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 2019.10.17
사회주의자여, 포퓰리스트를 경계하라
2019노동운동포럼 “오늘날의 사회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하고 장기 저성장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2019노동운동포럼에서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유행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21세기 사회주의 주장은 대부분 "자본을 악마화하고 노동자계급을 숭고한 영웅으로 내세우는" "타락한 노동자주의"에 가깝다. 한지원 연구원은 ‘혼란스러운 사회주의관’으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며, “어떤 경우라도 포퓰리즘으로 퇴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더라도 “결과가 부정의”한 것이 자본주의!
지난 10월 12일 토요일 경희대학교에서 진행된 2019노동운동포럼의 첫 번째 순서는 "오늘날의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언한 자유주의적 지향에도 오늘날 현실에서 부자유와 불평등이 증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소유제도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누구나 자신의 노동을 상품화하여 판매할 수 있지만(평등), 자본 소유자는 굳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필요가 없고, 임노동 계약이 법적으로 보장되더라도(공정) 상품화된 임노동은 자본 소유자에 의해 통제되며, 노동계약에 따라 임금이 지불되더라도, 결국 소유자 계급이 잉여를 지배한다. 자본주의적 소유제도를 걷어치우지 않고서는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은 요원하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소유제도를 걷어치우는 것을 핵심 목표로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지향에 따라 자본가 없는 경제를 조직하고자 했던 소련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소련의 시도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유화 계획경제로 요약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기존 지배계급의 반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이는 결국 당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이어졌다. 또한 경제 영역에서 계급으로서 자본가는 사라졌을지라도 국유화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당이 자본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무엇보다 소련의 ‘국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모순으로서 이윤율의 하락을 막을 수 없었고, 미국의 법인기업 자본주의보다 훨씬 앞서 붕괴했다. 소련의 실패는 당의 독재, 그리고 국유화가 아닌, 사회주의를 향한 다른 경로를 고민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노동자주의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어
국내 일각의 좌파들은 실패한 소련을 반복한다. 이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한 소련 사회주의의 시도가 왜 당의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들이라면 소련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국유화 계획경제를 주장한다. 국유화된 계획경제를 통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충분히 생산하고,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국유화 노선을 반복하는 구(舊)사회주의로는 현대적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비판할 능력을 상실한 사회주의는 노동자주의로 타락한다. 자본가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은 항상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이 노동자주의 도그마다. “노동조합은 투쟁력이 뒷받침되는 이상 가장 높은 수준의 임금을 쟁취해야 한다. 노동조합 임금투쟁은 자본가 이윤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되찾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대담하게 수행해야 한다”라는 부류의 주장 속에는 소련의 실패를 넘어서기 위한 고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노동자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여정을 오히려 퇴보시킬 뿐이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자들의 이기적 행동을 정당화한다. 노동자 다수가 사회와 기술에 관한 지식을 쌓으려 할 필요 없이 자본가에게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인식을 확산한다. 노동자들은 항상 도덕적으로 우월하므로, 대안적인 사회윤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간주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이기주의적 운동은 오히려 노동자가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유행하는 사이비 사회주의들
최근 심심찮게 국제면에 등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미국 연방 하원의원으로 미국민주적사회주의그룹(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이하 DSA) 소속이다. DSA는 “자원과 생산에 대한 민중적 통제, 경제계획, 공평한 분배, 페미니즘, 인종평등, 억압 없는 관계” 등을 지향하는 미국 내 최대 ‘사회주의’ 단체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점이 ‘사회주의’적인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DSA는 전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 그린뉴딜 등의 정책을 제시하데, 이는 이전 오바마 정부에서 시도했던 정책과 크게 차이가 없다. 단지 재원 마련 방법에서 오바마 정부와 차이가 있을 뿐인데, 이런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국가가 화폐를 얼마든지 찍어내도 된다는 입장이다. 이 역시 보편적 등가물로서 화폐의 본질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는 한참 미달한다. 어쩌면 이들은 패션 잡지 GQ에 실린 글처럼, ‘섹시’ 해 보이기 위해서 또는 ‘쿨한 트렌드’를 선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술발전으로 사회주의가 도입되리라는 낙관적인 주장도 유행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공지능 로봇과 디지털 경제가 크게 확대되면, 필요한 상품은 3D프린팅 기술로 스스로 만들면 되고, 따라서 생산을 위한 거대한 자본이 필요 없어지며,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으로 화폐가 무용해지는 등 자본주의가 스스로 도태된다는 주장이다. 정반대로 인공지능 로봇의 도입으로 대량실업이 발생하고, 극소수의 자본가가 부를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테크노-디스토피아적 주장은 이러한 4차 산업혁명 사회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된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대신 기본소득을 주면 된다는 주장 역시, 어떻게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것인지를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강연에서 누누이 강조되었던 것처럼, 사회주의의 생명력은 현실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힘에 있다. 사회, 경제의 객관적인 구조를 분석하지 않고, 사회적 불만을 그저 수렴하고자 한다면 참혹한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나 경제와 사회가 처참하게 붕괴한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나, 사회주의를 내세웠지만, 긴축재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가 그 대표적 사례다.
21세기 사회주의자라면 무엇보다 포퓰리스트를 경계해야
강연 중에는 “임금 극대화 투쟁이나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제약을 극복”하는 것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제약을 인식하면서 투쟁”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됐다. 한지원 연구원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전 시기와 똑같이 임금을 인상하는 것은 구조적 위기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위기를 가속화 할 수 있다. 현재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과 계획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사회운동은 오히려 덫에 빠질 수 있다”고 답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제약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포퓰리즘과 구별될 수 없다. 지금 당장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 질서가 어떤 형태일지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사회주의자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상품화폐 경제와 그것의 불평등한 결과를 지양할 것인가. 어떻게 계급 없는 경제질서를 조직할 것인가. 어떻게 임금노동의 모순을 극복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당장 명확한 대답을 제시할 수 없더라도, 자본주의가 제기하는 질문 자체를 회피하는 ‘사이비 사회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고 자본주의 비판의 과학으로서 사회주의를 재건하는 것, 이것이 21세기 사회주의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