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에서 지난 2월 29일 철도노조 서울본부에서는 전국체신민주노동자회(이하 체신민노회)가 창립되었다. 비록 체신민노회 창립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전국에서 모인 수십 명의 노동자들은 차분하게 때론 논쟁적으로 6시간이 넘는 총회를 진행하였다. 이날 총회는 집배원노동자협의회(집노협)가 기존 집배원노동자들만의 협의체 수준에 머물렀던 한계에서 벗어나, 전체 체신노동자의 활동가 현장조직으로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데 공감하는 자리였다. 이로써 체신민노회는 집노협의 장시간노동과 비정규직 철폐라는 과제를 계승하고, 체신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첫 번째 과제로서 체신노조를 실질적으로 민주화하기 위한 길에 올라섰다. 3년 전 지금, 체신의 비정규직투쟁 2001년 10월, 비정규직 집배원노동자들은 집노협을 탄생시켰다. 그 후 2년 6개월의 참담한 세월이 흘렀다. ‘상시위탁집배원’이라는 비정규직 신분으로 노동하던 체신노동자들은 비참한 현실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미 정보통신부는 IMF외환위기 이후, 지난 수년간 수천 여명의 체신노동자들을 감축한 바 있으며, 비정규직의 확대, 민영화 계획까지 제출할 전망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체신 노동자의 생존권과 건강권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었으며, 정권과 자본의 다양한 칼날에 무방비로 공격 당하고만 있었다. 여기에 반세기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체신노조는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조합활동을 온전하게 실행해오지 못했기에 체신 노동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노예의 삶을 강요받아 왔다. 하지만 수많은 차별과 근로기준법 위반 그리고 안정되지 못한 신분이라는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목숨을 내맡겨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이러한 상황에 내맡겨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2001년 3월 ‘비정규직 노동조합’설립 투쟁과 ‘비정규직 대책위원회’로 결집된 활동은 이후 집노협의 출범을 낳았다. 이로써 체신노조를 실질적으로 민주화시키기 위한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으며 그 귀결로 ‘전국집배원노동자협의회’의 탄생하였다. 정보통신부는 당시 투쟁하던 노동자에게 계약해지라는 최대의 탄압을 휘둘렀다. 하지만 집노협은 탄압에 절대 굴하지 않으며, 비록 소수였지만 전국 순회 투쟁을 전개하며 강인한 역사를 만들어 갔다. 체신현장의 상태 체신현장은 각종 통제로 힘겨워지고 있다. 집배 업무 완화를 위하여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용되었지만 몇 년여의 세월이 지난 지금, 어느 우체국을 막론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 애초 비정규직 도입 자체를 막아내지 못한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인원 증원이 수반되지 않는 비정규직의 폐지 및 축소는 집배원 노동자에게 또다시 상당한 업무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업무의 원칙성만을 강요하는 행정지침 속에 체신 노동자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집배 결위 구역에 대한 충원은 몇 개월째 표류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구체적 계획이 잡히지 않고 있다. 겨우 해결된다 하여도 또 다른 비정규직 고용으로 대체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집배 구역 축소 이야기가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금융기관과 정부당국은 우체국금융의 비효율성과 낮은 수익성을 지적하며 민영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체신사업에 대한 수익성을 목표로, 철저하게 자본의 이해와 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연장선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업무 관련하여 현장의 통제 강화, 비정규직 증가 및 인력 감원 등 구조조정의 지속적 추진은 결국 직종과 고용형태를 불문하고 전체 체신 노동자의 생존권 침해와 건강권 하락으로 이어질 뿐이다. 체신의 현장조직으로 서기까지 이러하듯, 희망이라고는 도대체 보이질 않는 체신에서 제대로 살아보고픈 자그마한 소망의 확고한 실현을 위하여 체신노동자들의 활동력을 모아 체신민노회로 집결하였다. 과거 체신에서는 전국체신노조위원장 직선제추진위원회와 같이 일정하게 체신노조 민주화를 지향하는 단체도 존재하였지만 체신노동자들 사이에 뿌리박지 못하고, 해산하는 경험을 밟기도 했다이로 인해, 체신민노회는 체신에서 유일하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불문하고, 전체 체신 노동자의 단결을 추구하며 체신노조를 자주적?민주적 조직체로 바로 세우고 인력감축, 민영화, 비정규직화 등 정권의 구조조정을 분쇄하는데 일조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민주노조 운동의 귀감이 되었던 몇 몇 사업장 노동조합조차 최근 만연된 노사협조주의 등에 휘둘려 조합원의 뜻과 괴리된 모습이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작년에 연이어 터진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의 분신에 거의 속수무책인 민주노조가 아니던가. 이러한 민주노조의 상황은 분명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체신민노회가 어느 방향으로 자신의 활동을 가져나가야 하는지 타산지석의 교훈을 주고 있다. 비록 체신 민노회가 제대로 된 조직력을 완비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진정한 노동운동을 찾아나가려는 모습은 전체 노동운동 속에서도 하나의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체신노동자의 희망으로 체신노조는 애초 조합원의 의지가 담겨지지 않은 이승만 정권의 요구에 의해 출범하였으며 반세기의 역사 속에 체신 노동자들은 정부와 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모든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체신노조는 조합원의 방패막 역할이라는 자기임무에 충실하지 못하였던 바, 체신민노회는 체신노조의 자기역할을 강제시키며 체신에서 민주화의 주체가 설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 우선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이 계급적 원칙에 입각한 치열함으로 자본의 공격을 분석?격파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서며 내부에 썩어있거나 썩어가는 의식을 도려내고 건강한 의식을 발굴?발전시킬 것을 결의했다. 모든 사안의 뿌리가 될 노동자 대중들이 모든 것들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PSSP
멕시코에서 이주해온 한 여성은 이미 미국에 살고 있는 언니와 함께 한 고층 빌딩 청소 일을 하게 된다. 젊은 그녀 앞에 한 남성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는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한 나이 많은 노동자가 근무시간에 지각을 하게 되자, 관리자는 근무 태만과 안경을 가져오지 않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잘라버리려 한다. 마침 노조 설립에 관심을 갖게 된 주인공과 주위 노동자들은 합심하여 단결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관리자의 방해공작과 해고 협박이 이어지지만, 노동자들은 다른 청소 노조원들과 연대하며 스스로를 조직화한다. 턱없이 낮은 임금에 항의하며 임금 상승과 의료보험 혜택 등을 내걸고 사측과 투쟁하여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다. 결말에선 두 자매의 갈등도 서로를 이해하며 해소된다. 언니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이주해 성매매에 종사했었고 그 기반으로 이제야 그나마 직장을 얻어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데, 동생이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되면서 안정된 생활을 잃게 될까 염려하며 동생과 갈등을 빚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들이 좌초되고 타협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는 현실적인 갈등들 또한 이 영화는 놓치지 않고 있다. 계속 봐야지 벼르다가 간만에 비디오방을 찾아 본 “빵과 장미”라는 영화의 내용이다. 오랜만에 보는 정치적으로 건전한(^^) 영화였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은 스스로 단결하여 조직화하는 것과 동시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동하는 여성들이 조직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사업장에 모여 함께 노동한다는 것은 노동자 조직화에 있어 큰 장점일 것이다. 실제 많은 여성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재택 근무의 형태로, 가내 하청의 형태로 일하는 노동자들, 노동자임을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비공식 노동자들이 주로 여성이다. 그녀들은 노동하면서도 노동자로 인정받지도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도 못한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만 하더라도 150만 여명으로 추산되는데, 그녀들은 윤리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감히 자신의 직업조차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흩어져있고, 지속적으로 노동할 수 없다는 것도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어려운 점으로 작용한다. 여성 취업곡선은 M자형을 그린다. 결혼 전까지 높았던 취업률은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는 시기에 급격히 감소했다가 이후 다시 상승하게 된다. 양육이나 가사 노동 때문에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취업상태에 있지 못하고 실업을 반복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여성들을 조직화하려면 다른 방식의 조직화 계획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비공식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사업장에 앉아 노조원들이 가입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있는 영세 사업장, 그녀들의 가정과 같은 곳으로 가서 직접 그/녀들을 조직해야 한다. 사업장별 노동조합을 고수하는 형태로는 더 이상 여성노동자들을 폭넓게 조직할 수 없다. 지역일반노조나 실업자를 포함하는 노조 형태가 이러한 점에서 긍정성이 있는 것 같다. 좀 더 조사,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최근에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 집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엄마 간병을 하느라 병원에 자주 드나든 나는 간병하는 직업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아픈 사람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는 보살핌 노동에, 환자 볼일까지 치워야하는 허드렛일, 환자 옆에서 꼬박 새우잠을 자야하는 장시간 야간 노동까지...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노동해온 그녀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그녀들은 이제 비공식 부문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스스로를 조직화하며 투쟁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 비공식 부문 여성 노동자 조직화는 우리에게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여성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좀 더 정세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연대투쟁이 진행되어야 한다. 나는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인식이 무조건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안정적으로 노동하던 남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화되고 사내하청화된다는 것에 대항해서 정규직화를 외치고 있는데, 이런 현실 이면에는 애초에 비정규직이었고 노동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은 간과되어 있다. 나는 이제껏 여성이 처한 불안정한 노동 상황이 전반적으로 확산, 심화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노동을 분석하는 개념들이 더욱 예각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노동운동, 단위 사업장 중심의 투쟁이 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주체 형성에 기여하지 못하고 수세적인 투쟁을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신자유주의 시대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새로운 주체로 세워낼 수 있는 운동이 전개되어야 하며 이들과의 연대를 위한 각각의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만이 침체되어 있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여성위 토론회에 참석했던 ‘장애여성공감’ 양영희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성이 처한 노동 현실의 열악함에 대해, 또한 장애 여성이 겪는 또 다른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장애 여성의 노동 실태에 대한 조사는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다만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 정도로만 조사가 이뤄지는 방식은 장애 여성이 무성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것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도 노동 현장에서는 철저한 성별분업 하에 여성적인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일을 한다고 장애 여성들이 여성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취급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인식과 지위가 여성이 노동하는 곳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말이다. 장애 여성들의 경우, 온전히 학교 교육을 이수하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영세 수공업 등의 노동현장에 투입되어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극악한 노동 착취에 시달린다. 이러한 현실은 장애 여성의 교육권 박탈과 노동 상황의 열악함을 말해준다. ‘여성’이 ‘노동’한다는 것, 많은 숙제를 남긴다. PSSP
2월 26일에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있었던 [쟁점토론회] 참여복지5개년 계회 과 일자리만들기 사회협약 토론회 자료집입니다. 자료집 목차 주발제 참여복지 5개년 계획 비판과 과제: 강동진 일자리만들기 사회협약 비판: 김혜진 토론문 장애인 복지정책비판: 양영희 참여복지5개년 계획에 제시된 주거부문에 대한 검토 및 비판: 문헌준 청년실업운동본부 투쟁방향과 계획: 최정민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저항하는 공동행동 제안서 참여복지5개년 계획의 주요내용 일자리만들기 사회협약 전문
비정규공대위에서 실시한 진상조사 보고서입니다.
고 박일수 동지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꼬리를 무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죽음'들'에 무뎌지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살을 에는 자본의 탄압보다 두려운 것은, 이겨낼 생각조차 품지 못하는 사람들의 온순함이다. 박일수. 50세.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인터기업' 노동자. 노조의 '노'자만 꺼내도 서슬 퍼런 해고가 현실이 되는 침묵의 공장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 임금체불 진정서 한번 내보겠다고 연판장을 돌리던 이. 원하청 노동자 하나하나 만나가며 연대를 호소하고 투쟁을 조직했던 이. 심장의 피 꺼내 쓴 듯한 울림 깊은 유서를 A4용지 석 장에 빼곡이 적어 집에 한 통, 품속에 한 통. 울산에선 부리나케 분신대책위가 꾸려졌다. 유일한 유족인 딸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검을 마친 뒤 현대중공업 정문 바로 앞 울산대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다. 현대중공업노조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짙다"면서 대책위 참가를 거부했다. 이어 "고 박일수 씨는 현대중공업은 물론, 현대중공업 협력회사인 인터기업과도 근로계약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임을 민주노총 울산본부에 친절히 알려왔다. 이도 모자라 "현중노조의 요구가 무시되고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현 사태를 악용할 경우, 민주노총은 물론 울산지역의 제 노동단체와의 모든 관계를 신중히 재검토할 것임을 천명"까지 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노동자들은 크레인 고공농성을 시도하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경찰에 넘겨졌다. 그 시각 정문 밖에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이 공장진입을 시도하다 잡초처럼 짓이겨졌다. 여성도, 시의원도 예외가 없었다. 유족은 검은색 소나타에 실려 납치될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납치범 중 한 명은 현대중공업노조 이 아무개 기획부장이었다. 경찰도 찾지 못했던 고인의 이복동생이 돌연 등장했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유서는 차라리 비정규직을 둘러싼 21세기의 야만을 폭로하는 한편의 신랄한 고발장이었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존엄성은 개만도 못한 처지…암울한 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줄 곳은 아무 곳도 없다…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억울함을 노동부에 고발해봐야 부당해고비 몇 푼 받으면 끝난다…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한다…현대 중공업 공장 사내복지 시설을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 뿐…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현대어용노조는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조이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 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고인의 분노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인상된 시급 640원을 소급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다가 하청업체 하나가 통째로 날라 가는 곳이 현대중공업이다. 원청노동자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샤워실에 따뜻한 물과 수건조차 나오지 않는 곳이 현대중공업이다. 자본이 쳐놓은 차별의 그물은 이렇듯 촘촘하다. 하나하나 셀 수조차 없는 일상적 차별에서, 정규직 노조라면 상상도 못할 부당노동행위까지, 자본은 비정규직을 인간 이하로 대우했다. 위험수위를 넘은 차별은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됐다.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이 지난해 발간한 <금속산업 사내하청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실태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현재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수는 모두 14,050명이다. 2002년 1월 사내 하청노동자가 9,128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9개월만에 5천여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숫자의 하청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같은 현상이 비단 현대중공업만이 아닌 모든 직종과 산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폭증은 철저한 이윤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자본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을 선택했다. 자연스레 노동통제 및 노동강도도 직영노동자보다 가혹해졌다. 심지어 현대중공업은 다른 사내 하청업체로 이직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출입증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출입증제도는 사내하청 노동자 관리를 위한 전산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으며, 다른 회사뿐만 아니라 사업장, 나아가 지역차원의 이동도 통제하고 있다. 노조결성을 시도했거나, 노조에 관심을 보이거나, 노조에 적극적인 노동자의 취업을 막기 위한 블랙리스트도 횡행한다. 현대중공업은 하청업체별 인력관리를 위해 구축된 통합전산시스템을 원하청업체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 구성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원 대부분은 노조결성 직후 해고됐고, 지금까지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다. 정부는 잇따르는 비정규직의 죽음과, 이 죽음을 불러온 사태악화의 주범이란 역사의 판결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이번 사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분명히 기록하고자 한다. 고 박일수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차 가해자는 분명 자본과 정권이다. 노무현 정부는 취임 1년 만에 비정규노동자 2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살인정권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보다 시선을 돌려야 할 곳은 바로 우리 스스로다. 고인이 겨눈 비판의 화살은 정권과 자본을 향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안이한 인식과 불철저한 연대도 죽음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정규직노조 이야기는 아예 말자. 그들이 '비정규 투사'가 되길 기대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사회주의 언론'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보수정치인들까지 '차별 철폐'를 심심찮게 외치고 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민주노조 진영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비정규 사업을 '제1과제'로 삼아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아직 한참 부족했다. 각종 정책과 제도개선안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그 투쟁을 주도하고 이끌어야 할 투쟁주체는 아직도 형성되지 않았다. 비정규 투쟁주체 형성의 난망함이 그들의 불안정한 신분에 있음을 깨닫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정규직노조의 과제로 규정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임단협 말기 슬그머니 양보할 수 있는 '카드' 이상이 아니지 않는가. 혹 그렇다면 이는 차별에 멍든 비정규 노동자들의 눈물 젖은 얼굴을 다시 한번 가격하는 것은 아닌가. 활동가라면 누구나 성경처럼 외우고 있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는 공염불에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은 아직도 '노조운동의 현실을 모르는 학구파들의 푸념' 이상이 아닌가. 사람이 몇씩 죽어나가도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가 아닌가. 다시 반문해야 한다. 고 박일수 동지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번 싸움에서 무엇보다 역점을 둬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과 반목을 딛는 일이다.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기획하고 수행해야 한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급기야 오만을 넘어 방자함에 이른 자본과 정권은 사태의 본질을 노동계급 내부의 갈등으로 치환해 해석할 것이다. 계급 내부의 약한 고리를 물고늘어지며 하나의 대오가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현대중공업노조의 이해할 수 없는(혹은 충분히 예상됐던) 반응은 그들에게 참으로 요리하기 좋은 호재임이 틀림없다. 단언컨대, 지금 싸움의 핵심은 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 그 단순한 진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분명한 이 명제가 실현되지 않을 때 닥쳐올 불행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지경임을 확신한다. 죽음의 행렬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그 때마다 분노에 몸을 떨던 노동자는 그 분노만큼의 절망에 빠져들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패륜적인 의혹처럼 어둠의 세력이 죽음을 부추겨서도 아니며, 현실의 노동운동이 무능해서도 아니다. 문제는 모두에게 닥친 노동운동의 위기 일반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전투성 혹은 허울좋은 투항에 경도된 노동운동의 현실이다. 좌표를 상실한 노동운동은 계급대중을 두 가지 길로 내몰았다. 하나는 죽음도 불사한 극단적 항거이며, 다른 하나는 당장의 안락함이 보장되는 투항이다. 그칠 줄 모르는 자본의 공세와 융단폭격 속에 이 땅 노동자는 빈사상태에 놓였다. 폭격은 때론 '비정규직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고, 때론 '손배·가압류'라는 꼬리표를 달거나 '해고'라는 얼굴로 나타났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은 노조결성도 시도해보고, 수배생활을 견디고, 크레인 농성도 해보지만 단단한 자본의 벽 앞에 절망하고 만다. '사회적 합의'를 미끼로 달콤한 미소를 보내는 자본 앞에, 어떤 이들은 쉽게 투항한다. 먼 앞날의 효과보다 눈앞의 성과에 만족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들은 차라리 자본의 품안으로 들어간다. 협조와 타협을 앞세우고, 투쟁의 준비를 내세운다. 공장 안에 틀어박혀 고전적인 임단협 투쟁에 안주하기도 하고, '사회문제 해결'에 목소리 높이며 정작 문제의 근원은 외면한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투항은 명분과 실리 모두를 갖춘 것으로 포장된다. 보다 건강한 이들은 차마 투항하지 못한 채 끝간데 없는 싸움을 택하지만, 노동운동의 위기 속에 활로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죽음을 택한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명제 중 하나인 '노동자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통한 비정규직 철폐를 향해 총진군해야 한다. 정규직노동자의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장·단기적 계획을 수립하고, 강령 제·개정 운동을 통해 비정규 차별철폐의 정신을 담는 등 조직문화 혁신사업을 펼쳐야 한다. 임단협 투쟁에서부터 원하청 공동투쟁을 활성화해 민주노조 운동의 진일보를 이뤄내야 한다. 절망을 부르는 투항주의를 극복하고, 근본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정방향을 걸어야 한다. 다시 한번 고 박일수 동지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성명] 노무현정권는 계속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력, 강제연행을 즉각 중단하라. 지난 2월 15일 노무현 정부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를 만나러 간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단 샤말 타파 대표를 불시에 강제 연행되는데 이어, 이에 항의하는 2월 17일 출입국관리소 앞 집회를 출입국관리소 직원 80명과 경찰이 침탈하여 네팔인 굽타 씨가 폭력적으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월말까지 단속추방을 하지 않겠다던 정부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법무부장관이 이주노동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민주노총과 논의하겠다고 말한 것이 언제였던가? 이번 사건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정부가 보였던 ‘대화와 양보’의 목적이 결국 이주노동자들의 투쟁 자체를 와해시키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누가 이주노동자들을 이 나라로 받아들였는가? 누가 이주노동자들을 불법체류자로 만들었는가? 바로 한국의 정부였다. 명백하게도 이번 사건을 비롯하여 고용허가제 발표 이후 벌어진 모든 일의 책임은 한국의 정부에게 있다. 과거 경제 부흥을 위해 이주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그들이 처한 체불임금 문제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한 어떠한 해결도 없이 무작정 정부의 방침이니 나가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 오기 위해 천만 원, 이천만원씩 소개비를 내고도, 임금체불과 임금횡령,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한 산업재해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도 묵묵히 일해 왔었다. 정부는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못할망정, 되려 범죄자로 만들고 폭력을 행사하고 잡아가두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신자유주의와 정권의 횡포로 고통 받고 있고, 이에 맞서 싸우려는 모든 민중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해야 한다. 참여정부가 보여주는 배제와 폭력은 단지 ‘외국’이주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현실이 민중들에 대한 분할과 배제, 폭력의 정치가 ‘국적’을 불문하고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비인간적인 비정규직 차별에 저항하는 노동자들, 농업과 자신의 삶을 파탄 내는 개방에 맞서 저항하는 농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그들에게 붙여지는 ‘폭도’와 ‘사회 불안정 세력’의 딱지를 보라. ‘참여정부’에게 고통 받는 민중, 저항하는 민중은 참여의 주체일 수 없고 ‘2등 국민, 2등외국민, 또는 외국인’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여 싸워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정부는 강제 연행된 이주노동자들을 즉각 석방하고 더 이상 이주노동자들을 토끼 몰이식으로 잡아들이는 작태를 즉각 멈춰야 한다. 또한 모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사면하여 합법화하고 사업장 이동이 보장되는 제도의 개선에 즉각 나서야 한다. 만일 정부가 자신의 잘못을 고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 다면, 사회진보연대는 제 사회단체와 연대하여 노무현정권의 이주노동자 탄압에 맞서 힘차게 연대투쟁을 진행 할 것이다. -2월 17일 사회진보연대-
현중사내하청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노동자 단결투쟁으로 비정규직 철폐하자! -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故박일수 동지 죽음에 부쳐 1. 또다시 한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결을 했다. 고인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비는 바이다. 향년 50세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故박일수 동지. 그는 유서에서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 몸 불태워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부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절규했다. 작년 10월 근로복지공단비정규노조 이용석 광주지부장이 분신 자결한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또다시 비정규 노동자의 분신사태를 접해야 하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누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그동안 비정규직을 양산해왔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무엇 하나 대책도 없는 정부와 자본이 그 일차적 가해자이다. 2. 그러나 책임을 마냥 떠넘기기에는 우리 민중운동 진영도 그리 떳떳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화된지 몇 년이 되었고, 민주노조운동 내에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1의 과제로 받아안고자 노력해왔지만 이렇게 열사의 죽음을 또다시 맞이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자층의 급증한 증가 속에서 이들을 노동운동의 주체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고 노동자계급 내에서의 차별과 분열을 단결과 연대로 극복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故박일수 동지의 죽음으로 맞이한 투쟁의 계기 속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최대의 목표로 놓고 투쟁에 임해야 할 것이다. 정권과 자본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를 비수처럼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중공업 노조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울산대책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관건은 현장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단결일 것이다. 3. 비정규직의 죽음을 막는 길은 노동자가 계급으로서 단결하고 연대하여 비정규직을 철폐하는 것 뿐이다. 사회진보연대도 이를 위해 투쟁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