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보다
| 2021.06.23
서민 씨의 오류와 타락
조선일보 택배 파업 칼럼에 대한 비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택배 파업이 일단락되자, 보수 언론에서 노동조합을 비난하는 기사들이 떼를 지어 나온다. 특히 서민 씨가 6월 19일 조선일보에 쓴 <최악의 노동 지옥이라면서 아무도 그만두지 않는 ‘이 직업’의 역설>은 그 종합판이라 할만하다. 이제껏 보수 언론에서 제멋대로 짜기워 놓은 이야기들을 가져다 놓고, 서민 씨 특유의 조롱과 비난을 퍼붓고 있어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그가 딱 그 꼴이다.
서민 씨 칼럼은 사실관계의 오류로 시작한다. 칼럼은 “택배 기사는 정해진 급여를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라는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이 부분부터 땡!
최근 법원은 택배 기사가 ‘노조법상 근로자’라는 점에 대해 일관된 판결을 내리고 있다. 법원은 택배 기사가 택배사 및 대리점에 필수적인 노무를 제공하고 있고, 경제적·조직적 종속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서민 씨는 비판하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인 기초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검색창에 ‘택배’, ‘사업자’, ‘노동자’ 세 키워드만 넣어도 관련 내용이 수백만 건이 쏟아지니 말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그의 칼럼은 단순 팩트 오류를 넘어 빠르게 논리적 비약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이렇게 탐욕스러운 존재. 아무리 택배 기사가 개인 사업자이고 돈 욕심 때문에 죽었다 해도”라며 과로사로 죽은 택배 기사들을 그는 조롱한다. 근거는 택배 기사 소득이 임금근로자 평균보다 높다는 것.
통계부터 하나 보자. 여러 실태 조사에 따르면 2019년 택배 기사의 노동시간은 주 평균 71시간이 넘는다. 임금근로자 평균 42시간보다 1.7배 길다. 1년으로 환산하면 3천7백 시간에 달하는데, 이런 걸 바로 살인적 장시간 노동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길게 일하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자리를 지키려면 그렇게 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택배 노동자는 ‘책임배송’이라는 형태로 업무를 수행한다. 자기 구역에 하루 물량이 100개든 300개든 혹은 그 이상이든 구역에 대한 물량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 물량의 상한선은 없다. 이걸 못하면 구역을 빼앗길 수도 있다. 일종의 해고다. 둘째, 시간당 임금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서민 씨가 인용한 택배 기사 순소득으로 계산해보면, 택배 기사 시간당 평균 소득은 1만4천 원이다. 임금근로자 시간당 평균 임금 1만7천 원보다 20%가량 적다. 더군다나 택배 기사에게 배분되는 수수료율은 매년 낮아진다. 매해가 불안한 택배 기사들은 일이 있을 때 죽어라 벌어야 조금이나마 안정적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요컨대, 탐욕이 아니라 택배 시장 구조가 만드는 불안정성이 택배 기사들을 살인적 노동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서민 씨에게는 장시간에 걸쳐 죽기 살기로 일을 하는 서민 노동자가 탐욕스러워 보일지 모르겠으나, 현실의 택배 기사는 삶을 갈아 넣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택배 경쟁의 정글에서 가까스로 오늘을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서민 씨 칼럼의 마지막 부분은 노조 합의안에 대한 비난이다. 노조 활동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금지, 물품 파손 등에 대한 대리점 책임 확대, 조합원 자녀 대학 등록금 지원 등이 노조의 요구안이었는데, 서민 씨는 이에 대해 “이런 노조의 요구를 들어줄 업종이 대체 얼마나 될까?”라며 반문한다.
서민 씨가 노동조합에 대해서 조금도 조사해보지 않고 칼럼을 썼다는 게 여기서도 드러난다. 노조 활동에 대한 손배소 금지는 노동운동의 오랜 요구였다. 사측의 노조 탄압에 항상 악용되는 게 손배소이기 때문이다. 손배소 탓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조합 간부도 여럿이다. 물품 파손에 대한 대리점 책임 확대는 노동자성과 관련된다. 노동자의 업무상 과실은 엄격하게 판단되어야 하는데, 택배 업계에서는 관행적으로 기사가 물품 파손을 물어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서민 씨도 부서진 물품을 들고 난처해하는 택배 기사를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대학등록금 지원은 단체협약을 안정적으로 체결하는 노조들에서 대부분 포함하는 기업 복지 중 하나이다. 서민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무시무시한 내용이 아니란 것이다.
이런 팩트 오류와 논리적 결함은 칼럼의 끝부분에서 마침내 음모론으로 흑화한다. 그는 노조의 요구는 파업을 위한 명분 쌓기였고, 실제 목표는 대리점주를 쫓아내고 노조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고 과감하게 단언한다. 이 대목에서 “싸우면서 닮는다”라는 말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그는 수년간 김어준 씨를 상대로 음모론의 정치를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노조를 상대로 음모론을 제조한다. 근거는 밑도 끝도 없는 어떤 ‘녹취록’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파업을 길게 이어간 이유는 대리점 문제 탓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는 원청, 즉 CJ대한통운과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원청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바지사장에 불과한 하청 기업 대표를 앞세우는 건 한국 노사관계에서 일반적이다. 특히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한데, 택배 노동자들은 사회적 합의 방식으로 원청과 교섭하기 위해 여러 손실을 감당하며 파업을 진행했다. 한국적 노사관계의 문제점을 전혀 모르는, 아니 관심도 없는 서민 씨의 음모론은 주소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민 씨의 염치없음’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두겠다. 단국대 의과대 정규직 교수인 서민 씨는 한국에서 가장 안정적이며 높은 소득을 올리는 직업군에 있다. 교수라는 직종의 특성상 시간적으로도 꽤 자유로운 편이다. 위키백과에는 그의 직업이 방송인이라고도 나온다. 과연 그가 극도의 불안정성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6일 연 3천7백 시간을 일하는 택배 기사에게 ‘탐욕’을 이야기하는 게 과연 타당할까? 서민 씨가 지식인 행세라도 하고 싶다면 최소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성찰 정도는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조국 비판에서 재미를 본 서민 씨는 요즘 “아무말 대잔치” 식으로 여러 사회 문제들에 어쭙잖은 비판을 하는 것 같다. 그가 칼럼에서 탐욕을 비판한다며 소환한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다. “더이상 할 말이 없을 때는 말을 그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