치 제도를 그의 국제연맹 규약 초안에 포함시켰다. 

미국 행정부와 그 동맹국들도 모두 위임통치 제도를 찬성했다. 미 국무장관 랜싱은 당시 동맹국이 위임통치를 열렬히 환영한 배경에는 그들이 (독일로부터 받을 전쟁배상금을 깎아주지 않고도) 독일이 보유하던 식민지를 위임통치 명목으로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위임통치를 받게 된 민족 중 소수는 국제연맹에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위임통치 형태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오로지 국제연맹과 위임통치를 맡은 국가들만이 언제 ‘자기통치’(실질적 독립)를 실시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었고, 위임통치를 받게 된 민족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채 종속된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
 
 

8. 이승만, 김규식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이승만과 이동휘의 노선 분화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전인 2월 25일, 위임통치 청원서에 서명하여 3월 3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분명한 전제 조건 하에 한국을 일정 기간 동안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게 요지였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도 이를 승인했다. 한편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이 4월에 작성한 청원서에서도 “일본이 감독국의 일원이 아니라는 조건 아래, 일정한 보호기간 동안 한국을 국제적 감독에 맡길 것을 바란다”며 위임통치를 청원했다. (김규식이 이승만의 청원서 내용을 알게 된 후 그 내용을 포함시켰다는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3·1운동 이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논란을 빚었다.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임정 내 이동휘 세력, 하와이와 원동의 박용만 세력, 북경·만주·노령 지역의 일부 독립단체들이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강력히 비판했다. 

예컨대, 1919년 11월 임정의 국무총리로 부임한 이동휘는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에 종속된 상태이지만 얼마간의 자치권을 획득하여 독립의 토대로 삼자는] 자치운동이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원하는 외교가는 원치 않는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기도 했다. 이동휘가 혁명 러시아와 연계한 사회주의 운동의 길을 걸어간 사실은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를 반대한 그의 입장과 분명히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시 이동휘는 이미 1918년 5월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의 대표였다. 반면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당시 한국의 실정과 국제정세를 다각도로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동휘와 이승만의 노선 분화가, 궁극적으로는 민족자결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할 것이냐를 두고 나타난 레닌과 윌슨의 쟁점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동휘가 고심 끝에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당대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운동(민족주의적 독립운동)과 연대, 결합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 청원 운동과는 확실히 선을 긋고자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당대 사회주의자가 지향한 ‘민족해방운동론’이 실천적으로 어떤 길을 걷고자 했는지 읽어낼 수 있다. 
 
 

9. 파리 강화회의 이후 레닌의 민족해방운동론: 파리 강화회의와 국제연맹 비판 

 
 
1920년 7~8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2차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41개국의 대의원 217명이 출석하고, 169명이 의결권을 지녔다. 바로 2차대회의 중요성은 인도, 중국,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대표가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이때 ‘민족·식민지 문제 소위원회’도 구성되었는데, 19개국 대표 20인이 구성원이었다. 레닌과 카마네프를 비롯해 로이(멕시코), 마링(네덜란드령 동인도), 아랜(인도), 술탄 자데(페르시아), 슬라벳키(터키), 유택영(중국)과, 앞에서 언급한 이동휘가 대표로 있던 한인사회당의 박진순(조선)이 참여했다.

이 소위원회에 레닌이 제출한 글,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1920년 7월 28일)는 1차 세계전쟁과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 그의 평가를 분명히 제시한다. “양대 진영은 이번 전쟁을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이라는 상투적인 말로 정당화했다.” 그러나 체결된 강화조약은 “승리한 부르주아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민족’ 간 국경선마저 가차 없이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에게는 ‘민족’ 간 국경선마저 거래대상이다. 이른바 국제연맹은 이번 전쟁의 승자가 그들의 전리품을 서로 보장하기 위한 보험계약에 불과하다.” 애초 레닌이 전쟁을 중단한 방안으로 ‘영토병합과 배상이 없는 즉각적인 종전’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회고해 보면,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비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한 사례를 포함해 유럽 영토의 13%, 인구의 10%(650~700만 명)를 잃었다. 그렇다면 승전국의 노골적인 전리품 약탈에 관한 독일 부르주아의 항의는 정당한가.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 “부르주아에게 있어서 민족적 통일성을 재확립하고 분리된 영토를 재통일하려는 시도는 전쟁에서 완패한 자들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군사력을 모으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인위적으로 찢긴 민족을 재통일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오로지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 부르주아를 제압함으로써 진정한 민족해방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팽창주의적이고 호전적인 독일 부르주아가 재통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이 될 것이고, 또 이번에는 승전국이 되어 다른 나라의 영토를 더 약탈할 것이므로 이는 결코 지지할 수 없다. (이는 곧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히틀러의 독일이 벌인 2차 세계전쟁을 예언하는 듯 보인다.) 레닌이 보기에, 오히려 유럽 대륙 전반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의 불길이 타올라야만 과거에 벌어졌던 제국주의 국가 간 약탈적인 영토병합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소할 길이 열릴 수 있다. 

실제로 레닌은 혁명 러시아가 과거 차르 치하에서 획득했던 영토나 이권을 반환하고 원상회복이 되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1919년 7월 27일 외무위원장 레프 카라한 명의로 발표한 반제국주의 선언에서 중국 문제에 대한 입장을 보면, △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체결한 비밀조약을 페기한다, △ 만주 중동철도와 그 이권을 중국에 무상으로 반환한다, △ 중국에 대한 배상금 청구를 포기한다, △ 제정러시아가 보유하던 중국 내 조차지와 영사재판권이라는 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연히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은 중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편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래서 레닌은 테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와 피억압 민족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하는 것 외에는, 또 소비에트 권력이 세계 제국주의에 승리하는 것 외에는 자신들이 구원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쓰디쓴 경험을 통해 확신해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민족해방운동, 식민지해방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가능한 한 가장 밀접한 동맹을 실현하는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또한 레닌은 테제의 말미에 이렇게 덧붙인다.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와 약소 인민을 오랫동안, 현재에도 노예화했기 때문에 노예화된 나라의 노동 인민은 억압민족[제국주의 열강]에 속한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해 억압민족 전반에 대한 억울한 마음뿐만 아니라 불신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불신과 편견을 신속히 극복하기 위한 양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처럼 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민족문제, 식민지문제를 강조한 만큼, 대회 직후인 1919년 9월 1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1차 동방인민대회도 열렸다. 터키, 인도, 아프가니스탄, 중국, 조선의 대표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미국, 일본의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대표도 참석했다. 37개국에서 무려 1891명의 대표가 모였다. 이 대회에서는 “만국의 노동자와 모든 피억압민족이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또한 대회의 결정에 따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에 상설기관으로 선전선동 평의회를 구성하여 기관지 《동방인민》을 출판하기로 했다. 또한 1921년 모스크바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0. 레닌의 민족해방운동론이 조선에 일으킨 반향 

 
 
그렇다면 레닌과 코민테른의 이러한 노력은 식민지, 피억압민족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을까. 조선의 예를 들어보자. 코민테른 2차대회 다음 해에는 ‘모스크바 피압박민족대회/극동회의’(1921~1922년)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많은 조선인이 참석했는데, 전체 참석자 144명 중에서 조선인이 52명이나 되어 36%를 차지했다. 왜 그랬나. 

몇 년 후 김단야가 남긴 기록이 있다. 김단야는 《조선일보》에 1925년 1월 22일부터 2월 3일까지 11회에 걸쳐 「레닌 회견 인상기 – 그의 서거 1주년에」를 연재했다. 레닌과의 회견에는 조선인 중에서 김단야 본인 외에 여운형, 김규식, 김시현, 최고려, 현순 등 5명이 참여했고, 중국, 일본, 몽골, 자바의 대표를 포함해 모두 20명이 함께 했다. 김단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21년 11월 11일의 일이다. 그날은 태평양회의라는 명의 아래 세계의 열강 대표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모며 태평양을 중심으로 나타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모인 날이었다. 세계의 모든 시선은 그리로 모여 실로 회의는 일시 전세계의 주목의 초점이 되었다. … [조선, 중국, 일본, 기타 태평양 연안 신문의] 모든 논조의 대개는 그 회의가 동양민족의 앞길을 잘 해결하여 주리라고 쓴 것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이 약자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조선민족은 이 회의를 태산같이 믿은 사람도 적지 않았었다. … 그러나 그 회의는 … 이미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은 세인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며, 그 결과가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 회의는 … 동양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과거에 태평양 연안에서 자유경쟁에 따라다니는 이권쟁탈로 인하여 피차에 생긴 알력으로 말미암아 열강 사이에 국교가 자못 위험케 된 중에 … 일본과 미국 국교는 극도로 위험에 빠진 것을 좀 유완케 하고자 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이권쟁탈 지대를 분배하여 서로 충돌이 없이 좀 더 조직적으로, 협의적으로 동양천지를 착취하게 된 것이었다.
… 그때에 북쪽 붉은 나라 안에 근거를 둔 세계무산자해방운동의 본영인 국제공산당에서는 일찍 그 회의의 성질을 간파한 동시에 그 결과까지도 미리 알았다. 그리하여 동양의 약소민족과 노력군중에게 실로 사활문제를 가진 것이라 하여 피압박군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단결하여 무서운 독수(毒手)를 대항치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정신에서 원동민족대회를 소집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동양 각국 안에 있는 노동단체 또는 혁명단체의 대표를 부르게 되어.. 대표 백수십여 인이 붉은 러시아에 모여 [1922년] 1월 15일에 모스크바를 밟게 된 것이었다. … 러시아 황실의 … 궁전 안에서 동양의 망명가, 무산자가 모임을 이루게 된 것은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태평양 회의(워싱턴 회의)란 무엇이었나. 1921년 3월, 미국 대통령으로 새로 취임한 공화당 출신 워런 하딩은 태평양에서 해군의 군비축소와 여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중국,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8개국에 회의를 제안했다. 

이때에도 임시정부는 대통령직에 있던 이승만을 대표로 하여 (초대를 받지 못한)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미 파리 강화회의를 경험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내에서도 대표단 파견에 회의론이 있었으나, 결국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큰 관심을 보여 연일 기사를 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리 강화회의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도 않았고 거론되지도 않았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의 위상에 금이 갔고, 임시정부 내각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러한 참담한 실패 이후, 레닌과 코민테른의 민족문제, 식민지문제에 대한 입장이나, 식민지 민족운동, 계급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연대 의지는 조선 내에서도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1. 결론: 레닌과 우크라이나 전쟁 

 
 
2차 세계전쟁 종전 후 유엔 헌장에 민족자결의 원리가 도입되고 전후 세계가 탈식민화의 길을 걷게 된 역사는 결코 순탄치 않았으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민족자결을 기본 원리로 삼는 전후 세계질서란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물론 강대국의 거부권이 보장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상징하듯이, 여러 근본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개시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전쟁이고, 20세기의 반제국주의 해방 전쟁과 비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발리바르의 이러한 주장이 담긴 글을 번역하여 「전쟁 속에서: 민족주의, 제국주의, 세계정치」, 《사회운동포커스》, 2022년 8월 3일, 4일로 발간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첫 번째 정의는,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이 전쟁을 (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과 같은) 20세기의 반제국주의 해방 전쟁이나, 심지어 초기 현대 국가들이 영국, 스페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분리되며 형성된 것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제 입장은 …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펼쳐지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을 지지해야 할 즉각적인 긴급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의 독립 그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히 이것은 [러시아로부터] 부인당한,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민중은 대규모의 범죄적 전쟁의 희생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패배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을 것이며, 국제 질서에 파괴적인 정치적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침략으로 민족자결 원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못 심대하다. 우리 시대가 세계전쟁 이전의 세계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레닌이 살아 있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까. 필자는 레닌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이들의 저항에 연대하고 ‘푸틴 타도’를 외쳤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이러한 확신을 입증하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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