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선교협 노옥희 인터뷰
인터뷰 & 정리 신진선 | 편집부장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그 동안의 저임금, 장시간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폭력적인 노동통제 속에서 고통 받고 있던 노동자들이 자신들 역시 인간임을 선언하는 투쟁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 교육, 생활의 거점인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계기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전노협-민주노총 건설로 이어져온 노동자 운동이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상황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세련되고 유연한 착취와 통제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다수다. 또 노동자운동의 위기가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6월 항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되고 있지 못하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6월 항쟁 당시의 주역들이 많이들 현정치권에 몸담고 있기 때문일 거다. 또 한편으로 현재 노동자운동의 상황을 반증하는 것 일게다. 노동자들의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노동자 운동을 전망해보고자 한다. 87년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한편의 인터뷰로 모두 갈무리 할 수 없겠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출발점이었던 울산 지역 노동자 운동에 대한 회고를 통해 당시의 기억들을 되살려보고자 한다.
노옥희 선생은 86년 교사 시국 선언 관련으로 해직된 이후 86년부터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에서 운영한 노동문제상담소의 간사로 활동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 노조 건설 지원사업과 건설 이후 노조 간부 지도사업을 벌였고 87년 8월 31일 ‘3자 개입금지’로 구속되었다. 현재는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민생특위 위원장과 울산 87 노동자 대투쟁 2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사회운동: 원래 교사이셨는데요. 어떻게 울산에서 노동자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노옥희: 대학을 다닐 때 까지만 해도 운동이라고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한 차례의 집회나 시위도 없어서 유신대학이라고 불렸다고 하더군요. 교사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공고로 발령이나 아이들을 가르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졸업해서 주로 현장에 취업해 있던 학생들이 찾아와서 얘기를 하는데 내가 그냥 애들만 가르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은 대학을 못 나와서 차별받고 있다며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현장 노동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한 아이가 산재를 당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찾아왔는데 나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노동자는 노동조합도 만들 수 있고 산재 보상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죠.
사회운동: 87년 6월 항쟁이 있은 후 7월부터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시초는 87년 7월 5일 현대 엔진노조의 결정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뒤이어 현대미포조선, 현대자동차 등으로 그리고 부산, 마산, 창원 등지로 각 지역의 노조 결성이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이렇게 폭발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우연적으로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 데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던 배경에 대해 말씀 해주세요.
노옥희: 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크게 연관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6월 항쟁 이전부터 각 현장들은 단사별 소모임을 통해 노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엔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등 각 현장에는 각종 문제 해결에 나서는 소모임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고, 그 대표들이 모여 지역모임을 조직해 함께 학습하고 각 현장의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각 현장 소모임에서 노동법이나 역사, 자본주의에 관련한 학습과 시간외 수당 바로 받기, 성과급 차별에 대한 저항 등을 위해 몰래 유인물을 뿌리기도 하고, 몸벽보 등 집단적인 행동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사진1%]이 중에서 가장 앞서간 소모임이 현대엔진 소모임이었고, 현대엔진 소모임은 6.29 선언 이전에 이미 노조 결성일자를 7월 5일로 확정하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 공간이 열리고 상황이 좋아지면서 준비했던 단위들이 하나 둘 노조 결성을 시작했습니다. 또 이와는 별도로 노동 대중들의 지속적으로 잠재된 불만과 저항의식이 6월 항쟁을 계기로 분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은 두발 등과 같은 신체, 근로조건, 임금 등에서 자기 결정권이 없었기에 일상적인 불만이 쭉 누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87년 현대중공업에서 집회를 할 때 지도부들이 광장에 모인 노동자들에게 즉석에서 자신들의 요구안을 쭉 적게 했습니다. 그 때 다양한 요구들이 폭발적으로 나왔습니다. 지도부 차원에서 임금 몇 프로 인상하자라고 이야기 하는 것 보다 더 높은 요구와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동자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있다고 다들 생각했겠지만 노동자들 내부에는 폭발적인 힘을 키우고 있었던 거죠.
사회운동: 당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이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을 거 같습니다. 당시 여론의 반응은 어땠나요?
노옥희: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있었지만 지역 여론은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가족들도 동참하고 지역주민들도 함께 지지했죠. 87년 같은 경우는 모두가 하나 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울산은 지역 구성원이 대부분 노동자이고 노동자의 가족들입니다. 넓게 보면 다들 노동자 계급이라고 볼 수 있죠. 때문에 87년 당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남의 일이 아니었죠. 또 당시의 집회는 지금처럼 고립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집회에 참가하는 대열과 아닌 사람이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잖아요.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구호나 투쟁가는 없었지만 유행가를 부르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에 지역주민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지금처럼 대열지어 집회를 하면서 집회 참가자인 노동자들과 지역주민들이 분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조합원이 아니어도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죠. 노동운동이 쇠퇴기로 접어들기 전 몇 년간 이런 분위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사회운동: 노옥희 선생님은 특히 86년부터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의 노동문제상담소 간사로 계시면서 자생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계셨는데요. 87년 당시 노동자 운동 내에서 활동가들의 활동과 이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노옥희: 87년 이전 보다 87년 과정과 이후에 굉장히 많은 활동가들이 울산에 내려왔습니다. 활동가들은 지역 투쟁에 결합하기도 하고 활동가를 조직하고 학습하는 활동들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활동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현안에 대한 투쟁 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도 가지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87년 당시에는 워낙에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힘이 컸기 때문에 활동가들의 의식적인 노력들이 투쟁을 주도하거나 노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지금은 그 당시 내려왔던 많은 활동가들이 대부분 떠났습니다. 물론 개인의 전망과 관련한 고민도 있었겠지만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했을 듯합니다. 노동조합이 안정화 되면서 당시 활동가들의 역할이 일정 정도 노동조합과 상급조직으로 이전이 되면서 공개적인 학습이나 교육의 기회가 많아졌다는 조건도 작용했을 겁니다.
사회운동: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노동자들이 폭발적으로 자신들의 주체성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또 이를 토대로 이후 한국 노동자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가 무엇이었는지 말씀해주세요. 덧붙여 87년 노동자 운동과 관련하여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나 발굴되지 못한 쟁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노옥희: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하면서 저는 말로만 되 뇌이던 ‘이 땅의 주인은 노동자.’라는 것을 몸소 겪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 큰 힘이 발휘되고 또 그 과정에서 노동자 수만을 이끄는 훌륭한 대중운동 지도자들이 나오는 걸 봤습니다. 현대 엔진 노조 결성을 기점으로 수많은 현대 계열 노조와 남구 지역의 노조 민주화 투쟁들 중 우리가 준비한 곳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끝없는 대열, 노동자 지도자들이 노동자 대오를 이끌고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 내고 스스로의 투쟁을 만들고 조직하던 그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이 역사의 주인임을 깨달은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사람들도 그걸 깨달았습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집단행동을 했을 때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은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이 점 또한 커다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 기억들은 많이 유실되었고 또 당시 노동자들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조명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이탈해가는 과정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어떻게 성장했고 또 어떻게 이탈하게 되었는지를. 개인적으로 변절했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객관적인 평가 속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또 유실된 기억들을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87년이 있고 20년이 지났습니다. 현재 87년의 노동자 대중들은 과거의 경험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생활 조건이나 상황이 많이 달라진 탓이겠지요. 몇 년 전 현대중공업 민주집행부 때 조사한 바에 따르면 주로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마련하느라고 잔업이나 특근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언제 회사가 망하거나 내쫓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본의 통제력이 막강해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많이 잃어버리고 있는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87년 이후 세대도 비슷하지요. 다만 87년 세대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어, 새로운 사회가 가능하다든가 단결하면 뭔가 달라지더라든가 라는 기본적인 노동자 의식이 없는 젊은 노동자가 많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봅니다. 87년 이후 세대들, 지금의 젊은 노동자들은 87년의 역사를 거의 모릅니다. 당시 역사를 알게 된다면 지금 같이 일하는 늙은 노동자들을 새롭게 보게 될 것이고 노동자들이 많은 힘을 가졌다는 것도 깨달을 겁니다. 또 지금은 힘든 상황이지만 역사를 반추하며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 마지막으로 87년 노동자 운동 20주년을 맞는 선생님의 소회를 말씀해주세요.
노옥희: 울산에서는 87년 20주년 관련 사업을 크게 4가지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역사위원회에서는 구술, 설문조사 등의 방식으로 여러 영역에서 노동자 스스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술위원회에서는 학술적인 정리를 하며 87년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87년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화두로 민주노조운동 20년을 돌아보고 이후를 전망하기 위한 다양한 대중적인 토론과 강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교육, 문화, 산업안전 등 노동운동의 각 영역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노동자의 축제의 장으로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울산에서는 87년 20주년 사업의 목표로 소박하게는 모든 노동자들이 모두 87년을 알게 하자는 것을 잡고 있습니다. 현장으로 들어가 유인물 배포 등의 선전활동을 광범위하게 할 계획입니다. 또 이를 넘어서 87년 정신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돌아보면 87년 상황이라는 것이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는데 당시 운동이 폭발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폭은 많이 넓어졌지만 그 깊이도 함께 깊어 졌다고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열정적인 활동과 진정성,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87년 정신은 결국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87년 당시 노동조합은 단사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투쟁은 지역적이고 전국적으로 하였습니다. 현재 노동자 계급의 통일성이 확보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이 연대성을 발휘하고 또 지역의 다양한 운동과의 연대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