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뉴코아 비정규노동자들의 피맺힌 목소리를 들어라!
1. 뉴코아 노동자 한 명이 이랜드 신촌 본사 근처 40m 높이 CCTV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이랜드 자본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다. 세 차례에 걸친 점거투쟁, 매장봉쇄 투쟁, 농성 등 안 해본 것이 없는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이 이제 하늘까지 올라가 세상에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해외 출장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고 뉴코아, 홈에버 사장들만 나와 변명과 회피로만 일관했다. 각종 부당노동행위, 불법탄압 사례가 자세히 밝혀지는데도 나몰라라 했다. 노동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중재는 한계가 있다며 당사자간 타결만 되뇌었다. 장관과 기업 사장들은 책임을 피하기만 하며, 비정규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공시위까지 벌여야 한단 말인가?
2. 이 모든 책임은 당연히 비정규직‘보호’법을 만든 노무현 정부와 이랜드 자본 측에 있다.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에서 내쫓고 있는 비정규법이 가장 문제다. 오죽하면 어제 이랜드일반노조 김경욱 위원장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재판부도 “비정규직 입법으로 저소득층 노동자의 고용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는 과정에서 돌출됐고...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적·정치적인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지 않았는가. 노무현 정부는 더 이상 비정규 노동자들의 피맺힌 요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비정규법안을 폐기하고 노동자 생존과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이랜드 자본 역시 마찬가지다. 비정규법을 핑계로 대량해고와 외주화를 추진하고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들을 쥐어짠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노조를 무시하고 용역과 구사대를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는 전근대적 노동탄압으로 일관했다. 그것이 부끄러워 박성수 회장은 국정감사에도 나타나지 못하고 해외로 꽁무니를 뺀 것 아닌가.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증인으로 박성수 회장을 다시 부르기로 한 마당에 더 이상 숨지 말고, 떳떳하다면 공개석상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3. 이랜드노조 위원장은 석방되고 나서 “피해자가 구속되어 있고, 가해자는 활보하고 있다”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는 피해자인 노동자들이 가해자를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과 이 투쟁에 연대하는 이들은 연대를 더욱 강화하여 노동자의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이다. 이미 민주노총 서울본부, 민주노총 전북본부가 비정규직 투쟁 승리를 위해 연대파업을 결의했다. 민주노총에서도 오는 11월 10일 노동자대회 전야제를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러한 연대의 분위기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이미 이랜드-뉴코아 투쟁은 노동자 전체의 투쟁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원장 석방 이후 사기를 한층 높이고 있는 이랜드 노동자들, 고공시위까지 감행하며 절규하는 뉴코아 노동자들의 뒤에는 수천 수십만의 노동자가 있음을 노무현 정권과 이랜드 자본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2007. 10. 23
사회진보연대 (www.pssp.org)
8. 국제노동자협회, 노조, 파업a 국제노동자협회가 설립되면서 영국 노조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전까지 이들의 투쟁은 오로지 임금과 노동시간에 국한되었고, 편협한 중세 길드 체계에 얽매여 있었다. 노조들은 완전히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1825년 의회법b에 따라 인가를 받고, 매일같이 벌어지는 노동과 자본의 투쟁 때문에 필수적이 된 정부가 인정하는 단체다. 그들의 목표는 고용주와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은 파업c인데, 파업의 합법성은 평화의 파괴(breach of peace)를 회피하고 강제적인 작업제한(forcible restraint of trade)d을 시도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 앞서 말한 법에 의해 보장되었다. 이 법의 비호 아래 노조는 영국의 모든 공장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그 수, 조직, 기금을 갖춘 덕에 강력한 단체로 성장하여 고용주와 대립하는 가운데 그들이 항상 고려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조는 모든 정치적 반동의 시기 속에서도, 고용주과 자본가의 반동책략 가운데서도, 지난 수 십 년간의 모든 궁핍과 경제 공황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마르크스가 일찍이 1847년에 프루동을 비판하는 저작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파리, 1847)e에서 밝혔던 바대로, 중세 행정자치구(commune)의 성립이 부르주아 사회의 중간 계급에게 가졌던 중요성만큼이나 노동 계급의 조직화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 편으로 노조가 설사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노동 계급 조직화의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긴급하고 현재적인 목적들 곁에서 일반적 목적, 즉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사회적 해방을 얻어낸다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제 노조 자신이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국제적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본성에 있어 노동운동은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자명해졌다. 이러한 이유에서 1866년 셰필드에서 열린 영국 노조 대의원들의 대규모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입안·채택되었다.416)
우리는 국제노동자협회가 만국의 노동자들이 형제애(brotherhood) 안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도록 기울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 자리에 모인 대표들이 속한 다양한 단체들 모두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할 것을 진심으로 권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체 노동계급의 진보와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f
런던 노동평의회g 417)는 영국 노조들의 중앙기구로서, 역시 런던에 소재하던 국제 노동자 협회의 총평의회와 합의를 맺었다. 런던평의회의 서기관 오드거(Odger)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 구성원이다. 이 시간 이후에서야 영국 노조 활동은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이 최초로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했을 때부터 곧바로 드러나게 된다.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러셀-글래드스톤(Russell-Gladstone) 내각이 1866년 6월 붕괴하고 난 뒤 의회 개혁은 기약 없이 중단된 듯 보였다. 토리당 지도자들은 다수의 갈채 속에서 어떤 개혁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적 운동을 떠맡았다. 대규모의 대중 집회가 런던(London), 버밍엄(Birmingham), 맨체스터(Manchester), 글래스고(Glasgow), 브리스틀(Bristol) 등지에서 열렸다. 노조는 자신들의 역량을 다해 이 집회에 참여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운동의 지도부인 '개혁 동맹Reform League'418)을 지지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승리를 쟁취했고, 토리당 정부는 의회적 개혁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419)"런던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서도 자본가들의 전횡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외국인을 고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체근로의 가능성은 영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힘있게 주장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총평의회의 활동은 이러한 위협을 공공연히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대체근로는 비밀리에 추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노동자가 대체근로의 낌새를 채는 것만으로도 자본가들의 계획을 충분히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협회에 속한 작업장에서 파업이나 직장폐쇄가 일어나면 유럽 대륙의 연락소에서는 각각의 지역 노동자들에게 즉각 영국의 분쟁 사업장의 자본가들 및 그 대리인과의 계약에는 응하지 말 것을 교육하였습니다. 협회 소속 작업장이 아닌 경우에도 협조가 된다면 다른 직종을 대신하여 똑같은 조치가 취해집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하여 철도굴착 노동자, 차장, 엔진 운전자, 도금 노동자, 전선 노동자, 벌목 노동자 등의 작업장 및 공장에 관련된 파업 기간 동안 영국 자본가들의 책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런던의 바구니 노동자 파업에서와 같은 몇몇 사례에서 자본가들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노동자들을 몰래 입국시켰지만,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호소에 따라 그들은 영국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했다. 협회의 파리 집행위원회는 일부 노동자 집단을 지원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루베(Roubaix)에서 리본 제조업자들은 그들의 공장에 자의적인 처벌규정을 도입했는데, 이는 자연히 임금 삭감의 효과를 불러왔다. 이 벌금 체계의 필연적 결과는 이 제도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와 직장폐쇄, 그에 대한 반란과 당국의 무력개입이었다.422) 그러나 여기서 파리의 국제노동자협회 중앙위원회가 개입하였고, 생산업자 자신들이 만들고, 적용하고, 처벌까지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내부규정은 현행법에 위배됨을 밝혀내었다. 이 결과로 프랑스 정부는 순수한 경영상의 내규 이외에 벌금을 부과하는 어떠한 사적인 공장 내규도 불법이며 전적인 횡령에 해당됨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가 개입하였던 사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1. 1867년 2월의 파리 놋쇠 작업장 폐쇄
이 싸움의 가장 근본적인 의의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에서 노조가 이제 막 합법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약 5,000명 규모의 놋쇠노동자조합은 합법화의 이익을 입은 최초의 노조로서 1866년 초 영국 모델을 따라 노조를 건설하였다. 그 시작부터 이들은 자연히 고용주들에겐 눈에 가시였고, 자본가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기회가 닥쳐온 것은 1867년 2월로, 당시 노조는 조합원을 대표하여 5명의 고용주에게 자신의 결정사항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즉각 동맹을 맺고 구성하여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탈퇴하던지 아니면 직장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87명의 고용주가 1500명에 달하는 노동자를 포괄하는 직장폐쇄를 단행하였을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는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폐 자체를 둘러싼 싸움이었던 것이다. 직장폐쇄 초기에, 놋쇠노동자들은 35,000 프랑의 기금을 가지고 있었다. 노조는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주당 20프랑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고, 월 5,000 프랑을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주선 하에 영국의 노조로부터 대부를 얻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승리하였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로부터 바라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하였던 런던 총평의회의 도덕적·재정적 지원, 그리고 프랑스의 다른 노조들로부터 놋쇠노동자들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한 국제협회 파리 중앙평의회의 개입 덕분이었다. 영국인 동료들로부터의 협력을 통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승리라는 사회적 중요성 외에도, 이 사례는 국제적인 의의를 지닌다. 프랑스의 일간지 Courrier fran ais는 1867년 3월 24일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i"티에르(M. Thiers)씨는 국제관계에서 어떠한 새로운 정책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하고 결코 고립되지 않은 사실이 이제 막 발생했다. 민중들로부터 온 이 사례는 실로 새로운 무언가의 예고 노릇을 한다." "우리는 수 백 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인 사이의 격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증오가 여전히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는지 어떤지는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파리의 놋쇠노동자들에게 이들의 임금과 일자리를 건 싸움에 연대와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치체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정당들이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1868년 봄 제네바 파업 **
파리 놋쇠노동자 건이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재를 건 싸움이었다면, 스위스에서의 이 사례는 대륙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존망을 결정짓는 것이었다.423) 국제노동자협회와 일군의 제네바 자본가들과의 불화가 발생하였는데, 그 경과는 다음과 같다. 1867년 8월 이래로 제네바의 건설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대한 깊은 불만의 조짐이 있었다. 건설노동자들의 전체 회의는 1868년 1월 19일에 열렸는데, 여기서 이들은 공동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이 위원회는 고용자들과의 협상과 우호적인 협의를 통해 일일 12시간 노동을 10시간으로 줄이고 20%의 임금인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내용을 담은 협정서을 작성해서 모든 고용주들에게 배포했다. 고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대응조직을 결성하고 건설 부문 고용자 총회(genetal meeting)를 3월 18일로 공고했다. 자본가들의 임시 위원회는 총회 개시 전에 노동자와 자본가 대의원의 평화적 대화를 요구하는 노동자 위원회의 거듭된 제안을 무시하였다. 사실 이들의 태도는 곧 있을 총회에서 그들이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를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동자 위원회는 고용자 위원회와의 협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선언하고 3월 14일 저녁 국제노동자협회의 제네바 중앙 위원회가 이 일을 맡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협회는 이러한 요청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협회는 3명의 제네바 시민으로 된 위원회를 선출하였는데, 이들이 중재를 위해 기울인 개인적인 노력 역시 실패하였다. 18일 총회를 거쳐 결국 고용자 협회를 만든 이틀 뒤인 3월 20일, 위원회는 "모든 건설업자 여러분"을 대상으로 하는 3월 23일 회의를 공개제안 하였다. 바로 다음 날 신문지상에 18일 열린 총회 명의의 공식 답변이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18일 총회에서 결정한 바 자신들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위원회와는 무엇이 되었건 대화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단 3표의 반대만으로 통과시켰다는 것이었다. 23일 아침 국제노동자협회의 노동자 위원회는 벽보를 붙여 이 같은 상황을 알리고 만약 당일 저녁까지 호의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고 고용주들과의 모든 평화적 이해의 여지가 사라진다면 국제노동자협회 전 부문의 총회를 소집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그날 저녁 6시 신호가 주어졌고, 협회의 회원들은 노조의 시설이 있는 론 가(Rue de Rhone)의 도처에 모였다. 부르주아들은 공황에 빠졌다. 상점과 집 문을 걸어 잠궜고, 현금보관함을 안전한 곳에 숨겼다. 일부 사무실j의 직원들은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았다. 그 동안 협회에 소속된 5,000 명의 건장한 노동자들이 사정권까지 행진했는데, 이 곳은 원래 총회가 예정되었던 장소였다. 여기서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논의하고 입을 모아 건설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지원을 확신시켰다. 이렇게 되고 나자 국제노동자협회가 아닌 제네바의 노조 지도부들이 조합원의 열광적인 환호와 연대에 대한 단호한 확신을 등에 업고 벽돌절삭공, 벽돌공, 미장공, 페인트공 등의 파업을 선언하게 된다. 그 결과 회합은 조용히 해산되었다. 그날 밤 9시가 되자 제네바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불가피했던 파업 선언이 25일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브뤼셀, 파리, 리용에 있는 집행위원회로 전달되었다. 협회의 제네바 지부로서는 이미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 버린 파업의 규모 때문에 긴급하게 지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한 편 고용주들은 잽싸게 티치노(Ticino)와 피에드몬트(Piedmont) 등지에서 이들을 대체할 노동자를 들여오려 했다. 그러나 대체인력들은 도착한 순간 국제노동자협회 건물로 인도되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이들 역시 파업대오에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 시기 국제협회가 온갖 야만적 공격과 가장 악독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Journal de Geneve가 그러한 어조를 유지했는데, 이 신문은 비엔나의 Neue Zurcher Zeitung, Neue freie Pressk와 기타 여러 급진적, 자유주의적, 보수적 부르주아 기관지들의 열렬한 지원을 받았다. 제네바 중앙평의회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파업 원인 자체는 뒤로 물러나고, 국제노동자협회가 상황의 전면에 부각되게 되었다. 3월 28일 고용주 협회는 26일자로 된 벽보를 붙여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최대한 공평하게 다룰 것을 약속하는 한 편, 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전횡과 공갈을 경고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국제협회는 외국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파업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예전의 친밀한 상호이해를 상기시키면서 선의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작업장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기꺼이 올려줄 것이며, 11시간의 노동시간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노동자들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아직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건설부문 작업장조차 폐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합의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는데, 왜냐하면 고용주들이 국제협회에서 나온 대의원들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어떠한 노동자도 개별적으로 복귀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폐쇄는 3월 30일까지 지속되었고, 가구장이, 목수, 주석광부의 사업장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러한 폐쇄가 제네바 노동자에게 미친 가져온 도덕적 효과는 이전까지 국제협회에 거리를 유지하던 마차제조공, 편자공, 안장공, 실내장식업자, 줄갈이공(file-cutter), 제혁공, 그리고 기타 노조들조차도 부문별로 협회에 가입을 요청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며칠 사이 협회는 1,000 명이 넘는 새로운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귀금속 업계에 고용된 노동자들, 예를 들어 금세공업자, 시계 제작자, 그릇 제조업자, 세공업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제네바 시민이었는데, 3월 30일 2,000명 규모의 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일제히 건설노동자의 대의가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도덕적, 물질적 수단을 통해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제협회와 관련해서 이 모임은 제네바 노동자들이 외부세력의 전횡에 지배되고 있다는 악의적인 거짓선전을 거부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 이때까지 국제협회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모든 합의에 이르는 길이 봉쇄된 지금 문제는 파업을 보다 오래 지속할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국제협회의 제네바 중앙평의회는 약 3,000 명의 노동자와 가족을 지원해야만 했고, 이는 제네바의 노동자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도움의 손길은 도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먼저 제네바 노동자들과 노조가 보여준 자기희생의 정신이 가장 먼저 치사받아 마땅하다. 제네바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과 빵을 나누었다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렇게 개인들이 임금을 자발적으로 기부한 이외에도 노조의 예금은행과 구제기금도 500프랑에서 5,000프랑에 이르는 지원금을 갹출했다. 다른 스위스 도시의 노조와 스위스 주재 독일노동자 단체들도 내놓은 지원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독일로부터의 원조 하노버(Harnover, Workers' Union), 함부르크(Hamburg,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쉬베린(Schwerin, building workers), 로스톡(Rostock), 카우케멘(Kaukehmen), 솔링겐(Solingen), 만하임(Mannheim, Tailors' Union), 에슬링겐(Esslingen, Workers' Educational Society), 뮌헨(Munich,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외 다른 도시들-도 있었다. 특히 적극적이었던 곳은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파리와 브뤼셀에 있는 집행위원회였다. 4월 초가 되자 총평의회는 더 많은 금액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몇 가지 형식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만 최소 월 40,000 프랑에 이르는 돈을 일부는 융자, 일부는 원조의 형태로 파업이 승리할 때까지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브뤼셀과 파리의 집행위원회의 중재를 통해 두 도시의 노조들에서 상당한 양의 기부금이 제공되었는데, 이를테면 인쇄업자들로부터 2,000프랑, 파리 주석광 노조로부터 1,500프랑 등등이 있었다. 고용주들은 그제서야 노동자들을 말려 죽이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이미 협회의 중앙평의회와는 절대로 교섭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에 협상은 주의회(State Council) 의장이며 제네바 사법경찰국장(Chief of the Justice and Police Department of Geneva)이기도 한 캄페리오(Camperio)가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협회의 중앙위원회에 모든 건설부문 직종 대의원이 4월 8일 협상타결을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회합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이미 협상 3일 째 합의가 도출되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시간을 1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2시간을 단축하기로 합의하였고, 10퍼센트의 임금인상에 동의하였다. 그 날 저녁(4월 11일) 캄프리오는 벽보를 붙여 그의 중재를 통해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파업은 종료되었으며, 월요일(4월 13일)에는 모든 작업이 재개될 것이라고 알렸다. 국제노동자협회 역시 파업의 만족스러운 타결과 노동자들이 파업기간 동안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들을 치하하며 지난 날들의 고난은 잊고 월요일에 활기차게 일터로 복귀할 것을 주문하는 선전포스터를 붙였다. 국제노동자협회에 있어 이 투쟁은 스위스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3. 벨기에 정부와 샤를루아(Charleroi) 광산노동자 간 유혈투쟁 (1868년 3월)
벨기에는 부르주아의 천국이다. 이 나라의 정체(政體)는 부르주아 국가의 이상적 모델이다. 정부는 부르주아의 대행자이고, 자본 지배의 대리인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익 사이의 사소한 대립일지라도 화약과 납탄이 횡행하는 유혈사태로 마무리되는 게 여기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424) 국제노동자협회가 그 곳에서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의 대의에 더욱 확고히 관여할수록, 샤를루아 광산 지대 노동 쟁의의 대의를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다. 많은 나라의 국내 산업들 중에서도 석탄과 철은 그 정점에 위치해 있다. 그 두 산업은 유기적 전체를 이룬다. 어떠한 제철소나 용광로도 석탄 없이 가동될 수 없고, 채탄산업의 입장에서도 이 둘은 가장 큰 소비자다. 따라서 한 쪽에서의 교란은 다른 쪽에 곧바로 그 영향을 미친다. 모든 위기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야금산업의 위기는 석탄가격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석탄과 철에 있어 자연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에는 석탄과 철 모두 지표 가까이 묻혀 있어 채굴이 손쉽다. 한 편 프랑스는 자연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나라인데,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야금산업은 영국이나 프러시아의 석탄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프랑스로서는 석탄 수입이 필수적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석탄을 생산하는 벨기에는 몹시 난감한 경쟁을 겪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석탄이 팔리는 가격에 영향이 있는 운송비용을 고려할 때, 영국이나 (라인강과 그 지류들로 이어진 수로를 가진) 프러시아가 운송 면에서 훨씬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에서 일반적인 석탄의 가격은 석탄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에 달려있다. 실제로 각 국가에서 동일한 양의 석탄을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시간 양의 차이로 인해 이 요소의 국제적 관련성이 눈에 띤다. 임금 또한 노동시간과 마찬가지로 국가별 차이가 있는데, 영국에서는 대륙에서보다 최소 26 2/3퍼센트 높다.*** 이것이 양국의 석탄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철과 철강 산업의 위기 혹은 다른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불황이 석탄 가격을 낮추면, 탄광소유자는 임금을 낮추려 한다. 그러나 임금이 이미 충분히 낮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고, 특히 흉작이 들이닥친 시기의 임금삭감은 노동자를 절망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임금삭감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변명이 있는데, 하나는 영국에서만 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륙에서만 통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통하는 변명은 대륙의 낮은 임금이다. 대륙에서 통하는 변명은 영국산 석탄의 낮은 가격으로 인한 경쟁 심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 광부들이 어느 정도까지 궁핍에 내몰렸는지는 Demokratisches Wochenblatt에 실린 다음의 기사l 를 보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벨기에 광부들보다 더 통탄할 만한 궁핍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계 부품으로 전락했다고도 할 수 있을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이들은 거의 모든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박탈당했다. 여기 노동자들은 말, 당나귀, 채굴도구, 기타 비품 등과 함께 광산업자의 자산 목록에 올라와 있는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실이다. 광산회사는 더 많은 노동자를 손에 쥐고 있을 때 더 부유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회사가 '인도적 차원'에서 노동자 거주지를 만든다면 회사가 얻는 직접적 이익은 많아봐야 2퍼센트에서 3퍼센트 내외가 될 것이지만 그 간접적 이득은 거의 측정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왜냐하면 회사로서는 이를 통해 광산에 자신의 생존을 건 노동자를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어떤 작업환경 아래서든 광산의 가동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광부들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선심쓰듯이 부르는 말인 자유인이 아닌 농노나 노예라고 부르는 것이 낳겠다." "모든 노동계급 중에서 특히 벨기에 석탄노동자들은 노예 표식을 달고 있다. 무지, 잔인함, 육체적 정신적 퇴화.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아마 다른 어떤 산업보다 인간에게 해로운 산업을 자본이 제한 없이 지배할 때 나타나는 안타까운 결과이다. 물론 부르주아들은 광부들의 이 비참한 신세를 바로 자신들이 초래한 잘못과 악덕, 조심성 부족, 경솔함과 방탕에 원인을 돌리기만 할 뿐이다. 현명하시게도 부르주아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공허한 동정심만으로는 도저히 그 출구를 찾을 수 없지만 가능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일반 이익에 부합하는 상황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원인과 환경들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광부들을 살과 뼈로 만든 기계와 다름없이 만드는 요인 중에 가장 큰 것은 작업의 성질과 작업환경 자체, 그리고 너무나 긴 노동시간이다. 노동시간이 노동 강도의 증가와 같은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은 현 사회 체계의 경제 법칙이다." "광부들의 노동은 순전히 육체적이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활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뇌는 거의 정지 상태에 있다. 정신적 활동은 어떠한 자극도 받지 못한 채 초보적이고, 생기없는 수면상태에 머무른다. 결과적으로 두뇌활동은 극단적으로 편협해진다. 그 활동이 순전히 육체적인 것처럼 욕구와 취향 역시 전적으로 육체적이고 잔인해진다. 만약 당신이 그 직업의 특성을 알고 있다면 광부들의 지적, 도덕적 퇴화는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격심한 노동의 파괴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그 습관들과 품행이 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뭇 불가능한 일이다." "광부의 가치는 오로지 그의 근육에 의해 매겨진다. 지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일하는 데는 기술, 재능, 교육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적 능력 하나면 족하다. 광산에서의 다양한 작업들에 대한 간략한 묘사만으로도 독자들은 현재의 경제 체계 아래서 광부가 스스로의 육체적 능력, 정신력, 도덕성을 고양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광산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정으로 나뉜다. 갱도작업자가 광맥층으로부터 석탄을 캔다. 불도저가 그것을 통로로 가지고 나가면, 갱도의 하역인부가 그것을 수레나 바구니에 담는다. 그 바구니를 끌어당겨 지표에 이어진 수갱으로 옮긴다. 길을 뚫는 사람, 견인차, 흙 운반인은 갱도를 파내거나, 수갱을 뚫고 거기서 나온 흙과 암석을 퍼낸다. 이 모든 작업은 조그만 등불이 밝혀주는 희미한 빛 아래에서 먼지로 가득한 공기를 마셔야 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광부들은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옆구리로 눕는다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엎드리거나 고되게 몸을 구부린 상태에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기어 다닐 수밖에 없다. 굴착노동자나 들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역시 전적인 육체노동을 수행한다는 점은 같지만 이들은 그나마 햇볕이 드는 개방된 공간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탄광노동자의 고통스런 조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래도 탄광노동자들이 정신적 도덕적으로 미약한 수준에 있다는 것이 놀라운가? 어떻게 환기도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하루 15시간 내지 18시간 일을 시키면서 사람의 인격을 가지길 바라는가? 이렇게 사람의 성정을 파괴할 뿐인 작업조건에서는 아무리 신께서 행복한 성정을 부여한 사람일 지라도 금방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육체가 도덕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육체적 상태는 대개 정신의 지표인 것이다. 상공회의소의 1844년 공식 보고서를 보면 탄광노동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얼굴이 창백하고, 골격은 굽어 있고, 다리는 휘어 있으며 걸음은 매우 느리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40세에서 50세가 되면 조기노화의 징후가 나타난다.'" "탄광기술자인 비도(Biduat) 씨는 1843년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이 직업(채탄공)을 가진 이들은 항상 태양빛을 보지 못하고, 공기 대신 유독가스를 들이마시고, 부자연스런 자세를 취해야 하며, 항상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등 정상적인 삶의 조건에서 인간을 가장 멀게 만드는 종류의 일을 하여야만 하므로 이에 대한 더 특별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나에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43년에 사실이었던 것이 1868년에도 마찬가지다. 채탄공의 신체적·정신적 여건이 비록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확실히 개선되지 않았다. 노동시간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임금 역시 현재의 경기후퇴를 무시하더라도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데에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탄광에 여러 가지 개선책들이 도입되었지만, 이 개선책이란 노동자와는 관계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위아래를 오가지는 않지만, 그렇게 절약된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은 일을 하는데 바치는 것이라 이러한 개선은 자본가의 이익만 될 뿐이다. 그 결과 채굴노동자는 정신적 유연성을 잃고 학교와 교육을 '게으름뱅이'의 전유물로 치부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조잡한 오락과 쾌락에만 탐닉하게 될 뿐이다. 탄광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야만적 상태를 유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적으로 노동자에게서 이윤을 뽑아내기 때문에 만약 노동자들이 정신을 차려 신중하고 사려깊게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수익성을 잃게 될 더 못한 산업들이 풍부한 데서 도움을 받는다. 탄광주들은 노동자들에게서 단돈 1 페니라도 쥐어짜내기 위해 온갖 함정을 준비해 놓는다.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하여 정신적 능력이 동면에 들어 가 버린 이들을 구슬려 등골을 빼먹는 것은 얼마나 쉬운지!" "이런 상태는 계속될 수도 없고 계속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성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 인간성의 호소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법칙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하지만 부르주아가 아무런 도덕적 후과 없이 노동자들을 농노나 가축 수준으로 후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장지역이나 광신지구의 부르주아를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문화와 교육에 대한 경멸, 경영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사고의 결여, 그리고 부르주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쾌락만을 향한 조악한 욕망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는가? 이는 미국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노예소유주가 겪었던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 곳에서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노예제와 노예노동이었다. 여기서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그 원인 역시 같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자가 더 낮은 곳으로 몰릴수록 고용주 역시 노동자를 따라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이들처럼 확실하게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적 기업으로부터 당하는 해악, 역으로 사회 전체를 고름을 내뿜는 종기로 뒤덮어 버리는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교육과 협력이다. 노동시간 단축만이 계몽과 교육의 혜택을 노동자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혜택에 참여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이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처한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노동자의 도덕적 물질적 향상은 사회정의의 문제이며, 공공선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선 대중교육과 협동조합을 만드는 길 밖에는 없다. 이러한 방책들을 실행에 옮기고, 지지·지원하는 것은 국가에 달려 있다. 부르주아 경제체계가 이미 사회를 부패시키고 침식하고 있는 지금, 이를 행하지 않고 멍하게 있다면 자멸할 뿐이다."
1867년 2월 마르시엔느의 광산에서는 소요가 있었는데, 곧바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소요의 배경에는 1866년 흉작으로 인한 빵값 상승과 물품부족이 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이 살육사건의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1867년 3월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발신하였다.425)국제노동자협회 중앙평의회
"땅에는 군인들이 넘쳐나니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움츠러들었다. 일반적으로 위험하다고 알려진 이들도 모두 철창 안에 가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것이었다... 이들을 체포하면서 군대는 그 위세와 위용을 뽐내었는데, 이는 뭇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또 동료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혹 있을지 모를 감옥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에 대한 이 조직된 압박을 고려한다면 다시는 그러한 소란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유혈극은 깊은 위협의 효과 또한 갖는 것이다... 들떠있지만 조금도 위험하지는 않은 폭도 대중은 밤이 되기 전에 완전한 무기력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들이 지난 며칠간 귀 기울였던 모든 지도자들은 철창 안에 갇혔다. 사람들이 혹 그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일지 모를 작자조차 모조리 잡아들였다... 사실 철권을 휘두른 것은 경찰이지 군대는 아니었다... 이 지역 시장(市長), 경찰관료, 헌병대장에게서 조언을 얻어, 보고서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명시된 모든 이들을 잡아넣었다."
이 야만들이 고통받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으킨 망연자실 속에서, 국제노동자협회 브뤼셀 중앙위원회는 언론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대중적 집회를 제안하였다. 자본가와 그 공범인 정부를 맹비난하면서 벨기에 노동자들이 다시 저항에 나설 것을 추동하고, 구속된 자들에게 법률상담과 변호사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샤를루아 노동자의 운동은 전체 국제노동자협회 모두의 대의라고 선언하였다. 런던의 총평의회는 파리와 제네바의 운영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브뤼셀에 있는 위원회를 지원하였다.427) 샤를루아 지역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을 군대로 진압한 이후 고용주들은 실업자들과 굶어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탄광을 당분간 가동중지 시킨 것으로 아주 만족해했다. 정부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국제노동자협회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제네바에서 동시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재정이 좋지 않았고 지원위원회도 한창 조직 중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아사의 위기에 몰렸다. 날로 커지는 비참을 보고 이제 샤를루아 마을 주민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샤를루아 자유연합(the Liberal association of Charleroi)은 정부가 이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에게 즉각 직업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선거위원회를 해체하고 천주교도들에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협박은 원하던 결과를 낳았다. 물론 아사 직전 노동자들의 울부짖는 비탄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걱정 때문에 자유주의 정권이 상당한 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동안 3월에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한 법집행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건, 즉 그들이 유죄로 판결받던 그렇지 않던, 정부는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은 총탄세례나 감옥뿐 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정부가 자신들의 정당한 불만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하거나, 고용주의 학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노동자들은 조력이 어느 쪽에서 올 것인지,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돌아서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정부가 아니라 바로 국제노동자협회라는 것을.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정부의 승인 없이 20인을 넘는 조직을 구성할 수 없다.431)그 법을 그대로 따르자면 프랑스에 있는 대부분의 산업·상업 기업들은 불법이며, 다만 정부의 묵인 아래 존재하는 것이다. 항고심의 결정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조직이 공개적이고 정부가 일정 기간 해체하지 않을 경우 암묵적y인 승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정부의 승인을 얻건 그렇지 않건 정부가 그 설립을 일단 묵인했던 조직이라면 기껏해야 그 조직을 해체할 수 있을 뿐 그 구성원을 처벌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겪었다. 프랑스의 모든 지부는 유진 듀퐁(Eugene Dupont)을 총평의회의 대표로 하는 영국 조직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덧붙여 말하자면 런던에는 프랑스 그룹과 독일 그룹이 있다.) 비록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있어서는 함께 행동한다 하더라도 프랑스 지회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지 않고 오직 런던의 총평의회와만 소통하고 있다. 각각의 조직들은 독립적인 집행위원회를 가지고 런던의 총평의회와 교통한다. 프랑스에서 조직의 건설을 추동한 것은 파리 그룹의 파리 집행위원회였다. 위원회는 내무장관z과 파리 경찰국장에게 그 설립과 존재를 이미 1864년에 통보하였다. 그 이후로 파리위원회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의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구성원들의 공개 회합은 매주 이루어졌고, 그에 관한 보고문이 공개적으로 신문에 실렸다. 사실 지난 몇 십 년간의 비밀조직과는 완전히 다르게도 그 조직은 본성상 공개적인 것이었고, 런던의 총평의회의 회합 역시 런던 신문에 매주 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와 프랑스 정부간 최초의 분쟁은 1867년 9월 로잔 총회ㄱ직후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의 일원인 쥘 고트로(Jules Gottraux)는 총회 문서의 일부를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문서들을 프랑스에서 영국432)으로 가져 가려 했다. 그가 프랑스 국경을 넘는 순간 문서들을 압수당했다.433) 런던 총평의회의 총서기장ㄴ이 프랑스 내무장관ㄷ에게 편지를 써서 그 압류된 문서는 영국의 재산이기 때문에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협회의 총평의회는 영국 외무장관인 스탠리 경(Lord Stanley)에게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관인 코울리 경(Lord Cowley)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가 프랑스 정부에 문서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그제서야 프랑스 정부는 요구에 응했다. 두 번째 분쟁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들은 제네바 총회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제안하며 원칙을 옹호하는 제안서를 낭독했다. 이 문서는 일방적으로 프루동주의적이면서 고유하게 프랑스적이었는데, 당연히 협회에서 채택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파리에 있는 어떤 출판업자도 그것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위원회는 브뤼셀에서 제안서를 인쇄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경을 넘는 도중 문서를 압수 당했는데, 1867년 3월 3일 협회의 파리 중앙위원회는 국무장관이며 황제ㄹ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루어(Rouher)에게 편지를 보내 문서를 압류한 까닭을 물었다.ㅁ그는 그라비에 44번가에 있는 협회의 파리지부 사무실로 답신ㅂ을 보내어 자신의 사무실로 한 번 방문해 줄 것을 청했다. 위원회는 장관과의 회담에 파견할 사람ㅅ 을 정했다. 루어는 몇 군데 못마땅한 부분의 변경과 수정을 요구했다.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노동자에게 많은 은혜를 내려준 황제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몇 마디 말을 덧붙인다면 누구나 그 업적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Pourtant, si vous faisiez entrer quelques remerciments a l'adresse de l'empereur qui a tant fait pour les classes ouvrieres, l'on pourrait voir.)ㅇ 협회의 대표는 협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개인이 되었건 정당이 되었던 아첨이나 명예훼손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루어는 회담장을 박차고 나와 그 문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자신들이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 정부는 아미엥, 루베, 파리에서 일어난 파업에 대해 협회가 미치는 영향력과 증대되어가는 역량에 주목하였다. 정부는 위의 회담 몇 주 뒤 협회의 제국주의 국수주의 반대 운동에 크게 불쾌해하면서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째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434)1868년 정초의 꼭두새벽ㅈ 파리 경찰은 파리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의 집을 급습하였다. 경찰이 발견한 모든 서신과 신문은 압수되었다. 경찰은 그 문서들을 바탕으로 파리그룹의 등록된 회원만 약 2,000명이라고 추산하였다(그 이후 이 숫자는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들이 기소할 때 가져다 붙이기 좋아한 죄목은 비밀 단체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는데, 두 달간 조사를 거치고 난 뒤 이는 기각되었다. 대신 치안 규정을 무시한 죄가 등장하였는데, 즉 정부의 승인 없이 20명 이상의 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이었다. 1868년 3월 20일 센느(Seine) 형법재판소에서 공판이 이루어졌다. 피고 중 한 명이 석공 톨랭(Tolain)이 나머지 15명의 피고인들을 대변하였다. 심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435)재판장ㅊ 당신은 당신과 공동피고인들이 구성원으로 속해 있던 국제노동자협회가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톨랭 이 자리가 그 질문에 답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변하고 싶은 것은 우리 단체의 공개적 활동이 그 존재의 암묵적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재판장 하지만 승인받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군요? 톨랭 누구도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국제협회가 도대체 어떤 나라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프랑스, 벨기에, 영국, 아니면 독일 정부 중 어디입니까? 알 수도 없고, 누구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정부의 승인이 영국에서는 무슨 소용일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재판장 조직의 모임에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습니까? 톨랭 전혀, 그런 일 없습니다. 재판장 1866년 브뤼셀에서 출간된 선언ㅋ을 당신들에게서 압수했는데, 그 내용은 정치에 관한 것이었고, 심지어 전복적 정치(politique transcendentale)ㅌ에 관한 내용도 있더군요. 톨랭 그 선언문은 내 소유물입니다. 내가 알기로 프랑스에서 그 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이 쓰고 출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나라의 모든 단체는 타국의 단체들에게 연대를 강요하지는 않으면서, 각자의 특수한 요구를 제출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이나 독일 지부가 우리가 감히 손댈 생각을 하지 않는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나는 우리 모임에서는 정치 문제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 협회는 어떻게 조직이 됩니까? 그 소재지는 어디고, 그 목적은 무엇이지요? 그리고 파리 사무소과 총평의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톨랭 총평의회는 1864년에 런던에서 구성되었습니다. 영구적인 소재지는 없습니다. 런던에 삼년간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극복할 수 없던 문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아시려면 그 규약ㅍ을 읽는 것이 가장 좋겠군요(규약을 읽는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오. 톨랭 파리 사무소는 신문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호소한 이후 건설되었습니다. 사무소를 만든 이유는 파리 지부의 활동의 구심을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제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한다거나, 단체를 대표해서 다른 부문과 교섭을 한다거나. 이 모든 것들은 백주대낮에 매우 개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파리 사무소의 정관은 인쇄된 소책자로ㅎ배포되었고 모든 구성원들은 일주일에 10상팀의 회비를 내야 합니다. 재판장 이 사무소가 조직을 확장해야 한다는 직접적 선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톨랭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사무소가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거의 대부분 우리는 런던의 총평의회를 언급하곤 합니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가 어떤 파업에 개입한 적이 있습니까? 파리 놋쇠노동자, 루베, 아미엥 그리고 다른 파업들에서? 톨랭 협회는 앞서 언급하신 그러한 사건들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부위였습니다. 파업의 원인을 연구한 결과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자뿐 아니라 사용자들에게 있어서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검찰관 레펠레티에(Lepelletier)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신사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피고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지적이며, 강직한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유죄판결은 받은 적도 없고, 이들의 도덕성을 의심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혐의를 입증함에 있어, 신사 여러분, 그들의 명예를 손상할 만한 얘기라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검찰관은 이들이 법을 어겼고 유죄를 입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재판이 무효라는 피고의 주장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어떠한 비난이 이 기소에 쏟아지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지난 며칠간 Si cle, the Opinion nationale, 그리고 Courrier fran ais를 읽어보셨다면, 국제노동자협회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이 일부 매체들이 이 기소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3년간 협회는 광범위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해 왔다. 정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지는 못했지만, 묵인되었다. 그 목적은 노동자의 물질적이며 도덕적 해방이기에,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이며, 진리, 도덕성, 정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해법이다… 하지만 그러한 묵인이 단순히 권력의 전횡과 폭력의 변덕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가혹한 기소로 끝장나게 되었다. 대략 이런 것입니다. 만약 협회의 구성원들이 적어도 그들의 강령을 저버리고 국가에 위협적인 문제에 몰두했다면, 그들이 정치에 관여했다면 모르겠지만 반대로 그들은 총회에서 그러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활동을 자신들의 정관이 정하는 바에만 한정시켰으며, 그 정관이란 정부당국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며 최소한 이미 간접적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우리 검찰에게 덧씌워진 비난입니다. 나는 줄여말거나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비난입니까? 협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협회가 자신의 강령에 제시된 대로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에만 자신의 활동을 한정지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가)
그래서 그 검사는 파리 사무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룩셈부르크 문제436)에 대한 협회의 일반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피고인들이 법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피고 톨랭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탄원장을 제출하였다.나)"조직의 불법성이 정부당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데 기인한다는 점; 또한 어떠한 공식적인 승인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앞서 말한 승인이 암묵적으로 이미 면제되었다는 것; 특별한 형식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입법자 스스로도 예외로 인정한 법을 엄격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 결과 대중적 신뢰도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것이 1834년 법에 대한 논의, 그리고 언급되는 승인은 암묵적일 수 있다는 정부 대표의 언급을 따르고 있다는 점; 그러한 암묵적 인정 혹은 묵인이 20명 이상의 인원을 가진 모든 산업·상업 기업이 존재하는 형태라는 점; 이 같은 관행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우리와 같은 단체들을 박해하는 권력을 용인하는 것은 사회적 양심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명백한 실존 때문에 그들이 적법하게 승인되었다고 간주한다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에; 협회에 대한 암묵적 승인은 1) 그것의 존재와 행동은 끊임없이 공개적이었고, 이는 여타 사기업보다 훨씬 더 공공연했다는 점에서, 2) 국제협회가 내무장관과 경찰국장에 보내는 두 통의 편지에서 협회의 설립이 18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나오다는 것; 내무장관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대리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국무장관이 협회 서기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시적이고 공식적인 정부의 승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장관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정당성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는 점, 그동안 협회가 자신의 이론이나 목적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검찰 조사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 사실상 1866년 총회라)에서 프랑스 대의원의 의견서를 발제하기 위해 초청받았던 협회의 서기 역시 지금 비난받고 기소된 것과 똑같은 이론과 목적을 제시했다는 점; 1867년 1월 4일 검찰 간부조차 조직이 충분히 합법화되었다고 간주했는데, 이유인즉슨 당시 그들이 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개 재판에서는 어떤 기소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이 모든 이유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법정이 검찰의 기소내용을 각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탄원을 제출하면서 톨랭은 다른 피고들을 대신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연설은 노동계급의 결어에 맞서는 열정적인 저항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상호교육을 통하여, 또 자신들의 가장 사활적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대해 학습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규명하려고 노력할 때, 그리고 개선을 확보하려고 시도할 때 노동자들이 초래하는 위협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하건, 얼마나 조심을 하건,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순수하고 무해한 것이든 노동자들은 항상 위협받고, 박해받으며 조사 대상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산업적 혁신이 새로운 요구들을 창출하였고 사회 경제를 완전히 재구축했다.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정부 자신도 이러한 재구축 운동을 따랐고 열심히 협력했다.톨랭은 말을 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국제노동자협회로 단결한 이유입니다.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의 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길 원합니다. 영국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과 우리 모두 똑같은 관심사, 똑같은 사회적 문제로 움직입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말하길 기계가 정교화되면서 노동자의 사회적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므로 함께 서로를 계몽하고,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찾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고 똑같은 생각에 고무되었습니다. 그 이후 노동자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어떤 개선도 기대할 수 없다는 공동의 구호가 제시되었습니다. 이 구호는 1864년 런던에서 열린 공개 집회에서 주창되었습니다."
그래서 톨랭은 런던의 총평의회와 파리 사무소의 설립, 조직과 활동 등을 설명했다. 정부가 암묵적 승인을 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그는 자신들이, 다른 한 편으로는, 공식적 승인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은 노동자와 모든 시민들에게 자연적으로 부여된 권리를 허가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권력을 정부에게 양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선언으로 진술을 마무리 지었다."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금껏 우리가 취한 입장은 적절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당신의 판결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내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증오나 옹고집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한 각성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일들은 우리가 직접 해결할 것을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끝장내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수단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법을 넘어섬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법을 길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경찰, 정부, 자치 행정당국, 나아가 모든 대중들이 모든 것을 알고, 보고, 묵인했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판결은 이러했다.마)"검찰조사와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에 따라, 피고인들이 지난 삼 년 간 국제노동자협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체의 파리 회원이었고, 이 단체는 20인 이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점," "연합된 노동자들이 협회의 목적에 따라 뭉쳐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했고, 앞서 말한 목적이란 노동자들의 처지를 협동조합, 생산과 신용 등을 통해 개선시키려는 것이며, 또한 정기적으로 회합을 열어 자신들을 영구적인 단체로 구성하였다는 점," "형법 291조와 292조바), 1834년 4월 10일 발효된 법사)은 프랑스 영토 안에서 그 법을 어긴 자에게 적용되는 경찰과 안보에 관계되는 것이며, 그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에 관계없이, 파리 사무소가 앞서 말한 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점," "신문지상에서 상기 단체의 존재가 인지되었다거나 당국의 묵인이 있었다는 것이 명시적인 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면제하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 "피고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형법 291조와 292조, 1834년 4월 10일 법에 해당하고 그에 따라 처벌가능한 위반을 범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본 법정은 이로써 파리 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국제노동자협회의 파리 지부를 해산하고, 피고인 각자에게 100프랑의 벌금을, 벌금을 변제하지 못할 시에는 30일의 구류로 대신할 것을 선고한다."
"우리, 그러니까 런던 총평의회의 파리 지부가, 경찰 및 관계 당국에 우리 단체의 설립을 알린 뒤 명시적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지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조직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승인을 구하는 치욕에 굴하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규약의 바로 첫 번째 원칙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 규약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승인을 받아들이는 자는 복종, 종속, 후견권, 간단히 말해 노에 신분을 받아들이는 것인 바, 그 모든 형태의 노예 신분이야말로 국제노동자협회가 그것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해방시키려 하는 굴레 자체인 것입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형량을 확정한 데 덧붙여 항소한 이들에게 항소심에 들어간 모든 비용까지 선고했다. 이번 선고의 근거는 실질적으로 1심 선고의 근거와 동일했으며, 다만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롭게 추가되었다."그 조직의 막대한 힘과 그 활동의 광범위한 확장 때문에 위험이 가중되었다."
"우리가 볼 때 파업은 임금을 확보하기 위한 거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에 반해 파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파업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결국 공정한 임금을 받아 내리라란 보장도 없이 몇 주에서 몇 달에 이르는 가장 혹독한 궁핍으로 노동자와 가족들을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경제적 조건을 연구함으로써 노동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과업을 스스로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고 그 결과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주 파업이라는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점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 앞에서는 당신들이 판사이고 우리들은 피고인입니다. 하지만 주의(主義) 앞에서는 우리는 두 개의 당파입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든 지켜야 하는 질서의 당파, 안정의 당파이고, 우리는 개혁의 당파, 사회주의의 당파인 것입니다. 편견 없이 한 번 살펴봅시다. 그 완전성을 의심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범죄자가 되어 버린 저 사회 질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뼛속까지 불평등으로 좀먹었고, 이기심의 위협을 받으며, 반사회적 편견의 냉혹한 발톱에 목이 졸리고 있습니다. 인권 선언과 민중의 의지의 단명(短命)했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 줌 지배계급에게 좌우됩니다. 민중들의 피가 민족과 민족, 우리와 똑같은 굴레에 허덕이며 우리와 똑같은 해방을 열망하는 민중과의 동족살해의 전쟁터에서 강이 되어 흘러가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향락은 오로지 소수만을 위해 존재하고, 그들은 최대한, 그리고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향락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대다수 민중들은 비참과 무지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신음하고, 저기서는 기아에 고문당하며, 그리고 도처에서 자신들의 노예상태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미신과 편견의 암흑 속에서 시들어 갑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원한다면, 주식거래라는 도박이 어떻게 혼란과 해악을 끼치는지, 풍요와 기근이 모두 어떻게 그 힘 있는 자본가의 손에 달려있는지를, 그리고 그가 쌓아올린 황금의 산 곁에 있는 폐허와 고의적인 파산을 보십시오. 산업에서는, 고삐 풀린 경쟁이 노동자를 내리누르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어떤 분별 있는 관계도 파괴합니다. 필수품을 만드는 일손은 부족하고, 사치품을 만드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가난한 아이들 수백만이 몸에 걸칠 실오라기 하나 없는데 10,000일 동안 노동하더라도 살 수 없는 터무니없는 가격이 매겨진 숄이 세계 박람회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필품조차 구할 만큼도 벌지 못하는 한 편에서, 세계는 부른 배를 두드리는 게으름뱅이들로 가득합니다." "구 세계는 노예제라는 가시가 살에 박혀 종말을 고했습니다. 근대 시대도 대중의 고통에 관심을 쏟지 않고, 노동자에게 쉼없는 노동을 강요한다면, 노동자들은 생필품도 살 수 없는데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사치와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한다면, 만약 이 시대가 이 같은 사회 상태가 완전히 부당하다는 것을 보려 들지 않는다면, 그 종말 역시 멀리 있진 않을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W. 팰리 박사는 La Cooperation신문에서 지난 5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카) "옥수수밭에 있는 비둘기 무리를 생각해 보라. 99마리의 비둘기가 옥수수를 쪼아먹는 대신 줄기와 왕겨만을 먹으면서, 오직 한 마리 비둘기를 위해 옥수수 알갱이를 산더미처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한 마리는 종종 가장 약하고 불쌍한 비둘기일 수 있다. 이 한 마리는 꼬꼬 울면서 거들먹거리고, 배불리 포식하고, 제 영역을 표시하여 못 쓰게 한다. 열심히 일하는 나머지 99마리는 친절하게도 이를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중의 하나가 - 더 용감한 녀석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녀석들보다 더 배고픈 녀석이었을 수도 있다 - 옥수수 한 알을 감히 먹어버렸다. 유순함에 눈먼 나머지 비둘기들은 그 녀석에게로 몰려가 끌어내고, 손실을 보충해 넣고, 자신들의 무리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 상황을 보십시오. 당신은 물론 이러한 일이 자연상태에선 일어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성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론은 이중적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동물 위보다 고차원적 행위를 행한다고 결론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이성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에게서 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99마리, 비참 속에 태어나서 일하러 나가 버린 그의 어미를 거의 보지 못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하는, 일상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쓰레기더미 속에서 자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덤까지 그를 따라 다닐 병원균을 얻는 그 99마리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8살이 채 되자마자, 최소한의 근력이 생기자마자 일하러 갑니다. 희박하고 비위생적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혹사당할뿐더러, 무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다. 이는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제 20살이 된 그 친구는 그를 필요로 하는 부모를 떠나야만 합니다. 병영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전장에서 총을 맞아 죽기 위해서 말이지요. 만약 그가 살아서 도망칠 수 있다면, 그는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영국의 박애주의자 맬서스(Malthus) 선생이나 프랑스의 장관이신 뒤샤텔(Duchatel) 씨가 이 결혼을 허락한다면 말이지요. 이 분들은 노동자에게 부인이나 가족은 필요치 않으며,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에게 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하여간 결혼하면 바로, 가난, 궁핍, 실업, 질병과 함께 아이들이 그의 집에 들어앉습니다. 그래서 이제 비참한 자신을 보다 못한 그는 감히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지만, 프레스톤에서처럼 기아에 손발이 묶이거나, 샤를루아에서처럼 총질을 당하거나, 볼로냐에서 철창에서처럼 갇히거나, 카탈로니아에서처럼 포위 상태에 놓이거나, 여기 파리에서처럼 줄줄이 법정에 엮여 들어올 뿐이겠지요." "이렇게 이 비참한 자들은 고통과 수치의 길을 터벅터벅 걷습니다. 성년이 되면, 평온했던 유년의 기억 따윈 머리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노년이 기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가족이 없거나 가난한 상태에 머문다면, 그는 마침내 거지를 위한 시설에서 악인처럼 죽어가겠지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소비한 것의 네 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사회는 그 잉여를 어디에 쓴 것일까요? 100번째 비둘기에게 물어보면 알겠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99마리의 노동에 기생하던 그 녀석 말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엄격한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 불의를 따르는 어떤 민족이나 사회 조직체도 결국은 부패와 사멸의 먹이가 될 뿐임을. 이것이야말로 사치와 비참, 압제와 노예, 무지와 수치, 타락과 퇴화가 공존하는 이 시대에 지난 역사에서 확실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 위안인 것입니다. 금은보화가 삐져나오는 궁전의 문턱에서 굶어죽어 가는 인간이 있는 한, 국가 체계는 불안정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맥박을 짚어 보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놓지 않으려는 계급과 자기 노력의 과실을 되찾으려는 계급 사이의 소리죽인 분노를 듣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에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지독한 미신이 다시 복귀하고 있습니다. 방자한 이기주의와 붕괴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것은 쇠잔의 조짐입니다. 지반이 당신 발 밑에서 진동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조심하기를!" "위대한 정의를 실연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세계 무대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곤 했던 계급, 모든 시기 모든 정권 아래서 억압되었던 그 계급, 노동 계급은 이제 당신에게 부활의 수단을 건넵니다. 현명하게 그 정당성을 인정하시오. 그 대의를 방해하지 마시오. 그것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완전한 자유의 호흡만이 공기를 맑게 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구름을 흩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계급이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던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다면, 그들은 무대에서 퇴장해야 합니다. 만약 붕괴하는 모든 체제의 마지막 수단인 포악함을 피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노력은 이 시대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위대하지 않다는 것, 따라서 강력한 정치적 부활, 평등, 그리고 자유를 통한 연대의 도착을 알리는 젊은 계급 속으로 용해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도록 합시다."
이들 9명에 대한 법원의 선고는 3개월의 금고형에 100프랑의 벌금이었다. 피고인들은 항소하려 했지만, 결국 기각되었다."우리가 평화의 지속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유럽 여러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사상과 감정이 통일될 때다. 며칠 뒤 국제협회의 총회가 열릴 것이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그 곳에 대표를 파견하는데, 아마도 프랑스는 예외일 것이지만, 그 지혜로운 결의로 유럽의 모든 노동자 대표들이 모인 이 총회가 유럽의 암피트리온적인 평의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 만약 내일, 프랑스 혁명 불멸의 원칙에 통달하고 노동의 신성한 이익, 즉 질서, 안전, 자유를 포함하는 그 이익을 손에 넣어 이 총회가 평화를 선포한다면, 그 선언은 전 유럽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2. 벨기에 정부와의 투쟁
벨기에 부르주아 신문의 부추김을 받아, Independance belge를 앞세운 벨기에 정부가 국제노동자협회를 샤를루아의 혼란을 일으킨 주모자로 꾸미려는 시도가 있었다.파) 그러나 3월에 체포된 벨기에 노동자들을 조사하자 이 같은 혐의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1868년 5월, 벨기에 법무경찰 장관인 줄 바라(Jule Bara)는 벨기에 하원(Belgian Chamber of deputies)의 외국인 추방 법 갱신을 둘러싼 토론439)을 이용하여 악의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를 공격하였다하). 협회의 존재를 외국인법 갱신 제안의 1차적 구실로 삼은 그는 협회의 다음 총회 소집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국제노동자협회는 로잔 총회에서 1868년 9월 7일 브뤼셀을 다음 총회 장소로 지명했었다.갸) 이에 브뤼셀 집행위원회와 벨기에 국제노동자협회의 모든 구성원은 법무장관에게 5월 22일자 공개 서신을 공동 명의로 작성했다.냐) 그 편지에서 분명히 한 것은 장관이 협회 총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거리낌 없는 편지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장관님, 아래 서명자들은 당신이 우리의 대의에 크게 공헌한 것에 관해 감사를 보냅니다. 노동자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의회 회기 중에 화제로 삼아 의회 기록이 우리 원칙들을 유포하는 데 활용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요." "당신이 더 이상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당신네 신문들은 이 나라에서 협회가 거둔 성공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타조처럼 눈을 감고 위험을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우리를 하나의 세력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당신은 우리를 공식적으로 축성(祝聖)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당신의 태도로써 우리가 당신네들에게 하나의 세력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당신 무리들이 벨기에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시는군요. 우리의 협회를 돕기 위해 외국인이 온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안달할 테구요."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들의 운동이 해외에서 고취되고 지도되었다는 장관의 암시를 확고히 거부하면서 그 편지를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장관님, 하나 명심하셔야 할 것은 진(gin) 한 통에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한 사람이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로 움직일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우리의 활동을 이끄는 것은 모든 명예로운 정신에 깃들어 있는 정의, 오로지 그것 뿐입니다. 출범하자마자 우리 동맹은 이미 수천 명의 추종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전진한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 있습니다. 노동 해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은 당신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겠지만요, 장관님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듣기 바랍니다."
이후 편지는 국제노동자협회의 포부를 상세히 밝히고, 총회의 문건 중 더 많은 문서들을 입수해 읽으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정부의 위법사항이 제시된다. 샤를루아에서 빵 대신 죽음을 선물 받아 무고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을 상기시켰다. 파업이 노동자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충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파업은 자본의 가렴주구에 대항하여 아직까지 노동자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적법 수단인 것이다.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그렇소, 법무('justice')장관 나으리, 우리는 당신이 배반해 버린 그 정의의 승리를 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 없이도, 당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당신에 대항해 싸울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총회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아주 화가 나셨던 모양이지요. 장관 나으리께서 그렇게 부조리한 단어를 말하시다니… 예를 들어 당신은 '집회의 자유'를 선포하신 바 있는데, 우리는 장관님께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무사히 그것을 파괴하실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당신이 떠벌린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9월에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장관 나으리께옵선 우리가 벨기에에 풀어 놓은 천둥번개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완고한 권위주의 정부로써 그것을 불러들인 건 바로 당신네들입니다. 진짜 뇌성벽력은 거기 당신 곁에 있습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지만 말입니다."
1868년 6월 16일 회의에서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벨기에 정부가 공언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브뤼셀에서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열기로 한 벨기에 위원회의 결정을 추인하였다.440) 프랑스의 집행위원회 역시 동의의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총회에 참석하고 그 결과는 알아서 감당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파리의 Courrier francais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의 국제노동자협회에게 가해지는 동시적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이러한 해프닝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지금 협회는 유럽 전역에 걸쳐 놀라운 규모로 그 지지기반을 넓혀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반동들은 그것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그것이 어디에서건 사회 개조의 전위로 여겨진다는 점을 증명한다."
"미국에서 지난 몇 년간 이루어진 선동들은 갑작스레 완벽한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는 그 자체 가지고 있었던 특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입법부에 영향을 미친 여러 외부요인들의 우연한 일치와 논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전에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이 10시간 노동으로 줄어든 바 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으로 한층 단축할 것을 요구했다(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점을 확인해 두자.). 그래서 이름이 "8시간 운동"이다) 의회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요구를 거부해 왔으나, 갱신된 발의안을 예전과 똑같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두 당 모두 다음 대선에서 노동자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두 당 모두 분명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이 운동에 맞서 저 많은 유권자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어떤 노동자들이 약간의 언어유희를 가미하여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 그리고 8실링 임금"이라는 구호를 썼다. 앞서 말한 운동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한,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정도로 자신의 노동력이 쓰이기를 원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이나 불법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정부당국은 이 선동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도록 허락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것을 선호할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그 전능한 불문율은 여기서도 그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독일 부르주아의 기관지인 Kollnische Zeitung이 미국에서 8시간노동제 운동의 예기치 못한 성공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신문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이라는 "불문"율의 "전능함"을 믿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New-Yorker Handelszeitung 역시 바로 그 "수요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선언하고 있다."우리는 데마고그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러한 결정을 개탄할 수밖에 없다. 하원의 두 당 모두가 정부 사업장에서의 노동일을 임금삭감 없이 8시간으로 결정했고, 대통령이 이 법안에 기꺼이 서명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부가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고용자들이라면 자기 사업장의 노동시간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선동을 승인한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법이란 것은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를 규제하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공화국의 고상하고 자유로운 시민이라면 얼마나 자주 깨끗한 셔츠를 입어야 하는가, 또는 살면서 제대로 된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 찢어진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와 법이 무관한 것처럼. 그리고 생산력의 5분의 1을 불능화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진정 시의적절한지 여부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눈먼 노동자 대중의 환심을 얻고자 했던 이가 이 횃불에 뛰어들었고, 다가오는 대선 생각에 아무도 손을 델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노동력의 가격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규제된다. 국회가 이 문제를 다루고 싶어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상원과 하원의 신사들이 이 점을 보지 않았을 리 없다. 놀랍게도, 섬너(Sumner) 상원의원 같은 이도 이러 식으로 이어질 노동자의 교육적 필요에 관한 수많은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이러한 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민중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만이 민중의 친구일 것이다. 일단 선거가 끝나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머지 않아 8시간 노동제 운동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것인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대선이 끝나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미국의 입법부가 8시간 노동일 운동을 인정한 거대한 사건에 비하면 이 문제가 부차적으로 다루어진다.444)결과는 멀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미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부터 8시간 노동일의 원칙은 계속 전진하여 활발히 전개되어 아메리카 대륙, 영국, 그리고 유럽대륙 모두에서 노동자 계급의 도덕적이고 정당한 요구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수요와 공급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자 필요의 하한선까지 임금을 낮추는 모든 지역들에서 말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조건의 근면한 탐구자이자 권위자인 칼 마르크스가 1867년 7월 25일 예언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18세기에 미국 독립전쟁이 18세기에 유럽의 중간 계급에게 경종을 울린 것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는 미국 남북전쟁이 유럽의 노동자 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자본 제 1판의 서문] a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Trades' Unions"와 "Strik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b노동자 연합 관련 법을 폐지하고 그것을 다른 법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령 - Ed.본문으로 c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단어 "Strikes"와 "Grev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d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breach of peace"와 "restraint of trade"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eK. Marx, The poverty of Philosophy. Answer to the "Philosophy of Poverty" by M. Proudhon. - Ed.본문으로 416) 이 직종별 대표자 회의는 1866년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 셰필드에서 열렸고 200,000명의 조직된 노동자를 대표하는 138명의 대표자가 참석하였다. 노조에 국제노동자협회에의 참여를 호소하는 이 결의문은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 held in Sheffield, on July 17th, 1866, and Four Following Days, Sheffield, 1866 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본문으로 f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s..., Sheffield, 1866 - Ed.본문으로 g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단어 "Trades' Council"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17)주 38을 보라본문으로 418) 2차 선거개혁에 대한 일반 민주주의적 운동에의 영국 노조의 참여에 관여했다.본문으로 419) 이는 1867년 8월 15일 영국 의회에 의해 결국 채택된 개혁안을 지칭한다. 이 법은 투표권을 도시에 12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과 집이나 아파트를 세주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이전까지 투표권은 연간 12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이 되었다. 이러한 투표권의 확대로 인해 유권자의 수는 100만에서 200만으로 늘어났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비교적 부유한 계층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영국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표를 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 어떤 한 산업의 모든 공장과 작업장을 폐쇄하는 것,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감수하도록 하는 자본의 도구이다(아이이호프 주) 본문으로 420)1866년의 경제위기는 주로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유명한 '면화기근' 현상을 불러일으킨 미국 남북전쟁 이후에 발생하였다. 면화기근은 거대 생산업자에게는 극단적으로 유리하고 수 백의 소규모 공장에게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1866년 위기는 금용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탄광, 철강, 강철 산업은 생산을 줄이고, 철도 건설 등의 사업이 축소되었다.본문으로 421)이는 노동자의 연합과 파업을 금지하는 1791년 Le Chpelier 법의 폐지(프랑스, 1864)와 노동자 연합 금지 철폐를 의미한다.(벨기에, 1867)본문으로 h"Third Annual Report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뒤에 독일어 해석이 괄호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22)루베에서의 직공과 방적공의 파업, 파리에서 놋쇠 노동자 파업. 14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i V. Huriot, "M. Thiers a dir qu'en matiere de relations internationales, il n'y avait point de politique nouvelle...", Le Courrier francais, No.12, March 24, 1867 - Ed.본문으로 **이 파업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다음의 소책자에 수록되어 있다: Die internationale Arbeiterassociation und die Arbeitseinstellung in Genf in Fr hjahr 1868. Von Joh. Phil. Becker. Deutsche Verlagshalle, Pr -l' v que 33, Geneva, 1868. 이 책을 읽는 노동자에게, 수익금 전액을 파업 지원 중 생겨난 비용 부담 목적에 사용하는 강심장 조 필 베커(Joh. Phil. Becker)의 소책자와 월간 Vorbote를 강력히 추천한다. 조 필 베커는 그 자신이 노동자 출신으로서 노동계급을 위해 칼로 말로 펜으로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단호하게 한 평생을 바쳐 싸워온 인물이다. 노동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 사람은 그 사유에 있어 독창적일뿐더러 열정적인데, 요즈음 모든 노동 써클에 들이대는 "신물나는 덕성과 허무한 도덕"a1의 소인배a2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노동계급에게 인정받을 만하다. 그는 스위스 국제노동자운동의 삶과 혼이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협회에 가입한 모든 독일 성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아이히호프 주)본문으로 a1Heinrich Heine, Neue Gedichte: Romanzen 7, anno 1829. - Ed.본문으로 a2Littel great man - Ed.본문으로 423)제네바 파업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 자신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 "The Fourth Annual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와(이 책 p.16) 국제노동자협회 4차 연례총회 총평의회 보고서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to the Fourth Annual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책 p.47를 보라)본문으로 j사무실 Offices. - Ed.본문으로 k Neue freie Press, Nos.1286(supplement), 1288, 1291, March 29, 31, April 3을 보라본문으로 424)이 상황에 대한 묘사는 마르크스에 의해 쓰여졌다. 벨기에 대학살("The Belgian Massacres")를 보라. (이 책, p.47)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리차드 휘팅(Richard Whiting)의 추산을 따름. 프랑스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자들에 비해 어느 정도 열악한 지를 계산하기 위해 그는 두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재의 가격 차이를 비교한다. 그는 노동자가 프랑스에서 5프랑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영국에서 5실링(이는 6프랑에 해당된다)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같다고 한다. 가격 차이는 여기에서 16 2/3 퍼센트라는 임금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프랑과 실링이 지닌 가치가 양국에서 동일함을 밝혀 낸 뒤, 그는 프랑스에서 임금이 영국에서보다 적어도 10퍼센트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프랑스, 벨기에, 라인 프러시아(Rhenish Prussia)에서 임금이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 또한 밝혀내었다.본문으로 l"Die Lage der belgischen Kohlenarbeiter", Demokratisches Wochenblatt, Nos.20 and 21, May 16 and 23, 1868. - Ed.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Demokratisches Wochenblatt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독일 인민당(German People's Party)의 기관지이고 C. W. Vollrath에 의해 출간된다. 편집장은 Wilhelm Liebknecht.본문으로 425)이 호소문은 총평의회(1867년 2월 26일 회의)에서 지시한 사항을 에카리어스(Eccarius)가 작성하고, 1867년 3월 13일 The International Courier No.8에 수록한 것이다.본문으로 m영문 원본에서 "the thunderer of Printing House Square"라고 되어있다. - Ed.본문으로 nThe Times, Nos.25678, 25689, 25692, 25695 December 11, 24, 29 and 31, 1866; No.25708, January 15, 1867을 보라 - Ed.본문으로 o"La grave de Marchienne-au-Pont", L'Economiste belge, No.3, February 9, 1867 - Ed.본문으로 pIbid. - Ed.본문으로 q영어 원문에는 "the affair" - Ed.본문으로 r이 책 pp.14-1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6)자마이카 영국 식민지 총독 에어(Eyer)는 1865년 10월 흑인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 학살은 영국에서 대중적 격분을 일으켰고, 영국 정부는 에어를 해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본문으로 sWhite terror - Ed.본문으로 427)1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tK. Marx,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연설" - Ed.본문으로 428)분리주의자(the Secessionist)들은 1861~65년 남북전쟁 당시부터 남부 11주의 미연방 탈퇴를 주장한 이들이다. 1861년에 노예주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동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줄여서 CSA)을 결성한다.본문으로 uK. Marx,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럼 링컨에게" - Ed.본문으로 v "Mr. Lincoln and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London, Jan.31", The Times, No.25101, February 6, 186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9)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보-오전쟁)을 지칭한다. 13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1867년 9월 18일 무장한 페니어주의자들이 맨체스터에서 경찰의 열차를 습격하여 두 명의 정치범(페니어주의자 간부)을 구출하였다. 경사 한 명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전국에서 정기적인 순회재판을 보장하는 영국법에 반하여 이 사건은 특별조사위원회가 처리하였는데, 이들이 마련한 특별재판에서 그 공격에 가담한 죄로 고발된 페니어주의자들은 경찰관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름난 판사인 블랙번(Blackburn)은 수감자 탈출에 가담했다고 밝혀진 모든 피고인들이 이에 따라 살인혐의가 인정된다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배심원을 설득하였다. 블랙번 판사는 5명의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평결을 내리고 사형을 언도하였다. 5명 중 2명의 집행은 연기되었고 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868년 6월 2일 바로 그 블랙번 판사는 자마이카 전 총독인 에어(Eyre)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영국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A. Cockburn)경의 견해를 인용하며 에어가 행정권을 남용하지 않았다고 대배심을 설득하여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6월 8일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은 퀸즈 벤치430)법정에서 블랙번 판사가 사실을 날조했다고 기소했고, 블랙번 판사는 자신의 사법적 실수를 인정하였다.본문으로 430) 27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w이 책 3~4페이지를 보라. - Ed.본문으로 x "London Meetings", The Times, No.25974, 1867년 11월 21일 - Ed.본문으로 4311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y독일어 원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프랑스어 "tacite"이 라틴어로 괄호안에 적혀있다. - Ed.본문으로 z Paul Boudet - Ed.본문으로 ㄱ 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분쟁은 1866년 제네바 총회 뒤에 일어났다.(13번 주를 보라) - Ed.본문으로 432)1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33)프랑스 국경에서의 이 사건과 프랑스 대표단 문서(Memorial of the French Delegation)(pp. 365~66을 보라)의 압류에 대한 아이히호프의 기술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에 수록된 마르크스의 작업을 이용하고 있다.(이 책 12~14페이지)본문으로 ㄴJohn George Eccarius - Ed.본문으로 ㄷCharles La Vallette - Ed.본문으로 ㄹ 나폴레옹 3세본문으로 ㅁ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편지는 3월 9일자로 되어있다( "A M. le ministre de l'intereur. Vendredi, 9 mars 1867",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 - Ed.본문으로 ㅂIbid - Ed.본문으로 ㅅ 제 1인터네셔널 파리 지부의 문서 담당관인 Antoine Marie Bourdon이다.본문으로 ㅇ독일어 원본에는 프랑스어 문장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괄호 안에 제시되어 있다. 1867년 3월 10일 벌어진 이 회담의 내용은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에 수록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34)1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ㅈ1868년 전야(12월 31일) - Ed.본문으로 435)이 장(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의 마지막까지의 텍스트는 국제노동자 협회 회보. 파리 사무소(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 Travailleurs. Bureau de Paris)(Paris, 1868)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의 요약 및 직접인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톨랭의 심문에 관한 기록을 보려면 이 책의 pp.12~15를 보라.본문으로 ㅊ 들르스보 (Delesvaux) - Ed.본문으로 ㅋ이는 Manifeste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suivi de Reglement provisoire, Breussels, 1866을 지칭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요청에 따라 찰스 롱게(Charles Longuet)에 의해 번역되었다. 롱게는 임시규약(Provisional Rules) 첫 번째 불역본의 오역을 바로 잡았다.-Ed본문으로 ㅌ독일어 원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속에 프랑스어가 제시되어 있다.본문으로 ㅍ강령 중에서 톨랭이 읽은 부분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l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aris, 1868. pp.14~15이다. - Ed.본문으로 ㅎ"Reglement de Bureau de Paris." In: Pre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pp.22~24 - Ed.본문으로 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16,20 - Ed.본문으로 436) 이는 1867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통치자들 사이에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더키(Grand Duchy)를 둘러싼 분쟁을 지칭한다. 이는 군사적 준비를 불러왔고 양 나라에서 모두 경솔한 군사적 프로파간다가 수반되었다.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향한 전초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867년 10월 17일 Liebknecht가 제국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비스마르크의 룩셈부르크 문제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였다. 10월 22일 총평의회 회의에서 마르크스는 그 연설문 요약을 읽었다. 그 연설은 이 총평의회 회의 보고서에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The Bee-Hive, No.315, October, 1867에 수록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라파르그를 시켜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도록 하여 Le Courrier francais에 싣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었다.본문으로 나)Ibid., pp.32~35 - Ed.본문으로 다)Paul Boudet - Ed.본문으로 라)Congres de Geneve. Memoire des delegues francais, Brussels, 1866 - Ed.본문으로 마)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39~40 - Ed.본문으로 바)Code Penal, ou code des delits et des peines, Cologne, 1810 - Ed.본문으로 사)Loi sur les associations, 10~11 avril 1834 - Ed.본문으로 아) "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Le courrier francais, No.71, March 14, 1868 - Ed.본문으로 자)이 호소문은 Le courrier francais, No.101, April 20, 1868에 실렸다. - Ed.본문으로 437) 16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차) Proces..., pp.124~26 - Ed.본문으로 카)"Correspondance. Travail et Cooperation, Londres, 27 avril 1868", La Cooperation, No.18, May 3, 1868 - Ed.본문으로 438) 1852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의 이름으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가 프랑스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것으로 제 2공화국이 붕괴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로 끝나게 된 쿠데타는 1년전인 1851년 12월 2일에 발생하였다.본문으로 타)Ch. Delescluze, "Le droit d'Association. Devant la justice", Le Reveil, No.2, July 9, 1868 - Ed.본문으로 파)이 책 p.14를 보라 - Ed.본문으로 439)5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하)1868년 5월 16일 Jules Bara의 하원의회에서의 연설, La Voix de l'Avenir, No.23, June 7, 1868; La Liberte, No.47, May 17, 1868을 보라 - Ed.본문으로 갸)브뤼셀 총회는 1868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열렸다.본문으로 냐)"A Monsieur Bara, ministre de la Justice", La tribune de peuple, No.5, May 24, 1868 - Ed.본문으로 440)2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42)Grutli 노조 (Grutli-Verein) - 스위스 개혁주의 단체인데, 장인들과 노동자의 교육협회로서 1838년 설립되었다. 그 이름은 스위스의 국가적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스위스의 전설에 따르면 스위스의 세 개 주의 대표가 1307년에 Gr tli (루틀리, Rutli)의 풀밭에서 만나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한 저항동맹을 결의했다고 한다.본문으로 443)이는 1850년 3월 11일 제정된 반동적인 프로이센 법과 관계되어 있다.본문으로 444) 미국에서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은 1840년대와 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 들어와서 그 운동은 대중적 성격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연대체(league)와 노동조합이 동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National Labour Union) 역시 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대중운동의 영향력 때문에 미국 의회는 모든 정부 기업과 연방 기구들에 대한 8시간 노동일 법을 1868년 6월 25일 상정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고용자들은 이를 실행하지 않거나 위배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고용자들에 대해 저항할 것을 노동조합에 주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미국 노동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윌리엄 실비스(William Sylvis)의 적극적인 관여로 1866년 8월 볼티모어 대회를 거쳐 설립되었다. 1866년 10월 9일 쿠겔만(Ludwig Kugelman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볼티모어 대회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제안한 모든 요구들이 거기에 담겨있네, 노동자의 정확한 본능에 의해서 말이지." 1866년 10월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와의 관계를 확립하였지만, 1867년 8월 시카고 대회에서 선출된 대의원인 리차드 트레벨릭(Richard Trevellick)은 로잔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최근 대회인 바슬(Basle) 대회(1869년 9월)에는 카메론(Cameron)이 전미 노동조합의 대표였다. 1870년 8월 열렸던 전미 노동조합의 신시내티 대회에서 카메론은 자신의 국제노동자협회 대회 참가를 보고하였고,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원칙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확인하고, 협회에 가입할 것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그 결의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 지도자들이 화폐 개혁의 유토피아적 공상에 포섭되었고, 1870년과 71년 많은 노동조합들이 떨어져 나가, 72년 전미 노동조합은 거의 개점휴업상태가 되었다.본문으로8. 국제노동자협회, 노조, 파업a 국제노동자협회가 설립되면서 영국 노조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전까지 이들의 투쟁은 오로지 임금과 노동시간에 국한되었고, 편협한 중세 길드 체계에 얽매여 있었다. 노조들은 완전히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1825년 의회법b에 따라 인가를 받고, 매일같이 벌어지는 노동과 자본의 투쟁 때문에 필수적이 된 정부가 인정하는 단체다. 그들의 목표는 고용주와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은 파업c인데, 파업의 합법성은 평화의 파괴(breach of peace)를 회피하고 강제적인 작업제한(forcible restraint of trade)d을 시도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 앞서 말한 법에 의해 보장되었다. 이 법의 비호 아래 노조는 영국의 모든 공장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그 수, 조직, 기금을 갖춘 덕에 강력한 단체로 성장하여 고용주와 대립하는 가운데 그들이 항상 고려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조는 모든 정치적 반동의 시기 속에서도, 고용주과 자본가의 반동책략 가운데서도, 지난 수 십 년간의 모든 궁핍과 경제 공황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마르크스가 일찍이 1847년에 프루동을 비판하는 저작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파리, 1847)e에서 밝혔던 바대로, 중세 행정자치구(commune)의 성립이 부르주아 사회의 중간 계급에게 가졌던 중요성만큼이나 노동 계급의 조직화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 편으로 노조가 설사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노동 계급 조직화의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긴급하고 현재적인 목적들 곁에서 일반적 목적, 즉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사회적 해방을 얻어낸다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제 노조 자신이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국제적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본성에 있어 노동운동은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자명해졌다. 이러한 이유에서 1866년 셰필드에서 열린 영국 노조 대의원들의 대규모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입안·채택되었다.416)
우리는 국제노동자협회가 만국의 노동자들이 형제애(brotherhood) 안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도록 기울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 자리에 모인 대표들이 속한 다양한 단체들 모두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할 것을 진심으로 권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체 노동계급의 진보와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f
런던 노동평의회g 417)는 영국 노조들의 중앙기구로서, 역시 런던에 소재하던 국제 노동자 협회의 총평의회와 합의를 맺었다. 런던평의회의 서기관 오드거(Odger)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 구성원이다. 이 시간 이후에서야 영국 노조 활동은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이 최초로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했을 때부터 곧바로 드러나게 된다.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러셀-글래드스톤(Russell-Gladstone) 내각이 1866년 6월 붕괴하고 난 뒤 의회 개혁은 기약 없이 중단된 듯 보였다. 토리당 지도자들은 다수의 갈채 속에서 어떤 개혁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적 운동을 떠맡았다. 대규모의 대중 집회가 런던(London), 버밍엄(Birmingham), 맨체스터(Manchester), 글래스고(Glasgow), 브리스틀(Bristol) 등지에서 열렸다. 노조는 자신들의 역량을 다해 이 집회에 참여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운동의 지도부인 '개혁 동맹Reform League'418)을 지지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승리를 쟁취했고, 토리당 정부는 의회적 개혁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419)"런던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서도 자본가들의 전횡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외국인을 고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체근로의 가능성은 영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힘있게 주장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총평의회의 활동은 이러한 위협을 공공연히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대체근로는 비밀리에 추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노동자가 대체근로의 낌새를 채는 것만으로도 자본가들의 계획을 충분히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협회에 속한 작업장에서 파업이나 직장폐쇄가 일어나면 유럽 대륙의 연락소에서는 각각의 지역 노동자들에게 즉각 영국의 분쟁 사업장의 자본가들 및 그 대리인과의 계약에는 응하지 말 것을 교육하였습니다. 협회 소속 작업장이 아닌 경우에도 협조가 된다면 다른 직종을 대신하여 똑같은 조치가 취해집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하여 철도굴착 노동자, 차장, 엔진 운전자, 도금 노동자, 전선 노동자, 벌목 노동자 등의 작업장 및 공장에 관련된 파업 기간 동안 영국 자본가들의 책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런던의 바구니 노동자 파업에서와 같은 몇몇 사례에서 자본가들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노동자들을 몰래 입국시켰지만,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호소에 따라 그들은 영국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했다. 협회의 파리 집행위원회는 일부 노동자 집단을 지원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루베(Roubaix)에서 리본 제조업자들은 그들의 공장에 자의적인 처벌규정을 도입했는데, 이는 자연히 임금 삭감의 효과를 불러왔다. 이 벌금 체계의 필연적 결과는 이 제도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와 직장폐쇄, 그에 대한 반란과 당국의 무력개입이었다.422) 그러나 여기서 파리의 국제노동자협회 중앙위원회가 개입하였고, 생산업자 자신들이 만들고, 적용하고, 처벌까지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내부규정은 현행법에 위배됨을 밝혀내었다. 이 결과로 프랑스 정부는 순수한 경영상의 내규 이외에 벌금을 부과하는 어떠한 사적인 공장 내규도 불법이며 전적인 횡령에 해당됨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가 개입하였던 사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1. 1867년 2월의 파리 놋쇠 작업장 폐쇄
이 싸움의 가장 근본적인 의의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에서 노조가 이제 막 합법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약 5,000명 규모의 놋쇠노동자조합은 합법화의 이익을 입은 최초의 노조로서 1866년 초 영국 모델을 따라 노조를 건설하였다. 그 시작부터 이들은 자연히 고용주들에겐 눈에 가시였고, 자본가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기회가 닥쳐온 것은 1867년 2월로, 당시 노조는 조합원을 대표하여 5명의 고용주에게 자신의 결정사항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즉각 동맹을 맺고 구성하여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탈퇴하던지 아니면 직장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87명의 고용주가 1500명에 달하는 노동자를 포괄하는 직장폐쇄를 단행하였을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는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폐 자체를 둘러싼 싸움이었던 것이다. 직장폐쇄 초기에, 놋쇠노동자들은 35,000 프랑의 기금을 가지고 있었다. 노조는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주당 20프랑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고, 월 5,000 프랑을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주선 하에 영국의 노조로부터 대부를 얻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승리하였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로부터 바라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하였던 런던 총평의회의 도덕적·재정적 지원, 그리고 프랑스의 다른 노조들로부터 놋쇠노동자들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한 국제협회 파리 중앙평의회의 개입 덕분이었다. 영국인 동료들로부터의 협력을 통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승리라는 사회적 중요성 외에도, 이 사례는 국제적인 의의를 지닌다. 프랑스의 일간지 Courrier fran ais는 1867년 3월 24일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i"티에르(M. Thiers)씨는 국제관계에서 어떠한 새로운 정책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하고 결코 고립되지 않은 사실이 이제 막 발생했다. 민중들로부터 온 이 사례는 실로 새로운 무언가의 예고 노릇을 한다." "우리는 수 백 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인 사이의 격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증오가 여전히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는지 어떤지는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파리의 놋쇠노동자들에게 이들의 임금과 일자리를 건 싸움에 연대와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치체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정당들이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1868년 봄 제네바 파업 **
파리 놋쇠노동자 건이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재를 건 싸움이었다면, 스위스에서의 이 사례는 대륙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존망을 결정짓는 것이었다.423) 국제노동자협회와 일군의 제네바 자본가들과의 불화가 발생하였는데, 그 경과는 다음과 같다. 1867년 8월 이래로 제네바의 건설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대한 깊은 불만의 조짐이 있었다. 건설노동자들의 전체 회의는 1868년 1월 19일에 열렸는데, 여기서 이들은 공동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이 위원회는 고용자들과의 협상과 우호적인 협의를 통해 일일 12시간 노동을 10시간으로 줄이고 20%의 임금인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내용을 담은 협정서을 작성해서 모든 고용주들에게 배포했다. 고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대응조직을 결성하고 건설 부문 고용자 총회(genetal meeting)를 3월 18일로 공고했다. 자본가들의 임시 위원회는 총회 개시 전에 노동자와 자본가 대의원의 평화적 대화를 요구하는 노동자 위원회의 거듭된 제안을 무시하였다. 사실 이들의 태도는 곧 있을 총회에서 그들이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를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동자 위원회는 고용자 위원회와의 협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선언하고 3월 14일 저녁 국제노동자협회의 제네바 중앙 위원회가 이 일을 맡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협회는 이러한 요청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협회는 3명의 제네바 시민으로 된 위원회를 선출하였는데, 이들이 중재를 위해 기울인 개인적인 노력 역시 실패하였다. 18일 총회를 거쳐 결국 고용자 협회를 만든 이틀 뒤인 3월 20일, 위원회는 "모든 건설업자 여러분"을 대상으로 하는 3월 23일 회의를 공개제안 하였다. 바로 다음 날 신문지상에 18일 열린 총회 명의의 공식 답변이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18일 총회에서 결정한 바 자신들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위원회와는 무엇이 되었건 대화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단 3표의 반대만으로 통과시켰다는 것이었다. 23일 아침 국제노동자협회의 노동자 위원회는 벽보를 붙여 이 같은 상황을 알리고 만약 당일 저녁까지 호의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고 고용주들과의 모든 평화적 이해의 여지가 사라진다면 국제노동자협회 전 부문의 총회를 소집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그날 저녁 6시 신호가 주어졌고, 협회의 회원들은 노조의 시설이 있는 론 가(Rue de Rhone)의 도처에 모였다. 부르주아들은 공황에 빠졌다. 상점과 집 문을 걸어 잠궜고, 현금보관함을 안전한 곳에 숨겼다. 일부 사무실j의 직원들은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았다. 그 동안 협회에 소속된 5,000 명의 건장한 노동자들이 사정권까지 행진했는데, 이 곳은 원래 총회가 예정되었던 장소였다. 여기서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논의하고 입을 모아 건설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지원을 확신시켰다. 이렇게 되고 나자 국제노동자협회가 아닌 제네바의 노조 지도부들이 조합원의 열광적인 환호와 연대에 대한 단호한 확신을 등에 업고 벽돌절삭공, 벽돌공, 미장공, 페인트공 등의 파업을 선언하게 된다. 그 결과 회합은 조용히 해산되었다. 그날 밤 9시가 되자 제네바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불가피했던 파업 선언이 25일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브뤼셀, 파리, 리용에 있는 집행위원회로 전달되었다. 협회의 제네바 지부로서는 이미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 버린 파업의 규모 때문에 긴급하게 지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한 편 고용주들은 잽싸게 티치노(Ticino)와 피에드몬트(Piedmont) 등지에서 이들을 대체할 노동자를 들여오려 했다. 그러나 대체인력들은 도착한 순간 국제노동자협회 건물로 인도되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이들 역시 파업대오에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 시기 국제협회가 온갖 야만적 공격과 가장 악독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Journal de Geneve가 그러한 어조를 유지했는데, 이 신문은 비엔나의 Neue Zurcher Zeitung, Neue freie Pressk와 기타 여러 급진적, 자유주의적, 보수적 부르주아 기관지들의 열렬한 지원을 받았다. 제네바 중앙평의회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파업 원인 자체는 뒤로 물러나고, 국제노동자협회가 상황의 전면에 부각되게 되었다. 3월 28일 고용주 협회는 26일자로 된 벽보를 붙여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최대한 공평하게 다룰 것을 약속하는 한 편, 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전횡과 공갈을 경고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국제협회는 외국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파업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예전의 친밀한 상호이해를 상기시키면서 선의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작업장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기꺼이 올려줄 것이며, 11시간의 노동시간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노동자들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아직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건설부문 작업장조차 폐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합의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는데, 왜냐하면 고용주들이 국제협회에서 나온 대의원들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어떠한 노동자도 개별적으로 복귀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폐쇄는 3월 30일까지 지속되었고, 가구장이, 목수, 주석광부의 사업장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러한 폐쇄가 제네바 노동자에게 미친 가져온 도덕적 효과는 이전까지 국제협회에 거리를 유지하던 마차제조공, 편자공, 안장공, 실내장식업자, 줄갈이공(file-cutter), 제혁공, 그리고 기타 노조들조차도 부문별로 협회에 가입을 요청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며칠 사이 협회는 1,000 명이 넘는 새로운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귀금속 업계에 고용된 노동자들, 예를 들어 금세공업자, 시계 제작자, 그릇 제조업자, 세공업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제네바 시민이었는데, 3월 30일 2,000명 규모의 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일제히 건설노동자의 대의가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도덕적, 물질적 수단을 통해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제협회와 관련해서 이 모임은 제네바 노동자들이 외부세력의 전횡에 지배되고 있다는 악의적인 거짓선전을 거부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 이때까지 국제협회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모든 합의에 이르는 길이 봉쇄된 지금 문제는 파업을 보다 오래 지속할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국제협회의 제네바 중앙평의회는 약 3,000 명의 노동자와 가족을 지원해야만 했고, 이는 제네바의 노동자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도움의 손길은 도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먼저 제네바 노동자들과 노조가 보여준 자기희생의 정신이 가장 먼저 치사받아 마땅하다. 제네바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과 빵을 나누었다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렇게 개인들이 임금을 자발적으로 기부한 이외에도 노조의 예금은행과 구제기금도 500프랑에서 5,000프랑에 이르는 지원금을 갹출했다. 다른 스위스 도시의 노조와 스위스 주재 독일노동자 단체들도 내놓은 지원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독일로부터의 원조 하노버(Harnover, Workers' Union), 함부르크(Hamburg,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쉬베린(Schwerin, building workers), 로스톡(Rostock), 카우케멘(Kaukehmen), 솔링겐(Solingen), 만하임(Mannheim, Tailors' Union), 에슬링겐(Esslingen, Workers' Educational Society), 뮌헨(Munich,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외 다른 도시들-도 있었다. 특히 적극적이었던 곳은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파리와 브뤼셀에 있는 집행위원회였다. 4월 초가 되자 총평의회는 더 많은 금액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몇 가지 형식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만 최소 월 40,000 프랑에 이르는 돈을 일부는 융자, 일부는 원조의 형태로 파업이 승리할 때까지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브뤼셀과 파리의 집행위원회의 중재를 통해 두 도시의 노조들에서 상당한 양의 기부금이 제공되었는데, 이를테면 인쇄업자들로부터 2,000프랑, 파리 주석광 노조로부터 1,500프랑 등등이 있었다. 고용주들은 그제서야 노동자들을 말려 죽이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이미 협회의 중앙평의회와는 절대로 교섭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에 협상은 주의회(State Council) 의장이며 제네바 사법경찰국장(Chief of the Justice and Police Department of Geneva)이기도 한 캄페리오(Camperio)가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협회의 중앙위원회에 모든 건설부문 직종 대의원이 4월 8일 협상타결을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회합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이미 협상 3일 째 합의가 도출되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시간을 1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2시간을 단축하기로 합의하였고, 10퍼센트의 임금인상에 동의하였다. 그 날 저녁(4월 11일) 캄프리오는 벽보를 붙여 그의 중재를 통해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파업은 종료되었으며, 월요일(4월 13일)에는 모든 작업이 재개될 것이라고 알렸다. 국제노동자협회 역시 파업의 만족스러운 타결과 노동자들이 파업기간 동안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들을 치하하며 지난 날들의 고난은 잊고 월요일에 활기차게 일터로 복귀할 것을 주문하는 선전포스터를 붙였다. 국제노동자협회에 있어 이 투쟁은 스위스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3. 벨기에 정부와 샤를루아(Charleroi) 광산노동자 간 유혈투쟁 (1868년 3월)
벨기에는 부르주아의 천국이다. 이 나라의 정체(政體)는 부르주아 국가의 이상적 모델이다. 정부는 부르주아의 대행자이고, 자본 지배의 대리인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익 사이의 사소한 대립일지라도 화약과 납탄이 횡행하는 유혈사태로 마무리되는 게 여기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424) 국제노동자협회가 그 곳에서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의 대의에 더욱 확고히 관여할수록, 샤를루아 광산 지대 노동 쟁의의 대의를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다. 많은 나라의 국내 산업들 중에서도 석탄과 철은 그 정점에 위치해 있다. 그 두 산업은 유기적 전체를 이룬다. 어떠한 제철소나 용광로도 석탄 없이 가동될 수 없고, 채탄산업의 입장에서도 이 둘은 가장 큰 소비자다. 따라서 한 쪽에서의 교란은 다른 쪽에 곧바로 그 영향을 미친다. 모든 위기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야금산업의 위기는 석탄가격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석탄과 철에 있어 자연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에는 석탄과 철 모두 지표 가까이 묻혀 있어 채굴이 손쉽다. 한 편 프랑스는 자연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나라인데,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야금산업은 영국이나 프러시아의 석탄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프랑스로서는 석탄 수입이 필수적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석탄을 생산하는 벨기에는 몹시 난감한 경쟁을 겪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석탄이 팔리는 가격에 영향이 있는 운송비용을 고려할 때, 영국이나 (라인강과 그 지류들로 이어진 수로를 가진) 프러시아가 운송 면에서 훨씬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에서 일반적인 석탄의 가격은 석탄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에 달려있다. 실제로 각 국가에서 동일한 양의 석탄을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시간 양의 차이로 인해 이 요소의 국제적 관련성이 눈에 띤다. 임금 또한 노동시간과 마찬가지로 국가별 차이가 있는데, 영국에서는 대륙에서보다 최소 26 2/3퍼센트 높다.*** 이것이 양국의 석탄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철과 철강 산업의 위기 혹은 다른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불황이 석탄 가격을 낮추면, 탄광소유자는 임금을 낮추려 한다. 그러나 임금이 이미 충분히 낮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고, 특히 흉작이 들이닥친 시기의 임금삭감은 노동자를 절망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임금삭감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변명이 있는데, 하나는 영국에서만 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륙에서만 통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통하는 변명은 대륙의 낮은 임금이다. 대륙에서 통하는 변명은 영국산 석탄의 낮은 가격으로 인한 경쟁 심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 광부들이 어느 정도까지 궁핍에 내몰렸는지는 Demokratisches Wochenblatt에 실린 다음의 기사l 를 보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벨기에 광부들보다 더 통탄할 만한 궁핍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계 부품으로 전락했다고도 할 수 있을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이들은 거의 모든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박탈당했다. 여기 노동자들은 말, 당나귀, 채굴도구, 기타 비품 등과 함께 광산업자의 자산 목록에 올라와 있는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실이다. 광산회사는 더 많은 노동자를 손에 쥐고 있을 때 더 부유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회사가 '인도적 차원'에서 노동자 거주지를 만든다면 회사가 얻는 직접적 이익은 많아봐야 2퍼센트에서 3퍼센트 내외가 될 것이지만 그 간접적 이득은 거의 측정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왜냐하면 회사로서는 이를 통해 광산에 자신의 생존을 건 노동자를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어떤 작업환경 아래서든 광산의 가동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광부들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선심쓰듯이 부르는 말인 자유인이 아닌 농노나 노예라고 부르는 것이 낳겠다." "모든 노동계급 중에서 특히 벨기에 석탄노동자들은 노예 표식을 달고 있다. 무지, 잔인함, 육체적 정신적 퇴화.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아마 다른 어떤 산업보다 인간에게 해로운 산업을 자본이 제한 없이 지배할 때 나타나는 안타까운 결과이다. 물론 부르주아들은 광부들의 이 비참한 신세를 바로 자신들이 초래한 잘못과 악덕, 조심성 부족, 경솔함과 방탕에 원인을 돌리기만 할 뿐이다. 현명하시게도 부르주아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공허한 동정심만으로는 도저히 그 출구를 찾을 수 없지만 가능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일반 이익에 부합하는 상황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원인과 환경들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광부들을 살과 뼈로 만든 기계와 다름없이 만드는 요인 중에 가장 큰 것은 작업의 성질과 작업환경 자체, 그리고 너무나 긴 노동시간이다. 노동시간이 노동 강도의 증가와 같은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은 현 사회 체계의 경제 법칙이다." "광부들의 노동은 순전히 육체적이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활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뇌는 거의 정지 상태에 있다. 정신적 활동은 어떠한 자극도 받지 못한 채 초보적이고, 생기없는 수면상태에 머무른다. 결과적으로 두뇌활동은 극단적으로 편협해진다. 그 활동이 순전히 육체적인 것처럼 욕구와 취향 역시 전적으로 육체적이고 잔인해진다. 만약 당신이 그 직업의 특성을 알고 있다면 광부들의 지적, 도덕적 퇴화는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격심한 노동의 파괴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그 습관들과 품행이 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뭇 불가능한 일이다." "광부의 가치는 오로지 그의 근육에 의해 매겨진다. 지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일하는 데는 기술, 재능, 교육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적 능력 하나면 족하다. 광산에서의 다양한 작업들에 대한 간략한 묘사만으로도 독자들은 현재의 경제 체계 아래서 광부가 스스로의 육체적 능력, 정신력, 도덕성을 고양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광산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정으로 나뉜다. 갱도작업자가 광맥층으로부터 석탄을 캔다. 불도저가 그것을 통로로 가지고 나가면, 갱도의 하역인부가 그것을 수레나 바구니에 담는다. 그 바구니를 끌어당겨 지표에 이어진 수갱으로 옮긴다. 길을 뚫는 사람, 견인차, 흙 운반인은 갱도를 파내거나, 수갱을 뚫고 거기서 나온 흙과 암석을 퍼낸다. 이 모든 작업은 조그만 등불이 밝혀주는 희미한 빛 아래에서 먼지로 가득한 공기를 마셔야 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광부들은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옆구리로 눕는다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엎드리거나 고되게 몸을 구부린 상태에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기어 다닐 수밖에 없다. 굴착노동자나 들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역시 전적인 육체노동을 수행한다는 점은 같지만 이들은 그나마 햇볕이 드는 개방된 공간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탄광노동자의 고통스런 조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래도 탄광노동자들이 정신적 도덕적으로 미약한 수준에 있다는 것이 놀라운가? 어떻게 환기도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하루 15시간 내지 18시간 일을 시키면서 사람의 인격을 가지길 바라는가? 이렇게 사람의 성정을 파괴할 뿐인 작업조건에서는 아무리 신께서 행복한 성정을 부여한 사람일 지라도 금방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육체가 도덕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육체적 상태는 대개 정신의 지표인 것이다. 상공회의소의 1844년 공식 보고서를 보면 탄광노동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얼굴이 창백하고, 골격은 굽어 있고, 다리는 휘어 있으며 걸음은 매우 느리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40세에서 50세가 되면 조기노화의 징후가 나타난다.'" "탄광기술자인 비도(Biduat) 씨는 1843년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이 직업(채탄공)을 가진 이들은 항상 태양빛을 보지 못하고, 공기 대신 유독가스를 들이마시고, 부자연스런 자세를 취해야 하며, 항상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등 정상적인 삶의 조건에서 인간을 가장 멀게 만드는 종류의 일을 하여야만 하므로 이에 대한 더 특별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나에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43년에 사실이었던 것이 1868년에도 마찬가지다. 채탄공의 신체적·정신적 여건이 비록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확실히 개선되지 않았다. 노동시간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임금 역시 현재의 경기후퇴를 무시하더라도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데에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탄광에 여러 가지 개선책들이 도입되었지만, 이 개선책이란 노동자와는 관계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위아래를 오가지는 않지만, 그렇게 절약된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은 일을 하는데 바치는 것이라 이러한 개선은 자본가의 이익만 될 뿐이다. 그 결과 채굴노동자는 정신적 유연성을 잃고 학교와 교육을 '게으름뱅이'의 전유물로 치부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조잡한 오락과 쾌락에만 탐닉하게 될 뿐이다. 탄광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야만적 상태를 유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적으로 노동자에게서 이윤을 뽑아내기 때문에 만약 노동자들이 정신을 차려 신중하고 사려깊게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수익성을 잃게 될 더 못한 산업들이 풍부한 데서 도움을 받는다. 탄광주들은 노동자들에게서 단돈 1 페니라도 쥐어짜내기 위해 온갖 함정을 준비해 놓는다.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하여 정신적 능력이 동면에 들어 가 버린 이들을 구슬려 등골을 빼먹는 것은 얼마나 쉬운지!" "이런 상태는 계속될 수도 없고 계속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성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 인간성의 호소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법칙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하지만 부르주아가 아무런 도덕적 후과 없이 노동자들을 농노나 가축 수준으로 후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장지역이나 광신지구의 부르주아를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문화와 교육에 대한 경멸, 경영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사고의 결여, 그리고 부르주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쾌락만을 향한 조악한 욕망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는가? 이는 미국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노예소유주가 겪었던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 곳에서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노예제와 노예노동이었다. 여기서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그 원인 역시 같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자가 더 낮은 곳으로 몰릴수록 고용주 역시 노동자를 따라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이들처럼 확실하게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적 기업으로부터 당하는 해악, 역으로 사회 전체를 고름을 내뿜는 종기로 뒤덮어 버리는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교육과 협력이다. 노동시간 단축만이 계몽과 교육의 혜택을 노동자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혜택에 참여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이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처한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노동자의 도덕적 물질적 향상은 사회정의의 문제이며, 공공선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선 대중교육과 협동조합을 만드는 길 밖에는 없다. 이러한 방책들을 실행에 옮기고, 지지·지원하는 것은 국가에 달려 있다. 부르주아 경제체계가 이미 사회를 부패시키고 침식하고 있는 지금, 이를 행하지 않고 멍하게 있다면 자멸할 뿐이다."
1867년 2월 마르시엔느의 광산에서는 소요가 있었는데, 곧바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소요의 배경에는 1866년 흉작으로 인한 빵값 상승과 물품부족이 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이 살육사건의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1867년 3월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발신하였다.425)국제노동자협회 중앙평의회
"땅에는 군인들이 넘쳐나니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움츠러들었다. 일반적으로 위험하다고 알려진 이들도 모두 철창 안에 가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것이었다... 이들을 체포하면서 군대는 그 위세와 위용을 뽐내었는데, 이는 뭇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또 동료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혹 있을지 모를 감옥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에 대한 이 조직된 압박을 고려한다면 다시는 그러한 소란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유혈극은 깊은 위협의 효과 또한 갖는 것이다... 들떠있지만 조금도 위험하지는 않은 폭도 대중은 밤이 되기 전에 완전한 무기력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들이 지난 며칠간 귀 기울였던 모든 지도자들은 철창 안에 갇혔다. 사람들이 혹 그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일지 모를 작자조차 모조리 잡아들였다... 사실 철권을 휘두른 것은 경찰이지 군대는 아니었다... 이 지역 시장(市長), 경찰관료, 헌병대장에게서 조언을 얻어, 보고서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명시된 모든 이들을 잡아넣었다."
이 야만들이 고통받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으킨 망연자실 속에서, 국제노동자협회 브뤼셀 중앙위원회는 언론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대중적 집회를 제안하였다. 자본가와 그 공범인 정부를 맹비난하면서 벨기에 노동자들이 다시 저항에 나설 것을 추동하고, 구속된 자들에게 법률상담과 변호사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샤를루아 노동자의 운동은 전체 국제노동자협회 모두의 대의라고 선언하였다. 런던의 총평의회는 파리와 제네바의 운영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브뤼셀에 있는 위원회를 지원하였다.427) 샤를루아 지역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을 군대로 진압한 이후 고용주들은 실업자들과 굶어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탄광을 당분간 가동중지 시킨 것으로 아주 만족해했다. 정부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국제노동자협회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제네바에서 동시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재정이 좋지 않았고 지원위원회도 한창 조직 중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아사의 위기에 몰렸다. 날로 커지는 비참을 보고 이제 샤를루아 마을 주민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샤를루아 자유연합(the Liberal association of Charleroi)은 정부가 이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에게 즉각 직업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선거위원회를 해체하고 천주교도들에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협박은 원하던 결과를 낳았다. 물론 아사 직전 노동자들의 울부짖는 비탄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걱정 때문에 자유주의 정권이 상당한 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동안 3월에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한 법집행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건, 즉 그들이 유죄로 판결받던 그렇지 않던, 정부는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은 총탄세례나 감옥뿐 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정부가 자신들의 정당한 불만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하거나, 고용주의 학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노동자들은 조력이 어느 쪽에서 올 것인지,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돌아서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정부가 아니라 바로 국제노동자협회라는 것을.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정부의 승인 없이 20인을 넘는 조직을 구성할 수 없다.431)그 법을 그대로 따르자면 프랑스에 있는 대부분의 산업·상업 기업들은 불법이며, 다만 정부의 묵인 아래 존재하는 것이다. 항고심의 결정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조직이 공개적이고 정부가 일정 기간 해체하지 않을 경우 암묵적y인 승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정부의 승인을 얻건 그렇지 않건 정부가 그 설립을 일단 묵인했던 조직이라면 기껏해야 그 조직을 해체할 수 있을 뿐 그 구성원을 처벌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겪었다. 프랑스의 모든 지부는 유진 듀퐁(Eugene Dupont)을 총평의회의 대표로 하는 영국 조직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덧붙여 말하자면 런던에는 프랑스 그룹과 독일 그룹이 있다.) 비록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있어서는 함께 행동한다 하더라도 프랑스 지회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지 않고 오직 런던의 총평의회와만 소통하고 있다. 각각의 조직들은 독립적인 집행위원회를 가지고 런던의 총평의회와 교통한다. 프랑스에서 조직의 건설을 추동한 것은 파리 그룹의 파리 집행위원회였다. 위원회는 내무장관z과 파리 경찰국장에게 그 설립과 존재를 이미 1864년에 통보하였다. 그 이후로 파리위원회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의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구성원들의 공개 회합은 매주 이루어졌고, 그에 관한 보고문이 공개적으로 신문에 실렸다. 사실 지난 몇 십 년간의 비밀조직과는 완전히 다르게도 그 조직은 본성상 공개적인 것이었고, 런던의 총평의회의 회합 역시 런던 신문에 매주 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와 프랑스 정부간 최초의 분쟁은 1867년 9월 로잔 총회ㄱ직후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의 일원인 쥘 고트로(Jules Gottraux)는 총회 문서의 일부를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문서들을 프랑스에서 영국432)으로 가져 가려 했다. 그가 프랑스 국경을 넘는 순간 문서들을 압수당했다.433) 런던 총평의회의 총서기장ㄴ이 프랑스 내무장관ㄷ에게 편지를 써서 그 압류된 문서는 영국의 재산이기 때문에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협회의 총평의회는 영국 외무장관인 스탠리 경(Lord Stanley)에게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관인 코울리 경(Lord Cowley)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가 프랑스 정부에 문서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그제서야 프랑스 정부는 요구에 응했다. 두 번째 분쟁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들은 제네바 총회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제안하며 원칙을 옹호하는 제안서를 낭독했다. 이 문서는 일방적으로 프루동주의적이면서 고유하게 프랑스적이었는데, 당연히 협회에서 채택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파리에 있는 어떤 출판업자도 그것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위원회는 브뤼셀에서 제안서를 인쇄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경을 넘는 도중 문서를 압수 당했는데, 1867년 3월 3일 협회의 파리 중앙위원회는 국무장관이며 황제ㄹ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루어(Rouher)에게 편지를 보내 문서를 압류한 까닭을 물었다.ㅁ그는 그라비에 44번가에 있는 협회의 파리지부 사무실로 답신ㅂ을 보내어 자신의 사무실로 한 번 방문해 줄 것을 청했다. 위원회는 장관과의 회담에 파견할 사람ㅅ 을 정했다. 루어는 몇 군데 못마땅한 부분의 변경과 수정을 요구했다.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노동자에게 많은 은혜를 내려준 황제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몇 마디 말을 덧붙인다면 누구나 그 업적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Pourtant, si vous faisiez entrer quelques remerciments a l'adresse de l'empereur qui a tant fait pour les classes ouvrieres, l'on pourrait voir.)ㅇ 협회의 대표는 협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개인이 되었건 정당이 되었던 아첨이나 명예훼손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루어는 회담장을 박차고 나와 그 문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자신들이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 정부는 아미엥, 루베, 파리에서 일어난 파업에 대해 협회가 미치는 영향력과 증대되어가는 역량에 주목하였다. 정부는 위의 회담 몇 주 뒤 협회의 제국주의 국수주의 반대 운동에 크게 불쾌해하면서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째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434)1868년 정초의 꼭두새벽ㅈ 파리 경찰은 파리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의 집을 급습하였다. 경찰이 발견한 모든 서신과 신문은 압수되었다. 경찰은 그 문서들을 바탕으로 파리그룹의 등록된 회원만 약 2,000명이라고 추산하였다(그 이후 이 숫자는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들이 기소할 때 가져다 붙이기 좋아한 죄목은 비밀 단체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는데, 두 달간 조사를 거치고 난 뒤 이는 기각되었다. 대신 치안 규정을 무시한 죄가 등장하였는데, 즉 정부의 승인 없이 20명 이상의 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이었다. 1868년 3월 20일 센느(Seine) 형법재판소에서 공판이 이루어졌다. 피고 중 한 명이 석공 톨랭(Tolain)이 나머지 15명의 피고인들을 대변하였다. 심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435)재판장ㅊ 당신은 당신과 공동피고인들이 구성원으로 속해 있던 국제노동자협회가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톨랭 이 자리가 그 질문에 답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변하고 싶은 것은 우리 단체의 공개적 활동이 그 존재의 암묵적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재판장 하지만 승인받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군요? 톨랭 누구도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국제협회가 도대체 어떤 나라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프랑스, 벨기에, 영국, 아니면 독일 정부 중 어디입니까? 알 수도 없고, 누구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정부의 승인이 영국에서는 무슨 소용일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재판장 조직의 모임에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습니까? 톨랭 전혀, 그런 일 없습니다. 재판장 1866년 브뤼셀에서 출간된 선언ㅋ을 당신들에게서 압수했는데, 그 내용은 정치에 관한 것이었고, 심지어 전복적 정치(politique transcendentale)ㅌ에 관한 내용도 있더군요. 톨랭 그 선언문은 내 소유물입니다. 내가 알기로 프랑스에서 그 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이 쓰고 출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나라의 모든 단체는 타국의 단체들에게 연대를 강요하지는 않으면서, 각자의 특수한 요구를 제출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이나 독일 지부가 우리가 감히 손댈 생각을 하지 않는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나는 우리 모임에서는 정치 문제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 협회는 어떻게 조직이 됩니까? 그 소재지는 어디고, 그 목적은 무엇이지요? 그리고 파리 사무소과 총평의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톨랭 총평의회는 1864년에 런던에서 구성되었습니다. 영구적인 소재지는 없습니다. 런던에 삼년간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극복할 수 없던 문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아시려면 그 규약ㅍ을 읽는 것이 가장 좋겠군요(규약을 읽는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오. 톨랭 파리 사무소는 신문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호소한 이후 건설되었습니다. 사무소를 만든 이유는 파리 지부의 활동의 구심을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제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한다거나, 단체를 대표해서 다른 부문과 교섭을 한다거나. 이 모든 것들은 백주대낮에 매우 개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파리 사무소의 정관은 인쇄된 소책자로ㅎ배포되었고 모든 구성원들은 일주일에 10상팀의 회비를 내야 합니다. 재판장 이 사무소가 조직을 확장해야 한다는 직접적 선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톨랭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사무소가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거의 대부분 우리는 런던의 총평의회를 언급하곤 합니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가 어떤 파업에 개입한 적이 있습니까? 파리 놋쇠노동자, 루베, 아미엥 그리고 다른 파업들에서? 톨랭 협회는 앞서 언급하신 그러한 사건들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부위였습니다. 파업의 원인을 연구한 결과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자뿐 아니라 사용자들에게 있어서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검찰관 레펠레티에(Lepelletier)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신사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피고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지적이며, 강직한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유죄판결은 받은 적도 없고, 이들의 도덕성을 의심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혐의를 입증함에 있어, 신사 여러분, 그들의 명예를 손상할 만한 얘기라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검찰관은 이들이 법을 어겼고 유죄를 입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재판이 무효라는 피고의 주장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어떠한 비난이 이 기소에 쏟아지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지난 며칠간 Si cle, the Opinion nationale, 그리고 Courrier fran ais를 읽어보셨다면, 국제노동자협회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이 일부 매체들이 이 기소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3년간 협회는 광범위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해 왔다. 정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지는 못했지만, 묵인되었다. 그 목적은 노동자의 물질적이며 도덕적 해방이기에,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이며, 진리, 도덕성, 정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해법이다… 하지만 그러한 묵인이 단순히 권력의 전횡과 폭력의 변덕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가혹한 기소로 끝장나게 되었다. 대략 이런 것입니다. 만약 협회의 구성원들이 적어도 그들의 강령을 저버리고 국가에 위협적인 문제에 몰두했다면, 그들이 정치에 관여했다면 모르겠지만 반대로 그들은 총회에서 그러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활동을 자신들의 정관이 정하는 바에만 한정시켰으며, 그 정관이란 정부당국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며 최소한 이미 간접적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우리 검찰에게 덧씌워진 비난입니다. 나는 줄여말거나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비난입니까? 협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협회가 자신의 강령에 제시된 대로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에만 자신의 활동을 한정지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가)
그래서 그 검사는 파리 사무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룩셈부르크 문제436)에 대한 협회의 일반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피고인들이 법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피고 톨랭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탄원장을 제출하였다.나)"조직의 불법성이 정부당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데 기인한다는 점; 또한 어떠한 공식적인 승인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앞서 말한 승인이 암묵적으로 이미 면제되었다는 것; 특별한 형식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입법자 스스로도 예외로 인정한 법을 엄격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 결과 대중적 신뢰도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것이 1834년 법에 대한 논의, 그리고 언급되는 승인은 암묵적일 수 있다는 정부 대표의 언급을 따르고 있다는 점; 그러한 암묵적 인정 혹은 묵인이 20명 이상의 인원을 가진 모든 산업·상업 기업이 존재하는 형태라는 점; 이 같은 관행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우리와 같은 단체들을 박해하는 권력을 용인하는 것은 사회적 양심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명백한 실존 때문에 그들이 적법하게 승인되었다고 간주한다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에; 협회에 대한 암묵적 승인은 1) 그것의 존재와 행동은 끊임없이 공개적이었고, 이는 여타 사기업보다 훨씬 더 공공연했다는 점에서, 2) 국제협회가 내무장관과 경찰국장에 보내는 두 통의 편지에서 협회의 설립이 18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나오다는 것; 내무장관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대리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국무장관이 협회 서기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시적이고 공식적인 정부의 승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장관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정당성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는 점, 그동안 협회가 자신의 이론이나 목적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검찰 조사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 사실상 1866년 총회라)에서 프랑스 대의원의 의견서를 발제하기 위해 초청받았던 협회의 서기 역시 지금 비난받고 기소된 것과 똑같은 이론과 목적을 제시했다는 점; 1867년 1월 4일 검찰 간부조차 조직이 충분히 합법화되었다고 간주했는데, 이유인즉슨 당시 그들이 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개 재판에서는 어떤 기소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이 모든 이유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법정이 검찰의 기소내용을 각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탄원을 제출하면서 톨랭은 다른 피고들을 대신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연설은 노동계급의 결어에 맞서는 열정적인 저항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상호교육을 통하여, 또 자신들의 가장 사활적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대해 학습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규명하려고 노력할 때, 그리고 개선을 확보하려고 시도할 때 노동자들이 초래하는 위협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하건, 얼마나 조심을 하건,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순수하고 무해한 것이든 노동자들은 항상 위협받고, 박해받으며 조사 대상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산업적 혁신이 새로운 요구들을 창출하였고 사회 경제를 완전히 재구축했다.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정부 자신도 이러한 재구축 운동을 따랐고 열심히 협력했다.톨랭은 말을 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국제노동자협회로 단결한 이유입니다.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의 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길 원합니다. 영국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과 우리 모두 똑같은 관심사, 똑같은 사회적 문제로 움직입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말하길 기계가 정교화되면서 노동자의 사회적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므로 함께 서로를 계몽하고,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찾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고 똑같은 생각에 고무되었습니다. 그 이후 노동자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어떤 개선도 기대할 수 없다는 공동의 구호가 제시되었습니다. 이 구호는 1864년 런던에서 열린 공개 집회에서 주창되었습니다."
그래서 톨랭은 런던의 총평의회와 파리 사무소의 설립, 조직과 활동 등을 설명했다. 정부가 암묵적 승인을 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그는 자신들이, 다른 한 편으로는, 공식적 승인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은 노동자와 모든 시민들에게 자연적으로 부여된 권리를 허가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권력을 정부에게 양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선언으로 진술을 마무리 지었다."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금껏 우리가 취한 입장은 적절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당신의 판결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내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증오나 옹고집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한 각성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일들은 우리가 직접 해결할 것을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끝장내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수단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법을 넘어섬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법을 길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경찰, 정부, 자치 행정당국, 나아가 모든 대중들이 모든 것을 알고, 보고, 묵인했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판결은 이러했다.마)"검찰조사와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에 따라, 피고인들이 지난 삼 년 간 국제노동자협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체의 파리 회원이었고, 이 단체는 20인 이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점," "연합된 노동자들이 협회의 목적에 따라 뭉쳐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했고, 앞서 말한 목적이란 노동자들의 처지를 협동조합, 생산과 신용 등을 통해 개선시키려는 것이며, 또한 정기적으로 회합을 열어 자신들을 영구적인 단체로 구성하였다는 점," "형법 291조와 292조바), 1834년 4월 10일 발효된 법사)은 프랑스 영토 안에서 그 법을 어긴 자에게 적용되는 경찰과 안보에 관계되는 것이며, 그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에 관계없이, 파리 사무소가 앞서 말한 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점," "신문지상에서 상기 단체의 존재가 인지되었다거나 당국의 묵인이 있었다는 것이 명시적인 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면제하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 "피고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형법 291조와 292조, 1834년 4월 10일 법에 해당하고 그에 따라 처벌가능한 위반을 범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본 법정은 이로써 파리 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국제노동자협회의 파리 지부를 해산하고, 피고인 각자에게 100프랑의 벌금을, 벌금을 변제하지 못할 시에는 30일의 구류로 대신할 것을 선고한다."
"우리, 그러니까 런던 총평의회의 파리 지부가, 경찰 및 관계 당국에 우리 단체의 설립을 알린 뒤 명시적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지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조직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승인을 구하는 치욕에 굴하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규약의 바로 첫 번째 원칙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 규약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승인을 받아들이는 자는 복종, 종속, 후견권, 간단히 말해 노에 신분을 받아들이는 것인 바, 그 모든 형태의 노예 신분이야말로 국제노동자협회가 그것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해방시키려 하는 굴레 자체인 것입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형량을 확정한 데 덧붙여 항소한 이들에게 항소심에 들어간 모든 비용까지 선고했다. 이번 선고의 근거는 실질적으로 1심 선고의 근거와 동일했으며, 다만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롭게 추가되었다."그 조직의 막대한 힘과 그 활동의 광범위한 확장 때문에 위험이 가중되었다."
"우리가 볼 때 파업은 임금을 확보하기 위한 거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에 반해 파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파업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결국 공정한 임금을 받아 내리라란 보장도 없이 몇 주에서 몇 달에 이르는 가장 혹독한 궁핍으로 노동자와 가족들을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경제적 조건을 연구함으로써 노동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과업을 스스로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고 그 결과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주 파업이라는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점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 앞에서는 당신들이 판사이고 우리들은 피고인입니다. 하지만 주의(主義) 앞에서는 우리는 두 개의 당파입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든 지켜야 하는 질서의 당파, 안정의 당파이고, 우리는 개혁의 당파, 사회주의의 당파인 것입니다. 편견 없이 한 번 살펴봅시다. 그 완전성을 의심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범죄자가 되어 버린 저 사회 질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뼛속까지 불평등으로 좀먹었고, 이기심의 위협을 받으며, 반사회적 편견의 냉혹한 발톱에 목이 졸리고 있습니다. 인권 선언과 민중의 의지의 단명(短命)했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 줌 지배계급에게 좌우됩니다. 민중들의 피가 민족과 민족, 우리와 똑같은 굴레에 허덕이며 우리와 똑같은 해방을 열망하는 민중과의 동족살해의 전쟁터에서 강이 되어 흘러가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향락은 오로지 소수만을 위해 존재하고, 그들은 최대한, 그리고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향락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대다수 민중들은 비참과 무지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신음하고, 저기서는 기아에 고문당하며, 그리고 도처에서 자신들의 노예상태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미신과 편견의 암흑 속에서 시들어 갑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원한다면, 주식거래라는 도박이 어떻게 혼란과 해악을 끼치는지, 풍요와 기근이 모두 어떻게 그 힘 있는 자본가의 손에 달려있는지를, 그리고 그가 쌓아올린 황금의 산 곁에 있는 폐허와 고의적인 파산을 보십시오. 산업에서는, 고삐 풀린 경쟁이 노동자를 내리누르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어떤 분별 있는 관계도 파괴합니다. 필수품을 만드는 일손은 부족하고, 사치품을 만드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가난한 아이들 수백만이 몸에 걸칠 실오라기 하나 없는데 10,000일 동안 노동하더라도 살 수 없는 터무니없는 가격이 매겨진 숄이 세계 박람회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필품조차 구할 만큼도 벌지 못하는 한 편에서, 세계는 부른 배를 두드리는 게으름뱅이들로 가득합니다." "구 세계는 노예제라는 가시가 살에 박혀 종말을 고했습니다. 근대 시대도 대중의 고통에 관심을 쏟지 않고, 노동자에게 쉼없는 노동을 강요한다면, 노동자들은 생필품도 살 수 없는데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사치와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한다면, 만약 이 시대가 이 같은 사회 상태가 완전히 부당하다는 것을 보려 들지 않는다면, 그 종말 역시 멀리 있진 않을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W. 팰리 박사는 La Cooperation신문에서 지난 5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카) "옥수수밭에 있는 비둘기 무리를 생각해 보라. 99마리의 비둘기가 옥수수를 쪼아먹는 대신 줄기와 왕겨만을 먹으면서, 오직 한 마리 비둘기를 위해 옥수수 알갱이를 산더미처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한 마리는 종종 가장 약하고 불쌍한 비둘기일 수 있다. 이 한 마리는 꼬꼬 울면서 거들먹거리고, 배불리 포식하고, 제 영역을 표시하여 못 쓰게 한다. 열심히 일하는 나머지 99마리는 친절하게도 이를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중의 하나가 - 더 용감한 녀석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녀석들보다 더 배고픈 녀석이었을 수도 있다 - 옥수수 한 알을 감히 먹어버렸다. 유순함에 눈먼 나머지 비둘기들은 그 녀석에게로 몰려가 끌어내고, 손실을 보충해 넣고, 자신들의 무리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 상황을 보십시오. 당신은 물론 이러한 일이 자연상태에선 일어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성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론은 이중적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동물 위보다 고차원적 행위를 행한다고 결론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이성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에게서 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99마리, 비참 속에 태어나서 일하러 나가 버린 그의 어미를 거의 보지 못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하는, 일상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쓰레기더미 속에서 자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덤까지 그를 따라 다닐 병원균을 얻는 그 99마리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8살이 채 되자마자, 최소한의 근력이 생기자마자 일하러 갑니다. 희박하고 비위생적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혹사당할뿐더러, 무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다. 이는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제 20살이 된 그 친구는 그를 필요로 하는 부모를 떠나야만 합니다. 병영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전장에서 총을 맞아 죽기 위해서 말이지요. 만약 그가 살아서 도망칠 수 있다면, 그는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영국의 박애주의자 맬서스(Malthus) 선생이나 프랑스의 장관이신 뒤샤텔(Duchatel) 씨가 이 결혼을 허락한다면 말이지요. 이 분들은 노동자에게 부인이나 가족은 필요치 않으며,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에게 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하여간 결혼하면 바로, 가난, 궁핍, 실업, 질병과 함께 아이들이 그의 집에 들어앉습니다. 그래서 이제 비참한 자신을 보다 못한 그는 감히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지만, 프레스톤에서처럼 기아에 손발이 묶이거나, 샤를루아에서처럼 총질을 당하거나, 볼로냐에서 철창에서처럼 갇히거나, 카탈로니아에서처럼 포위 상태에 놓이거나, 여기 파리에서처럼 줄줄이 법정에 엮여 들어올 뿐이겠지요." "이렇게 이 비참한 자들은 고통과 수치의 길을 터벅터벅 걷습니다. 성년이 되면, 평온했던 유년의 기억 따윈 머리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노년이 기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가족이 없거나 가난한 상태에 머문다면, 그는 마침내 거지를 위한 시설에서 악인처럼 죽어가겠지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소비한 것의 네 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사회는 그 잉여를 어디에 쓴 것일까요? 100번째 비둘기에게 물어보면 알겠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99마리의 노동에 기생하던 그 녀석 말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엄격한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 불의를 따르는 어떤 민족이나 사회 조직체도 결국은 부패와 사멸의 먹이가 될 뿐임을. 이것이야말로 사치와 비참, 압제와 노예, 무지와 수치, 타락과 퇴화가 공존하는 이 시대에 지난 역사에서 확실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 위안인 것입니다. 금은보화가 삐져나오는 궁전의 문턱에서 굶어죽어 가는 인간이 있는 한, 국가 체계는 불안정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맥박을 짚어 보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놓지 않으려는 계급과 자기 노력의 과실을 되찾으려는 계급 사이의 소리죽인 분노를 듣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에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지독한 미신이 다시 복귀하고 있습니다. 방자한 이기주의와 붕괴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것은 쇠잔의 조짐입니다. 지반이 당신 발 밑에서 진동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조심하기를!" "위대한 정의를 실연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세계 무대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곤 했던 계급, 모든 시기 모든 정권 아래서 억압되었던 그 계급, 노동 계급은 이제 당신에게 부활의 수단을 건넵니다. 현명하게 그 정당성을 인정하시오. 그 대의를 방해하지 마시오. 그것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완전한 자유의 호흡만이 공기를 맑게 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구름을 흩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계급이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던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다면, 그들은 무대에서 퇴장해야 합니다. 만약 붕괴하는 모든 체제의 마지막 수단인 포악함을 피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노력은 이 시대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위대하지 않다는 것, 따라서 강력한 정치적 부활, 평등, 그리고 자유를 통한 연대의 도착을 알리는 젊은 계급 속으로 용해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도록 합시다."
이들 9명에 대한 법원의 선고는 3개월의 금고형에 100프랑의 벌금이었다. 피고인들은 항소하려 했지만, 결국 기각되었다."우리가 평화의 지속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유럽 여러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사상과 감정이 통일될 때다. 며칠 뒤 국제협회의 총회가 열릴 것이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그 곳에 대표를 파견하는데, 아마도 프랑스는 예외일 것이지만, 그 지혜로운 결의로 유럽의 모든 노동자 대표들이 모인 이 총회가 유럽의 암피트리온적인 평의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 만약 내일, 프랑스 혁명 불멸의 원칙에 통달하고 노동의 신성한 이익, 즉 질서, 안전, 자유를 포함하는 그 이익을 손에 넣어 이 총회가 평화를 선포한다면, 그 선언은 전 유럽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2. 벨기에 정부와의 투쟁
벨기에 부르주아 신문의 부추김을 받아, Independance belge를 앞세운 벨기에 정부가 국제노동자협회를 샤를루아의 혼란을 일으킨 주모자로 꾸미려는 시도가 있었다.파) 그러나 3월에 체포된 벨기에 노동자들을 조사하자 이 같은 혐의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1868년 5월, 벨기에 법무경찰 장관인 줄 바라(Jule Bara)는 벨기에 하원(Belgian Chamber of deputies)의 외국인 추방 법 갱신을 둘러싼 토론439)을 이용하여 악의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를 공격하였다하). 협회의 존재를 외국인법 갱신 제안의 1차적 구실로 삼은 그는 협회의 다음 총회 소집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국제노동자협회는 로잔 총회에서 1868년 9월 7일 브뤼셀을 다음 총회 장소로 지명했었다.갸) 이에 브뤼셀 집행위원회와 벨기에 국제노동자협회의 모든 구성원은 법무장관에게 5월 22일자 공개 서신을 공동 명의로 작성했다.냐) 그 편지에서 분명히 한 것은 장관이 협회 총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거리낌 없는 편지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장관님, 아래 서명자들은 당신이 우리의 대의에 크게 공헌한 것에 관해 감사를 보냅니다. 노동자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의회 회기 중에 화제로 삼아 의회 기록이 우리 원칙들을 유포하는 데 활용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요." "당신이 더 이상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당신네 신문들은 이 나라에서 협회가 거둔 성공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타조처럼 눈을 감고 위험을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우리를 하나의 세력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당신은 우리를 공식적으로 축성(祝聖)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당신의 태도로써 우리가 당신네들에게 하나의 세력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당신 무리들이 벨기에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시는군요. 우리의 협회를 돕기 위해 외국인이 온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안달할 테구요."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들의 운동이 해외에서 고취되고 지도되었다는 장관의 암시를 확고히 거부하면서 그 편지를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장관님, 하나 명심하셔야 할 것은 진(gin) 한 통에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한 사람이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로 움직일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우리의 활동을 이끄는 것은 모든 명예로운 정신에 깃들어 있는 정의, 오로지 그것 뿐입니다. 출범하자마자 우리 동맹은 이미 수천 명의 추종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전진한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 있습니다. 노동 해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은 당신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겠지만요, 장관님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듣기 바랍니다."
이후 편지는 국제노동자협회의 포부를 상세히 밝히고, 총회의 문건 중 더 많은 문서들을 입수해 읽으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정부의 위법사항이 제시된다. 샤를루아에서 빵 대신 죽음을 선물 받아 무고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을 상기시켰다. 파업이 노동자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충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파업은 자본의 가렴주구에 대항하여 아직까지 노동자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적법 수단인 것이다.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그렇소, 법무('justice')장관 나으리, 우리는 당신이 배반해 버린 그 정의의 승리를 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 없이도, 당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당신에 대항해 싸울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총회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아주 화가 나셨던 모양이지요. 장관 나으리께서 그렇게 부조리한 단어를 말하시다니… 예를 들어 당신은 '집회의 자유'를 선포하신 바 있는데, 우리는 장관님께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무사히 그것을 파괴하실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당신이 떠벌린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9월에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장관 나으리께옵선 우리가 벨기에에 풀어 놓은 천둥번개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완고한 권위주의 정부로써 그것을 불러들인 건 바로 당신네들입니다. 진짜 뇌성벽력은 거기 당신 곁에 있습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지만 말입니다."
1868년 6월 16일 회의에서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벨기에 정부가 공언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브뤼셀에서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열기로 한 벨기에 위원회의 결정을 추인하였다.440) 프랑스의 집행위원회 역시 동의의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총회에 참석하고 그 결과는 알아서 감당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파리의 Courrier francais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의 국제노동자협회에게 가해지는 동시적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이러한 해프닝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지금 협회는 유럽 전역에 걸쳐 놀라운 규모로 그 지지기반을 넓혀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반동들은 그것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그것이 어디에서건 사회 개조의 전위로 여겨진다는 점을 증명한다."
"미국에서 지난 몇 년간 이루어진 선동들은 갑작스레 완벽한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는 그 자체 가지고 있었던 특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입법부에 영향을 미친 여러 외부요인들의 우연한 일치와 논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전에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이 10시간 노동으로 줄어든 바 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으로 한층 단축할 것을 요구했다(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점을 확인해 두자.). 그래서 이름이 "8시간 운동"이다) 의회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요구를 거부해 왔으나, 갱신된 발의안을 예전과 똑같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두 당 모두 다음 대선에서 노동자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두 당 모두 분명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이 운동에 맞서 저 많은 유권자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어떤 노동자들이 약간의 언어유희를 가미하여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 그리고 8실링 임금"이라는 구호를 썼다. 앞서 말한 운동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한,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정도로 자신의 노동력이 쓰이기를 원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이나 불법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정부당국은 이 선동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도록 허락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것을 선호할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그 전능한 불문율은 여기서도 그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독일 부르주아의 기관지인 Kollnische Zeitung이 미국에서 8시간노동제 운동의 예기치 못한 성공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신문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이라는 "불문"율의 "전능함"을 믿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New-Yorker Handelszeitung 역시 바로 그 "수요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선언하고 있다."우리는 데마고그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러한 결정을 개탄할 수밖에 없다. 하원의 두 당 모두가 정부 사업장에서의 노동일을 임금삭감 없이 8시간으로 결정했고, 대통령이 이 법안에 기꺼이 서명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부가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고용자들이라면 자기 사업장의 노동시간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선동을 승인한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법이란 것은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를 규제하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공화국의 고상하고 자유로운 시민이라면 얼마나 자주 깨끗한 셔츠를 입어야 하는가, 또는 살면서 제대로 된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 찢어진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와 법이 무관한 것처럼. 그리고 생산력의 5분의 1을 불능화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진정 시의적절한지 여부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눈먼 노동자 대중의 환심을 얻고자 했던 이가 이 횃불에 뛰어들었고, 다가오는 대선 생각에 아무도 손을 델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노동력의 가격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규제된다. 국회가 이 문제를 다루고 싶어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상원과 하원의 신사들이 이 점을 보지 않았을 리 없다. 놀랍게도, 섬너(Sumner) 상원의원 같은 이도 이러 식으로 이어질 노동자의 교육적 필요에 관한 수많은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이러한 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민중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만이 민중의 친구일 것이다. 일단 선거가 끝나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머지 않아 8시간 노동제 운동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것인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대선이 끝나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미국의 입법부가 8시간 노동일 운동을 인정한 거대한 사건에 비하면 이 문제가 부차적으로 다루어진다.444)결과는 멀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미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부터 8시간 노동일의 원칙은 계속 전진하여 활발히 전개되어 아메리카 대륙, 영국, 그리고 유럽대륙 모두에서 노동자 계급의 도덕적이고 정당한 요구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수요와 공급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자 필요의 하한선까지 임금을 낮추는 모든 지역들에서 말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조건의 근면한 탐구자이자 권위자인 칼 마르크스가 1867년 7월 25일 예언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18세기에 미국 독립전쟁이 18세기에 유럽의 중간 계급에게 경종을 울린 것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는 미국 남북전쟁이 유럽의 노동자 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자본 제 1판의 서문] a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Trades' Unions"와 "Strik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b노동자 연합 관련 법을 폐지하고 그것을 다른 법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령 - Ed.본문으로 c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단어 "Strikes"와 "Grev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d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breach of peace"와 "restraint of trade"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eK. Marx, The poverty of Philosophy. Answer to the "Philosophy of Poverty" by M. Proudhon. - Ed.본문으로 416) 이 직종별 대표자 회의는 1866년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 셰필드에서 열렸고 200,000명의 조직된 노동자를 대표하는 138명의 대표자가 참석하였다. 노조에 국제노동자협회에의 참여를 호소하는 이 결의문은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 held in Sheffield, on July 17th, 1866, and Four Following Days, Sheffield, 1866 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본문으로 f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s..., Sheffield, 1866 - Ed.본문으로 g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단어 "Trades' Council"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17)주 38을 보라본문으로 418) 2차 선거개혁에 대한 일반 민주주의적 운동에의 영국 노조의 참여에 관여했다.본문으로 419) 이는 1867년 8월 15일 영국 의회에 의해 결국 채택된 개혁안을 지칭한다. 이 법은 투표권을 도시에 12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과 집이나 아파트를 세주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이전까지 투표권은 연간 12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이 되었다. 이러한 투표권의 확대로 인해 유권자의 수는 100만에서 200만으로 늘어났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비교적 부유한 계층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영국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표를 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 어떤 한 산업의 모든 공장과 작업장을 폐쇄하는 것,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감수하도록 하는 자본의 도구이다(아이이호프 주) 본문으로 420)1866년의 경제위기는 주로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유명한 '면화기근' 현상을 불러일으킨 미국 남북전쟁 이후에 발생하였다. 면화기근은 거대 생산업자에게는 극단적으로 유리하고 수 백의 소규모 공장에게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1866년 위기는 금용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탄광, 철강, 강철 산업은 생산을 줄이고, 철도 건설 등의 사업이 축소되었다.본문으로 421)이는 노동자의 연합과 파업을 금지하는 1791년 Le Chpelier 법의 폐지(프랑스, 1864)와 노동자 연합 금지 철폐를 의미한다.(벨기에, 1867)본문으로 h"Third Annual Report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뒤에 독일어 해석이 괄호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22)루베에서의 직공과 방적공의 파업, 파리에서 놋쇠 노동자 파업. 14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i V. Huriot, "M. Thiers a dir qu'en matiere de relations internationales, il n'y avait point de politique nouvelle...", Le Courrier francais, No.12, March 24, 1867 - Ed.본문으로 **이 파업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다음의 소책자에 수록되어 있다: Die internationale Arbeiterassociation und die Arbeitseinstellung in Genf in Fr hjahr 1868. Von Joh. Phil. Becker. Deutsche Verlagshalle, Pr -l' v que 33, Geneva, 1868. 이 책을 읽는 노동자에게, 수익금 전액을 파업 지원 중 생겨난 비용 부담 목적에 사용하는 강심장 조 필 베커(Joh. Phil. Becker)의 소책자와 월간 Vorbote를 강력히 추천한다. 조 필 베커는 그 자신이 노동자 출신으로서 노동계급을 위해 칼로 말로 펜으로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단호하게 한 평생을 바쳐 싸워온 인물이다. 노동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 사람은 그 사유에 있어 독창적일뿐더러 열정적인데, 요즈음 모든 노동 써클에 들이대는 "신물나는 덕성과 허무한 도덕"a1의 소인배a2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노동계급에게 인정받을 만하다. 그는 스위스 국제노동자운동의 삶과 혼이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협회에 가입한 모든 독일 성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아이히호프 주)본문으로 a1Heinrich Heine, Neue Gedichte: Romanzen 7, anno 1829. - Ed.본문으로 a2Littel great man - Ed.본문으로 423)제네바 파업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 자신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 "The Fourth Annual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와(이 책 p.16) 국제노동자협회 4차 연례총회 총평의회 보고서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to the Fourth Annual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책 p.47를 보라)본문으로 j사무실 Offices. - Ed.본문으로 k Neue freie Press, Nos.1286(supplement), 1288, 1291, March 29, 31, April 3을 보라본문으로 424)이 상황에 대한 묘사는 마르크스에 의해 쓰여졌다. 벨기에 대학살("The Belgian Massacres")를 보라. (이 책, p.47)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리차드 휘팅(Richard Whiting)의 추산을 따름. 프랑스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자들에 비해 어느 정도 열악한 지를 계산하기 위해 그는 두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재의 가격 차이를 비교한다. 그는 노동자가 프랑스에서 5프랑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영국에서 5실링(이는 6프랑에 해당된다)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같다고 한다. 가격 차이는 여기에서 16 2/3 퍼센트라는 임금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프랑과 실링이 지닌 가치가 양국에서 동일함을 밝혀 낸 뒤, 그는 프랑스에서 임금이 영국에서보다 적어도 10퍼센트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프랑스, 벨기에, 라인 프러시아(Rhenish Prussia)에서 임금이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 또한 밝혀내었다.본문으로 l"Die Lage der belgischen Kohlenarbeiter", Demokratisches Wochenblatt, Nos.20 and 21, May 16 and 23, 1868. - Ed.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Demokratisches Wochenblatt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독일 인민당(German People's Party)의 기관지이고 C. W. Vollrath에 의해 출간된다. 편집장은 Wilhelm Liebknecht.본문으로 425)이 호소문은 총평의회(1867년 2월 26일 회의)에서 지시한 사항을 에카리어스(Eccarius)가 작성하고, 1867년 3월 13일 The International Courier No.8에 수록한 것이다.본문으로 m영문 원본에서 "the thunderer of Printing House Square"라고 되어있다. - Ed.본문으로 nThe Times, Nos.25678, 25689, 25692, 25695 December 11, 24, 29 and 31, 1866; No.25708, January 15, 1867을 보라 - Ed.본문으로 o"La grave de Marchienne-au-Pont", L'Economiste belge, No.3, February 9, 1867 - Ed.본문으로 pIbid. - Ed.본문으로 q영어 원문에는 "the affair" - Ed.본문으로 r이 책 pp.14-1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6)자마이카 영국 식민지 총독 에어(Eyer)는 1865년 10월 흑인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 학살은 영국에서 대중적 격분을 일으켰고, 영국 정부는 에어를 해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본문으로 sWhite terror - Ed.본문으로 427)1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tK. Marx,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연설" - Ed.본문으로 428)분리주의자(the Secessionist)들은 1861~65년 남북전쟁 당시부터 남부 11주의 미연방 탈퇴를 주장한 이들이다. 1861년에 노예주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동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줄여서 CSA)을 결성한다.본문으로 uK. Marx,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럼 링컨에게" - Ed.본문으로 v "Mr. Lincoln and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London, Jan.31", The Times, No.25101, February 6, 186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9)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보-오전쟁)을 지칭한다. 13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1867년 9월 18일 무장한 페니어주의자들이 맨체스터에서 경찰의 열차를 습격하여 두 명의 정치범(페니어주의자 간부)을 구출하였다. 경사 한 명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전국에서 정기적인 순회재판을 보장하는 영국법에 반하여 이 사건은 특별조사위원회가 처리하였는데, 이들이 마련한 특별재판에서 그 공격에 가담한 죄로 고발된 페니어주의자들은 경찰관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름난 판사인 블랙번(Blackburn)은 수감자 탈출에 가담했다고 밝혀진 모든 피고인들이 이에 따라 살인혐의가 인정된다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배심원을 설득하였다. 블랙번 판사는 5명의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평결을 내리고 사형을 언도하였다. 5명 중 2명의 집행은 연기되었고 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868년 6월 2일 바로 그 블랙번 판사는 자마이카 전 총독인 에어(Eyre)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영국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A. Cockburn)경의 견해를 인용하며 에어가 행정권을 남용하지 않았다고 대배심을 설득하여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6월 8일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은 퀸즈 벤치430)법정에서 블랙번 판사가 사실을 날조했다고 기소했고, 블랙번 판사는 자신의 사법적 실수를 인정하였다.본문으로 430) 27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w이 책 3~4페이지를 보라. - Ed.본문으로 x "London Meetings", The Times, No.25974, 1867년 11월 21일 - Ed.본문으로 4311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y독일어 원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프랑스어 "tacite"이 라틴어로 괄호안에 적혀있다. - Ed.본문으로 z Paul Boudet - Ed.본문으로 ㄱ 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분쟁은 1866년 제네바 총회 뒤에 일어났다.(13번 주를 보라) - Ed.본문으로 432)1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33)프랑스 국경에서의 이 사건과 프랑스 대표단 문서(Memorial of the French Delegation)(pp. 365~66을 보라)의 압류에 대한 아이히호프의 기술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에 수록된 마르크스의 작업을 이용하고 있다.(이 책 12~14페이지)본문으로 ㄴJohn George Eccarius - Ed.본문으로 ㄷCharles La Vallette - Ed.본문으로 ㄹ 나폴레옹 3세본문으로 ㅁ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편지는 3월 9일자로 되어있다( "A M. le ministre de l'intereur. Vendredi, 9 mars 1867",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 - Ed.본문으로 ㅂIbid - Ed.본문으로 ㅅ 제 1인터네셔널 파리 지부의 문서 담당관인 Antoine Marie Bourdon이다.본문으로 ㅇ독일어 원본에는 프랑스어 문장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괄호 안에 제시되어 있다. 1867년 3월 10일 벌어진 이 회담의 내용은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에 수록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34)1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ㅈ1868년 전야(12월 31일) - Ed.본문으로 435)이 장(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의 마지막까지의 텍스트는 국제노동자 협회 회보. 파리 사무소(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 Travailleurs. Bureau de Paris)(Paris, 1868)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의 요약 및 직접인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톨랭의 심문에 관한 기록을 보려면 이 책의 pp.12~15를 보라.본문으로 ㅊ 들르스보 (Delesvaux) - Ed.본문으로 ㅋ이는 Manifeste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suivi de Reglement provisoire, Breussels, 1866을 지칭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요청에 따라 찰스 롱게(Charles Longuet)에 의해 번역되었다. 롱게는 임시규약(Provisional Rules) 첫 번째 불역본의 오역을 바로 잡았다.-Ed본문으로 ㅌ독일어 원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속에 프랑스어가 제시되어 있다.본문으로 ㅍ강령 중에서 톨랭이 읽은 부분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l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aris, 1868. pp.14~15이다. - Ed.본문으로 ㅎ"Reglement de Bureau de Paris." In: Pre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pp.22~24 - Ed.본문으로 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16,20 - Ed.본문으로 436) 이는 1867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통치자들 사이에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더키(Grand Duchy)를 둘러싼 분쟁을 지칭한다. 이는 군사적 준비를 불러왔고 양 나라에서 모두 경솔한 군사적 프로파간다가 수반되었다.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향한 전초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867년 10월 17일 Liebknecht가 제국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비스마르크의 룩셈부르크 문제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였다. 10월 22일 총평의회 회의에서 마르크스는 그 연설문 요약을 읽었다. 그 연설은 이 총평의회 회의 보고서에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The Bee-Hive, No.315, October, 1867에 수록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라파르그를 시켜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도록 하여 Le Courrier francais에 싣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었다.본문으로 나)Ibid., pp.32~35 - Ed.본문으로 다)Paul Boudet - Ed.본문으로 라)Congres de Geneve. Memoire des delegues francais, Brussels, 1866 - Ed.본문으로 마)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39~40 - Ed.본문으로 바)Code Penal, ou code des delits et des peines, Cologne, 1810 - Ed.본문으로 사)Loi sur les associations, 10~11 avril 1834 - Ed.본문으로 아) "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Le courrier francais, No.71, March 14, 1868 - Ed.본문으로 자)이 호소문은 Le courrier francais, No.101, April 20, 1868에 실렸다. - Ed.본문으로 437) 16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차) Proces..., pp.124~26 - Ed.본문으로 카)"Correspondance. Travail et Cooperation, Londres, 27 avril 1868", La Cooperation, No.18, May 3, 1868 - Ed.본문으로 438) 1852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의 이름으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가 프랑스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것으로 제 2공화국이 붕괴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로 끝나게 된 쿠데타는 1년전인 1851년 12월 2일에 발생하였다.본문으로 타)Ch. Delescluze, "Le droit d'Association. Devant la justice", Le Reveil, No.2, July 9, 1868 - Ed.본문으로 파)이 책 p.14를 보라 - Ed.본문으로 439)5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하)1868년 5월 16일 Jules Bara의 하원의회에서의 연설, La Voix de l'Avenir, No.23, June 7, 1868; La Liberte, No.47, May 17, 1868을 보라 - Ed.본문으로 갸)브뤼셀 총회는 1868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열렸다.본문으로 냐)"A Monsieur Bara, ministre de la Justice", La tribune de peuple, No.5, May 24, 1868 - Ed.본문으로 440)2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42)Grutli 노조 (Grutli-Verein) - 스위스 개혁주의 단체인데, 장인들과 노동자의 교육협회로서 1838년 설립되었다. 그 이름은 스위스의 국가적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스위스의 전설에 따르면 스위스의 세 개 주의 대표가 1307년에 Gr tli (루틀리, Rutli)의 풀밭에서 만나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한 저항동맹을 결의했다고 한다.본문으로 443)이는 1850년 3월 11일 제정된 반동적인 프로이센 법과 관계되어 있다.본문으로 444) 미국에서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은 1840년대와 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 들어와서 그 운동은 대중적 성격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연대체(league)와 노동조합이 동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National Labour Union) 역시 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대중운동의 영향력 때문에 미국 의회는 모든 정부 기업과 연방 기구들에 대한 8시간 노동일 법을 1868년 6월 25일 상정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고용자들은 이를 실행하지 않거나 위배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고용자들에 대해 저항할 것을 노동조합에 주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미국 노동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윌리엄 실비스(William Sylvis)의 적극적인 관여로 1866년 8월 볼티모어 대회를 거쳐 설립되었다. 1866년 10월 9일 쿠겔만(Ludwig Kugelman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볼티모어 대회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제안한 모든 요구들이 거기에 담겨있네, 노동자의 정확한 본능에 의해서 말이지." 1866년 10월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와의 관계를 확립하였지만, 1867년 8월 시카고 대회에서 선출된 대의원인 리차드 트레벨릭(Richard Trevellick)은 로잔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최근 대회인 바슬(Basle) 대회(1869년 9월)에는 카메론(Cameron)이 전미 노동조합의 대표였다. 1870년 8월 열렸던 전미 노동조합의 신시내티 대회에서 카메론은 자신의 국제노동자협회 대회 참가를 보고하였고,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원칙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확인하고, 협회에 가입할 것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그 결의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 지도자들이 화폐 개혁의 유토피아적 공상에 포섭되었고, 1870년과 71년 많은 노동조합들이 떨어져 나가, 72년 전미 노동조합은 거의 개점휴업상태가 되었다.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