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에 휩싸인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1) 데이비드 베이컨 *번역: 강 국(회원) 시카고 네이비야드의 휑뎅그렁한 회의장에서 대의원들이 회의장 곳곳에 분산된 네 개의 마이크 뒤에 줄지어 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낸시 월포스는 2번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는 이 순간을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려 왔다. 마이크가 켜지자 그녀는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월포스는 가냘픈 여성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장 곳곳의 왁자지껄한 대화를 관통하며 좌중을 압도했다. 21세기 마더 존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한 아일랜드 출신 미국의 노동운동 선동가, ‘광부의 천사’라고 불림 - 역자)의 격렬함과 분노에 휩싸여, 그녀는 직설적이고 꾸밈없는 진실을 동료 대의원들에게 토해냈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부시 행정부의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우리가 이라크에 가게 된 것은 거짓된 구실 때문이었으며, 이라크에 머물게 하는 것은 핼리버튼사(현 미국 대통령 딕 체니가 몸담았던 회사로서 이라크에서 많은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 - 역자)에 있는 부시 일당들을 배불리는 것말고는 절대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면서 바그다드로부터의 멀고 위험한 길을 무릅쓰고 미국산별노조총연맹(AFL-CIO) 대의원대회에 참여한 일군의 이라크 노동자들을 가리켰다. "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녀는 일갈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미국의 점령을 끝내는 것입니다."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그것을 바로 지금 원합니다, 내일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갈채가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곳에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자결권을 얻을 수도 진실로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회의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의 갈채에 휩싸였다. 월포스의 얼굴은 눈 주변이 깊이 패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며 샌프란시스코의 경향과 함께 했다. 사무전문직노조의 재무서기관인 그녀는 이제 미국의 최상급 노동자운동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또한 그녀는 게이와 레즈비언 노조원의 전국조직인 〈노동의 긍지〉(Pride at Work)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2년 동안 그녀와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에 속한 반전 대오는 오랜 투쟁을 거쳐 결국 이라크 전쟁을 AFL-CIO 시카고 회의 중앙무대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반전 문제에 관해 이와 같은 역사적 일보를 내딛은 바로 그때, 과도한 내부 분쟁으로 인해 노동운동 자체의 통일성이 희생되고 있었다. 월포스의 연설이 있기 바로 전날 세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는데, 이는 국제정치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쇠퇴하는 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이견 때문이었다. 전쟁은 이와 같은 구체적 관심사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대의원 대회가 끝난 뒤 노조분열로 인한 대회장에서의 상처를 지켜보면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적은 내부분열, 더 많은 용기와 정치적 전망이라고 그들은 결론 내렸다. 총회가 끝난 후 활동가 앨런 벤자민과 나눈 대담에서 월포스는 그 날이 “노동운동에게 매우 나쁜 날”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노조원들은 이런 일이 왜 발생해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조차 이게 모두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답니다. 꽤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 왔는데도 말이에요.” 노동운동가 빌 플레처가 보기에, 그 논쟁은 깊은 분열을 낳긴 했지만 노동자들의 기본 문제를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놓고 말하기 꺼려왔던 것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 사회의 우선순위는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으며, 우리는 그걸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산업노조의 탈퇴 토론 말미에 AFL-CIO는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진보적인 노조원에게 이는 빛나는 순간이긴 했지만,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팀 폴슨은 그의 동료 대의원들에게 전쟁과 노동자들에게 더 절실한 문제들 간의 연관성을 설명하였다. 그 도시의 중앙노동 평의회 서기인 팀 폴슨에 따르면, "폭탄과 점령에 지출되는 이 모든 돈이 보건, 고용, 기간시설에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남녀노동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요.“ 전국적으로 볼 때, 노조는 노조원의 감소 면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노조는 미국 노동자의 35%를 조직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에는 조직률이 26%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전체노동자의 고작 12%, 또 사적 부문 노동자의 8%만이 노조원이다. 이들은 주로 동·서 해안의 도시 지역과 중서부의 이전 시기 공장지대에 집중되어 있거니와, 전국 대부분 지역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힘으로 고용주들과 협상하도록 방치된 셈이다. 노조원의 감소는 정치역량과 경제적 수단의 감소로 이어진다. 캘리포니아(AFL-CIO 조합원의 1/6을 차지하고 있다)와 뉴욕은 다른 지역보다는 노조 비중이 높다. 하지만 이곳에서조차 노동자들은 주지사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의 전면전에 직면하고 있다. 주지사 보궐선거에 대한 조치는 캘리포니아의 강력한 공공노조가 의미 있는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분쇄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대열을 분열시킬 때가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AFL-CIO 총회 첫날, 두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다. 가장 큰 노조인 국제서비스노조(SEIU)는 180만 명 규모이고, 트럭운송조합(Teamsters)는 110만 명 규모다. 총회가 끝나면서 한 노조가 탈퇴했는데 연합식품상업노조였다. 셋 모두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거대하고 중요한 노조다. [이 지역의] 국제서비스노조 지부들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톡톤에 이르는 공공노동자들을 대표하는 790 지부, 캘리포니아 주 전체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535지부, 전국에서 가장 커다란 노조 지부 중의 하나인 연합의료노동자 지부들이 있다. 베이 에어리어(샌프란시스코 만 지역 - 역자) 전역의 트럭운송조합 지부들은 트럭운송과 수송, 저장, 식품 가공 공장, 그리고 수많은 여타 사기업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연합식품상업노조는 식품판매업과 식육가공도매업 회사들에 있는 노조다. AFL-CIO에서 탈퇴한 이 세 노조는 〈승리를 위한 변화〉라 불리는 새로운 노동연합을 조직해 냈는데, 여기에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탈퇴하지 않은 다른 노조들이 속해 있다. 섬유호텔식당노조는 그 중 하나다. 이 노조의 2지부는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크고 화려한 14개 호텔과 영웅적인 투쟁을 벌여 왔다. 섬유호텔식당노조의 다른 지부들은 의류와 세탁 산업의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 〈승리를 위한 변화〉에는 또한 농업 노동자 노조와 건설노조, 그리고 목공노조(the Carpenters)(이들은 몇 년 전 AFL-CIO를 탈퇴했다)가 속해 있다. AFL-CIO,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채택하다 이는 미국 노조의 역사에서 매우 모순적인 순간이다. 지금까지 대중들의 이목은 주로 노조의 분열에 집중되어 왔지만, 전쟁에 관한 논쟁의 반향은 앞으로 수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젊은 시위대였던 반전 연대 활동가들의 세대, 그리고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개입 당시 기층 활동가들이 오늘날 노조를 이끌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어버렸거나 잊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월포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운동의 침묵, 특히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맞서 싸우고 있는 경제 체계를 지탱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이 사용되는 것에 대한 운동의 침묵을 보는 데 신물이 났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조직구조에 대한 내부 이견이 넘쳐나고 있지만, 이라크 전쟁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통신노조(CWA)의 부의장인 브룩스 선켓은 총회장에서 일련의 열정적인 연설을 쏟아 내면서, 30년 전 정부가 자신을 베트남 전쟁에 보낼 때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 전쟁은 그 전쟁과 아주 유사해 보입니다. 그들은 당시 나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지금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노동자연맹의 병원노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헨리 니콜라스는 대의원들에게, 이라크에서 네 번 복무한 그의 아들이 한 차례 더 복무하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도 이견을 표명하지 않은 채, 연사들은 연달아 일어나 전쟁과 점령을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했다. 2년 전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 노조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던 이 논쟁은 이제 최고조에 달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략의 의도를 품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 순간부터, 노조 활동가들은 그에 맞서기 위한 전국적 네트워크인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노조에서 작은 집단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이제 백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들의 연합이 되었다. 방청석에서는 월포스가 가리킨 이라크 노조 지도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이라크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다섯 명의 노조 활동가들과 함께 두 달 전 미국을 순회했다. 16일 동안 그들은 50개 이상의 도시를 돌면서, 미국의 노조 동지들에게 점령 중단을 위한 행동을 취할 것을 호소했다. 5월에 두 명의 이라크인이 베이 에어리어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정유노동자일반노조의 지도자인 하산 유마와 팔레 아부드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 노조들 즉, 샌호세에 있는 국제서비스노조의 커다란 공공노동자 지부, 마르티네즈의 정유 노동자들, 그리고 거의 모든 베이 에어리어 노동평의회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런 경험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애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는 이라크 노조원들의 순회연설을 조직하여, 그들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직접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의 전국 집행자 중 한 명인 진 브루스킨(Gene Brusk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우리는 우리나라 노조들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라크 노동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들은 연대와 인간적 공감의 정신에 입각하여 화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우리가 옳았습니다." 총회에서의 논쟁은 이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군대 철수를 요구하는 18개의 결의안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의 노조와 노동평의회, 그리고 주 노동 연맹들로부터 AFL-CIO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총회가 열리면서, AFL-CIO의 전국집행부는 "가능한 한 빨리" 점령을 종식시킬 것을 호소하는 결의안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러자 총회에 참석한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 대의원들은 군대의 "신속한 철수"라는 문구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싸움이 시작되려 했고, 갑자기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AFL-CIO 집행부는 이에 동의했다. 신속한 철수라는 안이 회의장에 제출됐을 때 폴슨은, “여기서 ‘신속하게’라고 말할 때, 이는 ‘즉각’과 같은 뜻입니다 ― 우리가 이 결의안을 지지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새로운 용어는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현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층 지도부가 내린 지도가 아니라 미국 노동운동의 기층에서 만들어진 풀뿌리 행동의 산물이었다. 미군철수라는 호소는 그 자녀와 가족이 전쟁에 나설 것을 호출 받은 수천의 평범한 노동자와 노조원의 정서를 반향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이제는 미국 노조의 다수가 미군의 생명을 지키는 최선의 수단은 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라크전이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은 거의 신빙성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라크 민중들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행정부의 주장은 비슷한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행정부의 5년 간의 공격 후, 부시 행정부의 가장 완고한 지지자가 아닌 다음에야 부시의 친-민주주의(pro-damecracy) 선언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점령이 가지는 반-민주적 효과에 대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이라크인들이 미국 노조원들에게 전해 준 바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유전, 정유공장 그리고 다른 이라크 공기업에서 노조 조직화를 금지했다. 한편 부시의 정치요원들이 이 공기업들을 외국 기업에 처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천 개의 일자리와, 그리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소득의 잠재적인 상실을 동반할 것이다. "이건 해방이 아닙니다. 이것은 점령입니다." 미국에서의 발언을 위해 조합원을 파견한 노조 중 하나인 이라크 노조연맹의 지도자 가십 하산이 말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식민지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식민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신속한 철수는 단지 미국 병사들을 본국으로 데려온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구는 미국 노동자들을 이라크인들 편에 서게 하는 것인데, 부유한 세계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나라가 개조되는 것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노동조합의 구조에 대한 논쟁 그러나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중요한 문제 하나를 두드러지게 했다. 노조원들은 점점 더 현명해지고 있고, 전쟁에서 무역에 이르는 세계적 쟁점이 미국의 거리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원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고, 이 같은 이해를 실천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조직은 더 작아지고 있다. 정치적 의식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총회 준비 기간에 이라크는 노조 논쟁의 주된 주제가 아니었다. 사실 이 주제는 자주 사뭇 다른 토론 속으로 묻혀 버렸는데, 이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개 [노조의] 생존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결국 [노조] 분열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지만, 미국 노조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은, 대외 정책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고 주로 노조의 효율적인 행동을 가로막는 [노조 내부의] 구조 문제와 훨씬 더 관련이 있었다. 관련 쟁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지부 사례는 샌프란시스코 호텔 노동자들의 1년에 걸친 투쟁사례이다. 거대한 호텔 경영자에 맞서 전국 각 도시의 노조가 동시에 교섭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호텔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단체 협약의 종료 시기를 동일하게 2006년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은 이를 쟁취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업자들]이 주되게 저항하고 있다. 그 도시의 [호텔] 사용자협회(Multi Employer Group)가 합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호텔 경영자들을 대표하는데, 여기에는 힐튼, 인터콘티넨탈, 스타우드, 하야트 등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호텔을 경영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업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만일 노조가 전국 각 도시에서 노동자 공동 전선을 꾸리면, 개별 지역 노조만의 힘으로는 쟁취할 수 없는 새로운 생활수준을 쟁취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호텔 노동자들은 2년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식품 노동자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이 다섯 달 동안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에 걸친 새이프웨이, 알버트슨, 랄프 등의 식료품 체인에서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실질적으로 더 낮은 임금과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체인점들이 국내 다른 지역에서는 가게를 열어 이윤을 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조들이 기억해야 할 교훈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과 지역적으로 교섭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부족했던 것은 연대였다 -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社의 노조는 유사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이 항공사 노조는 자신의 연금제도를 올해 초 연방정부에게 투매(投賣)해 버렸고, 그래서 퇴직자들은 자신들의 연금수급액이 삭감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항공 산업은 11개의 노조로 나뉘어져 있다(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항공사에만도 네 개의 노조가 있다). 이 같은 분열상태에서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란 어렵다. 만일 그들 모두가 단일한 노조에 속했다면, 그리고 거의 모든 항공 노동자들이 조직되어 있었다면, 승리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십 수 년을 들여 건설해 낸 퇴직 제도의 해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한 회사가 파산한다면(유나이티드 에어라인사가 파산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위협한 것처럼), 그 파산회사의 노동자는 다른 항공사로 쉽게 흡수될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하나의 노조와 하나의 단체협약만이 있다면 말이다.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화 방식에 집착한 결과, 임금 삭감, 복지 삭감, 연금 상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반면 샌프란시스코 부두노동자조합, 즉 미서부항만노조는 3년 전 자신의 조합원에 대항한 사용자의 직장폐쇄를 물리쳤다. 그들이 이긴 것은 1930-40년대 당시 노조가 동일한 쟁점에 대해 아주 영리했기 때문이다. 부두 노동자들은 술꾼이나 부랑자 취급을 받곤 했다. 1934년 샌프란시스코 총파업 이후, 그들은 전 항구에 걸쳐 서부 연안에 있는 모든 해운 회사들과 단일한 단체협약을 맺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결과적으로 부두 노동자들의 임금은 현재 미국 산업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연대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따라서 작년 많은 노조들은 노조운영 방식을 바꾸기 위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논의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서비스노조의 8월 총회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의장 앤디 스턴은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호소했다. 그리고 2004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노조는 「승리를 위한 단결」이라 불리는 10개 조항으로 된 안을 제출하였다. 이는 즉각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노조들이 화답했다. 10개 조항에서 노조들이 교섭하고 조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큰 노조로 통합하도록 요구하는 권한을 AFL-CIO에게 부여하기로 되어 있는 항은 가장 논쟁적인 조항이었다. 또한 [이 항에 따르면] 총연맹은 동일 산업의 노동자는 많은 노조로 분할되지 않게 명확히 하도록 하고 있다. 스턴은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공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면, 여기서 노조들은 직종별로, 기업별로, 노조/비노조 별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들의 역량을 분할하고 통일된 전략을 갖지 못할 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노동자입니다.” 많은 노조들이 자신들이 강요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격렬한 이견을 표출했다. 하지만 결국 논쟁은 돈에 관한 논의로 전락했다. <승리를 위한 변화 연합>을 결성한 노조들은 AFL-CIO가 그들이 내는 조합비의 절반을 환불하여 새로운 조합원들을 조직하는 전략적 캠페인에 투여할 것을 주장했다. AFL-CIO 의장 존 스위니(그 자신이 국제서비스노조의 前의장이자 스턴의 스승이었다)는 연맹이 조직화에 비용을 늘려야 하겠지만 더 많은 비용을 선거 캠페인에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양측 모두 조직화와 정치활동 모두에 자금 투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차이점이란 각각에 배분될 비율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예산 분배에 대한 쟁점 이것이 노조연맹을 분열시킬 만한 값어치를 가진 쟁점인가? 서부 지역 국제서비스노조 부의장인 엘리시오 메디나(Eliseo Medina)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나 공직자도, 그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한들 말입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우리 운동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정치는 해법의 일부겠습니다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조에 가입할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동원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핵심 산업을 조직하고자 하는 노조들에게 1인당 50% 그러니까 대략 5천만 달러를 환불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AFL-CIO는 천오백만 달러 정도로 가고자 했고, 나머지 자금은 정치[사업]에 할당하려 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차이입니다 ― 그들이 제안한 것은 그 일을 하기에 완전히 충분치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은 확신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다만 노조가 공격받고 있는 와중에 그 힘을 분열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논쟁이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빌 플레쳐는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존 스위니의 개혁 집행부가 1995년에 선출된 이후, 그는 총연맹의 교육국장이 되었고 뒤에는 스위니의 보좌관이 되었다. 급진적 정치 때문에 밀려난 이후, 그는 미국 노조의 느린 변화 속도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었다. 한 대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노조는 심각한 보수주의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 보수주의란 다름 아니라 진행 중인 변화의 성격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그래서 매우 통찰력 있는 운동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정말이지 물러나야 합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확실히 잘 못된 가정을 하였습니다. 노조는 지배 엘리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노조는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조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노조가 지배엘리트와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 질 것이라고 가정하였던 것입니다]” 플레쳐와 다른 이들은, 노조가 자금을 조직가를 고용하는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선거운동을 진행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내며 논쟁한 반면, 방향, 즉 노조가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AFL-CIO 대의원대회에서 벌어진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자금과 노조의 구조에 지배된 논쟁에서 그나마 실체적 내용과 정치를 더해준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는 그처럼 훨씬 깊이 있는 토론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AFL-CIO 대의원대회 이후 수백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이주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방어하겠다는 고귀한 이상이 지금은 사라졌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기층 조합원으로부터 이번 대회에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와 유사한 외침이 터져 나와 기본적인 정책에서의 또 다른 변화를 대의원대회장에 강제하였다. 그래서 노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취업을 연방범죄로 만드는 <이주 개혁 및 통제 법>(1986 제정)과 고용허가제에 대한 이전의 지지 입장을 철회하였다. 이제 섬유호텔식당노조 공동의장이 된 존 빌헬름(John Wilhelm)은 허가제를 지지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고 선언했다.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오늘날, 실질적으로 고용허가제를 강화시킬 두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 있다. 양자 모두 거대한 새로운 노동연수제도를 설립할 것인데, 이는 1940-50년대 멕시코 계절 농업노동자 프로그램과 같은 것으로, 이주자들을 임시 비자로 들여와 거대 기업의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주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 계획이 착취적 ― 사실상의 비자발적 노예노동 ― 이라고 보아 전통적으로 반대해 왔다. 이 법안 중 하나인 케네디-맥케인 법안은 노조의 전국 정치간부들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지역 노조와 기층조합원들 사이에서 그 안이 노동과 이주자들에게 미칠 영향에 관해 어떤 토론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 의회의 가장 진보적인 이주법안은 연수생 제도를 담고 있지 않으며 [연수생제도 금지를 위해] 강화된 집행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 안이 흑인연방의원회의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도, 노조로부터는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섬유호텔식당노조는 이주노동자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버스·기차여행 - 역자)를 발의했다. 단체협상에서 2 지부는 호텔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설치한 사실상의 인종 차별선을 없앨 것을 요구하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에게 보고 싶어하는 종류의 변화는 바로 이것이다 ― 원칙에 입각한 실제적 의제,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정직한 시도, 그리고 워싱턴의 유해한 정치 환경의 조건을 바꾸고자 하는 거리의 열기 말이다. 하지만 대신에 - 심지어 진보적인 노조에서도 -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라곤 정계 엘리트들과의 거래이다. 플레쳐가 말하듯, 논쟁은 더 첨예해져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노동운동의 단결 그리고 한편 [주요 노조들이 분리해 나간 뒤에도] 샌프란시스코의 노조와 노동평의회는 살아남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투쟁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정말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대부분의 다른 지역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의 거대 공공노조, 즉 서비스 790 지부의 사무총장인 조시 무니가 이 도시 평의회 의장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무니는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메디나(국제서비스노조의 서부지역 담당 부의장 - 역자)에 따르면, 무니는 “우리는 지역적이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계속 함께 일할 필요가 있으며 AFL-CIO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노조들은 그들이 웬만해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밀접한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평의회들은 이제 <승리를 위한 변화>에 속하게 된 노조의 회비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이것 없이 활동해야만 한다면, 그 평의회들은 사무처 요원들을 해고하고 활동을 줄여야만 할 것이다. 평의회들은 선거(예컨대 올 11월 캘리포니아에 찾아오는 선거) 기간 동안 수고스러운 일들의 대부분을 한다. 노조원들은 평의회가 보유한 전화명부를 이용하러 떼 지어 몰려오고, 평의회가 조직한 대중집회들을 좇아 밤에 혹은 주말에 지역을 돌아다니고, 심지어는 평의회 모임에서 누가 親노동 후보인지를 결정한다. [목수·벽돌공·연관공 등의] 건축업에서는, 공항이나 학교 다리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다루는 프로젝트 노동협약은 주로 평의회가 서명하며, 참여하는 노조들이 부기할 것이 요구된다. 만일 이 구조가 해체된다면 노조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노동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스위니는 이미 성명서 하나를 발표했는데, 어떤 AFL-CIO 사무처요원들은 이를 “자본의 입장”(the company line)이라는 냉소적 명칭으로 불렀다. 이 성명서에 의하면 총연맹에서 탈퇴한 노조들은 이후에는 지역 평의회에서 투표권을 지니고 회비를 납부하는 완전한 대의원으로 참가할 수 없다. 팀 폴슨은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최근 대담에서 희망적으로 말했다. “나는 우리가 지금껏 벌였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점을 분명히 압니다. 우리의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상점노조 지부들은 대의원대회 이전에는 노동운동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전국 지도자들에게 불화를 다스리는 계획표를 제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총연맹을 떠난 노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트럭운송조합과 자동차노조(UAW)가 1960년대에 탈퇴했을 때 그러했다. 건설에서 가장 큰 노조인 목공노조는 몇 년 전 탈퇴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베이 에어리어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AFL-CIO에 가입한 미국교사연맹은 독립전국교원연합과 협동한다 ―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양쪽의 지부가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 교원노조를 결성하기 위해 통합했다. 폴슨은 “제 생각에 우리는 항상 해 왔던 일을 계속하면 될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 간에 강고해지는 연대를 지금 모두 폐기해버리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에요.”라고 말한다. 노조들은 단결을 지속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아니(Arnie,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별칭 - 역자)가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면서] 몰래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1) David Bacom, "Unions at War", San Frasico Bay Guardian, 8월 10일자. 본문으로
분쟁에 휩싸인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1) 데이비드 베이컨 *번역: 강 국(회원) 시카고 네이비야드의 휑뎅그렁한 회의장에서 대의원들이 회의장 곳곳에 분산된 네 개의 마이크 뒤에 줄지어 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낸시 월포스는 2번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는 이 순간을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려 왔다. 마이크가 켜지자 그녀는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월포스는 가냘픈 여성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장 곳곳의 왁자지껄한 대화를 관통하며 좌중을 압도했다. 21세기 마더 존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한 아일랜드 출신 미국의 노동운동 선동가, ‘광부의 천사’라고 불림 - 역자)의 격렬함과 분노에 휩싸여, 그녀는 직설적이고 꾸밈없는 진실을 동료 대의원들에게 토해냈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부시 행정부의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우리가 이라크에 가게 된 것은 거짓된 구실 때문이었으며, 이라크에 머물게 하는 것은 핼리버튼사(현 미국 대통령 딕 체니가 몸담았던 회사로서 이라크에서 많은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 - 역자)에 있는 부시 일당들을 배불리는 것말고는 절대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면서 바그다드로부터의 멀고 위험한 길을 무릅쓰고 미국산별노조총연맹(AFL-CIO) 대의원대회에 참여한 일군의 이라크 노동자들을 가리켰다. "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녀는 일갈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미국의 점령을 끝내는 것입니다."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그것을 바로 지금 원합니다, 내일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갈채가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곳에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자결권을 얻을 수도 진실로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회의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의 갈채에 휩싸였다. 월포스의 얼굴은 눈 주변이 깊이 패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며 샌프란시스코의 경향과 함께 했다. 사무전문직노조의 재무서기관인 그녀는 이제 미국의 최상급 노동자운동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또한 그녀는 게이와 레즈비언 노조원의 전국조직인 〈노동의 긍지〉(Pride at Work)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2년 동안 그녀와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에 속한 반전 대오는 오랜 투쟁을 거쳐 결국 이라크 전쟁을 AFL-CIO 시카고 회의 중앙무대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반전 문제에 관해 이와 같은 역사적 일보를 내딛은 바로 그때, 과도한 내부 분쟁으로 인해 노동운동 자체의 통일성이 희생되고 있었다. 월포스의 연설이 있기 바로 전날 세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는데, 이는 국제정치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쇠퇴하는 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이견 때문이었다. 전쟁은 이와 같은 구체적 관심사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대의원 대회가 끝난 뒤 노조분열로 인한 대회장에서의 상처를 지켜보면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적은 내부분열, 더 많은 용기와 정치적 전망이라고 그들은 결론 내렸다. 총회가 끝난 후 활동가 앨런 벤자민과 나눈 대담에서 월포스는 그 날이 “노동운동에게 매우 나쁜 날”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노조원들은 이런 일이 왜 발생해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조차 이게 모두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답니다. 꽤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 왔는데도 말이에요.” 노동운동가 빌 플레처가 보기에, 그 논쟁은 깊은 분열을 낳긴 했지만 노동자들의 기본 문제를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놓고 말하기 꺼려왔던 것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 사회의 우선순위는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으며, 우리는 그걸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산업노조의 탈퇴 토론 말미에 AFL-CIO는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진보적인 노조원에게 이는 빛나는 순간이긴 했지만,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팀 폴슨은 그의 동료 대의원들에게 전쟁과 노동자들에게 더 절실한 문제들 간의 연관성을 설명하였다. 그 도시의 중앙노동 평의회 서기인 팀 폴슨에 따르면, "폭탄과 점령에 지출되는 이 모든 돈이 보건, 고용, 기간시설에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남녀노동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요.“ 전국적으로 볼 때, 노조는 노조원의 감소 면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노조는 미국 노동자의 35%를 조직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에는 조직률이 26%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전체노동자의 고작 12%, 또 사적 부문 노동자의 8%만이 노조원이다. 이들은 주로 동·서 해안의 도시 지역과 중서부의 이전 시기 공장지대에 집중되어 있거니와, 전국 대부분 지역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힘으로 고용주들과 협상하도록 방치된 셈이다. 노조원의 감소는 정치역량과 경제적 수단의 감소로 이어진다. 캘리포니아(AFL-CIO 조합원의 1/6을 차지하고 있다)와 뉴욕은 다른 지역보다는 노조 비중이 높다. 하지만 이곳에서조차 노동자들은 주지사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의 전면전에 직면하고 있다. 주지사 보궐선거에 대한 조치는 캘리포니아의 강력한 공공노조가 의미 있는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분쇄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대열을 분열시킬 때가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AFL-CIO 총회 첫날, 두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다. 가장 큰 노조인 국제서비스노조(SEIU)는 180만 명 규모이고, 트럭운송조합(Teamsters)는 110만 명 규모다. 총회가 끝나면서 한 노조가 탈퇴했는데 연합식품상업노조였다. 셋 모두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거대하고 중요한 노조다. [이 지역의] 국제서비스노조 지부들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톡톤에 이르는 공공노동자들을 대표하는 790 지부, 캘리포니아 주 전체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535지부, 전국에서 가장 커다란 노조 지부 중의 하나인 연합의료노동자 지부들이 있다. 베이 에어리어(샌프란시스코 만 지역 - 역자) 전역의 트럭운송조합 지부들은 트럭운송과 수송, 저장, 식품 가공 공장, 그리고 수많은 여타 사기업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연합식품상업노조는 식품판매업과 식육가공도매업 회사들에 있는 노조다. AFL-CIO에서 탈퇴한 이 세 노조는 〈승리를 위한 변화〉라 불리는 새로운 노동연합을 조직해 냈는데, 여기에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탈퇴하지 않은 다른 노조들이 속해 있다. 섬유호텔식당노조는 그 중 하나다. 이 노조의 2지부는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크고 화려한 14개 호텔과 영웅적인 투쟁을 벌여 왔다. 섬유호텔식당노조의 다른 지부들은 의류와 세탁 산업의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 〈승리를 위한 변화〉에는 또한 농업 노동자 노조와 건설노조, 그리고 목공노조(the Carpenters)(이들은 몇 년 전 AFL-CIO를 탈퇴했다)가 속해 있다. AFL-CIO,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채택하다 이는 미국 노조의 역사에서 매우 모순적인 순간이다. 지금까지 대중들의 이목은 주로 노조의 분열에 집중되어 왔지만, 전쟁에 관한 논쟁의 반향은 앞으로 수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젊은 시위대였던 반전 연대 활동가들의 세대, 그리고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개입 당시 기층 활동가들이 오늘날 노조를 이끌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어버렸거나 잊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월포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운동의 침묵, 특히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맞서 싸우고 있는 경제 체계를 지탱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이 사용되는 것에 대한 운동의 침묵을 보는 데 신물이 났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조직구조에 대한 내부 이견이 넘쳐나고 있지만, 이라크 전쟁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통신노조(CWA)의 부의장인 브룩스 선켓은 총회장에서 일련의 열정적인 연설을 쏟아 내면서, 30년 전 정부가 자신을 베트남 전쟁에 보낼 때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 전쟁은 그 전쟁과 아주 유사해 보입니다. 그들은 당시 나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지금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노동자연맹의 병원노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헨리 니콜라스는 대의원들에게, 이라크에서 네 번 복무한 그의 아들이 한 차례 더 복무하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도 이견을 표명하지 않은 채, 연사들은 연달아 일어나 전쟁과 점령을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했다. 2년 전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 노조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던 이 논쟁은 이제 최고조에 달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략의 의도를 품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 순간부터, 노조 활동가들은 그에 맞서기 위한 전국적 네트워크인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노조에서 작은 집단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이제 백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들의 연합이 되었다. 방청석에서는 월포스가 가리킨 이라크 노조 지도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이라크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다섯 명의 노조 활동가들과 함께 두 달 전 미국을 순회했다. 16일 동안 그들은 50개 이상의 도시를 돌면서, 미국의 노조 동지들에게 점령 중단을 위한 행동을 취할 것을 호소했다. 5월에 두 명의 이라크인이 베이 에어리어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정유노동자일반노조의 지도자인 하산 유마와 팔레 아부드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 노조들 즉, 샌호세에 있는 국제서비스노조의 커다란 공공노동자 지부, 마르티네즈의 정유 노동자들, 그리고 거의 모든 베이 에어리어 노동평의회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런 경험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애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는 이라크 노조원들의 순회연설을 조직하여, 그들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직접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의 전국 집행자 중 한 명인 진 브루스킨(Gene Brusk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우리는 우리나라 노조들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라크 노동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들은 연대와 인간적 공감의 정신에 입각하여 화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우리가 옳았습니다." 총회에서의 논쟁은 이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군대 철수를 요구하는 18개의 결의안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의 노조와 노동평의회, 그리고 주 노동 연맹들로부터 AFL-CIO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총회가 열리면서, AFL-CIO의 전국집행부는 "가능한 한 빨리" 점령을 종식시킬 것을 호소하는 결의안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러자 총회에 참석한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 대의원들은 군대의 "신속한 철수"라는 문구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싸움이 시작되려 했고, 갑자기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AFL-CIO 집행부는 이에 동의했다. 신속한 철수라는 안이 회의장에 제출됐을 때 폴슨은, “여기서 ‘신속하게’라고 말할 때, 이는 ‘즉각’과 같은 뜻입니다 ― 우리가 이 결의안을 지지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새로운 용어는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현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층 지도부가 내린 지도가 아니라 미국 노동운동의 기층에서 만들어진 풀뿌리 행동의 산물이었다. 미군철수라는 호소는 그 자녀와 가족이 전쟁에 나설 것을 호출 받은 수천의 평범한 노동자와 노조원의 정서를 반향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이제는 미국 노조의 다수가 미군의 생명을 지키는 최선의 수단은 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라크전이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은 거의 신빙성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라크 민중들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행정부의 주장은 비슷한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행정부의 5년 간의 공격 후, 부시 행정부의 가장 완고한 지지자가 아닌 다음에야 부시의 친-민주주의(pro-damecracy) 선언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점령이 가지는 반-민주적 효과에 대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이라크인들이 미국 노조원들에게 전해 준 바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유전, 정유공장 그리고 다른 이라크 공기업에서 노조 조직화를 금지했다. 한편 부시의 정치요원들이 이 공기업들을 외국 기업에 처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천 개의 일자리와, 그리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소득의 잠재적인 상실을 동반할 것이다. "이건 해방이 아닙니다. 이것은 점령입니다." 미국에서의 발언을 위해 조합원을 파견한 노조 중 하나인 이라크 노조연맹의 지도자 가십 하산이 말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식민지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식민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신속한 철수는 단지 미국 병사들을 본국으로 데려온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구는 미국 노동자들을 이라크인들 편에 서게 하는 것인데, 부유한 세계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나라가 개조되는 것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노동조합의 구조에 대한 논쟁 그러나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중요한 문제 하나를 두드러지게 했다. 노조원들은 점점 더 현명해지고 있고, 전쟁에서 무역에 이르는 세계적 쟁점이 미국의 거리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원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고, 이 같은 이해를 실천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조직은 더 작아지고 있다. 정치적 의식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총회 준비 기간에 이라크는 노조 논쟁의 주된 주제가 아니었다. 사실 이 주제는 자주 사뭇 다른 토론 속으로 묻혀 버렸는데, 이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개 [노조의] 생존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결국 [노조] 분열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지만, 미국 노조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은, 대외 정책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고 주로 노조의 효율적인 행동을 가로막는 [노조 내부의] 구조 문제와 훨씬 더 관련이 있었다. 관련 쟁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지부 사례는 샌프란시스코 호텔 노동자들의 1년에 걸친 투쟁사례이다. 거대한 호텔 경영자에 맞서 전국 각 도시의 노조가 동시에 교섭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호텔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단체 협약의 종료 시기를 동일하게 2006년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은 이를 쟁취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업자들]이 주되게 저항하고 있다. 그 도시의 [호텔] 사용자협회(Multi Employer Group)가 합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호텔 경영자들을 대표하는데, 여기에는 힐튼, 인터콘티넨탈, 스타우드, 하야트 등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호텔을 경영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업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만일 노조가 전국 각 도시에서 노동자 공동 전선을 꾸리면, 개별 지역 노조만의 힘으로는 쟁취할 수 없는 새로운 생활수준을 쟁취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호텔 노동자들은 2년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식품 노동자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이 다섯 달 동안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에 걸친 새이프웨이, 알버트슨, 랄프 등의 식료품 체인에서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실질적으로 더 낮은 임금과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체인점들이 국내 다른 지역에서는 가게를 열어 이윤을 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조들이 기억해야 할 교훈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과 지역적으로 교섭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부족했던 것은 연대였다 -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社의 노조는 유사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이 항공사 노조는 자신의 연금제도를 올해 초 연방정부에게 투매(投賣)해 버렸고, 그래서 퇴직자들은 자신들의 연금수급액이 삭감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항공 산업은 11개의 노조로 나뉘어져 있다(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항공사에만도 네 개의 노조가 있다). 이 같은 분열상태에서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란 어렵다. 만일 그들 모두가 단일한 노조에 속했다면, 그리고 거의 모든 항공 노동자들이 조직되어 있었다면, 승리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십 수 년을 들여 건설해 낸 퇴직 제도의 해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한 회사가 파산한다면(유나이티드 에어라인사가 파산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위협한 것처럼), 그 파산회사의 노동자는 다른 항공사로 쉽게 흡수될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하나의 노조와 하나의 단체협약만이 있다면 말이다.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화 방식에 집착한 결과, 임금 삭감, 복지 삭감, 연금 상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반면 샌프란시스코 부두노동자조합, 즉 미서부항만노조는 3년 전 자신의 조합원에 대항한 사용자의 직장폐쇄를 물리쳤다. 그들이 이긴 것은 1930-40년대 당시 노조가 동일한 쟁점에 대해 아주 영리했기 때문이다. 부두 노동자들은 술꾼이나 부랑자 취급을 받곤 했다. 1934년 샌프란시스코 총파업 이후, 그들은 전 항구에 걸쳐 서부 연안에 있는 모든 해운 회사들과 단일한 단체협약을 맺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결과적으로 부두 노동자들의 임금은 현재 미국 산업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연대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따라서 작년 많은 노조들은 노조운영 방식을 바꾸기 위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논의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서비스노조의 8월 총회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의장 앤디 스턴은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호소했다. 그리고 2004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노조는 「승리를 위한 단결」이라 불리는 10개 조항으로 된 안을 제출하였다. 이는 즉각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노조들이 화답했다. 10개 조항에서 노조들이 교섭하고 조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큰 노조로 통합하도록 요구하는 권한을 AFL-CIO에게 부여하기로 되어 있는 항은 가장 논쟁적인 조항이었다. 또한 [이 항에 따르면] 총연맹은 동일 산업의 노동자는 많은 노조로 분할되지 않게 명확히 하도록 하고 있다. 스턴은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공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면, 여기서 노조들은 직종별로, 기업별로, 노조/비노조 별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들의 역량을 분할하고 통일된 전략을 갖지 못할 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노동자입니다.” 많은 노조들이 자신들이 강요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격렬한 이견을 표출했다. 하지만 결국 논쟁은 돈에 관한 논의로 전락했다. <승리를 위한 변화 연합>을 결성한 노조들은 AFL-CIO가 그들이 내는 조합비의 절반을 환불하여 새로운 조합원들을 조직하는 전략적 캠페인에 투여할 것을 주장했다. AFL-CIO 의장 존 스위니(그 자신이 국제서비스노조의 前의장이자 스턴의 스승이었다)는 연맹이 조직화에 비용을 늘려야 하겠지만 더 많은 비용을 선거 캠페인에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양측 모두 조직화와 정치활동 모두에 자금 투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차이점이란 각각에 배분될 비율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예산 분배에 대한 쟁점 이것이 노조연맹을 분열시킬 만한 값어치를 가진 쟁점인가? 서부 지역 국제서비스노조 부의장인 엘리시오 메디나(Eliseo Medina)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나 공직자도, 그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한들 말입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우리 운동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정치는 해법의 일부겠습니다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조에 가입할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동원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핵심 산업을 조직하고자 하는 노조들에게 1인당 50% 그러니까 대략 5천만 달러를 환불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AFL-CIO는 천오백만 달러 정도로 가고자 했고, 나머지 자금은 정치[사업]에 할당하려 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차이입니다 ― 그들이 제안한 것은 그 일을 하기에 완전히 충분치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은 확신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다만 노조가 공격받고 있는 와중에 그 힘을 분열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논쟁이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빌 플레쳐는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존 스위니의 개혁 집행부가 1995년에 선출된 이후, 그는 총연맹의 교육국장이 되었고 뒤에는 스위니의 보좌관이 되었다. 급진적 정치 때문에 밀려난 이후, 그는 미국 노조의 느린 변화 속도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었다. 한 대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노조는 심각한 보수주의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 보수주의란 다름 아니라 진행 중인 변화의 성격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그래서 매우 통찰력 있는 운동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정말이지 물러나야 합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확실히 잘 못된 가정을 하였습니다. 노조는 지배 엘리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노조는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조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노조가 지배엘리트와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 질 것이라고 가정하였던 것입니다]” 플레쳐와 다른 이들은, 노조가 자금을 조직가를 고용하는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선거운동을 진행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내며 논쟁한 반면, 방향, 즉 노조가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AFL-CIO 대의원대회에서 벌어진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자금과 노조의 구조에 지배된 논쟁에서 그나마 실체적 내용과 정치를 더해준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는 그처럼 훨씬 깊이 있는 토론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AFL-CIO 대의원대회 이후 수백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이주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방어하겠다는 고귀한 이상이 지금은 사라졌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기층 조합원으로부터 이번 대회에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와 유사한 외침이 터져 나와 기본적인 정책에서의 또 다른 변화를 대의원대회장에 강제하였다. 그래서 노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취업을 연방범죄로 만드는 <이주 개혁 및 통제 법>(1986 제정)과 고용허가제에 대한 이전의 지지 입장을 철회하였다. 이제 섬유호텔식당노조 공동의장이 된 존 빌헬름(John Wilhelm)은 허가제를 지지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고 선언했다.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오늘날, 실질적으로 고용허가제를 강화시킬 두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 있다. 양자 모두 거대한 새로운 노동연수제도를 설립할 것인데, 이는 1940-50년대 멕시코 계절 농업노동자 프로그램과 같은 것으로, 이주자들을 임시 비자로 들여와 거대 기업의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주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 계획이 착취적 ― 사실상의 비자발적 노예노동 ― 이라고 보아 전통적으로 반대해 왔다. 이 법안 중 하나인 케네디-맥케인 법안은 노조의 전국 정치간부들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지역 노조와 기층조합원들 사이에서 그 안이 노동과 이주자들에게 미칠 영향에 관해 어떤 토론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 의회의 가장 진보적인 이주법안은 연수생 제도를 담고 있지 않으며 [연수생제도 금지를 위해] 강화된 집행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 안이 흑인연방의원회의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도, 노조로부터는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섬유호텔식당노조는 이주노동자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버스·기차여행 - 역자)를 발의했다. 단체협상에서 2 지부는 호텔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설치한 사실상의 인종 차별선을 없앨 것을 요구하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에게 보고 싶어하는 종류의 변화는 바로 이것이다 ― 원칙에 입각한 실제적 의제,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정직한 시도, 그리고 워싱턴의 유해한 정치 환경의 조건을 바꾸고자 하는 거리의 열기 말이다. 하지만 대신에 - 심지어 진보적인 노조에서도 -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라곤 정계 엘리트들과의 거래이다. 플레쳐가 말하듯, 논쟁은 더 첨예해져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노동운동의 단결 그리고 한편 [주요 노조들이 분리해 나간 뒤에도] 샌프란시스코의 노조와 노동평의회는 살아남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투쟁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정말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대부분의 다른 지역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의 거대 공공노조, 즉 서비스 790 지부의 사무총장인 조시 무니가 이 도시 평의회 의장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무니는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메디나(국제서비스노조의 서부지역 담당 부의장 - 역자)에 따르면, 무니는 “우리는 지역적이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계속 함께 일할 필요가 있으며 AFL-CIO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노조들은 그들이 웬만해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밀접한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평의회들은 이제 <승리를 위한 변화>에 속하게 된 노조의 회비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이것 없이 활동해야만 한다면, 그 평의회들은 사무처 요원들을 해고하고 활동을 줄여야만 할 것이다. 평의회들은 선거(예컨대 올 11월 캘리포니아에 찾아오는 선거) 기간 동안 수고스러운 일들의 대부분을 한다. 노조원들은 평의회가 보유한 전화명부를 이용하러 떼 지어 몰려오고, 평의회가 조직한 대중집회들을 좇아 밤에 혹은 주말에 지역을 돌아다니고, 심지어는 평의회 모임에서 누가 親노동 후보인지를 결정한다. [목수·벽돌공·연관공 등의] 건축업에서는, 공항이나 학교 다리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다루는 프로젝트 노동협약은 주로 평의회가 서명하며, 참여하는 노조들이 부기할 것이 요구된다. 만일 이 구조가 해체된다면 노조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노동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스위니는 이미 성명서 하나를 발표했는데, 어떤 AFL-CIO 사무처요원들은 이를 “자본의 입장”(the company line)이라는 냉소적 명칭으로 불렀다. 이 성명서에 의하면 총연맹에서 탈퇴한 노조들은 이후에는 지역 평의회에서 투표권을 지니고 회비를 납부하는 완전한 대의원으로 참가할 수 없다. 팀 폴슨은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최근 대담에서 희망적으로 말했다. “나는 우리가 지금껏 벌였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점을 분명히 압니다. 우리의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상점노조 지부들은 대의원대회 이전에는 노동운동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전국 지도자들에게 불화를 다스리는 계획표를 제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총연맹을 떠난 노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트럭운송조합과 자동차노조(UAW)가 1960년대에 탈퇴했을 때 그러했다. 건설에서 가장 큰 노조인 목공노조는 몇 년 전 탈퇴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베이 에어리어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AFL-CIO에 가입한 미국교사연맹은 독립전국교원연합과 협동한다 ―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양쪽의 지부가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 교원노조를 결성하기 위해 통합했다. 폴슨은 “제 생각에 우리는 항상 해 왔던 일을 계속하면 될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 간에 강고해지는 연대를 지금 모두 폐기해버리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에요.”라고 말한다. 노조들은 단결을 지속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아니(Arnie,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별칭 - 역자)가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면서] 몰래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1) David Bacom, "Unions at War", San Frasico Bay Guardian, 8월 10일자. 본문으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경을 넘어선 이주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주의 여성화’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주 여성의 숫자는 이주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전체 80여만 명의 이주 인구 중 대략 35% 정도가 여성이다. 물론 이주 여성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여성의 이주를 촉진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여성 이주의 확대 양상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각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주 노동의 주요 수입국인 중심부 국가들의 경우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활성화되고 첨단 금융산업과 하인노동으로 노동의 양극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정부, 보모와 같은 재생산노동, 시설관리, 청소 등의 하층 노동에 이주 여성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확대, 성산업의 유례없는 팽창 역시 여성 이주를 확대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제하는 급격한 농업개방은 송출국과 유입국 모두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주 여성의 문제는 금융세계화 질서 속으로 민족국가가 위계화된 형태로 통합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 성산업, 가족제도 등을 통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호 결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지난 5월 말 ‘이주여성의 현실과 문제’를 주제로 월례포럼을 진행했다.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과 이주여성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씨가 ‘인신매매와 성착취-아시아 이주와 한국의 이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주셨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유입경로와 형태, 현황과 문제점, 이주 여성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대안과 현재 진행 중인 활동 등을 중심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특히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이주 여성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었는데, 여성위원회 차원에서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의 문제에 비해 평소 접근이 부족했던 주제였던 만큼 여러모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정리가 매우 늦었지만 이주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있게 가져가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 글을 싣는다. 김민정 씨의 발제와 토론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주 여성에 대한 여성위원회의 고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이 작성되었다. 셋째 아이 출산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양에서 먼 걸음 해주셨던 김민정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시아에서 여성이주의 특성 아시아 내에서 이주 노동 송출국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고, 수입국은 대부분 중동지방 국가들인데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약 1,000만 명 수준에 이른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유입숫자가 적은 편이다. 통상 이주 노동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주요 요인이 노동시장 내의 수요 및 자본력(기술력), 임금수준, 송출 비용 정도인데, 한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선호가 있기는 하지만, 송출비용이 워낙 막대하고 일정한 기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되는 조건을 가진 중동지방으로 이동이 집중된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내에서의 여성 이주는 앞서 언급한 여성 이주의 국제적 추세와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다소 다른 양상도 함께 보인다. 아시아 내에서 여성 이주는 주로 제조업 부문의 노동과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주를 이룬다.1) 아시아에서 이주 노동과 국제결혼을 촉진하는데 있어 대만의 역할은 매우 컸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를 활성화했는데, 그에 따라 제조업의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값싼 이주 노동이 대거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만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 국제결혼중개업이 형성되었고, 대만의 하층 노동자계급과 몰락한 농촌의 남성들이 그 수요층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대만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은 약 40만 명에 달한다. 한편 국제결혼을 위한 이주 여성의 주요 송출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만의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으로 진출한 대만남성들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결혼을 산업화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개방정책과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제결혼은 국가 차원의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으로 확대된다. 여성 이주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확대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 이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조건이 많다. 이는 국제결혼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여성 이주의 제약 조건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 현실과 결합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주노동의 형태, 결혼 여부에 따른 제약, 교육수준으로 인한 제약, 성산업으로의 유입 가능성 등이 여성 이주의 조건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경우 국가가 정책적으로 미혼 여성의 국제이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국가들의 이주여성은 대부분 3·40대 기혼여성들이다. 최근 국제결혼의 주요 대상국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의 경우 2차 산업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으며, 저학력에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경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매우 많다(명목상 기술력이 이유가 되지만 실제로는 현재 한국의 2차 산업 구조가 남성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이유가 크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여성 이주의 형태는 저임금 2차 산업과 서비스산업, 국제결혼 등으로 집중된다. 남성 이주에 비해서도 매우 취약한 여성 이주의 조건은 여성의 비공식 이주를 증가시키는데, 이로써 성산업으로의 유입이나 인신매매의 위험이 생겨난다. 실제 전 세계 여성 인신매매의 1/3이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이주에 나섰던 태국여성이 서아프리카의 성산업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현황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은 전체 이주자 중 약 37%에 이른다. 13만 명 정도가 2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13만 명, E6 비자(공연예술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가 대략 1,200~1,300명 수준이다. 한국남성들의 국제결혼은 199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 600여명 수준에서 2004년에는 연간 25,500여명으로 확대된다(아래 계속해서 제시될 통계수치는 통계청과 법무부 자료를 따른 것이다). 국적별 분포를 보면, 2004년을 기준으로 중국이 70%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조선족들로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선호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베트남(9.6%), 일본(4.8%), 필리핀(3.8%)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길거리 광고가 등장할 만큼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은 수치상으로 그리 큰 비중은 아니지만, 여타 국가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1년 사이(2003년~2004년) 감소한 것에 비해 거의 유일하게 증가세(2003년의 경우 7.3%)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의 체감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한국 남성과 이주 여성의 국제결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농촌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례에 집중되는데,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르다.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2004년 기준으로 서울이 25%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23%), 부산(7%), 인천(6%) 등 대도시가 주를 이룬다. 반면 농촌지역이 많이 포함되는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경우 3~4% 수준이다. 초혼과 재혼 등을 기준으로 한 결혼 종류에 따른 구분을 보면, 2001년 당시 초혼이 6,700여명, 재혼이 3,200여명이었는데 그 후 재혼의 사례가 단기간에 꾸준히 상승하여 2004년이 되면 각각 13,700여명과 11,600여명으로 비슷한 비율에 이르게 된다.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의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흔한 경우가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한 유입이다.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에서 남성은 상대 여성의 가족에게 전달되는 지참금과 방문절차 비용, 중개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대략 1,400만 원 정도를 소요한다. 이 외에 통일교 등 종교단체의 알선을 통한 결혼이나 국제결혼을 한 당사자의 개인적 소개를 통한 결혼, 아주노동자 생활 과정에서 만난 사람끼리의 연애결혼 등이 있다. 국제결혼의 일부는 안정적인 거주기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장결혼이다. 이 경우 한국에서 취업 이후 벌어들일 소득을 고려하여 선불-후불 분납제도를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 때 상호 얼굴 한번 대면한 적 없는 서류상의 ‘종이남편’은 이 비용의 일부를 할당받는다. 성산업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가장 많은 경로가 E6 비자를 통한 입국2) 이고, 그밖에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미등록 상태로 장기체류 하는 경우,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를 통한 유입 등의 경로가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업화된 형태의 국제결혼은 결혼이 성사되고 실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배우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 인신매매적 요소, 결혼 중개업체의 횡포 등이 대표적인 위험들이다. 많은 상담사례에서 여성에게 ‘한국에서는 농부가 부자이고 존경받는 직업이다’, ‘한 달에 300달러씩 친정에 송금해주겠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얘기나 가족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가 드러났다. 남성의 한 두 차례 방문으로 성혼이 이루어지고 대부분 그 방문에서 중개업체들이 성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치 않는 성관계, 임신 같은 성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소요된 모든 비용을 여성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폭력적 조건 속에서 여성들은 결혼여부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최근 베트남처럼 국제결혼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결혼중개업체가 송출국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모집하고 합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합숙생활 자체가 감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강제적 조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인신매매적 요소가 다분하며, 실제 합숙 이후 성산업으로의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갈취는 이 밖에도 매우 다양하다. 성관계 경험여부에 따라서 여성의 가족에게 차등적으로 지참금을 지불하는 사례도 있고, 처녀막 재생 수술을 종용하기도 하며, 금품을 갈취하기도 하는 등 여성 이주의 과정에는 매우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이주한 여성의 생활조건과 지위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과정에서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주 이후 한국에서의 삶 또한 결코 순탄치 않다.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성은 대부분 불안정한 직업, 빈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거나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소농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여성들이 처하는 일차적인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에서 기인한다(최근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제결혼 부부 중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는 가구가 52%, 끼니를 굶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 16%에 이르고 있다). 극도의 내핍생활을 감당하거나 한국 여성에 비해 열등한 조건으로 취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의 이탈을 우려하여 취업은 남편의 동의 하에서만 가능하며, 조선족들의 경우 서비스업으로 취업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오히려 ‘돈 벌어올 것’을 강요받거나 그를 목적으로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경우나 재생산노동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앞서 남성의 초혼과 재혼 등의 결혼 형태에 따른 분포를 살펴보았는데, 재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징적으로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결혼을 하는 이주여성들의 연령이 대부분 20대 초·중반이고 종종 10대 후반도 있는데, 재혼을 하는 한국 남성의 경우 4~50대 어떤 경우 60대에 이른다. 이 경우 이주 여성들은 무급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의 제공자나 다름없는데, 실제로 연로하고 병든 부모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남성이 적지 않다. 단기 가정부, 간병인을 고용하느니 비용 면에서도 오히려 저렴하고 기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기 고용인을 고용하는 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연령대가 높은 남성들의 사례 또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에만 한정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성적학대, 구타와 같은 신체적 학대, 재생산노동과 유급 노동의 이·삼중 부담, 문화·언어·민족적 차이 등을 악용한 언어·정서적 학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도 이주 여성들에게 그것은 곧 불법체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이탈을 한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쉼터 체류자들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여성들은 대부분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직·간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생활의 문제, 문화적 차이, 외국인 혐오증, 국제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적 인식은 이주 여성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되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 데 있어 한계로 작용한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은 그 형태와 절차가 ‘노골적으로’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주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의 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의 법·제도 또한 이주 여성들을 취약한 지위로 내몰고 있다. 이주 여성의 신분보장과 거주, 기본적 권리와 관련되는 법·제도로는 국적법, 출입국관리법, 그밖에 공공서비스 차원의 기본권의 문제가 있는데, 신분보장 및 거주의 권리는 결혼지속 여부에 철저히 종속된다. 심지어는 배우자가 위장결혼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결혼관계를 청산할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이때도 결국 여성은 불법체류자로 내몰릴 뿐이다. 그밖에 의료, 교육, 소득보조 등 공공서비스 혜택에서 이주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국제결혼의 경우 ‘결혼’의 한 형태라는 이유로 이주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인신매매적 요소 등에 대한 법·제도적 차원에서 규제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또한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이주여성운동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3) 국적 취득 이전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 적용, 각종 상담 및 교육 등에 대한 지원 확대와 관련된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이주가 제기하는 쟁점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이 동남아시아의 빈국 출신임을 보아 알 수 있듯, 이 여성들에게 이주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진입하는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고국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주를 감행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고학력, 전문직 종사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부양이나, 빈곤탈출, 자식에게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동기로 국제결혼을 결심한다. 여성이주의 형태 중 국제결혼의 경우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쟁점은 국제결혼이 여성매매 또는 성매매와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편에는 국제결혼이 ‘노골적으로’ 상품화되어 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가족의 압력, 중개업체의 폭력이 개입되고 실제 인신매매도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성매매와 다름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에는 이미 현실에 다수가 존재하는 결혼의 한 형태라는 점과 빈곤이 여성들에게 일반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제결혼이 이주 여성들이 선택한 하나의 대응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의 곁가지에는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자들이 대부분 한국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노골적으로’ 상품화된 결혼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언제부턴가 성행하기 시작한 국내의 수많은 결혼중개업체들을 통한 결혼은 국제결혼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이와 같은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형태가 등장할 만큼 결혼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현실에서 이주 여성과 토착 거주 여성은 그 삶의 조건과 양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점이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 여성이 가족제도 내에서의 억압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 민족국가 내부에서 배제의 대상이라면 이주 여성은 외적 배제라는 또 다른 조건이 결합된 매우 중층적인 억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무급 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이주 여성의 지위와 재생산노동과 임금노동(또는 농사일)의 병행이라는 역할은 사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위이며 역할이다. 또한 이주여성에게 가해지는 동정과 성적인 이유에서의 멸시라는 이중적 시각은 어느 사회에서건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보호받을 자격 있는/없는 인간’이라는 이분법의 변형된 판본이다. 따라서 국제결혼이 성매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본질적인 쟁점일 수 없다.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이주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가족제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제결혼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주의 형태라는 사실은 여성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인 가족의 역할을 사고할 때만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인간적인 국제결혼’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이주여성이 국적과 결혼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여성으로서, 노동자·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여성을 국적에 따라 차별·배제하고 자본에게만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1) 중심부 국가의 경우처럼 재생산노동을 위한 여성 이주가 아시아에서 확대되기는 힘든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역할은 국내 여성들의 저임금 일자리로 제공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조선족들의 경우가 상류층의 가정부로 고용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본문으로 2) E6 비자를 통해 입국해 성산업으로 유입된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의 문제가 사회화되자, 정부는 2003년 6월부터 무용수들에 대한 E6비자 발급을 중단했고, 그 후 E6 비자를 통한 입국은 급감하였다. 본문으로 3) 지금까지는 결혼중개업체의 존립에 대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에는 국내결혼중개업체는 신고제로, 국제결혼중개업체는 허가제로 양성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주여성운동에서는 중개업체에 대한 허가제/금지/불법화 등의 선택지를 검토한 끝에 ‘결혼’의 속성을 고려하여, 허가제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경을 넘어선 이주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주의 여성화’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주 여성의 숫자는 이주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전체 80여만 명의 이주 인구 중 대략 35% 정도가 여성이다. 물론 이주 여성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여성의 이주를 촉진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여성 이주의 확대 양상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각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주 노동의 주요 수입국인 중심부 국가들의 경우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활성화되고 첨단 금융산업과 하인노동으로 노동의 양극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정부, 보모와 같은 재생산노동, 시설관리, 청소 등의 하층 노동에 이주 여성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확대, 성산업의 유례없는 팽창 역시 여성 이주를 확대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제하는 급격한 농업개방은 송출국과 유입국 모두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주 여성의 문제는 금융세계화 질서 속으로 민족국가가 위계화된 형태로 통합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 성산업, 가족제도 등을 통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호 결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지난 5월 말 ‘이주여성의 현실과 문제’를 주제로 월례포럼을 진행했다.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과 이주여성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씨가 ‘인신매매와 성착취-아시아 이주와 한국의 이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주셨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유입경로와 형태, 현황과 문제점, 이주 여성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대안과 현재 진행 중인 활동 등을 중심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특히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이주 여성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었는데, 여성위원회 차원에서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의 문제에 비해 평소 접근이 부족했던 주제였던 만큼 여러모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정리가 매우 늦었지만 이주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있게 가져가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 글을 싣는다. 김민정 씨의 발제와 토론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주 여성에 대한 여성위원회의 고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이 작성되었다. 셋째 아이 출산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양에서 먼 걸음 해주셨던 김민정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시아에서 여성이주의 특성 아시아 내에서 이주 노동 송출국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고, 수입국은 대부분 중동지방 국가들인데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약 1,000만 명 수준에 이른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유입숫자가 적은 편이다. 통상 이주 노동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주요 요인이 노동시장 내의 수요 및 자본력(기술력), 임금수준, 송출 비용 정도인데, 한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선호가 있기는 하지만, 송출비용이 워낙 막대하고 일정한 기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되는 조건을 가진 중동지방으로 이동이 집중된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내에서의 여성 이주는 앞서 언급한 여성 이주의 국제적 추세와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다소 다른 양상도 함께 보인다. 아시아 내에서 여성 이주는 주로 제조업 부문의 노동과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주를 이룬다.1) 아시아에서 이주 노동과 국제결혼을 촉진하는데 있어 대만의 역할은 매우 컸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를 활성화했는데, 그에 따라 제조업의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값싼 이주 노동이 대거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만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 국제결혼중개업이 형성되었고, 대만의 하층 노동자계급과 몰락한 농촌의 남성들이 그 수요층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대만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은 약 40만 명에 달한다. 한편 국제결혼을 위한 이주 여성의 주요 송출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만의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으로 진출한 대만남성들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결혼을 산업화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개방정책과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제결혼은 국가 차원의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으로 확대된다. 여성 이주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확대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 이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조건이 많다. 이는 국제결혼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여성 이주의 제약 조건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 현실과 결합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주노동의 형태, 결혼 여부에 따른 제약, 교육수준으로 인한 제약, 성산업으로의 유입 가능성 등이 여성 이주의 조건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경우 국가가 정책적으로 미혼 여성의 국제이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국가들의 이주여성은 대부분 3·40대 기혼여성들이다. 최근 국제결혼의 주요 대상국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의 경우 2차 산업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으며, 저학력에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경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매우 많다(명목상 기술력이 이유가 되지만 실제로는 현재 한국의 2차 산업 구조가 남성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이유가 크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여성 이주의 형태는 저임금 2차 산업과 서비스산업, 국제결혼 등으로 집중된다. 남성 이주에 비해서도 매우 취약한 여성 이주의 조건은 여성의 비공식 이주를 증가시키는데, 이로써 성산업으로의 유입이나 인신매매의 위험이 생겨난다. 실제 전 세계 여성 인신매매의 1/3이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이주에 나섰던 태국여성이 서아프리카의 성산업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현황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은 전체 이주자 중 약 37%에 이른다. 13만 명 정도가 2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13만 명, E6 비자(공연예술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가 대략 1,200~1,300명 수준이다. 한국남성들의 국제결혼은 199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 600여명 수준에서 2004년에는 연간 25,500여명으로 확대된다(아래 계속해서 제시될 통계수치는 통계청과 법무부 자료를 따른 것이다). 국적별 분포를 보면, 2004년을 기준으로 중국이 70%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조선족들로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선호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베트남(9.6%), 일본(4.8%), 필리핀(3.8%)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길거리 광고가 등장할 만큼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은 수치상으로 그리 큰 비중은 아니지만, 여타 국가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1년 사이(2003년~2004년) 감소한 것에 비해 거의 유일하게 증가세(2003년의 경우 7.3%)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의 체감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한국 남성과 이주 여성의 국제결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농촌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례에 집중되는데,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르다.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2004년 기준으로 서울이 25%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23%), 부산(7%), 인천(6%) 등 대도시가 주를 이룬다. 반면 농촌지역이 많이 포함되는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경우 3~4% 수준이다. 초혼과 재혼 등을 기준으로 한 결혼 종류에 따른 구분을 보면, 2001년 당시 초혼이 6,700여명, 재혼이 3,200여명이었는데 그 후 재혼의 사례가 단기간에 꾸준히 상승하여 2004년이 되면 각각 13,700여명과 11,600여명으로 비슷한 비율에 이르게 된다.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의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흔한 경우가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한 유입이다.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에서 남성은 상대 여성의 가족에게 전달되는 지참금과 방문절차 비용, 중개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대략 1,400만 원 정도를 소요한다. 이 외에 통일교 등 종교단체의 알선을 통한 결혼이나 국제결혼을 한 당사자의 개인적 소개를 통한 결혼, 아주노동자 생활 과정에서 만난 사람끼리의 연애결혼 등이 있다. 국제결혼의 일부는 안정적인 거주기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장결혼이다. 이 경우 한국에서 취업 이후 벌어들일 소득을 고려하여 선불-후불 분납제도를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 때 상호 얼굴 한번 대면한 적 없는 서류상의 ‘종이남편’은 이 비용의 일부를 할당받는다. 성산업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가장 많은 경로가 E6 비자를 통한 입국2) 이고, 그밖에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미등록 상태로 장기체류 하는 경우,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를 통한 유입 등의 경로가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업화된 형태의 국제결혼은 결혼이 성사되고 실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배우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 인신매매적 요소, 결혼 중개업체의 횡포 등이 대표적인 위험들이다. 많은 상담사례에서 여성에게 ‘한국에서는 농부가 부자이고 존경받는 직업이다’, ‘한 달에 300달러씩 친정에 송금해주겠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얘기나 가족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가 드러났다. 남성의 한 두 차례 방문으로 성혼이 이루어지고 대부분 그 방문에서 중개업체들이 성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치 않는 성관계, 임신 같은 성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소요된 모든 비용을 여성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폭력적 조건 속에서 여성들은 결혼여부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최근 베트남처럼 국제결혼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결혼중개업체가 송출국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모집하고 합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합숙생활 자체가 감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강제적 조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인신매매적 요소가 다분하며, 실제 합숙 이후 성산업으로의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갈취는 이 밖에도 매우 다양하다. 성관계 경험여부에 따라서 여성의 가족에게 차등적으로 지참금을 지불하는 사례도 있고, 처녀막 재생 수술을 종용하기도 하며, 금품을 갈취하기도 하는 등 여성 이주의 과정에는 매우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이주한 여성의 생활조건과 지위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과정에서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주 이후 한국에서의 삶 또한 결코 순탄치 않다.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성은 대부분 불안정한 직업, 빈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거나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소농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여성들이 처하는 일차적인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에서 기인한다(최근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제결혼 부부 중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는 가구가 52%, 끼니를 굶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 16%에 이르고 있다). 극도의 내핍생활을 감당하거나 한국 여성에 비해 열등한 조건으로 취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의 이탈을 우려하여 취업은 남편의 동의 하에서만 가능하며, 조선족들의 경우 서비스업으로 취업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오히려 ‘돈 벌어올 것’을 강요받거나 그를 목적으로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경우나 재생산노동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앞서 남성의 초혼과 재혼 등의 결혼 형태에 따른 분포를 살펴보았는데, 재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징적으로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결혼을 하는 이주여성들의 연령이 대부분 20대 초·중반이고 종종 10대 후반도 있는데, 재혼을 하는 한국 남성의 경우 4~50대 어떤 경우 60대에 이른다. 이 경우 이주 여성들은 무급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의 제공자나 다름없는데, 실제로 연로하고 병든 부모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남성이 적지 않다. 단기 가정부, 간병인을 고용하느니 비용 면에서도 오히려 저렴하고 기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기 고용인을 고용하는 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연령대가 높은 남성들의 사례 또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에만 한정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성적학대, 구타와 같은 신체적 학대, 재생산노동과 유급 노동의 이·삼중 부담, 문화·언어·민족적 차이 등을 악용한 언어·정서적 학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도 이주 여성들에게 그것은 곧 불법체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이탈을 한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쉼터 체류자들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여성들은 대부분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직·간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생활의 문제, 문화적 차이, 외국인 혐오증, 국제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적 인식은 이주 여성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되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 데 있어 한계로 작용한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은 그 형태와 절차가 ‘노골적으로’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주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의 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의 법·제도 또한 이주 여성들을 취약한 지위로 내몰고 있다. 이주 여성의 신분보장과 거주, 기본적 권리와 관련되는 법·제도로는 국적법, 출입국관리법, 그밖에 공공서비스 차원의 기본권의 문제가 있는데, 신분보장 및 거주의 권리는 결혼지속 여부에 철저히 종속된다. 심지어는 배우자가 위장결혼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결혼관계를 청산할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이때도 결국 여성은 불법체류자로 내몰릴 뿐이다. 그밖에 의료, 교육, 소득보조 등 공공서비스 혜택에서 이주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국제결혼의 경우 ‘결혼’의 한 형태라는 이유로 이주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인신매매적 요소 등에 대한 법·제도적 차원에서 규제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또한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이주여성운동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3) 국적 취득 이전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 적용, 각종 상담 및 교육 등에 대한 지원 확대와 관련된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이주가 제기하는 쟁점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이 동남아시아의 빈국 출신임을 보아 알 수 있듯, 이 여성들에게 이주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진입하는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고국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주를 감행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고학력, 전문직 종사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부양이나, 빈곤탈출, 자식에게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동기로 국제결혼을 결심한다. 여성이주의 형태 중 국제결혼의 경우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쟁점은 국제결혼이 여성매매 또는 성매매와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편에는 국제결혼이 ‘노골적으로’ 상품화되어 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가족의 압력, 중개업체의 폭력이 개입되고 실제 인신매매도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성매매와 다름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에는 이미 현실에 다수가 존재하는 결혼의 한 형태라는 점과 빈곤이 여성들에게 일반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제결혼이 이주 여성들이 선택한 하나의 대응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의 곁가지에는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자들이 대부분 한국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노골적으로’ 상품화된 결혼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언제부턴가 성행하기 시작한 국내의 수많은 결혼중개업체들을 통한 결혼은 국제결혼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이와 같은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형태가 등장할 만큼 결혼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현실에서 이주 여성과 토착 거주 여성은 그 삶의 조건과 양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점이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 여성이 가족제도 내에서의 억압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 민족국가 내부에서 배제의 대상이라면 이주 여성은 외적 배제라는 또 다른 조건이 결합된 매우 중층적인 억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무급 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이주 여성의 지위와 재생산노동과 임금노동(또는 농사일)의 병행이라는 역할은 사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위이며 역할이다. 또한 이주여성에게 가해지는 동정과 성적인 이유에서의 멸시라는 이중적 시각은 어느 사회에서건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보호받을 자격 있는/없는 인간’이라는 이분법의 변형된 판본이다. 따라서 국제결혼이 성매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본질적인 쟁점일 수 없다.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이주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가족제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제결혼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주의 형태라는 사실은 여성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인 가족의 역할을 사고할 때만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인간적인 국제결혼’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이주여성이 국적과 결혼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여성으로서, 노동자·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여성을 국적에 따라 차별·배제하고 자본에게만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1) 중심부 국가의 경우처럼 재생산노동을 위한 여성 이주가 아시아에서 확대되기는 힘든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역할은 국내 여성들의 저임금 일자리로 제공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조선족들의 경우가 상류층의 가정부로 고용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본문으로 2) E6 비자를 통해 입국해 성산업으로 유입된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의 문제가 사회화되자, 정부는 2003년 6월부터 무용수들에 대한 E6비자 발급을 중단했고, 그 후 E6 비자를 통한 입국은 급감하였다. 본문으로 3) 지금까지는 결혼중개업체의 존립에 대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에는 국내결혼중개업체는 신고제로, 국제결혼중개업체는 허가제로 양성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주여성운동에서는 중개업체에 대한 허가제/금지/불법화 등의 선택지를 검토한 끝에 ‘결혼’의 속성을 고려하여, 허가제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노동자계급의 적응과 항의의 사회적, 역사적 뿌리 번역: 정지영 (정책편집부장), 임필수 (정책편집국장) [편집자주] 리차드 로만은 토론토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에뒤르 벨라스코 아레구이는 멕시코시티의 아스카포트살코에 있는 시립자치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메이데이 노동조합조정위원회>의 설립자 중 한 명이다. 이 둘은 북미 대륙의 관점에서 본 멕시코 노동자계급에 관한 책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글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Richard Roman and Edur Velasco Arregui, Neoliberalism, Labor Market Transformation, and Working-Class Response: Social and Historical Roots of Accommodation and Protest, Latin American Perspective, Issue 119, Vol 28 No 4, July 2001 52-71. 지면의 제약 때문에 참고문헌은 생략했지만 {사회운동}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멕시코 체제는 이중의 위기 속에서 곤경을 겪고 있다. 하나는 축적 모델의 위기고 다른 하나는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식의 위기다. 이 위기의 해결책에는 긴장과 모순이 가득 차있다. 정치적 자유화는 무자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계획과 충돌한다. 한편으로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선거 개혁과 다른 한편으로 [치아파스를 포함한 여러] 지역의 봉기와 군사적 진압 과정간의 분기 속에서 긴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인민들이 선거 개혁을 통한 변화를 계속 갈망함에 따라 멕시코 체제는 점점 더 군사화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임금, 일자리, 삶의 질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경험했다. 멕시코 노동자계급은 기로에 서있다. 멕시코 노동자 계급이 택하는 방향이 멕시코의 미래에 그리고 사실상 북아메리카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멕시코의 도시 인구 75%와 심지어 농촌 인구 50%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게 사실이지만 위기와 변화의 시기에 멕시코 노동자계급의 잠재적 역할은 대체로 무시되었다. 이 글은 멕시코의 극적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무대 중앙에 출연할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경제적, 정치적 위기의 심화는 유동적인 상황을 낳으며 그 속에서 상호 연관된 세 가지 과정이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형성하고 있다. 세 가지 과정이란 멕시코 자본주의의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재구성, 전통적인 노동통제 형태의 약화, 새로운 맥락에서 노동자계급 운동을 형성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 투쟁을 말한다. 멕시코의 변화를 두고 경합하는 프로젝트들이 존재한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경로는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경제의 변화와 정치적으로 짝을 이루는 온건한 선거 이행이다. 이는 불신 받는 권위주의 체제를 새로운 권위주의 선거체제로 대체할 것이다.1) 경제 구조조정에 따르는 인간적 고통에 대한 항의를 억압하는 [멕시코 체제의] 대응은 봉기/군사진압이라는 동학을 초래하고 있다.2) 이미 지방에서는 폭발적인 불만이 나타났다. 치아파스의 사빠띠스타 봉기는 저항의 희망을 일신했고, 농촌에서 항의운동이 지속되도록 힘을 주었다. 게다가 몇몇 다른 주들에서도 무장 봉기가 일어나고 있다.3) 멕시코 정부의 대응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통제 방식을 더 군사화하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와 미국 제국주의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도전을 쉽사리 묵인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권위주의 동학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진정한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경제적,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결합한 민주주의 운동이다. 멕시코에서 참된 민주주의 이행은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인민의 기회와 권력을 확장하려는 인민의 희망을 일신하는 포괄적인 경제 전략을 동반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을 건설할 수 있는 세력은 불만을 품은 농촌 부문과 동맹을 맺은 노동자계급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근본적이고 민주적인 변혁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자본의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따라서 신속히 성장하고 있는 [멕시코정부와 미국 제국주의의] 반혁명적인 대응을 강화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자계급을 희생시킬 뿐만 아니라 신속히 재구성한다. 사실 노동자계급과, 더 일반적으로 도시 빈민에 대한 공격은 아직 광범위하고 굽히지 않는 저항과 반대 운동을 초래하지 않았다. 이런 공격이 수많은 폭발적인 저항과 전투성을 야기했지만, 이는 분할된 채로 남아 있고 계속 유지되기 어려운 상태에 머물러있다. 자본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자 투쟁에 새로운 장애물과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했다. 구조조정은 명백히 불공평한 조건에서 엄청난 인간적 고통을 낳았다. 정당성의 위기와 더불어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박탈은 강력한 불만을 초래했다. 이런 불만의 에너지는 살아남으려는 일상의 투쟁으로 흩어져 버리거나 아직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의 협소하고 방어적인 투쟁 수준으로 억눌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전국적인 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으로서 진정한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통해 합쳐질 가능성도 있다. 결과는 구조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결과는 멕시코 노동자계급과, 더 일반적으로 기층 계급들의 가슴과 정신을 향한 정치적-문화적-이데올로기적 투쟁에 달려있다. 노동통제의 구체제 또한 위기에 처해 있다.4) 이전에는 노동자를 통제하는 요새였던 공식노조는 이제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위기와 국가와 연계된 권위주의 즉 공식노조의 과두세력의 위기는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두 개의 위기가 같은 것은 아니다. 공식노조의 관료주의가 처한 위기는 국가권력 블록 내에서 [공식 노조의] 주변화에 기인하며 신자유주의 프로젝트 속에서 통제 대리인으로서 역할이 궁극적으로는 불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노동관료들은 국가의 대리인이라는 역할을 유지하려고 교묘한 술수를 부리고 있다. 공식노조기구의 위기는 노동자계급에게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제공한다. 기층이 통제하는 진정한 노조가 탄생할 가능성도 있지만, 새로운 코포라티즘5)이나 노조주의의 완전한 파괴라는 새로운 노동통제 형태가 발전할 위험 역시 존재한다. 노동 관료와 노동자계급이 처한 이중적인 위기는 멕시코 노동자계급 운동의 미래를 둘러싼 다면적인 투쟁을 낳았다. 노동자계급은 코포라티즘 노조주의라는 낡은 용기인 노동의회(CT)와 멕시코노동자총연맹(CTM)6)으로 다시 후퇴하거나 새로운 코포라티즘의 재생 용기인 노동자전국조합(UNT)으로 포섭될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민주적인 노조와 광범위한 노동자계급 운동에 대한 참여를 동반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투쟁을 발견할 것인가? 노동자계급의 다양성과 구조조정 과정에서 겪은 경험의 다양성은 자기-조직화와 전투성을 위한 다양한 잠재력을 창조한다. 경합하는 프로젝트들은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아래로부터의 불만, 운동과 상호 작용한다.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둘러싼 전투가 진행중이다. 투쟁의 결과는 노동자 운동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고, 따라서 멕시코의 미래는 노동자계급이 주요한 행위자로 출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체화될 것이다. 노동시장의 변화 1990년대의 변화로 인해 노동시장의 구조는 심대한 변화를 겪었고, 다시 이 변화는 노동조합이 저항하는 형태와 [저항을 주도하는] 노동조합 부문의 변화를 낳았다. 우선 경제활동인구 중 다수 집단들이 직종을 불문하고 불안정고용 상태로 밀려났으며, 공식 고용에서 만성적인 일자리 불안과 파트타임 노동, 장기실업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로 노동자계급 중에서 공공부문 노동자의 비율이 증가했다. 경기역행수단인 공공지출의 성격 때문에 공공부문의 고용은 유지되었고, 이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응집력과 동원 능력의 기초를 제공했다. 세 번째, 위기로 인해 산업부문 고용[의 중심지가] 중동부에서 북부로 대규모로 재배치되었다. 노동력의 불안정고용 상태는 파트타임 고용의 증가에서 볼 수 있다. 파트타임 노동자는 1990년 410만 명에서 1996년 980만 명으로, 즉 전체 경제인구의 17.4%에서 28%로 증가했다.7) 멕시코 노동자 중에서 거의 3명 중 1명이 노동력의 주변적인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도시고용에 관한 통계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지표들은 이런 변화를 확증한다. 노동시장은 점점 더 분할되고 있다. 주당 35시간 이상을 일하면서 최저임금 이하를 받는 노동자의 수가 1992년과 1996년 사이에 전체 피고용자의 4.7%에서 8.2%로 두 배로 뛰었다. 실질 임금으로 따졌을 때 1992년의 최저임금은 1996년보다 40% 더 높았다(Posada Garc a, 1998: 24). 따라서 전일 노동자의 26%가 4년 전의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험, 연금 등] 급여에서 배제된 노동자의 수는 1992년에서 1996년 사이에 44%에서 49%로 증가했고,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수는 같은 기간에 41%에서 45%로 증가했다(INEGI, 1998c: 4). 1990년대 위기에서 출현한 노동자계급은 전통적인 조직화 방식을 따르기에는 훨씬 더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다시 고용되었지만, 그들은 파트타임에 취직하거나, 중소기업에 고용되고, 건강을 해치는 조건에서 노동하게 되었다. 1995년의 높은 순 실업률의 시기가 지난 후 노동력의 재통합 과정은 심대한 건강 손상, 인구의 광범위한 부문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영양실조, 노동자들의 생활 에너지의 빠른 고갈과 같이 매우 악화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졌다.8) 새로운 노동시장의 두 번째 특징은 서비스부문의 압도적인 비중이다. 1990년에 공공·사회 서비스 부문(즉, 교육, 의료, 문화, 정보)에는 240만 명이 고용되어 있었다. 이 수치는 1996년에 350만 명으로 증가했다. 공공교육에 160만 명(고등교육에 30만 명), 공공의료체계에 50만 명(의사 12만 명, 준(準) 의료인과 보조직에 25만 명, 행정직과 관리직에 13만 명), 문화, 정보, 통신 부문에 28만 명 등이다. 사적 부문의 의료, 교육, 통신, 정보 서비스는 110만 명을 고용했다. 이 부문의 거대한 성장과 대대적인 사유화를 실행하는 정부의 무능력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1990년대 동안 공공·사회 서비스 부문의 노동자들은 점점 더 큰 동원 역량을 지닌 세력이자 노동조합 저항의 구심으로 부상했다. 교사, 운송노동자, 의료노동자와 다양한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노동자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의 노동이 재배치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사회적 응집력을 보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저항을 가능하게 했다(INEGI, 1997b: 165). 세 번째 특징은 산업의 대규모 지리적 구조조정이다. 멕시코는 1995년의 위기 이후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확장을 경험했다. 이런 확장은 북부에 있는 30개의 제조업 도시로 산업부문의 고용을 대량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동반했다. 제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1990년 450만 명에서 1996년 580만 명으로 증가했다.9) 대부분은 아주 영세한 산업이나 중소기업에 고용되었다. 북부 주(州)들의 제조업 노동력 비율은 1980년대 1/4 수준이었지만 1997년 1/2에 이르렀다.. 멕시코사회보장제도(IMSS)에 포함되는 4백만 노동자 중에 2백만 명이 현재 북부에 있다. 노동조합의 저항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조업이 주로 북부로 재배치된 것은 독으로 작용했다.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성과를 조직하고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지역에 [법률로 명문화 되어있지 않았지만] 사실상 존재하는 두 개의 노동법에 의해 침식되었다. 북부지역의 노사관계의 특징은 고용의 개별화, 관리자가 직무를 규정할 수 있는 커다란 유연성, 단체협상의 제거, 작업조건에 대한 기업의 일방적인 결정 등이다. 이런 것들은 미국의 많은 주에 존재하는 반(反)노조 입법 "오픈숍"[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제도], "일할 수 있는 권리 법안"(right to work)[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아도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 법, 즉 '노동조합이 노동자가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는 법] 등 의 멕시코 판이다(INEGI, 1998a: 17, 65, 표3). 이것은 사기꾼, 회사 혹은 공식노조가 관리하는 보호계약[멕시코의 어용노조(공식노조)와 사용자들이 노동자들도 모르게 맺는 단체협약. 정보가 공개되지 않으므로 노동자들은 자기가 어떤 노동계약을 맺었는지 알지 못한다]을 통해서 실현된다. 관리자의 절대권력은 전통적인 산업지역에서 노조 관료나 기층 조합원이 때때로 가할 수 있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실제로 북부지역에서 노사관계는 헌법의 123조10)나 노동법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이런 전개는 낡은 코포라티즘의 논리와 방법을 통해 협상하는 공식노조의 능력을 크게 약화했다. 사유화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공공부문이 더 이상 산업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고 전국 조합의 조합원은 급격히 감소했다. 사회임금을 협상한다는 생각은 포기되었고, 사회임금은 시장과 거대 독점자본의 강압적인 권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상황은 지난 15년을 통틀어 파업의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한 사실을 대체로 설명해준다. 1982년에 947번의 파업이 있었던 반면에, 1997년에는 단지 34번의 파업이 있었다. 대량해고, 단체협약 파기, 산업 재배치, 통제구조의 일신은 산업 노동력의 자율적인 조직화를 저해했다. 1990년대 멕시코 노동시장과 노동조합의 구조 1990년대 경제불황 시기에 출현한 새로운 노동시장은 멕시코에서 조직된 노동자운동의 지형을 바꿨다. 가장 현저한 변화는 1) 전국노조들의 위축, 2) 교육, 의료, 도시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양적·질적 강화, 3) 사적 부문 생산·서비스 분야, 특히 금융 관련 분야에 포함되는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 하락 등이다. 전국노조들이 경험한 위기는 사유화와 구조조정의 직접적인 결과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국영 철도다. 1990년에 국영 철도에 종사하는 노조 가입자는 9만5천 명이었지만, 1997년까지 3만 5천명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에 석유노동자조합의 조합원은 18만에서 10만으로 줄었고, 멕시코전기노동자조합(SUTERM)(레오나르도 로드리게스 알카이네가 의장이었으며11) 그는 현재 CTM의 의장이다) 조합원은 8만에서 4만 5천으로 줄었고, 광산과 금속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18만 3천에서 9만 8천으로 줄었다.12) 거대 전국산업조합들의 조직률은 1980년대 20%에서 세기의 마지막 해에는 7%로 떨어졌다. 이런 전국 조합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조직률을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전체 노동력과 경제구조에 비교해 볼 때 전통적인 산업 부문의 고용 비중은 대체로 줄어들었다(IMEGI, 1997c; Poder Ejecutivo Federal., 1997: 50). 대조적으로, 교육, 의료, 도시 서비스의 분야에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은 입지를 강화했고 조합원의 수도 증가했다. 그 이유는 1970년에서 1998년 사이에 4,800만에서 9,600만으로 두 배 증가한 인구로 인해 공공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INEGI, 1997c; Poder Ejecutivo Federal., 1997: 50). 초등교육에서 대학교육까지 포괄하는 교사노동조합은 200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나라에서 가장 커다란 노동조합이다. IMSS, 보건의료노조, 사회보장·사회서비스 노동조합(ISSSTE)의 50만 조합원들과 더불어, 교사노동조합은 멕시코 노동조합운동의 새롭고 역동적인 축을 구성하고 있다. 도시 공공서비스, 수질관리, 자연보존, 대도시 유지 부문의 노동조합 또한 수적인 힘을 유지한다. 지방자치단체공무원노조(SUTGDF)은 가장 강력하다. 지역에 뿌리를 둔 도시 공공서비스의 성격은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지역적 힘의 기반을 제거하는 재배치 전략이 사용될 수 없게 했고, 도시화와 공공 서비스에 대한 요구의 증가는 고용이 계속 증가하는 요인이 되었다.13) 공공부문 서비스노동조합의 수적인 힘은 공공서비스가 사유화되거나 심각하게 감축되지 않는 한 인구성장에 따라서 계속 증가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국가는 노사관계에 대한 책임을 주 정부에게 넘기는 행정의 분산을 통해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잠재력에 대항하려 했다. 이 전략은 연방정부 최정상에 대한 [노동조합의] 압력을 [각각의 주정부로] 빗겨나게 하여 교섭을 파편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현재까지 이 전략이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약화하지는 못했다. 1988년과 1997년 사이에 교수, 교사, 의사, 간호사, 기술자, 약사, 첨단기술과 정보통신 기술자의 숫자는 크게 증가한 반면, 이들의 실질임금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공식적인 통계는 35% 감소했다고 추정하지만, 이 수치는 하위직과 상위 관리직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공공부문 하위직 노동자들만을 놓고 본다면, 실질임금의 감소는 50%를 넘는다(INEGI, 1997a). 국민총생산(GNP)에서 공공부문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982년 9.1%에서 1997년 3.5%로 줄었다. 이런 감소의 일부분은 공공부문 피고용인 중 연방정부의 피고용인과 분산된 공공부문 독립체의 피고용인의 비중이 줄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서 1982년 이후 수많은 공유산업이 사유화된 결과로 국유산업의 많은 피고용인들이 해고되었다. 그렇지만 공공부문의 고용은 1982년 360만 명에서 1997년 440만 명으로 증가했다. 공공부문의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 것은 국영 공공서비스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삭감된 결과이지, 그들의 수가 감소한 결과가 아니다(Banco de M xico, 1998, section 1, Tables Ⅰ-53 to Ⅰ-58). 고용증가와 임금삭감의 결합은 폭발물이며 공공부문의 조직된 노동자들의 상대적인 전투성을 설명해준다. 공공부문 노동력의 조직화, 파업, 저항은 노동분쟁에 관한 공식적인 통계에 등록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통계누락은 노사관계의 평화와 노동의 완벽한 패배라는 신화를 조장한다.14)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성장해 온 반면에, 사적 서비스 부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물론 경제 전반의 사유화는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리를 지닌 기층 노동자부터 그런 권리가 없는 고위 관리직에 이르는 수십만 노동자들을 강제로 재분류한다. 외부하청의 활용 역시 노동조합을 피하기 위한 전술이다. 다른 한편, 가채용이나 임시직 상태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의 취약성은 노동조합 조직화를 매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시장의 알맹이 부문을 차지하는 해외기업에게 허가한 수백 개의 자회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허가를 받은 민간 서비스 부문에서 노동조합 비율은 23%이고, 이는 전국 평균치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국영 공공서비스 부문 노동자들의 조직률 87%와 대조된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멕시코 노동운동이 직면한 모순과 도전을 보여준다. 모순과 도전은 전국조합들의 영향력 약화, 사유화와 단체협약의 유연화에 따른 전국조합의 감소, 국영 공공서비스 부문의 조합원 수 증가와 사유화에 저항하는 능력의 강화, 거대한 규모의 비조직 노동자의 존재 - 4명 중 3명, 또는 보호계약까지 고려한다면 6명 중 5명 - 등이다. 멕시코 노동 시장을 분석하면서 OECD는 실질임금 삭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시장이 노동조합에 대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강조한다. OECD는 조직 노동자와 비조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지표로 사용한다. 1980년대 초, 조직된 노동자들의 임금은 비조직 노동자들보다 40% 높았다. 1992년 이러한 차이는 실제적으로 사라졌다. 비조직 노동자의 임금은 조직 노동자 임금의 97% 수준이 되었다(OECD, 1997: 89). 코포라티즘 70년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15년이 지난 후, 노조의 현실적인 협상력은 최저 수준이다. 그 결과 비조직 노동자의 임금이 상향 조정된 것이 아니라 조직 노동자의 임금이 하향 평준화되었다. 양쪽 모두 임금이 감소했지만, 조직 노동자의 임금은 훨씬 더 가파르게 줄었다. 구조조정, 재구성, 저항 구조조정이 노동계급에게 미친 영향은 균등하지 않다. 노동계급의 이전부터 존재하는 다양성과 구조조정의 차별적인 경험은 저항을 위한 노동계급 역량의 조건을 이룬다.15) 중동부 지역 전통산업의 심장부에서는 대량해고가 벌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북부 마낄라도라 지역에서 대규모 고용증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전 노동자계급은 상당히 분해되었고, 북부지역의 새로운 노동자들은 아직 지역적인 수준을 능가하는 도전을 시작할 수 있을 만한 위치와 고용의 안정성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산업 노동자계급의 저항 능력은 심대하게 변했다.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저항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서 나왔는데, 그들의 숫자는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래로부터 형성된 이런 힘이 경쟁하고 있는 관료주의적 대안에 의해 이용될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 스스로의 표현을 창출할 것인지 여부다. 마낄라도라의 노동자들은 초과착취의 조건에 직면해 있지만, 그들은 주로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더 광범위한 지역공동체와의 맺은 관계는 새롭고 끊어지기 쉽다. 공장들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마낄라도라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오직 일시적인 성과만을 얻을 수 있다. 마낄라도라에서는 정부와 자본이 노동조합을 깨뜨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 - 기꺼이 [투쟁을] 진압하려는 정부,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으며 계속 증가하는 산업예비군의 활용 가능성, 자본을 재배치할 수 있는 능력 - 이 훨씬 더 강력하다.16) 노동조합 조직은 [이러한 탄압에] 살아남을 수 있는 광범위한 노동자운동과 단단히 묶여야 한다. 마낄라도라 지역에서 노조의 장기적인 유효성은 정부와 경제정책의 성격을 바꾸는 데 달려있다. 노조는 그런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출발점일 수 있으며 그 운동에 튼튼한 중심이 될 수 있지만, 노조는 [정부와 경제정책의 성격을 바꾸는] 운동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 마낄라도라 노동자들은 단지 자신의 임금과 노동조건에만 관심을 두는 빈 그릇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그릇에 전통과 고향의 지역공동체의 동시대적인 고통을 담으며, 가족의 유대, 경제적 이해, 사회적 관계, 정체성 등은 그들을 자신의 지역공동체와 여전히 연결해준다. 마낄라도라 노동자들의 투쟁은 오래 지속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사회와 체제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노조와 여타의 사회적, 경제적 운동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의 배타적인 관점에서 벌어지는 저항은 탈산업화된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단순한 노조주의로는 공장 폐쇄나 재배치를 막을 수 없다. 안정적인 노동에서 더욱 불안정한 노동이나 비공식 부문으로 밀려난 수많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인구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과거의 역사와 멕시코 혁명의 전통에 뿌리를 둔 도덕 경제(moral economy)에 대한 관념을 지니고 있다. 점점 더 안정적인 정규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들은 그런 일자리를 갈망한다. 그들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황폐해진 지역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두 축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다. 즉 그러한 가능성은 한편으로는 실업, 비공식부문의 활동, 생활조건의 급격한 악화, 작업장에서의 원자화(집합적인 장소의 노동자에서 비공식 부문의 개별적인 노동자로 변화)라는 사기 저하라는 축과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 주거, 사회서비스 등 정부와 기업이 공격하는 모든 것들을 최소한 회복하거나 최대한 향상시키겠다는 절박함이라는 축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들은 취업자, 반(半)실업자, 실업자, 비공식 부문 노동자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노동자운동의 일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일부는 다양한 형태의 인민연합조직 지역운동, 노점상연합, 여타의 정치·사회운동 으로 조직된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광범위한 노동자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노조가 조직과 전투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조합 구성원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를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노동자운동은 노동자에게 긍정적인 의미가 거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자운동은 지역적, 전국적으로 산업예비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고용을] 재배치할 수 있는 자본의 능력에 직면하여 있으므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지극히 적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는 중요한 저항의 능력이 있다. 그들의 공공부문 고용의 공적인 성격은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요구가 정치적 권위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사실 그들의 요구는 IMF가 촉진하는 긴축정책과 단절을 요구하고, 그러한 요구는 공공서비스의 유지, 확장 혹은 악화와 연관을 맺으므로 불가피하게 사회적이다. 공공부문에서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후퇴는 기초적인 공공서비스의 악화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기층의 불만을 봉쇄하려는 공식 노조에 속해있다. 대부분의 공공부문 노조들 내부에는 [멕시코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전통적인 어용노조에 반대하는] 반(反)주류적 경향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메이데이노동조합조정위원회에 가입해있다. 우리는 공공부문의 전투성이 공공부문 고용의 지속적인 확장과 실질임금의 급격한 하락, 노동조건의 심각한 후퇴가 폭발적으로 결합한 데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훨씬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처럼 멕시코 산업의 재배치와 구조조정의 결과로 사적 부문의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공공부문의 전투성은 때때로 공공서비스 유지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기초로 인민계급의 더 광범위한 부문과 소중한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저항의 모델을 표현한다. 경합하는 전략들 공식 노조의 국가통제 독점은 붕괴 과정에 있다. 미래의 멕시코 노동자운동을 형성하기 위한 전투에는 세 개의 주요 흐름 CTM-CT, UNT, CIPM 이 포함되어 있다.17) 지역, 지방에서 벌어지는 소요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세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각각 특별한 역사와 고유한 성격을 지닌 여러 멕시코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지역, 지방에서 진행되는 노동조합운동의 재편성 과정에서 논쟁이 없다는 게 [노동조합운동의] 전국적인 동질성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18) CTM-CT는 영향력과 권력의 새로운 기반을 암중모색하는 중이다. CTM-CT의 간부들이 기층 조합원에게 행사하는 권력은 대체로 CTM-CT가 체제와 맺는 관계에서 나온다. 국가의 노동입법은 CTM-CT의 힘을 지탱해주는 반면, 동시에 CTM-CT의 열망을 지배블록 내로 제한하는 데 기여한다. 항상 단체협상은 노조 관료가 자기 자신과 때때로 기층 조합원을 위한 성과를 얻으려고 통제된 조직력을 체제에 대한 지지와 결합하는 정치적인 과정이었다. CTM-CT의 영향력의 전통적인 기반은 매우 약해졌고, 지배 블록 내에서 CTM-CT의 역할은 매우 축소되었다. 노동시장과 정권의 전략이 변화함에 따라 예전 방식의 전술과 단순한 노조주의는 무력해졌다. 이런 노동 관료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해체되는 것에 맞서서 보수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서 아무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지만, 사실상 구조조정 과정에서 분할과 정복을 위한 그들의 역할만은 정권에게 유용하다. 비록 그들이 앞으로도 체제와 여당의 미래를 둘러싼 분파투쟁의 행위자이긴 하지만, 그들이 미래의 멕시코 정치와 노사관계에서 주요한 행위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공식노조의 "반(反)주류" 분파 대부분은 현재 UNT로 조직되어 있으며19) 그들의 전략은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으로 노사관계를 현대화하는 것이다. 이들 분파의 관료들은 살리니스타 현대화20)를 지지했다. 그들은 단체협상에서 국가를 빼자고 요구했다. 이는 거대자본, IMF, 세계은행도 공유하는 목표였고, 역사적으로 멕시코 국가가 노동자조직을 교묘히 속이고 탄압하는 역할을 해왔으므로 커다란 호소력을 지닌 목표다. 하지만 [현재의 협상을] 대량실업과 반실업을 경험하고 있는 노동력과 강력한 기업 간의 시장이 주도하고 탈정치화된 단체협상으로 대체하는 것은 단지 노동에 대한 자본의 힘을 증가시킬 뿐이다. 현대화된 "새로운 관료주의자"와 자본 사이의 [국가에 의해] 중재되지 않는 협력이 국가가 강요하는 결탁을 대체할 것이다.21) 노동자들은 통제를 받는 피지배자로 남겠지만, 새로운 관료주의자들은 구래의 관료주의자들보다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부터 더 많은 자율성을 얻게될 것이다. 새로운 관료주의자들은 지배정당과 정부요직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유지함으로써 계속 지배구조로 통합된다. 그들은 국가가 직접적인 노사관계의 관리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들 자신이 집권정당의 지도적 위치로부터 철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국가의 군사력 증강을 감축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강압적인 권력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실제로는 [인민봉기에 대한] 군사진압과 신자유주의적 현대화 프로젝트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화되었다. UNT의 교묘한 비정치적 태도는 지배집단 내부에서 투쟁하는 UNT 핵심 지도자들의 정치책략을 교묘히 숨긴다. 게다가 이런 태도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법률적, 제도적 변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을 가로막는다. 노동자계급은 도시와 지방의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운동의 핵심 요소로서 노동자계급의 발전을 촉진하는 정치적 관점을 요구한다. 협소하고 비정치적인 노조주의는 노동자계급 운동을 조직된 노동자와 비조직된 노동자로 분할하고, 민주주의 이행을 보장한다는 정권의 주장을 신임한다. 그러므로 이는 민중운동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무장해제에 기여하고 동시에 국가는 점차 강제적인 억압 수단들로 무장한다. 관료주의적인 노동운동의 분열 때문에 몇몇 작고 독립적인 노조와 연맹이 UNT에 들어갔다. 이들 개혁주의 경향은 UNT를 진정한 독립노조의 발전을 위한 매개체로 간주한다. 관료적 통제의 오랜 메커니즘이 약화됨에 따라서 관료주의적인 노동운동의 분열은 기층 노동자의 투쟁에게 기회로 보였다. 하지만 반(反)주류 관료에 의한 새로운 연맹의 형성은 민주적인 에너지가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계속 통제되는 구조에 갇힐 수 있는 위험으로 드러난다. 비록 UNT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요소를 약간 포함하더라도, UNT는 프란시스코 헤르난데스 후아레스(전화 노동자)와 같이 현대화된 관료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거대노조와 이들의 자원을 권위주의적으로 통제하며 지배집단과 연계를 맺고 있다. CTM-CT와 UNT는 모두 체계의 해체와 재구성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동자운동 관료들이 통제하는 제도적 틀이다. 각각은 노동자계급의 전투성과 독립성을 봉쇄하기 위한 [국가 또는 자본과의] 협력 형태를 제안한다. 그러나 양자 모두 노동조합 내에서나 멕시코 사회 내에서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는다. CTM-CT는 독재체제의 구조적인 핵심의 일부였고 구 체계를 회복하고 싶어한다. CTM-CT는 노조 민주주의와 멕시코의 민주적 이행 양자 모두를 반대한다. UNT의 주요 지도자들은 제도혁명당(PRI)의 당원으로 남아있고, 경제 구조조정을 최우선으로 보는 살리니스타파와 결합되어있다. 그들은 민주적 이행을 경제 구조조정의 기본적인 과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따라서 UNT는 대량빈곤과 점증하는 봉기/군사진압의 동학 한복판에서 비지니스 노조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CTM-CT나 UNT 모두 노동조합과 정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매개체는 아니다. CIPM은 1995년 관료적 노조운동이 기층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까봐 노동절 투쟁을 포기했을 때 노동절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임시로 구성되면서 탄생했다. 그러므로 CIPM은 반(反)주류 경향의 노조, 민주적인 지역노조과 중앙노조, 지역공동체 운동, 다양한 좌파 조직들의 조직화를 위한 협의체로 출발했다. CIPM은 계속해서 노동절 투쟁을 조직해왔고, 현재 진행되는 노동자계급 운동으로서 더욱 명확한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CIPM에는 정치적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CPIM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아래로부터 쟁취해야만 하고 노동조합의 권리는 민주적 이행이 없이는 달성될 수도, 강화될 수도 없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은 노조 없이 노동하는 계급을 포괄하여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광범위한 합의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CIPM은 계급투쟁/민주주의 혁명의 관점에 기초하여 [인민]계급 내부의 기층의 통합을 지향한다. 그리고 CIPM은 점증하는 지역봉기와 동맹을 맺고 있다. CIPM과 싸빠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은 투쟁의 연대를 표명해왔고, 싸빠티스타에 동감하는 시민들의 전국조직인 싸빠티스타해방전선(FZLN)은 CIPM의 일원이다. CTM-CT와 UNT 노조의 기층 반대파는 CIPM의 매우 중요한 일부분이다. CIPM은 새로운 노조를 이중으로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노조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싸움을 지지한다. CIPM은 노동자운동의 임무를 삼중으로 규정한다. 1) 빈곤화와 사유화를 추진하는 정치, 경제에 대항하는 즉각적인 투쟁, 2) 노조에서 민주적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한 기층조합원의 투쟁, 3) 싸빠티스타를 비롯한 지역의 봉기세력과의 동맹 속에 멕시코의 민주적 이행을 위한 투쟁. 1997년 10월 CIPM의 첫 번째 전국회의에서는 UNT와의 관계 문제가 격렬하게 논의되었다. 며칠 간의 토론 후에 진행된 투표에서 (전국적으로 120개 조직에서 온) 400명의 선출된 대표자들 중 85%가 UNT에 가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 결과는 독립조직으로서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고 동시에 UNT의 프로젝트가 노동자들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새로운 관료주의자들의 프로젝트라는 강력해 선언했다.22) CIPM과 UNT의 또 다른 핵심적인 의견차이는 조직의 포괄 범위에 관한 것이었다. UNT는 오직 노조만을 포괄하지만 CIPM은 노조뿐만 아니라 관료주의적 노조 내의 민주적 경향, 지역조합과 같은 다른 형태의 노동자조직도 포괄한다. 비판가들은 이런 식의 포괄은 노동조합 중앙으로서의 성격을 왜곡한다고 말하지만 CIPM의 목표는 노동조합 중앙이 되는 것을 넘어선다. CIPM의 목표는 노동자계급 기층의 봉기를 촉진하고, 그들의 통합을 돕는 것이다. CIPM의 관점에서 중심 요소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시민사회의 민주적 봉기와 결합하는 것이다. 선거활동, 특히 민주혁명당(PRD)에 대한 지지는 CIPM 내부의 중요한 쟁점이다. CIPM 내에는 자신의 [자율적인] 방침을 추구해야하고 노조와 계급투쟁이 선거활동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있다. 그러나 이런 합의가 있더라도, 선거를 통한 이행이 가능한가, 선거활동과 의회 밖의 활동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PRD의 성격과 앞으로의 궤적은 무엇인가(미국과 멕시코 자본을 달래기 위해서 자신을 온건한 정당으로 보이려는 PRD의 노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에 대해서는 중요한 의견차이가 존재한다. 멕시코시티에서 PRD 정부가 당선되고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PRD가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자본을 달래려는 PRD의 시도와 빈곤화에 직면한 대중적 불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 것이다. 이런 선거 동학은 농촌 주민들에 대한 전쟁이 강화되는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구실로 군사화가 진행되고 있다. 군대는 봉기진압전략의 일환으로 멕시코시티의 주요한 노동자계급 지역(아스카코트살코 같은 지역)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CIPM의 많은 구성원들은 비록 종종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지라도 PRD의 열렬한 지지자인 반면, CIPM은 선거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얄팍하게 가려진 쿠데타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와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방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CIPM은 멕시코의 민주주의와 새로운 정치, 경제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결론 CTM-CT, UNT, CIPM 사이의 논쟁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행동을 위한 대안적 경로와 목적지는 무언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투쟁이다. 이 논쟁의 결과는 노동자계급과 멕시코의 미래에 결정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역사의 행위자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CTM-CT와 UNT는 모두 노동자계급을 엘리트의 책략을 위한 병사로 보며, 집합적인 투쟁을 통해 자신의 제도를 통제하고 미래를 구성할 주체라기보다는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자원으로 본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노동자계급과 멕시코 사회의 더 광범위한 투쟁에서 고립시킬 전략들을 제안한다. 조직된 노동자 내부에서 헤게모니 세력으로서 CTM-CT와 UNT의 승리는 노동자계급의 패배이며 사회정의와 민주주의 이행을 위한 투쟁의 패배가 될 것이다. 문제는 CIPM의 승리가 아니라, 어떤 일반적 관점이 노동계급 내에서 우세해질 것인지에 달려 있다. CIPM과 다양한 지역, 지방의 운동들은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과 민주주의 쟁취는 확고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위기와 급속한 발전의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조직하는 형태는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삶과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관념은 힘을 얻고 있으며 변화를 야기할 능력이 있다. 그것은 거대한 인민운동의 발전,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계급과 사이의 동맹을 가능하게 한다. 오직 이러한 운동만이 멕시코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후기 (1998년 말) 이 글이 쓰여진 이래로 많은 것이 변했고 또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전국행동당(National Action Party, PAN)의 빈센트 폭스의 선거 승리는 변화와 지속 모두를 표현한다. 선거를 통해 PRI는 창당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직위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그러나 이런 이행은 이미 선거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 체제의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PRI의 신자유주의 분파와 PAN의 동맹이며 정부정책의 형성하는 자본의 지도적인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멕시코의 자본가계급의 분파들은 국가에 대한 더욱 직접적인 통제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다. 그들의 투쟁은 PRI의 국가 통제라는 구체제에 반대하는 민주적인 시민사회의 투쟁과 동시에 일어났지만, 그들의 목표는 거대기업의 지배인가 아니면 시민사회의 지배인가라는 점에서 매우 달랐다. 새 내각의 핵심요직 임명을 보면 변화에 대한 어떤 관념이 우세한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시민사회가 일부 자리에 등용되었지만, 핵심적인 경제요직에는 자본가계급의 성원들이 들어갔다. 진행 중인 멕시코의 신자유주의 이행은 짧은 시간 내에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조직된 봉기가 부재한 가운데 시민사회와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본의 승리는 공고해질 것이다. 사빠띠스따는 2001년 3월 치아파스 정글에서부터 멕시코시티에 이르는 사빠띠스따해방군의 역동적이고 평화로운 행진을 계획했다. 이 행진은 헌법에 원주민의 권리를 포함하라고 정부를 압박하는 시도이며 동시에 전국적 규모로 멕시코 피억압자의 새로운 사회블록을 형성하려는 시도다. 이때의 역사적인 수렴점 원주민, 농장노동자, 여성, 실업자, 노동자, 청년의 인파 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민봉기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녔다. 사빠띠스따는 그런 운동을 점화할 정치적, 도덕적인 지도력을 보유했다. 그들의 봉기는 광범위한 민중들 사이에서 희망을 되살렸고 지역과 원주민 사이에서 새로운 조직과 동원을 이끌었다. 하지만 산업화된 도시 지역에서는 농촌봉기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봉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도시인민들이 그러한 봉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 조직화는 현존하는 노조 내에서 기층의 민주적 봉기의 발전,23) 북부 마낄라도라 지역의 주요한 조직화 동력, 원주민과 지역봉기와의 동맹를 동반할 것이다. 멕시코 노동자계급과 멕시코 사회는 결정적인 분기점에 서 있다. 1) 이러한 선거체제를 새로운 권위주의 지배의 형태로 보는 개념은 Petras and Vieux(1994), Petras(1997), zirker(1998)에 의해 발전되었다. 다른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과 비교할 때, 멕시코 이행의 특수성은 1) 이행의 출발점이 멕시코의 독특한 문민 일당(一黨)/대통령중심 체제이고, 2) 다당제 선거체제를 위한 운동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배경으로 군대의 영향력이 점증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처치가 곤란한 경제위기는 은행의 위기가 심화하고 은행들이 대규모 구제금융을 받음에 따라 분명해진다. 본문으로 2) 이런 동학은 멕시코 군대 내에 조직된 반체제 그룹, <민중의 의식 고양을 위한 애국사령부>(Patriotic Command to Raise the People's Consciousness, CPCP)가 출현함으로써 더욱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La Jornada, 1998, 12, pp.19-26를 보라). 본문으로 3) 멕시코 언론은 1998년 여덟 개 주(州) 농촌 지역에서 일어난 무장봉기 집단의 행동을 보도했다. 그 중에서 오악사카, 구에레로, 히달고, 멕시코 주, 그리고 당연하게도 치아파스의 무장봉기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고, 구에레로 주의 엘차르코와 아토약, 오악사카 주의 로스록시차스 시내에서는 심각한 군사적 대치가 벌어졌다. 본문으로 4) 노동통제의 구체제를 일반적으로 코포라티즘이라 지칭하며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섯 가지 축에 기초를 두고 있다. 1) 노조 승인과 파업권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법, 2) 공식적으로 승인된 노조들의 지배정당과 국가 장치로의 통합, 3) [노동조합 내부의] 조직적인 과두지배세력의 일상적인 통제 메커니즘을 통한 권위주의적 통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과 국가와의 연계에 기초한 노동조합 지도부의 노동조합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제, 4) 어용노조의 관료주의자(charro)가 지휘하는 국가와 폭력단의 탄압, 5) 얼마간의 기간동안 유지되는 사회협약 - 이러한 사회협약은 노동자계급의 제한적 부문이 특히 사회임금(social wage) 영역에서 이득을 얻는 것을 허용한다(사회협약 가장 두드러졌던 때는 이른바 멕시코의 기적이라 불렸던 수입대체형 산업화의 시기였다). 공식 노조들은 지배정당의 일부이며, 노조 관료들은 노조와 지배정당, 정부의 요직을 동시에 또는 차례로 차지한다. 공식 노조들은 노동자계급 내의 국가 기구이며, 지도자들은 권력 브로커다. 이런 노조에 의한 동원―동원하겠다는 위협에 그칠 때가 더 많다―은 노조투쟁 또는 계급투쟁과 거의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코포라티즘] 체제 내부 투쟁에서 활용하는 있는 카드거나 또는 진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평조합원의 압력을 줄이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노동통제 체계는 멕시코의 독특한 권위주의 체제의 발전에서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이것은 멕시코 혁명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멕시코 혁명은 혁명적 수사법과 강력한 "노조"의 존재를 결합하여 대다수 "노조"와 [멕시코] 체제의 진정한 성격을 속이는 체제를 낳았다. 이런 체제가 도시 노동자들과 인민의 다른 부문들에 대한 공격과 가끔씩 있었던 양보 없이 쉽게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계속 재발하는 인민 봉기와 엘리트 사이의 분할은 체제의 불안정하고 반(半)-보나파르트적인 성격에서 기인한다. 본문으로 5) "새로운 코포라티즘"(neocorporatism)이라는 용어는 [코포라티즘에 대한] 비판가들에 의해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사실 [새로운 코포라티즘을 옹호하는] 이러한 흐름은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이며, 현대화, 유연화 등등을 위해 자본과 협력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통념을 받아들인다. 이 흐름은 외형적으로는 더욱 부드러워졌지만 실제로는 노조와 사회에서 과두지배를 유지하려는 권위주의적인 비즈니스 노조주의의 한 형태다. 본문으로 6) CTM은 유력한 공식 노조연맹이고, 다양한 친(親)정권 노조연맹의 조직인 CT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다. 본문으로 7) 1990년의 수치는 인구조사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 조사는 파트타임 노동을 주당 노동시간이 33시간 이하 노동으로 정의한다. 1996년 수치는 전국고용통계에서 인용했는데, 여기서 파트타임 노동은 주당 34시간 이하 노동으로 정의한다. 이는 북아메리카의 전일(full-time) 노동과 거의 비슷하지만, 멕시코에서 그것은 지극히 필연적인 반(半)실업과 노동조건의 악화를 의미한다. 다음과 같은 점들은 이런 특성을 명확히 드러내준다. 1) 멕시코연방 노동법은 주당 노동시간을 48시간으로 규정한다. 멕시코에서 임금은 시간당이 아니라 일당으로 계산된다. 일주일에 6일 동안 5시간씩 일하는 사람은 반일(半日) 노동으로 간주되어 그에 준하는 임금을 받는다. 따라서 전일 노동자와 비교할 때 파트타임 노동자의 임금 감소 비율은 노동시간 감소 비율보다 훨씬 크다. 2) 전체 파트타임 노동자의 중 80%는 주당 노동시간이 25시간 미만이다. 3) 파트타임 노동자 대부분은 전혀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본문으로 8) 멕시코의 주요 민간은행인 바나멕스는 1990년대를 통틀어 빈곤이 계속해서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빈곤상태에서 생활하는 멕시코인의 숫자는 4,700만 명―지방에 1,500만 명, 도시 지역에 3,200만 명―으로 증가했다(Banamex-Accival, 1998b: 442). 전국통계·지리·정보기구(INEGI)의 연구에 따르면 1996년에 가구의 64%, 대략 7,000만 명이 빈곤선 아래에 있었다. 빈곤선 아래의 숫자는 1992년에 비해 230만 명 증가한 것이다(INEGI, 1998b: 77-79). 본문으로 9) 산업부문에 고용된 [노동자 중에서] 아주 작은 비율만이 멕시코 사회보장제도에 등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인구조사 자료는 산업 노동력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1989년에 제조업 부문에서 사회보장에 등록된 노동자는 총 310만 명이었다. 1997년에 이 수치는 거의 400만 명에 달했다. 본문으로 10)123조는 1917년에 채택된 헌법의 유명한 노동 관련 조항이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진보적이고,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는 국가의 개입에 헌법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조항은 또한 노동조합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 노동자운동은 123조의 진보적 해석과 효과적인 실행을 위해 투쟁해왔다. 현재는 이 조항을 신자유주의에 부합하도록 바꾸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본문으로 11) 로드리게스 알카이네는 1975년 이래로 계속 SUTERM의 의장이었다. 그는 1919년 5월 1일에 텍스코코에서 태어났다. 61년 동안 CTM의 의장을 역임한 후 1997년 6월 21일에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피델 벨라스케즈와 함께 로드리게스 알카이네는 멕시코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적 지배의 장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는 멕시코의 산업화 시기에 카를로스 행크 곤잘레스 교수가 이끄는 정치·경제 권력 그룹인 아틀라코물코 그룹과 결합했다. 아틀라코물코 그룹은 로드리게스가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제도혁명당(PRI)의 상원의원을 할 수 있게 해줬다. 로드리게스는 지방 정계의 보스로 사업가의 이해와 결합한 노조 관료의 전형적인 예다. 그는 1998년 2월 CTM 의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본문으로 12) 설탕노조는 1988년에서 1997년 사이에 조합원 수가 5만 명에서 3만 명으로 감소했다. 석유화학노조는 조합원 수가 2만2천 명에서 1만 명으로 50% 이상 급감했다. 본문으로 13) 이것은 중앙전기전력회사 노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멕시코공화국전화국노조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새롭게 부상하는 전화회사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다. 민간전화산업에서 노조는 그 산업에 속한 노동자 전체를 대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각 민간회사의 조합원만을 대표한다(Poder Ejecutivo Federa, 1997: Secci n de empleo y remuneraciones). 본문으로 14) 정부가 고용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노동부나 연방 또는 지역의 쟁의조정중재위원회가 수합한 자료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1960년에 개정된 헌법 123조 노동법규 B 부문에 속하는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B 부문은 그들의 파업권이나 노동조합 조직에 대해 강력한 규제조치를 부과한다. 본문으로 15) Banamex-Accival(1998a: 612-615)은 공공서비스 부문의 반(反)주류 노동조합인 UNT와 메이데이노동조합조정위원회(CIPM), 사적 부문의 공식, 기업별 노조주의의 상대적 집중을 설명한다. 본문으로 16) 공장 이전을 통해서 혹은 단순히 [도급] 계약자를 바꾸는 것을 통해서. 본문으로 17) 멕시코 노조 내에서 이 세력들의 새로운 상호관계는 Banamex-Accival의 1998년 5월 보고서(1998a: 197)에서 다뤄지고 있는데, 그 보고서는 CTM-CT, UNT, CIPM 사이의 싸움은 낡은 코포라티즘 모델을 변경할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본문으로 18) 전국단위 이하의 수준에서 주목할만한 하나의 경향은 다양한 부문을 포괄하며 노조간 연계 형태를 지닌 조직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좋은 사례는 <소노라 사회조직 확대전선>(FAOS)이다. FAOS는 3개의 전국조직(CT/CTM, UNT, CIPM)에 각각 공식적으로 가입해있는 다양한 조직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소노라 지역에서 그들은 매우 중요한 아래로부터의 재구성을 달성할 수 있었다. FAOS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강령을 지니고 있으며, 1998년 2월 소노라의 철도 시설을 점거했던 것과 같이 사유화에 저항하는 전투적 투쟁형태를 발전시켰다. FAOS의 기원과 구성은 FAOS가 CIPM과 매우 닮도록 했으나, 양자 사이에 조직적 연계는 없다. 또 하나의 흥미로은 사례는 <잘리스코 노동조합조정위원회>(CIDJ)인데, 이것은 FAOS와 매우 유사하지만 CIPM과 조직적 연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특정한 주(州)에서 일어나는 투쟁은 고유한 특징과 동학을 가지고 있다. 베라크루스와 타바스코에 위치한 PEMEX(국영석유회사)의 해고 노동자들의 길고 전투적인 투쟁을 보라. 그리고 여러 사례들처럼 미국과 캐나다의 노조로부터 지원과 협력을 받는 마낄라도라, 특히 티주아나, 시우다드 후아레스, 시우다드 사쿠나 지역 노동자들의 길고 전투적인 투쟁을 보라. 이처럼 한 나라를 넘어선 연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는 미국 남서부 지역의 전투적인 노조 세력과 연계를 맺고 있는 <코아후일라·타마울리파스 노동자 국경위원회>다. 또 다른 예는 마낄라도라 지역에서 투쟁과 파업의 다양한 경험인데, 이 곳에서는 미국전기노동자조합과 전미트럭운전사조합(Teamsters)이 실제로 노조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지원하고 있다. 본문으로 19) '반(反)주류' 공식노조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노동조합 포럼>으로 조직했다. UNT는 그 포럼에서 발전했다. 그러나 새롭고 대안적인 노동연맹의 형태를 둘러싼 분열이 발생했다.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끄는 교사들의 조합인 <전국교육노동자조합>(SNTE)은 새로운 연맹을 반대했다. SNTE는 포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지만 공식노조운동이 갈라지는 것에는 반대했다.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지니며 포럼의 멤버였던 전력노동자조합(SME)은 UNT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SME는 UNT를 관료들의 내부투쟁을 위한 책략으로 보았다. 일부 소규모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노조와 연맹들, 예를 들어 <진정한 노동전선>(FAT)은 포럼과 UNT 양자 모두에 가입했는데, 이들은 UNT가 진정한 노동운동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본문으로 20) 1998년 12월 하순의 인터뷰에서, 헤르난데스 후아레스는 살리나스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재차 천명했다(Martinez, 1998). 본문으로 21) 자본의 신자유주의 현대화 프로젝트에서 UNT 핵심 지도자들의 협력적인 입장은 1998년 2월 11일 상품·서비스조합연맹(FESEBES)과 멕시코고용주연합(COPARMEX) 사이에 체결된 협정으로 증명된다. FESEBES는 1990년에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설립된 서비스부문노조(통신, 항공, 전력, 영상과 TV, 기타)와 동맹을 맺고 있다. 여기의 핵심 지도자들은 UNT의 핵심 지도자들이기도 하다. COPARMEX는 반-노동자적 고용주들의 연합이다. FESBES/UNT 지도자들은 정부의 감독 없이도 기업과 노동자가 협력할 수 있는 역사적인 단계로 나아갔다며 협정을 환영했다. 본문으로 22) UNT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핵심 논거는 UNT가 관료적 지도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지도자들의 프로젝트는 노사관계를 신자유주의적으로 "현대화"하는 것이며, 이 프로젝트는 노동조합의 투쟁을 사회 정의와 민주적 이행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투쟁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도자들은 사실상 살리나스 분파와 연계되어 있으며, CTM-CT 대 UNT라는 대립은 체제 내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CIPM은 UNT나 다른 그룹들과의 전술적 동맹은 지지하지만 조직적인 통합은 반대한다. 본문으로 23) 2001년 1월에 SUTERM과 SNTE의 전국지도부 선출을 위한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치러졌고, 이 때 새 대통령 빈센트 폭스는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노조 관료들을 지지했다. 본문으로 참고문헌 Banamex-Accival (Banco Macional de M Xico y Acciones y Valores) 1998a Examen de la situaci n econ mico de M xico. Mexico City 1998b M xico social: 1996-1998. Mexico City Banco de M xico 1998 Indicadores econ micos. Mexico City INEGI (Instituto Nacional de Estand sticas, Geograf a e Inform tica) 1997a Anuario estad stico 1996. Mexico City: Secretar a de Programaci n y Presupuesto. 1997b Cuentas nacionales de 1996. Vol. 1. Mexico City: Secretar a de Programaci n y Presupuesto. 1998a Cuaderno de informaci n oportuna regional: Primer trimestre de 1998. Mexico City: Secretar a de Programaci n y Presupuesto. 1998b Encuesta de ingreso gasto de 1996. Mexico City: Secretar a de Programaci n y Presupuesto. 1998c Indicadores de empleo y desempleo enero de 1997. Mexico City: Secretar a de Programaci n y Presupu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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