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7-8.27호

Le Nozze Di Figaro, Don Giovanni

박준도 | 편집실장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1~1791)

‘음악의 천재’ 라는 명성을 제쳐놓고, 그가 음악사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는지 곰곰이 따져보면, 뜻밖의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매우 왜소한 자리에 초라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행히도 그의 스승인 하이든이 조금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고, 8음계 화성학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하이든이 인정했듯) 하이든보다 훨씬 자유롭게, 아니 풍부하게 8음계 화성학을 구사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음들 사이에서 혁명의 보편성 혹은 보편적 존재로서 인류를 사고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생전과 달리) 베토벤의 그늘에는 가리지만, 하이든보다 친근한 것이다.
사실, 모차르트는 음악사보다 음악의 사회사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왜냐하면, 그가 바로 최초로 독립한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음악의 주된 고객은 귀족이었고, 패트런(후원자)도 귀족이었으며, 연주장소는 교회나 살롱이었다. 이것이 모차르트 당대에, 시민계급과, 출판업자-극장주, 공개연주회로 바뀐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맞서다 헤어진 일화는 매우 유명한데, 왜냐하면 그 뒤로 그는 작품과 연주회로 돈을 직접 버는 최초의 음악가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간 그의 삶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귀족들 사이에서도, 돈 많은 부르주아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784년 프리메이슨에 가담하여 이 운동을 위한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당대 평균적인 사회정서를 담은 음악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부터 그는 몰락하기 시작한다. ⌈피가로의 결혼⌋(1786)이 바로 이 기점에 있다.

당시, 오페라 부파(이탈리아 희극)는 조잡한 것인데다,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공감하던 주정주의하고도 거리가 멀었다. 어쨌거나 주요고객을 따져보면 희극을 작곡하는 일 자체가 대단한 모험인 셈인데, 그는 여기서 대성공을 거둔다. 바로 ⌈피가로의 결혼⌋이다. 시민 극장에서 관람한 사람들은 열광했고, 극장주는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내친김에 그는 하나 더 만드는데, 같이 소개하는 ⌈돈 죠반니⌋(1787)가 바로 그것이다.
두 오페라 모두 귀족의 도덕, 성 관념을 문제삼는 오페라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의 주인인 백작은 초야권을 주장하며, 틈만 나면 피가로의 아내가 될 수잔나를 유혹하는 것이 주관심사인 사내고, ⌈돈 죠반니⌋에서 돈 죠반니는 자신과 잠 잔 여인을 열거하는 것이 자랑인 사내다. ⌈피가로의 결혼⌋이 백작과 피가로 사이에서 벌어지는 숱한 헤프닝을 다루었다면, ⌈돈 죠반니⌋는 그의 엽기적인 행각을 놓고 마을사람들이 벌리는 한 판 소동이다. 차이가 있다면, 앞서의 오페라가 백작을 계도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반해, ⌈돈 죠반니⌋는 그를 지옥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향락의 나날에서 빠져 나올 줄 모르는 귀족에 맞서 부르주아들이 매우 엄격한 도덕을 앞세웠던 시절이었고, 18세기 문화가 귀족의 퇴폐성을 없애는 것이 관심이었음을 상기해보면, 이 오페라의 사회사적 맥락을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두 오페라는 그것만으로 멈추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이 상황에서 오고갔을 법한 수많은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음으로 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검열로 잘려 버린 문구를 음악으로 살려놓기도 하고(⌈피가로의 결혼⌋-피가로의 당돌함은 가사이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백작에 대한 분노뿐만 아니라, 질투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투로 그는 놀림이 된다),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의 아리아에는 미묘한 감정이 교차한다(돈 죠반니의 하인 레포렐로는 기본적으로 그를 경멸하지만 한편에서는 선망하는데, 그 바람에 돈 죠반니로 몰려 위기에 빠진다). 확실히 그는 줄거리 맥락을 넘어, 등장인물 각자에게 다른 인물들의 존재와 행동이 곧 자신의 요소라는 사실을 음으로 만드는데 탁월했다(끊임없이 미끄러지고 교차하는 기표로서 음). 그가 독창의 단순 나열에 불과했던 오페라 부파를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그가 이때부터 생활고를 겪게 된 것은 사실 모차르트 자신의 성격이나 그가 만든 음악 때문이라기보다 당시까지 작곡가들의 생계를 지탱해주던 구조가 해체된 탓이 더 크다. 동시대 최대 궁정작곡가인 살리에르에 비해 절반도 안되는 작곡료에 그나마 기회도 적었다. 시장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조잡한 곡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반면 그의 생활은 더욱 타락해갈 따름이었다.
자료를 직접 모을 수 있었던 전기(傳記) 작가들이 말년 그의 생활상을 침묵으로 일관하는데, 알고도 외면했다고들 한다. 오늘 우리가 듣는 그의 후기 음악은 대부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역설인지, 연관관계가 있는지..... 필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라고 권유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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