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노조, 왜 문제인가 민주노총과 산하 각 산별 연맹들은 산별노조 건설을 최우선의 조직적 과제로 상정하고 조직재편을 위한 논의를 강력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산별노조 추진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논의되어 왔지만, 산별노조 추진 흐름은 최근 더 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산별노조 논의가 불붙는 데는 (아마도 추진주체들 대부분은 더 거창한 이유를 말하겠지만) 2007년부터 기업단위의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는 등 노동관계 제도의 변화가 임박했다는 점이 실상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현상적인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른바 '87년 노동정치체제'라 불리던 특정한 노동정치체제가 체계적인 위기에 처했으며 전화의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1) 2007년 변화하는 법·제도도 그러한 압력의 일환이며, 당장 올해 하반기 '노사관계선진화방안'(이른바 노사관계로드맵)에서 다시 다루어지게 되어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주요 정치세력들은 모두 '현재의 체제'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각자가 제기하는 해결의 방안은 다르지만, 그 문제들의 해결 과정에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조직의 변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동의가 형성되고 있다. 최근 금속연맹 선거와 같이 좌파와 우파의 불안정한 동거가 가능했던 정세적 배경도 여기에 있다. 모든 정치세력이 합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어쨋든 산별노조 건설'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상급단체를 중심으로 한 일정박기식, 형식적 조직통합 방식의 산별전환 드라이브라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산별노조 논의에 있어서는 '87년 노동정치체제'의 위기라는 것이 현시기 노동조합 운동의 위기와 노동관계 제도의 전반적인 위기를 의미한다면, 산별노조라는 특정한 노조 조직재편 전략에 대한 논의 이전에 위기의 노동자운동이 "어떻게 전화해야 하는가?"의 질문이 필요하다. 노동자운동 전화의 방향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하며,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쟁점은 이 속에서 하나의 하위범주로 지정되어야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산별노조 건설이 아니라 노동자운동의 전화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과제들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전략을 둘러싼 선별노조 건설의 쟁점에 대해 논의하자. 산별노조와 기업별노조 산(업)별노조(industrial union)는 같은 종류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 의하여 직종과 기업을 초월하여 조직된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의 초기형태인 직업별 조직형태를 취하지 않고 직종은 차이가 있더라도 하나의 사업장,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한다는 점에서 직종을 초월한다. 자본의 구획에 따라 묶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필요에 따라 묶인다는 점에서 사업장을 넘는다. 이와 함께 일반적으로 노조의 문제의식, 투쟁과제도 사업장을 넘어 산업과 계급 전체로 확대되는 데 유리하다. 남한의 기업별노조가 조합원 가입에 있어서 기업의 취업한 노동자만으로 구성되고, 기업 내에서 정규직 노동자를 배타적인 가입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해고자 혹은 해당 산업에 종사했던 실업자, 취업 대기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조직형식의 측면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광범위한 단결에 보다 유리하다. 남한의 노조는 한국전쟁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모두 파괴된 가운데 대한노총 산하로 조직되었다. 1961년에 건설되어 대한노총을 이은 한국노총은 1964년 노동법 개정을 거쳐 형식적으로는 산별노조로 조직되었으나 실질적인 운영은 기업별노조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산별노조 체제는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애초 한국노총이라는 조직자체가 5·16 쿠데타 직후 모든 노조연맹을 해체한 가운데 중앙정보부가 재조직한 것이었다. 조직체계와 무관하게 사용자와의 단체협상(단협)은 기업 노조(당시 조직체계에서는 분회) 수준에서 거의 이루어졌고 산업별 교섭과 투쟁은 부재한 반면, 산별 조직은 분회 해산권을 가져 민주노조를 탄압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었다.2) 이후 1980년 노동법 개정은 기업별노조 체제를 다시 복귀시키면서 노조운동의 기업별 분할을 강제했다. 이는 1970년대 말부터 다시 분출하는 노동자운동을 분할, 노조간 연대를 봉쇄하기 위한 조치로서, 이른바 '노동계 정화지침'과 함께 수행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제3자 개입금지 등 법적 제도적 요인, 기업별 노조를 넘어서는 연대 차단과 상급단체에 대한 불인정, 가혹한 탄압 등의 영향으로 기업별 노조가 관행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때로는 산별노조 형태로 때로는 기업별 노조 형태를 강요했다. (오히려 정권과 자본에게 있어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정세에 종속된다는 점.) 그러나 1987년 이후 노동현장의 직접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업별 노조 형태는 단일한 작업장을 중심으로 직접민주주의가 항상 가능하도록 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노조의 의사결정이 작업장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다른 고려 사항이 없다는 점에서 지도부 소환, 협상안에 대한 총회 등 직접민주주의 요소들이 제도적인 수준으로까지 강화되었다. 또한 역설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노조의 부재는 국가 차원의 코포러티즘 형성에 난점으로 작용한다. 기업 내 쟁점에 노조가 몰두하면서 코포러티즘적 제도 형성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 노조의 교섭력보다 기업의 지불능력이 임금, 노동조건 결정의 중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이른바 '종업원의식'과 상호작용하고 노동자 대중의 시야는 개별기업 내에 제한되었다. 임금단체협상(임단협)의 적용범위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기업종업원, 노조가입 대상인 정규직 직원 내부에만 적용된다. 특히 제3자 개입금지의 영향 등으로 기업별 노조 외부와의 연대는 항상 제한되었는데, 단위 노조 외곽의 다른 노조, 운동단체와의 연대가 제한되면서 노조의 경제주의가 심화된다.3) 또한 이러한 체제는 대공장 정규직--중소 영세 비정규직의 분할로 발전해갔다. 대공장 노조는 자신의 투쟁력과 함께 독점자본의 지불능력 덕분으로 높은 임금 인상률을 쟁취했으나,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조의 경우 기업별 노조로는 조직화도 힘들뿐더러 투쟁을 통해 많은 성과를 얻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사정은 89년 이후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심화된다. 산별노조 추진, 현재의 의미 민주노총은 2005년 정기대대에 제출된 사업계획 중 산별노조 건설계획으로 ①산별노조 전환 및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②산별 연맹 통합재편, ③산별 교섭 쟁취와 산별 공동투쟁, ④ 2007년 이후 대산별 노조 건설 본격화 및 복수노조 시대 대응, 1국1노총 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시기의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당위적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①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대응, ②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대응 1 : 비정규직화/사회양극화에 대한 대응, ③신자유주의공세에 대한 대응 2 : 노조 무력화대응, ④복수노조허용 /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등의 변화에 대한 대응과 같은 것들이다.4) ①~③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④가 민주노총이 2007년이라는 특정 시한까지 산별노조 건설 시한을 설정하는 이유일 것이다. 민주노총의 제 정파들은 산별노조 건설이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합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는 보다 광범위하게 노동자운동의 위기, 노동자운동에 대한 제도들의 위기이며 이 위기를 불러온 자본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87년 노동체제'의 위기로도 불리는 이 위기에 대해서, 정부, 자본과 노조운동의 정치세력 등 여러 주체들은 각자 제시하는 과제 혹은 쟁점들은 ①사회적 합의기구 구성, ②복수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 노사관계선진화방안(노사관계로드맵), ③비정규법안 + 정규직유연화(노사관계로드맵), ④산별노조 전환과 산별교섭, ⑤1국1노총(양대 노총 통합) 등 다양하다. 현재의 산별노조 전환의 흐름은 ①~⑤까지의 각 주체들의 대응과 함께 종합적으로 평가되어야하고 각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트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특히 정부 내 자유주의자들과 노조운동 안의 우파는 유럽식의 '민주적 코포러티즘' 구조를 지향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권도 노동자 운동의 관리차원에서 (실현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 노동연구원, 노동교육원 등을 통해서 이러한 모델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는 산별노조 전환은 애초부터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전후의 특수한 케인즈주의적 타협과 냉전 시기 반공노조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남한에서 그대로 가능할 수 없다. 이른바 '87년 노동체제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노동자운동의 위기의 남한에서의 현상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이 위기에 대한 나름의 체계적인 대안인 셈이다. 급진적인 노동자운동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의 불안정화와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자신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 속에서 조직적 혁신과 정치/이념적 혁신 과제가 동시에 제기된다. 산별노조와 관련된 쟁점은 주로 조직적 혁신의 쟁점과 연관되어 있으나 정치/이념적 혁신의 과제와 결합한 전체적인 전략 속에서 논의되지 않으면 조직형식적 공론에 그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에서 제기되어온 쟁점들 산별노조 건설에 제기되는 쟁점에 대한 논쟁은 핵심적인 조직논쟁이라는 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화의 역사와 함께 계속 이어져왔다. 과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의 주체들도 전노협이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과도기적 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고 1992년 이후 전노협 조직발전논쟁(조발논쟁)과 함께 산별노조는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민주노총 건설과 산별노조 건설 경로를 중심으로 시작된 당시 논쟁의 구도는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를 강화하고, 전노협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단결시키고 그 성과를 토대로 업종분과를 산별연맹으로 발전시키자고 했던 전노협 1안과, 전노협의 주도성에 집착하지 말고 전노협 미가입 중간노조를 폭넓게 포괄하는 민주노조 진영의 총단결 조직을 조속히 건설하자는 전노협 2안 사이에서 형성된다. 전노협의 조발논쟁은 1987년 이후 지역연대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폭넓게 단결하여 즉각 대산별로 조직을 건설하자는 입장과 업종간 연대의식과 동질성을 살려 단계적으로 업종을 중심으로 한 소산별노조 조직을 우선 건설하자는 입장 사이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전노협 사업장이 제조업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금속산업연맹 건설 논쟁으로 이어진다. '대산별론'은 1987년 이후 지역차원의 활발한 연대운동이 보여주듯이 이미 업종별 차이를 넘어서는 실천의 성과가 존재하므로 이를 바탕으로 대산별을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건설은 대산별 건설과 함께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시기가 늦어지더라도 전노협을 구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단결해야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서 '소산별론'은 동질성이 높은 업종끼리 소산별(업종) 조직을 구성하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대산별로 나가자는 것으로, 조선, 자동차, 금속일반의 세 업종의 소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이 업종별 단위를 산별조직의 골간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 입장은 민주노총을 가급적 빨리 건설할 것을 요구한다.5) 이러한 논쟁은 이전 시기의 전노협 조직발전 논쟁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후에도 금속산별노조 건설, 공공산별노조 건설 논쟁 등 대상과 방식을 변주해가며 유사한 구도로 반복된다. 이러한 논쟁 과정에서 제기되어온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자. o 산별교섭과 산별투쟁 우선 "산별노조의 필요성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노동조합=교섭조직'이라고 보고 산별노조는 산별교섭이 핵심이라는 입장은, 조직을 확대할 경우 이에 따라 조직의 역량이 확대되므로 산별로 뭉치자고 주장한다. 교섭을 중시하는 경우에는 산별노조의 핵심이 산별교섭인 만큼 이에 걸맞는 산별교섭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몰두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논자들이 산별교섭이 교섭비용을 줄인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산별교섭 실현을 위해서라도 노사정 사회적 교섭이 필요하며, 산별교섭과 짝을 이루어 진행되어야한다고 보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이에 대한 비판은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의 확대라는 점에서 산별노조를 사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산별교섭만 놓고 본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한데, 남한의 자본가들이 독일과 같이 산업별로 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산업별로 보다는 재벌기업별로 구획되어 있어 기업별 지불능력에 따른 교섭이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산별노조처럼 단일 조직을 구성한 후에도 내부에 상이한 몇 개의 교섭질서가 가능한 것이라면 산별노조 건설이 교섭구조의 실현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산별교섭을 강조하는 입장은 1국1노총 주장으로도 연결된다. 진정한 산별교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1산업1노조, 1국1노총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특히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경우는 꾸준히 1국1노총을 주장해왔다.6) 이후 사회적 교섭, 산별교섭을 위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제기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산별교섭을 둘러싼 쟁점은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투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는 쟁점으로 연결된다. '산별교섭 쟁취투쟁'이 쟁점이다. 1998-99년 금속연맹은 산별노조 건설투쟁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면서, '기필코 산별'을 기치로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서 별도의 투쟁으로 '산별교섭 쟁취'를 내걸고 연맹지도부가 삭발/단식 투쟁을 전개한다. 이는 오히려 당시 쟁점이던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한 투쟁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보건의료노조의 2004년 투쟁도 산별교섭 쟁취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산별교섭에 대한 집착은 보건의료 산별협약 10장2조와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10장2조는 산별협약을 최저기준이 아니라 지부단협에 대해 우선 적용하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대병원 지부 등 일부지부의 임단협이 하향평준화되는 효과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별협약은 지부의 투쟁과 이를 위한 교섭권, 쟁의권을 억압/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우연한 실수는 아닌데, 자본가들이 산별교섭에 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단위 사업장별 교섭비용의 절감과 통제에 있기 때문이다.(노조 측에서도 교섭비용 절감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산별노조로의 단결이 '투쟁'을 통해야 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정치세력이 동의하지만 과연 어떤 투쟁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것이다. 2005년의 경우에도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는 사용자단체 구성 등 교섭상대 구성과 관련해서도 다시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는데, 투쟁의 요구가 다시 '산별교섭 쟁취'라는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한편, 2006년을 예상해보더라도, 민주노총이 제시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 사회적 교섭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조직될 경우 이를 매개로 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은 사회적 교섭에서 산별교섭으로 이어지는 교섭구조 구축과 연결될 수 있다. o 대산별노조, 소산별노조, 그리고 건설의 경로와 조직운영의 방식 당면한 산별노조 건설이 금속단일노조, 공공단일노조 등 대규모로 구획되어야한다는 입장과, 보다 세분화된 산업 혹은 업종이어야 한다는 입장은 전노협 조직발전 논쟁에서부터 제기되어 왔다. 당면한 산별노조 건설이 세분화된 산업 혹은 업종을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입장은 대산별노조로 발전해야한다는 지향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당면과제'의 성격, 단계론적 성격을 강조해왔다.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도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업종별 이해'라는 일종의 경제적 이해가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쟁취하는 실리적 조직형태를 긍정한다. 이는 산별교섭에 있어서도 업종단위로 조직을 건설해야만 이에 따라 사용자단체를 구성하고 산별교섭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산별교섭을 중시하는 입장이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를 옹호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이 업종별로 단결해있지 않은 마당에 교섭을 위해서라도 업종노조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자본가가 뭉치는 '사용자단체 구성'을 노조가 요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쟁점은 건설이후 조직운영의 방식에 있어 지역중심인가, 업종/기업지부 중심인가라는 쟁점과도 연결된다. 산별노조의 발전된 형태가 기업별, 업종별 조직을 유지하지 않고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데는 전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현실론'은 업종과 기업별 질서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기간을 상당히 길게 상정한다. 대산별노조를 주장하는 입장은 이에 비해 업종별 구획을 부차화하고 지역별로 조직 골간을 구성할 것을 제시한다. 산별노조 건설의 일시론, 단계론과도 연결된 이 논쟁은 그러나 금속연맹의 산별노조 전환이 현대자동차노조 등 대기업 노조의 잇따른 투표 부결로 인해 과거와 같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대기업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이 일시적이든 단계적이든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오히려 대기업노조가 산별노조에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이 논란이 된다. 이러한 논란의 과정에서 완성차 노조나 철도, 화물과 같은 운수부문 등 자체만으로 충분히 파괴력 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단위는 자기완결적인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를 구성하려는 경향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능한 단위, 파괴력 있는 투쟁을 할 수 있는 단위들끼리 모이기는 쉽다는 입장이 제시된다. 그러나 그 '파괴력'이 해당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것에 머무를 때에는 기업별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를 조금 더 확장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산업의 파괴력을 활용할 경우 해당 노조들의 경제적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투쟁은 힘을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적 파괴력만을 중심으로 사고할 경우 불안정노동자 조직화 등 기존노조 운동의 혁신과제는 간과될 수 있다. 사회를 바꾸는 변혁투쟁, 정치투쟁도 힘있는 산업만의 파괴력 있는 투쟁이 아니라 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반란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산별노조의 이념이 '완성차 노동자는 하나다'거나 '운수노동자는 하나다'를 넘어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지향을 가진다면 보다 광범위한 단결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실현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고민, 실천과제는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그밖에 총연맹(내셔널센터)의 위상이 전국적 투쟁본부인가, 정책과 대정부 협의를 담당하는 단위인가 하는 쟁점이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은 임금단체투쟁(임단투)은 산별연맹이 담당해야할 과제이지 민주노총이 담당해야할 과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전국 중앙조직은 노동운동의 이념 정립, 사회개혁투쟁과 정책참가를 포함한 정책 제도 개선 활동, 정치세력화 등을 기본임무로 하고, 산별연맹은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을 둘러싼 단체 교섭과 조직확대, 해당 산업에 걸맞는 사회개혁 투쟁과 산업정책 개발 등에 활동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한다.7) 내셔널센터는 사회협약이나 정책참가, 정치세력화를 주임무로 하고 임단투·고용문제 등은 산별노조가 수행한다고 분리하는 것인데, 이러한 관념이 코포러티즘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서 그간 좌파진영은 산별노조의 투쟁을 전국적인 투쟁전선으로 모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내셔널센터는 이러한 방향으로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산별노조의 건설이후 조직운영에 있어서 지부 지회 등 현장민주주의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도 중요한 쟁점이다. 금속노조의 경우 단위 사업장 지회의 파업권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쟁점으로 드러났다. 지난 해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과 서울대병원 지부의 투쟁과 관련된 논쟁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사업장 지회의 파업권이 인정되더라도 산별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협약이 성립된 후에는 지부 파업권이 규약에 있느냐와 무관하게 지회의 독자 투쟁은 억압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산별노조의 운영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된다. 단지 규약에 정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또한 산별노조는 사업집행의 인적, 재정적 역량을 중앙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현장 간부가 부족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장 공동화(空洞化)'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8) 단위노조의 집행간부는 단지 '집행실무자'가 아니라 조직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기되어온 쟁점들에 대한 평가 기존의 여러 쟁점들은 우리나라 노조운동의 지배적 형태인 기업별 노조를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쟁점은 이미 1990년대 초에 대부분 형성되었다. 쟁점은 기존 조직의 구획, 통합 이후의 운영 등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쟁점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산별노조 건설이 주로 기업별 노조 조직간의 통합으로 사고되었기 때문이다. 기업별 노조가 통합하면 그것으로 조직화의 공백은 없을 것이라고 사고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산별노조건설 방식이 주로 존재하는 기업별 노조의 통합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여전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존의 쟁점을 간단하게 기각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며, 여전히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계급적인 원칙에 입각한 입장이 있어야한다. 조직통합을 넘어서는 노동자운동의 전화에 대한 노력이 있어야 대기업노조의 산별노조 전환 실패가 곧바로 '산별노조실패 = 노동자운동혁신의 실패'라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주로 '대공장 이기주의'라고 불리는, 대기업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할 수 없는 이유들을 제거하는 노력도 가능할 수 있다.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중심으로 형성된 쟁점은 조직형식적 논쟁으로 전개될 뿐 아니라 기존의 기업별 노조 중심의 조직화 공백을 간과할 수 있다. 이미 노동의 불안정화 속에서 기존의 기업별, 정규직 중심의 노조운동은 급격하게 실리적으로 변화했으며, 불안정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왔으나 이를 조직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이후 노조가 몰락한 중소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등 불안정노동자, 여성노동자 조직화는 조직통합을 중심으로 한 논쟁에서는 부차적으로 취급된다. 불안정노동자와 여성노동자 조직화의 문제는 산별노조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한 여러 수식어 중 하나로 제시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공세와 노동의 불안정화, 기존 노조운동의 이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함께 1990년대에는 미처 사고하지 못했던 노동자운동 혁신의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처한 상황과 노동자 대중의 존재방식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변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쟁점들이 제기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의 입장을 내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한 분석과 이에 대한 대안이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과제는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투쟁,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 복구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주로 쟁점이 되어온 것들은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혁신이 요구되는 계급지형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논쟁은 확장되고 새로운 논점을 중심으로 전화되어야한다. 비정규직의 조직화에서, 조직방식, 자원투입, 조직편제의 문제 등이 제기되고,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비정규직 조직화에 있어서 지역일반노조의 성과, 특수고용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수준의 직종노조의 활성화라는 조건은 산별노조 건설에서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넘어서는 쟁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남한에서 민주노총이 이념형으로 생각하는 서유럽형태의 산별노조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별도로 발본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후의 자본주의 황금기에 가능했던 구조라는 점이나 산업적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차이(재벌지배경제구조), 자본가들의 조직구조, 노동조합 출발의 역사적 차이 등을 볼 때 오히려 제3세계의 노조운동 역사,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전평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 자체가 쟁점은 아니었다. 제3세계 국가들도 대부분 이미 초기업 노조 형태를 띄었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겠으나 남한에서 추진되는 것과 유사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방식으로 노조운동의 혁신이 이루어진 경우는 없다. 기존의 노조에서 민주화된 노조 분파가 이탈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는 경우에도, 국가-자본가 단체와 안정적인 교섭권을 확보할 수 있는 '산별교섭'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없다. 전평의 경우에도 강력한 투쟁력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산별 단일노조를 건설했던 것이지 '산별교섭'을 위해서 산별노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잠시 외국과 일제 하, 전평 시기를 검토하자. 역사적 사례들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 추진 흐름들은 많은 외국 사례를 참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례들은 하나같이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에 한정되어 있으며, 역사적인 과정보다는 주로 현재 운영되는 '완성된 모델'을 소개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한 교훈을 얻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산별노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쟁과정에서도 건설 과정이 아니라 산별노조의 운영모델을 소개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의 건설이 단지 조직모델을 수입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산별노조 형태가 특정한 정세에서, 특정한 운동의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한다.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의 한 항목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o 유럽과 미국, 19세기 말 20세기 초9) 1890~1914년 기간 동안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새로운 노조주의가 출현한다. 19세기말 세계경제의 불황과 영국헤게모니의 쇠퇴, 대량생산체제의 도입은 이제까지 조직된 직종별노조를 통해서는 조직할 수 없는 새로운 미조직 노동자 대중인 미숙련, 반숙련 노동자층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은 영국의 신노조주의(new unionism)와 일반노조운동, 독일의 산별노조운동, 미국의 산별노조운동 등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혁명 시기에는 독일의 평의회주의, 러시아의 소비에트 등 대안적 노동자 조직형태가 출현한다. (1)영국: 신(新)노조주의 운동 19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직종을 중심으로 숙련 노동자들이 주도하여 확립되었다. 이때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조합비로 '파업기금'을 확보하고 개별 교섭 과정에서 조합에서 설정한 임금 이하의 노동력 판매를 거부하고 이를 통해 실업 = 파업을 하는 조합원에게 생계비를 지급한다.(클로즈드 샵(closed shop)) 그러나 이들이 조직하지 못하는 새로운 미숙련, 반숙련 노동자층이 등장하는 데, 이들을 조직하는 영국의 신노조주의는 1889년 런던부두파업을 계기로 폭발한다. 부두의 대중적 파업에서 기존 노조에 포괄되지 못한 미숙련, 임시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파업이 승리하고, 이후 미숙련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파업과 조직화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숙련노조도 미숙련 노동자 조직화를 시작하여 철도에서도 1889년 저임금·임시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철도노동자일반노조가 결성되는 등, 이들은 상호부조라는 전통적 노조의 활동을 넘어서는 전투적 노조를 천명하고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투쟁했다. 신노조주의를 주도한 것은 미숙련·저임금·일용직노동자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부문주의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를 하나의 노조로 조직한다는 일반노조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인 조직형태를 넘어 '노동자는 하나다'는 이념적 성격이 운동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일반노조들은 특정 산업에 상대적으로 집중하면서 산별노조 형태를 띄거나 기존의 직종노조와 통합하면서 산별노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의 노조운동의 전통은 업종과 산업을 불문하는 조직형태가 많아 '산별노조'라 부르는 만큼 '일반노조'라 부를 수 있으며 업종별로 무관해 보이는 조직끼리의 통합도 일반적이고, '1산업 1노조' 식으로는 조직되지 않는다. (2)독일의 산별노조운동 독일은 후발 자본주의 주자로서 국가를 중심으로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시행했다. 자본가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은행자본을 중심으로 트러스트, 카르텔을 구성하면서 독점을 심화하고, 기업은 수평적으로 통합되고 자본가들은 국가의 지원아래 산업별로 조직화된다. 이는 독일식의 산별교섭 모델이 가능한 토대가 되는데 노동자의 단결 이전에 자본가의 단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는 19세기 중반, 장인 중심의 노동조합이 있었으나 광범위한 노동조합의 결성 이전에 사회민주당이 우선 활성화된다. 1878~79년의 심각한 경제불황기에 기존 노조조직은 국가의 박해로 거의 파괴되지만, 反사회주의법이 시행된 10여 년 동안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성장하면서 노동자 조직을 확대한다. ('영웅적 시기') 1880년대 독립노조 운동이 재개되는데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다. 1888~9년 전국적인 파업의 물결이 있었지만 여전히 숙련공 중심의 직종노조가 주류였다. 1890~1914년 동안 점증하는 기계화와 노동분업에 따라 전통적인 숙련공은 쇠퇴하고 미숙련·반숙련 노동자가 증가하고 노조는 '산별원리'를 채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직종의 틀을 사실상 넘어서지 못했다. 곧이어 1차 세계대전시기 사회민주당의 전쟁협력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위기에 빠진다. 독일 패전과 함께 독일제국은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되면서 이시기 독일 노동자들은 1919년 독일노총을 결성하고 논쟁은 "전국적 중앙노조 vs 평의회", "산별연맹 vs 직종연맹"의 구도로 진행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광범위한 노동의 탈숙련화는 지체되고 숙련 노동자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가운데 직종노조 형태가 계속된다. 나치 시기 노동조합의 파괴 이후 현재 형태의 독일의 산별노조는 전쟁 후 재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AFL-CIO와 미군정의 지원을 중심으로 노조에서 공산주의자를 배제(정치적 급진주의의 거세)하고, 현재와 같은 형태의 산별노조 형태가 비로소 정착한다. (3)미국의 산별노조운동 미국 사회는 1865년 남북전쟁이 종식된 후 빠른 산업화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자동화된 생산체제는 미숙련·반숙련 노동자들을 증가시키는 반면 숙련노동자들은 점차 약화된다. 1880년도와 1890년도 불황기 노동자대중의 위기는 1886년에는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 AFL) 건설로 이어진다. 이는 직종별로 조직된 형태(직종별 노조주의(craft unionism))로 숙련노동자들만 가입되었고, 반숙련 혹은 미숙련 노동자, 그리고 흑인노동자들은 가입하지 못했다. 1905년에는 산별노조를 추구하는 생디칼리즘 경향의 노동자조직인 세계산업별노동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 IWW)이 조직된다. 그러나 1차 대전 중 탄압이 가중되고 1918년에만 100명 이상의 IWW 지도자들이 반역죄로 투옥되면서 1924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조직이 붕괴한다. AFL의 조합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여전히 직종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도입에 따라 광범위한 반숙련·미숙련 노동자, 즉 기존의 숙련 직종 노조로는 조직할 수 없는 노동자대중이 중가한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많은 반숙련·미숙련 노동자들이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 : CIO)로 조직되었으며 산별 노조주의가 주류의 움직임으로 되어간다. 약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1934∼1938년 사이에 CIO로 조직되었다. CIO는 주로 대규모 공장(주로 자동차 산업)이 집중된 지역에서 성장했다. CIO의 전략은 낡은 직업별노조와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로운 형태의 전국적인 산업별노조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CIO 지도부는 AFL 내부의 개혁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력한 조직화를 진행했다. 한편,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이 도입된다. 뉴딜 정책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향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데, 이에 따라 노동자운동에 유화적인 제도가 허용된다.(와그너법) 그러나 대공황 종식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탄압이 시작된다. 1947년 태프트-하트리법을 통해 노동분쟁에 금지명령제도 부활, 노동조합의 부당노동행위가 규정되고, 클로즈드 샵이 금지된다. 이러한 법안 통과와 조직률 정체, AFL의 산별노조화, CIO 내부의 공산주의자 축출 속에서 AFL과 CIO는 1955년 통합한다. 1959년 제정된 랜드럼-그리핀법은 노동조합 내부의 재정을 국가가 감시하고 사용자로부터 교섭단체로서의 승인을 목적으로 한 피케팅 행위를 제한하는 등 노조활동을 제한한다.(최근 남한에서 노사관계선진화 방안 등 법·제도 개편과의 유사성에 주목할 수 있다.) 이들 나라의 사례를 보면 산별교섭과 관련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영-미의 경우에는 자본의 수평적 통합이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식' 산별교섭-산별협약은 정착되지 않는다. AFL-CIO도 독일식의 산별교섭을 시도했지만 사용자단체를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독일의 경우에는 자본이 산업별로 수평적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산별교섭-산별협약이 가능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는데 독일식 독점자본은 코포러티즘의 물질적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o 라틴아메리카, 1970년대 이후 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의 노조운동 남한은 세계자본주의의 반주변부로서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보다 남미 등 신흥공업국의 사례와 유사할 수 있다. 특히 어용노조의 민주화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운동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사례도 주요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들 국가의 새로운 노조운동은 국가의 전국적인 노동통제에 저항하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탈집중화 경향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에서 전형적인 산업-지역별 조직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관료화·어용화 되었으며 이에 대항하는 운동은 공장단위의 노조대표 선출, 공장위원회 건설 등을 중심으로 했는데, 이는 사업장 단위 조직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다. 남한의 경우에도 사업장 조직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사업장 단위의 민주화를 통해서 어용적인 전국조직을 극복하고 새로운 단결을 모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멕시코의 경우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사실상의 부속조직으로 노총(CTM)이 존재하고 강력한 코포러티즘 정책을 통해 노동조합을 노무관리기관으로 유지해왔다. 1970년대 이후 독립노조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전자산업노조 내 민주파, 자동차 산업노조(기업별) 등의 독립노조운동이 있었으나 산업적 단결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브라질은 국가가 관리하는 어용노총 체제에서 197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의 성장과 경제위기라는 정세에서 노동자운동이 폭발한다. 1978~80 대파업투쟁, 상파울로 주변의 ABC 공단의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대파업 진행은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을 형성한다. 대파업 이후 노조의 민주화는 사업장 단위에서 노조반대파, 공장위원회, 전투적인 노조의 공장대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어용적인 산별노조에 대항해 공장단위로 구성된 공장위원회는 민주적인 노조를 촉진한다. 이후 별도의 공장조직을 구성하는 것보다는 노조의 공장지부를 장악하는 것으로 전개되지만 이들은 이후 독립노조로 발전하거나 노조를 민주화한다. 이들은 1981년 브라질의 민주노총이라고 할 수 있을 노총(CUT)을 결성한다. 사업장 단위의 전투성과 직접교섭 전략이 성공하면서 어용노조를 압도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CUT는 자신들이 만든 노동자당(PT당)과 함께 지속적으로 우경화 되었다. CUT 자체가 관료화되고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는 측면이 클 뿐 아니라, CUT의 이전 간부들이 주로 노동자당에서 이후 의회 선거의 후보자에 포함되어있거나 입각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PT당과 결합하면서 제도화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독특한 코포러티즘 전통으로 페론주의가 존재했다. 노총(CGT)은 노동관료가 노조를 장악하고 국가의 대해 협조하는 대가로 일정한 권력과 고용안정과, 사회보장을 약속 받았다.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의 교체 과정에서 노조의 분열과 통합이 진행되고 여전히 CGT가 주도하였지만, 1969년 산업도시인 코르도바의 지역총파업을 계기로 노조민주화 투쟁이 강화된다. 여기서도 공장단위의 투쟁적인 지도부를 구성이 활성화된다. 1976년 군사정권 하 민주적인 노조활동가의 대량 살해되지만 경제위기와 고용불안 속에서 노조는 다시 급진화 되고 노총은 몇 개로 분열했지만 공장단위에서는 '조합간 조정위원회'를 통해서 사업장단위의 투쟁 전개했다.10) 라틴아메리카 사례에서는 노조민주화의 과정에서 사업장 단위 조직이 갖는 중요성이 확인된다. 또한 브라질과 같이 '민주노조'가 초역사적으로 민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o 일제하 노동운동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일제하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산별노조 건설이 단지 '조직통합'의 과정이 아니며, 동시에 현장을 강화하는 노조운동의 재편과 혁신의 과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30년대 산별노조운동을 먼저 살펴보자.11) 일제하 노동조합은 초기에는 지역별(일반)노조로 결성되었다가 지역별 업종노조로 분화한다.(대표적으로 고무업종, 섬유업종 등) 1920년대 중반부터 직업별노조를 산별노조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조선공산당의 지도방침에 따라 서울에서 인쇄노조를 출판노조로 변경하는 등 각 지역별로 산별조직화가 진행되었다. 산별노조 방침은 이후 1930~31년 사이 전국 각지의 노동단체를 통해 실현된다. 각 지역에서도 인쇄출판업이 산별노조 건설을 선도하고, 다른 부문으로 확대된다. 경성 섬유공조합, 출판노조, 용산의 금속노조, 인천의 금속노조, 항만노조, 함흥의 화학공조합, 부산의 부두노동자조합, 원산의 운수노동자조합 등이 이때 결성된다. 이때의 산별노조란 지역별로 구성된 산별조직을 의미하는데, 대도시에서 시작되어 중소도시로 파급되어 간다.(이에 비해서 현재에는 주로 전국조직만을 산별노조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중소도시의 경우 영세업종의 통합으로 산별노조 건설이 힘든 경우 일반노조 형태인 '합동노조'로 조직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러한 산별노조 운동은 1920년대 중반기의 일시적인 침체를 극복하면서 조직을 쇄신-부활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의 산별노조 조직방침은 지역내 각 공장에 공장반을 두어 노조의 분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 내 산업에 따른 산별노조 지부를 설치한 후, 이를 전국적으로 통일한다는 방침이었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 흐름과 동시에 공장 내 공장반 설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공장반 설치는 활동과 조직의 중심이 공장과 사업장 현장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했다. 노조활동에 있어서도 보다 현장에 밀착한 생생한 요구를 수립했는데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현장을 강화하는 작업을 동시에 의미했다는 것이다. 산별노조 재편과정에서 노조 내에 부인부, 청소년부, 실업부를 조직하여 미숙련·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된다. 이러한 산별노조 시도는 아직 미약하지만 1930년대 일본의 중화학공업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군수부문을 중심으로 노동자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자본주의 발달과 이른바 산업합리화 정책의 진전으로 숙련노동의 쇠퇴와 미숙련 노동자의 증가, 실업자 증가, 여성과 청소년 노동이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의 변화, 노동자 증가는 전면적인 수준이라 보기는 힘들었으며 당시의 노동운동가들이 산별노조를 지향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강했다.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의 지침이 산별노조를 지향하고 있기도 했을 뿐더러, 전국적 차원의 단일조직을 조직하여 전국적 연대와 단결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 투쟁을 지향한 것이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노조운동으로 전환한다. 혁명적 노조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산업별 조직방식을 채택.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인 공장위원회를 강화하고 산별노조 지부 구성, 각 산별노조 지부의 지부협의회와 이를 바탕으로 한 도 협의회, 전국 중앙협의회를 구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해방이후 노동자운동은 1945년 11월 1~4일 집중적으로 16개 산별노조를 결성하고 11월 5~6일 전국노동조합평의회를 건설한다. 일제 시기부터, 혹은 해방직후 급속히 확대된 직장별, 직종별, 산업별 형태의 각종 조직이 지역산별노조로 결집하면서 전국적인 산별노조 체계를 급격하게 구축된 것이다. 16개의 산별노조로 조직되었고 산별노조는 -- 지역별 산별[지부] -- 공장[분회] -- 직장[반] -- 5명 단위[조]로 구성되었다. 지역일반노조 형태의 지역합동노조는 지방평의회에 직속으로 가입한다. 지역에서는 전평 전체의 도평의회가 구성되고 여기에서 산별지부가 결합했다. 이러한 공식 골간 외에도 현장의 통일전선 강화를 위해 공장(관리) 위원회, 자치위원회, 직장위원회, 투쟁위원회 등이 활발하게 결성된다. 전평의 강력한 활동은 중앙집권적 산별노조를 통한 지도도 중요했지만 강력한 현장조직력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현장 기초단위가 구성되어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전평이 계급적 원칙에 입각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공산당 세포모임이 사업장마다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산별노조 건설이 현재 추진되는 방식처럼 반드시 전국조직을 상층에서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산별노조 건설이 오히려 현장을 강화하는 의미를 가지고 추진되었다는 점, 산별노조의 힘은 '산업별 조직형태' 이전에 강력한 현장조직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기되어야할 쟁점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유럽이나 미국, 1970년대 이후의 제3세계의 사례 모두는 노동조합 조직의 심대한 변화(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는 계급구조의 변화와 이에 따른 계급투쟁의 전환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노동정치체제의 동요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재편 방향은 노동자운동의 혁신 혹은 실패를 반영하는 것일뿐더러 그 재편방향 자체가 계급투쟁의 장소가 된다. 남한 노동자운동에서 위기의 성격이 복합적이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에 대한 대안도 여러 가지로 제기되고 있다. 노동자운동의 재편방향은 이후 더욱 뚜렷하게 분기할 것인데, 이러한 분기는 당분간 '산별노조 건설의 쟁점'이라는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쟁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이 초역사적인 과제는 아니라면 지금 시기에 노동자운동에 요구되는 과제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발전 전망이 세워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주체 형성을 위한 과제의 하위과제로서 조직형태의 재편이 제기될 수 있다. 산별노조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조직형태의 재편의 일부분인 것이다. 기존의 기업별 노조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기 위한 효율적인 조직화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 형태를 실현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그 해답이 곧바로 현재 논의되는 형태의 산별노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신자유주의 하 노동자대중에 가해지는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압력에 대응하는 적합한 조직형태는 무엇인가라는 방식의 질문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쟁점이 구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노조운동이 사업장 단위의 전투적 경제주의로 제한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업을 넘어선 단결의 확대와 함께 노조운동의 사회운동적 강화를 위한 조직의 혁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운동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산별노조를 통해 '사회공공성' 요구를 제기하고 이를 '사회적 교섭기구'에서 논의하고, 또 이를 압박하기 위해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배치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노조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조건 자체의 변화(그리고 장기적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의 경향)가 필요한데, 이는 지역을 중심으로 '취업한 노동자'에 제한되지 않는, 기층민중에게 조직적으로 열려있고 활발하게 연대하는 구조로 재편되어 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조직적 과제를 넘어서 노동자 운동의 혁신을 위한 과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한다. 특히 노동자 운동이 축적조건(객관적 조건)과 이념/조직(주체적 조건)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이념'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조직적 재편전망과 아울러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이를 대중운동과 이 이데올로기, 조직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노동자운동의 혁신은 불가능할 것이다.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의 측면만 보더라도 이 과제는 조직확대를 위한 사업은 물론이지만 기존 노조운동의 이념이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에 적합한 내용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50억 기금 모금이나 조직활동가 배치를 통해서도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노조 운동은 이념과 조직을 포괄하는 하나의 '운동'이지 양적 성과를 중심으로 하는 외판사업 비즈니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한다고 할 때, 그러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이를 추진하는 주체들과 타협이 아니라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토론과 실천을 위한 몇 가지 제안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하여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쟁점을 논의해보자. o 산별노조와 지역일반노조 - 비정규직 조직화의 쟁점 지역을 근거지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으로 일반노조가 활성화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지역노조가 지역을 중심으로 단지 조합원을 조직하는 역할을 넘어서, 지역을 운동이 근거지로 복원하기 위한 활동을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지역 일반노조는 산별노조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별 노조 형태로 조직을 유지할 수 없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 불안정노동자에게는 거의 유일한 의미있는 조직형태이다. 산별노조 추진주체들에게도, 여전히 기업별 노조의 통합이라는 것이 주된 관심이기는 하지만 지역일반노조의 고민과 수렴하는 측면이 있다는 데 주목해야한다. 금속노조의 지역지부 건설, 공공연맹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건설 등은 산별노조를 지역적 차원에서부터 일반노조와 유사하게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지역 일반노조 주체들에게 있어서도, 지역 일반노조가 산별노조의 건설과정에서 결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단위도 있는데 이는 산별노조가 일반노조를 품어 안을 만큼 충분히 가입대상을 확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정부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공공,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여성 불안정노동자를 확산시키고 있다. '사회적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 불안정노동자들은 불과 수개월 단위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을 조직하는 것은 기업별 노조로서는 불가능할 뿐더러 기업별 노조의 연합형태로서의 산별노조로서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고민들의 진전은 지역을 근거로 하는 불안정노동자조직화에 있어서 산별노조 건설과 지역일반노조가 경향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준다. (조직적 통합을 직접 지향하는 수렴이라기 보다는 노조 조직화의 문제의식과 그 형태가 수렴해간다는 것. 따라서 조직적으로 함께 할 수 있을지 여부는 토론과 함께 주체들의 실천적인 노력, 상호 파괴적인 조직경쟁을 하지 않는 존중과 예의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이 19세기말 20세기 초 직종별노조의 산별노조로의 전환과정이나 영국의 신노조운동에서 일반노조 운동의 활성화, 산별노조의 조직화 병행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산별노조, 일반노조의 건설은 폭발적인 미조직노동자(미숙련노동자)들의 조직화 과정에서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조직적 진출이 새로운 조직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현재 남한에서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통한 산별노조건설이라는 현재의 시점에 미조직노동자(비정규직노동자)들의 진출이 아직 기존의 노조를 압도, 상대화하고 새로운 조직을 출현시킬 만큼 폭발적이지 않다. 따라서 결국 기존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결의로 산별노조를 건설해야한다는 난점이 발생한다.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끊임없이 이미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난점은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이 가지는 한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조직화에 있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의 중요성에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또한 조직된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노동자대중의 진출, 새로운 운동의 개시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라는 과제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내용과 형태로 진행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o 지역중심, 지역을 골간으로 하는 산별노조의 건설 지역을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실질적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노조가 현장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가운데에서도, △사업장을 넘어서는 공동투쟁이 가능하며, △지역에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불안정 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고, △지역의 민중운동, 사회운동과 결합할 수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의 골간을 구성하고 지역의 사회운동과 연대하거나, 지역의 광범위한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업별 노조나 그 연합체제로서 연맹, 그러한 수준을 유지하는 산별노조로는 불가능하다. 앞서 예를 든 '사회적 일자리'의 불안정노동자들의 경우와 같이 새로운 형태로 계속 확산되는 불안정노동자를 '업종노조'나 '업종을 골간으로 한 산별노조' 형태의 조직이 조직대상으로 포괄할 수 없으며, 각 업종조직의 지역조직의 규모 상 조직화와 투쟁을 책임질 수도 없다. 산별노조가 단지 특정 산업에 제한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산업적 이해'라는 것을 특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업장을 넘어서는 지역의 사회운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대상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노동-사회운동단체에도 열려야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어야함은 물론이지만, 노동자 회원으로 구성된 노동단체는 그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조합'의 하나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유기적으로 조직적 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복수노조 제한 규정이 사라진다면 법적으로도 조합원의 이중가입도 가능해지고 사업장단위를 넘어서 노조의 유연한 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단지 조합원 가입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직적 결합과 함께 이들 사회운동이 제기하는 과제를 산별노조의 운동의제로 결합할 수 있어야한다. 한편, 이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골간 구성을 위해서는 '대산별' 형태가 유리하다. 업종노조의 형태로는 규모의 한계 때문에 지역별 골간을 구성하고 운영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운동과제, 조직화 대상을 일반화할 수도 없다. 대산별 형태로 조직을 확장하는 것을 통해서 노조의 이해를 허구적인 '산업별 이해'라는 방식으로 협소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을 크게 만든다고 조직의 투쟁과제가 자동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계급적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운동주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역의 연대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속노조는 지역을 골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지역에서는 산별노조로 재편되면서 금속노조 안의 단결은 증진되었을지언정 지역연대에는 더 소홀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산별노조가 '무슨무슨 노동자는 하나다'는 식의 조직이 아니라 '노동자는 하나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형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계급형성을 위한 투쟁의 과제들이 있고, 이를 운동의 요소로서 끊임없이 실현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지역의 투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산별노조를 지역을 중심으로 강화하는 과제도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조직도'를 멋있게 그려내는 것과는 또 다른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o 노동자운동의 전화를 위한 이념적 전망의 수립 산별노조 형태이든 일반노조 형태이든, 조직형태의 변화를 통해서만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 다만, 조직형태의 변화가 맹아적인 행태일지라도 운동의 특정한 지향을 표현하고 그것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맹아적 지향을 추출-강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이념적 전망을 좌파들은 '계급적 산별노조'라는 방식으로 추상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즉, 산별노조의 건설과정이 노동자운동의 '계급성'을 다시 강화하는 과정이 되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계급성'이라는 원칙은 여전히 추상적일 뿐이라는 점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명료한 정치적, 이념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특히 정치적 이념적 전망의 수립은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재편과정과 분리된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결합되어야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대중 이데올로기로 결합하지 않고서는 이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조직적 재편조차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산별노조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어야한다. 산별노조가 현재 남한 노조운동의 주류형태인 기업별 노조보다 나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결의 확장이라는 것은 항상 노동자운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적으로는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노동자 연대의 강화와 계급 형성의 과제를 수행하기 유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산별노조 건설은 당면한 노동운동이 혁신을 위해 추진되는 전략의 일부이며, 산별조직 건설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은 다시 한번 강조해야한다. 그것을 간과하는 순간 산별노조만 건설하면 노조운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처럼 부풀리는 이른바 '산별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은 낮은 조직률의 고착과 노조운동의 대표성의 위기, 법·제도의 불리한 변경에 따라 수세적으로 제기되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몰두는 밀리고 밀려서 진행되는 노동자운동의 퇴각에 대한 사후적인 반응, 그것도 한발 더 물러선 퇴행적인 반응이 될 가능성도 크다. 보다 공세적으로 노동자운동 혁신의 과제를 실천하는 투쟁에서, 하나의 과정으로서만 산별노조가 고민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새로운 조직의 전면적인 건설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 ①새로운 미조직 노동자들의 진출 ②새로운 급진적 이념의 수용 ③새로운 조직형태를 통한 단결 폭의 확대 ④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장 현장의 강화 이후 남한에서 산별노조 건설 과정을 단지 기업별 노조의 통합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동운동의 혁신의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요소들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과정은 노동자운동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조운동의 체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이다. 따라서 여러 운동 주체들이 이러한 변화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는가에 따라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노조운동의 성격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된 쟁점을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노력은 특히 중요하다. 지역을 중심으로 불안정노동자를 광범위하게 조직하기 위한 조직적 근거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노력이 관건이다. 지역 중심의 운동이 필요하다거나 불안정노동자 조직화가 의미있다는 말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주장해도, 현실에서 그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물질적으로 산별노조 건설 흐름이 지역강화와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의 과제를 받아안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노조 조직들도 계급형성의 과제를 함께 수행하면서 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진출이 활성화된다면, 어쩌면 산별노조에 관련된 이상의 쟁점들은 모두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다. 산별노조 건설의 쟁점을 넘어, 새로운 노동자 대중의 진출을 촉진하고 계급형성의 과제를 실현하는 노동자운동을 재개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비판과 실천을 조직하자.
산별노조, 왜 문제인가 민주노총과 산하 각 산별 연맹들은 산별노조 건설을 최우선의 조직적 과제로 상정하고 조직재편을 위한 논의를 강력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산별노조 추진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논의되어 왔지만, 산별노조 추진 흐름은 최근 더 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산별노조 논의가 불붙는 데는 (아마도 추진주체들 대부분은 더 거창한 이유를 말하겠지만) 2007년부터 기업단위의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는 등 노동관계 제도의 변화가 임박했다는 점이 실상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현상적인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른바 '87년 노동정치체제'라 불리던 특정한 노동정치체제가 체계적인 위기에 처했으며 전화의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1) 2007년 변화하는 법·제도도 그러한 압력의 일환이며, 당장 올해 하반기 '노사관계선진화방안'(이른바 노사관계로드맵)에서 다시 다루어지게 되어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주요 정치세력들은 모두 '현재의 체제'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각자가 제기하는 해결의 방안은 다르지만, 그 문제들의 해결 과정에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조직의 변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동의가 형성되고 있다. 최근 금속연맹 선거와 같이 좌파와 우파의 불안정한 동거가 가능했던 정세적 배경도 여기에 있다. 모든 정치세력이 합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어쨋든 산별노조 건설'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상급단체를 중심으로 한 일정박기식, 형식적 조직통합 방식의 산별전환 드라이브라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산별노조 논의에 있어서는 '87년 노동정치체제'의 위기라는 것이 현시기 노동조합 운동의 위기와 노동관계 제도의 전반적인 위기를 의미한다면, 산별노조라는 특정한 노조 조직재편 전략에 대한 논의 이전에 위기의 노동자운동이 "어떻게 전화해야 하는가?"의 질문이 필요하다. 노동자운동 전화의 방향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하며,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쟁점은 이 속에서 하나의 하위범주로 지정되어야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산별노조 건설이 아니라 노동자운동의 전화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과제들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전략을 둘러싼 선별노조 건설의 쟁점에 대해 논의하자. 산별노조와 기업별노조 산(업)별노조(industrial union)는 같은 종류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 의하여 직종과 기업을 초월하여 조직된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의 초기형태인 직업별 조직형태를 취하지 않고 직종은 차이가 있더라도 하나의 사업장,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한다는 점에서 직종을 초월한다. 자본의 구획에 따라 묶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필요에 따라 묶인다는 점에서 사업장을 넘는다. 이와 함께 일반적으로 노조의 문제의식, 투쟁과제도 사업장을 넘어 산업과 계급 전체로 확대되는 데 유리하다. 남한의 기업별노조가 조합원 가입에 있어서 기업의 취업한 노동자만으로 구성되고, 기업 내에서 정규직 노동자를 배타적인 가입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해고자 혹은 해당 산업에 종사했던 실업자, 취업 대기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조직형식의 측면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광범위한 단결에 보다 유리하다. 남한의 노조는 한국전쟁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모두 파괴된 가운데 대한노총 산하로 조직되었다. 1961년에 건설되어 대한노총을 이은 한국노총은 1964년 노동법 개정을 거쳐 형식적으로는 산별노조로 조직되었으나 실질적인 운영은 기업별노조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산별노조 체제는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애초 한국노총이라는 조직자체가 5·16 쿠데타 직후 모든 노조연맹을 해체한 가운데 중앙정보부가 재조직한 것이었다. 조직체계와 무관하게 사용자와의 단체협상(단협)은 기업 노조(당시 조직체계에서는 분회) 수준에서 거의 이루어졌고 산업별 교섭과 투쟁은 부재한 반면, 산별 조직은 분회 해산권을 가져 민주노조를 탄압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었다.2) 이후 1980년 노동법 개정은 기업별노조 체제를 다시 복귀시키면서 노조운동의 기업별 분할을 강제했다. 이는 1970년대 말부터 다시 분출하는 노동자운동을 분할, 노조간 연대를 봉쇄하기 위한 조치로서, 이른바 '노동계 정화지침'과 함께 수행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제3자 개입금지 등 법적 제도적 요인, 기업별 노조를 넘어서는 연대 차단과 상급단체에 대한 불인정, 가혹한 탄압 등의 영향으로 기업별 노조가 관행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때로는 산별노조 형태로 때로는 기업별 노조 형태를 강요했다. (오히려 정권과 자본에게 있어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정세에 종속된다는 점.) 그러나 1987년 이후 노동현장의 직접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업별 노조 형태는 단일한 작업장을 중심으로 직접민주주의가 항상 가능하도록 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노조의 의사결정이 작업장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다른 고려 사항이 없다는 점에서 지도부 소환, 협상안에 대한 총회 등 직접민주주의 요소들이 제도적인 수준으로까지 강화되었다. 또한 역설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노조의 부재는 국가 차원의 코포러티즘 형성에 난점으로 작용한다. 기업 내 쟁점에 노조가 몰두하면서 코포러티즘적 제도 형성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 노조의 교섭력보다 기업의 지불능력이 임금, 노동조건 결정의 중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이른바 '종업원의식'과 상호작용하고 노동자 대중의 시야는 개별기업 내에 제한되었다. 임금단체협상(임단협)의 적용범위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기업종업원, 노조가입 대상인 정규직 직원 내부에만 적용된다. 특히 제3자 개입금지의 영향 등으로 기업별 노조 외부와의 연대는 항상 제한되었는데, 단위 노조 외곽의 다른 노조, 운동단체와의 연대가 제한되면서 노조의 경제주의가 심화된다.3) 또한 이러한 체제는 대공장 정규직--중소 영세 비정규직의 분할로 발전해갔다. 대공장 노조는 자신의 투쟁력과 함께 독점자본의 지불능력 덕분으로 높은 임금 인상률을 쟁취했으나,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조의 경우 기업별 노조로는 조직화도 힘들뿐더러 투쟁을 통해 많은 성과를 얻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사정은 89년 이후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심화된다. 산별노조 추진, 현재의 의미 민주노총은 2005년 정기대대에 제출된 사업계획 중 산별노조 건설계획으로 ①산별노조 전환 및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②산별 연맹 통합재편, ③산별 교섭 쟁취와 산별 공동투쟁, ④ 2007년 이후 대산별 노조 건설 본격화 및 복수노조 시대 대응, 1국1노총 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시기의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당위적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①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대응, ②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대응 1 : 비정규직화/사회양극화에 대한 대응, ③신자유주의공세에 대한 대응 2 : 노조 무력화대응, ④복수노조허용 /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등의 변화에 대한 대응과 같은 것들이다.4) ①~③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④가 민주노총이 2007년이라는 특정 시한까지 산별노조 건설 시한을 설정하는 이유일 것이다. 민주노총의 제 정파들은 산별노조 건설이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합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는 보다 광범위하게 노동자운동의 위기, 노동자운동에 대한 제도들의 위기이며 이 위기를 불러온 자본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87년 노동체제'의 위기로도 불리는 이 위기에 대해서, 정부, 자본과 노조운동의 정치세력 등 여러 주체들은 각자 제시하는 과제 혹은 쟁점들은 ①사회적 합의기구 구성, ②복수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 노사관계선진화방안(노사관계로드맵), ③비정규법안 + 정규직유연화(노사관계로드맵), ④산별노조 전환과 산별교섭, ⑤1국1노총(양대 노총 통합) 등 다양하다. 현재의 산별노조 전환의 흐름은 ①~⑤까지의 각 주체들의 대응과 함께 종합적으로 평가되어야하고 각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트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특히 정부 내 자유주의자들과 노조운동 안의 우파는 유럽식의 '민주적 코포러티즘' 구조를 지향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권도 노동자 운동의 관리차원에서 (실현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 노동연구원, 노동교육원 등을 통해서 이러한 모델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는 산별노조 전환은 애초부터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전후의 특수한 케인즈주의적 타협과 냉전 시기 반공노조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남한에서 그대로 가능할 수 없다. 이른바 '87년 노동체제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노동자운동의 위기의 남한에서의 현상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이 위기에 대한 나름의 체계적인 대안인 셈이다. 급진적인 노동자운동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의 불안정화와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자신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 속에서 조직적 혁신과 정치/이념적 혁신 과제가 동시에 제기된다. 산별노조와 관련된 쟁점은 주로 조직적 혁신의 쟁점과 연관되어 있으나 정치/이념적 혁신의 과제와 결합한 전체적인 전략 속에서 논의되지 않으면 조직형식적 공론에 그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에서 제기되어온 쟁점들 산별노조 건설에 제기되는 쟁점에 대한 논쟁은 핵심적인 조직논쟁이라는 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화의 역사와 함께 계속 이어져왔다. 과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의 주체들도 전노협이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과도기적 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고 1992년 이후 전노협 조직발전논쟁(조발논쟁)과 함께 산별노조는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민주노총 건설과 산별노조 건설 경로를 중심으로 시작된 당시 논쟁의 구도는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를 강화하고, 전노협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단결시키고 그 성과를 토대로 업종분과를 산별연맹으로 발전시키자고 했던 전노협 1안과, 전노협의 주도성에 집착하지 말고 전노협 미가입 중간노조를 폭넓게 포괄하는 민주노조 진영의 총단결 조직을 조속히 건설하자는 전노협 2안 사이에서 형성된다. 전노협의 조발논쟁은 1987년 이후 지역연대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폭넓게 단결하여 즉각 대산별로 조직을 건설하자는 입장과 업종간 연대의식과 동질성을 살려 단계적으로 업종을 중심으로 한 소산별노조 조직을 우선 건설하자는 입장 사이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전노협 사업장이 제조업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금속산업연맹 건설 논쟁으로 이어진다. '대산별론'은 1987년 이후 지역차원의 활발한 연대운동이 보여주듯이 이미 업종별 차이를 넘어서는 실천의 성과가 존재하므로 이를 바탕으로 대산별을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건설은 대산별 건설과 함께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시기가 늦어지더라도 전노협을 구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단결해야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서 '소산별론'은 동질성이 높은 업종끼리 소산별(업종) 조직을 구성하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대산별로 나가자는 것으로, 조선, 자동차, 금속일반의 세 업종의 소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이 업종별 단위를 산별조직의 골간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 입장은 민주노총을 가급적 빨리 건설할 것을 요구한다.5) 이러한 논쟁은 이전 시기의 전노협 조직발전 논쟁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후에도 금속산별노조 건설, 공공산별노조 건설 논쟁 등 대상과 방식을 변주해가며 유사한 구도로 반복된다. 이러한 논쟁 과정에서 제기되어온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자. o 산별교섭과 산별투쟁 우선 "산별노조의 필요성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노동조합=교섭조직'이라고 보고 산별노조는 산별교섭이 핵심이라는 입장은, 조직을 확대할 경우 이에 따라 조직의 역량이 확대되므로 산별로 뭉치자고 주장한다. 교섭을 중시하는 경우에는 산별노조의 핵심이 산별교섭인 만큼 이에 걸맞는 산별교섭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몰두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논자들이 산별교섭이 교섭비용을 줄인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산별교섭 실현을 위해서라도 노사정 사회적 교섭이 필요하며, 산별교섭과 짝을 이루어 진행되어야한다고 보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이에 대한 비판은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의 확대라는 점에서 산별노조를 사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산별교섭만 놓고 본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한데, 남한의 자본가들이 독일과 같이 산업별로 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산업별로 보다는 재벌기업별로 구획되어 있어 기업별 지불능력에 따른 교섭이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산별노조처럼 단일 조직을 구성한 후에도 내부에 상이한 몇 개의 교섭질서가 가능한 것이라면 산별노조 건설이 교섭구조의 실현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산별교섭을 강조하는 입장은 1국1노총 주장으로도 연결된다. 진정한 산별교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1산업1노조, 1국1노총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특히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경우는 꾸준히 1국1노총을 주장해왔다.6) 이후 사회적 교섭, 산별교섭을 위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제기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산별교섭을 둘러싼 쟁점은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투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는 쟁점으로 연결된다. '산별교섭 쟁취투쟁'이 쟁점이다. 1998-99년 금속연맹은 산별노조 건설투쟁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면서, '기필코 산별'을 기치로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서 별도의 투쟁으로 '산별교섭 쟁취'를 내걸고 연맹지도부가 삭발/단식 투쟁을 전개한다. 이는 오히려 당시 쟁점이던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한 투쟁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보건의료노조의 2004년 투쟁도 산별교섭 쟁취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산별교섭에 대한 집착은 보건의료 산별협약 10장2조와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10장2조는 산별협약을 최저기준이 아니라 지부단협에 대해 우선 적용하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대병원 지부 등 일부지부의 임단협이 하향평준화되는 효과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별협약은 지부의 투쟁과 이를 위한 교섭권, 쟁의권을 억압/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우연한 실수는 아닌데, 자본가들이 산별교섭에 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단위 사업장별 교섭비용의 절감과 통제에 있기 때문이다.(노조 측에서도 교섭비용 절감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산별노조로의 단결이 '투쟁'을 통해야 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정치세력이 동의하지만 과연 어떤 투쟁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것이다. 2005년의 경우에도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는 사용자단체 구성 등 교섭상대 구성과 관련해서도 다시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는데, 투쟁의 요구가 다시 '산별교섭 쟁취'라는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한편, 2006년을 예상해보더라도, 민주노총이 제시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 사회적 교섭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조직될 경우 이를 매개로 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은 사회적 교섭에서 산별교섭으로 이어지는 교섭구조 구축과 연결될 수 있다. o 대산별노조, 소산별노조, 그리고 건설의 경로와 조직운영의 방식 당면한 산별노조 건설이 금속단일노조, 공공단일노조 등 대규모로 구획되어야한다는 입장과, 보다 세분화된 산업 혹은 업종이어야 한다는 입장은 전노협 조직발전 논쟁에서부터 제기되어 왔다. 당면한 산별노조 건설이 세분화된 산업 혹은 업종을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입장은 대산별노조로 발전해야한다는 지향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당면과제'의 성격, 단계론적 성격을 강조해왔다.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도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업종별 이해'라는 일종의 경제적 이해가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쟁취하는 실리적 조직형태를 긍정한다. 이는 산별교섭에 있어서도 업종단위로 조직을 건설해야만 이에 따라 사용자단체를 구성하고 산별교섭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산별교섭을 중시하는 입장이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를 옹호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이 업종별로 단결해있지 않은 마당에 교섭을 위해서라도 업종노조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자본가가 뭉치는 '사용자단체 구성'을 노조가 요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쟁점은 건설이후 조직운영의 방식에 있어 지역중심인가, 업종/기업지부 중심인가라는 쟁점과도 연결된다. 산별노조의 발전된 형태가 기업별, 업종별 조직을 유지하지 않고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데는 전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현실론'은 업종과 기업별 질서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기간을 상당히 길게 상정한다. 대산별노조를 주장하는 입장은 이에 비해 업종별 구획을 부차화하고 지역별로 조직 골간을 구성할 것을 제시한다. 산별노조 건설의 일시론, 단계론과도 연결된 이 논쟁은 그러나 금속연맹의 산별노조 전환이 현대자동차노조 등 대기업 노조의 잇따른 투표 부결로 인해 과거와 같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대기업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이 일시적이든 단계적이든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오히려 대기업노조가 산별노조에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이 논란이 된다. 이러한 논란의 과정에서 완성차 노조나 철도, 화물과 같은 운수부문 등 자체만으로 충분히 파괴력 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단위는 자기완결적인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를 구성하려는 경향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능한 단위, 파괴력 있는 투쟁을 할 수 있는 단위들끼리 모이기는 쉽다는 입장이 제시된다. 그러나 그 '파괴력'이 해당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것에 머무를 때에는 기업별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를 조금 더 확장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산업의 파괴력을 활용할 경우 해당 노조들의 경제적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투쟁은 힘을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적 파괴력만을 중심으로 사고할 경우 불안정노동자 조직화 등 기존노조 운동의 혁신과제는 간과될 수 있다. 사회를 바꾸는 변혁투쟁, 정치투쟁도 힘있는 산업만의 파괴력 있는 투쟁이 아니라 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반란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산별노조의 이념이 '완성차 노동자는 하나다'거나 '운수노동자는 하나다'를 넘어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지향을 가진다면 보다 광범위한 단결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실현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고민, 실천과제는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그밖에 총연맹(내셔널센터)의 위상이 전국적 투쟁본부인가, 정책과 대정부 협의를 담당하는 단위인가 하는 쟁점이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은 임금단체투쟁(임단투)은 산별연맹이 담당해야할 과제이지 민주노총이 담당해야할 과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전국 중앙조직은 노동운동의 이념 정립, 사회개혁투쟁과 정책참가를 포함한 정책 제도 개선 활동, 정치세력화 등을 기본임무로 하고, 산별연맹은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을 둘러싼 단체 교섭과 조직확대, 해당 산업에 걸맞는 사회개혁 투쟁과 산업정책 개발 등에 활동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한다.7) 내셔널센터는 사회협약이나 정책참가, 정치세력화를 주임무로 하고 임단투·고용문제 등은 산별노조가 수행한다고 분리하는 것인데, 이러한 관념이 코포러티즘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서 그간 좌파진영은 산별노조의 투쟁을 전국적인 투쟁전선으로 모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내셔널센터는 이러한 방향으로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산별노조의 건설이후 조직운영에 있어서 지부 지회 등 현장민주주의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도 중요한 쟁점이다. 금속노조의 경우 단위 사업장 지회의 파업권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쟁점으로 드러났다. 지난 해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과 서울대병원 지부의 투쟁과 관련된 논쟁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사업장 지회의 파업권이 인정되더라도 산별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협약이 성립된 후에는 지부 파업권이 규약에 있느냐와 무관하게 지회의 독자 투쟁은 억압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산별노조의 운영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된다. 단지 규약에 정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또한 산별노조는 사업집행의 인적, 재정적 역량을 중앙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현장 간부가 부족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장 공동화(空洞化)'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8) 단위노조의 집행간부는 단지 '집행실무자'가 아니라 조직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기되어온 쟁점들에 대한 평가 기존의 여러 쟁점들은 우리나라 노조운동의 지배적 형태인 기업별 노조를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쟁점은 이미 1990년대 초에 대부분 형성되었다. 쟁점은 기존 조직의 구획, 통합 이후의 운영 등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쟁점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산별노조 건설이 주로 기업별 노조 조직간의 통합으로 사고되었기 때문이다. 기업별 노조가 통합하면 그것으로 조직화의 공백은 없을 것이라고 사고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산별노조건설 방식이 주로 존재하는 기업별 노조의 통합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여전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존의 쟁점을 간단하게 기각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며, 여전히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계급적인 원칙에 입각한 입장이 있어야한다. 조직통합을 넘어서는 노동자운동의 전화에 대한 노력이 있어야 대기업노조의 산별노조 전환 실패가 곧바로 '산별노조실패 = 노동자운동혁신의 실패'라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주로 '대공장 이기주의'라고 불리는, 대기업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할 수 없는 이유들을 제거하는 노력도 가능할 수 있다.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중심으로 형성된 쟁점은 조직형식적 논쟁으로 전개될 뿐 아니라 기존의 기업별 노조 중심의 조직화 공백을 간과할 수 있다. 이미 노동의 불안정화 속에서 기존의 기업별, 정규직 중심의 노조운동은 급격하게 실리적으로 변화했으며, 불안정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왔으나 이를 조직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이후 노조가 몰락한 중소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등 불안정노동자, 여성노동자 조직화는 조직통합을 중심으로 한 논쟁에서는 부차적으로 취급된다. 불안정노동자와 여성노동자 조직화의 문제는 산별노조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한 여러 수식어 중 하나로 제시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공세와 노동의 불안정화, 기존 노조운동의 이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함께 1990년대에는 미처 사고하지 못했던 노동자운동 혁신의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처한 상황과 노동자 대중의 존재방식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변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쟁점들이 제기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의 입장을 내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한 분석과 이에 대한 대안이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과제는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투쟁,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 복구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주로 쟁점이 되어온 것들은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혁신이 요구되는 계급지형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논쟁은 확장되고 새로운 논점을 중심으로 전화되어야한다. 비정규직의 조직화에서, 조직방식, 자원투입, 조직편제의 문제 등이 제기되고,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비정규직 조직화에 있어서 지역일반노조의 성과, 특수고용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수준의 직종노조의 활성화라는 조건은 산별노조 건설에서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넘어서는 쟁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남한에서 민주노총이 이념형으로 생각하는 서유럽형태의 산별노조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별도로 발본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후의 자본주의 황금기에 가능했던 구조라는 점이나 산업적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차이(재벌지배경제구조), 자본가들의 조직구조, 노동조합 출발의 역사적 차이 등을 볼 때 오히려 제3세계의 노조운동 역사,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전평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 자체가 쟁점은 아니었다. 제3세계 국가들도 대부분 이미 초기업 노조 형태를 띄었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겠으나 남한에서 추진되는 것과 유사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방식으로 노조운동의 혁신이 이루어진 경우는 없다. 기존의 노조에서 민주화된 노조 분파가 이탈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는 경우에도, 국가-자본가 단체와 안정적인 교섭권을 확보할 수 있는 '산별교섭'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없다. 전평의 경우에도 강력한 투쟁력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산별 단일노조를 건설했던 것이지 '산별교섭'을 위해서 산별노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잠시 외국과 일제 하, 전평 시기를 검토하자. 역사적 사례들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 추진 흐름들은 많은 외국 사례를 참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례들은 하나같이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에 한정되어 있으며, 역사적인 과정보다는 주로 현재 운영되는 '완성된 모델'을 소개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한 교훈을 얻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산별노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쟁과정에서도 건설 과정이 아니라 산별노조의 운영모델을 소개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의 건설이 단지 조직모델을 수입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산별노조 형태가 특정한 정세에서, 특정한 운동의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한다.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의 한 항목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o 유럽과 미국, 19세기 말 20세기 초9) 1890~1914년 기간 동안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새로운 노조주의가 출현한다. 19세기말 세계경제의 불황과 영국헤게모니의 쇠퇴, 대량생산체제의 도입은 이제까지 조직된 직종별노조를 통해서는 조직할 수 없는 새로운 미조직 노동자 대중인 미숙련, 반숙련 노동자층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은 영국의 신노조주의(new unionism)와 일반노조운동, 독일의 산별노조운동, 미국의 산별노조운동 등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혁명 시기에는 독일의 평의회주의, 러시아의 소비에트 등 대안적 노동자 조직형태가 출현한다. (1)영국: 신(新)노조주의 운동 19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직종을 중심으로 숙련 노동자들이 주도하여 확립되었다. 이때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조합비로 '파업기금'을 확보하고 개별 교섭 과정에서 조합에서 설정한 임금 이하의 노동력 판매를 거부하고 이를 통해 실업 = 파업을 하는 조합원에게 생계비를 지급한다.(클로즈드 샵(closed shop)) 그러나 이들이 조직하지 못하는 새로운 미숙련, 반숙련 노동자층이 등장하는 데, 이들을 조직하는 영국의 신노조주의는 1889년 런던부두파업을 계기로 폭발한다. 부두의 대중적 파업에서 기존 노조에 포괄되지 못한 미숙련, 임시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파업이 승리하고, 이후 미숙련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파업과 조직화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숙련노조도 미숙련 노동자 조직화를 시작하여 철도에서도 1889년 저임금·임시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철도노동자일반노조가 결성되는 등, 이들은 상호부조라는 전통적 노조의 활동을 넘어서는 전투적 노조를 천명하고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투쟁했다. 신노조주의를 주도한 것은 미숙련·저임금·일용직노동자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부문주의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를 하나의 노조로 조직한다는 일반노조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인 조직형태를 넘어 '노동자는 하나다'는 이념적 성격이 운동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일반노조들은 특정 산업에 상대적으로 집중하면서 산별노조 형태를 띄거나 기존의 직종노조와 통합하면서 산별노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의 노조운동의 전통은 업종과 산업을 불문하는 조직형태가 많아 '산별노조'라 부르는 만큼 '일반노조'라 부를 수 있으며 업종별로 무관해 보이는 조직끼리의 통합도 일반적이고, '1산업 1노조' 식으로는 조직되지 않는다. (2)독일의 산별노조운동 독일은 후발 자본주의 주자로서 국가를 중심으로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시행했다. 자본가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은행자본을 중심으로 트러스트, 카르텔을 구성하면서 독점을 심화하고, 기업은 수평적으로 통합되고 자본가들은 국가의 지원아래 산업별로 조직화된다. 이는 독일식의 산별교섭 모델이 가능한 토대가 되는데 노동자의 단결 이전에 자본가의 단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는 19세기 중반, 장인 중심의 노동조합이 있었으나 광범위한 노동조합의 결성 이전에 사회민주당이 우선 활성화된다. 1878~79년의 심각한 경제불황기에 기존 노조조직은 국가의 박해로 거의 파괴되지만, 反사회주의법이 시행된 10여 년 동안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성장하면서 노동자 조직을 확대한다. ('영웅적 시기') 1880년대 독립노조 운동이 재개되는데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다. 1888~9년 전국적인 파업의 물결이 있었지만 여전히 숙련공 중심의 직종노조가 주류였다. 1890~1914년 동안 점증하는 기계화와 노동분업에 따라 전통적인 숙련공은 쇠퇴하고 미숙련·반숙련 노동자가 증가하고 노조는 '산별원리'를 채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직종의 틀을 사실상 넘어서지 못했다. 곧이어 1차 세계대전시기 사회민주당의 전쟁협력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위기에 빠진다. 독일 패전과 함께 독일제국은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되면서 이시기 독일 노동자들은 1919년 독일노총을 결성하고 논쟁은 "전국적 중앙노조 vs 평의회", "산별연맹 vs 직종연맹"의 구도로 진행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광범위한 노동의 탈숙련화는 지체되고 숙련 노동자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가운데 직종노조 형태가 계속된다. 나치 시기 노동조합의 파괴 이후 현재 형태의 독일의 산별노조는 전쟁 후 재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AFL-CIO와 미군정의 지원을 중심으로 노조에서 공산주의자를 배제(정치적 급진주의의 거세)하고, 현재와 같은 형태의 산별노조 형태가 비로소 정착한다. (3)미국의 산별노조운동 미국 사회는 1865년 남북전쟁이 종식된 후 빠른 산업화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자동화된 생산체제는 미숙련·반숙련 노동자들을 증가시키는 반면 숙련노동자들은 점차 약화된다. 1880년도와 1890년도 불황기 노동자대중의 위기는 1886년에는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 AFL) 건설로 이어진다. 이는 직종별로 조직된 형태(직종별 노조주의(craft unionism))로 숙련노동자들만 가입되었고, 반숙련 혹은 미숙련 노동자, 그리고 흑인노동자들은 가입하지 못했다. 1905년에는 산별노조를 추구하는 생디칼리즘 경향의 노동자조직인 세계산업별노동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 IWW)이 조직된다. 그러나 1차 대전 중 탄압이 가중되고 1918년에만 100명 이상의 IWW 지도자들이 반역죄로 투옥되면서 1924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조직이 붕괴한다. AFL의 조합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여전히 직종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도입에 따라 광범위한 반숙련·미숙련 노동자, 즉 기존의 숙련 직종 노조로는 조직할 수 없는 노동자대중이 중가한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많은 반숙련·미숙련 노동자들이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 : CIO)로 조직되었으며 산별 노조주의가 주류의 움직임으로 되어간다. 약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1934∼1938년 사이에 CIO로 조직되었다. CIO는 주로 대규모 공장(주로 자동차 산업)이 집중된 지역에서 성장했다. CIO의 전략은 낡은 직업별노조와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로운 형태의 전국적인 산업별노조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CIO 지도부는 AFL 내부의 개혁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력한 조직화를 진행했다. 한편,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이 도입된다. 뉴딜 정책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향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데, 이에 따라 노동자운동에 유화적인 제도가 허용된다.(와그너법) 그러나 대공황 종식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탄압이 시작된다. 1947년 태프트-하트리법을 통해 노동분쟁에 금지명령제도 부활, 노동조합의 부당노동행위가 규정되고, 클로즈드 샵이 금지된다. 이러한 법안 통과와 조직률 정체, AFL의 산별노조화, CIO 내부의 공산주의자 축출 속에서 AFL과 CIO는 1955년 통합한다. 1959년 제정된 랜드럼-그리핀법은 노동조합 내부의 재정을 국가가 감시하고 사용자로부터 교섭단체로서의 승인을 목적으로 한 피케팅 행위를 제한하는 등 노조활동을 제한한다.(최근 남한에서 노사관계선진화 방안 등 법·제도 개편과의 유사성에 주목할 수 있다.) 이들 나라의 사례를 보면 산별교섭과 관련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영-미의 경우에는 자본의 수평적 통합이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식' 산별교섭-산별협약은 정착되지 않는다. AFL-CIO도 독일식의 산별교섭을 시도했지만 사용자단체를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독일의 경우에는 자본이 산업별로 수평적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산별교섭-산별협약이 가능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는데 독일식 독점자본은 코포러티즘의 물질적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o 라틴아메리카, 1970년대 이후 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의 노조운동 남한은 세계자본주의의 반주변부로서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보다 남미 등 신흥공업국의 사례와 유사할 수 있다. 특히 어용노조의 민주화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운동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사례도 주요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들 국가의 새로운 노조운동은 국가의 전국적인 노동통제에 저항하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탈집중화 경향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에서 전형적인 산업-지역별 조직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관료화·어용화 되었으며 이에 대항하는 운동은 공장단위의 노조대표 선출, 공장위원회 건설 등을 중심으로 했는데, 이는 사업장 단위 조직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다. 남한의 경우에도 사업장 조직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사업장 단위의 민주화를 통해서 어용적인 전국조직을 극복하고 새로운 단결을 모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멕시코의 경우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사실상의 부속조직으로 노총(CTM)이 존재하고 강력한 코포러티즘 정책을 통해 노동조합을 노무관리기관으로 유지해왔다. 1970년대 이후 독립노조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전자산업노조 내 민주파, 자동차 산업노조(기업별) 등의 독립노조운동이 있었으나 산업적 단결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브라질은 국가가 관리하는 어용노총 체제에서 197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의 성장과 경제위기라는 정세에서 노동자운동이 폭발한다. 1978~80 대파업투쟁, 상파울로 주변의 ABC 공단의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대파업 진행은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을 형성한다. 대파업 이후 노조의 민주화는 사업장 단위에서 노조반대파, 공장위원회, 전투적인 노조의 공장대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어용적인 산별노조에 대항해 공장단위로 구성된 공장위원회는 민주적인 노조를 촉진한다. 이후 별도의 공장조직을 구성하는 것보다는 노조의 공장지부를 장악하는 것으로 전개되지만 이들은 이후 독립노조로 발전하거나 노조를 민주화한다. 이들은 1981년 브라질의 민주노총이라고 할 수 있을 노총(CUT)을 결성한다. 사업장 단위의 전투성과 직접교섭 전략이 성공하면서 어용노조를 압도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CUT는 자신들이 만든 노동자당(PT당)과 함께 지속적으로 우경화 되었다. CUT 자체가 관료화되고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는 측면이 클 뿐 아니라, CUT의 이전 간부들이 주로 노동자당에서 이후 의회 선거의 후보자에 포함되어있거나 입각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PT당과 결합하면서 제도화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독특한 코포러티즘 전통으로 페론주의가 존재했다. 노총(CGT)은 노동관료가 노조를 장악하고 국가의 대해 협조하는 대가로 일정한 권력과 고용안정과, 사회보장을 약속 받았다.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의 교체 과정에서 노조의 분열과 통합이 진행되고 여전히 CGT가 주도하였지만, 1969년 산업도시인 코르도바의 지역총파업을 계기로 노조민주화 투쟁이 강화된다. 여기서도 공장단위의 투쟁적인 지도부를 구성이 활성화된다. 1976년 군사정권 하 민주적인 노조활동가의 대량 살해되지만 경제위기와 고용불안 속에서 노조는 다시 급진화 되고 노총은 몇 개로 분열했지만 공장단위에서는 '조합간 조정위원회'를 통해서 사업장단위의 투쟁 전개했다.10) 라틴아메리카 사례에서는 노조민주화의 과정에서 사업장 단위 조직이 갖는 중요성이 확인된다. 또한 브라질과 같이 '민주노조'가 초역사적으로 민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o 일제하 노동운동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일제하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산별노조 건설이 단지 '조직통합'의 과정이 아니며, 동시에 현장을 강화하는 노조운동의 재편과 혁신의 과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30년대 산별노조운동을 먼저 살펴보자.11) 일제하 노동조합은 초기에는 지역별(일반)노조로 결성되었다가 지역별 업종노조로 분화한다.(대표적으로 고무업종, 섬유업종 등) 1920년대 중반부터 직업별노조를 산별노조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조선공산당의 지도방침에 따라 서울에서 인쇄노조를 출판노조로 변경하는 등 각 지역별로 산별조직화가 진행되었다. 산별노조 방침은 이후 1930~31년 사이 전국 각지의 노동단체를 통해 실현된다. 각 지역에서도 인쇄출판업이 산별노조 건설을 선도하고, 다른 부문으로 확대된다. 경성 섬유공조합, 출판노조, 용산의 금속노조, 인천의 금속노조, 항만노조, 함흥의 화학공조합, 부산의 부두노동자조합, 원산의 운수노동자조합 등이 이때 결성된다. 이때의 산별노조란 지역별로 구성된 산별조직을 의미하는데, 대도시에서 시작되어 중소도시로 파급되어 간다.(이에 비해서 현재에는 주로 전국조직만을 산별노조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중소도시의 경우 영세업종의 통합으로 산별노조 건설이 힘든 경우 일반노조 형태인 '합동노조'로 조직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러한 산별노조 운동은 1920년대 중반기의 일시적인 침체를 극복하면서 조직을 쇄신-부활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의 산별노조 조직방침은 지역내 각 공장에 공장반을 두어 노조의 분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 내 산업에 따른 산별노조 지부를 설치한 후, 이를 전국적으로 통일한다는 방침이었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 흐름과 동시에 공장 내 공장반 설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공장반 설치는 활동과 조직의 중심이 공장과 사업장 현장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했다. 노조활동에 있어서도 보다 현장에 밀착한 생생한 요구를 수립했는데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현장을 강화하는 작업을 동시에 의미했다는 것이다. 산별노조 재편과정에서 노조 내에 부인부, 청소년부, 실업부를 조직하여 미숙련·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된다. 이러한 산별노조 시도는 아직 미약하지만 1930년대 일본의 중화학공업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군수부문을 중심으로 노동자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자본주의 발달과 이른바 산업합리화 정책의 진전으로 숙련노동의 쇠퇴와 미숙련 노동자의 증가, 실업자 증가, 여성과 청소년 노동이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의 변화, 노동자 증가는 전면적인 수준이라 보기는 힘들었으며 당시의 노동운동가들이 산별노조를 지향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강했다.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의 지침이 산별노조를 지향하고 있기도 했을 뿐더러, 전국적 차원의 단일조직을 조직하여 전국적 연대와 단결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 투쟁을 지향한 것이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노조운동으로 전환한다. 혁명적 노조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산업별 조직방식을 채택.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인 공장위원회를 강화하고 산별노조 지부 구성, 각 산별노조 지부의 지부협의회와 이를 바탕으로 한 도 협의회, 전국 중앙협의회를 구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해방이후 노동자운동은 1945년 11월 1~4일 집중적으로 16개 산별노조를 결성하고 11월 5~6일 전국노동조합평의회를 건설한다. 일제 시기부터, 혹은 해방직후 급속히 확대된 직장별, 직종별, 산업별 형태의 각종 조직이 지역산별노조로 결집하면서 전국적인 산별노조 체계를 급격하게 구축된 것이다. 16개의 산별노조로 조직되었고 산별노조는 -- 지역별 산별[지부] -- 공장[분회] -- 직장[반] -- 5명 단위[조]로 구성되었다. 지역일반노조 형태의 지역합동노조는 지방평의회에 직속으로 가입한다. 지역에서는 전평 전체의 도평의회가 구성되고 여기에서 산별지부가 결합했다. 이러한 공식 골간 외에도 현장의 통일전선 강화를 위해 공장(관리) 위원회, 자치위원회, 직장위원회, 투쟁위원회 등이 활발하게 결성된다. 전평의 강력한 활동은 중앙집권적 산별노조를 통한 지도도 중요했지만 강력한 현장조직력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현장 기초단위가 구성되어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전평이 계급적 원칙에 입각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공산당 세포모임이 사업장마다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산별노조 건설이 현재 추진되는 방식처럼 반드시 전국조직을 상층에서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산별노조 건설이 오히려 현장을 강화하는 의미를 가지고 추진되었다는 점, 산별노조의 힘은 '산업별 조직형태' 이전에 강력한 현장조직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기되어야할 쟁점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유럽이나 미국, 1970년대 이후의 제3세계의 사례 모두는 노동조합 조직의 심대한 변화(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는 계급구조의 변화와 이에 따른 계급투쟁의 전환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노동정치체제의 동요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재편 방향은 노동자운동의 혁신 혹은 실패를 반영하는 것일뿐더러 그 재편방향 자체가 계급투쟁의 장소가 된다. 남한 노동자운동에서 위기의 성격이 복합적이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에 대한 대안도 여러 가지로 제기되고 있다. 노동자운동의 재편방향은 이후 더욱 뚜렷하게 분기할 것인데, 이러한 분기는 당분간 '산별노조 건설의 쟁점'이라는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쟁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이 초역사적인 과제는 아니라면 지금 시기에 노동자운동에 요구되는 과제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발전 전망이 세워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주체 형성을 위한 과제의 하위과제로서 조직형태의 재편이 제기될 수 있다. 산별노조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조직형태의 재편의 일부분인 것이다. 기존의 기업별 노조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기 위한 효율적인 조직화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 형태를 실현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그 해답이 곧바로 현재 논의되는 형태의 산별노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신자유주의 하 노동자대중에 가해지는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압력에 대응하는 적합한 조직형태는 무엇인가라는 방식의 질문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쟁점이 구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노조운동이 사업장 단위의 전투적 경제주의로 제한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업을 넘어선 단결의 확대와 함께 노조운동의 사회운동적 강화를 위한 조직의 혁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운동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산별노조를 통해 '사회공공성' 요구를 제기하고 이를 '사회적 교섭기구'에서 논의하고, 또 이를 압박하기 위해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배치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노조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조건 자체의 변화(그리고 장기적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의 경향)가 필요한데, 이는 지역을 중심으로 '취업한 노동자'에 제한되지 않는, 기층민중에게 조직적으로 열려있고 활발하게 연대하는 구조로 재편되어 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조직적 과제를 넘어서 노동자 운동의 혁신을 위한 과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한다. 특히 노동자 운동이 축적조건(객관적 조건)과 이념/조직(주체적 조건)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이념'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조직적 재편전망과 아울러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이를 대중운동과 이 이데올로기, 조직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노동자운동의 혁신은 불가능할 것이다.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의 측면만 보더라도 이 과제는 조직확대를 위한 사업은 물론이지만 기존 노조운동의 이념이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에 적합한 내용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50억 기금 모금이나 조직활동가 배치를 통해서도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노조 운동은 이념과 조직을 포괄하는 하나의 '운동'이지 양적 성과를 중심으로 하는 외판사업 비즈니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한다고 할 때, 그러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이를 추진하는 주체들과 타협이 아니라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토론과 실천을 위한 몇 가지 제안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하여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쟁점을 논의해보자. o 산별노조와 지역일반노조 - 비정규직 조직화의 쟁점 지역을 근거지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으로 일반노조가 활성화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지역노조가 지역을 중심으로 단지 조합원을 조직하는 역할을 넘어서, 지역을 운동이 근거지로 복원하기 위한 활동을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지역 일반노조는 산별노조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별 노조 형태로 조직을 유지할 수 없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 불안정노동자에게는 거의 유일한 의미있는 조직형태이다. 산별노조 추진주체들에게도, 여전히 기업별 노조의 통합이라는 것이 주된 관심이기는 하지만 지역일반노조의 고민과 수렴하는 측면이 있다는 데 주목해야한다. 금속노조의 지역지부 건설, 공공연맹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건설 등은 산별노조를 지역적 차원에서부터 일반노조와 유사하게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지역 일반노조 주체들에게 있어서도, 지역 일반노조가 산별노조의 건설과정에서 결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단위도 있는데 이는 산별노조가 일반노조를 품어 안을 만큼 충분히 가입대상을 확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정부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공공,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여성 불안정노동자를 확산시키고 있다. '사회적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 불안정노동자들은 불과 수개월 단위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을 조직하는 것은 기업별 노조로서는 불가능할 뿐더러 기업별 노조의 연합형태로서의 산별노조로서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고민들의 진전은 지역을 근거로 하는 불안정노동자조직화에 있어서 산별노조 건설과 지역일반노조가 경향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준다. (조직적 통합을 직접 지향하는 수렴이라기 보다는 노조 조직화의 문제의식과 그 형태가 수렴해간다는 것. 따라서 조직적으로 함께 할 수 있을지 여부는 토론과 함께 주체들의 실천적인 노력, 상호 파괴적인 조직경쟁을 하지 않는 존중과 예의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이 19세기말 20세기 초 직종별노조의 산별노조로의 전환과정이나 영국의 신노조운동에서 일반노조 운동의 활성화, 산별노조의 조직화 병행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산별노조, 일반노조의 건설은 폭발적인 미조직노동자(미숙련노동자)들의 조직화 과정에서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조직적 진출이 새로운 조직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현재 남한에서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통한 산별노조건설이라는 현재의 시점에 미조직노동자(비정규직노동자)들의 진출이 아직 기존의 노조를 압도, 상대화하고 새로운 조직을 출현시킬 만큼 폭발적이지 않다. 따라서 결국 기존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결의로 산별노조를 건설해야한다는 난점이 발생한다.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끊임없이 이미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난점은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이 가지는 한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조직화에 있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의 중요성에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또한 조직된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노동자대중의 진출, 새로운 운동의 개시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라는 과제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내용과 형태로 진행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o 지역중심, 지역을 골간으로 하는 산별노조의 건설 지역을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실질적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노조가 현장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가운데에서도, △사업장을 넘어서는 공동투쟁이 가능하며, △지역에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불안정 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고, △지역의 민중운동, 사회운동과 결합할 수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의 골간을 구성하고 지역의 사회운동과 연대하거나, 지역의 광범위한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업별 노조나 그 연합체제로서 연맹, 그러한 수준을 유지하는 산별노조로는 불가능하다. 앞서 예를 든 '사회적 일자리'의 불안정노동자들의 경우와 같이 새로운 형태로 계속 확산되는 불안정노동자를 '업종노조'나 '업종을 골간으로 한 산별노조' 형태의 조직이 조직대상으로 포괄할 수 없으며, 각 업종조직의 지역조직의 규모 상 조직화와 투쟁을 책임질 수도 없다. 산별노조가 단지 특정 산업에 제한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산업적 이해'라는 것을 특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업장을 넘어서는 지역의 사회운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대상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노동-사회운동단체에도 열려야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어야함은 물론이지만, 노동자 회원으로 구성된 노동단체는 그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조합'의 하나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유기적으로 조직적 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복수노조 제한 규정이 사라진다면 법적으로도 조합원의 이중가입도 가능해지고 사업장단위를 넘어서 노조의 유연한 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단지 조합원 가입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직적 결합과 함께 이들 사회운동이 제기하는 과제를 산별노조의 운동의제로 결합할 수 있어야한다. 한편, 이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골간 구성을 위해서는 '대산별' 형태가 유리하다. 업종노조의 형태로는 규모의 한계 때문에 지역별 골간을 구성하고 운영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운동과제, 조직화 대상을 일반화할 수도 없다. 대산별 형태로 조직을 확장하는 것을 통해서 노조의 이해를 허구적인 '산업별 이해'라는 방식으로 협소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을 크게 만든다고 조직의 투쟁과제가 자동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계급적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운동주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역의 연대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속노조는 지역을 골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지역에서는 산별노조로 재편되면서 금속노조 안의 단결은 증진되었을지언정 지역연대에는 더 소홀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산별노조가 '무슨무슨 노동자는 하나다'는 식의 조직이 아니라 '노동자는 하나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형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계급형성을 위한 투쟁의 과제들이 있고, 이를 운동의 요소로서 끊임없이 실현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지역의 투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산별노조를 지역을 중심으로 강화하는 과제도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조직도'를 멋있게 그려내는 것과는 또 다른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o 노동자운동의 전화를 위한 이념적 전망의 수립 산별노조 형태이든 일반노조 형태이든, 조직형태의 변화를 통해서만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 다만, 조직형태의 변화가 맹아적인 행태일지라도 운동의 특정한 지향을 표현하고 그것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맹아적 지향을 추출-강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이념적 전망을 좌파들은 '계급적 산별노조'라는 방식으로 추상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즉, 산별노조의 건설과정이 노동자운동의 '계급성'을 다시 강화하는 과정이 되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계급성'이라는 원칙은 여전히 추상적일 뿐이라는 점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명료한 정치적, 이념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특히 정치적 이념적 전망의 수립은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재편과정과 분리된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결합되어야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대중 이데올로기로 결합하지 않고서는 이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조직적 재편조차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산별노조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어야한다. 산별노조가 현재 남한 노조운동의 주류형태인 기업별 노조보다 나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결의 확장이라는 것은 항상 노동자운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적으로는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노동자 연대의 강화와 계급 형성의 과제를 수행하기 유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산별노조 건설은 당면한 노동운동이 혁신을 위해 추진되는 전략의 일부이며, 산별조직 건설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은 다시 한번 강조해야한다. 그것을 간과하는 순간 산별노조만 건설하면 노조운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처럼 부풀리는 이른바 '산별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은 낮은 조직률의 고착과 노조운동의 대표성의 위기, 법·제도의 불리한 변경에 따라 수세적으로 제기되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몰두는 밀리고 밀려서 진행되는 노동자운동의 퇴각에 대한 사후적인 반응, 그것도 한발 더 물러선 퇴행적인 반응이 될 가능성도 크다. 보다 공세적으로 노동자운동 혁신의 과제를 실천하는 투쟁에서, 하나의 과정으로서만 산별노조가 고민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새로운 조직의 전면적인 건설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 ①새로운 미조직 노동자들의 진출 ②새로운 급진적 이념의 수용 ③새로운 조직형태를 통한 단결 폭의 확대 ④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장 현장의 강화 이후 남한에서 산별노조 건설 과정을 단지 기업별 노조의 통합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동운동의 혁신의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요소들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과정은 노동자운동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조운동의 체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이다. 따라서 여러 운동 주체들이 이러한 변화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는가에 따라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노조운동의 성격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된 쟁점을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노력은 특히 중요하다. 지역을 중심으로 불안정노동자를 광범위하게 조직하기 위한 조직적 근거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노력이 관건이다. 지역 중심의 운동이 필요하다거나 불안정노동자 조직화가 의미있다는 말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주장해도, 현실에서 그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물질적으로 산별노조 건설 흐름이 지역강화와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의 과제를 받아안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노조 조직들도 계급형성의 과제를 함께 수행하면서 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진출이 활성화된다면, 어쩌면 산별노조에 관련된 이상의 쟁점들은 모두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다. 산별노조 건설의 쟁점을 넘어, 새로운 노동자 대중의 진출을 촉진하고 계급형성의 과제를 실현하는 노동자운동을 재개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비판과 실천을 조직하자.
1995년 스위니 집행부 당선 이후 미국 AFL-CIO의 대외정책 킴 사입스1) *번역 :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노동 제국주의와 미국 노동자운동의 비극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는 자신의 역사 대부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AFL-CIO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독재자와 협조했고, 진보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입증되었다. 한마디로 AFL-CIO는 우리가 정확히 ‘노동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천을 펼쳤다. AFL-CIA(미국노총-중앙정보국)라는 이름은 좌파의 망상증이 아니며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노동 제국주의’는 1955년 AFL-CIO의 통합부터 등장한 게 아니다. 정확히 20세기 초, 사무엘 곰퍼스가 지도부를 맡은 미국 노동총연맹(AFL) 때부터 등장했다. AFL은 멕시코혁명 동안 혁명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간섭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으며, 미국 외교정책 집단 내에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어도, AFL은 1차 세계대전 후 서반구(특히 멕시코)의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범아메리카노동총연맹(PAFL)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AFL은 윌슨 정부에게 받은 5만 달러를 PAFL 설립에 사용했다. 1924년 곰퍼스가 죽자 대부분의 해외 활동은 일단 끝났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부활했다. AFL은 유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나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파시스트에 저항한 공산주의자를 목표로 삼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훼손하기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고, 그 후에는 유럽대륙에서 소련에 대항하며 미국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CIA는 AFL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CIA가 자금을 중단하자 AFL은 악명 높은 ‘프렌치 커넥션’을 포함해 마약거래에 손을 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AFL의 활동도 부활했다. 처음에는 반공주의 국제노동조직인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조직(ORIT)를 통해 활동했고, 1954년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하는 데 조력했다. 그러나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AFL-CIO는 이 지역의 도전에 더 적극 대응하려고 아메리카자유노동개발기구(AIFLD)를 창설했다. 특히 AIFLD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1964년 브라질과 1973년 칠레)를 위한 기초를 깔았고, 도미니카공화국과 영국령 기니에 간섭했다. 또한 AFL-CIO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활동을 병행했다. 1964년 아프리카아메리카노동센터(AALC)를 설립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7년 아시아아메리칸자유노동기구(AAFLI)는 특히 남한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를 돕기 위해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AAFLI는 1983-89년 동안 필리핀의 진보적인 노동자조직인 메이데이운동(KMU)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세운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규모는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포함해 세계 다른 어느 나라의 노동자조직에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AAFLI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5년 존 스위니의 당선과 대외정책 개혁 한마디로 조지 미니와 레인 커크랜드가 의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AFL-CIO는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반대하는 상당한 흐름이 형성됐다. 1995년 존 스위니가 새로운 의장으로 당선될 때 AFL-CIO의 이러한 활동에 대한 반대는 적어도 하나의 요소였다. 1995년 10월 존 스위니가 당선될 때 많은 활동가들은 AFL-CIO의 대외활동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리라 기대했다. 스위니의 초기 활동은 고무적이었다. 1997년 그는 AAFLI, AALC, AIFLD와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유노동조합기구(FTUI)와 같은 반(半)-자율적인 기구들을 해산하게 했고 (보통 연대센터라고 부르는) 아메리카국제노동연대센터(ACILS)라는 중앙집중적인 조직으로 대체했다. 또한 스위니는 국제부에서 오랫동안 냉전의 전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몇몇 개발도상국의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긍정적인 노력을 보였고, 이러한 변화는 질적인 개선이었다. 하지만 최근 어떤 사건들은 AFL-CIO의 대외정책 개혁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세 가지 사건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AFL-CIO는 과거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개하고 의혹을 일소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둘째, 연대센터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개입했다. 셋째, AFL-CIO는 미국 정부의 냉전시기와 유사한 노동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염두에 두며 각각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AFL-CIO, 과거를 자백하길 계속 거부하다 처음부터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AFL-CIO와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일부 가입조직들의 반동적인 대외정책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러한 도전은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특히 1960년대 AFL-CIO의 대외정책을 분석한 책의 출판은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1980년대 활동가들이 레이건의 니카라과 공격을 노동운동이 지지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초기 분석은 AFL-CIO의 활동이 노동운동 외부 즉 CIA, 백악관, 국무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노동운동의 대외정책을 외부 요인의 결과로 설명했다. 그러나 1989년 나의 책이 출판된 후, 독립 연구자들은 이러한 대외정책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내적 요소에 근거해 계발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AFL-CIO의 대외활동이 CIA와 합작한 것이었고 미국 대외정책에 이득을 주었고 백악관과 국무부의 주도력을 지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접근방식은 그러한 대외정책이 정부의 자금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상층부 관리 내에서 계발되었고 통제되었다고 입증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평조합원에게 보고되거나 추인되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은폐되었다 - 보고되더라도 매우 왜곡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미국 노동자의 이름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AFL-CIO가 해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쳐 왔는지 모르며, 그러한 활동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AFL-CIO의 대외활동에 대한 학술적 조사활동을 펼쳤고 동시에 기층 조합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다. 마침내 활동가들은 조합원을 교육하고 그들이 국제노동조직에서 악명을 지우기 위한 활동을 요구하게 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AFL-CIO의 지도부는 이러한 활동을 방해하거나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1998년 이후로 지도부의 이러한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프레드 히르쉬는 AFL-CIO의 대외정책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캘리포니아 산 호세 지역의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의혹청산”(Clear the Air)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한 동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과 AIFLD가 지원한 칠레 쿠데타(1973년)의 25주년을 회상하고 1974년 AFILD의 지도자 윌리엄 도허티를 반대하는 공식 결의안을 노동평의회가 통과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결의한 통과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었고, 안은 공식적으로 제출되지 못했다. 2000년 영국정부가 칠레의 피노체트 전 대통령을 체포한 사건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나 AFL-CIO는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프레드 히르쉬와 동료들은 “의혹청산” 결의안을 다시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결의안이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통과되었고, AFL의 주(州) 조직인 캘리포니아노동연맹의 2002년 총회에 상정되었다. 캘리포니아연맹의 집행위원회는 ‘협상안’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결의안이 “완화된다면” 이 문제를 더욱 신중히 토의하기 위한 캘리포니아 활동가와 AFL-CIO 대외정책 지도자의 모임을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상안이 수용되었고 누그러진 결의안이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2003년 10월에 약속한 모임이 열리기까지 15개월 이상이 걸렸다. AFL-CIO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기보다는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았고, 모임에 참여한 평조합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관한 정보와 보고서를 모아달라는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AFL-CIO가 차베스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폭로되다 AFL-CIO가 과거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 저항에 직면하는 동안 AFL-CIO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는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는 혼란스러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차베스에 적대적인 세력이었으며, 고용주 편에 선 베네수엘라노동자총연맹(CTV)도 종종 번번히 적대세력에 포함되었다. CTV는 2002년 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나는 2004년 4월에 쓴 기사에서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다음처럼 지적했다. 아메리카통신노동자(CWA)/신문동업조합의 로버트 콜리어의 보도에 따르면 CTV는 2001년 10월, 2002년 3-4월, 2002년 10월-2003년 2월에 벌어진 총파업/공장폐쇄를 수행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기업가연합회인 페데카마라스(FEDECAMARAS)와 협력했다. 콜리어는 CTV가 2002년 3월 쿠데타를 계획하고 조직하는데 직접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콜리어는 “한마디로 AFL-CIO는 반동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활동가들은 AFL-CIO(특히 ACILS)와 CTV의 무수한 관계를 발견했다. AFL-CIO는 쿠데타 직전에 CTV의 관리들을 워싱턴으로 인도했다. 베네수엘라연대센터와 결합한 활동가들은 정보자유법을 활용해서 미국 민주주의기부재단(NED)에 제출된 문서와 보고서를 폭로했다. [NED는 미국 국무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기구며,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됐다. CIA가 벌이는 정치인에 대한 은밀한 매수나 거짓 민간인조직 창설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역주] 자료들은 1997-2002년 동안 ACILS의 활동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어떤 문서들은 AFL-CIO가 페데카마라스가 주도하는 기업가조직과 카톨릭교회, CTV가 연합하고, 차베스 대통령에 대항하는 공동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데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ACILS가 NED에 제출하는 2002년 1/4분기 보고서를 보자. CTV와 페데카마라스는 카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2002년 3월 5일 전국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두 달에 걸친 두 조직간의 회의와 공동계획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사건이었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심화를 막기 위한 ‘민족적 합의’(National Accord)를 도출한 공동활동은 두 조직을 차베스정부에 반대하는 기함 조직으로 확립할 것이다. 연대센터는 두 조직의 협력을 위한 의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초기 모임의 조직 단계를 지원했다. 3월 5일 전국회의는 대충자금(counterpart funds)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전국회의가 열린지 30일이 지나지 않아 CTV와 페데마라카스는 석유회사 경영진의 해고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고, 쿠데타가 벌어졌다. ACILS가 이런 과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려면, 우리는 ACILS의 대표자들이 CTV와 페데마라카스의 지도자와 정기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 또 1997-2001년 동안 NED가 ACILS와 CTV의 협력활동에 지원한 587,962 달러를 무시해야 한다 (2001년에도 153,777 달러를 지원했다). 2002년 12월에는 6개월 간 활동을 위해 11,6001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증거는 활동가들이 AFL-CIO의 대외공작에 대한 항의 행동을 자극했다. 2004년 캘리포니아 총회를 위한 결의안 검토위원회에서 “세계노동자의 단결과 신뢰의 건설”이란 이름의 결의안이 등장했다. 이 결의안은 1994년 7월 캘리포니아주 총회 대표단에서 통과되었다. AFL-CIO의 전국수준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이 자신의 가장 큰 주(州) 지부로부터 힐난을 받은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조합원은 전체 AFL-CIO의 1/6을 차지한다). 미 국무부와 노동외교자문위원회 AFL-CIO의 이러한 활동은 과거 방식의 활동을 포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매우 어두운 징조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노동제국주의로 복귀를 뜻하는가, 아니면 존 스위니가 새롭게 선택한 방침에서 벗어난 예외일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미 국무부의 노동외교[노동부문에 관한 외교] 자문위원회(ACLD)에 AFL-CIO가 참여하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면 몇몇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ACLD는 미국 대외정책의 증진을 위해 국무부가 제안해 설립되었다. 클린턴정부 때 세워졌지만 부시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2. 존 스위니 의장과 린다 차베스 톰슨 사무총장, 윌리엄 루시 국제위원장, 바바라 쉐일러 국제국장과 필 피시맨 국제차장, 해리 캠버리스 연대센터 집행위원장 등 주요 지도부 모두가 ACLD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원회는 과거 노동운동 최고위층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자격으로 참여한 사람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 도나휴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NED 위원이었고 AFL-CIO의 재정책임자였으며 1995년 의장선거에서 스위니와 경쟁했다). 3. 이들 지도자들은 독립적인 행위자이며 특히 부시정부와 다른 접근법을 옹호했다. 4. 이러한 활동은 어떤 출판물로도 보고되지 않으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없다. ACLD는 1999년 5월 20일에 설립되었고, 설립헌장은 위원회의 목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문위원회의 목적은 국무부가 관리하는 노동외교 프로그램에 관해 국무부 장관을 자문하는 것이다. 국무부는 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부와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특히 위원회는 미국 노동정책의 목표와 이상을 증진하고자 하는 국제사회 내의 미국의 지도력을 보장하고자 한다. 누가 ACLD를 착안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국무부의 외교인권노동국의 에드문드 맥윌리암스 국제노동국장은 노동외교를 부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이 냉전시기 미국정부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외교는 냉전 시기 동안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사회를 증진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당시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쳐부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지원이었다. 냉전 이후 정책 결정자들은 노동외교를 격하했다. 동시에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새로운 도전을 낳으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훨씬 더 중요해졌다. 활기찬 노동외교가 다시금 미국 대외정책의 소중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는 “국무부 노동국, 국제개발처(USAID), 해외공보처(USIA)가 수행한 활발한 노동외교가 미국 대외정책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하며, 공산주의와 투쟁하자는 정부의 요청에 노동조합이 “다시 집결했고” 서구 정부를 떠받치는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은 냉전시기처럼 미국 대외정책의 공식화와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증진하고자 하는 목표-민주주의, 인권, 정치적 안정, 사회경제적 발전-는 노동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목표와 동일하다. 그는 세계화가 사회안전망이나 직업훈련 없이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세계 노동자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이처럼 확대되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고, 미국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관심사를 대외정책 결정가들에게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며, 노동운동은 정부의 대외정책 과정에 재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미국과 노동의 동맹은 노동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이 아동노동, 강제노동, 여성과 약소자에 대한 차별적 고용에 기반을 두면 안 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외교의 부활은 냉전시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깨지기 쉬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민주적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맥윌리암스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러한 주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ACLD의 첫 번째 보고서, “괜찮은 노동의 세계: 새로운 세기를 향한 노동외교”를 받고 몇 개월 간 몇몇 권고 사항을 평가한 후 2000년 11월 8일 ACLD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효과적인 노동외교 없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난 4개월 간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당신들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ACLD는 단지 2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되었지만, 부시정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01년 말(9.11 사건 이후)에 나온 보고서에서는 강조점이 이동한다. 보고서는 “노동외교의 역할과 중요성은 미국의 안보를 증진하고 이를 훼손하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싸우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보고서의 이름이 “노동외교: 민주주의와 안보에 복무하자”란 점에서 강조점의 변화를 더 잘 간파할 수 있다. 두 번째 보고서도 첫 번째처럼 노동권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만 두 번째 보고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미국의 안보를 향상시킬 때만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대테러전쟁은 왜 노동외교의 기능이 중요한지 실례를 제공한다. 비참함, 소외, 절망으로 이끄는 노동조건은 테러리즘 세력이 모이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조건의 개선은 테러리즘을 예방하고 대항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나아가 보고서는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것은 테러리즘과 싸우고 안보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모든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고서는 “이슬람 국가의 노동조합”에 대해 다룬다. 보고서는 “이슬람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감성, 정신, 직업을 통제하기 위한 정지적 대리자 역할을 하는 기구이자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전장”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ACILS의 프로그램은 기업과 산업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고양하려는 정책이 이슬람 국가의 노동자에게 현대적인 경제적 사고와 정치적 가치를 심어주는 데 가장 유망한 접근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반복해서 표현하지만, 세계 노동자의 안녕과 호혜와 연대에 기반한 AFL-CIO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제 맥윌리암스의 주장의 모순을 살펴보자. 우리는 냉전시기에 AFL-CIO의 역할이 명백히 반동적이었다고 입증했지만, 어째서 맥윌리암스는 냉전시기의 정부와 노동조직의 긴밀한 관계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계를 재수립해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목표를 공동으로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한 모순적인 주장의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윌리암 로빈슨의 저서, 『과두제의 촉진: 세계화, 미국의 간섭과 헤게모니』를 살펴보아야 한다. 로빈슨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대외정책의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초점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어떤 독재자라도 지지하고 통제하는 것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를 포함하여)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사회”에 적극 간섭하는 것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촉진”이 핵심이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과두제의 촉진 또는 위로부터 엘리트가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과두제 민주주의는 엘리트가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를 뽑고, 그들이 제안하는 방식으로만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특히 USIAD와 국무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과두제 민주주의를 주입하고 있다. 그리고 국무부는 NED를 통해 연대센터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조직과 세계 곳곳의 여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다.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정부 보고서의 주장을 ‘해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노동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국과 해외의 노동자를 공격하는 미국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노동 제국주의의 귀환과 우리의 선택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결과를 볼 때 존 스위니가 이끄는 AFL-CIO의 대외정책이 ‘전통적인’ 노동 제국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AFL-CIO 최상층부가 노동 제국주의로 복귀하는 문제를 숨김없이 다루지 않는다면 AFL-CIO를 ‘개혁’하려는 최근 어떤 시도도 실패할 운명에 처할 게 분명하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며, 의미심장한 변화를 추구하려면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미국과 세계 노동자의 안녕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1) [역주] 이 글은 『Monthly Review』 2005년 5월호에 실린 킴 사입스(Kim Scipes)의 「Labor Imperialism Redux?: The AFL-CIO's Foreign Policy Since 1995」를 요약, 번역한 글이다. 웹사이트 www.monthlyreview.org에서 영어 원문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전국작가노동조합(National Writers Union)에서 활동하며 퍼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
1995년 스위니 집행부 당선 이후 미국 AFL-CIO의 대외정책 킴 사입스1) *번역 :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노동 제국주의와 미국 노동자운동의 비극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는 자신의 역사 대부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AFL-CIO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독재자와 협조했고, 진보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입증되었다. 한마디로 AFL-CIO는 우리가 정확히 ‘노동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천을 펼쳤다. AFL-CIA(미국노총-중앙정보국)라는 이름은 좌파의 망상증이 아니며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노동 제국주의’는 1955년 AFL-CIO의 통합부터 등장한 게 아니다. 정확히 20세기 초, 사무엘 곰퍼스가 지도부를 맡은 미국 노동총연맹(AFL) 때부터 등장했다. AFL은 멕시코혁명 동안 혁명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간섭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으며, 미국 외교정책 집단 내에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어도, AFL은 1차 세계대전 후 서반구(특히 멕시코)의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범아메리카노동총연맹(PAFL)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AFL은 윌슨 정부에게 받은 5만 달러를 PAFL 설립에 사용했다. 1924년 곰퍼스가 죽자 대부분의 해외 활동은 일단 끝났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부활했다. AFL은 유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나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파시스트에 저항한 공산주의자를 목표로 삼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훼손하기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고, 그 후에는 유럽대륙에서 소련에 대항하며 미국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CIA는 AFL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CIA가 자금을 중단하자 AFL은 악명 높은 ‘프렌치 커넥션’을 포함해 마약거래에 손을 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AFL의 활동도 부활했다. 처음에는 반공주의 국제노동조직인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조직(ORIT)를 통해 활동했고, 1954년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하는 데 조력했다. 그러나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AFL-CIO는 이 지역의 도전에 더 적극 대응하려고 아메리카자유노동개발기구(AIFLD)를 창설했다. 특히 AIFLD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1964년 브라질과 1973년 칠레)를 위한 기초를 깔았고, 도미니카공화국과 영국령 기니에 간섭했다. 또한 AFL-CIO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활동을 병행했다. 1964년 아프리카아메리카노동센터(AALC)를 설립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7년 아시아아메리칸자유노동기구(AAFLI)는 특히 남한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를 돕기 위해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AAFLI는 1983-89년 동안 필리핀의 진보적인 노동자조직인 메이데이운동(KMU)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세운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규모는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포함해 세계 다른 어느 나라의 노동자조직에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AAFLI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5년 존 스위니의 당선과 대외정책 개혁 한마디로 조지 미니와 레인 커크랜드가 의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AFL-CIO는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반대하는 상당한 흐름이 형성됐다. 1995년 존 스위니가 새로운 의장으로 당선될 때 AFL-CIO의 이러한 활동에 대한 반대는 적어도 하나의 요소였다. 1995년 10월 존 스위니가 당선될 때 많은 활동가들은 AFL-CIO의 대외활동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리라 기대했다. 스위니의 초기 활동은 고무적이었다. 1997년 그는 AAFLI, AALC, AIFLD와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유노동조합기구(FTUI)와 같은 반(半)-자율적인 기구들을 해산하게 했고 (보통 연대센터라고 부르는) 아메리카국제노동연대센터(ACILS)라는 중앙집중적인 조직으로 대체했다. 또한 스위니는 국제부에서 오랫동안 냉전의 전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몇몇 개발도상국의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긍정적인 노력을 보였고, 이러한 변화는 질적인 개선이었다. 하지만 최근 어떤 사건들은 AFL-CIO의 대외정책 개혁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세 가지 사건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AFL-CIO는 과거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개하고 의혹을 일소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둘째, 연대센터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개입했다. 셋째, AFL-CIO는 미국 정부의 냉전시기와 유사한 노동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염두에 두며 각각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AFL-CIO, 과거를 자백하길 계속 거부하다 처음부터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AFL-CIO와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일부 가입조직들의 반동적인 대외정책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러한 도전은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특히 1960년대 AFL-CIO의 대외정책을 분석한 책의 출판은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1980년대 활동가들이 레이건의 니카라과 공격을 노동운동이 지지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초기 분석은 AFL-CIO의 활동이 노동운동 외부 즉 CIA, 백악관, 국무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노동운동의 대외정책을 외부 요인의 결과로 설명했다. 그러나 1989년 나의 책이 출판된 후, 독립 연구자들은 이러한 대외정책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내적 요소에 근거해 계발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AFL-CIO의 대외활동이 CIA와 합작한 것이었고 미국 대외정책에 이득을 주었고 백악관과 국무부의 주도력을 지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접근방식은 그러한 대외정책이 정부의 자금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상층부 관리 내에서 계발되었고 통제되었다고 입증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평조합원에게 보고되거나 추인되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은폐되었다 - 보고되더라도 매우 왜곡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미국 노동자의 이름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AFL-CIO가 해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쳐 왔는지 모르며, 그러한 활동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AFL-CIO의 대외활동에 대한 학술적 조사활동을 펼쳤고 동시에 기층 조합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다. 마침내 활동가들은 조합원을 교육하고 그들이 국제노동조직에서 악명을 지우기 위한 활동을 요구하게 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AFL-CIO의 지도부는 이러한 활동을 방해하거나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1998년 이후로 지도부의 이러한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프레드 히르쉬는 AFL-CIO의 대외정책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캘리포니아 산 호세 지역의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의혹청산”(Clear the Air)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한 동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과 AIFLD가 지원한 칠레 쿠데타(1973년)의 25주년을 회상하고 1974년 AFILD의 지도자 윌리엄 도허티를 반대하는 공식 결의안을 노동평의회가 통과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결의한 통과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었고, 안은 공식적으로 제출되지 못했다. 2000년 영국정부가 칠레의 피노체트 전 대통령을 체포한 사건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나 AFL-CIO는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프레드 히르쉬와 동료들은 “의혹청산” 결의안을 다시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결의안이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통과되었고, AFL의 주(州) 조직인 캘리포니아노동연맹의 2002년 총회에 상정되었다. 캘리포니아연맹의 집행위원회는 ‘협상안’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결의안이 “완화된다면” 이 문제를 더욱 신중히 토의하기 위한 캘리포니아 활동가와 AFL-CIO 대외정책 지도자의 모임을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상안이 수용되었고 누그러진 결의안이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2003년 10월에 약속한 모임이 열리기까지 15개월 이상이 걸렸다. AFL-CIO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기보다는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았고, 모임에 참여한 평조합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관한 정보와 보고서를 모아달라는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AFL-CIO가 차베스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폭로되다 AFL-CIO가 과거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 저항에 직면하는 동안 AFL-CIO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는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는 혼란스러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차베스에 적대적인 세력이었으며, 고용주 편에 선 베네수엘라노동자총연맹(CTV)도 종종 번번히 적대세력에 포함되었다. CTV는 2002년 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나는 2004년 4월에 쓴 기사에서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다음처럼 지적했다. 아메리카통신노동자(CWA)/신문동업조합의 로버트 콜리어의 보도에 따르면 CTV는 2001년 10월, 2002년 3-4월, 2002년 10월-2003년 2월에 벌어진 총파업/공장폐쇄를 수행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기업가연합회인 페데카마라스(FEDECAMARAS)와 협력했다. 콜리어는 CTV가 2002년 3월 쿠데타를 계획하고 조직하는데 직접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콜리어는 “한마디로 AFL-CIO는 반동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활동가들은 AFL-CIO(특히 ACILS)와 CTV의 무수한 관계를 발견했다. AFL-CIO는 쿠데타 직전에 CTV의 관리들을 워싱턴으로 인도했다. 베네수엘라연대센터와 결합한 활동가들은 정보자유법을 활용해서 미국 민주주의기부재단(NED)에 제출된 문서와 보고서를 폭로했다. [NED는 미국 국무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기구며,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됐다. CIA가 벌이는 정치인에 대한 은밀한 매수나 거짓 민간인조직 창설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역주] 자료들은 1997-2002년 동안 ACILS의 활동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어떤 문서들은 AFL-CIO가 페데카마라스가 주도하는 기업가조직과 카톨릭교회, CTV가 연합하고, 차베스 대통령에 대항하는 공동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데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ACILS가 NED에 제출하는 2002년 1/4분기 보고서를 보자. CTV와 페데카마라스는 카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2002년 3월 5일 전국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두 달에 걸친 두 조직간의 회의와 공동계획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사건이었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심화를 막기 위한 ‘민족적 합의’(National Accord)를 도출한 공동활동은 두 조직을 차베스정부에 반대하는 기함 조직으로 확립할 것이다. 연대센터는 두 조직의 협력을 위한 의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초기 모임의 조직 단계를 지원했다. 3월 5일 전국회의는 대충자금(counterpart funds)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전국회의가 열린지 30일이 지나지 않아 CTV와 페데마라카스는 석유회사 경영진의 해고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고, 쿠데타가 벌어졌다. ACILS가 이런 과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려면, 우리는 ACILS의 대표자들이 CTV와 페데마라카스의 지도자와 정기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 또 1997-2001년 동안 NED가 ACILS와 CTV의 협력활동에 지원한 587,962 달러를 무시해야 한다 (2001년에도 153,777 달러를 지원했다). 2002년 12월에는 6개월 간 활동을 위해 11,6001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증거는 활동가들이 AFL-CIO의 대외공작에 대한 항의 행동을 자극했다. 2004년 캘리포니아 총회를 위한 결의안 검토위원회에서 “세계노동자의 단결과 신뢰의 건설”이란 이름의 결의안이 등장했다. 이 결의안은 1994년 7월 캘리포니아주 총회 대표단에서 통과되었다. AFL-CIO의 전국수준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이 자신의 가장 큰 주(州) 지부로부터 힐난을 받은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조합원은 전체 AFL-CIO의 1/6을 차지한다). 미 국무부와 노동외교자문위원회 AFL-CIO의 이러한 활동은 과거 방식의 활동을 포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매우 어두운 징조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노동제국주의로 복귀를 뜻하는가, 아니면 존 스위니가 새롭게 선택한 방침에서 벗어난 예외일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미 국무부의 노동외교[노동부문에 관한 외교] 자문위원회(ACLD)에 AFL-CIO가 참여하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면 몇몇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ACLD는 미국 대외정책의 증진을 위해 국무부가 제안해 설립되었다. 클린턴정부 때 세워졌지만 부시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2. 존 스위니 의장과 린다 차베스 톰슨 사무총장, 윌리엄 루시 국제위원장, 바바라 쉐일러 국제국장과 필 피시맨 국제차장, 해리 캠버리스 연대센터 집행위원장 등 주요 지도부 모두가 ACLD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원회는 과거 노동운동 최고위층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자격으로 참여한 사람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 도나휴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NED 위원이었고 AFL-CIO의 재정책임자였으며 1995년 의장선거에서 스위니와 경쟁했다). 3. 이들 지도자들은 독립적인 행위자이며 특히 부시정부와 다른 접근법을 옹호했다. 4. 이러한 활동은 어떤 출판물로도 보고되지 않으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없다. ACLD는 1999년 5월 20일에 설립되었고, 설립헌장은 위원회의 목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문위원회의 목적은 국무부가 관리하는 노동외교 프로그램에 관해 국무부 장관을 자문하는 것이다. 국무부는 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부와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특히 위원회는 미국 노동정책의 목표와 이상을 증진하고자 하는 국제사회 내의 미국의 지도력을 보장하고자 한다. 누가 ACLD를 착안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국무부의 외교인권노동국의 에드문드 맥윌리암스 국제노동국장은 노동외교를 부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이 냉전시기 미국정부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외교는 냉전 시기 동안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사회를 증진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당시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쳐부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지원이었다. 냉전 이후 정책 결정자들은 노동외교를 격하했다. 동시에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새로운 도전을 낳으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훨씬 더 중요해졌다. 활기찬 노동외교가 다시금 미국 대외정책의 소중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는 “국무부 노동국, 국제개발처(USAID), 해외공보처(USIA)가 수행한 활발한 노동외교가 미국 대외정책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하며, 공산주의와 투쟁하자는 정부의 요청에 노동조합이 “다시 집결했고” 서구 정부를 떠받치는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은 냉전시기처럼 미국 대외정책의 공식화와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증진하고자 하는 목표-민주주의, 인권, 정치적 안정, 사회경제적 발전-는 노동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목표와 동일하다. 그는 세계화가 사회안전망이나 직업훈련 없이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세계 노동자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이처럼 확대되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고, 미국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관심사를 대외정책 결정가들에게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며, 노동운동은 정부의 대외정책 과정에 재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미국과 노동의 동맹은 노동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이 아동노동, 강제노동, 여성과 약소자에 대한 차별적 고용에 기반을 두면 안 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외교의 부활은 냉전시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깨지기 쉬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민주적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맥윌리암스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러한 주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ACLD의 첫 번째 보고서, “괜찮은 노동의 세계: 새로운 세기를 향한 노동외교”를 받고 몇 개월 간 몇몇 권고 사항을 평가한 후 2000년 11월 8일 ACLD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효과적인 노동외교 없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난 4개월 간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당신들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ACLD는 단지 2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되었지만, 부시정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01년 말(9.11 사건 이후)에 나온 보고서에서는 강조점이 이동한다. 보고서는 “노동외교의 역할과 중요성은 미국의 안보를 증진하고 이를 훼손하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싸우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보고서의 이름이 “노동외교: 민주주의와 안보에 복무하자”란 점에서 강조점의 변화를 더 잘 간파할 수 있다. 두 번째 보고서도 첫 번째처럼 노동권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만 두 번째 보고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미국의 안보를 향상시킬 때만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대테러전쟁은 왜 노동외교의 기능이 중요한지 실례를 제공한다. 비참함, 소외, 절망으로 이끄는 노동조건은 테러리즘 세력이 모이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조건의 개선은 테러리즘을 예방하고 대항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나아가 보고서는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것은 테러리즘과 싸우고 안보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모든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고서는 “이슬람 국가의 노동조합”에 대해 다룬다. 보고서는 “이슬람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감성, 정신, 직업을 통제하기 위한 정지적 대리자 역할을 하는 기구이자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전장”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ACILS의 프로그램은 기업과 산업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고양하려는 정책이 이슬람 국가의 노동자에게 현대적인 경제적 사고와 정치적 가치를 심어주는 데 가장 유망한 접근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반복해서 표현하지만, 세계 노동자의 안녕과 호혜와 연대에 기반한 AFL-CIO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제 맥윌리암스의 주장의 모순을 살펴보자. 우리는 냉전시기에 AFL-CIO의 역할이 명백히 반동적이었다고 입증했지만, 어째서 맥윌리암스는 냉전시기의 정부와 노동조직의 긴밀한 관계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계를 재수립해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목표를 공동으로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한 모순적인 주장의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윌리암 로빈슨의 저서, 『과두제의 촉진: 세계화, 미국의 간섭과 헤게모니』를 살펴보아야 한다. 로빈슨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대외정책의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초점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어떤 독재자라도 지지하고 통제하는 것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를 포함하여)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사회”에 적극 간섭하는 것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촉진”이 핵심이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과두제의 촉진 또는 위로부터 엘리트가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과두제 민주주의는 엘리트가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를 뽑고, 그들이 제안하는 방식으로만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특히 USIAD와 국무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과두제 민주주의를 주입하고 있다. 그리고 국무부는 NED를 통해 연대센터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조직과 세계 곳곳의 여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다.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정부 보고서의 주장을 ‘해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노동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국과 해외의 노동자를 공격하는 미국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노동 제국주의의 귀환과 우리의 선택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결과를 볼 때 존 스위니가 이끄는 AFL-CIO의 대외정책이 ‘전통적인’ 노동 제국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AFL-CIO 최상층부가 노동 제국주의로 복귀하는 문제를 숨김없이 다루지 않는다면 AFL-CIO를 ‘개혁’하려는 최근 어떤 시도도 실패할 운명에 처할 게 분명하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며, 의미심장한 변화를 추구하려면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미국과 세계 노동자의 안녕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1) [역주] 이 글은 『Monthly Review』 2005년 5월호에 실린 킴 사입스(Kim Scipes)의 「Labor Imperialism Redux?: The AFL-CIO's Foreign Policy Since 1995」를 요약, 번역한 글이다. 웹사이트 www.monthlyreview.org에서 영어 원문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전국작가노동조합(National Writers Union)에서 활동하며 퍼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
김 정 은 | 여성부장 성매매는 여성의 빈곤, 여성 노동의 현실, 성의 상품화, 가족 제도 하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등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들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지금껏 성매매는 이러한 사회구조적인 원인들이 제기되기보다는 그 원인이 '성을 파는' 여성들의 도덕적 문제로(또는 여성들의 성을 사는 남성들의 문제로) 치부되었고,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공격이 이뤄졌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성매매 여성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사회적인 낙인과 편견으로 고통 받았다. 따라서 우리가 성매매 문제를 개인적인 행위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성매매 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이 성매매 여성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성매매 문제 해결에 대한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은 그녀들의 긍정적인 주체화, 조직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하는 자, 성노동자로서 그녀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그간 남한사회 성매매 운동에서 펼쳐진 담론들을 살펴보며 성매매 여성들이 주체로 설정될 수 없었던 성매매 논의의 공백을 현재 성매매 '근절'의 근거로 제기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제기하고 있다. 성매매 여성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은 '성'노동자라는 차이를 주장하기 보다는 '노동자'로서의 공통의 권리를 긍정하자는 주장이다. 이 때 성매매가 개별행위자들의 행위이기에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금지주의의 관점을 폐기하고, 사회구조적인 지배, 착취, 폭력의 문제로 쟁점을 확대하고 성노동자들의 주체화와 조직화를 가능케 하기 위한 측면에서 비범죄주의는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성매매는 여성 일반의 문제이고, 여성 해방의 과정 속에서 폐절될 수 있다. 성매매 '근절'이라는 당위 선언이 아닌, 성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성매매 폐절을 위한 운동 속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실천이 되어야 한다. 성매매 논의에서 성노동자가 부재했던 이유 성매매방지법 시행 이후, 성매매방지법의 강력한 시행을 요구했던 여성운동 단체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했던 지점이 아마도 집결지 여성들의 시위를 접했을 때일 것이다. 성매매방지법 시행이 오히려 생존권을 억압한다고 말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운동계가 말하던 '피해' 여성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성운동계는 '포주의 강요', '스톡홀름 신드롬'(인질이 장기간 범인에게 잡혀 있다보면 나중에는 범인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운운하며 그녀들의 발언 자체를 '사뿐히 즈려밟고' 초지일관 경찰의 강력한 단속을 촉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문제제기가 성적 억압의 한 형태인 성매매에 집중되었던 상황에서 성매매에 대한 분석이 성매매 여성의 주체성을 상정하지 못한 채 성매매 '근절'을 위한 법 개정 운동으로 나아갔던 논의의 과정들을 반영한다. 기생관광 반대 운동으로 대표되는 70~80년대 성매매 운동은 기독교 여성운동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이 기독교 여성운동은 정부의 기생관광 정책과 이를 통한 외화 획득, 향락 산업의 문제를 비판했다. 이들은 기생관광 반대의 근거로 '민족의 수치'를 언급하거나 성매매 여성의 인권 유린을 성의 상품화로 인한 '정조'유린의 문제로 제기했다. 당시 성매매 운동은 가부장제에서의 남녀 성별 권력관계, 성매매 문제와 여성 문제 전반과의 연관을 해명하지 못했던 한계를 보였다. 이러한 기독교 여성운동은 이후 쉼터와 쉼터의 연합체인 ('매매춘 근절을 위한') 한소리회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절박한 여성'을 지원하고 성매매 여성의 인권문제를 이슈화했다. 이들은 성매매를 개인여성의 문제가 아닌 '매매구조'의 문제로 제기했다. 매춘여성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내 성매매 여성이 자발적으로 매춘을 하고 있다는 사회적 통념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탈매춘이 왜 불가능한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 성매매 현장에서의 인신매매, 구금, 강간, 포주의 착취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몰린 성매매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이 폭로되었다. 성매매 여성은 거대한 성적 착취 구조의 피해자로 인식되고 성매매 현장에서 '구출'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한계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종교적'인 맥락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여성학계가 성매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의 문제는 단순한 성 문제가 아니라 여성노동, 가족 등의 문제가 얽힌 여성문제의 결정판이라는 인식 또한 가능하게 되었다.(민경자, 「한국 매춘여성운동사」, 『한국 여성인권운동사』, 한울아카데미, 1999)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성매매가 여성의 생존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는 점을 간과한 채 성매매 문제에 대한 과제로 성매매 '근절'을 고수하고, 성매매 반대의 근거는 "성매매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라는 명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성매매 근절을 요구하고 성매매방지법 개정운동을 펼쳐온 것이 현재까지 여성운동계의 성매매에 대한 입장이다. 여성운동계는 '자신의 쾌락과 이익을 위해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을 사물로 취급하는 성매매의 경험은 결국 여성을 대상화, 사물화하는 성폭력의 경험과 일치하고 남성에게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듯, 성매매는 돈을 주고 행하는 "연습게임"이라며' 서구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논거로 삼아 성매매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원미혜,「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 『섹슈얼리티 강의』, p180, 동녘, 1999) 남성일반이 여성일반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구조 아래서 성매매 여성은 성폭력의 피해자이며, 성매매에서 자발이나 동의는 불가능하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성매매방지법에서 성매매 여성을 동질적으로 피해자라 규정했던 지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성매매를 '선택'했고 성매매를 지속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주장하는 성매매 여성들의 요구와 행위는 그녀들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녀들은 정신적 치료와 사회 '적응' 훈련이 필요한 더욱 약한 피해자가 되어갔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매매에 대한 논의는 '왜 성을 파는 사람이 여성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왜 성매매 여성들이 성매매에 유입되고 남아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간과한 채 성매매 여성들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억압해온 한계를 지닌다.1)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서구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에 대한 분석이 남성의 '폭력적인 성'으로 인한 여성의 성적 실천의 위험성을 부각하면서 여성들이 성적 실천에 대해 발언하지 않거나 그로부터 후퇴했던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실천 지점을 남기지 못했던 역사적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성매매 문제는 성매매 여성들의 문제로만 환원되고, 성매매 여성들은 '정조'를 훼손당한 자, 구원받아야 하는 자, 남성의 성적 착취의 희생자, 스스로 성매매를 '선택'했다고까지 말하도록 '세뇌'당한 성적 착취 구조의 피해자로서만 인식되었다. 성매매방지법 이후 생존권을 위해 성매매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집결지 여성들의 존재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는 다뤄질 수 없었던 공백이었던 것이다. 성매매 여성도 노동자다! 역설적이게도 지금껏 남한의 성매매 금지주의 법 아래에서 범죄자이자 '문란한' 여성이라 낙인찍히며 살아온 성매매 여성들이 집단적인 시위를 통해 자신들을 드러내고 권리를 요구한 것은 성매매방지법 제정과 시행의 후과다. 그녀들의 존재와 요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와 여성운동계에 대항하여 이들은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노동에 의한 대개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으로서 노동자'2)라고 말하며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을 성'노동자'로 호명하는 것은 육체적인 거래라는 도덕적 기준을 고수하며 그녀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인간이자 노동하는 자로서의 공통의 권리를 긍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녀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그녀들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발언할 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성매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 그 쉽지 않은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리자가 아닌 주체로서 사회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된 그녀들의 삶을 가시화하는 것은 그녀들을 억압했던 사회적 편견과 낙인을 분쇄하는 운동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자고 했을 때, "성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인가?", "성매매를 노동으로 긍정함으로써 성매매를 지속시키자는 것 아닌가?"하는 물음들이 제기된다. 과연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칭하면 성매매가 확대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동안 성매매가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행위라고 명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성매매가 노동이냐 아니냐의 성격 규정은 성매매 감소· 확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매매를 발생시키는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를 제거하는 운동의 과정을 통해서만 성매매는 폐절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의 임노동을 팔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있다. 이 때 성매매가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것은 현재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대다수의 노동이 그러한 '노동'이 아닌 것과 같다.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은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형태를 띠기 때문에 노동자의 집단적인 권력을 통해 착취에 맞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임노동 관계를 폐절하는 운동의 일환이 된다. 그러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임노동 관계를 폐절하는 것이 즉각적으로 그러한 임노동 관계에서 철수하라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이유에서 집결지 여성들도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일터에서 철수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여성의 의제로서 가사노동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여성들이 이를 전담하자거나 가사노동이 이뤄지는 공간인 가족을 폐쇄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가사노동이 성별분업이라는 논리로 여성들에게 전담되고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을 평가절하했던 측면을 비판하고 가사노동의 전화를 제기하고자 했던 측면을 되새김해야 할 것이다. 성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장 '폐쇄'가 아니라 자신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노동할 수 있는 집단적인 권력을 형성하는 권리 쟁취의 과정이다. 현재 성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착취당하며 건강권을 침해당하고 있다. 성노동자들은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노동하며, 노동시간도 무척 길고, 노동과정에서 원치 않는 임신, 그에 따른 낙태, 성병이나 AIDS와 같은 질병에 노출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성노동자 자신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매매를 통해 생존을 유지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성노동이 자아실현을 위한 '노동'이 될 수 없으며 종국에는 폐절되어야 한다는 지향은 명확하다. 성매매는 여성의 육체와 성적 이미지가 상품 가치로 거래되는 성의 상품화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매매만을 '근절'함으로써 성의 상품화 일반을 저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와 성적 이미지를 통제할 수 있는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인식하고 요구하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그 한 형태인 성매매 또한 폐절될 수 있을 것이다. 성매매를 비범죄화하자! 성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고 권리 쟁취를 위한 조직화를 가능케 하기 위해 성매매의 비범죄화는 필연적인 요구이다. 당연히 현행 범죄자의 신분이 성노동자들의 주체화와 조직화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금지주의가 성노동자들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억압해왔다는 비판적 평가와 맞닿는 바이기도 하다. 금지주의는 성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온갖 폭력에 노출시켰다. 금지주의는 성매매의 음성화를 동반하는데 음성화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성매매를 양산하는 범죄 조직, 그와 결탁한 경찰을 만들어냄으로서 음성적 성매매를 가능케 하는 구조를 양산한다. 음성화는 단지 성매매 업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단속이 어려워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노동자들의 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포주와 남성 구매자들은 성노동자들이 범죄자라는 신분을 악용하여 그녀에게 폭력과 착취를 휘둘렀지만 성노동자들은 처벌이 두려워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남성들에게 성매매가 용인되는 것과는 별개로 성노동자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로 보고 손가락질하는 '창녀' 낙인은 성노동자를 가정과 공동체로부터 추방하여 더욱 고립시켰다. 고립된 여성들은 여기저기 팔려다니고, 지속적으로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자신들의 아이를 양육할 권리마저 의심받았다.(김정은, 「성매매방지법과 성매매를 둘러싼 쟁점」, 『월간 사회진보연대』, 2004년 11월호, 통권 50호) 그러나 비범죄주의가 성매매를 둘러싼 모든 법률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성매매 자체를 규제하지도, 성매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의 비범죄주의 국가에서 매춘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 상업적 목적을 위한 아동과 성인에 대한 성적 착취 행위에 가담한 자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 규정을 두는 등의 적극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법률의 개입이 필요한 지점은 성매매를 금지하는 지점이 아니라 성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지점이어야 한다. 포주로부터 부당하게 임금을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 남성 구매자의 폭력과 강간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남성 구매자를 처벌할 권리, 평생 직업도 아닌 성매매를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신매매 되지 않을 권리 등은 성매매를 금지하는 형법이 아닌 노동법이나 상법, 민법과 같은 여타의 법률로 보호할 수 있다. 현재 성매매를 둘러싼 각 국의 입법 정책을 금지주의, 합법적 규제주의, 비범죄주의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비범죄주의 또한 국가가 성매매를 관리· 통제하는 법률의 일환이 아니냐는 질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비범죄주의는 19세기 유럽의 합법적 규제주의 정책이 공창이나 등록제로 성판매 여성을 '통제'했던 것에 반대하여 폐창운동이 전개되면서 모색된 하나의 시도이자 전략이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주장은 금지주의가 아닌 나머지, 합법적 규제주의나 비범죄주의에서 하나를 선택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 어떤 정책을 행하든 간에 성매매를 완벽히 근절하거나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매매 관련 법률안의 의미를 상대화하고 사회적으로 만연된 성매매의 형태를 억제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최소화하는 데 성매매 법률안의 의미를 둔다면, 우리는 성매매 정책을 사고함에 있어 어떤 법률안의 형태가 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매매가 도덕적이거나 법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개별 행위자들의 행위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지배, 착취, 폭력의 문제로 쟁점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성매매 수요-공급에서 성 구매자와 알선자, 성매매 여성을 성매매 성립의 원인으로 보고 이들을 처벌해야 성매매가 감소한다는 금지주의의 관점을 폐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범죄주의를 통해 우리는 성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사회구조적인 원인들을 인식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김정은·호성희, 「성매매, 새로운 담론을 위해(2)-각 국의 성매매 법률안 고찰」, 『월간 사회진보연대』, 2005년 3· 4월호 통권 53호) 한국 사회에서 서울여성영화제라는 형식을 빌어 공식적으로 성노동 담론이 제기되기도 하고, 아직은 적지만 여러 여성단체나 조직들이 성노동자를 인정하고 그녀들과의 연대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성노동자'만'을 비범죄화하고 남성 구매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제기되고 있다. 『여/성이론』에서 고정갑희씨는 성매매종사여성들의 노동을 성노동으로 칭하고 당연히 그녀들을 비범죄화해야 하지만 '진짜 범죄자는 가부장적 구조를 유지해 온 남성 집단이므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성구매자를 처벌하게 되면 여성들이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생존을 누군가가 책임져 줘야 하고 그래서 구출과 구제라는 용어가 나오게 된다, 이런 딜레마는 있지만...'(고정갑희, 〈성매매방지법과 여성주의자들의 방향감각〉,《여/성이론》통권 12호)이라고도 말한다. 그녀는 이런 '딜레마'를 감수하면서까지 남성 구매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성노동자만을 비범죄화하여 처벌을 면하는 것과 여성운동진영이 모든 성매매 여성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처벌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 다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가부장적 구조를 유지해온' 남성 집단을 처벌하면 가부장적 구조가 폐지될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처벌되어야 가부장적 구조가 폐지될 수 있을까. 남성들이 처벌되기만 하면 여성들의 성적 억압은 사라지는가. 여성의 성적 억압과 착취라는 가부장적 구조는 남성 일반이 유지해온 것이 아니라 가족 제도 하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욕 추구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었던 방식에 그 원인이 있다. 가족 제도 하에서 여성의 성은 재생산을 위한 기능만을 부여받았으며, 여성의 성욕은 억압되었다. 성매매에서 드러나는 ('성매매 여성'이 아닌) 여성 '일반'의 성적 억압과 착취의 구조는 가족 제도 하에서 성욕이 부정되고 억압되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여성의 억압과 종속에 기초한 가족 제도의 전화 없이는 여성 '일반'의 성적 억압은 소멸되지 않는다. 성노동자와 연대를 실천하자 박정희 군사정부가 '사회악'을 근절한다는 차원에서 1961년 제정된 윤락행위등방지법을 제정했듯, 2004년 제정된 성매매방지법도 '국가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한' 것이지, 진정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함은 아니었다.(김정은, 「성매매방지법과 성매매를 둘러싼 쟁점」, 『월간 사회진보연대』, 2004년 11월호, 통권 50호) 도시개발사업을 통해 집결지를 폐쇄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는 집결지를 중점적으로 단속하여 눈앞에서 없애버리겠다는 발상을 드러낸다. 정부는 성노동자들이 외치는 생존권 보장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거 계획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여성부는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위한 예산을 확충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 현실적인 수준에 못 미치는 실정이다. 그러나 턱없이 적은 자활생계비는 탈성매매라는 '사회복귀'를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면서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권 문제는 가벼운 문제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매매를 병행하는 여성에게는 집결지 여성들의 자활생계비를 지원하면 안 된다는 식의 여론이 형성되고,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을 지원하는 문제가 법률상의 문구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탁상공론이 제기되는 실정은 성매매방지법이 결코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성노동자들과 그녀들의 생존을 건 요구를 법 논리라는 빌미로 억압하고 방관하는 정부를 규탄한다. 우리는 성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에 함께 할 것이다. 여성운동계도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성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 우리가 연대해야 할 주체이자, 권리의 주체로서 성노동자를 인정하고 연대를 모색하는 길은 여성 해방 운동에 새로운 지평이 될 것이다. 1)1960년대 아메리카 핵가족의 위기와 함께 출현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여성운동계에 수입되어 현재까지 여성운동계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성매매 근절운동과 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는 현실 운동에 대한 평가를 제기하는 바,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현미, 「2세대 페미니즘」,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 공감, 2003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2)2005년 4월 5일, <성노동운동민중연대>에서 낸 「여성계는 반성하고 진보진영은 성노동자들의 죽음을 외면 말라!」는 제목의 성명서의 일부에서 발췌했다.(www.k-hnews.com) 이 단체의 조직 구성이나 성격이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성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고자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