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전국민중연대’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전선질서 재편이라는 과제는 8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 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이후 변혁론과 조직론을 둘러싸고 줄곧 논의되어 왔던 문제다. 우선 ‘전선운동’은 역사적인 개념으로, 각 나라가 가지고 있는 변혁운동의 성격과 구조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전적·일반적으로는 ‘우리사회의 기층 민중운동진영을 비롯한 정치조직 및 시민사회단체가 해당 시점에서 해결해야 할 사회적 이슈와 현안을 내걸고 공동의 투쟁을 전개함’을 의미한다. 이런 일반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80년대 이후 추진된 전선운동의 흐름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1)
기간 전선운동의 개괄적 흐름
1984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1970년대 이래 재야운동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민주통일국민회의>가 주축이 되어 1985년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을 건설했다. 당시 이 조직들은 자신을 전선운동의 출발점으로 사고하였으며, 민통련의 건설은 본격적인 전선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85년 2.12 총선을 거치며 본격화된 개헌투쟁에 대응해 약 25개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3월 25일 ‘민통련’을 결성하게 되는데, 민통련은 군부독재에 의한 구속, 수배와 같은 탄압 속에서도 투쟁을 전개하였다.2) 이런 투쟁은 1987년 김대중 씨, 김영삼 씨를 포함, 당시의 야당 정치세력까지 참여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국본>은 군부독재에 맞서 1987년 6월 호헌철폐라는 국민적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국본>을 이끌었던 세력은 김대중,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야당 인사들이었고, 따라서 실질적인 투쟁의 성과가 민중운동진영의 힘으로 귀결되기보다는 보수야당으로 수렴되는 한계를 낳았다. 그러나 1987년 호헌철폐를 기점으로 7월과 8월에는 억눌려 있던 남한 사회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 일어난다. 1987년 노동자들의 역사적·혁명적인 투쟁 앞에 자본과 정권을 비롯한 전 세계가 놀랐지만, 6월의 호헌철폐가 보수야당의 성과로 끝난 상황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을 지도할 조직적 힘은 대단히 미약했다. <국본>은 1987년 대선을 둘러싸고 단일한 전선을 구축하지 못한 채 양 김 씨에 대한 태도와 지지를 둘러쌓고 분열되었으며, 결국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이 재집권하게 된다.3)
1987년 대선 이후 분열을 극복하고 노태우 정권에 대한 총력 대응을 조직하기 위해서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협의회>(이하 전민련)가 결성되었다. <전민련>에는 <서울민족민주운동연합회> 등 지역운동단체 12개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와 <전국농민운동연합> 등 부문운동단체 8개를 비롯하여 개별운동단체 약 200개가 참여했다. 그러나 <전민련>은 불과 8개월 만에 정기중앙위에서 합법정당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내부 분열을 겪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0년, 대중조직들은 민자당 합당에 대해 아래로부터 정치적 반대를 조직하려했고, 4월 21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국빈민연합> 등 기층조직과 13개 재야단체가 한시적 공동투쟁체인 <국민연합>을 결성하는 등 운동세력의 통일단결을 위해 노력한다. 1991년 대대적으로 몰아닥친 공안탄압으로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이 희생되었지만, 민중당을 중심으로 ‘지방선거에서 표로 심판하자’ 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투쟁전선은 급격히 약화된다.
1991년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운동진영은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연합>, <전민련> 등을 통합·확대하여 <민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을 공식 출범시킨다. <전국연합>은 해방 이래 최초로 전국적 조직을 규합하여 전선운동으로서 위상과 조직체계를 갖추고 출발했다. 그러나 그해 <전국연합>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87년 악몽을 되풀이한다. 후보전술을 둘러싸고 격렬한 내부 논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보수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채택, 김대중을 후보로 선택했다. <전국연합>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 하에서 민주대연합을 이뤄 보수수구세력을 압박하고 우리사회의 민주주의를 앞당겨야 한다는 정세인식을 바탕으로 대선에 임하지만, 결국 92년 대선은 수구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의 당선으로 끝났다. <전국연합>은 이후 통일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내부 논쟁에 휘말리고, 민간 부르주아 정부와 함께 등장한 신자유주의 질서 등 1990년대 변화된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1990년대 초중반 기층대중조직의 생존권적 요구가 대두되면서 당면한 정치적 임무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거나, 이와 반대로 기층대중조직의 민중생존권 투쟁이 경제주의적 투쟁으로 폄하되거나 정치적으로 소외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연합>이 민중생존권 투쟁과 기층민중 운동진영의 투쟁을 제대로 엄호하지 못하자 <전노협>, <전빈련> 등이 <전국연합>을 탈퇴했고, ‘전선체’를 표방했던 <전국연합>의 전망은 사실상 빛이 바래게 된다.
그 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노동유연화가 광풍처럼 우리사회에 몰아치고 IMF 경제위기가 발생하면서, 이에 맞서 1997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와 같은 사안별 연대기구가 만들어졌다 해소되기를 반복했고, 이후 1998년 5월 <고용·실업대책과 재벌개혁 및 IMF 대응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이하 IMF 범국본)가 한시적 공동투쟁체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