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5.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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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대위를 통해 본 "가족주의"적 운동 전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정주연 |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활동가
가족대책위원회, 일명 “가대위”는 이제 하나의 투쟁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일찍이 민가협, 유가협과 같이 가족구성원의 죽음, 구속의 탄압에 맞선 투쟁으로부터 시작된 가족들의 투쟁참여에서 이제 구조조정이라는 무지막지한 노동자 살생부 앞에서 가족단위가 결합한 투쟁은 더욱 더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지난해만해도 울산의 태광산업 투쟁에서 가대위의 활약이 있었고, 효성 가족대책위, 철도노조 가족대책위, 그리고 현재의 발전노조 가족대책위까지 이러한 투쟁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발전노조 파업과정에 참여한 가대위 활동은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역동적인 가대위의 활동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발전노조 가대위는 파업이 시작된 이래 왕성하게 활동하였는데, 파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발전소 매각 저지 / 노동자 탄압 중단"을 요구하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유화 정책을 비판하는 정치적 투쟁을 펼쳤다. 특히, 이번 같은 산개투쟁은 단일 대오의 엄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파업참가자가 개별적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이 특징인데, 가대위의 선전전과 복귀자를 막기 위한 감시투쟁은 파업 성공에 크게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보다 정치적인 투쟁에도 가대위 투쟁을 바라보며 씁쓸한 감정이 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아마도 사회운동내의 여성활동가나 여성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여성이라면 이러한 감정을 한 번쯤 가져보았을 것이다. 이는 현재의 가족구조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절묘하게 결합하여 배태한 여성억압적 공간이라는 것과, 더불어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역사적으로 여성의 노동 권리를 박탈하고 이를 기반으로 저임금 착취를 합리화한 저변에 현재의 ‘가족’구조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술이 자본주의적 가족모델과 가족임금 이데올로기의 반여성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점을 지나치고, 의도치 않았지만 현재의 가족구조를 ‘합리화’시켜 줄 여지가 있기에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가 사회적 실재임에도 가부장적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의 ‘노동권’을 부차적 권리로 인식시키려는 지배세력에게 역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杞憂)에서 더욱 주목하는 것이다.<br>

<b>가족, 누구의 이해에 기여하는가?</b><br>

가족대책위 사람들은 말한다. “가진 자의 횡포 앞에서 다른 것 없어요. 가족들이 똘똘 뭉쳐서 싸우는 수밖에.. 크게 힘은 안돼도... 끝까지 싸워야죠.” “파출부라도 할거니까 민영화 막지 못하면 집에 들어오지 말아요. 민영화 저지는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싸움이기 때문에 민영화를 막지 못하면 결국 가족들도 나중에 살기 힘들어 질 것이기 때문에...".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 앞에서 똘똘 뭉치는 연대의 전술은 사회적 약자들의 오래된, 그리고 가장 막강한 무기이다. 남편이 가져오는 봉급에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상황에서 “결국 가족들도 나중에 살기 힘들어 질 것”이라는 말은 현실을 반영한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현재 가대위의 투쟁은 가족이라는 ‘하나의 생계단위’를 형성한 사람들의 생존권 투쟁인 것이다. 그러나 가대위의 투쟁이 생존권 싸움이라 하여 무조건적인 지지만을 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가족의 생계가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한데에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부정한 결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이 가부장제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자의 재생산노동에 지불하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가족’이라는 혈연적 집합체를 생산체계 내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임금제를 통해 남성에게 한 가족의 ‘생계부양자’의 지위를 줌으로써 가능했다. 이로써 자본은 재생산 노동에 부담해야하는 비용을 절감했다. 뿐만 아니라 생계 부양의 논리를 적용하여 자본의 필요에 의해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해낼 때 여성의 노동권을 생계보조적 의미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임금의 저임금화를 정당화해냈다.
그러나 자본의 궁극적 목표는 한단계 높은 곳에 있다. 자본가가 모두를 노동자로 규정하는 대신 ‘가족’이라는 귀속적인 성격을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노동력 분절화를 이루는데,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축적의 필요성이라기보다는 사회통제를 위해서이다. 실제로 자본가와 가부장제 기득권 집단 간의 남성적 협상은 여성지배를 용이하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단적인 예로, 경제 위기시 구조조정의 일차적 희생양으로 여성들을 노동시장에서 밀어내는데 남성 생계부양자 논리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자본은 노동권에서 여성을 먼저 배재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여성․남성노동자 공동의 투쟁을 막고, 사회적 저항을 약화시켰다. 결국 이것은 저항 주체 사이의 단결을 저해하고 서로를 고립시켰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동반자관계로 공고화된 가족임금제는 여성의 노동권리를 박탈하고 또한 가족 안에서 생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을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간에 성별에 의한 대립관계를 형성케 하여 자본의 사회통제에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가족과 사회의 착취 고리를 끊어내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대위의 투쟁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비록 사유화 반대를 표면에 걸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가대위의 투쟁은 가족단위의 생존권 투쟁이었음은 분명하다.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노동자의 노동권을 사수하기 위한 이러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 투쟁일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여성을 억압해온 가부장적 사회질서는 인정하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대위의 투쟁은 본의 아니게(의도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험스러운 점을 가지고 있다.

<b>지배 이데올로기의 선별적 수용</b><br>

남성중심적 노동운동 진영은 대중에게 익숙하다는 점에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수용한다. 그런데 그들이 대중적이라고 생각하는 가부장적 생활방식과 구조의 수용은 무원칙적으로 남성들의 편의에 따라 선별적으로 수용된다. 가대위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들에게 이보다 확실한 대중성 확보의 수단은 없겠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가부장적인 ‘생계공동체 가족’구조는 여성들에게 오랜 역사동안 억압적이고 착취를 가하는 기제였다. 그럼에도 남성중심적 노동운동 진영은 가대위를 전술의 일환으로서 조직하고 있다. 피부양자인 아내와 아이들이 ‘가족공동체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온정주의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발전노조 가대위의 투쟁처럼 사유화 반대라는 정치적 투쟁문구를 내걸고 있다고 해도 가대위의 투쟁은 온정주의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투쟁의 국면에서 활용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번 떠올려 보자. 과연 여성의 노동권 확보 및 생존권 투쟁에서 가대위와 같은 조직적 활동을 펼친 사례가 있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경제위기를 기화로 종횡무진 자행되던 여성에 대한 구조조정에서 가대위와 같은 투쟁은 결코 조직된 적이 없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감수해야했던 농협과 부부사원 중 아내를 우선 해고한 알리안츠 제일 생명의 사례, 노조와 사측과 정부라는 삼자의 담합으로 단행된 현대자동차 식당 여성노동자의 정리해고에는 어떠한 가대위도 꾸려지지 않았다. 가대위는 고사하고 이 여성노동자의 해고에 맞선 투쟁에 참여한 남성(가족으로서 혹은 동지로서)은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성차별적 구조조정이 바로 남성을 생계부양자로 규정하는 가족임금제를 앞세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여성이 해고되더라도 가족의 생계부양자도 아닐 뿐더러(현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차원에서) 가족 안에서도 부수적인(부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노동을 담당하는 여성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가족단위가 함께 투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부가 생기고 여러 가지 여성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고 하여 누군가는 여성의 권리가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에 의해 구축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제로섬의 논리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고작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 실제적인 여성가장들이 대거 존재한다는 것은 경제위기 뒤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은 여성들의 노동권 박탈은 물론이고 복지수급자 대상에서도 여성을 배제하기 일수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구성원의 다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스러운 상황 역시 가족임금제에 기반한 가족구조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투쟁은 여성 착취적 가족 구조의 변화를 촉구하고 가족임금제를 철폐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제가 이처럼 좌우세력에게 모두 활용되어도 결과적으로 좌우진영에 똑같은 효과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다양하고 매우 유연한 전략을 구사한다. 경제위기 초기단계에서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여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일자리에서 몰아냈지만 결국은 이들을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하면서 여성의 노동유연화를 이끌어냈다. 이어서 전체 80을 위해 20이 희생하자는 논리를 구사하며 남성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합리화시키려 들고, 또 사유화가 경쟁력 확보를 통한 모두의 살길인 것처럼 선전한다. 하나의 구멍이 생겨도 삽시간에 댐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논리에 전면적인 대응이 절실히 필요한 이때, 가부장제 논리의 선별적 수용은 자칫 원숭이가 자기 꾀에 넘어가는 꼴이 될 수 있다.<br>

<b>글을 마치며 : 태생적 한계를 넘어 새롭게 다시 태어나길....</b><br>

그녀의 노동은 그의(his) 것이다. 그녀의 노동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그가 전쟁과 정치 등의 중대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는 사회적으로 알려져야 하고, 그녀의 공적은 알려져서도 보여져서도 안된다. 이렇게 그녀의 역사는 강탈당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기록된다. 우리가 책 속에서 읽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의 업적이며 법률도 권력도 전쟁도 다 ‘그’의 것이다. ‘그’는 그녀의 고통스런 노역을 등에 업은 성취자이다

― 로즈마리 류터, 새여성 세계사 중에서 ―<br>

이제까지 가대위의 투쟁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것은 가대위 투쟁에 나선 개개인을 반여성적이라고 비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가대위 투쟁에 참여한 성원들의 열의와 활동을 폄하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글은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가대위라는 투쟁 단위가 남성 생계부양자를 중심으로 한 여성억압적 가족구조를 정당화해낼 수 있다는 걱정에서 가대위 투쟁을 다시 돌아보고자 했다. 또한 여성들의 가부장제에 맞선 투쟁이 결코 자본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가대위 투쟁이 어떠한 한계와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를 평가해 보기 위한 것이다.
끝으로 비록 가대위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투쟁체이지만, 그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조직된 힘을 바탕으로 여성들의 강고한 투쟁체로 한단계 한단계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경제 위기를 계기로 많은 여성들이 어머니로서 혹은 가계를 책임지는 아내로서 운동에 참여했지만, 투쟁속에 형성된 조직과 투쟁과정에서 얻은 ‘여성’이라는 자각은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요구하는 주체로 변하게 된 사례가 많다. 가대위에 참여한 여성들도 아내라는 이름의 ‘정치적 내조자’, ‘혁명적 내조자’로서만 남지 않고 진정 새로운 투쟁의 주체로, 나아가 여성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여성억압적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균형 있는 저항 주체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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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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