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의 진실 “GM 현금 4억 달러로 신규법인을 설립(대우채권단이 1억 9700만 달러 투자, 대신 배당부 장기 우선주 12억 달러 배당), 이 신규법인(GMDAT)이 5.73억 달러의 부채를 포함 대우자동차 인수” 2002년 4월 외자유치를 빌미로 해외매각에 혈안이 된 김대중 정부의 대우자동차 매각명세표다. 12억 달러 우선주 배당에 5.73억 달러 부채를 합쳐도 매각대금은 20억 달러가 채 안 된다. 그 와중에 GM이 내놓은 현금은 고작 4억 달러니 군산·창원공장 청산가치만 2조 2천억 원인 대우자동차를 5천억 조금 더(4억 달러) 받고 판 꼴이다. 여기다 채권단은 GM에게 20억 달러어치의 저리 장기운영자금 대출을 약속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은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27(~23)%에 이르는 법인세를 10년간 감면(7년간 100%, 3년간 50%)해 주었고, 외국인 임직원의 소득세도 10년간 감면(7년간 100%, 3년간 50%)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정권의 혁혁한 공은 19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었던 대우자동차노동조합을 온갖 협박과 공권력 행사로 기를 꺾어놓고 팔아버린 점에 있다. 김대중 정부는 해외매각과 정리해고(1,725명)에 반대해왔던 GM대우 부평공장의 노동조합에 공권력을 투입하면서 강제진압·해산하였고, 해외매각이 수면에 떠오르자마자 모든 언론은 생산성 향상 계획에 노동조합이 무조건 동참하라며 압력을 넣었다. 이런 상황의 지렛대를 이용하여 GM은 부평공장 인수만큼은 끝까지 유예하였다. 부평공장 운영을 좌지우지할 것이면서도 4가지 전제조건이 달성되어야 인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6개월 연속 주야 2교대 가동, 연 4%대의 생산성 향상, 국제적 품질 수준 유지, 노사분규로 인한 작업손실시간 GM 기준 충족(전 세계 GM 공장의 평균 ― 연 2시간 이하) 등 부평공장이 향후 6년 동안 GM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완전한 항복을 전제로 부평공장을 인수한다는 것이다. GMDAT와 DIMC 법인통합의 이면 2005년 10월 GMDAT(군산/창원공장)는 DIMC(대우인천차)를 흡수통합했다. GM대우 부평공장의 환경품질책임제가 2005년 GM전체의 모범사례로 꼽힐 만큼 성과를 거둔데다 2005년 임단협도 무분규상태로 타결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2002년 2년 동안 임금교섭 자체가 없었고 임금인상폭도 작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우자동차노동조합(이성재 집행부)은 인수 4대 전제조건 중 하나인 노사평화유지 조항을 지켰다. GM대우자동차 기업조직 및 GM대우노조의 정상화가 최우선과제였기 때문이다. 2001년 의식개혁을 통한 회사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환경품질책임제는 전사, 부서, 개인 단위의 환경품질 관리 구역을 두고 그곳의 자재, 기계, 방법, 사람에 대해, 노동자를 관리 책임자로서 경영에 참여시켜 모든 공정 내 품질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근무외시간에 시행하는 ‘자율관리’였지만 매각·파산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회사가 만들어놓은 성과지표와 오류 체크리스트 작성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고, 개선―제안작업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부평공장은 2003에만 환경품질책임제 하나로 20억 원의 비용을 절감하였고, 2004년에는 GM의 세계 공장 중에서 GMS(Global Manufacturing System) 평가 최우수 공장이 되기도 하였다. 과거 1992~3년 대우자동차의 NAC운동으로 대우자동차의 저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다 잠시 주춤한 바 있는 데, 환경품질책임제로 린생산체계가 재확립된 것이다. 다른 린생산체계도 그랬듯 부평공장의 환경품질책임제 또한 노동강도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1995년 60짭수/JPH(Jobs Per Hour)에 이르렀던 시간당 자동차 생산대수가 1998년 대우자동차 위기로 급격히 하락했었는데, 2005년 환경품질책임제 운동으로 60짭수/JPH 그대로 복원된 것이다. 차이가 나는 것은 생산직 노동자 수가 2000년 5,327명에서 2005년 4,011명으로 크게 감소되었다는 점이다. NAC 운동으로 늘었던 때도 그랬듯 현재 짭수 증가는 기술생산성과는 관련 없이 오로지 노동강도 강화에만 의존한다. 여기다 인원까지 감축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환경품질책임제가 추진하는 작업환경개선시도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노동조합보다는 직장/팀체계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다. 실제 환경품질책임제는 제품생산과 관련된 ‘제안’뿐만 아니라 약간이나마 작업환경 개선과 관련된 ‘제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GM대우 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선 2003년 생산성 지표가 일정하게 회복(2002년 매출액 6천원 → 2003년 4조원)되고 2교대 근무가 확대되면서 GM대우는 인력충원을 시도하였다. 2교대 근무를 확대하는 것인 만큼 GM대우는 (반)숙련노동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2001년 정리해고된 조합원을 복귀시킨다. 그리하여 2006년에는 거의 모든 조합원이 복귀된다. 재입사 형식이었고, 따라서 아직도 그들이 GM대우 노동자로서 모든 권리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이때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늘어나는데 노동조합이 해고된 조합원을 복귀시키면서 GM대우 회사 측의 비정규직 고용을 묵인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타협점이 형성된 것이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숫자는 점점 늘어 2007년에는 부평공장에서만 1차 하청업체 노동자가 1,478명, 전체의 40.6%에 이른다. 2006년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인천항의 KD(Knock Down)센터에는 자동차 부품 조립·포장 노동자들이 전원 비정규직으로 채용된다. 다른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그러하듯 GM대우 부평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정규직 노동자들과 유사한 일을 하고 있으며, 노동강도는 거의 동일하거나 더 강하다. 부평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대부분 서브라인 쪽에서 일하고 있으며, 임금수준도 정규직 노동자보다 낮다. 그리고 연령 및 근속에 있어서도 정규직과 크게 차이가 나는데, 이는 직영과 하청의 차별, 수당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을 당연히 여기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 GM대우는 신규인원을 뽑을 때, 단체협약에 따라 정리해고자들을 우선 복귀시킨 뒤 하청업체에서 ‘발탁채용’을 하는데, 현장에서는 이 발탁채용이 사내하청 노동자들 사이의 고용 및 승진체계로 부각되기도 한다. 이 바람에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의 임금 및 근로조건의 차이가 다시 한번 당연시 된다. 물론 이런 발탁채용은 사내하청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단결조차 심각하게 저해한다. 한편 2005년 불법파견 시비는 GM대우에도 밀어닥치는데, 어찌된 일인지 GM대우 부평공장은 불법파견시비에서 벗어났다. 1개 하청업체가 여러 부서로 인원을 나누어 파견하는가 하면, 현장의 하청업체 운영이 사업부서별로 이루어지고 있는 등 정황이 명백한데도 말이다. 창원공장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 창원비정규직노조지회를 중심으로 투쟁이 확대되지만, 2006년 이성재 집행부의 GM대우 노동조합은 이 투쟁을 경원시하거나, ‘공장을 볼모로 한 투쟁 중단’을 요구하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의지를 꺾는데 여념이 없었다. GM대우의 자구책 ― 생산성 15% 향상 2001년2002년2003년2004년2005년2006년매출액(백만달러)177,260177,867185,837195,351194,655207,349매출댓수(천대)807384118098909890519181순이익(백만달러)6011,7363,8222,701-10,417-1,978이윤마진(%)0.31.11.51.4-5.3-1 <표1. GM의 매출 및 순익상황> <표1>에서 보는 것처럼 GM의 매출은 증가했지만 순이익은 점점 하락하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이윤율 하락경향을 GM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2005년 11월 GM은 (이제는 M&A가 아니라) 경영정상화를 위한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는데. 핵심은 70억 달러의 경비 절감을 위해 2009년까지 5개 조립공장의 폐쇄하고, 3만 명의 종업원을 구조조정하겠다는 것이다. 구 분2002년2003년2004년2005년2006년매 출 액(백만원)614,296 4,276,923 6,051,631 7,531,273 9,604,122 영업 이익(백만원)-96,300 -255,098 -396,165 -28,843 335,642 당기순이익(백만원)-130,559 -222,635 -172,844 65,464 592,757 <표2. GM대우의 매출 및 순익상황> 한편 <표2>에서 보는 것처럼 GM대우의 순익은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데, 이는 GM의 순익경향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국내 자동차산업 순익 경향과도 다르다. 이는 GM대우의 위상이 GM전체 내에서 매우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데 (GM대우는 지금 현재 GM 전체 차량 생산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GM대우가 GM의 글로벌 생산 기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GM대우의 역할 증대는 기술혁신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노동강도의 강화(내포적 노동시간의 증대)에 기반을 둔 것이다. 사실 이는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해보려는 개별 기업의 생존전략 중 하나이기도 한데, 린-생산체계의 도입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GM대우는 도산위기에 처했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위상마저도 급격히 추락했기 때문에 이것이 재도입-강화되는데 있어 GM대우는 다른 어느 공장보다 유리했던 것이다. 물론 GM대우는 늘어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의 자동차 시장 전초기지로서 지리적 잇점도 있었고, 심지어는 김대중정권이 강력한 노동조합 탄압에다 ‘법인세·소득세·특소세 면제’라는 엄청난 특혜까지 보태주었기 때문에 GM대우의 위상이 강화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GM대우가 GM의 동아시아 R&D거점 기지로서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는데, 한국은 유가 상승과 달러환율 하락이라는 기회비용 상승요소가 늘 상존하기 때문이다. 국제유가는 GM대우 신설법인이 설립되었던 2002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뛰었고 달러환율은 25% 이상 하락했다. 매출액의 80%이상을 외화로 거래하지만, 비용의 87%는 원화로 지급해야 하는 GM대우에게 원화가치 상승은 비용상승의 커다란 압박요인이었다. 결국 대대적인 비용감축 계획을 내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2007년 GM대우가 내내 강조해온 ‘생산성 15% 향상’ 계획이다. 비용감축을 목표로 하는 생산성 향상 계획은 반드시 노동강도의 강화와 인원감축(/노동시간 감소)을 동반하게 된다. 기술투자는 단기적인 비용상승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획기적인 기술개선이 아닌 한 장기적으로 이윤율의 저하경향을 가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업은 이를 회피하려 한다. 따라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노동강도 강화다. 그에 따라 린생산체계가 끊임없이 탐구되어 변형된 형태로 재도입·강화되고, 다양한 방식의 인원감축안이 강구된다. 2007년 GM대우 부평공장에서 현장을 들썩였던 낭비제거혁신활동, 분임조 활동 등등이 노동강도 강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3조 2교대, 야간근무 정상퇴근 등은 인원감축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사실 하루 노동시간 감축은 개별 노동자의 소득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루 8시간 노동만으로는 소득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도 이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동조합의 저항에 부딪힌 GM대우는 이를 철회하였다. 하지만 무력화된 노동조합과 린생산체계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약한 상황에서 또다른 린생산체계의 도입―노동강도 강화에는 정규직 노동자들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같은 ‘생산성 15% 향상 계획’이 부평공장 내 노동자의 분할선을 타고 들어오는 경우다. 정규직 노동자들과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라는 분할선 말이다. 외주화(/진성도급화)와 노동강도의 강화 사실 광범위한 외주화는 린생산체계에 고유한 것으로,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상층과 저임금·열악한 노동조건이라는 하층 노동자가 각각 분리구축되어 생산연쇄 체계를 구축할 때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는 자동차산업의 플랫폼화, 모듈화, 적기생산(JIT : Just In Time)―직서열 납입방식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의 도입을 요구하고 동시에 노동자들 사이의 강한 분할선(남성/여성, 자국인/타국인, 주민/이주민, 백인/흑인, 그리고 정규직/비정규직)을 전제한다. 즉 노동조합의 쇠퇴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생산연쇄체계가 구축되어서 노동조합이 쇠퇴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쇠퇴했기 때문에 생산연쇄체계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외주화는 그 자체로 자동차산업에서 획기적인 경영기법이 될 수는 없는데, 외주화는 조직비용이 줄지 모르지만 유통비용이 늘어날 수 있고, 더더구나 하청업체의 이익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계라는 차원에서 보면 혁신적인 경영기법은 아니다. 외주화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외주화를 통해서(혹은 반대로든) 인원절감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여부다. GM대우 혹은 우리나라의 모든 자동차산업에서처럼 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선이 강한 상태에서 회사가 비용절감 노력을 강구하게 될 때, 회사가 외주화 전략에 눈을 뜨는 것은 인원절감의 효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외주화과정에서 상당량의 작업이 기업주에 의해서건 종신고용을 보장받으려는 노동자에 의해서건 생산연쇄의 아래쪽으로 이동한다. 하청업체는 생산관리 뿐만 아니라 인력관리의 비용까지도 부담하게 되는데, 이 때 수익률이 급격히 낮아진 하청업체는 그것을 또 다른 2차 하청업체에게 그리고 자신이 고용한 (하청)노동자에게 이를 전가한다. 외주화된 업체의 노동조건이 극악해지고, 외주화 과정에서 완전히 고용승계가 안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국 외주화 과정을 통해서 인원절감의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또 다른 효과도 얻어낼 수 있는데, 외주화의 압력 앞에서 회사의 경영위기 담론에 동화된 노동자들은 GM대우의 신차 수주를 위한 입찰 노력을 가속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에 대한 노동강도 강화로 귀결되고 말 생산혁신의 아이디어를 스스로 ‘제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하이GM을 최대경쟁상대로 규정지어 놓고는 내수시장 진작과 기업이미지 제고, 품질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안을 내놓겠다고 호언하는 GM대우 노동조합이나, 너나 할 것 없이 생산혁신을 위한 각종 제안을 늘어놓는 노동자들이 맞이하게 될 것은 노동강도 강화와 함께 노동자의 현장 민주주의, 자주성의 침해일 뿐이다. 2007년 이남목 위원장이 이끄는 GM대우노동조합은 ‘생산성 15% 향상’이라는 문제에 직면해서 이를 부서협의회 차원으로 넘겨버렸고, 부서협의회에서는 몇몇 소위원들이 저항을 하긴 하였지만 전환배치와 외주화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해왔던 작업장으로 전환배치된 노동자는 더 강한 노동강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모듈화가 진척됨에 따라 더욱 무거워진 부품을 조립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고된 일자리를 참고 작업장을 지키도록 해야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이 들에 대해서만큼은 노동력의 자연감소 속도를 조절한다는 의미에서 약간 더 많은 고임금과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을 보장해 주긴 하겠지만 이는 악순환의 또 다른 축을 의미할 뿐이다. 현 시기 GM대우노동조합 목표의 불가능성 2007년 임단협시기 노동조합은 물론 상당수의 현장조직들이 자동차 생산 물량확보가 시급하다며 아우성을 쳤다. 현재 자동차산업의 위기를 과잉생산으로 진단하고 있는 이들에게 ‘물량확보’는 (다소 이기적이긴 하지만) 유력한 대안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량확보로 고용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발상은 완전히 자기 부정에 가까운 발상에 다름 아닌데, 왜냐하면 현 시기 자동차 물량확보의 전제는 무엇보다도 ‘비용감소’이고 이 비용감소의 전제조건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인원감축(/노동시간 감소)’이기 때문이다. 설사 노동자 내부의 분할선을 타고 흐르는 외주화에 눈을 감는다고 해서 자신이 예외가 될 수는 없는데, 강화된 노동강도를 버티지 못해 일찍 정년(/퇴직)하던가, 점점 낮아지는(혹은 제자리를 걷고 있는) 시급 상황―이는 저임금 노동자들과의 격차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더욱 강화된다―에서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장시간 근로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선이 강화되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 자체가 부정된다는 점이다. 악순환의 첫 발자국을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스스로가 내딛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경영참가와 함께 현장권력을 강화한다는 현 노동조합 집행부의 발상이 실현 불가능한 미망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2007년 전미자동차노조(UAW)의 파업투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UAW는 공장 별 새 모델 투입을 요구하며, 공장폐쇄를 중단할 것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형식적인 이틀 파업) 이 과정에서 물량공급, 공장폐쇄 중단, 일부 외주화공정의 공장 안 진입 등 몇 가지 성과(?)가 있었지만, (핵심)생산라인-(비핵심)직종 임금 차등 지급, 신입사원부터 적용될 임금 2중 임금제(Two-tier), 3년간 기본급 동결 일괄 성과급으로 지급 등을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신규) 노동자의 노동력 유연화에 동의하고, 노동자 내의 임금격차를 구조화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회사 측이 간절히 요구했던 비용절감 노력에 화답한 꼴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지금 GM대우 노동조합은 미국 내에서 이처럼 물량이 동결된 것에 한편으로는 (고용을 지켰다는 점에서)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물량이 더 이상 한국-동아시아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안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이 상태로는 GM대우 노동조합이 선택할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GM대우 노동자운동이 한걸음 더 나가기 위해서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제도를 폐지하거나 그것을 전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내하청(/비정규직)을 고착화하는 제도를 문제 삼고, 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선 감축이 전제인 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 비정규직 철폐를 전제로 임금인상투쟁, 외주화저지투쟁, 노동강도 저지 투쟁(특히 린생산체계 도입에 대한 규탄)을 벌여나가야 하며, 중국 노동자와의 연대의식을 전제로 초민족 자본의 실체―GM대우의 초과착취와 온갖 특혜(법인세 면제, 노동조합 활동을 원천적으로 구성못하게 하는 제도)를 드러내고, GM출신의 CEO와 ISP가 얼마나 많은 소득을 갈취하는지(이들은 수억에 이르는 연봉을 받으면서 소득세 한 푼 내지 않고 부를 향유하고 있다), GM은 GM대우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지(GM이 얻게되는 이득은 영업이익만이 아니다. 기술 라이센스, 자동차 상표 라이센스, 주식을 통한 자본 가치 증식 등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GM대우에서의 이익을 GM으로 집중 시키고 있다)를 폭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현장통제에 대한 권한이 노동자와 노동조합에게 있으며, (상하이GM과 GM대우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해외초민족 자본과 노동자(정규직과 비정규직) 이라는 대립구도가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와의 연대를 전제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계급대표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운동의 주체로 세워낼 수 있는 투쟁계획이 입안해야 한다. GM이라는 초민족 자본을 상대로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투쟁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선두에 서야 하고, 그에 기반을 두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의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비정규직 제도를 고착하고, 초민족 자본의 초과착취 및 수탈을 제도적으로 보증해주는 국가에 대한 비판과 의식적인 단절을 통해서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의 공동전선을 가늠해야 한다.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패배라는 강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가능하려면 발상의 전면적인 전화가 필요하다.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고립무원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이 투쟁에 수많은 GM대우의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프랑스 사회운동 앞에 놓인 난제 유럽의 정치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1995년 11월~12월에 일어난 대대적인 공공부문 파업 이후 프랑스가 신자유주의에 맞선 저항 전선의 선두에 서 있다고 여겼다. 2006년 최초고용계약(CPE) 노동시장 개혁에 맞선 성공적인 투쟁은 물론이거니와 2005년의 신자유주의적 유럽 헌법 국민투표 부결과 경찰 폭력에 맞선 이민자 청년들의 봉기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의 주요 사례들은 최근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반대의 강도를 확인시켜 주었다.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이러한 순환을 마감한 후 2007년 5월 대선에서 우파 후보 니콜라 사르코지가 당선되자 프랑스 좌파 정치세력 및 사회운동은 크게 낙심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적 대응 사르코지의 당선은 의심할 나위 없이 지난 몇 년 동안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에 동참해왔던 수백만 민중들의 희망에 몰아친 광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승리는 모호하다. 사르코지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사회적 변화에 대한 요구를 활용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심화하고자 했다. 그는 활동가들에게는 임금인상을, 권위주의적 국가에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프랑스 경제를 보호할 것을 동시에 약속했다. 그는 경제적 개입주의와 보호주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조치와 전통적인 권위주의를 혼합한 정치 강령을 토대로 당선되었다. 프랑스 내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조류와 전통적 권위주의 우익의 추종 세력 모두에 호소하는 사르코지의 기회주의적 캐치올(catch-all) 전략은 프랑스 좌파가 방향을 상실하고 분열되는 상황에서 성공적이었다. 집권 좌파는 오른쪽(온정적인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을 향해 표류하기 시작했고, 급진좌파 정당들은 각기 다른 조직으로 갈라져 협소한 정당적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단일 후보를 배출할 수 없었다. 프랑스 사회모델의 폐기 사르코지의 근본적인 목표는 전후 시대의 프랑스 사회모델을 떠받쳤던 축들(노동법, 사회보장, 연금체계, 적절한 재분배를 노리는 재정정책)을 폐기하는 것이다. 사르코지 정부의 정치적 우선 과제는 이러한 목표를 반영한다. 집권한 지 겨우 열 달 만에 사르코지 정부는 곤란할 만큼 눈에 띄는 기록을 남겼다. 이 정부의 우선적인 정치 행위 중 하나는 가장 부유한 집단에는 5십억 유로나 되는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한 반면, 의료 서비스 및 의약품에 대한 환급율은 인하한 것이다. 사르코지는 또한 우익 유권자들에게 파업권을 제한하고 노동법을 일소할 것을 거듭 약속했다. 몇 달 후, 사르코지 정부는 고용과 해고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고자 노동력을 더욱 유연화하기 위한 노동조합과 사용자 간의 교섭을 지지했다. 그러나 사르코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방향은 지난 몇 달 동안 중대한 사회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2007년 여름, 대학 간 경쟁을 부추기고 교수들의 지위를 불안정화하는 한 편 사적 자금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방향의 국공립 대학 체계 개혁이 실시되었다. 2007년 가을, 학생들과 이보다 적은 수의 교수들 및 연구자들이 프랑스의 수많은 대학에서 이러한 개혁에 맞선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패배하고 말았다. 공무원 역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하루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1995년과 같이 지속적인 투쟁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이러한 투쟁들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사회운동들은 투쟁 한번 해보지 못하고 거듭 패배해버릴 위험성, 즉 최악의 시나리오를 면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스의 노사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고 조직된 노동자들을 완전히 약화시키려는 우파들의 계획에 직면한 상황에서, 프랑스 좌파 및 사회운동들 사이의 분위기는 참패로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기보다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편에 가깝다. 이는 2007년 11월 철도노동자 파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평조합원들이 투쟁을 주도하다 사르코지는 강력한 우파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선거운동 기간 동안 철도 및 지하철 노동자들의 연금체계를 개혁(퇴직 연령을 높이고 수당을 축소)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철도노동자는 프랑스 노동 계급 중에서도 가장 잘 조직되어 있고 전투적인 부위의 핵심이라는 상징을 지니고 있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보시켰던 1995년 11월~12월의 대규모 철도 파업 이후 프랑스 우파들은 철도노동자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007년 11월 철도노동자들은 높은 조직력은 물론 상당한 활력과 투쟁 의지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2007년 11월 철도 노동자 파업은 9일 동안 지속되었고 철도 수송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정부는 물론 파업을 자제하고 즉각 교섭에 돌입하려고 했던 주요 노총조차도 투쟁이 이토록 강력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주요 노총인 <프랑스 노동총동맹>(Conf d ration g n rale du Travail, CGT, 공산당 계열)은 작업장 행동으로 의미 있는 압력을 행사하기도 전에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놓고 협상에 돌입하려고 했다. 소규모의 쉬드(SUD, 연대·단결·민주) 노조가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오랜 기간 지속되는 파업을 옹호하는 한편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하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주요 노총의 타협주의적 태도는 파업 기간 동안 매일 열린 철도·지하철 파업노동자 총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총회는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재결집하도록 했고, 경험이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와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들이 한데 어우러지도록 했다. 평조합원 및 파업에 참여한 많은 비조합원들은 정부로 하여금 개혁안을 철회시키기 위해 노동조합 지도부와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파업을 지속하는 데에 찬성표를 던졌다. 파업 참가율이 첫 날 61%에서 점차 감소하여 9일째 되는 날이 되어서는 14%에 이르렀지만, 파업 노동자의 핵심은 매우 높은 단결력과 결의를 보였다. 파업 참가자 중 활동가 층 사이에 실망하는 기운이 생기면서 결국 총회는 파업을 중단했고 노조는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협상은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철도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지도 모르지만, 개혁안을 중대하게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파업에 대한 외부적 지지가 별로 없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파업이 9일 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성공이다. 언론은 파업을 비난하는 선전에 앞장섰는데, 이들은 파업으로 대중교통에 혼란이 발생했다고 강조하는 한편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는 통근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파업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해댔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우파 세력들이 일치단결하여 자신들만의 특수한 이익을 방어하는 특권층이라고 파업노동자들을 비난했다. 사회당은 단지 정부가 선택한 방법이 거칠다고 비판했지만 정부 개혁안의 내용은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공백: 반대세력 없는 정치? 철도 노동자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노총들이 이렇듯 소심한 태도를 보이고 파업 노동자와의 연대투쟁을 조직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자, 이들이 과연 사르코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울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지금까지는 노조 지도부의 태도로는 분명히 사르코지 정부에 맞선 투쟁을 이끄는 역할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대선에서 좌파 세력이 패배한 이후 생겨난 정치적 공백을 메우려는 의지가 없다. 최근의 몇몇 투쟁에서 규모가 작은 SUD 노조는 프랑스 노동운동의 혁명적 노조주의의 유산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주었던 전투적 노조주의로의 강력한 헌신은 CGT의 우려스러운 변화를 상쇄하지는 못한다. 물론 CGT 내에도 여전히 헌신적이고 전투적인 활동가들이 있다. 향후 몇 달 동안 CGT 내에서 전략적 재편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리고 지도부가 내부 민주주의를 확실히 보장하지 않으려 한다면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르코지가 당선된 이후 좌파 세력 사이에서는 혼란과 운명론, 수동성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지금까지도 사회당 지도부 사이에서는 이데올로기적 분열과 종파적 분열이 심각한 수준이다. 사회당 내 여러 조류들은 사르코지의 당선을 구실삼아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더욱 우경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당 지도부가 취하는 사르코지에 대한 비판은 신자유주의 정책 이행의 방법과 개인적인 통치스타일에 초점을 둘 뿐 정견 자체는 문제 삼지 않는다. 동시에, 대선시기부터 벌어진 공산당,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대안세계화 네트워크 활동가, 녹색당 좌파 사이의 분열의 후과는 급진좌파 사이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기층, 평조합원 활동가들은 2008년 3월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단일 후보를 배출하려는 등 단일한 행동을 위한 강력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는 급진좌파가 제도 정치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LCR은 급진좌파 중 가장 역동적인 요소로 보이는데, 이는 지난 대선에서 후보로 배출한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4%를 득표하는 한편 언론을 통한 인지도를 누린 덕이다. 몇몇 사람들은 LCR이 발표한 새로운 반자본주의 정당 건설 계획이 급진좌파의 단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LCR 지도부가 광범위하고 다양한 세력을 포괄하는 정당을 만들려는 의지가 있는지는 현재로써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사르코지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노동자와 퇴직자들의 '구매력'을 제고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다. 에너지 요금, 식품 가격, 주거비용이 상승하는 가운데 이 공약은 역으로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노동 계급, 그리고 심지어 사르코지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퇴직자들 사이에서도 생계비 인상으로 인한 불만족은 점차 쌓여가고 있다. 대통령의 호화로운 생활, 부자 친구들의 비용으로 즐기는 사치스러운 휴가, 갑부의 딸과의 결혼 또한 광범위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철도 파업 및 다른 쟁의행위를 통해 드러난 현저한 불만과 분노가 노동계급의 다른 부위에도 존재하는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현재 사적 부문 여러 기업에서 진행 중인 임금협상은 또 다른 투쟁의 불씨가 될 지도 모른다. 2008년 2월에도 벌써 대형 할인 매장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파업이 전개되었다. 이는 협상력이 낮고 여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문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모든 노동자의 퇴직 연력을 높이는 총체적인 연금 개혁이 예정되어 있다. 이는 분명 사르코지의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혼합물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프랑스 노동계급의 집단적인 투쟁과 기층 동원력의 예측 불가능한 폭발력을 과소평가한다면 이는 사르코지의 오산이다.
[%=사진1%]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전노협 청산 과정의 유사성 최근 민주노동당의 분당으로 운동 진영이 뜨겁다. 하지만 분당이라는 무게감에 비해 논쟁의 양상은 그리 진지하지 않은 것 같다. '종북주의' 논쟁을 통해 당을 뛰쳐나온 진보신당 세력은 기간 민주노동당 정치 활동에 대한 어떤 평가도 없이 총선 대응이라는 일정만을 가지고 창당에 매진하고 있고, 당을 사수하며 혁신하겠다는 자주파는 심상정 비대위가 해산하자마자 노사정위 참여와 간부 비리 건으로 민주노총을 위기로 내몬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범개혁진영연합을 주창하며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부정해온 정성희 소통과 혁신 연구소 소장을 불러들였다. 한편 분당 사태 속에 비정규직 철폐라는 노동자운동의 사활적 과제를 내걸고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민중운동 진영에서 방치되고 있다. 이랜드 투쟁을 만들었고, 또한 승리로 이끌기 위해 연대해 왔던 많은 활동가들은 탈당 이후 방황하거나 신당 창당 준비에 여념이 없고,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겠다는 진보정당들은 한국 정치의 중심지 여의도 한복판에서 지배계급의 심장부를 겨누고 투쟁하고 있는 코스콤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은 이러한 운동진영의 분열과 대중운동에 대한 방기 그리고 대중운동의 개량화가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최근의 사태를 바라보는 활동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준다. 저자에 따르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해산과 민주노총 건설 과정은 노동운동의 변혁지향성을 제거하고 체제 타협적 노동운동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기획이었다. 개량주의적 운동 세력이 한국노동당을 건설하면서 공공연히 변혁지향성 포기를 선동하고,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건설하면서 변혁적 노동단체들을 의도적으로 노동조합과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전자는 좌파 정파들이 자신들의 노동운동 내 지분 확보를 위해 초정파적 공동투쟁체인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을 해체시키고, 전노협을 대중적 투쟁과 논쟁 속에서가 아니라 상층 중심의 정파간 이합집산 속에서 해산시켜 버렸다고 주장한다. 개량주의 운동 세력의 기획과 좌파 정파들의 이합집산이 변혁 지향적 대중운동, 지역 중심의 대중운동을 만들어 온 "평등 사회를 앞당기는" 전노협을 청산시키고, 사회적 타협과 상층 중심의 교섭을 내세운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노협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88-89년 지역총파업 투쟁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 1월 22일 노동자운동의 명실상부한 중심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건설과 동시에 5개월간 100여 명이 구속되고 또 100여명이 수배되며, 총 18건의 공권력 투입이 벌어지는 탄압을 받았지만, 1990년, 1991년 전국총파업투쟁과 1991년 박창수 열사 투쟁을 거치며 조직을 사수하였다. 특히 1991년 5월의 박창수 열사 투쟁은 50만이 넘는 노동자가 전국적으로 가두 시위 및 파업을 벌이는 위력적 투쟁으로 발전하며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노협의 조직적 성장을 이끌어내었다. 저자는 전노협의 위기가 정권의 탄압보다도 내부 분열과 일부 정파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개량화 전략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90년 11월 전국노운협의 한 축을 이루던 PD 계열의 정파조직들이 비합법 전위당-합법 민중당-합법 대중조직이라는 형태로 노동운동을 재편해야 한다며 노운협을 탈퇴했다. 저자는 당시 전국노운협이 전노협 건설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점, 스스로를 정파를 초월한 상설 공동투쟁체로 규정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행동은 결국 동일 정파들만의 전국조직을 건설하겠다는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분열이 이후 전노협의 투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1990년의 탄압으로 인해 대부분의 전노협 간부들이 구속 수배 상태에 있어 집행 공백이 컸는데도 1991년 상반기 임단투에서 노동단체간의 정파 갈등 문제로 인해 노동단체를 배제한 공동투쟁본부를 꾸릴 수밖에 없게 되었고, 1991년 박창수 열사 투쟁 와중에서도 제 정파 조직이 전국노운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당시 투쟁을 주도했던 활동가들에 대한 문책에 열을 올렸다는 것이다. 1991년의 투쟁을 추스르고 조직 확대를 도모하기보다는 전노협에 대한 정파적 영향력 확대에 주력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들 정파들은 1991년 12월에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혹은 노동자 정당추진위원회(노정추)를 결성하고 1992년 2월 민중당과 통합하여 총선을 치루지만, 당은 2% 득표를 넘지 못하고 법적 해산을 당했다. 전자는 이러한 정당 건설 운동이 대중운동에 기여하기보다는 전노협의 조직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전노협의 상당수 중앙위원들은 노정추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조합원들의 경우 여전히 한국노동당 지지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노동자 후보들끼리 지역구를 둘러싸고 정쟁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조직분열은 몇몇 지역에서는 아주 심각하여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에서는 이후 몇 년간 공투본을 꾸리지도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노동당의 출범과 운동이 노동운동의 변혁성을 포기하고 합법 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향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주대환 등 노정추 일부 지도부가 1991년 12월 안기부에 비합법 투쟁과 혁명을 포기한다는 전향서를 제출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이후 1991년 말부터 민중당, 노정추의 운동은 적극적으로 노동운동 위기론을 조직했다. 그 핵심 내용은 전노협 노선의 폐기 혹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을 전노협에서 비생산직 노조로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과 노동자 정치운동(정당운동)에 대한 강조 혹은 의회주의에 대한 강조였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당시의 상황은 현재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새로운 운동의 시작부터가 대중운동의 확대보다는 축소를 향한다는 점이 그렇다. 전노협은 1990년 정권의 탄압으로 조합원의 1/3이 전노협을 탈퇴하는 등 위기를 맞았지만 1991년 박창수 열사 투쟁을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전노협에 참관 교류하는 노조들이 두 배 이상 늘었고, 1992년 하반기에는 대공장노조에서 '민주파'가 전노협 가입을 내걸고 당선되는 등 대중운동 속에서 전노협은 강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능성은 공동투쟁체의 분열과 의회주의적 대중정당, 합법 노동운동이라는 개량주의적 운동 속에서 질식하였다. 2008년 역시 비슷한데, 비정규직 문제를 전사회적으로 알려내고 전국적 연대를 이끌어낸 이랜드-뉴코아 투쟁이 200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속에서 방치된 것이 그것이다. 민중운동 진영의 관심은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운동, 범시민적지지, 진보정당의 지역정치와 연대 등 노동자운동이 혁신의 의제로 던진 대부분을 실천해 오던 이랜드-뉴코아 투쟁에서, 갑작스레 종북주의 논쟁으로 대표되는 정파적 대립으로 이동하였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민주노동당이 앞장서서 만들어 온 이 투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을 혁신해야 한다며 분당을 주장하는 일부 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을 투쟁정당에서 정책정당, 의회중심 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분열을 주도한 세력이 당시 전노협 당시와 비슷하다는 점 또한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당시 전국노운협을 탈퇴하고, 한국노동당추진위를 결성하며 개량적 노동운동 위기론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주대환 등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활동가들이었다. 2008년 노정추의 계보를 이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의 조승수 등은 종북주의 논쟁을 일으키며 분당 논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분파투쟁을 넘어선 변혁이념 혁신의 과제 저자는 당시 전노협 청산 과정의 주된 이유를 변혁적 지향을 가진 노동운동을 포기한 세력에서 찾는다. "한국노동당이 안기부에 투항하면서 발표한 탄원서 내용의 핵심은 '변혁노선을 포기하고 합법 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러한 합법 개량주의 세력과 자본과 정권의 양면 공격 속에서, 사상-이념적으로 동요와 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변혁지향성을 포기하고 체제 내 운동으로 포섭되고 만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대중조직의 변혁성이 사라진 문제를 몇 몇 세력의 문제로만 치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당시와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를 지켜보면 더욱 그러하다. 역사에서 체제 타협적 운동과 이로 인한 분열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은 '변혁 이념' 자체에도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변혁 지향적 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지지받고, 더욱 큰 대중운동으로 발전한다면 당연히 체제 타협적 운동은 대중적 분열이 아니라 소수 세력의 준동에 그쳤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가 짧게 언급하고 있는 1990년 소련 동구권의 몰락은 운동가들에게 사민주의로의 전향인가 혁명성의 유지인가라는 질문 이상이었다. 동구권 붕괴라는 사회주의 역사가 던지는 질문들, 국가 소멸이 아닌 국가를 강화한 당, 노동자 국제주의를 포기한 민족주의,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문제, 마르크스주의가 대처할 수 없었던 성적 차이, 지적 차이, 생태주의 등의 문제, 대중들의 주체화 문제 등 에 대해 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답을 내리고, 그것을 대중적 운동으로 만들어낼 만한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변혁적 운동의 축소와 체제 타협적 운동의 확장은 어쩔 수 없는 객관적 조건이었다 할 것이다. 다만 저자가 책의 결론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대중투쟁을 통한 조직건설과 혁신이 변혁지향적 노동운동의 기본이다. 따라서 상층 정치 세력간 분파 투쟁의 승패 이전에 어떠한 대중투쟁, 어떠한 이념으로 조직된 대중운동인가에 대한 답을 끝내 내리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전노협의 청산과 민주노총 건설로 상징되는 변혁 지향적 노동운동 패배의 중요한 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변혁 이념의 혁신이 대중적으로 진행되며 대중운동화하지 못한 결과는 오늘날 더욱 참담한데, 어찌되었건 수 많은 노동자들의 피 땀 속에서 건설된 민주노동당이 '종북주의 논쟁'이라는 정치 음모적 논쟁 속에서 분당된 것이 그것이다. 그나마 전노협이 청산되어가던 과정은 많은 숨은 쟁점이 있지만 그래도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 선 민주노총 건설 후 산별건설, 선 산별건설 후 민주노총 건설 등의 조직형식 논쟁의 외양이라도 가졌다. 하지만, 작금의 민중운동 분열은 진보정당의 이념, 지역정치, 의회활동, 대중투쟁에 대한 평가 하나 없는 오직 정치 세력간 원한에 근거하고 있다. 탈당의 행렬 속에 당원 간 원한과 냉소를 생각해보면 이것을 단순히 몇 몇 정치 세력의 작전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와 노동자운동의 과제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전노협의 청산 과정에서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의 지역운동 성과가 청산되고 지역 조직이 총연맹의 지침을 받는 행정적 조직으로 수렴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상층 중심의 조직이 아니라 조합원 중심의 조직이 되려면, 일상적으로 조합원들이 생활하고 연대하며 투쟁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공간을 토대로 해서 전국연대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전략인 노동에 대한 분할과 배제를 넘어서는 계급적 단결을 만드는 것은 오직 지역 연대를 통한 일상적 연대 의식의 고취와 공동체의 구축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지역 대중운동의 쇠퇴 과정의 배경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도 있었다. 1980년대 초반의 3저 호황 효과가 사라진 1990년대 이후 임극 격차 확대 등의 노동 분할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노동부 자료에 의하면 500인 이상 사업장에 비해 500인 미만의 중소사업장 임금은 1987년 90% 수준에서 1992년 70% 수준까지 하락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부터 전노협 건설까지 남한의 노조는 기업별 노조이긴 했지만 작업 조건, 생활조건의 동일함에서 계급적 동일성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이러한 동일한 지반이 지속적으로 붕괴한다. 또한 산업 구성이 점차 제조업에서 금융, 서비스업으로 이동해 가며, 기존의 노동자 연대 지역이 공동화되어 갔다. 전노협 백서에 의하면 전노협 조합원 수의 감소는 주로 중소 공장의 휴업 폐업으로 인한 것이었다. IMF 이후 노동자간 분절은 더욱 심해졌다. 원청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격차는 임금에서부터 고용까지 매우 크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영세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같은 계급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러한 노동자 간 분절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미래가 없다는 것은 좌우파를 떠나서 모두가 동의하는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아직까지 뚜렷한 해답은 없는 상황이다. 다만 우리는 저자가 전노협 청산 과정에서 평가하고 있는 몇 가지 지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저자는 전노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전노협이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대공장 노동조합들을 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변혁적 노동자운동을 대표하는 전노협을 전노협 내부 활동가들부터 버린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데, 전노협이 업종회의, 대공장노동조합을 모두 전노협으로 가입시키지는 못했더라도 전체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급진적인 분파로 남아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3년 전노협 35차 중앙위원회에서 전노협을 전노대의 하급 기관으로 결정하며 전노협의 전망을 포기한 이후 전노협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후 전노협 운동의 성과는 사장된 채 업종회의, 대공장연대회의의 운동을 기반으로 체제 타협적 노동운동이 민주노총을 만들어 내었다. 현 시기 노동자 운동의 혁신 역시 마찬가지로 산별노조라는 조직 형식에 대한 집중보다는 비타협적으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운동들을 조직하는 것, 그 운동들이 노동자운동을 대표할 수 있도록 모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오늘날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민주노총-산별노조라는 조직 프레임에 이들을 가두기보다는,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을 혁신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표방하는 진보정당 역시 듣기 좋은 말로 스스로를 포장할 것이 아니라 이들 새로운 운동과 주체들이 정치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스스로의 조직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포섭과 배제 속에 지역 대중운동 역시 어떠한 노동자들이, 어떠한 세력이 대중운동의 중심에 서있는가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나가며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은 전노협의 발전적 해체와 업종회의, 대공장 노동조합의 합류를 통해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는 노동운동사의 주류적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변혁지향적 노동운동이 청산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서 민주노총 운동이 그 시작에서부터 문제가 있었고, 최근의 대공장 중심의 노동조합, 코퍼러티즘적 노동운동, 지역 사회에서 괴리된 노동운동 등의 문제가 민주노총에 대한 근본적 평가 없이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노협 운동이 청산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혁지향적 대중운동, 지역연대운동이 유실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최근 분당 사태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다. 물론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운동사를 정파 간 분파투쟁에 집중하여 서술하면서 노동운동 쇠퇴와 개량화의 저변에 있는 변혁이념의 문제, 대중 주체화 문제, 자본주의 변화에 대한 분석 등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점은 한계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는 지금 노동운동을 혁신하고자 분투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앞에서 비판하였듯이 '종북주의 논쟁', '대중투쟁 없는 창당 일정' 등으로 그리 대중운동에 기여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통일지상주의 운동, 민족주의 운동, 체제 타협적 노동자운동과 더 이상 한 배에 있을 수 없다는 각오로 새로운 정당운동을 시작하고 있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토론해보고 싶은 내용들이다.
『사회운동』독자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사실 좀 부끄러웠다. 잘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 뒀던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맘의 여유도 생기고 매주 화요일 마다 겨울사회운동 세미나에 나오면서 약간의 자신감(?)을 찾아서일까, 부끄러운 맘을 살짝 감추고 흔쾌히 쓰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찬찬히 읽어 보았다. 「사회화와 노동」을 통해 이미 읽었던 글들도 있어서 다소 긴장감이 떨어졌지만, 유럽 활동가 두 명의 인터뷰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들의 인터뷰가 앞으로 말할 두 가지 문제제기에 어떤 자극제가 된 듯하다. 그냥 좋았다, 아쉬웠다라고 쓰기엔 뭔가 부족하여 제목도 긴장감 있게 문제제기라 했지만 관심을 끌기 위한 표현이라 생각해 주길 바라며, 이들 인터뷰를 읽으며 생각한 두 가지 정도를 적어 보도록 하겠다. '제도정당 vs 사회운동'의 관념 이 대립구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전부터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관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대상을 보고 의미를 연관시키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누구나 제도정당하면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을 연상한다. 그리고 이와 다른 비제도적인 사회운동이라 하면 NGO단체나 노조를 연상한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구별은 선거를 통한 의회주의 전략과 전술에 관한 관점이나 행동의 차이일 뿐 일반적인 운동의 대상에서 서로 별개의 영역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도권으로의 편입을 경계한다는 논리와 비제도적 투쟁이라는 관념 때문에 사회운동을 시민사회단체운동으로 자꾸 축소시켜 버리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는 46쪽 "정당과 사회운동의 고유한 역할 및 공동의 작업을 밝히는 과정의 일환일 것이다" 라는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당의 사회운동적 경향을 강화해야 한다는 우리의 논리에 비추어 정당의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이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정당과 사회운동의 교집합을 만들기 위한 '정당-사회운동 연대론' 혹은 '역할 분담론'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진보신당이 표방한 '보다 녹색으로 보다 적색으로'이라는 운동노선과 겉으론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도 사회운동적 의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남는 건 의회주의 노선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점만 남는데, 이에 대해서도 당연히 의회주의 전술을 통해 이러한 이념적 지향을 정당운동으로 풀어간다고 밝히면서 전략공천을 통해 사회운동과의 연대지점을 넓혀가겠다고 이들은 말한다. 결국 우리의 주장은 허공에 대해 지르는 메아리로 밖에 남지 않는다. 이러한 순환논리는 민주노동당에 들어간 소위 '좌파' ('좌파'라는 일반적 표현이 적절하지 않지만 어떻게 지칭할지 몰라 이렇게 적는다)들과의 논쟁에서 계속 반복되었던 일이다. 정당운동의 사회운동적 강화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할 좌파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반대로 사회운동이 기존 제도권의 정치세력들과 다르게 제도적 운동의 확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전에 그토록 외쳤던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가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이라는 의회주의 정당으로 귀결되고 그 운동의 결과가 지난 대선의 참담한 패배라 한다면, 사회운동의 제도적 운동 실험, 10여 년의 전체 과정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보다 발본적인 평가이다. 이를 단순하게 정당운동의 평가만으로 한정한다면, 그리고 그 운동의 추진세력들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면, 사회운동이 제도운동과 동떨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운동에 대한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자신을 더욱더 '주변부 시민사회단체운동' 으로 가두어 버리는 우를 범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의 편향은 두 가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등장하는데, 의회주의에 종속되지 않는 투쟁정당 건설이라는 '계급정당 건설론'과 현장에 근거하지 않은 운동은 의미가 없다는 '현장근거지론'이다. 다 옳은 말이고 누가 나서서 뜯어 말리지도 않는다. 실제 그러한 운동을 하면서 평가하고 혁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제도적인 운동과 다른, 제도화된 현 체제에 대항하는 '혁명주의적 관념'을 자신에게 투영하여 특권화 한다든가 그리하여 결국 주변화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제도화된 체제로 부터 '때 묻지 않은' 운동역량을 보존하고 있다가 중심이 몰락한 빈자리를 치고 들어가 장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진영론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운동적 정당론이 '우정당-좌전선'이라는 역할분담론으로 왜곡되지 않길 바라며 첫 번째 문제제기를 마친다. '노조운동 vs 사회운동'의 관념 앞서 말한 사회운동에는 노조운동이 이미 다 포괄된 개념이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정당-사회운동의 관계를 말할 때 노조운동으로 표상되는 노동자운동은 이와 다른 별도의 운동영역으로 잘못 인식되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자 함이다. 나는 노조운동이 사회운동의 대표적인 제도운동이라고 본다. 형식적으로 법의 테두리의 영향에 있고 그 운동이 새로운 제도와 질서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조운동의 제도권으로 포섭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조운동이 노동자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힘과 운동 구조를 창출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1·2월호의「2008 노동자 운동 전망과 과제」에서 말하고 있는 "이랜드, 뉴코아 투쟁의 역동성을 만들어 내었던 지역연대운동"에 대한 평가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다만 여기서도 느껴지는 것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를 '노조-사회단체의 연대론'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의 파업투쟁에 사회단체가 지역대책위를 꾸려 연대하는 것, 노조가 안으로 갇히지 않도록 사회단체가 외곽지원을 하는 것으로 서로의 역할을 지운다면 투쟁평가에서 항상 드러나는 노조와 사회단체의 '동상이몽'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1·2월호에서 2007년 노동자 운동의 평가 대부분을 민주노총 운동의 평가로만 남겨놓은 부분이 아쉽다. 이는 투쟁평가토론회 때 자주 등장하는 사회단체 활동가와 민주노총 간부의 서로 간에 벌어지는 하소연과 항변을 연상케 한다. 노조간부나 사회단체 활동가나 사회운동을 노조운동과 별개인 시민사회단체운동으로 생각하는 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것은 노조운동의 우경화쯤으로 왜곡되거나, 노조-단체의 '동상이몽'식 역할분담 속에 벌어지는 '노조투쟁의 지원군들'의 자기 위안으로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년 '사회운동포럼'이 의미 있는 첫발걸음이라 평가하면서도 아쉬운 점은 여전히 사회운동이 시민사회단체들 간의 느슨한 연대운동으로 오해된다는 점이다. 또한 운동평가 토론회에서 드러났던 활동가들의 문제제기가 운동 간의 새로운 관계형성과 당과 노조의 사회운동적 경향의 전면화에 기여하는 불씨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스스로를 특권화 하는 논리로 귀결된다면 '사회운동포럼'이 당운동과 노조운동에 실망한 활동가들의 모임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런 우려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인데, 그 출발점은 '사회운동 vs 정당운동 vs 노조운동'의 삼분구도에 대한 운동사회의 오래된 관념의 척결이라 생각한다. 다소 거친 말로 독자평을 맺고 나니 언급된 이들에게 미안하다. '누가 그걸 모르냐'고 항변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관념의 척결이 문제의 출발인 이상 그 해결의 여정은 여전히 험난하다. 나의 주장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어 차라리 아니한 것보다 못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다만 회원들 간의 건실한 논쟁에 기여하는 자극제가 되길 바라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여성 저임금, 비정규 노동 철폐! 여성노동권 쟁취! 재생산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3·8 세계 여성의 날 투쟁기획단 자료집입니다. 내용은 1> 투쟁기획단 제안 취지, 슬로건, 요구안 해설 2> 투쟁기획단 각 단위 상황 3> 38 여성의 날의 역사와 의의 교육안 입니다.
3ㆍ8 여성의 날 100주년에 부쳐 [%=사진1%] 3ㆍ8 여성의 날이 100년을 맞이했지만, 여성의 삶은 여전히 빈곤,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빼놓고 설명 할 수 없다. 지난 해 3월 8일, 바로 여성의 날에 그저 계속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시청을 점거하다 무참히 강제해산된 광주시청 청소용역 노동자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채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기는 저임금과 수시로 자행되는 해고에 맞서 2005년 8월 파업을 시작했던 기륭전자 노동자는 지금도 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비정규법안 시행령을 앞두고 회사의 외주용역화 시도에 맞서 파업을 시작한 이랜드, 뉴코아 노동자도 200일이 넘게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청소, 간병, 보육 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을 하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라는 부당한 저평가 속에서 저임금과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많은 여성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한 노동으로 착취당하고 있다.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이것이 바로 100년 전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봉기한 여성노동자가 외쳤던 요구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노동자의 요구와 무엇이 다른가. 사회 곳곳에서 ‘골드미스’, ‘女風’과 같이 여성을 둘러싼 화려한 수사가 난무하는 2008년에도 수많은 여성노동자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임금 인상, 최저임금 현실화, 근로기준법 준수,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투쟁하고 있다.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성인력 활용'의 현실 이랜드ㆍ뉴코아 여성노동자는 비정규 법안의 시행령을 앞두고 700여 명의 계산업무 노동자가 계약해지 통보를 받으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녀들의 요구는 자신의 일터에서 계속 일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계약 때마다 해고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외주용역화나 영원한 비정규직인 직무급제가 아니라 안정된 일자리를 원했다. ‘아줌마’라고 무시하면서 저임금/임금차별이 당연한 듯 여기는 회사를 비판했고, “걸핏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를 어떻게 정규직으로 고용하냐”는 회사의 선동에 맞서 노동자를 혹사시키는 이랜드 그룹의 노동 착취가 이직의 원인임을 지적했다. 고용안정과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녀들은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전담자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사를 전담하면서 가족 밖의 노동까지 저임금과 불안정에 묶어두는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고, 이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파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게 해준다고,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가 국가 경쟁력이라고 선전하던 정부는 이랜드ㆍ뉴코아 여성노동자의 요구를 공권력을 동원해 탄압하고 묵살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문제의 원인이 노조에 있다며 이랜드 그룹에게 ‘프랜들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 문제가 심화될 것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인력 활용 방안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여성인력 활용'은 김대중-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 10년 동안 강조되었고, 이명박 정권도 주목하고 있다. 최근 지배세력은 저출산ㆍ고령화 위기 담론을 강화하면서 미래 사회의 위험과 위기에 대처하는 핵심적인 인력으로 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과 정책은 여성의 삶을 개선하고 권리를 확장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여성은 권리를 가진 주체라기보다는 그저 활용 가능성이 높은 노동력으로 간주된다. 여성이 분리직군제, 직무급제 등 새로운 불안정 노동의 우선적용 대상이 됨으로써 자본이 이윤 추구를 위해 강요하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수월하게 확산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인력 활용'의 기만적 진실이다. 재생산 노동에 대한 여성의 책임 강화 여성을 이용하여 이윤을 극대화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위기를 관리하겠다는 정부와 지배세력의 움직임은 최근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다. 기존에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 온 재생산 영역까지 정부 정책으로 포괄하면서 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조치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일-가정 양립’ 정책과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권의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보육정책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면서 재생산 노동의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여성이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는 성별분업의 구조, 이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저임금이 당연시된 문제, 재생산 노동의 가치 저평가 등 핵심적인 문제는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산 노동을 여성‘만’의 책임과 부담으로 인식시키면서 이를 국가가 보조해주는 것이 여성에 대한 커다란 특혜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기만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 저출산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일-가정 양립’ 정책은 (이제는 정부가 출산과 양육을 지원해주기 때문에) 여성이 출산의 의무를 다하면서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식의 관념을 유포하면서 여성에게 출산의 의무를 강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가사 도우미, 간병, 노인 돌봄, 보육 등 기존에 가족 내에서 무급으로 수행하거나 비공식 부문에서 수행되던 여성의 일과 노동이 공식 부문에서 제도화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일-가정 양립’을 위해 자신의 재생산 노동을 시장에서 구입함으로써 대체해야 하는 여성의 요구와 전반적인 노동자 계급의 소득 하락, 빈곤 심화에 따라 여성이 가족의 생계를 보충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여성의 요구에 대한 정부와 지배세력의 적극적인 대응에 따라 더욱 확대되고 있다. 가사, 간병, 노인 돌봄, 보육 등의 영역은 저출산, 고령화,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에 따라 ‘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영역이라면서 정부의 여성 일자리 창출 정책의 주요 영역으로 꼽힌다. 즉 이 분야가 여성이 (기존에도 집에서 해오던 일이므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과 실천은 여성의 역할은 일차적으로 가족을 돌보는 일이며, 여성이 가족 내에서 수행하는 많은 일은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강화한다. 여성의 일이 특별한 숙련과 지식이 필요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어 평가 절하되어온 구조와 역사를 사고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따라서 여성을 재생산 노동의 구매자와 판매자로 분리하면서 여성의 권리나 요구를 개별화하고, 여성억압의 현실을 갱신하는 일자리 창출 전략은 여성해방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여성의 연대가 어려워지는 현실 충분한 임금, 안정된 일자리, 재생산 노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같은 것이 여성이 삶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과 권리이다. 이를 제거한 채 여성에게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력으로 이용되고 가족과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담을 짊어질 선택지만을 강요하는 것이 지금의 여성정책이자 여성인력 활용이다. 그러나 이런 본질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여성의 현실적 요구가 있고, 일과 가사를 병행하면서 가중되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여성에게 일자리를 확대하고 가사와 양육의 부담을 일정 분담한다는 정책과 논리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또 일부 여성은 이런 정책의 혜택과 수혜를 받는다. 따라서 여성을 둘러싼 매우 혼란스러운 현실이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알파걸, 골드미스, 증가하는 여성 전문직, 고위직과 같이 성공한 여성의 신화가 부각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현실과 최저 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다른 집의 돌봄 노동을 떠맡아야만 하는 빈곤 여성의 상황을 압도하고 은폐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 기회를 확대하고 지원하는 정책 속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건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아간다. 여성 억압의 구조,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고, 여성의 권리와 요구는 개별화되면서 여성이 스스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은 점차 좁아진다. 하지만 이런 갈등과 혼란이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늘 저임금 노동력으로 인식되어 온 여성노동자는 남성 노동자를 비롯한 전체 노동자 민중의 지위와 권리를 위협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이제는 너무나 일반적이 되어버린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지배 세력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가족주의 등 각종 균열선에 따라 노동자 대중에 대한 분할과 배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노동자 민중의 삶의 질과 권리를 후퇴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를 위한 해법이 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양보하여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보장하자는 분리직군제와 같은 방식이 그것이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빈곤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주의 때문으로 몰아붙이며, 노동자의 삶과 노동의 조건을 전반적으로 하락시키는 자본의 전략과 맞닿아있다. 여성노동자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문제를 도외시하고서는 이런 지배 세력의 전략에 맞설 수 없다. 따라서 여성노동자의 비정규 불안정 노동을 철폐하는 것은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권 쟁취와 전체 노동자 민중의 권리 쟁취에 필수적인 과제다. 여성 저임금, 비정규 노동 철폐! 여성노동권 쟁취! 재생산 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저항과 연대가 살아 숨쉬는 3ㆍ8 여성의 날로! 100년의 역사 속에서 3ㆍ8 여성의 날은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지 못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착취당하고, 어떤 정치적 권리도 없이 노동자로도 인간으로도 시민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노동자의 세계적인 투쟁의 날이자 연대의 날이었다. 여성노동자 스스로가 투쟁의 주체로 일어서고 서로 연대하면서 자신들의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웠고, 이를 통해 자신의 현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바꿔왔다. 2008년 3ㆍ8 여성의 날 또한 이런 정신을 이어받는 여성노동자의 투쟁과 연대의 날이 되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착취와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담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가족과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는 데 여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 여성정책을 더욱 확대하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여성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고착화할 것이 분명한 비정규 악법의 시행령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이랜드ㆍ뉴코아 여성노동자의 투쟁과 저항이었다. 그 투쟁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한 사업장의 문제로 고립됨으로써, 쟁취되지 못한 것은 비단 이랜드ㆍ뉴코아 여성노동자의 요구만이 아니다.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철폐하는 것이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에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또 이는 전체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에 한 발 다가가는 것이다. 100주년 3ㆍ8 여성의 날을 빈곤, 저임금, 비정규직에 시달리는 여성의 현실을 폭로하고 그에 맞선 여성의 투쟁을 선포하는 날이 되도록 하자. 더불어 노동자 민중의 인간다운 권리를 실현하는 사회를 위해 여성/남성, 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가 여성노동자의 요구와 목소리를 매개로 연대하는 날이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