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7-8.27호

'개혁세력'붕괴 이후의 한국사회

2002년 하반기 전망

정책국 |
제3세계 국가의 경우 군부파시즘에서 민간민선정부로 이행은 ‘발전주의’ 노선의 해체와 궤를 함께 하였다. 과거 군부 파시즘이 중화학 공업화, 수출산업 발전과 같이 ‘민족적 발전의 길’을 약속할 때 거대 부르주아와 미국은 이를 지지했고, 노동자․농민의 피를 대가로 자본축적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980년대 외채위기와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민족적 발전’이라는 발전주의 노선은 파탄났고 군부파시즘 역시 동반 붕괴하였다. 이때 군부파시즘을 대체했던 게 바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다. 그들은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자유화’(즉 신자유주의)를 내걸었다. 그들의 경제 개혁은 경제 개방과 구조조정을 의미했고, 그들은 ‘민주화’와 ‘자유화’를 동일한 것인 양 의도적으로 혼동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환호도 잠깐 에피소드에 불과했고, 발전주의 이후 ‘금융세계화의 길’이라는 노선 전환 역시 미래를 약속하지 못했다. 탈규제와 금융개방에 따라 자본유출(자본도피)이 광범위하게 발생했고, 초민족적 자본의 인수합병과 민영화로 산업의 토대가 잠식되었다. 이 가운데 몇몇 산업은 특화되고 나머지는 포기되면서 전반적인 산업불균형이 발생하였다. 결국 흔히 말하는 ‘20 대 80 사회'가 도래하는데, 이는 금융화의 수혜를 받는 자들과 배제된 자로 분할된 사회를 뜻하였다. 또한 경제의 금융화는 필연코 금융비리와 권력부패를 낳았고, 더군다나 외채위기의 재발은 사회가 해체되는 위기로 이어졌다. (정치권력의 부패는 스스로 통제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고, 오늘날 세계 정치의 핵심 쟁점은 '부패방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정당은 노선을 상실했고, 더더욱 미국과 초민족적 자본의 요구를 추종하는 길로 박차를 가하거나, 정체성의 상실 속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었다. 정권교체의 반복은 일상화되었고, 대중의 정치 불신과 함께 정치는 희화화되었다. 유일한 대안 세력이 되어야 할 민중운동은 ‘민주화’의 소극에 휘말리거나, 신자유주의와 허구적인 코포라티즘 사이에서 동요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와 ‘개혁’ 세력을 자처했던 김영삼과 김대중 정권이 붕괴한 이후 남한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개혁세력’의 붕괴와 사회적 위기의 심화

김대중 집권 말기에 이르러 사회 저변에 깔린 갈등과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구조조정과 금융 팽창의 직접적인 수혜 층은 매우 적으며 노동자 대중의 다수는 파괴적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화의 논리는 사회 저변에 침투하였고 금융화의 또 다른 측면인 소비산업의 급팽창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사회 전반의 사회․정치적 불안도 심화되었다. 노동자 대중의 전반적인 생활 하락,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이에 대비되는 '골드칼라'와 새로운 소비문화의 출현은 사회 해체를 부추기는 중대한 요소이다. 거기에 김대중 정권이 부패상이 공개되면서 정치에 대한 혐오도 덧붙여졌다. (남한 경제성장의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개인과 자본의 해외도피도 그 징후 중 하나다.)
그 결과는 지자체 선거에서 이른바 ‘개혁세력’의 붕괴로 드러났다(투표율 저조+득표율 저조). 선거 결과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 개혁 때문에 삶의 터전을 유린당한 다수 대중의 정치에 대한 거부와 금융화에서 (일시적으로라도) 수혜를 얻은 자들의 지지 철회가 기묘하게 결합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역설적으로,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한나라당이 민주당을 역으로 포위하고, 지배계급의 주류 분파가 군부독재의 탈을 벗고 다시금 정치 다수파로 복권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이와 함께, 부시정부의 세계전략은 금융세계화에 따른 정치․군사적, 경제적 위기를 관리하는데 근본적으로 무기력하다는 점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남미에서 재발하는 외채위기와 부시정부의 반 테러 전쟁은 미국의 무능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다. 특히 ‘악의 축’ 발언 이후 부시정부는 ‘대량살상무기=테러지원국’이라는 도식을 만들며, (특히) 동아시아에서 군비증강과 대북 압박책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김대중정권의 ‘햇볕정책’은 한계에 도달했고, 한반도에서 장기적인 대치 상태는 다시금 위기에 빠지고 만다.
사회의 해체 경향과 개혁세력의 붕괴, 미국 헤게모니의 무기력함은 사회적 위기를 구성한다. 특히 경제의 ‘자유화’와 정치의 ‘민주화’를 지향했던 남한에서의 ’개혁세력‘의 동반 몰락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비극적 소실점(消失點)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노선을 흡수한 반동 세력이 복권하고 있으나, 민중운동은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낡은 것은 사라졌으나 새로운 것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사회적 위기‘다.

개혁세력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해체

지자체 선거에서 민주당은 매우 몰락했다. 최악의 투표율에 득표율 저조. 선거에 앞서 이미 민주당의 정치적 이니셔티브는 거듭 추락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금융 비리가 차례차례 드러났으나, 새로운 정치적 리더쉽을 집단적으로 형성하지 못했다. 특히 무능과 부패, 지역주의를 상징하는 세력과 다른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노무현은 당내 경선에서 '김심'을 얻으려고 김대중과 '차별성'을 부각할 기회를 놓쳤고, 급기야 김영삼에게 정치적으로 구걸하는 듯한 양상으로까지 가고 말았다. 월드컵이란 정치적 호재가 있었지만, 붉은 악마와 함께 앉아 응원하는 것 이외에는, 정치적 동원을 위한 전망과 이데올로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지구당 후보 경선과정에서는 무정견이 대립하고, 금품 살포가 만연했다. 지역 차원에서조차 정치 동원을 실패하고 만 것이다. 결국 민주당은 ‘슬로건도 조직력도 없는 선거’를 치뤄야 했지만, 반면 한나라당은 ‘부패정권 심판’이라는 단일 슬로건으로 선거를 돌파했다.
물론 민주당의 몰락은 사회적 위기에 따른 결과다. 지난 5년 간 정책개혁 과정에서 다수 노동자 대중은 삶의 하락과 미래의 불안을 경험했다. 이들의 정치 거부는 뚜렷했다. 민주당이 핵심 지지 층으로 육성하려 했던 집단마저 지지를 철회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들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화이트칼라(관리자․기술자), 지식인과 NGO, 386세대 등 ‘중산층 이데올로기’로 결합된 집단과 중상층의 생활양식을 동경하는 노동자 상층부, 금융․서비스업의 골드칼라(“신지식인”?)로 대표된다.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은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자유화’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정치의 ‘민주화’는 정치개혁(즉 안정적인 양당 체제의 구축과 부패청산)을, 경제의 ‘자유화’는 금융팽창(즉 주가부양을 통한 실리획득, 해외직접투자 유치를 통한 일자리 유지)을 의미했다.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초기에 강력히 집행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배제하고 의회를 무력하게 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반면 소수파 정권의 한계로 인해 DJP연합을 포기할 수 없었다. 김대중 정권은 내각제 개헌을 파탄 낸 후 전국정당화에 실패했고, 선거제도와 정당구조 개혁, 언론 개혁에도 모조리 실패했다. 그렇다고 국가보안법-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요구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국가인권위 설치와 인권 개선 요구에도 제대로 응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권은 자유주의의 정치적 지향조차 충분히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세계적인 정치 쟁점인 ‘부패청산’ 문제는 김대중 정권에 직격탄이 되고 만다. 한편 IMF 조기졸업이라는 자화자찬식 ‘성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한 경제는 구조적인 불안정성을 드러냈다. 주가의 급상승과 급락의 반복은 김대중 정권의 정책개혁, 즉 금융팽창에 따른 남한경제의 활성화가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를 드러냈다. 경제적 실리의 획득도 매우 제한적이었고, 결국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대중이 김대중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몰락, 개혁세력의 붕괴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는 단지 민주당의 몰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세력을 정치적으로 응집시킬 매개가 해체되었음을 의미한다. 민주당은 개혁세력의 표상으로 ‘전국정당’이 되지 못하고, 되려 정반대로 ‘호남당’으로 전락했다. 386세대 정치인들이 동반 몰락했고(특히 386세대의 신진 정치세력의 뇌물 연루),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했던 시민운동은 무정견을 드러냈다. 민주당은 정몽준, 박근혜, 이인제와 비슷한 수준의 대선 ‘득표력’을 가진 것으로 판결이 나고 말았는데, 정계개편의 주도권을 잡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접어든 것이다.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하는 민주당의 ‘정계개편’ 시나리오처럼, 만약 이들이 결합한다면 이는 분명 개혁세력의 해체를 의미한다. 개혁세력의 정치적 비전을 더 이상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 인물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은 오히려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보수주의 연합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운동’ 세력으로서 민주당과 매우 이질적인 야권 세력이 될 것이다.
개혁세력의 붕괴는 ‘정권 교체’의 전조다. 한나라당은 ‘네가티브’ 전략을 기본적으로 유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공적자금 회수, 서해교전 등의 이슈를 걸며 정치공세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나라당이 어떤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네가티브로 일관하고 있는데다, 이회창 개인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있기 때문에, 정권교체가 확정적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집권에 성공한다 해도 사회 저변의 위기를 전환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며, 다른 양상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한나라당의 경우, ‘사회적 온정주의’의 철회, 노사정위원회 같은 코포라티즘의 축소, 세금 감면 등 ‘부자 우대정책’ 구사.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결합, 특히 반(反)페미니즘, 부시의 대북 정책 추종 등을 예상할 수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정권교체와 민간민선정부의 역사적 역할이 종료된 셈이다. (다시 말해 ‘민주화운동’ 세력이 남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폭력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지배계급의 주류분파를 대체하여 이제까지 충분히 칼날을 휘둘렀다는 말이다.) 남한 지배계급의 주류 분파는 군부독재의 탈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노선을 흡수하여 정치적 복권을 서두르고 있다. 1980년대 민중운동의 정치적 지향을 ‘미국화’(경제의 ‘자유화’와 정치의 ‘민주화’)로 호도하려 했던 ‘개혁세력’은 붕괴했으나, 현재의 민중운동은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낡은 것은 사라졌으나 새로운 것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으니, 정확한 의미에서 ’사회적 위기‘다.

사회 저변의 위기의 심화: 노동신축화와 경제의 금융화, 농업 포기와 지역경제의 붕괴

노동자 대중이 체험하고 있는 생존의 위기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수치상의 실업률 하락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대폭 축소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공공근로 같은 시도마저 완전히 방기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다”는 자본가 단체들의 발언이 쏟아지는 가운데, 노동을 신축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5월 초에 발표된 '비정규직 근로자 대책에 관한 노사정 1차 합의문'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폭을 대폭 축소하여 소수의 대상만 적용하여 부분적으로 사회보험을 확대하겠다는 기만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각종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기간제, 특수고용, 파견제)을 더욱 확대하는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33만 명에 이르는 이주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묵살하고, 오히려 산업연수제를 확대하는 등 극단적인 노동 착취를 자행하고 있다. 김대중 정책개혁의 약속이던 ‘사회안전망’ 확충은 단지 형식적인 의미만 남았으며, 공적 연금 체계의 부재로 생존의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오히려 연기금을 개혁해서 퇴직금제를 없애고 연금 체계를 완전히 투기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이와 함께, 노동운동에 대한 공세적인 탄압도 일상화되었다. 최근 들어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형사․민사상으로 고발하고, 손배소․가압류를 취하는 방식이 고착화되었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을 비롯하여, 파업 노동자들의 구속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노사정위원회는 노동 신축화를 강요하는 장치의 의미만 남았을 따름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가 내걸었던 ‘사회적 합의’는 실제 의미가 없는 허구적 구호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남한 경제는 금융화가 급속하게 진척되고 있다. WTO 뉴라운드 출범 이후, 금융서비스 시장 개방을 둘러싼 남한의 논의는 그 단면을 정확히 보여준다. 사실 남한은 GATS(서비스교역에 관한 일반협정)와 같은 다자간 협상의 방식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금융 자유화 조치를 추진하였고, 이미 개방이 상당히 진척되어 ‘완전 개방․자유화’ 수준에 이르렀다. 심지어 미국은 앞으로 벌어질 다자간 협상에서 남한이 여타 개발도상국의 시장개방에 앞장서기를 원하고 있다. 즉 향후 금융서비스 자유화 협상에서 한국이 주도하여 선진국의 역할을 대신해줄 것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이번 GATS 협상의 주요 요구 사항은 해외에서 국내 금융 상품의 거래를 확대하고, 내국인이 외국에서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을 자유화하며, 외국 금융회사가 남한에 자회사나 지사를 설립하는 것을 자유화하는 것이다. 최근의 보험업법 개정 움직임은 이와 같은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국내 재벌의 요구가 반영된 대표적 사례다. 그들은 보험업의 신규진입 규제, 가격 경쟁과 상품 경쟁에 대한 규제, 금융 산업 내의 겸업화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을 자유화하라고 요구해왔다. 그래야만 금융자본이 침투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 자유화의 파괴적 효과는 민중의 생계기반을 자본시장에 끌어들인다는 점에 있다. 금융자본의 구상에 따르면, ‘사회보장체계’로 불리던 의료시스템, 연금, 보험 영역은 거대한 화폐자본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재벌은 가장 큰 결정력을 가진 기관투자가가 된다. 즉 그들은 금융 세계화를 가속하기 위한 새로운 동력을 형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개인의 사회보장기금인 연기금과 보험펀드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금융 통합에 따라, 은행과 보험, 투신, 증권기관은 상품 판매망을 통합하고 사업분야와 판매량을 늘리면서, 개인과 가족의 ‘금융계획’을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다. 개인과 가족의 삶은 금융시장의 논리에 깊게 포섭되는데, 이제 각각의 사회구성원은 금융의 메커니즘에 해박해야 한다는 게 또 하나의 ‘의무’가 된다(‘대중 투자 문화’의 형성). 이 과정에서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신 금융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자산담보부증권, 부동산투자회사, 고수익 펀드와 같은 상품이 그 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목적은 자산규모와 노동비용을 축소하여 기업의 수익률 저하를 막고, 산업기반을 담보로 자산가치를 펀드화하여 금융투자를 활성화한다는데 있다. 그런데 투자가들은 이런 부류의 상품을 선호하며, 이는 다시금 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한다. 즉 민중의 생계기반이 구조조정과 노동 신축화를 촉진하는 부메랑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금융화에 따른 ‘대중투자문화’의 확산에 조응하여, 복권, 경마․경륜, 스포츠 도박, TV홈쇼핑, 경매, 카지노와 같은 투기성 소비산업도 만연한다. 결국 경제가 금융화하고, 투기성 소비산업이 번창하는 상황은 노동자 대중의 삶을 이중삼중으로 옥죄고 있다.
또한 경제의 금융화의 대가로 농업 개방은 불귀(不歸)의 점을 지나고 있다. 이미 김대중 정부는 4월에 발표한 ‘쌀산업종합대책’에서, 쌀값 하락을 유도하여 쌀 생산량과 쌀 재배 면적을 줄여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농업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고, 논농사 포기를 대가로 농민에게 소득보전을 해준다는 ‘직접 지불제’ 시행을 내세웠다. (그러나 직접지불제에 배당된 예산 비중이 전체 농업예산의 2.9%로 아주 낮아 별 효과가 없다.) 이는 2004년 WTO 쌀 재협상을 앞두고 자발적으로 쌀 시장 개방을 준비하는 조치다. 이처럼 현 단계 농업 개방은 곧바로 남한의 농업 포기 정책을 의미하며, 저변에서 한국의 사회경제적 위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농산물 대외 의존, 인구 이동, 생태위기 등).
이 결과로, 지역 경제가 심각하게 파탄 나고 있다. IMF 시기, 지역 중소기업은 연쇄부도를 경험했고, 지역 금융기관도 합병과 퇴출을 겪었다. 이에 따라 지역 경제의 공동화가 심화된다. 게다가 금융의 증권화, 주식투자 열풍에 따라 자금이 수도권으로 흘러가는 역외 유출도 커졌다. 수도권 중심으로만 금융시장, IT 산업이 팽창하고, 지역경제는 ‘바닥을 향한 경쟁’에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제적 특혜제공, 수도권의 금융적 팽창 수혜를 얻기 위한 소비산업의 확대 등등 지역 자치체의 생존경쟁이 유발되고 있다(결국 지역경제의 파탄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효과가 오늘날 다시 ‘지역주의’를 떠받치고 있다).
결국, 구조조정 프로그램 이후 금융 부문의 팽창과 소비 부문의 확대에 따른 경제성장률 증대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노동신축화와 경제의 금융화, 농업 포기와 지역경제의 붕괴는 남한사회의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한국경제을 성장시키겠다는 장미 빛 약속을 연장하려고 금융화를 촉진하는 경제정책을 구사한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북미관계의 위기

2000년 미국 대선의 선거 부정 의혹(흑인 투표의 체계적 배제), 2001년 세계무역센터의 붕괴와 반테러 전쟁의 개막, 최근 연달어 터져 나오는 기업 회계 조작 의혹(월드컴이라는 회사가 이익을 38억 달러 부풀려 장부를 조작한 사건) 등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다양한 징후다. 미국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과 함께, 부시정부의 세계전략은 금융세계화에 따른 정치․군사적, 경제적 위기를 관리하는데 근본적으로 무기력하다는 점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남미에서 재발하는 외채위기와 부시정부의 반 테러 전쟁은 미국의 무능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다.
오늘날 미국의 대외정책은 과거 ‘냉전’과 유사하게 ‘반테러전쟁’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수립되고 있다. 나아가 ‘대량살상무기=테러지원국가’라는 도식을 창조하여 ‘악의 축’과 전쟁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유럽국가의 전쟁참여를 독려(NATO의 강화)하며,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을 공고히 할 것을 꾀하고 있다. 특히 부시의 ‘악의 축’ 발언과 ‘핵태세보고서’는 미국의 현재 세계전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비핵국가를 포함하여(예컨대 북한) 악당국가에 선제핵공격을 감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선언했다. ABM 탈퇴하고, 공세적 핵무기전략을 구축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가운데 미국-이라크 전쟁위기는 점차 기정 사실로 되고 있으며, 아라파트를 배제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 안의 긴장은 다시금 중동의 정치 위기를 낳고 있다. 여기에 부시정부는 평화유지활동을 오히려 축소한다는 방침을 내놓고 있어, 제3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분쟁에 대한 무 개입 노선을 밝혔다. 미국의 간섭과 배제는 국제적 정치위기를 양면으로 조장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미국은 북한과 정치협상에 앞서 동북아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페리보고서’는 군사력증강과 정치협상 두 축을 동시에 진행할 것을 제안한데 반해, 부시정부는 중 단지 한 축만을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일본 관방장관의 ‘일본 핵무장화’ 발언은 이중적 효과를 낳았다. 먼저 동아시아 ‘세력 균형자’로서 미국의 동아시아 주둔을 합리화하는 효과다. 다시 말해, 미국 군대가 떠나면 일본은 안보불안감으로 독자적 핵무장화에 나설 것이므로, 미국이 반영구적으로 주둔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핵무기를 제외한 기타 군사무기(예컨대 첩보위성과 이지스구축함)를 부유할 수 있음을 합리화하며, 일본의 ‘보통국가’화(예컨대 헌법수정)를 촉진한다. 거듭 되풀이하는 일본 관료의 ‘망언’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는 ‘꽃놀이패’ 역할을 하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쉬지 않고 망언이 발표된다. 한국 역시, 이미 F15K를 도입했으며. 이후 구축함, 헬기, 미사일 등등 미국에게서 ‘사야될’ 무기 리스트가 사실상 확정되어 있다.
한편 서해교전 사태는 북한의 기본전략에 비추어 볼 때, 예상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북한은 미국, 일본 등과 대외 관계개선에 기대어 지금과 같은 ‘우리 식 사회주의’를 고수한다는 게 기본전략이다.) 북한은 미국과 정치협상을 앞두던 시점이며, 북일수교 과정에서 일본이 집요하게 요구한 일본 출신 ‘테러범’의 일본 입국을 추진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북한과 정치협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부시정부를 부추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군다나 최근 일본과 중국은 일본 영해를 침범했다는 ‘괴선박’의 인양 작업에 합의했다. 이 역시 일본과 미국의 반북 캠페인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2003년은 제네바 합의 이행과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문제가 걸린 분수령이자 위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미국은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임시변통 식의 해결책 만을 염두에 둔 듯하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장기적인 대치 상태는 다시금 위기에 접어들고 있으며, 중동위기와 함께 국제정세의 불안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다.

사회적 위기와 강고한 민중연대 투쟁조직의 구축

이처럼 남한 사회 저변의 사회경제적 위기, ‘개혁세력’의 몰락과 보수세력의 재등장, 한반도의 장기적 대치상태의 첨예화는 화약고와 같은 총체적 위기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현재 노동운동의 실리주의-조합주의 지향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 상대적으로 응집력 있는 대중운동 세력이 민중의 직접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투쟁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지난 5년 동안 민중운동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운동을 활성화하고, 사회 각 부문에서 자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막아내려고 쉼없이 투쟁했다. 그러나 현재 드러나는 사회적 위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더욱 강고한 투쟁에 돌입해야 한다. 활동력 있는 민중연대 투쟁조직을 전국적으로 구축하지 않는다면, 대중운동은 눈앞의 정치 탄압과 허구적인 코포라티즘적 지향 속에서 무력화될 수밖에 없으며, 대다수 대중은 위기의 파괴적 효과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다.
따라서 전국적인 투쟁조직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치투쟁과 대중투쟁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포착해야 한다. 특히 김대중-노무현으로 대표되는 현정권의 실정과 기만성을 거듭 폭로하고, 남한 보수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확대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의 ‘사회적 합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치장하기 위한 헛된 구호에 불과했고, 그들의 무능과 부패는 노동자 대중의 희생을 대가로 뿌린 떡고물이라는 사실을 적극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2002년 하반기, 금융 자유화와 농업 개방에 따른 민중생존의 위기에 맞서 대중적 투쟁에 적극 복무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의 자유화와 개방 정책은 민중의 생계기반을 직접 공격하며, 농업 포기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민중에게 다시금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노동 신축화와 민중 생존의 위기 속에서, 불안정노동의 확대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불안정노동의 양상은 실로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노동자의 삶에 끼치는 효과는 매한가지다. 노동자의 투쟁을 정치이슈화하고 연대투쟁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력을 집중해야 한다. 한미일 삼각동맹의 대북 압박책과 남한의 군사력 증강 시도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자. 서해교전 사태를 통해, ‘민족절멸의 위기’를 부추기면서까지 전쟁과 대북 압박책을 찬양하는 세력이 누구인지 분명히 드러났으며, 이는 또한 김대중 정권이 한미일 삼각동맹의 틀 속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군비증강 시도에 편승한 결과라는 점을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을 활발하게 펼쳐나가기 위한 민중연대 투쟁조직을 구축할 때에만, 대선과 같은 지배계급의 정치일정이 민중운동의 분열의 계기가 되는 것을 막고, 이를 기반으로 효과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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