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7-02-16

    ‘비판적 지지’, 20년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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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한국미래구상과 민중운동 대선 구상 비판 [%=사진1%] 물에 빠진 미친개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야 한다. 오늘날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딱 그 꼴이다. 그런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물에서 꺼내줘야 한다고 손을 내미는 자들이 있다. 아니, 푸닥거리를 해서라도 저 타락한 ‘민주화 세력’이라는 유령을 몇 번이고 되살려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자들이 있다. 차마 작금의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지지하자는 말은 못 꺼내지만 한나라당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며 ‘반수구 국민후보’를 주창하는 ‘창조한국미래구상(준)’(이하 ‘미래구상’)이 하나요, 이와는 다소 거리를 두면서도 ‘반보수대연합 전선 강화’와 ‘진보세력의 동반 성장’을 획책하는 기회주의 세력이 둘이다. 미래구상의 기만과 위선 물론 이들에게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 한나라당 ‘빅 3’에 대한 지지율 합계가 무려 75%에 달하고 당 지지율만 놓고 보더라도 50%를 상회하는 일방적인 판세가 그려지고 있다. 반면 대통령 국정운영과 집권여당에 대한 지지도는 공히 10%대에 머물러 있고, 그마저도 사분오열된 판국이다. 도처에서 이명박과 박근혜로 상징되는 친미반북․개발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어떠한가. 범여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는 상승하기는커녕 2004년 총선을 정점으로 줄곧 퇴보와 정체에 빠진 상태다. 게다가 이들의 표현을 빌자면 ‘이념적 급진성’으로 인해 현하의 정세 속에서 진보개혁세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제3의 대안이 되기는 힘들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해서 진보개혁세력의 단일후보를 추대하고 신보수주의의 시대를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옹립하겠다는 ‘반수구 국민후보’의 실체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평화공존과 신자유주의 반대가 자격요건인데, 정작 미래구상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면면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파트너를 자임한 정치적․행정적 NGO의 상층부이거나 곡학아세로 일관한 얼치기 ‘진보학자’일 따름이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반대해야 한다는 전제도 모순투성이다. 그러니 열린우리당 잔류파나 탈당신당파가 이들의 제안에 쌍수를 들며 환호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다. 이들이 통합신당의 기치로 표방한 ‘평화미래개혁세력의 통합’과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평화통일에 투철한 점으로 보자면 민주노동당 후보를 앞설 후보가 없는 것 아니냐는 반문에 대해서도 이들은 즉답을 회피한 채 열린우리당(또는 통합신당)이나 민주노동당과의 정치공학적 통합이 아닌 미래구상의 독자행보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상정하는 독자행보의 종착역은 과연 어디인가? 일단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선정책생산-(후후보선출)-범진보개혁세력경선-(연정?)의 시나리오다. 말하자면,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정책단을 형성한 뒤 자신들이 직접 독자 후보를 내지 않더라도 분화된 여권 내 개혁세력과 민주노동당을 아우르는 범진보개혁세력의 후보 단일화를 위한 거간꾼 역할 또는 정책연합까지 고려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여전히 핵심적인 문제는 ‘반한나라당’이지 범진보개혁세력의 통합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을 위시한 ‘민중운동’ 진영은 부차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이는 개혁의 떡고물로 각종 수혜를 누려온 자신들의 지위가 한나라당 집권 이후 박탈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가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노동당과 ‘민중운동’ 진영이 한나라당의 집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치적 선택의 폭을 유연하게 확장하지 않는다면 선거연합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래구상의 취약한 주체적 조건도 스스로의 구상을 제약하는 요인이기는 마찬가지다. 언론과 정치권에 기생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부 명망가들이 단기간에 기존의 정치세력을 견인할 만큼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어불성설이다. 혹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될 경우 소위 파당적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로 ‘격하’되거나 ‘도덕적 우위’를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시민운동의 생리도 크게 작용하여 미래구상 자체가 좌초할 여지조차 있다. 이는 결국 ‘반수구 국민후보’를 옹립하겠다는 미래구상의 행보가 열린우리당의 ‘합의이혼 후 헤쳐 모여’ 시나리오에 강하게 결박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시사한다. 가령 중도실용신당과 중도개혁신당, ‘재선그룹+민주당+국민중심당 신당’, 잔류 열린우리당 등 3~4개로 분화된 범여권이 올 8~9월까지 경쟁구도를 조성한다면?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각의 신당이 미래구상 자신을 포함한 외부의 유력인사․시민사회단체․전문가그룹을 영입하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대선 직전 오픈 프라이머리(100% 국민경선제)를 통해 후보단일화를 추진하게 된다면? 미래구상으로서는 ‘지지할 수 있고 당선 가능한’ 반한나라당 국민후보 연합에 동참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2000년 낙천낙선운동이나 2002년 대선, 2004년 탄핵 반대 정국에서 위력을 발휘한 반보수 네거티브 캠페인이 다시 한 번 부상할 것이다. 민중운동의 대선 구상, 위험한 줄타기 한편 민주노동당은 ‘진보민중진영’의 결집을 도모하여 대 수구보수 전선으로 이번 대선을 치른다는 구상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이번 대선을 ‘범한나라당’ 대 ‘범민주노동당’ 대결 구도로 가져간다는 권영길 원내 대표의 의정 연설에서도 재차 확인되는바, 범개혁세력의 분화로 발생한 균열과 공백을 잠식하고 나아가 이탈 세력을 포섭한다는 소위 ‘진보개혁 대표선수 교체론’으로도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범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헤게모니를 대체한다는 민주노동당의 장기적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응당 두 가지 전제, 즉 노동자 운동을 비롯한 급진적 대중운동의 실존과 함께, 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내적 성장이라는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현재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노동자운동은 작년을 거치며 사실상 무장 해제된 상태며, 현재로선 이를 역전시킬 마땅한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민주노동당도 ‘당내 사상운동의 부재와 종파적 분열’, ‘거대한 소수전략의 실패’, ‘울산 진보정치의 좌절’ 등으로 한자리수 지지율에 머무른 채 위기적 정체상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현행 당원직선제만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소지가 다분하다는 진단 하에, 당원 외에 민주노총과 전농 등 대중조직의 구성원으로 이뤄진 별도의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개방형 경선제’ 도입을 골자로 한 외연 확장에 몰두하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치세력의 성장과 반보수대연합 전선의 강화라는 이중적 과제 속에서 미래구상 식의 반보수 정치캠페인과 절충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느끼고 있다. 물론 이는 다른 한편으로 범개혁세력과 동반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내적 딜레마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한 술 더 떠서, 민주노동당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미래구상과 같은 기회주의 세력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상황의 지대’를 확보한다는 식의 정치공학적 발상을 숨기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미래구상과 같은 정치적 시민운동의 동반 성장을 통해 반보수대연합 투쟁을 펼쳐야 한다는 조희연 교수의 ‘진보개혁세력 헤게모니 창출론’도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미래구상을 주도하는 정대화 교수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연합을 사고하는 조희연 교수는 세계사회포럼의 국내판 프로세스로서 한국사회포럼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결국 개혁세력에 대한 단호한 비판과 단절을 우회한 채, 중도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헤게모니에 편승하면서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주도성을 통해 그 좌익을 형성하려는 시도로서, 자유주의의 좌익적 판본에 불과한 ‘진보주의’일 따름이다. 여기서 민주화 세력 또는 진보개혁세력이 공유하는 하나의 억설로서 소위 ‘87년 체제’는 그들이 주장하듯 ‘정치적 민주화’가 결코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87년의 성과는 노태우의 반동과 1991년의 국내외적 계급투쟁의 패배로 인해 심각한 단절을 경험했으며 오히려 군부세력과 지역주의에 기생한 양대 문민정권의 등장은 그전부터 추진되어온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실행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을 창출하는 계기였다. 이런 형세에서 한국진보연대(준)은 이러한 프로세스에 깊숙이 참여함으로써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반보수대연합’의 관념에 경도된 이들의 기회주의적 행태는 1997년 IMF 범국본 이후 어렵사리 유지되어온 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비극적 소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만일 범개혁세력의 통합이 가시화되는 동시에 반보수대연합의 현실성이 제기된다면, 민주노동당의 외형적 성장과 노무현 정권의 몰락의 여파로 다소 수줍게 잠복해있던 예의 그 ‘비판적 지지론’은 언제고 다시 상황을 압도할지 모른다. 민중운동 대선 대응,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대선이 민중운동의 단결과 전진을 도모하기보다 분열과 후퇴를 조장하는 과정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구상이나 ‘진보개혁 대표선수 교체론’과 같은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특히나 널뛰듯 오르내리는 지지율에 따라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일삼는 한국 정치의 인민주의적 토양을 고려한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수구보수의 귀환’을 주문처럼 읊조리며 공포를 환기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현 정세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함께 민중의 단결을 도모할 현실적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대중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급진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창출해야 한다. 1987년 이래 민중운동을 끈질기게 괴롭혀온 ‘비판적 지지론’은 물론이거니와 민중운동의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기 위해서도.

  • 2007-02-12

    사회주의와 세계대전: 제 2 인터내셔널의 붕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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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1%] 국제 사회주의 정책을 향해 '프롤레타리아란 무엇인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혐오하는 대중들이 프롤레타리아다.' 조레스(Jean Jaur s)의 이 말은 50년 동안 인터내셔널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는 자신들을 '평화의 당파'라고 정의했다. 사회주의와 反군국주의,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는 동의어였으며, 모든 선전의 중심테마였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평화로웠던 유럽의 인터내셔널은 원칙적인 선언과 자본주의가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그쳤다. 군국주의와 전쟁을 비판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결의안이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의 모든 대회1)마다 채택되었다. 결의안들은 자본의 분파가 전쟁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평화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자본주의 체계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고, 사회주의의 확립을 통해서만 중단될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체계가 정점에 달할수록 무력 충돌이 더욱 폭력적이고 빈번해질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서로의 절멸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은 국제주의와 계급의식이었다. 군국주의를 막고, 세계평화 체계를 설립하기 위해 인터내셔널 대회는 비밀 외교의 폐지, 직업군인을 민병대로 대체할 것, 전면적인 군축 등을 제안했다. 1896년 런던대회에서는 중재 시스템을 설립하기로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는 전쟁을 찬성하는 자들에게 반대해서 투표하는 것,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군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총파업은 아나키스트적 편향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2) 1893년에서 1907년까지의 인터내셔널 대회는 총파업이 전쟁을 방지하는데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해서 전면적 군축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군비지출에 반대하는 투표가 최선책이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위협은 점점 심각해졌고, 전쟁과 군군주의는 더 이상 단순히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파쇼다 위기, 스페인-미국 전쟁, 의화단 사건 당시 중국에 대한 개입, 보어전쟁,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독일의 분쟁, 러-일 전쟁, 발칸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분쟁을 거치면서 평화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바이앙( douard Vaillant)과 조레스는, 평화가 사회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이며, 전 세계적인 충돌에 직면한 유럽의 미래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법과 사회주의 국제정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일반원칙만을 주장하는 결의문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당들의 상호협력과 공동행동이 필수적이었다. 1902년 12월 국제사회주의사무국(ISB, 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3)이 암스테르담 대회의 의제 선정을 위해 소집되었을 때, 조레스는 전쟁을 더 이상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귀결로 보고자 했다. 그는 범게르만주의나 3국 동맹과 같은 문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전면적 군축의 달성방안과 중재재판소 등의 실현방안에 대한 검토를 요구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자들의 반전행동에서 '최대한'의 행동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독일과 러시아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공연히 그를 불신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정책이 구체화되고,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제2인터내셔널의 제도적 구조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자율적 당들의 연맹으로, 가입자들에게 정치적/전술적 문제에 있어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각 당들은 자신의 고유한 프로그램과 목표를 고수했고, 인터내셔널의 유일한 이슈는 최대한 협동을 조직하는 것뿐이었으며, 실질적 결정력이 없었다. 이런 구조는 결의안을 실행하는데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규약 제정에 20년이 걸렸고, 1900년까지 제2인터내셔널은 정기 대회로만 구성되었다. 대회의 결의안들은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지만, 가맹 당들의 협력이나 국제적 행동을 보장할 조직이 없었다.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서야 ISB와 집행위, 서기관의 상설 기관이 설립되고 브뤼셀에 본부를 두었다. 하지만 이런 제도화에도 가맹 당과 조직의 자율성의 원칙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며, 인터내셔널은 여전히 독립된 조직이 아닌 연합조직으로, 지부들과 분리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대회만으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운동의 확산을 위해 ISB가 만들어졌지만 아무런 권위가 없었으며, 수 년 동안 사회주의 세계의 우편함 역할만을 했다. 전쟁의 기미가 커질수록 사무국의 권력과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졌고, 1905년 위스망스(Camille Huysmans)4)가 서기장으로 임명되면서 ISB는 최종적 지위를 획득한다. ISB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조정하고, 대회들 사이의 업무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결의안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사무국의 지위 강화 속에서도 1889년에 만들어진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고, 대회의 역할도 손상되지 않았다. 응집력 있는 조직과 제도적 기구의 부재는 뿌리 깊은 상황을 반영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 동안 주요 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 운동은 수적,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다양한 당들의 민족적 현실이 중시되었고, 경험과 이해의 차이로 인해 정치적 판단은 민족적 이해로 협소하게 제한되었다. 두 번째 큰 장애물은 독일사회민주당(SPD)과 프랑스 사회주의자 그룹 사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독일의 半숙명론적 입장과 실천없는 평화주의는 프랑스의 낙관적인 행동 요청을 가로막았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로 SPD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지도력을 다투게 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 우위에 있던 SPD에 맞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다른 개념, 노동자들의 다른 행동을 승인받기 위해 싸웠다. 이런 맥락에서 조레스는 SPD의 정치적 무능력과 함께, SPD가 혁명적 행동이 아니라 의회에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는 특히 1905-6년 모로코 위기5)동안 명백하게 드러났다. SPD 집행부의 미봉책들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근심어린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바이앙과 조레스는 1905년 9월, 각국 사회주의자들이 공동행동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을 ISB에 요청했다. 이 제안은 1906년 3월 6일 ISB회의에서 논의되고 승인되었지만, 일반적 내용만이 다루어질 뿐이었다.6) 1907년 8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군국주의와 국제분쟁'이 선정되었다. 비록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군국주의와 전쟁 문제에 대해 정치, 이론의 영역에서 활기찬 논쟁이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철저히 규명되지 못했고, 전쟁이 벌어질 때 사회주의자의 행동과 태도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논쟁과 더불어 좌파 대표자들(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중도, 수정주의 우파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모든 논쟁은 학파간의 차이와 국제 사회주의 내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분열의 징후를 드러냈다. 다수파가 유럽전쟁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반적 정책을 원했던 반면, 좌파들은 자본주의 전쟁에서 연원할 수 있는 혁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적 시각과 전략에서 심대한 차이를 드러냈다. 공동 결의안 준비를 맡은 위원회의 논쟁은 이런 다양한 관점을 반영했다. 바이앙, 조레스는 의회개입에서부터 총파업과 폭동에 이르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방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사회주의자의 전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총파업에 반대한 독일 대표는 이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중재를 위한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로자(Rosa Luxemburg)와 레닌(Lenin), 마르토프(Martov)가 '전쟁은 발발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하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 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이 자본주의 계급 지배를 빨리 중단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대표들이 이 좌익적 개정안을 채택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이것이 가상의 미래일 뿐이라며 결의안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임박한 혁명'은 부르주아를 협박하는데 효과적이었을 뿐, 전략적 목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결의안은 방어전쟁과 제국주의 전쟁을 구별하는 사람들과, 민족적 방어와 계급투쟁을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무시했다. 이 문제는 순전히 이론적일 뿐 긴급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합의는 불가능했고, 이 갈등은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이 무딘 결의안은 사회주의 반전행동에 복무하지 못했으며, 인터내셔널에 존재하는 분열을 영속화했다. 역설적으로 이 결의안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레닌은 결의안이 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SPD 지도부는 극단주의에 대한 승리라고, 조레스는 국제 정책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라고 보았다. 분명 슈투트가르트 대회는 전환점이었다. 인터내셔널에서 SPD의 권위는 분명한 타격을 받은 반면, 프랑스 사회주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두 '열강' 사이의 갈등은 남아있었으며, 좌파와 중도/우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전략에 대한 문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비록 논쟁이 인터내셔널의 일반 방침이나 활동들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에 사회주의의 국제 정책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이론적 영역으로 격하되지 않았다. 뒤이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과 발칸위기7)는 더욱 불안을 일으켰다. 1908년 10월 회의에서 ISB는 재빨리 국제 상황을 분석하고 프랑스가 제안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전쟁의 지속적 위협을 언급하며 모든 사회주의 당들이 경계와 활동을 배가하고, 정세와 상황에 따라 국가/국제적 틀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법과 조치들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실천은 수동적이었고, 선언적인 평화주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영국 대표인 글래시어(Bruce Glasier)는 '이런 결의안은 정치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나 사실 ISB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비난에 대해서는 조직의 어려움에 대한 언급으로 답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국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반복하면서, 제한된 국가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정치 문제를 바라보았다. 전쟁 거부는 동의가 되었지만, 공동 대외정책의 자세한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달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빠져있는 모순과 취약성들을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인터내셔널의 다수파는 전쟁을 자본주의의 고유한 문제이며, 열강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증대되는 위협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전쟁은 다양한 형태의 정의 없이 비난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식민지 전쟁이나 정복 전쟁에 국한되었고, '침략 전쟁'과 '방어전쟁'은 정치적 행동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으로 충분히 정의되지 않은 채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었지만, 지도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경멸적으로 거절했다. 예를 들어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의 SPD 에센 당 대회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당의 전술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결정은 자국 정부가 침략전쟁을 치르는지, 방어전쟁을 치르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침략인가 혹은 조국을 방어하는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베벨(August Bebel)은 특유의 방법으로 질문을 회피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확신을 갖고 전쟁이 침략적인지 아니면 방어적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판(Van Ravestejn)과 같은 몇몇 젊은 사회주의 투사들은 일체의 단일화 시도를 거부하면서, 방어적 공격이나 방어 전쟁이라는 구별의 어려움을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 계급과 민족의 이해가 존재하더라도 침략전쟁과 방어전쟁에 대한 명확한 구별은 어쩌면 언제라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모든 전쟁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반대되어야 했다. 카우츠키(Karl Kautsky)도 비슷한 입장으로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침략과 방어전쟁 이론을 명확히 거부했다. 그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위한 전쟁은 불가능하며, 프롤레타리아는 국제적 세계 정책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위협을 처음부터 단호히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내셔널은 순전히 학술적 문제라고 간주했던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랐고, 결국 유럽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정의하는 것을 회피했다. 인터내셔널의 활동은 예방 전략에 집중되었다. 전쟁 가능성의 검토, 위협이 현실이 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 어떤 참사라도 제한하는 것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위기가 발발하자 즉시 적용된 인터내셔널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 전략을 통해 '전쟁에 대한 전쟁' 슬로건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공동의 계획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1910년 코펜하겐 대회의 목표였고, 대회 의제에 다시 '군국주의와 군축 문제'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차는 키어하디(Keir Hardie)8)와 바이앙이 제시한 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쟁에서 다시 드러났다. 키어하디-바이앙은 "대회는 전쟁을 예방하고 저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들 중 가장 적극적 형태의 선동과, 대중행동뿐만 아니라 특별히 전쟁 도구(무기와 탄약, 수송 등)를 공급하는 산업의 효과적인 총파업을 고려한다."고 제출했다. 이 제안은 독일의 좌파 대표자들에게조차 너무 혁명적이었고 혼란을 일으켰다. 독일 대표단의 격렬한 반대에 반데르벨데(Vandervelde)9)는 결의안을 ISB에 회부해 더 많은 검토를 거쳐 다음 인터내셔널 대회의 의제로 제출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결국 채택된 결의안은 독일대표단의 관점을 드러냈다. 결의안은 무장경쟁이 가속되지 않는다고 한정하고, 행동수단을 순전히 의회적인 것들과, 전쟁을 찬성하는 투표 거부, 강제력이 있는 국제 중재 재판소 회부, 무장 제한, 모든 국가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대회에서 결정된 유일한 것은 非사회주의자들의 평화운동 프로그램과 거의 동일했다. 코펜하겐 대회는 또 한 번 중심 문제에 정면대처하지 못했다. ISB는 여전히 전쟁이 일어날 경우 사회주의자의 행동을 조정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각국의 행동을 명확히 정의하고 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한 이런 책임은 거의 무의미했다. 유일하게 내려진 결정은,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위협적인 수준일 때는 언제나, 한 단체 이상이 요구할 경우 ISB 서기장이 사무국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코펜하겐 대회는 슈투트가르트 대회부터 존재했고 모로코 위기가 결정적 촉매가 된 분열을 촉진했다. 좌파들은 코펜하겐 대회를 부르주아 평화주의로 향하는, 이전 대회로의 후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다수는 코펜하겐 대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두 차례의 인터내셔널 대회를 통해 국제 사회주의 정책의 특정 원리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고, 전쟁의 위협에 대해 취해야할 조치들을 결정하는 것은 다음 1913년 비엔나 인터내셔널 대회로 넘겨졌다. 최대한 각국 정당들의 행동을 조정하고 반군국주의 운동을 강화하고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임무는 어떻게 수행될 것인가? 평화주의에 의해 혹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총공격으로? ISB에서 프랑스-독일의 차이: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후 국제 상황의 악화는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제국주의 개념과 정세 에 대한 분석은 모로코 위기,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리비아) 침공, 발칸 전쟁이 일어난 1911-1913년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외교적 긴장과 분쟁의 국지화 가능성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론에 대한 관심부족이 드러났고, 이론은 단지 배경지식의 문제로 격하되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라고 보았던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대한 조사는 거의 없었다. 국제정책의 장기적 프로그램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공식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기적이지만 모호한 공식과, 즉각적으로 타당하지만 극단적인 것 사이에서는 항상 전자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1911년과 1912년, ISB와 전원회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점 차이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모든 논쟁의 끝에는 대중을 동원할지, 거리로 나설 것인지, 의회 활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결정해야했다. 이 때 각국 조직들의 진정한 색채가 드러났다. 외교적 위기가 발생하자 관련 국 사회주의 당들은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각 당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정당화하면서 자국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다른 정당들의 행동을 요구했다. 간신히 인터내셔널 대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당들 사이에 내재된 불신은 위기가 나타나자 명확해졌다. 1908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제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낳았다. 약소 세르비아 정당은 오스트리아 당이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위기를 판단해 비엔나 정부를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0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력 경쟁에 대한 독일과 영국 사이의 문제도 심각했다. 노동당(Labour Party)과 ILP(Indepedent Labour Party of Great Britain)가 명확히 재무장에 반대했지만, 사회민주연합(Social Democratic Federation) 대표는 독일의 위협을 비난하며 자국의 해군 증강을 변호했다. 힌드만(Hyndman)이 이끄는 영국 사회주의 그룹은 민족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코펜하겐 대회에서 힌드만의 지지자들은 독일이 세계 정복을 꾀한다며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자국의 무장 정책, 특히 해군력 향상을 지지했다. 힌드만은 SPD에 대한 적대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05년에 그는 SPD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능력을 비판하는데 그쳤지만, 1908년에는 공개적으로 독일이 행동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시했다. 1911년에는 SPD가 인터내셔널의 모든 반전 캠페인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가 전쟁의 위협과 가능한 예방수단을 검토하기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를 모으자고 ISB에 세 차례 제안했을 때마다 SPD가 참석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즉시 ISB 서기장에게, 힌드만의 주장이 비방임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긴장은 완화되지 않았고, '힌드만 사건'은 더욱 심한 갈등으로 반복되었다. 국제적 긴장의 심화로 SPD 집행부와 프랑스 대표는 다시 ISB에서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1>국제 상황에 대한 해석과 평가, 2>고유한 평화 요인으로서 인터내셔널의 역할, 3>위협에 대처할 수단에 대한 판단에서 불일치를 드러냈다. 이러한 차이는 1905년 초에 확연해졌다. 이들은 각자 행동하면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베벨은 주의를 요청하며, 1905년 6월 모로코 분쟁에 대한 ISB 회의 소집을 요청한 힌드만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14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영국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고 예민하게 본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위기마다 회의를 소집하고 결의안을 통과시키면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프랑스와 정반대였다.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심각한 외교적 위기가 발생했던 모든 순간에 낙관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침묵했다. 반면 인터내셔널이 심각한 충돌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던 프랑스는 국제 정세가 악화될 때마다 근심했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했던 조레스, 바이앙, 장 롱게(Jean Longuet)는 오랫동안 외로이 자신의 관점을 유지했다. 외교 분쟁의 위험을 인식했기 때문에 조레스와 바이앙은, 사회주의자들이 중재와 화해 노력으로 국제 분쟁을 진정시키는데 활발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프랑스인들은 이론적 고려보다는 조레스가 합리적으로, 바이앙이 직관적으로 도달한 현실주의적 평가에 자극되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실용주의에 상당한 의심을 갖고 있었고, 프랑스의 예측과 분석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조레스의 평화에 대한 전망도, 중요한 국제 분쟁 해결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건설적 역할에 대한 개념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SPD는 대외 정책의 문제에 대한 합의를 만들지도,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SPD는 그것이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대외 정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꺼려했다.10) 독일의회(Reichstag)의 사회주의 그룹은 독일 정부의 팽창주의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특히 모로코 문제에서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1908년 10월 ISB 회의에서 몰켄부르(Molkenbuhr)는 모로코 위기에 대한 독일 정부의 태도를 '양동작전'이라고 묘사하며, 위협이 가상적이고 피상적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사실관계를 심하게 단순화하는 것으로, 당 우파가 제안한 '아프리카에 남아있을 독일의 권리' 이론에서 볼 수 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선언에 가깝다. 전쟁 이전에는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대는 더욱 없었다. 프랑스계 모로코가 독일이 지브랄터 해협으로 가는 것을 막아 식민지로 접근할 수 없게 되자, 1911년 SPD는 모로코 주권의 보호를 주장했다. 콩고 배상문제와 관련해서도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은, 그들이 받는 금액이 보잘 것 없다는 것에 국한되었다. 프랑스-독일이 보인 두 번째 차이는 인터내셔널이 평화의 요인인지에 대한 것이다. 국내 정책에 실질적 영향력이 있었고,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독일 사민당은 인터내셔널을 신경 쓰지 않았다. SPD 대표들은 ISB가 반전 투쟁의 믿을만한 조정자인지 의심했으며, 사무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SPD는 인터내셔널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통해 타국의 당들과 ISB를 다룰 수 있는 위선적인 후원 정책을 추구했다. 외교적 문제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능력에 대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달성 불가능한 것으로,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몰켄부르는 ISB가 노동자 정책에 한정되지 않고, 화려한 성명밖에 만들지 못하면서 대외 정책의 주요 문제들에 개입하는 것을 비난했다. 모로코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911년 아들러(Victor Adler)11)도 ISB의 외교영역에서의 활동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대중 집회 이상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대중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 특히 조레스와 바이앙의 믿음은 이와 정반대였다. 조레스는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의 국제적 조직이 마침내 출현하여 실질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으며, 사회주의 국제 정책에서 ISB의 역할을 강조했다. ISB의 프랑스 대표 바이앙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어떤 전쟁의 징후에도 바이앙은 놀랄만한 속도로 반응했다. 분쟁이 있을 때마다, 외교적 긴장이 있을 때마다 그는 ISB에 자신의 우려를 알렸고, 사회주의 세계에 경고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제안, 그의 부단한 행동 요청, 그의 예측은 오스트리아 당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적대를 낳기도 했다. SPD 집행위원회는 프랑스의 활동을 성급하거나 틀린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1908년 9월에 바이앙이 제안한 프랑스-독일의 공동 집회를 SPD 집행위원회가 반대했다. 하지만 SPD는 이전의 회의주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는 평화투쟁에 개입할 필요성을 인정했던 SPD 지도부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했다. 이런 변화는 부르주아 사회가 계속 발전,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전쟁의 결과가 잘못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1908년 이래로 SPD의 평화주의 운동은 특정한 '정치적 변화'보다는, '지속적으로 증대하는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야한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의 행동들은 자본주의를 조금씩 파괴하는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고, 군비 경쟁의 위협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중간계급의 이해가 일시적으로 만나 협력이 가능했기 때문에, 평화주의 행동은 부르주아를 위협하지 않는 것으로 국한되어야 했다. 독일은 이에 따라 조직된 노동자의 편에서 중간/중하위 계급이 공동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고전적 형태의 반대 전술을 취했다. 여론이 전쟁을 예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관점에 따라, 선전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당의 선전 주제는 집행위원회의 공식 관점(전쟁이 일어난 뒤에 저항하는 것은 뒤늦은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호전적 성향을 막는 것이다. 근대전쟁은 대중의 동의 없이 발발하기 어렵고, 만약 발발한다면 지배자들은 그것의 참혹한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반전 행동에 적합한 분야는 언론과 의회였다. 카우츠키가 보기에 최후의 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의 시민들이 연합하여 공동의 상업 정책을 추구하고, 의회, 정부, 군대를 갖는 국가의 연합으로' 유럽연합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전술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프랑스는 '세계평화의 유일한 보증인은 조직된 사회주의 노동자'라는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을, 행동 촉구로 해석했다. 대중들은 결집되어야 하며, 전투적 노동자들의 방식으로 전쟁의 위협을 막아야 했다. SPD에게 이는 현실에 조응하지 않는 원리일 뿐이었다. 독일 내부의 논쟁도 벌어졌다. 판네쿠크(Pannekoek)에게 반제 투쟁의 목적은 제국주의 성장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이었고, 이렇게 조직된 대중들이 자본주의를 정복할 것이었다. 그는 카우츠키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수동적인 대기주의이고, 모든 혁명적 행동은 비과학적 아나키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독일의 국경을 넘지도, 교의상의 논쟁 틀을 넘어서지도 못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은 아가디르 위기12) 이후에 더 격렬해졌다. 비록 이것은 여전히 '무대 뒤쪽에' 있었지만, 그 결과로 ISB는 반전 캠페인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고, 이와 같은 긴장의 순간에 효과적 행동을 조직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독일이 모로코에 전함을 보내기로 한 급작스런 결정때문에 관련국 사이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위스망스는 즉시 관련된 국가 대표들을 소집해 파리에서 ISB 회의를 개최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반데르벨데는 이런 문제들에 어떤 '대단한 위급함'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SFIO13)는 반대의 입장이었고, 7월 4일 CAP(Commissin Adinistrative Permanante de la SFIO)는 긴급하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사회주의 당 대표들을 소집해서 심각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ISB에 요구했다. 이틀 후 위스망스는 이 요구에서 제안된 모든 사회주의당 대표들을 초대했다. 독일 대표 몰켄부르는 모로코 위기에서 위기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다며 프랑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모로코 문제는 단지 독일 정부의 양동정책일 뿐이고, '이를 통해 자국 정부가 국내 상황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며, 독일 의회 선거에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베벨도 단호하게 이와 같은 입장을 밝혔고, ISB 서기장은 회의 계획을 중단했다. 조레스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대회 결의안에 따른 행동을 촉구했다. SPD 집행부는 이런 제안에 매우 공감한다며 응답했지만 명확한 선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고, 입장조차 결정되지 않았다. 당의 태도는 상황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혼란스런 독일의 행동은 사실 '민족적 논리'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고요함 뒤에는 완전한 무능력이 있었다. SPD의 고민은 독일이 관련될 때에만 시작되었다.14) 1911년 7월 21일 프랑스와 독일의 협상 파기의 조짐이 생기고 영국의 태도가 비판적이 되었을 때, 베벨은 위스망스에게 ISB 소집과, 브뤼셀에서 국제 총궐기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베벨은 이런 조치들이 '만약 위기가 심각해질 경우'에만 취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3일 후, 사회민주연합과 노동당의 서기장이 ISB 소집을 요구했다. 하지만 베벨은 그동안 '상황이 평화로워졌고', 프랑스가 영국을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제안에 반대했다. 반면 프랑스 대표들은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었다고 판단해 영국의 제안을 지지했다. ISB 집행위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아들러가 독일의 핑계를 지지함에 따라 회의는 다시 한 번 연기되었다. 당 집행부가 반전 투쟁의 임무에 무능력하다고 생각한 좌파들은 SPD의 우유부단함과 느린 반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1911년 7월 24일 로자는 몰켄부르와 위스망스의 서신 교환을 발표하고, 당 집행부의 기회주의적 전술을 엄하게 비난했다. 뒤이은 논의에서 SPD 집행부는 꼴사납게 행동했고, 사람들은 몰켄부르의 침묵을 유죄 시인으로 받아들였다. 로자의 비판에 분개한 베벨은 당 집행부의 어리석음에 절망했고, 특히 몰켄부르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그러나 베벨은 1911년 9월 예나 당 대회에서 당의 단결을 핑계로 당 집행부에 완전히 동조했다. 좌파들의 강력한 비판에도 SPD는 신중정책을 계속했고, 반전 행동 강화의 요청이 계속되어 베를린 트렙토우 공원의 인상깊은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15) 1911년 9월 11일 반데르벨데는 몇몇 프랑스 정치-경제 그룹의 공격적 캠페인에 대해 독일 정부가 불쾌해하며, 상황이 악화될 위험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또 프랑스와 독일 정부의 모든 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다는 정보도 있었다. 만약 협상이 실패하거나 관계가 결렬된다면 상황이 진짜 위험해질 것이고, 전면적인 반전의 노력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ISB 집행부는 신속히 행동해야만 했다. 최근의 충돌 요인들과 관련해서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결의안의 이행 수단을 찾자는 반데르벨데의 제안에 따라 CAP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강경노선을 강화하려한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위스망스는 ISB가 즉시 소집되어 국제 반전 행동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묵인했다. 급진적으로 표현된 선언에서 대참사를 막기 위해 취해져야할, 심지어 폭동까지 포함된 모든 수단이 논의되었다. '모든 국가의 노동계급이 동의하는 답은 정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혁명적 봉기를 통해 국제 평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위스망스는 SPD에도 개입했다.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예나 대회에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의 회합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전신을 보냈다. 베벨, 아들러, SPD 집행위는 이 의견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9월 14일 반데르벨데는 우려가 일정 부분 사라졌으며, ISB 회의가 긴급하지 않다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다. 9월 17일 위스망스는 문제의 핵심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에 있다는 것과 ISB 회의 소집을 결정했음을 독일 당 지도부에 전했다. 코펜하겐 결의에 따라 가맹 당에게 회의 소집의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SPD 집행부는 마지못해 회의를 받아들였다. 9월 23, 34일 취리히에서 ISB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의제의 중심주제는 프랑스-독일 대결을 초래할 수 있는 모로코 위기였다. 베벨은 코펜하겐 결의안을 재확인하려 했고, 바이앙이 제출한 발의는 총파업 문제에 대한 활기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논의는 즉각 인터내셔널이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신 검사'로 이어졌다.16) 이것은 또다시 식민지 분할이 벌어질 경우 이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주의 당들을 초청하자는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11월 4일 프랑스와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위기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심각하지 않은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독일의 예측이 실현되면서 그들의 위세가 커진 반면, 프랑스는 또 한 번 침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모로코 위기에 뒤이어 1911년 가을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식민전쟁이 이어졌다. 발칸의 벌집 3개월 동안 주저하고 망설인 후에 인터내셔널은 취리히에서 채택한 결의안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노동자의 반전운동은 모로코 위기 동안 효과적 행동을 취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의 침략에서는 시의적절한 행동을 보여주었다.17) ISB는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낸 후 즉시 전쟁을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48시간 전에 알았다. ISB가 반전운동을 지도하게 되었고, 집행위는 즉시 이탈리아의 침공을 비판하며 행동계획을 제시했다. 10월 7일 ISB의 입장을 명백히 담은 비밀 회보 초안이 대표들에게 보내졌다. 코펜하겐 결의안에 따라 무장 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분쟁이 발칸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발칸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 목표로 제시되었다. 집행위는 동시에 터키의 노동계급이 너무 취약하거나, 이탈리아의 행동이 불충분하거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있을 경우 ISB가 직접 개입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ISB는 언론, 성명, 의회 질의와 저항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열강의 노동자당에 사회주의자들의 결집을 요구했다. 또한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과 발칸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했다. 이 캠페인들을 실행함에 있어서 인터내셔널은 만족스러운 결과와 실패를 모두 보여주었다. 먼저 긍정적인 면으로, 중앙과 서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대규모 저항 운동을 살펴보자. 1911년 10월 초, ISB 집행위원회는 최대한 대중적으로 각국에서 동시에 발칸침략에 저항하는 국제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상황을 집행위처럼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많은 대표들이 제안에 찬성했다. 베벨은 공개적으로 여전히 모로코 사태가 중요하며, 발칸에서 분쟁은 없을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독일의회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SPD는, 삼국 동맹의 일원으로 이탈리아의 편이었던 자국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캠페인에 무모하게 참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베벨의 응답은 동시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터키에 대한 깊은 혐오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공격에 희생당했음에도 터키에 대한 어떤 연민도 없었으며, 대신 오토만 제국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와 청년투르크 당에 대한 불신을 찾을 수 있다. 1908년 7월에 일어난 청년투르크 혁명18)은, 이를 중요한 진보로 본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혁명은 후진적 터키가 평화를 위한 투쟁과 발칸의 현상유지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러일으켰다. 1908년 10월 11일 ISB는, 오토만 제국의 인민들이 이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근대적 자유'들을 도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며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는 청년 투르크 혁명의 노선이 변화되면서 약해졌다. (이 운동이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청년 사회주의자 운동에 대한 청년투르크 정권의 보복은 그 야만성이 이전 정권을 능가했고, 인터내셔널을 걱정하게 했다. 1911년 1월 살로니카에 모인 터키의 다양한 사회주의자 그룹의 대표들은 반동에 맞선 오토만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지원을 요구했고, ISB 서기장은 이 호소에 응답했다. 하지만 터키의 사회주의자 박해는 청년투르크 정권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불러왔다. 조레스만은 상황이 우선적으로 유럽 열강의 파멸적 정책의 결과라고 보았고, 터키 정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요청했다. 터키가 유럽의 발전과 진보를 공유하도록 청년투르크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 유럽사회주의의 의무였다. 비록 터키의 반사회주의 정책은 끔찍했지만, 인터내셔널은 평화라는 더 중요하며 일반적 문제로 사태를 바라봐야 했다. 1908년 이래로 동부, 특히 발칸은 유럽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핵심이며, 유럽 전쟁을 일으킬 분쟁의 중심이었고, 터키 새 정권의 강화는 동쪽 상황의 안정화를 의미했다. 조레스의 관점은 오랫동안 전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심지어 공격받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발칸의 균형이 끝장날 수 있는 침략에 직면한 1911년 10월 ISB 집행위에서는 조레스의 관점이 우세했다. 인터내셔널은 도덕적 고려만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 평화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가맹 당들에게 터키를 지원하는 운동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터키의 반노동자 정책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인터내셔널은 분쟁의 예방과 종식을 위해 청년투르크와의 반목을 잊으려했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Worker's Socialist Federarion of Salonica)의 완화된 태도와 청년투르크 지도자들의 화해 노력 덕분에 이 관점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미 1911년 10월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집행부는 ISB 서기장에게, 조직은 이탈리아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떠한 적대적 반대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한편, 터키 하원 의장은 10월 16일 반데르벨데에게 유럽 사회주의의 원조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고,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ISB는 11월 3일 터키 의원들의 순례에 맞춘 유럽 각 도시의 공동행동 혹은 집회 요청을 채택한다. ISB 대표단의 다수는 이탈리아의 공격이 강대국이 군사 행동을 할 변명을 제공하며, 이슬람과 유럽의 전쟁으로,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제안에 동의했다. 침략자를 규탄하고 터키를 지지하며 제국주의 정책을 규탄하는 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은 사회주의 당과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의 합병을 발표한 날인) 1911년 11월 5일의 대규모 집회는 상당한 규모여서, 낙관주의와 국제 사회주의의 역량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사회주의는 모든 역량을 이 평화공세에 쏟았고, 평화주의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평화공세는 1911년 말과 1912년 초 SPD 선거 캠페인의 중심테마였고, 이를 통해 1912년 1월 선거는 SPD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이탈리아, 부분적으로 발칸의 행동부족으로 실패한다. 인터내셔널의 이전 결의안들은 사문화되었다. 취리히의 ISB 회의에서 이탈리아 대표 치오티(Pompeo Ciotti)는, 자국 정부의 어떤 군국주의적 움직임에도 당이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9월 26/27일 저녁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 그리고 48시간 후 전쟁을 선언했을 때,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05년과, 특히 1911년 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ISP(Italian Socialist Party)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군비 지출과 전쟁 위협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여, 국제주의와 평화를 보존하려는 당의 결정을 증명했다. 하지만 1911년 9월 말 총파업을 준비하던 ISP 집행부19)는 자유주의 개량과 보통선거권 도입에 대한 약속에 매수당했고, 후퇴했다. 증대하는 민족주의의 압박 하에서 비쏠라티(Bissolati)와 보노미(Bonomi)가 이끄는 당의 개량주의 우익은, 공식적으로 정부 정책과 트리폴리타니아 전쟁을 지원했다. 이 전환은 이탈리아 노동자 운동과 인터내셔널 양자에 막대한 동요를 일으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는 즉각 ISB 서기장에게 이탈리아의 혼란과 이것의 위험성을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두 개의 입장, 정책을 추구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의 반전행동은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내용의 비밀회보가 10월 12일에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게 회람되었다. 사무국과 다른 가맹 당들에 대한 비난이 담긴 위스망스의 편지는 ISP 집행부 전원회의에서 논의되었고, (결국) 기각되었다. ISP 집행부는 당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며, 서기장 치오티로 하여금 이탈리아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비난에 대해 ISB에 항의하도록 했다. ISB 집행위는 이탈리아인들을 달래는 것처럼 했지만,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사무국은 ISP에 대해 규탄하지는 않았지만, ISP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도록 압박했다. 이탈리아인들은 ISP 집행부가 인터내셔널 결의안과 원칙에 따른 의무를 다할 것이라며 집행위를 안심시켰다. 치오티는 모든 응답에서 당이 신용을 지킬 것이라 주장했고, 1911년 12월에는 비판은 모두 중단되어야 하며, 집회에 대한 요구는 모두 과장되고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치오티는 계속 이탈리아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전쟁 반대의 의무를 다했다고 강조했지만, 위스망스는 그의 해명을 의심했다.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ISP는 터키-이탈리아 전쟁동안 신용을 잃었고, 이후 이탈리아 당의 제안은 의심을 받았고, 경멸당했다. 이탈리아에서 같은 당 내 다양한 경향의 공존과 우익의 지배가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 행동을 마비시켰다면, 발칸에서는 다양한 좌익 분파 사이의 경쟁과 적대가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 사회주의 당들은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인 관점을 버리고 발칸을 전체로 간주하지 못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 동남부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발칸의 사회적, 민족적 문제에 합의하고, 공통의 문제로 풀어가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고, 1910년 1월 7일에서 9일까지 베오그라드에서 발칸 사회주의 당의 첫 번째 협의가 열렸다. 발칸의 심각한 민족성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개혁을 보장하고, 민주적 변화들을 이끌 발칸 국가들의 민주 공화국 연합 창설이 공통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그들이 유럽 자본주의의 개입과 정복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발칸 인민들을 지방주의와 고립에서 해방시켜 동일한 문화와 경제적 정치적 자산을 갖게 하고, 밀접한 국가들 간 경계를 없애고, 외국지배의 멍에를 없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갖도록 해야 했다. 첫 번째 베오그라드 협의는 반제국주의적 원칙을 명확히 했다. 이 원칙을 시행하고 공동 전술을 만드는 것은 두 번째 협의의 임무였다. 1911년 8월 루마니아의 사회 민주당이 두 번째 발칸 사회주의자 협의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1903년 이래로 불가리아의 두 사회주의 당(좌익 '좁은 사회주의당(Narrow Socialist Party)'과 개량주의 '넓은 사회주의당(Broad Socialist Party)') 사이에 고조되어온 투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터키-이탈리아 전쟁으로 발칸에 대한 위협은 갑자기 끔찍한 현실이 되었고,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현실적이고 발 빠른 행동 협의가 필요했다. 1911년 10월 초에 세르비아 사회주의당이 새롭게 협의 소집을 요청했고, ISB 집행위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좁은 당'은 '넓은 당' 대표의 협의 참석을 불허해야한다는 요구를 고수했다. 그들의 주장은 ISB가 커다란 정치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좌절시켰다. '좁은 당'의 불참 때문에 단순한 예비회의만이 열렸으며,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공동 반전 행동에 대한 희망과 필요성에 대한 성명서만을 발표했을 뿐 어떠한 구체적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 때 ISB가 직접 개입해서 불가리아의 두 당을 2차 협의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좁은 당'은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소국으로의 분열(Balkanization)'에 반대하고, 발칸인민연합을 건설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은 결정적 순간에 불화와 적대를 드러냈다. 그들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남부유럽 사회주의자와 중앙,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발칸 문제에 대한 불일치가 혼란을 가중시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들은 발칸 문제에 대한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통일된 지침과, 발칸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인터내셔널에 요구했다. 그들은 인터내셔널이 발칸 내 사회주의 당들의 차이를 없앨 수 있으며, 발칸의 제국주의적이고 반노동계급적 전술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거대 당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일반적 진술에 만족했다. 1904년 ISB는 오토만 제국의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자율성에 찬성을 한다고 선언했으며,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의 사회주의 당들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이해하거나 공유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할 수도 없었다. 서부 유럽의 목표는 유럽의 평화 유지였으며, 최악의 경우에 분쟁이 일어나도 발칸으로 국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발칸 문제를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좁은 관점이 아니라 세계적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가정에서 서유럽은 동남유럽의 현상유지를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발칸 연합의 원칙을 지지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변화된 환경에 순응하고 현실에 이데올로기를 조화시키라고 조언했다. 이런 조언들은 단지 발칸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뿐이었으며, 그들이 '국제주의'라는 개념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놀라움은 더 커졌다. 발칸사회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이 정부의 대외 정책에 반대하지만, 이와 동시에 군주정이 발칸에서 문화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합병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세르비아 정부를 비난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화가 나서 ISB와 모든 가맹 당들에게 논의를 요구했다. ISB는 스스로의 역할을 오로지 정보제공에만 한정했다. ISB는 조정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관점을 완전히 지지하던 체코 대표 네멕(Nemec)의 응답과 세르비아 대표가 제출한 문서를 어떤 논평도 없이 회람의 형태로 보냈다. 그리고 코펜하겐 대회 전 오스트리아 당의 이름으로 레너(Karl Renner)20)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수사적 국제주의의의 모습을 좋아하는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불신은 남아있었다. 1911년과 1912년에 발칸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활발한 분석과 논쟁이 있었다. 이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양자 간 관점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으며, 입장의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주의자와 발칸 사회주의자 사이의 차이는 단지 전술이 아니라, 민족성 문제, 민족 문제, 제국주의적 현상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 때문이었다. 1912년 8월 1일,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 서기장 포포비치(Du an Popovi )가 발칸의 관점을 대변해 위스망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발칸의 모든 긴장과 민족주의, 쇼비니즘의 발현이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유럽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상유지는 발칸의 불화와 무질서, 혁명과 전쟁의 영속적인 요소로 자본가 권력을 돕는 것이며, 평화와 문명의 적이었으며, 발칸의 죽음을 의미했다. 현상유지는 발칸 인민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발칸인민연합이라는 중대한 목표를 가로막았다. 현상유지는 평화의 보증이 아니라, 반대로 영원한 전쟁의 근원이었다. 거대 서구 사회주의 당들은 非개입이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발칸 문제를 가두어 둘 수 있었다. 유럽에게 최고의 해답은 발칸 문제가 해결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열강의 식민정책과 발칸 문제로의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전면전은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관점은 발칸전쟁이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무시되었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오스트리아는 즉시 '발칸을 발칸 인민에게'라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인터내셔널 정책의 역설을 보여준 것은 이론적이며 정치적인 차이였다. 사회주의지도자들은 발칸이 세계의 균형에 대한 위협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위기가 끝나고 분쟁이 해결되자마자 ISB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분규의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ISB는 발칸에서 분쟁의 국지화 전술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중재야말로 '평화로운 국가들 사이에서 제국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이상적 해법이라고 보았다. 1912년 사회주의 언론들이 임박한 파국과, 갈등과 적대에 대한 예측을 했지만,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외교적 위기에 따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집된 ISB는, 다양한 갈등적 관점들 사이의 실용주의와 소극적 합의만을 보여주었다. 평온한 시기에 인터내셔널이 보인 활동은, 평화를 위한 그들의 투쟁이 사실상 끊임없는 즉흥극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12년은 그 전 해보다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알바니아의 폭동, 마케도니아의 불안과 유태인 학살, 불가리아에서 민족주의의 발호와 같은 위험징후가 발칸에 나타났다.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발칸의 지정학적 특징을 강조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폭발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발칸의 소식과 경계를 알리는 보고서들은 가맹당의 대다수에게 무시되었다. SPD는 언제나 냉정했다. 오직 프랑스 대표들만이 ISB에서 우려를 표하고 행동을 촉구했다. 반면 정보서비스만을 하던 ISB 집행위는 다음 국제 대회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결의안에 따라 대회는 1913년 열릴 예정이었지만, 네덜란드 대표단이 국제 대회를 소집할 만한 위급함이 없다는 이유로 1914년까지 대회를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1914년이 인터내셔널 50주년이기 때문에 선전하기 더욱 좋은 대회가 될 수 있다는 근거가 제시되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이 모든 가맹당 대표에게 제출되었고, 레닌 등 소수의 대표가 응답을 하지 않은 채 근소한 차로 제안이 가결되었다.21) 네덜란드의 제안 뒤에 SPD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단순한 과정의 문제로 다루었다. SPD 집행위는 바이앙-키어하디 수정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국제무대의 소강상태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은 다른 이유로 프랑스와 영국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22) 영국은 대회 연기를 원칙상의 이유로 거부했다. 이들은 1912년 10월 항의를 발표해서, 이런 과정이 '위대한 독일 당의 전통에 어울리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대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반대는 정치적 특성에 의한 것이었다. 발칸 위기가 불러올 수 있는 불안정에 대한 행동을 논의하기 위해 국제 대회는 예정된 대로 열려야 했다.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럽고 전면전의 위협이 있다고 생각한 발칸 사회주의 당들의 대표들이 같은 주장을 제시했다. 최대한 빨리, 진지하게 평화에 대한 열망을 호소하고,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인터내셔널의 의무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위스망스에게 대회 연기에 관한 진실 해명을 요구했다. 그의 답변은 인터내셔널 내의 심각한 의견차와 불안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바이앙과 힌드만에게 독일-체코의 적대 속에서 대회를 열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폴란드와 러시아, 불가리아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의견차가 심각해 대회가 사회주의의 분열을 드러낼 것을 걱정했다. 그동안 발칸의 상황은 극적 전환을 맞아 무장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9월 20일 위스망스에게 발칸의 전반적 분위기가 억압적이며, 전쟁이 언제라도 발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2차 발칸 사회주의자 회합이 중요하고, 위급했으며, 이에 대한 ISB의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불가리아의 '좁은 당'과 '넓은 당'을 같은 석상에 앉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 사무국이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대표 라코프스키(Rakovsky)를 보낼 것이 제안되었지만,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고, 이전 해의 행동들이 반복되었다. 즉각적인 전쟁의 위협에도 '좁은 당'과 '넓은 당' 사이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없었고, 갈등만이 두드러졌다. 10월 초, 이 발칸 폭풍의 규모와 중요성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낙관주의 대신에 불확실성과 공황상태를 심어주었다. 인터내셔널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함에 따라 전통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쟁의 위협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프랑스와 영국은 즉각 ISB 회의를 요구했지만, 독일 당이 다시 이를 가로막았다. 첫 번째 위협이 지나가자마자 베벨은 평정을 되찾았고, 다시 한 번 신중함을 권고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공포가 확실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즉각 ISB에 가능한 빨리 비엔나 대회를 열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현재의 분쟁이 안정되더라도 여전히 전쟁의 씨앗은 남을 것이기 때문에 대회를 통해 분쟁을 국지화하고, 외교적 수단으로 해법을 찾으려는 환상적 희망을 버리고 위협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 10월 28일 브뤼셀에서 ISB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조레스는 이 회의를 통해 ISB가 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을 조직할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번에는 항상 신중하고 희망에 차 있던 아들러도 서기장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베벨은 독일 대표에게 프랑스, 영국에 속지 말 것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라고 조언했다. ISB가 브뤼셀에서 모였을 때 1차 발칸 전쟁이 한창이었고, 분쟁을 국지화하고 전쟁의 확산을 막는 방법에 관한 문제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아들러는 인터내셔널이 '발칸의 슬라브 국가들의 자율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전쟁에 대해 저항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바이앙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개입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충분히 강력한 운동을 펼쳐 각국 정부가 혁명적 선동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분쟁이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가정에서 그는 강력하고 전면적 선동을 각국에 요구했다. 조레스는 낙관주의를 유지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국제대회의 소집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 결정을 정부에 알리고, 열강의 어떤 개입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대회 일정을 앞당길 것인지, 1914년까지 연기할 것인지, 단독으로 국제협의를 소집할 것인지에 대해 오랜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레스는 대회 연기는 패배의 승인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나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법의 문제로 회의가 망쳐질 것처럼 보이자 반데르벨데는 크리스마스에 바젤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대회는 원래 날짜대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바젤 특별대회와 비엔나 대회의 1914년 개최가 결정되었다. 바젤 대회를 효과적이고 인상적으로 열기 위해 ISB는, 전쟁과 유럽 열강의 발칸 개입에 반대하는 집중 캠페인을 요청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은 모든 조직적 역량과 대중행동으로 이 지침을 따랐다. 10월 20일에 시작해서 베를린에서만 25만 명이 조직된 이 대중 집회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구체적이고, 대규모의, 그리고 적극적인 위험에 직면해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행동을 통해 통일되는 특별한 시기였다. 여론이 조직되었고, 노동자들은 전면전을 반대하는 그들의 결심을 증명했다. 이를 통해 인터내셔널의 가상적 힘은 바젤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바젤: 전쟁에 대한 전쟁 1912년 11월 초 상황이 악화되어 SPD의 요구에 따라 바젤 특별대회의 일자가 11월 24, 25일로 앞당겨졌다. 전쟁의 참상은 점점 위협적이 되었고, 세계전쟁의 위험이 있었다. 아들러도 SPD 집행부도, '나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만족스럽게 해결될 것이고, 우리가 유럽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는 베벨의 낡은 낙관주의를 공유하지 않았다. 아무도 더 이상 '발칸 국가들이 휴전을 하고 평화협정을 시작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지 않았다. 발칸의 화약고가 폭발할 가능성에 직면해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태도를 명확히 하여 평화주의 활동에 힘을 쏟았고, 집중적인 반군국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 의장 하세(Hugo Haase)는 평화주의 활동이 재앙을 피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인민의 대다수가 전쟁을 혐오하고 반대한다면, 정부는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템펠호퍼 공원에서는 20만 명이 모인 평화 집회가 열렸다. 인터내셔널의 가맹당 모두는 SPD의 제안에 따라 이 반전 캠페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11월 17일, 수많은 유럽 도시에서 보다 대규모의 대중 투쟁을 조직했다. 11월 1일 유럽 논동자들은, '전쟁과 발칸 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호소에 응했다. 파리 근처 Pre Saint Gervais에서 10만 명이 집회를 열었다. 대회에 앞서 ISB의 결정에 따라 조레스, 바이앙, 베벨, 키어하디, 아들러, 라바노비치(Rubanovich)23), 위스망스로 구성된 위원회가 대회에서 제출할 결의안 초안 작성을 위해 모였다. 인터내셔널의 '현자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상황과 임무를 명확하고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입장 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였다. 바젤 대회는 반전투쟁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과, 인터내셔널의 힘을 표현해야 했으므로, ISB는 코펜하겐 대회에서 있었던 바이앙-키어 하디 수정안에 대한 논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바이앙의 입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0년 11월 초에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코펜하겐에서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파들이 자세히 검토하고 논평을 할 수 있도록 제안문 초안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바이앙은 프랑스 철도 노동자의 파업을 예로 들며, 이것이 국가적, 국제적 수준에서 실행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위스망스는 이에 따라 12월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문을 담은 회람문을 모든 가맹당에 보내면서 최대한 빨리 논평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직 네 개의 당만이 응답했다. 불만을 느낀 바이앙은 노조를 통해 당 지도부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으로 위스망스에게 노조 조직에 직접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CGT가 이미 총파업과 봉기를 포함해서 어떤 전쟁 계획에도 반응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을 지적했다.24) 결국 (이전 회람문에 대한) 답변과, 각국 노조 조직에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하는 새로운 회람문이 보내졌지만, 만족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의안 문안을 준비하려고 비밀리에 회합을 한 특별 위원회는 몇 가지 초안들을 검토했고, 총파업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했다. 바이앙은 논평을 통해 폭동과 파업이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최선의 무기였으며, 짜르주의의 음모와 군사적 모험을 제어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든 국가조직이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할 것을 요청하고, 사용가능한 모든 방법과 역량으로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총파업과 폭동은 거부되지도, 결정되지도 않았다. 독일은 여전히 입장을 유보했으며, 의심했다.25) 대회 전 날인 1912년 11월 23일, ISB는 위원회의 선언 초안을 검토하고, 550명의 대표들에게 만장일치로 채택될 문서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강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로자를 포함한 몇몇 대표들을 만족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전쟁을 예방하거나 끝내기 위해 반군국주의 대중파업과 같은 급진적 조치들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단락을 문서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 결국 대회에 제출된 문서는 전쟁을 예방하는 구체적 수단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했다. 조레스는 갖가지 커다란 가능성 때문에 결의안이 어떤 특정한 행동 방침을 정하지 못했고, 동시에 하나도 배제하지 못했다고 논평했다. 예측불가능하고 특별한 상황에서만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수단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쟁 발발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사전에, 예외 없이 유효한 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수단이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둠으로써, 결의안은 다양한 분파 대표들과 정당 지도자들에게 완전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했다. 이전 대회 결의안들과 달리 이번에는 상황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국제 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진술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결의안은 앞으로 있을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뿐이라는 단언적 진술로 시작되었다. 문서의 두 번째 부분은 발칸,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의 사회주의 당의 임무를 약술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독일, 프랑스, 영국의 노동계급에 맡겨졌다. 그들은 열강들 사이의 차이를 메우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대회는 전쟁이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격분과 분노만을 일으킬 뿐이며, 혁명을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지배계급에 경고했다. 선언은 수 년 동안 사회주의자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문제에 대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을 제공했다.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외에도, 중간 계급과 모든 평화주의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반전운동이 확장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바젤 대회는 새로운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한 채, 이전 정책들에 대한 성과 없는 논의로 끝나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바젤 특별대회는 1914년 이전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된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반전 시위였다.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정부 집단들과 유럽의 여론에서 대회의 반향은 상당했다. 바젤 대회는 1912년 11월 유럽이 경험한 심각한 위기의 순간을 진정시켰다. 대회 때 높아진 긴장이 완화되자마자 단결의 부재가 명백해졌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던 바젤 대회의 보고서에서 독일 보고서 편집자는 '기회주의적 이유로' 연설의 급진적 부분을 삭제했고, 이는 독일 사민당 조직의 혼란을 보여준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회 이후 몇 달간 바젤 결의안을 문자 그대로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2년 12월 노동자들의 대규모 반전 집회가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다. ISB가 자신들의 관점을 고수했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의 평화주의 열정이 계속 커졌음에도, 실제로는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바젤에서 원칙은 정해졌지만, 그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위협에 대해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 사실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열강들 간 분쟁의 변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 정보의 부족은 1912년 12월에서 1913년 1월에 두드러졌다. 심각하게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평가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이 ISB는 너무 성급하거나, 너무 늦게 행동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때 이른 행동으로 인터내셔널은 위신을 잃거나 전체 평화주의 투쟁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것이었고, 반대로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뜻했다. 1912년 12월 상황은 다시 더 끔찍한 것으로, 유럽 전쟁은 더욱 가까워 진 것으로 보였다. 상황을 평가하는데 있어 ISB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언론 특파원이나 분쟁에 관련된 국가의 사회주의 당 집행부가 제공하는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가장 즉각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정확한 정보가 간절했다. 언론은 오스트리아의 침략과 도발과 같은 위협을 전했지만, 이는 단지 혼란만을 낳았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언론의 대부분이 발칸 위기의 시초부터 러시아 대사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12년 12월, 혼란의 한 가운데서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아들러와 같은 분별력 있는 인사로부터 위험이 임박한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기대했고, 12월 10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의 기관지(Arbeiter Zeitung)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즉각적인 무력 분쟁의 위험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발칸 전쟁이 발칸 인민들의 정의와 해방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지만, 그것을 유럽 사회주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터내셔널은 실제로 발칸과 슬라비아 인민의 자율성을 대의로 내세웠지만, 실천 수준에서는 위험을 완화시키는 지연 전술만을 택했다. 심지어 바이앙도 전쟁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 퍼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ISB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제안을 따랐다. 평화주의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은 사건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사건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압력 단체로서 인터내셔널은 실천적으로 무능력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로코 위기 동안 했던 것처럼, 외교적 영역에서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남은 힘이 없었다. 이런 임무는 집행위에 맡겨진 것이었다. 12월 중순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협상을 쉽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제안했다. 첫 번째는 최대한 빨리 오스트리아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공동 협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바이앙의 입장에서 즉각적인 위협은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었고, 따라서 이 긴장 완화는 유럽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었다. 그는 모든 분쟁에서 관련국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사회주의적으로, 실천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덧붙여서 바이앙은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중립 국가들에 중재 재판을 요청하라고 했다. 상황 상 이런 협의 소집이 어려웠으므로 위스망스는 첫 번째 제안을 보류했지만, 바이앙의 주장을 아들러에게 전했다. 두 번째 제안은 스칸디나비아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위스망스가 이미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립국을 규합하여 열강들에게 점진적 군축을 제안하자는 스칸디나비아 그룹의 제안에 따라 그는 벨기에 정부에 이런 의견을 제시했고, 그 결과 중립국 간의 특별회의가 개최되기도 했었다. 아들러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보다 상황을 덜 심각하고, 덜 절망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의 상황이 위협적이지 않으며,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평화가 보장된 것으로 평가하면서, 집행위와 프랑스 조직의 대표들이 편향적 언론을 통해 사실을 판단하는 것을 비난했다. 아들러는 계속해서 바이앙이 제안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협의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협의가 실천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분쟁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아니라 불가리아와 터키 사이의 것이었으므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와 마찬가지로 CAP도 발칸 문제가 곧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프랑스 대표들은 반복해서 ISB가 정력적인 반군국주의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들은 계속 걱정했으며, 매일 면밀히 국제 사태의 변화를 주시했다.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자, 1913년 2월 18일의 회의에서 CAP는 유럽 국가들의 군비 지출 증가에 따른 위험에 대해 검토했다. 일반적인 의견은 '군비증가와 발칸에서의 계속된 전쟁 때문에 국제 평화가 이전보다 더욱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CAP는 ISB가 소집되어서 (1)바젤에서 결의된 반전행동을 어떻게 계속할 것이며, 조정할 것인지, (2) 제국주의의 공격과 독일, 프랑스의 무장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이 제안은 당시 독일의 군비 경쟁 가속화와 프랑스의 적개심 증대에 놀라고 있었던 SPD 집행부와 아들러에게 전해졌다. SPD 집행부는 바이앙의 편지를 받은 2월 21일에 곧 모였다. SPD 집행부는 CAP의 제안에 반대했지만,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동의했다. SPD 집행부는 1912년 SFIO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제안했던 상호 관계와 공동 행동을 강화하자는 역제안을 제출했다. 2월 24일 SFIO 대표 토마(Albert Thomas)가 조레스가 쓴 프랑스-독일 선언의 초안을 갖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48시간 동안의 격렬한 논쟁에서 베벨과 샤이데만은 반대했고, 하세, 베른슈타인과 다른 사람들은 찬성했다. 오랜 논의를 거쳐 더 정제된 최종 문서에서 원 저자의 가장 중요한 의견들을 유지하는 가운데, 프랑스-독일의 군비 경쟁에 대한 공동의 반대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13년 3월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과 SFIO는 이에 따라 발칸 위기가 여전히 잠재적 문제의 근원이지만, 평화적 해법에 다다르고 있거나, 적어도 국지화되고 있다고 믿었다. 인터내셔널은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기에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더 이상 긴급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제적 데탕트를 조성하는 것, 논쟁 중인 문제(예를 들어 알자스-로렌)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열강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중재재판소를 주장하고, 그리고 총체적, 단계적인 군축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무장한 평화'의 지배를 끝내야한다고, 프랑스와 독일의 무장경쟁, 군국주의적ㆍ쇼비니즘적 경향의 출현을 저지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두 국가들 사이의 화해에 기여하는 것이 영국, 프랑스, 독일의 연합을 위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터내셔널이 1913년에 제시하고, 1914년 7월까지 매달린 새로운 이론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행동은, 바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이는 국제 사회주의자 정책의 전환점과 새로운 지침의 도래를 나타냈다. 1) [역주] 18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20개국 391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파리 창립대회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의결은 '국제 노동자의 의회'라고 스스로 부른 대회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는 어떤 조직도 출현하지도 않았고, 지도자도 선출되지 않았으며, 현실적 제도 마련도 없었다. 이후 2차 1891년 브뤼셀 대회, 3차 1893년 취리히 대회, 4차 1896년 런던 대회에서는 매번 대회마다 전쟁의 위협에 대한 대처방안이 결의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뉴벤호이스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총파업을 진행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지만 매번 부결된다. 5차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 사무국과 집행위회, 서기장으로 구성된 본부를 브뤼셀에 두게 된다. 이후에는 6차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7차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8차 1910년 코펜하겐 대회까지 진행되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1912년 바젤 임시대회가 진행되었고, 1914년으로 예정되었던 비엔나 대회는 전쟁 발발로 열리지 못했다.본문으로 2) [역주] 제2인터내셔널 당시 총파업의 유효성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 총파업은 목표와 상관없이 대중들의 무절제한 군중심리에 휩쓸려 단순한 폭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이럴 경우 오히려 대대적 탄압을 불러일으켜 기존 운동의 기반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우려 속에 투쟁수단으로서 파업 자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현실적 문제가 되었다. 1893년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벨기에의 정치적 총파업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스웨덴에서 1894년, 1898년, 1902년 일어난 파업도 성공하지 못했다. 1903년 네덜란드에서 실시된 총파업은 사회주의 진영의 내분과 함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런 경험에 따라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총파업 문제가 제기되었다. 총파업은 대중파업과 구별되었고, 사회 전체의 존립을 대상으로 하는 무정부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승인 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총파업의 기능이 부인되었다. 하지만 1905년 러시아에서 정치적 대중파업이 사회주의적 목표를 향한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인터내셔널에서 총파업의 전술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재개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러시아 혁명이 진압되고 실패로 돌아가 버리면서 다시 무관심 속에 묻히게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와 같은 조직적 구심체가 없다는 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취약점으로 지적되었고, 개선요구가 이어짐에 따라 1900년 파리 대회에서 ISB가 설립된다. 사무국은 의장과 서기, 각국이 2명씩 보낸 대표들로, 전체 약 50~70명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각국 대표들이 자치권을 강력히 고집함에 따라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며, 결합도도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본문으로 4) [역주] 벨기에의 사회주의 작가 정치가. 본문으로 5) [역주] 1905~1906, 1911년 두 차례 모로코의 분할을 둘러싸고 국제분쟁이 일어난다.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연결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유럽열강의 분열대상이었다. 1880년 체결된 마드리드조약에 의해 모로코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모로코 침투가 두드러졌다. 프랑스가 모로코의 내정개혁을 요구한데 대해,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 탕헤르항을 방문해서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한다. 독일이 프랑스의 이권을 방해하고,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술탄을 원조함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이 극도의 대립상태에 이른다. 1906년 1~4월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회의가 열렸다. 프랑스와 영국의 결속을 통해 독일이 고립되고 프랑스의 진출이 인정되었다.본문으로 6) 바이앙은 ISB에서 채택된 자신의 제안이 최종적 해법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1907년 7월 9일 ISB 회의에서 그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이 문제를 올리는 것을 반대했다. 조레스는 인터내셔널 전체가 이 문제를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이앙의 제안에 반대한다. 본문으로 7) [역주]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여 강대해진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는 발칸 제국(諸國)의 상호유대와 결속을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2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사이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성립되었다. 원래 러시아는 이 발칸동맹을 반(反)오스트리아동맹으로 할 의도였으나, 발칸 제국은 그보다는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발칸반도에 있는 투르크의 영토를 획득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1912년 10월 발칸동맹국은 유럽 열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투르크 영내의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몬테네그로가 먼저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 다른 3국도 투르크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1차 발칸전쟁). 열강들의 예상과는 달리 투르크는 패전을 거듭하여 불가리아를 통해 동맹국에 휴전(休戰)을 요청했고, 그 결과 12월 휴전이 성립되었다. 12월 16일부터 런던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어 아드리아노플 등의 할양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다가, 1913년 1월 23일 투르크 내에서 청년투르크당(黨)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1월 29일 동맹국은 휴전을 취소하고, 2월 4일 전투를 재개하였다. 5월 30일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지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영토 전부와 크레타섬을 발칸동맹 제국에 할양하였다. 강화조약에서의 영토분배를 둘러싸고 발칸동맹 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자,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가 돌연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몬테네그로ㆍ세르비아ㆍ그리스ㆍ루마니아ㆍ투르크 등이 불가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연전연패하여, 7월 30일부터 부쿠레슈티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10일 부쿠레슈티조약이 성립되어 불가리아는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할양하고,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할양하였으며, 카바라 일대를 그리스에 넘겨주었다.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원망하게 되었고 러시아와도 사이가 멀어졌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였다. 발칸전쟁으로 발칸 제국 간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고, 내셔널리즘이 팽배한 제국들이 유럽 대륙으로의 영토확대를 꾀하면서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가 되었다. 본문으로 8) [역주] James Keir Hardie 1856-1915년 영국 정치가. 초기 노동당 지도자. 극빈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년시절부터 탄광 갱부(坑夫)로 일하였는데, 20대에 이미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또 저널리스트로도 활동, 1887년 《갱부》지(紙)를 간행하였다. 당시 자유당의 영향 아래 있었던 노동자의 정치적 자립을 주장하였고, 88년 미드라나크의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스코틀랜드노동당을 조직하였고, 92년 사우스웨스트햄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93년에는 독립노동당을 결성, 의장이 되었다. 1900년 이후로는 노동자대표위원회 및 노동당의 중심멤버로 활동하였다.본문으로 9) [역주] (1866. 1. 25 벨기에 익셀-1938. 12. 27 브뤼셀) 유럽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1914~39년 벨기에 연립내각에 몸담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전후 평화협상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1889년 벨기에 노동당에 가입하여 당수가 되었다. 1894년 사회당 소속 의원으로 처음 의회에 진출했으며, 1900년 이후 여러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보통선거권의 관철을 위하여 노력했으며 마침내 1919년 결실을 거두었다. 1914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반데르벨데는 전쟁기간 내내 내각에 몸담았다. 1919~20년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근로조건개선 조항을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법무장관으로서 형법의 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1919). 1925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자 사회당과 가톨릭당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위촉되었고, 그해 독일ㆍ프랑스ㆍ영국ㆍ이탈리아와의 로카르노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2년 동안 앙리 자스파르 내각에서 외무장관직을 수행했으나, 병역기간을 6개월로 한정시키고 반(反)군국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야당의 비난을 받았다. 무임소장관(1935~36)과 공공보건장관(1936~37)을 역임한 뒤 은퇴하여, 브뤼셀자유대학교에서 법률을 강의했다. 주요저서로 〈집산주의와 산업발전 Le Collectivisme et l' volution industrielle〉(1900), 〈사회주의 대(對) 국가 Le Socialisme contre l' tat〉(1918), <벨기에 노동당, 1885~1925 Le Parti Ouvrier Belge, 1885~1925〉(1925) 등이 있다.본문으로 10) 1908년 9월 영국-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반대하는 집회에 독일 대표로 카우츠키가 지목되었을 때, 베벨은 카우츠키가 독일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드러냈다. 본문으로 11) [역주] 오스트리아 통일사회민주당에 참여했으며 지도자로 활동했다. 1881년 이래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1886년 주간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1889년 당기관지 《노동신문 Arbeiter Zeitung》을 창간 편집하였다. 또한 분열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하인페르트 당대회에서 통일사회민주당으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고, 당 강령을 기초하였다. 1905년 의회에 진출, 죽을 때까지 의원으로 활약했는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외무장관에 취임하였으나 곧 병사하였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의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12) [역주] 1911년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가 출병한다. 그해 7월 독일이 군함을 파견해 프랑스를 위협했는데, 이 사건을 아가디르 사건이라고 한다.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에 양보를 하고 양국 간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 북부를 할양하고,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한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랑스 통합사회당,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로 1905년 4월 창당되었다. le Parti socialiste unifi , Section Fran aise de l'Internationale Ouvri re.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은 당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우위를 표시하는 것이며, 통합이라는 말은 통합이 항구적일 것이라는 것을 뜻했다. 여기에 노동자 성향이 강한 프랑스 혁명사회노동당의 주장으로 노동자라는 뜻의 Ouvri re가 붙여졌다. 본문으로 14) SPD의 대기주의도 고려되어야 한다. SPD 집행위는 임박한 독일의회 선거 때문에 독일 대표가 ISB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보았다. 집행위는 모로코 정책에 반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경우, 유권자들이 당을 애국적이지 않다고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으로 15) 집회의 슬로건도 각국 당의 관점을 나타냈다. 1911년 9월 프랑스 집회에서는 폭동과 총파업이 요구된 반면, 트렙토우 공원 집회에서는 단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수단이 평화유지에 사용되어야 하며, 독일 유권자들은 다음 독일 의회 선거에서 후보들에게 이를 권고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3-4천 명이 조직되고, 베를린에서는 경찰 추산 5-6만 명, 포어베르츠 추산 20만 명이 조직되었다.본문으로 16) 바이앙의 제안에 대한 논의는 공동행동을 효과저긍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 사이에는 많은 간극이 있었다. 전자 중 베벨은 무능력을 선언하는 것에만 동의했다. 다양한 대표들이 전쟁이 선언된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 이전에 행동을 취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로자와 바이앙은 전쟁 선언 이후에도 인터내셔널의 힘을 믿으려고 했다.본문으로 17) 예를 들어 CGT는 1911년 10월 긴급히 파리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전쟁이 선언될 경우 즉각 혁명적 총파업을 일으킬 것이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본문으로 18) [역주] 19세기 중엽부터 터키에서 사회개혁이 추진되고 있었고, 1876년에는 파샤가 헌법제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술탄은 터키-러시아전쟁(1877~78)을 이유로 헌법을 정지시켰다. 청년투르크당은 이에 헌법을 부활시키고 전제정치를 폐지하기 위해 처음에는 비밀결사로 발족하여 단기간에 사관학교ㆍ기술학교의 장교ㆍ교사ㆍ학생ㆍ정부 직원들 중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냈다. 20세기에 들어와 청년장교 층이 혁명세력의 지주가 되기에 이르자 당세는 신장되어, 1908년 살로니카에서 혁명을 일으켜 입헌정치를 선언한 뒤, 다음 해 압둘하미드 2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본문으로 19) 9월 23/24일 ISB 회의에서 치오티는 이탈리아 당이 총파업을 결정했고, 곧 이를 위한 회의들이 잡힐 것이며, 의회의 사회주의자 그룹 일부만이 이탈리아의 침략에 찬성할 뿐이라고 선언했다. 본문으로 20) [역주] 1907년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1919 1920년 오스트리아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고, 1931 1933년 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34년 나치스파(派)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오스트리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지도자. 본문으로 21)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스, 아르헨티나, 아르메니아 대표들이 이 안에 찬성했다. 본문으로 22) 대회의 원래 날짜대로 치르자는 안은 러시아 혁명적 사회주의자, 스위스, 미국, 불가리아 '좁은 사회주의자',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동의를 받았다.본문으로 23) 러시아 사회혁명당 대표 루바노비치는 당시 병중이었던 플레하노프와, 크라쿠프에 머물고 있어 바젤에 참석하지 못했던 레닌의 합의 하에 이 회의에 참석했다. 본문으로 24) 위스망스는 5월 10일 바이앙에게, ISB가 CGT에도 자문을 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고 물었다. 바이앙은 CGT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위스망스가 개인적으로 호소하라고 제안했다. 본문으로 25) 카메네프에 따르면 '총파업과 폭동'은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에서 결정되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므로, 바젤대회 결의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본문으로

  • 2007-02-12

    사회주의와 세계대전: 제 2 인터내셔널의 붕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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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1%] 국제 사회주의 정책을 향해 '프롤레타리아란 무엇인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혐오하는 대중들이 프롤레타리아다.' 조레스(Jean Jaur s)의 이 말은 50년 동안 인터내셔널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는 자신들을 '평화의 당파'라고 정의했다. 사회주의와 反군국주의,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는 동의어였으며, 모든 선전의 중심테마였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평화로웠던 유럽의 인터내셔널은 원칙적인 선언과 자본주의가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그쳤다. 군국주의와 전쟁을 비판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결의안이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의 모든 대회1)마다 채택되었다. 결의안들은 자본의 분파가 전쟁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평화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자본주의 체계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고, 사회주의의 확립을 통해서만 중단될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체계가 정점에 달할수록 무력 충돌이 더욱 폭력적이고 빈번해질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서로의 절멸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은 국제주의와 계급의식이었다. 군국주의를 막고, 세계평화 체계를 설립하기 위해 인터내셔널 대회는 비밀 외교의 폐지, 직업군인을 민병대로 대체할 것, 전면적인 군축 등을 제안했다. 1896년 런던대회에서는 중재 시스템을 설립하기로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는 전쟁을 찬성하는 자들에게 반대해서 투표하는 것,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군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총파업은 아나키스트적 편향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2) 1893년에서 1907년까지의 인터내셔널 대회는 총파업이 전쟁을 방지하는데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해서 전면적 군축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군비지출에 반대하는 투표가 최선책이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위협은 점점 심각해졌고, 전쟁과 군군주의는 더 이상 단순히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파쇼다 위기, 스페인-미국 전쟁, 의화단 사건 당시 중국에 대한 개입, 보어전쟁,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독일의 분쟁, 러-일 전쟁, 발칸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분쟁을 거치면서 평화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바이앙( douard Vaillant)과 조레스는, 평화가 사회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이며, 전 세계적인 충돌에 직면한 유럽의 미래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법과 사회주의 국제정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일반원칙만을 주장하는 결의문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당들의 상호협력과 공동행동이 필수적이었다. 1902년 12월 국제사회주의사무국(ISB, 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3)이 암스테르담 대회의 의제 선정을 위해 소집되었을 때, 조레스는 전쟁을 더 이상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귀결로 보고자 했다. 그는 범게르만주의나 3국 동맹과 같은 문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전면적 군축의 달성방안과 중재재판소 등의 실현방안에 대한 검토를 요구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자들의 반전행동에서 '최대한'의 행동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독일과 러시아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공연히 그를 불신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정책이 구체화되고,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제2인터내셔널의 제도적 구조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자율적 당들의 연맹으로, 가입자들에게 정치적/전술적 문제에 있어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각 당들은 자신의 고유한 프로그램과 목표를 고수했고, 인터내셔널의 유일한 이슈는 최대한 협동을 조직하는 것뿐이었으며, 실질적 결정력이 없었다. 이런 구조는 결의안을 실행하는데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규약 제정에 20년이 걸렸고, 1900년까지 제2인터내셔널은 정기 대회로만 구성되었다. 대회의 결의안들은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지만, 가맹 당들의 협력이나 국제적 행동을 보장할 조직이 없었다.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서야 ISB와 집행위, 서기관의 상설 기관이 설립되고 브뤼셀에 본부를 두었다. 하지만 이런 제도화에도 가맹 당과 조직의 자율성의 원칙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며, 인터내셔널은 여전히 독립된 조직이 아닌 연합조직으로, 지부들과 분리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대회만으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운동의 확산을 위해 ISB가 만들어졌지만 아무런 권위가 없었으며, 수 년 동안 사회주의 세계의 우편함 역할만을 했다. 전쟁의 기미가 커질수록 사무국의 권력과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졌고, 1905년 위스망스(Camille Huysmans)4)가 서기장으로 임명되면서 ISB는 최종적 지위를 획득한다. ISB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조정하고, 대회들 사이의 업무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결의안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사무국의 지위 강화 속에서도 1889년에 만들어진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고, 대회의 역할도 손상되지 않았다. 응집력 있는 조직과 제도적 기구의 부재는 뿌리 깊은 상황을 반영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 동안 주요 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 운동은 수적,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다양한 당들의 민족적 현실이 중시되었고, 경험과 이해의 차이로 인해 정치적 판단은 민족적 이해로 협소하게 제한되었다. 두 번째 큰 장애물은 독일사회민주당(SPD)과 프랑스 사회주의자 그룹 사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독일의 半숙명론적 입장과 실천없는 평화주의는 프랑스의 낙관적인 행동 요청을 가로막았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로 SPD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지도력을 다투게 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 우위에 있던 SPD에 맞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다른 개념, 노동자들의 다른 행동을 승인받기 위해 싸웠다. 이런 맥락에서 조레스는 SPD의 정치적 무능력과 함께, SPD가 혁명적 행동이 아니라 의회에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는 특히 1905-6년 모로코 위기5)동안 명백하게 드러났다. SPD 집행부의 미봉책들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근심어린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바이앙과 조레스는 1905년 9월, 각국 사회주의자들이 공동행동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을 ISB에 요청했다. 이 제안은 1906년 3월 6일 ISB회의에서 논의되고 승인되었지만, 일반적 내용만이 다루어질 뿐이었다.6) 1907년 8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군국주의와 국제분쟁'이 선정되었다. 비록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군국주의와 전쟁 문제에 대해 정치, 이론의 영역에서 활기찬 논쟁이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철저히 규명되지 못했고, 전쟁이 벌어질 때 사회주의자의 행동과 태도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논쟁과 더불어 좌파 대표자들(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중도, 수정주의 우파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모든 논쟁은 학파간의 차이와 국제 사회주의 내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분열의 징후를 드러냈다. 다수파가 유럽전쟁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반적 정책을 원했던 반면, 좌파들은 자본주의 전쟁에서 연원할 수 있는 혁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적 시각과 전략에서 심대한 차이를 드러냈다. 공동 결의안 준비를 맡은 위원회의 논쟁은 이런 다양한 관점을 반영했다. 바이앙, 조레스는 의회개입에서부터 총파업과 폭동에 이르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방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사회주의자의 전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총파업에 반대한 독일 대표는 이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중재를 위한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로자(Rosa Luxemburg)와 레닌(Lenin), 마르토프(Martov)가 '전쟁은 발발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하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 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이 자본주의 계급 지배를 빨리 중단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대표들이 이 좌익적 개정안을 채택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이것이 가상의 미래일 뿐이라며 결의안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임박한 혁명'은 부르주아를 협박하는데 효과적이었을 뿐, 전략적 목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결의안은 방어전쟁과 제국주의 전쟁을 구별하는 사람들과, 민족적 방어와 계급투쟁을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무시했다. 이 문제는 순전히 이론적일 뿐 긴급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합의는 불가능했고, 이 갈등은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이 무딘 결의안은 사회주의 반전행동에 복무하지 못했으며, 인터내셔널에 존재하는 분열을 영속화했다. 역설적으로 이 결의안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레닌은 결의안이 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SPD 지도부는 극단주의에 대한 승리라고, 조레스는 국제 정책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라고 보았다. 분명 슈투트가르트 대회는 전환점이었다. 인터내셔널에서 SPD의 권위는 분명한 타격을 받은 반면, 프랑스 사회주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두 '열강' 사이의 갈등은 남아있었으며, 좌파와 중도/우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전략에 대한 문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비록 논쟁이 인터내셔널의 일반 방침이나 활동들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에 사회주의의 국제 정책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이론적 영역으로 격하되지 않았다. 뒤이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과 발칸위기7)는 더욱 불안을 일으켰다. 1908년 10월 회의에서 ISB는 재빨리 국제 상황을 분석하고 프랑스가 제안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전쟁의 지속적 위협을 언급하며 모든 사회주의 당들이 경계와 활동을 배가하고, 정세와 상황에 따라 국가/국제적 틀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법과 조치들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실천은 수동적이었고, 선언적인 평화주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영국 대표인 글래시어(Bruce Glasier)는 '이런 결의안은 정치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나 사실 ISB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비난에 대해서는 조직의 어려움에 대한 언급으로 답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국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반복하면서, 제한된 국가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정치 문제를 바라보았다. 전쟁 거부는 동의가 되었지만, 공동 대외정책의 자세한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달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빠져있는 모순과 취약성들을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인터내셔널의 다수파는 전쟁을 자본주의의 고유한 문제이며, 열강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증대되는 위협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전쟁은 다양한 형태의 정의 없이 비난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식민지 전쟁이나 정복 전쟁에 국한되었고, '침략 전쟁'과 '방어전쟁'은 정치적 행동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으로 충분히 정의되지 않은 채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었지만, 지도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경멸적으로 거절했다. 예를 들어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의 SPD 에센 당 대회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당의 전술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결정은 자국 정부가 침략전쟁을 치르는지, 방어전쟁을 치르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침략인가 혹은 조국을 방어하는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베벨(August Bebel)은 특유의 방법으로 질문을 회피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확신을 갖고 전쟁이 침략적인지 아니면 방어적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판(Van Ravestejn)과 같은 몇몇 젊은 사회주의 투사들은 일체의 단일화 시도를 거부하면서, 방어적 공격이나 방어 전쟁이라는 구별의 어려움을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 계급과 민족의 이해가 존재하더라도 침략전쟁과 방어전쟁에 대한 명확한 구별은 어쩌면 언제라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모든 전쟁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반대되어야 했다. 카우츠키(Karl Kautsky)도 비슷한 입장으로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침략과 방어전쟁 이론을 명확히 거부했다. 그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위한 전쟁은 불가능하며, 프롤레타리아는 국제적 세계 정책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위협을 처음부터 단호히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내셔널은 순전히 학술적 문제라고 간주했던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랐고, 결국 유럽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정의하는 것을 회피했다. 인터내셔널의 활동은 예방 전략에 집중되었다. 전쟁 가능성의 검토, 위협이 현실이 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 어떤 참사라도 제한하는 것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위기가 발발하자 즉시 적용된 인터내셔널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 전략을 통해 '전쟁에 대한 전쟁' 슬로건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공동의 계획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1910년 코펜하겐 대회의 목표였고, 대회 의제에 다시 '군국주의와 군축 문제'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차는 키어하디(Keir Hardie)8)와 바이앙이 제시한 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쟁에서 다시 드러났다. 키어하디-바이앙은 "대회는 전쟁을 예방하고 저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들 중 가장 적극적 형태의 선동과, 대중행동뿐만 아니라 특별히 전쟁 도구(무기와 탄약, 수송 등)를 공급하는 산업의 효과적인 총파업을 고려한다."고 제출했다. 이 제안은 독일의 좌파 대표자들에게조차 너무 혁명적이었고 혼란을 일으켰다. 독일 대표단의 격렬한 반대에 반데르벨데(Vandervelde)9)는 결의안을 ISB에 회부해 더 많은 검토를 거쳐 다음 인터내셔널 대회의 의제로 제출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결국 채택된 결의안은 독일대표단의 관점을 드러냈다. 결의안은 무장경쟁이 가속되지 않는다고 한정하고, 행동수단을 순전히 의회적인 것들과, 전쟁을 찬성하는 투표 거부, 강제력이 있는 국제 중재 재판소 회부, 무장 제한, 모든 국가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대회에서 결정된 유일한 것은 非사회주의자들의 평화운동 프로그램과 거의 동일했다. 코펜하겐 대회는 또 한 번 중심 문제에 정면대처하지 못했다. ISB는 여전히 전쟁이 일어날 경우 사회주의자의 행동을 조정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각국의 행동을 명확히 정의하고 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한 이런 책임은 거의 무의미했다. 유일하게 내려진 결정은,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위협적인 수준일 때는 언제나, 한 단체 이상이 요구할 경우 ISB 서기장이 사무국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코펜하겐 대회는 슈투트가르트 대회부터 존재했고 모로코 위기가 결정적 촉매가 된 분열을 촉진했다. 좌파들은 코펜하겐 대회를 부르주아 평화주의로 향하는, 이전 대회로의 후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다수는 코펜하겐 대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두 차례의 인터내셔널 대회를 통해 국제 사회주의 정책의 특정 원리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고, 전쟁의 위협에 대해 취해야할 조치들을 결정하는 것은 다음 1913년 비엔나 인터내셔널 대회로 넘겨졌다. 최대한 각국 정당들의 행동을 조정하고 반군국주의 운동을 강화하고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임무는 어떻게 수행될 것인가? 평화주의에 의해 혹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총공격으로? ISB에서 프랑스-독일의 차이: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후 국제 상황의 악화는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제국주의 개념과 정세 에 대한 분석은 모로코 위기,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리비아) 침공, 발칸 전쟁이 일어난 1911-1913년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외교적 긴장과 분쟁의 국지화 가능성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론에 대한 관심부족이 드러났고, 이론은 단지 배경지식의 문제로 격하되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라고 보았던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대한 조사는 거의 없었다. 국제정책의 장기적 프로그램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공식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기적이지만 모호한 공식과, 즉각적으로 타당하지만 극단적인 것 사이에서는 항상 전자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1911년과 1912년, ISB와 전원회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점 차이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모든 논쟁의 끝에는 대중을 동원할지, 거리로 나설 것인지, 의회 활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결정해야했다. 이 때 각국 조직들의 진정한 색채가 드러났다. 외교적 위기가 발생하자 관련 국 사회주의 당들은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각 당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정당화하면서 자국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다른 정당들의 행동을 요구했다. 간신히 인터내셔널 대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당들 사이에 내재된 불신은 위기가 나타나자 명확해졌다. 1908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제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낳았다. 약소 세르비아 정당은 오스트리아 당이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위기를 판단해 비엔나 정부를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0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력 경쟁에 대한 독일과 영국 사이의 문제도 심각했다. 노동당(Labour Party)과 ILP(Indepedent Labour Party of Great Britain)가 명확히 재무장에 반대했지만, 사회민주연합(Social Democratic Federation) 대표는 독일의 위협을 비난하며 자국의 해군 증강을 변호했다. 힌드만(Hyndman)이 이끄는 영국 사회주의 그룹은 민족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코펜하겐 대회에서 힌드만의 지지자들은 독일이 세계 정복을 꾀한다며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자국의 무장 정책, 특히 해군력 향상을 지지했다. 힌드만은 SPD에 대한 적대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05년에 그는 SPD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능력을 비판하는데 그쳤지만, 1908년에는 공개적으로 독일이 행동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시했다. 1911년에는 SPD가 인터내셔널의 모든 반전 캠페인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가 전쟁의 위협과 가능한 예방수단을 검토하기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를 모으자고 ISB에 세 차례 제안했을 때마다 SPD가 참석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즉시 ISB 서기장에게, 힌드만의 주장이 비방임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긴장은 완화되지 않았고, '힌드만 사건'은 더욱 심한 갈등으로 반복되었다. 국제적 긴장의 심화로 SPD 집행부와 프랑스 대표는 다시 ISB에서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1>국제 상황에 대한 해석과 평가, 2>고유한 평화 요인으로서 인터내셔널의 역할, 3>위협에 대처할 수단에 대한 판단에서 불일치를 드러냈다. 이러한 차이는 1905년 초에 확연해졌다. 이들은 각자 행동하면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베벨은 주의를 요청하며, 1905년 6월 모로코 분쟁에 대한 ISB 회의 소집을 요청한 힌드만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14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영국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고 예민하게 본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위기마다 회의를 소집하고 결의안을 통과시키면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프랑스와 정반대였다.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심각한 외교적 위기가 발생했던 모든 순간에 낙관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침묵했다. 반면 인터내셔널이 심각한 충돌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던 프랑스는 국제 정세가 악화될 때마다 근심했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했던 조레스, 바이앙, 장 롱게(Jean Longuet)는 오랫동안 외로이 자신의 관점을 유지했다. 외교 분쟁의 위험을 인식했기 때문에 조레스와 바이앙은, 사회주의자들이 중재와 화해 노력으로 국제 분쟁을 진정시키는데 활발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프랑스인들은 이론적 고려보다는 조레스가 합리적으로, 바이앙이 직관적으로 도달한 현실주의적 평가에 자극되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실용주의에 상당한 의심을 갖고 있었고, 프랑스의 예측과 분석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조레스의 평화에 대한 전망도, 중요한 국제 분쟁 해결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건설적 역할에 대한 개념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SPD는 대외 정책의 문제에 대한 합의를 만들지도,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SPD는 그것이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대외 정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꺼려했다.10) 독일의회(Reichstag)의 사회주의 그룹은 독일 정부의 팽창주의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특히 모로코 문제에서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1908년 10월 ISB 회의에서 몰켄부르(Molkenbuhr)는 모로코 위기에 대한 독일 정부의 태도를 '양동작전'이라고 묘사하며, 위협이 가상적이고 피상적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사실관계를 심하게 단순화하는 것으로, 당 우파가 제안한 '아프리카에 남아있을 독일의 권리' 이론에서 볼 수 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선언에 가깝다. 전쟁 이전에는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대는 더욱 없었다. 프랑스계 모로코가 독일이 지브랄터 해협으로 가는 것을 막아 식민지로 접근할 수 없게 되자, 1911년 SPD는 모로코 주권의 보호를 주장했다. 콩고 배상문제와 관련해서도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은, 그들이 받는 금액이 보잘 것 없다는 것에 국한되었다. 프랑스-독일이 보인 두 번째 차이는 인터내셔널이 평화의 요인인지에 대한 것이다. 국내 정책에 실질적 영향력이 있었고,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독일 사민당은 인터내셔널을 신경 쓰지 않았다. SPD 대표들은 ISB가 반전 투쟁의 믿을만한 조정자인지 의심했으며, 사무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SPD는 인터내셔널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통해 타국의 당들과 ISB를 다룰 수 있는 위선적인 후원 정책을 추구했다. 외교적 문제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능력에 대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달성 불가능한 것으로,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몰켄부르는 ISB가 노동자 정책에 한정되지 않고, 화려한 성명밖에 만들지 못하면서 대외 정책의 주요 문제들에 개입하는 것을 비난했다. 모로코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911년 아들러(Victor Adler)11)도 ISB의 외교영역에서의 활동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대중 집회 이상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대중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 특히 조레스와 바이앙의 믿음은 이와 정반대였다. 조레스는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의 국제적 조직이 마침내 출현하여 실질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으며, 사회주의 국제 정책에서 ISB의 역할을 강조했다. ISB의 프랑스 대표 바이앙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어떤 전쟁의 징후에도 바이앙은 놀랄만한 속도로 반응했다. 분쟁이 있을 때마다, 외교적 긴장이 있을 때마다 그는 ISB에 자신의 우려를 알렸고, 사회주의 세계에 경고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제안, 그의 부단한 행동 요청, 그의 예측은 오스트리아 당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적대를 낳기도 했다. SPD 집행위원회는 프랑스의 활동을 성급하거나 틀린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1908년 9월에 바이앙이 제안한 프랑스-독일의 공동 집회를 SPD 집행위원회가 반대했다. 하지만 SPD는 이전의 회의주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는 평화투쟁에 개입할 필요성을 인정했던 SPD 지도부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했다. 이런 변화는 부르주아 사회가 계속 발전,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전쟁의 결과가 잘못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1908년 이래로 SPD의 평화주의 운동은 특정한 '정치적 변화'보다는, '지속적으로 증대하는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야한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의 행동들은 자본주의를 조금씩 파괴하는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고, 군비 경쟁의 위협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중간계급의 이해가 일시적으로 만나 협력이 가능했기 때문에, 평화주의 행동은 부르주아를 위협하지 않는 것으로 국한되어야 했다. 독일은 이에 따라 조직된 노동자의 편에서 중간/중하위 계급이 공동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고전적 형태의 반대 전술을 취했다. 여론이 전쟁을 예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관점에 따라, 선전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당의 선전 주제는 집행위원회의 공식 관점(전쟁이 일어난 뒤에 저항하는 것은 뒤늦은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호전적 성향을 막는 것이다. 근대전쟁은 대중의 동의 없이 발발하기 어렵고, 만약 발발한다면 지배자들은 그것의 참혹한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반전 행동에 적합한 분야는 언론과 의회였다. 카우츠키가 보기에 최후의 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의 시민들이 연합하여 공동의 상업 정책을 추구하고, 의회, 정부, 군대를 갖는 국가의 연합으로' 유럽연합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전술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프랑스는 '세계평화의 유일한 보증인은 조직된 사회주의 노동자'라는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을, 행동 촉구로 해석했다. 대중들은 결집되어야 하며, 전투적 노동자들의 방식으로 전쟁의 위협을 막아야 했다. SPD에게 이는 현실에 조응하지 않는 원리일 뿐이었다. 독일 내부의 논쟁도 벌어졌다. 판네쿠크(Pannekoek)에게 반제 투쟁의 목적은 제국주의 성장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이었고, 이렇게 조직된 대중들이 자본주의를 정복할 것이었다. 그는 카우츠키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수동적인 대기주의이고, 모든 혁명적 행동은 비과학적 아나키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독일의 국경을 넘지도, 교의상의 논쟁 틀을 넘어서지도 못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은 아가디르 위기12) 이후에 더 격렬해졌다. 비록 이것은 여전히 '무대 뒤쪽에' 있었지만, 그 결과로 ISB는 반전 캠페인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고, 이와 같은 긴장의 순간에 효과적 행동을 조직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독일이 모로코에 전함을 보내기로 한 급작스런 결정때문에 관련국 사이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위스망스는 즉시 관련된 국가 대표들을 소집해 파리에서 ISB 회의를 개최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반데르벨데는 이런 문제들에 어떤 '대단한 위급함'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SFIO13)는 반대의 입장이었고, 7월 4일 CAP(Commissin Adinistrative Permanante de la SFIO)는 긴급하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사회주의 당 대표들을 소집해서 심각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ISB에 요구했다. 이틀 후 위스망스는 이 요구에서 제안된 모든 사회주의당 대표들을 초대했다. 독일 대표 몰켄부르는 모로코 위기에서 위기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다며 프랑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모로코 문제는 단지 독일 정부의 양동정책일 뿐이고, '이를 통해 자국 정부가 국내 상황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며, 독일 의회 선거에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베벨도 단호하게 이와 같은 입장을 밝혔고, ISB 서기장은 회의 계획을 중단했다. 조레스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대회 결의안에 따른 행동을 촉구했다. SPD 집행부는 이런 제안에 매우 공감한다며 응답했지만 명확한 선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고, 입장조차 결정되지 않았다. 당의 태도는 상황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혼란스런 독일의 행동은 사실 '민족적 논리'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고요함 뒤에는 완전한 무능력이 있었다. SPD의 고민은 독일이 관련될 때에만 시작되었다.14) 1911년 7월 21일 프랑스와 독일의 협상 파기의 조짐이 생기고 영국의 태도가 비판적이 되었을 때, 베벨은 위스망스에게 ISB 소집과, 브뤼셀에서 국제 총궐기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베벨은 이런 조치들이 '만약 위기가 심각해질 경우'에만 취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3일 후, 사회민주연합과 노동당의 서기장이 ISB 소집을 요구했다. 하지만 베벨은 그동안 '상황이 평화로워졌고', 프랑스가 영국을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제안에 반대했다. 반면 프랑스 대표들은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었다고 판단해 영국의 제안을 지지했다. ISB 집행위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아들러가 독일의 핑계를 지지함에 따라 회의는 다시 한 번 연기되었다. 당 집행부가 반전 투쟁의 임무에 무능력하다고 생각한 좌파들은 SPD의 우유부단함과 느린 반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1911년 7월 24일 로자는 몰켄부르와 위스망스의 서신 교환을 발표하고, 당 집행부의 기회주의적 전술을 엄하게 비난했다. 뒤이은 논의에서 SPD 집행부는 꼴사납게 행동했고, 사람들은 몰켄부르의 침묵을 유죄 시인으로 받아들였다. 로자의 비판에 분개한 베벨은 당 집행부의 어리석음에 절망했고, 특히 몰켄부르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그러나 베벨은 1911년 9월 예나 당 대회에서 당의 단결을 핑계로 당 집행부에 완전히 동조했다. 좌파들의 강력한 비판에도 SPD는 신중정책을 계속했고, 반전 행동 강화의 요청이 계속되어 베를린 트렙토우 공원의 인상깊은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15) 1911년 9월 11일 반데르벨데는 몇몇 프랑스 정치-경제 그룹의 공격적 캠페인에 대해 독일 정부가 불쾌해하며, 상황이 악화될 위험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또 프랑스와 독일 정부의 모든 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다는 정보도 있었다. 만약 협상이 실패하거나 관계가 결렬된다면 상황이 진짜 위험해질 것이고, 전면적인 반전의 노력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ISB 집행부는 신속히 행동해야만 했다. 최근의 충돌 요인들과 관련해서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결의안의 이행 수단을 찾자는 반데르벨데의 제안에 따라 CAP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강경노선을 강화하려한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위스망스는 ISB가 즉시 소집되어 국제 반전 행동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묵인했다. 급진적으로 표현된 선언에서 대참사를 막기 위해 취해져야할, 심지어 폭동까지 포함된 모든 수단이 논의되었다. '모든 국가의 노동계급이 동의하는 답은 정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혁명적 봉기를 통해 국제 평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위스망스는 SPD에도 개입했다.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예나 대회에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의 회합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전신을 보냈다. 베벨, 아들러, SPD 집행위는 이 의견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9월 14일 반데르벨데는 우려가 일정 부분 사라졌으며, ISB 회의가 긴급하지 않다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다. 9월 17일 위스망스는 문제의 핵심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에 있다는 것과 ISB 회의 소집을 결정했음을 독일 당 지도부에 전했다. 코펜하겐 결의에 따라 가맹 당에게 회의 소집의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SPD 집행부는 마지못해 회의를 받아들였다. 9월 23, 34일 취리히에서 ISB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의제의 중심주제는 프랑스-독일 대결을 초래할 수 있는 모로코 위기였다. 베벨은 코펜하겐 결의안을 재확인하려 했고, 바이앙이 제출한 발의는 총파업 문제에 대한 활기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논의는 즉각 인터내셔널이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신 검사'로 이어졌다.16) 이것은 또다시 식민지 분할이 벌어질 경우 이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주의 당들을 초청하자는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11월 4일 프랑스와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위기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심각하지 않은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독일의 예측이 실현되면서 그들의 위세가 커진 반면, 프랑스는 또 한 번 침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모로코 위기에 뒤이어 1911년 가을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식민전쟁이 이어졌다. 발칸의 벌집 3개월 동안 주저하고 망설인 후에 인터내셔널은 취리히에서 채택한 결의안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노동자의 반전운동은 모로코 위기 동안 효과적 행동을 취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의 침략에서는 시의적절한 행동을 보여주었다.17) ISB는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낸 후 즉시 전쟁을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48시간 전에 알았다. ISB가 반전운동을 지도하게 되었고, 집행위는 즉시 이탈리아의 침공을 비판하며 행동계획을 제시했다. 10월 7일 ISB의 입장을 명백히 담은 비밀 회보 초안이 대표들에게 보내졌다. 코펜하겐 결의안에 따라 무장 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분쟁이 발칸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발칸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 목표로 제시되었다. 집행위는 동시에 터키의 노동계급이 너무 취약하거나, 이탈리아의 행동이 불충분하거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있을 경우 ISB가 직접 개입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ISB는 언론, 성명, 의회 질의와 저항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열강의 노동자당에 사회주의자들의 결집을 요구했다. 또한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과 발칸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했다. 이 캠페인들을 실행함에 있어서 인터내셔널은 만족스러운 결과와 실패를 모두 보여주었다. 먼저 긍정적인 면으로, 중앙과 서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대규모 저항 운동을 살펴보자. 1911년 10월 초, ISB 집행위원회는 최대한 대중적으로 각국에서 동시에 발칸침략에 저항하는 국제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상황을 집행위처럼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많은 대표들이 제안에 찬성했다. 베벨은 공개적으로 여전히 모로코 사태가 중요하며, 발칸에서 분쟁은 없을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독일의회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SPD는, 삼국 동맹의 일원으로 이탈리아의 편이었던 자국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캠페인에 무모하게 참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베벨의 응답은 동시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터키에 대한 깊은 혐오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공격에 희생당했음에도 터키에 대한 어떤 연민도 없었으며, 대신 오토만 제국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와 청년투르크 당에 대한 불신을 찾을 수 있다. 1908년 7월에 일어난 청년투르크 혁명18)은, 이를 중요한 진보로 본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혁명은 후진적 터키가 평화를 위한 투쟁과 발칸의 현상유지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러일으켰다. 1908년 10월 11일 ISB는, 오토만 제국의 인민들이 이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근대적 자유'들을 도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며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는 청년 투르크 혁명의 노선이 변화되면서 약해졌다. (이 운동이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청년 사회주의자 운동에 대한 청년투르크 정권의 보복은 그 야만성이 이전 정권을 능가했고, 인터내셔널을 걱정하게 했다. 1911년 1월 살로니카에 모인 터키의 다양한 사회주의자 그룹의 대표들은 반동에 맞선 오토만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지원을 요구했고, ISB 서기장은 이 호소에 응답했다. 하지만 터키의 사회주의자 박해는 청년투르크 정권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불러왔다. 조레스만은 상황이 우선적으로 유럽 열강의 파멸적 정책의 결과라고 보았고, 터키 정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요청했다. 터키가 유럽의 발전과 진보를 공유하도록 청년투르크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 유럽사회주의의 의무였다. 비록 터키의 반사회주의 정책은 끔찍했지만, 인터내셔널은 평화라는 더 중요하며 일반적 문제로 사태를 바라봐야 했다. 1908년 이래로 동부, 특히 발칸은 유럽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핵심이며, 유럽 전쟁을 일으킬 분쟁의 중심이었고, 터키 새 정권의 강화는 동쪽 상황의 안정화를 의미했다. 조레스의 관점은 오랫동안 전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심지어 공격받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발칸의 균형이 끝장날 수 있는 침략에 직면한 1911년 10월 ISB 집행위에서는 조레스의 관점이 우세했다. 인터내셔널은 도덕적 고려만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 평화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가맹 당들에게 터키를 지원하는 운동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터키의 반노동자 정책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인터내셔널은 분쟁의 예방과 종식을 위해 청년투르크와의 반목을 잊으려했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Worker's Socialist Federarion of Salonica)의 완화된 태도와 청년투르크 지도자들의 화해 노력 덕분에 이 관점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미 1911년 10월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집행부는 ISB 서기장에게, 조직은 이탈리아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떠한 적대적 반대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한편, 터키 하원 의장은 10월 16일 반데르벨데에게 유럽 사회주의의 원조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고,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ISB는 11월 3일 터키 의원들의 순례에 맞춘 유럽 각 도시의 공동행동 혹은 집회 요청을 채택한다. ISB 대표단의 다수는 이탈리아의 공격이 강대국이 군사 행동을 할 변명을 제공하며, 이슬람과 유럽의 전쟁으로,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제안에 동의했다. 침략자를 규탄하고 터키를 지지하며 제국주의 정책을 규탄하는 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은 사회주의 당과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의 합병을 발표한 날인) 1911년 11월 5일의 대규모 집회는 상당한 규모여서, 낙관주의와 국제 사회주의의 역량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사회주의는 모든 역량을 이 평화공세에 쏟았고, 평화주의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평화공세는 1911년 말과 1912년 초 SPD 선거 캠페인의 중심테마였고, 이를 통해 1912년 1월 선거는 SPD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이탈리아, 부분적으로 발칸의 행동부족으로 실패한다. 인터내셔널의 이전 결의안들은 사문화되었다. 취리히의 ISB 회의에서 이탈리아 대표 치오티(Pompeo Ciotti)는, 자국 정부의 어떤 군국주의적 움직임에도 당이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9월 26/27일 저녁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 그리고 48시간 후 전쟁을 선언했을 때,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05년과, 특히 1911년 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ISP(Italian Socialist Party)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군비 지출과 전쟁 위협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여, 국제주의와 평화를 보존하려는 당의 결정을 증명했다. 하지만 1911년 9월 말 총파업을 준비하던 ISP 집행부19)는 자유주의 개량과 보통선거권 도입에 대한 약속에 매수당했고, 후퇴했다. 증대하는 민족주의의 압박 하에서 비쏠라티(Bissolati)와 보노미(Bonomi)가 이끄는 당의 개량주의 우익은, 공식적으로 정부 정책과 트리폴리타니아 전쟁을 지원했다. 이 전환은 이탈리아 노동자 운동과 인터내셔널 양자에 막대한 동요를 일으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는 즉각 ISB 서기장에게 이탈리아의 혼란과 이것의 위험성을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두 개의 입장, 정책을 추구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의 반전행동은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내용의 비밀회보가 10월 12일에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게 회람되었다. 사무국과 다른 가맹 당들에 대한 비난이 담긴 위스망스의 편지는 ISP 집행부 전원회의에서 논의되었고, (결국) 기각되었다. ISP 집행부는 당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며, 서기장 치오티로 하여금 이탈리아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비난에 대해 ISB에 항의하도록 했다. ISB 집행위는 이탈리아인들을 달래는 것처럼 했지만,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사무국은 ISP에 대해 규탄하지는 않았지만, ISP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도록 압박했다. 이탈리아인들은 ISP 집행부가 인터내셔널 결의안과 원칙에 따른 의무를 다할 것이라며 집행위를 안심시켰다. 치오티는 모든 응답에서 당이 신용을 지킬 것이라 주장했고, 1911년 12월에는 비판은 모두 중단되어야 하며, 집회에 대한 요구는 모두 과장되고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치오티는 계속 이탈리아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전쟁 반대의 의무를 다했다고 강조했지만, 위스망스는 그의 해명을 의심했다.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ISP는 터키-이탈리아 전쟁동안 신용을 잃었고, 이후 이탈리아 당의 제안은 의심을 받았고, 경멸당했다. 이탈리아에서 같은 당 내 다양한 경향의 공존과 우익의 지배가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 행동을 마비시켰다면, 발칸에서는 다양한 좌익 분파 사이의 경쟁과 적대가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 사회주의 당들은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인 관점을 버리고 발칸을 전체로 간주하지 못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 동남부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발칸의 사회적, 민족적 문제에 합의하고, 공통의 문제로 풀어가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고, 1910년 1월 7일에서 9일까지 베오그라드에서 발칸 사회주의 당의 첫 번째 협의가 열렸다. 발칸의 심각한 민족성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개혁을 보장하고, 민주적 변화들을 이끌 발칸 국가들의 민주 공화국 연합 창설이 공통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그들이 유럽 자본주의의 개입과 정복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발칸 인민들을 지방주의와 고립에서 해방시켜 동일한 문화와 경제적 정치적 자산을 갖게 하고, 밀접한 국가들 간 경계를 없애고, 외국지배의 멍에를 없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갖도록 해야 했다. 첫 번째 베오그라드 협의는 반제국주의적 원칙을 명확히 했다. 이 원칙을 시행하고 공동 전술을 만드는 것은 두 번째 협의의 임무였다. 1911년 8월 루마니아의 사회 민주당이 두 번째 발칸 사회주의자 협의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1903년 이래로 불가리아의 두 사회주의 당(좌익 '좁은 사회주의당(Narrow Socialist Party)'과 개량주의 '넓은 사회주의당(Broad Socialist Party)') 사이에 고조되어온 투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터키-이탈리아 전쟁으로 발칸에 대한 위협은 갑자기 끔찍한 현실이 되었고,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현실적이고 발 빠른 행동 협의가 필요했다. 1911년 10월 초에 세르비아 사회주의당이 새롭게 협의 소집을 요청했고, ISB 집행위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좁은 당'은 '넓은 당' 대표의 협의 참석을 불허해야한다는 요구를 고수했다. 그들의 주장은 ISB가 커다란 정치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좌절시켰다. '좁은 당'의 불참 때문에 단순한 예비회의만이 열렸으며,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공동 반전 행동에 대한 희망과 필요성에 대한 성명서만을 발표했을 뿐 어떠한 구체적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 때 ISB가 직접 개입해서 불가리아의 두 당을 2차 협의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좁은 당'은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소국으로의 분열(Balkanization)'에 반대하고, 발칸인민연합을 건설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은 결정적 순간에 불화와 적대를 드러냈다. 그들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남부유럽 사회주의자와 중앙,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발칸 문제에 대한 불일치가 혼란을 가중시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들은 발칸 문제에 대한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통일된 지침과, 발칸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인터내셔널에 요구했다. 그들은 인터내셔널이 발칸 내 사회주의 당들의 차이를 없앨 수 있으며, 발칸의 제국주의적이고 반노동계급적 전술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거대 당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일반적 진술에 만족했다. 1904년 ISB는 오토만 제국의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자율성에 찬성을 한다고 선언했으며,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의 사회주의 당들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이해하거나 공유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할 수도 없었다. 서부 유럽의 목표는 유럽의 평화 유지였으며, 최악의 경우에 분쟁이 일어나도 발칸으로 국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발칸 문제를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좁은 관점이 아니라 세계적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가정에서 서유럽은 동남유럽의 현상유지를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발칸 연합의 원칙을 지지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변화된 환경에 순응하고 현실에 이데올로기를 조화시키라고 조언했다. 이런 조언들은 단지 발칸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뿐이었으며, 그들이 '국제주의'라는 개념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놀라움은 더 커졌다. 발칸사회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이 정부의 대외 정책에 반대하지만, 이와 동시에 군주정이 발칸에서 문화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합병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세르비아 정부를 비난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화가 나서 ISB와 모든 가맹 당들에게 논의를 요구했다. ISB는 스스로의 역할을 오로지 정보제공에만 한정했다. ISB는 조정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관점을 완전히 지지하던 체코 대표 네멕(Nemec)의 응답과 세르비아 대표가 제출한 문서를 어떤 논평도 없이 회람의 형태로 보냈다. 그리고 코펜하겐 대회 전 오스트리아 당의 이름으로 레너(Karl Renner)20)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수사적 국제주의의의 모습을 좋아하는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불신은 남아있었다. 1911년과 1912년에 발칸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활발한 분석과 논쟁이 있었다. 이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양자 간 관점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으며, 입장의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주의자와 발칸 사회주의자 사이의 차이는 단지 전술이 아니라, 민족성 문제, 민족 문제, 제국주의적 현상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 때문이었다. 1912년 8월 1일,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 서기장 포포비치(Du an Popovi )가 발칸의 관점을 대변해 위스망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발칸의 모든 긴장과 민족주의, 쇼비니즘의 발현이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유럽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상유지는 발칸의 불화와 무질서, 혁명과 전쟁의 영속적인 요소로 자본가 권력을 돕는 것이며, 평화와 문명의 적이었으며, 발칸의 죽음을 의미했다. 현상유지는 발칸 인민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발칸인민연합이라는 중대한 목표를 가로막았다. 현상유지는 평화의 보증이 아니라, 반대로 영원한 전쟁의 근원이었다. 거대 서구 사회주의 당들은 非개입이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발칸 문제를 가두어 둘 수 있었다. 유럽에게 최고의 해답은 발칸 문제가 해결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열강의 식민정책과 발칸 문제로의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전면전은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관점은 발칸전쟁이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무시되었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오스트리아는 즉시 '발칸을 발칸 인민에게'라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인터내셔널 정책의 역설을 보여준 것은 이론적이며 정치적인 차이였다. 사회주의지도자들은 발칸이 세계의 균형에 대한 위협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위기가 끝나고 분쟁이 해결되자마자 ISB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분규의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ISB는 발칸에서 분쟁의 국지화 전술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중재야말로 '평화로운 국가들 사이에서 제국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이상적 해법이라고 보았다. 1912년 사회주의 언론들이 임박한 파국과, 갈등과 적대에 대한 예측을 했지만,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외교적 위기에 따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집된 ISB는, 다양한 갈등적 관점들 사이의 실용주의와 소극적 합의만을 보여주었다. 평온한 시기에 인터내셔널이 보인 활동은, 평화를 위한 그들의 투쟁이 사실상 끊임없는 즉흥극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12년은 그 전 해보다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알바니아의 폭동, 마케도니아의 불안과 유태인 학살, 불가리아에서 민족주의의 발호와 같은 위험징후가 발칸에 나타났다.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발칸의 지정학적 특징을 강조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폭발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발칸의 소식과 경계를 알리는 보고서들은 가맹당의 대다수에게 무시되었다. SPD는 언제나 냉정했다. 오직 프랑스 대표들만이 ISB에서 우려를 표하고 행동을 촉구했다. 반면 정보서비스만을 하던 ISB 집행위는 다음 국제 대회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결의안에 따라 대회는 1913년 열릴 예정이었지만, 네덜란드 대표단이 국제 대회를 소집할 만한 위급함이 없다는 이유로 1914년까지 대회를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1914년이 인터내셔널 50주년이기 때문에 선전하기 더욱 좋은 대회가 될 수 있다는 근거가 제시되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이 모든 가맹당 대표에게 제출되었고, 레닌 등 소수의 대표가 응답을 하지 않은 채 근소한 차로 제안이 가결되었다.21) 네덜란드의 제안 뒤에 SPD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단순한 과정의 문제로 다루었다. SPD 집행위는 바이앙-키어하디 수정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국제무대의 소강상태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은 다른 이유로 프랑스와 영국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22) 영국은 대회 연기를 원칙상의 이유로 거부했다. 이들은 1912년 10월 항의를 발표해서, 이런 과정이 '위대한 독일 당의 전통에 어울리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대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반대는 정치적 특성에 의한 것이었다. 발칸 위기가 불러올 수 있는 불안정에 대한 행동을 논의하기 위해 국제 대회는 예정된 대로 열려야 했다.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럽고 전면전의 위협이 있다고 생각한 발칸 사회주의 당들의 대표들이 같은 주장을 제시했다. 최대한 빨리, 진지하게 평화에 대한 열망을 호소하고,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인터내셔널의 의무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위스망스에게 대회 연기에 관한 진실 해명을 요구했다. 그의 답변은 인터내셔널 내의 심각한 의견차와 불안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바이앙과 힌드만에게 독일-체코의 적대 속에서 대회를 열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폴란드와 러시아, 불가리아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의견차가 심각해 대회가 사회주의의 분열을 드러낼 것을 걱정했다. 그동안 발칸의 상황은 극적 전환을 맞아 무장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9월 20일 위스망스에게 발칸의 전반적 분위기가 억압적이며, 전쟁이 언제라도 발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2차 발칸 사회주의자 회합이 중요하고, 위급했으며, 이에 대한 ISB의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불가리아의 '좁은 당'과 '넓은 당'을 같은 석상에 앉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 사무국이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대표 라코프스키(Rakovsky)를 보낼 것이 제안되었지만,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고, 이전 해의 행동들이 반복되었다. 즉각적인 전쟁의 위협에도 '좁은 당'과 '넓은 당' 사이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없었고, 갈등만이 두드러졌다. 10월 초, 이 발칸 폭풍의 규모와 중요성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낙관주의 대신에 불확실성과 공황상태를 심어주었다. 인터내셔널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함에 따라 전통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쟁의 위협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프랑스와 영국은 즉각 ISB 회의를 요구했지만, 독일 당이 다시 이를 가로막았다. 첫 번째 위협이 지나가자마자 베벨은 평정을 되찾았고, 다시 한 번 신중함을 권고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공포가 확실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즉각 ISB에 가능한 빨리 비엔나 대회를 열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현재의 분쟁이 안정되더라도 여전히 전쟁의 씨앗은 남을 것이기 때문에 대회를 통해 분쟁을 국지화하고, 외교적 수단으로 해법을 찾으려는 환상적 희망을 버리고 위협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 10월 28일 브뤼셀에서 ISB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조레스는 이 회의를 통해 ISB가 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을 조직할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번에는 항상 신중하고 희망에 차 있던 아들러도 서기장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베벨은 독일 대표에게 프랑스, 영국에 속지 말 것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라고 조언했다. ISB가 브뤼셀에서 모였을 때 1차 발칸 전쟁이 한창이었고, 분쟁을 국지화하고 전쟁의 확산을 막는 방법에 관한 문제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아들러는 인터내셔널이 '발칸의 슬라브 국가들의 자율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전쟁에 대해 저항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바이앙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개입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충분히 강력한 운동을 펼쳐 각국 정부가 혁명적 선동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분쟁이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가정에서 그는 강력하고 전면적 선동을 각국에 요구했다. 조레스는 낙관주의를 유지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국제대회의 소집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 결정을 정부에 알리고, 열강의 어떤 개입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대회 일정을 앞당길 것인지, 1914년까지 연기할 것인지, 단독으로 국제협의를 소집할 것인지에 대해 오랜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레스는 대회 연기는 패배의 승인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나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법의 문제로 회의가 망쳐질 것처럼 보이자 반데르벨데는 크리스마스에 바젤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대회는 원래 날짜대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바젤 특별대회와 비엔나 대회의 1914년 개최가 결정되었다. 바젤 대회를 효과적이고 인상적으로 열기 위해 ISB는, 전쟁과 유럽 열강의 발칸 개입에 반대하는 집중 캠페인을 요청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은 모든 조직적 역량과 대중행동으로 이 지침을 따랐다. 10월 20일에 시작해서 베를린에서만 25만 명이 조직된 이 대중 집회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구체적이고, 대규모의, 그리고 적극적인 위험에 직면해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행동을 통해 통일되는 특별한 시기였다. 여론이 조직되었고, 노동자들은 전면전을 반대하는 그들의 결심을 증명했다. 이를 통해 인터내셔널의 가상적 힘은 바젤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바젤: 전쟁에 대한 전쟁 1912년 11월 초 상황이 악화되어 SPD의 요구에 따라 바젤 특별대회의 일자가 11월 24, 25일로 앞당겨졌다. 전쟁의 참상은 점점 위협적이 되었고, 세계전쟁의 위험이 있었다. 아들러도 SPD 집행부도, '나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만족스럽게 해결될 것이고, 우리가 유럽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는 베벨의 낡은 낙관주의를 공유하지 않았다. 아무도 더 이상 '발칸 국가들이 휴전을 하고 평화협정을 시작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지 않았다. 발칸의 화약고가 폭발할 가능성에 직면해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태도를 명확히 하여 평화주의 활동에 힘을 쏟았고, 집중적인 반군국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 의장 하세(Hugo Haase)는 평화주의 활동이 재앙을 피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인민의 대다수가 전쟁을 혐오하고 반대한다면, 정부는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템펠호퍼 공원에서는 20만 명이 모인 평화 집회가 열렸다. 인터내셔널의 가맹당 모두는 SPD의 제안에 따라 이 반전 캠페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11월 17일, 수많은 유럽 도시에서 보다 대규모의 대중 투쟁을 조직했다. 11월 1일 유럽 논동자들은, '전쟁과 발칸 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호소에 응했다. 파리 근처 Pre Saint Gervais에서 10만 명이 집회를 열었다. 대회에 앞서 ISB의 결정에 따라 조레스, 바이앙, 베벨, 키어하디, 아들러, 라바노비치(Rubanovich)23), 위스망스로 구성된 위원회가 대회에서 제출할 결의안 초안 작성을 위해 모였다. 인터내셔널의 '현자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상황과 임무를 명확하고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입장 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였다. 바젤 대회는 반전투쟁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과, 인터내셔널의 힘을 표현해야 했으므로, ISB는 코펜하겐 대회에서 있었던 바이앙-키어 하디 수정안에 대한 논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바이앙의 입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0년 11월 초에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코펜하겐에서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파들이 자세히 검토하고 논평을 할 수 있도록 제안문 초안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바이앙은 프랑스 철도 노동자의 파업을 예로 들며, 이것이 국가적, 국제적 수준에서 실행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위스망스는 이에 따라 12월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문을 담은 회람문을 모든 가맹당에 보내면서 최대한 빨리 논평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직 네 개의 당만이 응답했다. 불만을 느낀 바이앙은 노조를 통해 당 지도부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으로 위스망스에게 노조 조직에 직접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CGT가 이미 총파업과 봉기를 포함해서 어떤 전쟁 계획에도 반응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을 지적했다.24) 결국 (이전 회람문에 대한) 답변과, 각국 노조 조직에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하는 새로운 회람문이 보내졌지만, 만족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의안 문안을 준비하려고 비밀리에 회합을 한 특별 위원회는 몇 가지 초안들을 검토했고, 총파업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했다. 바이앙은 논평을 통해 폭동과 파업이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최선의 무기였으며, 짜르주의의 음모와 군사적 모험을 제어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든 국가조직이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할 것을 요청하고, 사용가능한 모든 방법과 역량으로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총파업과 폭동은 거부되지도, 결정되지도 않았다. 독일은 여전히 입장을 유보했으며, 의심했다.25) 대회 전 날인 1912년 11월 23일, ISB는 위원회의 선언 초안을 검토하고, 550명의 대표들에게 만장일치로 채택될 문서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강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로자를 포함한 몇몇 대표들을 만족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전쟁을 예방하거나 끝내기 위해 반군국주의 대중파업과 같은 급진적 조치들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단락을 문서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 결국 대회에 제출된 문서는 전쟁을 예방하는 구체적 수단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했다. 조레스는 갖가지 커다란 가능성 때문에 결의안이 어떤 특정한 행동 방침을 정하지 못했고, 동시에 하나도 배제하지 못했다고 논평했다. 예측불가능하고 특별한 상황에서만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수단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쟁 발발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사전에, 예외 없이 유효한 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수단이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둠으로써, 결의안은 다양한 분파 대표들과 정당 지도자들에게 완전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했다. 이전 대회 결의안들과 달리 이번에는 상황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국제 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진술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결의안은 앞으로 있을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뿐이라는 단언적 진술로 시작되었다. 문서의 두 번째 부분은 발칸,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의 사회주의 당의 임무를 약술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독일, 프랑스, 영국의 노동계급에 맡겨졌다. 그들은 열강들 사이의 차이를 메우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대회는 전쟁이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격분과 분노만을 일으킬 뿐이며, 혁명을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지배계급에 경고했다. 선언은 수 년 동안 사회주의자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문제에 대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을 제공했다.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외에도, 중간 계급과 모든 평화주의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반전운동이 확장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바젤 대회는 새로운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한 채, 이전 정책들에 대한 성과 없는 논의로 끝나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바젤 특별대회는 1914년 이전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된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반전 시위였다.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정부 집단들과 유럽의 여론에서 대회의 반향은 상당했다. 바젤 대회는 1912년 11월 유럽이 경험한 심각한 위기의 순간을 진정시켰다. 대회 때 높아진 긴장이 완화되자마자 단결의 부재가 명백해졌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던 바젤 대회의 보고서에서 독일 보고서 편집자는 '기회주의적 이유로' 연설의 급진적 부분을 삭제했고, 이는 독일 사민당 조직의 혼란을 보여준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회 이후 몇 달간 바젤 결의안을 문자 그대로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2년 12월 노동자들의 대규모 반전 집회가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다. ISB가 자신들의 관점을 고수했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의 평화주의 열정이 계속 커졌음에도, 실제로는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바젤에서 원칙은 정해졌지만, 그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위협에 대해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 사실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열강들 간 분쟁의 변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 정보의 부족은 1912년 12월에서 1913년 1월에 두드러졌다. 심각하게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평가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이 ISB는 너무 성급하거나, 너무 늦게 행동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때 이른 행동으로 인터내셔널은 위신을 잃거나 전체 평화주의 투쟁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것이었고, 반대로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뜻했다. 1912년 12월 상황은 다시 더 끔찍한 것으로, 유럽 전쟁은 더욱 가까워 진 것으로 보였다. 상황을 평가하는데 있어 ISB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언론 특파원이나 분쟁에 관련된 국가의 사회주의 당 집행부가 제공하는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가장 즉각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정확한 정보가 간절했다. 언론은 오스트리아의 침략과 도발과 같은 위협을 전했지만, 이는 단지 혼란만을 낳았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언론의 대부분이 발칸 위기의 시초부터 러시아 대사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12년 12월, 혼란의 한 가운데서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아들러와 같은 분별력 있는 인사로부터 위험이 임박한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기대했고, 12월 10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의 기관지(Arbeiter Zeitung)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즉각적인 무력 분쟁의 위험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발칸 전쟁이 발칸 인민들의 정의와 해방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지만, 그것을 유럽 사회주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터내셔널은 실제로 발칸과 슬라비아 인민의 자율성을 대의로 내세웠지만, 실천 수준에서는 위험을 완화시키는 지연 전술만을 택했다. 심지어 바이앙도 전쟁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 퍼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ISB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제안을 따랐다. 평화주의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은 사건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사건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압력 단체로서 인터내셔널은 실천적으로 무능력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로코 위기 동안 했던 것처럼, 외교적 영역에서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남은 힘이 없었다. 이런 임무는 집행위에 맡겨진 것이었다. 12월 중순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협상을 쉽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제안했다. 첫 번째는 최대한 빨리 오스트리아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공동 협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바이앙의 입장에서 즉각적인 위협은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었고, 따라서 이 긴장 완화는 유럽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었다. 그는 모든 분쟁에서 관련국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사회주의적으로, 실천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덧붙여서 바이앙은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중립 국가들에 중재 재판을 요청하라고 했다. 상황 상 이런 협의 소집이 어려웠으므로 위스망스는 첫 번째 제안을 보류했지만, 바이앙의 주장을 아들러에게 전했다. 두 번째 제안은 스칸디나비아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위스망스가 이미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립국을 규합하여 열강들에게 점진적 군축을 제안하자는 스칸디나비아 그룹의 제안에 따라 그는 벨기에 정부에 이런 의견을 제시했고, 그 결과 중립국 간의 특별회의가 개최되기도 했었다. 아들러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보다 상황을 덜 심각하고, 덜 절망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의 상황이 위협적이지 않으며,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평화가 보장된 것으로 평가하면서, 집행위와 프랑스 조직의 대표들이 편향적 언론을 통해 사실을 판단하는 것을 비난했다. 아들러는 계속해서 바이앙이 제안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협의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협의가 실천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분쟁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아니라 불가리아와 터키 사이의 것이었으므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와 마찬가지로 CAP도 발칸 문제가 곧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프랑스 대표들은 반복해서 ISB가 정력적인 반군국주의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들은 계속 걱정했으며, 매일 면밀히 국제 사태의 변화를 주시했다.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자, 1913년 2월 18일의 회의에서 CAP는 유럽 국가들의 군비 지출 증가에 따른 위험에 대해 검토했다. 일반적인 의견은 '군비증가와 발칸에서의 계속된 전쟁 때문에 국제 평화가 이전보다 더욱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CAP는 ISB가 소집되어서 (1)바젤에서 결의된 반전행동을 어떻게 계속할 것이며, 조정할 것인지, (2) 제국주의의 공격과 독일, 프랑스의 무장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이 제안은 당시 독일의 군비 경쟁 가속화와 프랑스의 적개심 증대에 놀라고 있었던 SPD 집행부와 아들러에게 전해졌다. SPD 집행부는 바이앙의 편지를 받은 2월 21일에 곧 모였다. SPD 집행부는 CAP의 제안에 반대했지만,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동의했다. SPD 집행부는 1912년 SFIO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제안했던 상호 관계와 공동 행동을 강화하자는 역제안을 제출했다. 2월 24일 SFIO 대표 토마(Albert Thomas)가 조레스가 쓴 프랑스-독일 선언의 초안을 갖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48시간 동안의 격렬한 논쟁에서 베벨과 샤이데만은 반대했고, 하세, 베른슈타인과 다른 사람들은 찬성했다. 오랜 논의를 거쳐 더 정제된 최종 문서에서 원 저자의 가장 중요한 의견들을 유지하는 가운데, 프랑스-독일의 군비 경쟁에 대한 공동의 반대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13년 3월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과 SFIO는 이에 따라 발칸 위기가 여전히 잠재적 문제의 근원이지만, 평화적 해법에 다다르고 있거나, 적어도 국지화되고 있다고 믿었다. 인터내셔널은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기에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더 이상 긴급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제적 데탕트를 조성하는 것, 논쟁 중인 문제(예를 들어 알자스-로렌)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열강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중재재판소를 주장하고, 그리고 총체적, 단계적인 군축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무장한 평화'의 지배를 끝내야한다고, 프랑스와 독일의 무장경쟁, 군국주의적ㆍ쇼비니즘적 경향의 출현을 저지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두 국가들 사이의 화해에 기여하는 것이 영국, 프랑스, 독일의 연합을 위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터내셔널이 1913년에 제시하고, 1914년 7월까지 매달린 새로운 이론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행동은, 바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이는 국제 사회주의자 정책의 전환점과 새로운 지침의 도래를 나타냈다. 1) [역주] 18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20개국 391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파리 창립대회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의결은 '국제 노동자의 의회'라고 스스로 부른 대회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는 어떤 조직도 출현하지도 않았고, 지도자도 선출되지 않았으며, 현실적 제도 마련도 없었다. 이후 2차 1891년 브뤼셀 대회, 3차 1893년 취리히 대회, 4차 1896년 런던 대회에서는 매번 대회마다 전쟁의 위협에 대한 대처방안이 결의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뉴벤호이스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총파업을 진행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지만 매번 부결된다. 5차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 사무국과 집행위회, 서기장으로 구성된 본부를 브뤼셀에 두게 된다. 이후에는 6차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7차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8차 1910년 코펜하겐 대회까지 진행되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1912년 바젤 임시대회가 진행되었고, 1914년으로 예정되었던 비엔나 대회는 전쟁 발발로 열리지 못했다.본문으로 2) [역주] 제2인터내셔널 당시 총파업의 유효성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 총파업은 목표와 상관없이 대중들의 무절제한 군중심리에 휩쓸려 단순한 폭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이럴 경우 오히려 대대적 탄압을 불러일으켜 기존 운동의 기반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우려 속에 투쟁수단으로서 파업 자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현실적 문제가 되었다. 1893년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벨기에의 정치적 총파업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스웨덴에서 1894년, 1898년, 1902년 일어난 파업도 성공하지 못했다. 1903년 네덜란드에서 실시된 총파업은 사회주의 진영의 내분과 함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런 경험에 따라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총파업 문제가 제기되었다. 총파업은 대중파업과 구별되었고, 사회 전체의 존립을 대상으로 하는 무정부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승인 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총파업의 기능이 부인되었다. 하지만 1905년 러시아에서 정치적 대중파업이 사회주의적 목표를 향한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인터내셔널에서 총파업의 전술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재개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러시아 혁명이 진압되고 실패로 돌아가 버리면서 다시 무관심 속에 묻히게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와 같은 조직적 구심체가 없다는 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취약점으로 지적되었고, 개선요구가 이어짐에 따라 1900년 파리 대회에서 ISB가 설립된다. 사무국은 의장과 서기, 각국이 2명씩 보낸 대표들로, 전체 약 50~70명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각국 대표들이 자치권을 강력히 고집함에 따라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며, 결합도도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본문으로 4) [역주] 벨기에의 사회주의 작가 정치가. 본문으로 5) [역주] 1905~1906, 1911년 두 차례 모로코의 분할을 둘러싸고 국제분쟁이 일어난다.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연결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유럽열강의 분열대상이었다. 1880년 체결된 마드리드조약에 의해 모로코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모로코 침투가 두드러졌다. 프랑스가 모로코의 내정개혁을 요구한데 대해,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 탕헤르항을 방문해서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한다. 독일이 프랑스의 이권을 방해하고,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술탄을 원조함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이 극도의 대립상태에 이른다. 1906년 1~4월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회의가 열렸다. 프랑스와 영국의 결속을 통해 독일이 고립되고 프랑스의 진출이 인정되었다.본문으로 6) 바이앙은 ISB에서 채택된 자신의 제안이 최종적 해법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1907년 7월 9일 ISB 회의에서 그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이 문제를 올리는 것을 반대했다. 조레스는 인터내셔널 전체가 이 문제를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이앙의 제안에 반대한다. 본문으로 7) [역주]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여 강대해진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는 발칸 제국(諸國)의 상호유대와 결속을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2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사이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성립되었다. 원래 러시아는 이 발칸동맹을 반(反)오스트리아동맹으로 할 의도였으나, 발칸 제국은 그보다는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발칸반도에 있는 투르크의 영토를 획득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1912년 10월 발칸동맹국은 유럽 열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투르크 영내의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몬테네그로가 먼저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 다른 3국도 투르크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1차 발칸전쟁). 열강들의 예상과는 달리 투르크는 패전을 거듭하여 불가리아를 통해 동맹국에 휴전(休戰)을 요청했고, 그 결과 12월 휴전이 성립되었다. 12월 16일부터 런던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어 아드리아노플 등의 할양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다가, 1913년 1월 23일 투르크 내에서 청년투르크당(黨)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1월 29일 동맹국은 휴전을 취소하고, 2월 4일 전투를 재개하였다. 5월 30일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지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영토 전부와 크레타섬을 발칸동맹 제국에 할양하였다. 강화조약에서의 영토분배를 둘러싸고 발칸동맹 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자,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가 돌연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몬테네그로ㆍ세르비아ㆍ그리스ㆍ루마니아ㆍ투르크 등이 불가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연전연패하여, 7월 30일부터 부쿠레슈티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10일 부쿠레슈티조약이 성립되어 불가리아는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할양하고,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할양하였으며, 카바라 일대를 그리스에 넘겨주었다.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원망하게 되었고 러시아와도 사이가 멀어졌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였다. 발칸전쟁으로 발칸 제국 간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고, 내셔널리즘이 팽배한 제국들이 유럽 대륙으로의 영토확대를 꾀하면서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가 되었다. 본문으로 8) [역주] James Keir Hardie 1856-1915년 영국 정치가. 초기 노동당 지도자. 극빈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년시절부터 탄광 갱부(坑夫)로 일하였는데, 20대에 이미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또 저널리스트로도 활동, 1887년 《갱부》지(紙)를 간행하였다. 당시 자유당의 영향 아래 있었던 노동자의 정치적 자립을 주장하였고, 88년 미드라나크의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스코틀랜드노동당을 조직하였고, 92년 사우스웨스트햄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93년에는 독립노동당을 결성, 의장이 되었다. 1900년 이후로는 노동자대표위원회 및 노동당의 중심멤버로 활동하였다.본문으로 9) [역주] (1866. 1. 25 벨기에 익셀-1938. 12. 27 브뤼셀) 유럽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1914~39년 벨기에 연립내각에 몸담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전후 평화협상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1889년 벨기에 노동당에 가입하여 당수가 되었다. 1894년 사회당 소속 의원으로 처음 의회에 진출했으며, 1900년 이후 여러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보통선거권의 관철을 위하여 노력했으며 마침내 1919년 결실을 거두었다. 1914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반데르벨데는 전쟁기간 내내 내각에 몸담았다. 1919~20년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근로조건개선 조항을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법무장관으로서 형법의 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1919). 1925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자 사회당과 가톨릭당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위촉되었고, 그해 독일ㆍ프랑스ㆍ영국ㆍ이탈리아와의 로카르노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2년 동안 앙리 자스파르 내각에서 외무장관직을 수행했으나, 병역기간을 6개월로 한정시키고 반(反)군국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야당의 비난을 받았다. 무임소장관(1935~36)과 공공보건장관(1936~37)을 역임한 뒤 은퇴하여, 브뤼셀자유대학교에서 법률을 강의했다. 주요저서로 〈집산주의와 산업발전 Le Collectivisme et l' volution industrielle〉(1900), 〈사회주의 대(對) 국가 Le Socialisme contre l' tat〉(1918), <벨기에 노동당, 1885~1925 Le Parti Ouvrier Belge, 1885~1925〉(1925) 등이 있다.본문으로 10) 1908년 9월 영국-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반대하는 집회에 독일 대표로 카우츠키가 지목되었을 때, 베벨은 카우츠키가 독일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드러냈다. 본문으로 11) [역주] 오스트리아 통일사회민주당에 참여했으며 지도자로 활동했다. 1881년 이래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1886년 주간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1889년 당기관지 《노동신문 Arbeiter Zeitung》을 창간 편집하였다. 또한 분열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하인페르트 당대회에서 통일사회민주당으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고, 당 강령을 기초하였다. 1905년 의회에 진출, 죽을 때까지 의원으로 활약했는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외무장관에 취임하였으나 곧 병사하였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의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12) [역주] 1911년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가 출병한다. 그해 7월 독일이 군함을 파견해 프랑스를 위협했는데, 이 사건을 아가디르 사건이라고 한다.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에 양보를 하고 양국 간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 북부를 할양하고,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한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랑스 통합사회당,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로 1905년 4월 창당되었다. le Parti socialiste unifi , Section Fran aise de l'Internationale Ouvri re.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은 당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우위를 표시하는 것이며, 통합이라는 말은 통합이 항구적일 것이라는 것을 뜻했다. 여기에 노동자 성향이 강한 프랑스 혁명사회노동당의 주장으로 노동자라는 뜻의 Ouvri re가 붙여졌다. 본문으로 14) SPD의 대기주의도 고려되어야 한다. SPD 집행위는 임박한 독일의회 선거 때문에 독일 대표가 ISB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보았다. 집행위는 모로코 정책에 반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경우, 유권자들이 당을 애국적이지 않다고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으로 15) 집회의 슬로건도 각국 당의 관점을 나타냈다. 1911년 9월 프랑스 집회에서는 폭동과 총파업이 요구된 반면, 트렙토우 공원 집회에서는 단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수단이 평화유지에 사용되어야 하며, 독일 유권자들은 다음 독일 의회 선거에서 후보들에게 이를 권고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3-4천 명이 조직되고, 베를린에서는 경찰 추산 5-6만 명, 포어베르츠 추산 20만 명이 조직되었다.본문으로 16) 바이앙의 제안에 대한 논의는 공동행동을 효과저긍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 사이에는 많은 간극이 있었다. 전자 중 베벨은 무능력을 선언하는 것에만 동의했다. 다양한 대표들이 전쟁이 선언된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 이전에 행동을 취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로자와 바이앙은 전쟁 선언 이후에도 인터내셔널의 힘을 믿으려고 했다.본문으로 17) 예를 들어 CGT는 1911년 10월 긴급히 파리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전쟁이 선언될 경우 즉각 혁명적 총파업을 일으킬 것이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본문으로 18) [역주] 19세기 중엽부터 터키에서 사회개혁이 추진되고 있었고, 1876년에는 파샤가 헌법제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술탄은 터키-러시아전쟁(1877~78)을 이유로 헌법을 정지시켰다. 청년투르크당은 이에 헌법을 부활시키고 전제정치를 폐지하기 위해 처음에는 비밀결사로 발족하여 단기간에 사관학교ㆍ기술학교의 장교ㆍ교사ㆍ학생ㆍ정부 직원들 중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냈다. 20세기에 들어와 청년장교 층이 혁명세력의 지주가 되기에 이르자 당세는 신장되어, 1908년 살로니카에서 혁명을 일으켜 입헌정치를 선언한 뒤, 다음 해 압둘하미드 2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본문으로 19) 9월 23/24일 ISB 회의에서 치오티는 이탈리아 당이 총파업을 결정했고, 곧 이를 위한 회의들이 잡힐 것이며, 의회의 사회주의자 그룹 일부만이 이탈리아의 침략에 찬성할 뿐이라고 선언했다. 본문으로 20) [역주] 1907년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1919 1920년 오스트리아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고, 1931 1933년 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34년 나치스파(派)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오스트리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지도자. 본문으로 21)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스, 아르헨티나, 아르메니아 대표들이 이 안에 찬성했다. 본문으로 22) 대회의 원래 날짜대로 치르자는 안은 러시아 혁명적 사회주의자, 스위스, 미국, 불가리아 '좁은 사회주의자',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동의를 받았다.본문으로 23) 러시아 사회혁명당 대표 루바노비치는 당시 병중이었던 플레하노프와, 크라쿠프에 머물고 있어 바젤에 참석하지 못했던 레닌의 합의 하에 이 회의에 참석했다. 본문으로 24) 위스망스는 5월 10일 바이앙에게, ISB가 CGT에도 자문을 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고 물었다. 바이앙은 CGT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위스망스가 개인적으로 호소하라고 제안했다. 본문으로 25) 카메네프에 따르면 '총파업과 폭동'은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에서 결정되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므로, 바젤대회 결의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본문으로

  • 2007-02-12

    한국진보연대(준) 출범 현황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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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대운동의 기본원칙에서 재출발해야 한국진보연대(준) 출범, 부문ㆍ지역단체의 요구에 근거했나? 2007년 1월 9일 한국진보연대(준)이 출범식을 열었다. 한국진보연대(준)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빈민연합, 한국청년단체협의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전국여성연대(준), 민주노동당,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등 19개 부문단체와 광주전남희망연대, 경남진보연합, 경기진보연대 등 3개 지역단체가 가입한 상태다. 한국진보연대(준)은 3~4월 중에 본조직 출범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전국민중연대 기존 가입단체를‘부문단체’와‘지역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런 분류법을 따른다) 지난해 10월 18일 전국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서 “진보진영 상설연대체 건설준비위원회를 각계에 제안한다.”는 안에 대해 17개 단체(부문 14개, 지역 3개)가 찬성하고 6개 단체가 반대 의사를 피력한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출범식이 열린 것이다. 그 결과 한국진보연대(준)은 지난 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서 찬성 의사를 밝힌 단체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민족화합운동연합 등 통일연대 가입단체 일부가 참여하는 수준에서 본조직 출범 일정을 강행하고 있다. 전국민중연대는 규약에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재적인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인원 2/3 이상의 찬성 결의가 있을 경우 해산한다.”(대표자는 전국민중연대의 임원과 각 회원단체의 대표자로 구성된다.)는 규정이 있으나, 부문단체의 상당수가 여전히 반대 의사를 견지하고 있고, 지역단체의 다수가 제대로 된 논의조차 거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발표된 일정대로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이 강행될 경우 나타날 파행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민중연대 회원단체 중 대표자회의나 별도의 입장 발표를 통해 상설연대체 준비위 건설 반대 또는 한국진보연대(준) 불참 의사를 명확히 밝힌 단체는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해 노동자의힘, 문화연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전국학생행진,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이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도 반대의사를 피력했지만 최근 해산했다). 부문단체 중에서 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조운동연구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은 한국진보연대(준)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공동준비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내부 논의 과정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노총은 "진보진영 총단결체를 추진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대의원대회 등을 통해 한국진보연대(준) 추진 과정 전반이 공유되고 승인되는 계기가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중앙위원회에서 다수결 의결로 결정이 내려지긴 했으나 지역차원의 토론, 공유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중앙에서 지역조직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또한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식이 개최된 현 시점까지도 지역단체의 상당수가 단 한 차례도 정식 논의를 진행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자료에는 서울민중연대를 참관단체로 기록했는데, 이는 사실상 ‘허위보고’로 간주해야 한다. 서울민중연대는 지난해 대표자회의를 통해 체계를 정비하고자 했지만, 실제 서울지역 연대활동은 <평택서울대책위>나 <전쟁위협 한미FTA 강요 미국반대! 민생파탄 노동기본권 말살! 민중총궐기 서울지역조직위원회>의 틀을 통해 진행되었다. 서울민중연대에서는 현재까지도 상설연대체 건설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제안조차 공식적인 회의체계를 통해 제기된 적이 없다. 서울민중연대나 대구경북민중연대처럼 최소한의 회의체계가 운영되더라도 상설연대체 건설이 공식 논의되지 못한 곳이 상당수이며, 인천민중연대처럼 지역민중연대의 기본 운영마저 아예 중단된 곳도 상당수에 이른다. 나아가 민중연대의 지역조직이 구성되지 못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대전충남, 전북, 울산 등). 경기, 경남, 광주전남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상당수는 실제로 공식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거나, 여러 사정으로 기본운영이 아예 중단되거나, 애초에 전국민중연대에 가입한 지역연대조직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진보연대(준)은 이러한 사실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을 꺼리고 있으며, 지역차원의 충분한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통일연대 지역조직(예를 들어 전북통일연대, 인천통일연대, 울산통일연대)을 통해 구색 맞추기 식으로 현실을 포장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현실은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이 부문, 지역단체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전국민중연대가 2003년 5월 창립대표자회의를 통해 출범한 이후 자임한 상설공동투쟁체라는 역할에 부합하는 활동성과에 근거해서 한 단계 발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출범 준비과정의 문제점 전국민중연대는 2005년 9월 조직발전기획단이 구성된 이후로 1년여 간의 논의를 통해 2006년 10월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사실상 다수결의 절차에 따라 진보진영 상설연대체 건설을 결정했다. 전국민중연대 규약에는 과반수 참석, 과반수 의결이 규정되어 있으나 상설공동투쟁체라는 위상에 따라 사실상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민중연대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조직발전전망은 다수결 의결로 통과된 셈이다(최종 해산에 관한 의결 과정은 남아 있다.). 지난해 10월 대표자회의 전까지 1년여 간의 논의는 실제로는 이견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사회진보연대가 바라보는 전국민중연대 활동평가와 발전전망에 대한 입장은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되었으므로 (「전국민중연대 조직발전 시안 비판」, 『사회화와 노동』, 300호, 2006년 3월 14일. 을 보라) 여기서는 간략히 요약한다. 첫째, 2003년 전국민중연대 본조직이 출범했지만, 이와 동시에 2003년 출범한 노무현정권에 대한 입장 문제를 두고 민중연대 내부에 노선 차이가 심각하게 드러났다. 노무현정권에 대한 국회탄핵을 '의회쿠데타’로 규정한 탄핵반대국민행동에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회, 사무처 간부 대다수가 참여한 사건은 민중연대의 내부 신뢰를 침식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양극화해소, 사회통합,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국민행동’을 표방한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 참여 여부를 다수결로 의결한 것도 전국민중연대 활동정신에 위배되는 중요 사건이었다. 탄핵반대국민행동과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 노무현정권을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구원하기 위한 노무현정권 집권 초기와 집권 중반기의 가장 대표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전국민중연대 가입단체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앙간부가 집단적으로 참여하거나, 전국민중연대가 통째로 참여하는 결정을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시도는 전국민중연대 발전전망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다. 둘째, 이러한 문제에 관한 심각한 이견이 확인되며 공동투쟁의 토대가 침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시된 조직발전시안은 전국민중연대 활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전국민중연대 활동 평가로부터 출발한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의 확장을 가로막는 내적 요인이 무엇인가, 과연 전국민중연대가 광범위한 사회운동 내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지가 중요 의제로 설정되어야했다. 그러나 조직발전시안을 통해 제시된 조직발전의 골자는 이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서, 연대기구의 정비(통일연대와의 통합), 대의원대회구조 신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안은 민중연대의 가입단체의 내적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조직구도에 따라 외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과 불신을 낳았다. 즉 <6·15공동선언실천을위한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가 구성된 이후로 위상과 역할이 모호해진 통일연대의 해소, 민중연대·통일연대와의 활동중복에 따른 전국연합의 해소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다. 특히 이러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것은 상설연대체 건설을 2007년 상반기로 못을 박은 상태에서 일정을 역추산해서 강행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민중연대 가입단체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기초해서 출발한 것이라면 한국진보연대(준)이 출범한 현재까지도 전국민중연대 기존 가입단체 중 상당수의 부문단체가 불참 의사를 피력하고, 대다수 지역단체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는 현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진보연대(준)이 기존 전국민중연대 가입단체 상당수를 사실상 배제하고 출범하는 것은 민중연대 내적 요인이 아니라 외적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통일연대 문제는 “상설연대체 건설을 제안한다.”는 결정을 내린 지난해 10월 대표자회의에서까지 한 차례도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한 때 ‘진보진영 단일연대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처럼, 연대기구의 ‘난립’을 근거로 단일연대체를 언급했을 뿐, 통일연대 그 자체에 관한 논의는 단 한 차례도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단체든 통일연대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고, 운동 노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통일운동에 관한 입장 차이는 최소한 1980년대 이후로 민중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집약하는 쟁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연대기구 정비’라는 명목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넷째, 대의원대회 신설은 합의제 방식으로 운영되는 상설공동투쟁체의 위상을 전변시키는 결정이므로 지극히 심각한 쟁점이다. 이는 전국민중연대 활동이 대의원구조로 운영될 수 있을 만큼의 조건을 확보했는지, 정치적 통일성과 신뢰를 발전시켰는지 여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문제다. 조직발전추진기획단은 논의 과정을 통해 대의원대회 신설에 대해서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함을 확인했고, 지난 전국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 제출된 정책위원장의 안에서는 이 내용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2007년 1월 5일 한국진보연대(준) 2차 운영위원회 결과보고에 따르면 “최고의결기구의 형태는 대의원대회(또는 중앙위원회)와 대표자회의 중간 형태”가 검토되고 있다(예를 들어 민주노총은 중집 60여명, 전농은 상무상집 30여명, 민주노동당은 확대간부회의 40여명 등). 대의원대회 신설 문제가 심각한 쟁점인 것은 지난 1990년대 초반 전국연합의 경험을 반영한다. 전국연합은 1992년 대선방침이나, 1993년 이후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범민련과 민족회의의 분화)이 대의원대회를 통해 결정되었으나, 그 결과 끊임없이 운동세력의 분열과 이탈, 축소를 낳았다(그 후 전국연합은 사실상 특정 경향의 ‘정치조직’으로 성격이 전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경험은 대의원대회라는 조직형식을 통해 민중운동의 단결을 꾀한다는 것은 완전히 순서가 뒤바뀐 발상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연대운동의 기본원칙에서 재출발해야 현재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민중운동의 주요 조직이 참여하고 있으므로, 결국 중앙방침을 통해 지역을 강제하여 한국진보연대(준)이 전국적인 틀을 갖춘 상설연대체로 발전할 것이라는 사고는 대단히 위험하다. 오히려 연대운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호존중과 신뢰의 기풍을 침식하고, 사회운동의 저변 확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군사세계화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운동세력의 상호소통과 공동투쟁을 위한 운동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으나, 현재 한국진보연대(준)이 그러한 역할을 자임할 수 있는지, 최소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노동자운동, 여성운동을 쇄신하려는 여러 흐름들과 반전평화운동, 인권운동, 반빈곤운동 등 다양한 운동흐름이 형성, 발전되고 있으나, 이러한 흐름들이 한국진보연대(준)과 조우할 수 있는지 불투명한 게 현실이다. 결국 이러한 발전적 움직임들이 상호소통하고 공동의 투쟁을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흐름이 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2007-02-12

    한국진보연대(준) 출범 현황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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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대운동의 기본원칙에서 재출발해야 한국진보연대(준) 출범, 부문ㆍ지역단체의 요구에 근거했나? 2007년 1월 9일 한국진보연대(준)이 출범식을 열었다. 한국진보연대(준)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빈민연합, 한국청년단체협의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전국여성연대(준), 민주노동당,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등 19개 부문단체와 광주전남희망연대, 경남진보연합, 경기진보연대 등 3개 지역단체가 가입한 상태다. 한국진보연대(준)은 3~4월 중에 본조직 출범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전국민중연대 기존 가입단체를‘부문단체’와‘지역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런 분류법을 따른다) 지난해 10월 18일 전국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서 “진보진영 상설연대체 건설준비위원회를 각계에 제안한다.”는 안에 대해 17개 단체(부문 14개, 지역 3개)가 찬성하고 6개 단체가 반대 의사를 피력한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출범식이 열린 것이다. 그 결과 한국진보연대(준)은 지난 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서 찬성 의사를 밝힌 단체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민족화합운동연합 등 통일연대 가입단체 일부가 참여하는 수준에서 본조직 출범 일정을 강행하고 있다. 전국민중연대는 규약에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재적인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인원 2/3 이상의 찬성 결의가 있을 경우 해산한다.”(대표자는 전국민중연대의 임원과 각 회원단체의 대표자로 구성된다.)는 규정이 있으나, 부문단체의 상당수가 여전히 반대 의사를 견지하고 있고, 지역단체의 다수가 제대로 된 논의조차 거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발표된 일정대로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이 강행될 경우 나타날 파행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민중연대 회원단체 중 대표자회의나 별도의 입장 발표를 통해 상설연대체 준비위 건설 반대 또는 한국진보연대(준) 불참 의사를 명확히 밝힌 단체는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해 노동자의힘, 문화연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전국학생행진,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이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도 반대의사를 피력했지만 최근 해산했다). 부문단체 중에서 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조운동연구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은 한국진보연대(준)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공동준비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내부 논의 과정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노총은 "진보진영 총단결체를 추진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대의원대회 등을 통해 한국진보연대(준) 추진 과정 전반이 공유되고 승인되는 계기가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중앙위원회에서 다수결 의결로 결정이 내려지긴 했으나 지역차원의 토론, 공유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중앙에서 지역조직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또한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식이 개최된 현 시점까지도 지역단체의 상당수가 단 한 차례도 정식 논의를 진행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자료에는 서울민중연대를 참관단체로 기록했는데, 이는 사실상 ‘허위보고’로 간주해야 한다. 서울민중연대는 지난해 대표자회의를 통해 체계를 정비하고자 했지만, 실제 서울지역 연대활동은 <평택서울대책위>나 <전쟁위협 한미FTA 강요 미국반대! 민생파탄 노동기본권 말살! 민중총궐기 서울지역조직위원회>의 틀을 통해 진행되었다. 서울민중연대에서는 현재까지도 상설연대체 건설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제안조차 공식적인 회의체계를 통해 제기된 적이 없다. 서울민중연대나 대구경북민중연대처럼 최소한의 회의체계가 운영되더라도 상설연대체 건설이 공식 논의되지 못한 곳이 상당수이며, 인천민중연대처럼 지역민중연대의 기본 운영마저 아예 중단된 곳도 상당수에 이른다. 나아가 민중연대의 지역조직이 구성되지 못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대전충남, 전북, 울산 등). 경기, 경남, 광주전남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상당수는 실제로 공식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거나, 여러 사정으로 기본운영이 아예 중단되거나, 애초에 전국민중연대에 가입한 지역연대조직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진보연대(준)은 이러한 사실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을 꺼리고 있으며, 지역차원의 충분한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통일연대 지역조직(예를 들어 전북통일연대, 인천통일연대, 울산통일연대)을 통해 구색 맞추기 식으로 현실을 포장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현실은 한국진보연대(준) 출범이 부문, 지역단체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전국민중연대가 2003년 5월 창립대표자회의를 통해 출범한 이후 자임한 상설공동투쟁체라는 역할에 부합하는 활동성과에 근거해서 한 단계 발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출범 준비과정의 문제점 전국민중연대는 2005년 9월 조직발전기획단이 구성된 이후로 1년여 간의 논의를 통해 2006년 10월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사실상 다수결의 절차에 따라 진보진영 상설연대체 건설을 결정했다. 전국민중연대 규약에는 과반수 참석, 과반수 의결이 규정되어 있으나 상설공동투쟁체라는 위상에 따라 사실상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민중연대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조직발전전망은 다수결 의결로 통과된 셈이다(최종 해산에 관한 의결 과정은 남아 있다.). 지난해 10월 대표자회의 전까지 1년여 간의 논의는 실제로는 이견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사회진보연대가 바라보는 전국민중연대 활동평가와 발전전망에 대한 입장은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되었으므로 (「전국민중연대 조직발전 시안 비판」, 『사회화와 노동』, 300호, 2006년 3월 14일. 을 보라) 여기서는 간략히 요약한다. 첫째, 2003년 전국민중연대 본조직이 출범했지만, 이와 동시에 2003년 출범한 노무현정권에 대한 입장 문제를 두고 민중연대 내부에 노선 차이가 심각하게 드러났다. 노무현정권에 대한 국회탄핵을 '의회쿠데타’로 규정한 탄핵반대국민행동에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회, 사무처 간부 대다수가 참여한 사건은 민중연대의 내부 신뢰를 침식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양극화해소, 사회통합,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국민행동’을 표방한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 참여 여부를 다수결로 의결한 것도 전국민중연대 활동정신에 위배되는 중요 사건이었다. 탄핵반대국민행동과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 노무현정권을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구원하기 위한 노무현정권 집권 초기와 집권 중반기의 가장 대표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전국민중연대 가입단체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앙간부가 집단적으로 참여하거나, 전국민중연대가 통째로 참여하는 결정을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시도는 전국민중연대 발전전망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다. 둘째, 이러한 문제에 관한 심각한 이견이 확인되며 공동투쟁의 토대가 침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시된 조직발전시안은 전국민중연대 활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전국민중연대 활동 평가로부터 출발한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의 확장을 가로막는 내적 요인이 무엇인가, 과연 전국민중연대가 광범위한 사회운동 내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지가 중요 의제로 설정되어야했다. 그러나 조직발전시안을 통해 제시된 조직발전의 골자는 이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서, 연대기구의 정비(통일연대와의 통합), 대의원대회구조 신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안은 민중연대의 가입단체의 내적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조직구도에 따라 외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과 불신을 낳았다. 즉 <6·15공동선언실천을위한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가 구성된 이후로 위상과 역할이 모호해진 통일연대의 해소, 민중연대·통일연대와의 활동중복에 따른 전국연합의 해소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다. 특히 이러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것은 상설연대체 건설을 2007년 상반기로 못을 박은 상태에서 일정을 역추산해서 강행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민중연대 가입단체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기초해서 출발한 것이라면 한국진보연대(준)이 출범한 현재까지도 전국민중연대 기존 가입단체 중 상당수의 부문단체가 불참 의사를 피력하고, 대다수 지역단체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는 현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진보연대(준)이 기존 전국민중연대 가입단체 상당수를 사실상 배제하고 출범하는 것은 민중연대 내적 요인이 아니라 외적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통일연대 문제는 “상설연대체 건설을 제안한다.”는 결정을 내린 지난해 10월 대표자회의에서까지 한 차례도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한 때 ‘진보진영 단일연대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처럼, 연대기구의 ‘난립’을 근거로 단일연대체를 언급했을 뿐, 통일연대 그 자체에 관한 논의는 단 한 차례도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단체든 통일연대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고, 운동 노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통일운동에 관한 입장 차이는 최소한 1980년대 이후로 민중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집약하는 쟁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연대기구 정비’라는 명목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넷째, 대의원대회 신설은 합의제 방식으로 운영되는 상설공동투쟁체의 위상을 전변시키는 결정이므로 지극히 심각한 쟁점이다. 이는 전국민중연대 활동이 대의원구조로 운영될 수 있을 만큼의 조건을 확보했는지, 정치적 통일성과 신뢰를 발전시켰는지 여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문제다. 조직발전추진기획단은 논의 과정을 통해 대의원대회 신설에 대해서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함을 확인했고, 지난 전국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 제출된 정책위원장의 안에서는 이 내용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2007년 1월 5일 한국진보연대(준) 2차 운영위원회 결과보고에 따르면 “최고의결기구의 형태는 대의원대회(또는 중앙위원회)와 대표자회의 중간 형태”가 검토되고 있다(예를 들어 민주노총은 중집 60여명, 전농은 상무상집 30여명, 민주노동당은 확대간부회의 40여명 등). 대의원대회 신설 문제가 심각한 쟁점인 것은 지난 1990년대 초반 전국연합의 경험을 반영한다. 전국연합은 1992년 대선방침이나, 1993년 이후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범민련과 민족회의의 분화)이 대의원대회를 통해 결정되었으나, 그 결과 끊임없이 운동세력의 분열과 이탈, 축소를 낳았다(그 후 전국연합은 사실상 특정 경향의 ‘정치조직’으로 성격이 전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경험은 대의원대회라는 조직형식을 통해 민중운동의 단결을 꾀한다는 것은 완전히 순서가 뒤바뀐 발상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연대운동의 기본원칙에서 재출발해야 현재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민중운동의 주요 조직이 참여하고 있으므로, 결국 중앙방침을 통해 지역을 강제하여 한국진보연대(준)이 전국적인 틀을 갖춘 상설연대체로 발전할 것이라는 사고는 대단히 위험하다. 오히려 연대운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호존중과 신뢰의 기풍을 침식하고, 사회운동의 저변 확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군사세계화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운동세력의 상호소통과 공동투쟁을 위한 운동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으나, 현재 한국진보연대(준)이 그러한 역할을 자임할 수 있는지, 최소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노동자운동, 여성운동을 쇄신하려는 여러 흐름들과 반전평화운동, 인권운동, 반빈곤운동 등 다양한 운동흐름이 형성, 발전되고 있으나, 이러한 흐름들이 한국진보연대(준)과 조우할 수 있는지 불투명한 게 현실이다. 결국 이러한 발전적 움직임들이 상호소통하고 공동의 투쟁을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흐름이 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2007-02-12

    마키아벨리와 공화주의적 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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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1%] 공화주의, 비-지배(Non-Domination), 그리고 법치(Rule of Law) 근대 공화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최근의 시도들 예컨대 페팃(Philip Pettit)의 작업 은 비-지배로서의 자유라는 이상(理想, ideal)과 법치를 강하게 동일시하려고 한다. 내 생각에 근대 공화주의가 비-지배의 이상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훨씬 더 강조하는 것은 국가의 법질서(law and order)에 대립하는 비-지배의 조건으로서 인민의 권력(power of the people)과 자유다. 인민 권력에서 법치로 옮아가는 것은 근대 공화주의보다는 근대 자유주의 전통에서 훨씬 더 많이 유래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마키아벨리에게서는 자유과 법치의 관계에 관한 원(原, proto-)자유주의적 이해방식과 공화주의적 이해방식 양 쪽 모두가 발견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같은 이해방식들을 소묘하면서, 자유와 질서, 인민 권력과 국가 권력, 혁명과 권위의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조건들을 나열해 볼 것이다. 근대 공화주의에 대한 페팃의 재구성에서, 비-지배의 정치적 조건은 거의 전적으로 법치의 유지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페팃이 볼 때 비-지배로서의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강자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음(being secured)으로써 … 자의적 권력들에 간섭(interfere)받지 않는 세계"1)에 사는 것이다. [여기서] 지배란 영향을 받는 사람의 의견과 이익을 따를 필요 없이 "자의적 근거로 피지배자들의 선택에 간섭"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의적 권력에 종속"된 상태로 정의된다.2) 개인들의 자의적 간섭으로부터 "보장하는"(secure) 것은 법 체계의 "비-자의적" 간섭이다. "비-지배적인(non-mastering) 간섭자"3)로 기능하는 법의 통치 말이다. 법은 그 비인격적(impersonal, [비개인적]) 형태 덕분에 타고난 비-자의적 성격을 보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바로 법의 통치를 받는 것이 비-자의적 권력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비-지배로서 자유라는 식의 결론이 뒤따르는 것 같이 보인다. 페팃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적절한 법적 체제(regime) 아래서만 존재할 수 있는 … 지위(status, [신분, 상태])다. 법이 통치자들이 향유하는 권위를 창출하는 것처럼, 법은 시민들이 공유하는 자유를 창출한다."4) 위에서 말한 이상화에 부합하는 몇 가지 측면들이 근대 공화주의에 있는 것은 분명하며, 스키너(Quentin Skinner)와 비롤리(Maurizio Viroli)의 작업 역시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근대 공화주의, 특히 (이 저자들 모두가 근대 공화주의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마키아벨리 안에는 비-지배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이해방식을 주장하는 그 이상(以上)이 있는데, 여기서 지배의 부정은 자의적 지배뿐 아니라 법적 지배에도 투여된다. 공화국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연합의 자유에 관한 가장 간결한 정의 중 하나는 아렌트에서 유래한다. "법치는, 인민 권력에 기초하는 한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를 종식시킬 것이다."5) 이 정식화에 따르면 공화국은 지배로부터의 자유,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의 부재라는 특징을 갖는 정치적 연합이다. 공화국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인민 권력으로,6) 국가나 정부(government, 통치) 형태는 여기에 기초해야만 지배받는 신분[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다. 만일 정부 형태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차이를 확립하는 것이라면, 근대 공화주의 전통에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인민 권력은 이 같은 차이 외부에 있으며,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분할이 없는, 비-통치의 조건 하에 사는"7) 것을 원리적으로 가능케 한다. 비-지배라는 근대 공화주의의 이상이 인민 권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통치 자체의 정당성을 문제삼을 수 있는 근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대적 또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이상이 목표로 삼는 정치적 조건은 "평등한 사람들이 통치 받는 만큼 통치하는 것, 그 결과로서 교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롭다(just)."8)는 것이었다. 고전적 이상이 제시하는 것은 최선의 또는 정의로운 종류의 통치로서, 이는 비-지배라는 근대적 이상과 대조된다. 오직 후자만이 근대 공화주의와 혁명이라는 현상이 항상 연관되는 이유를 해명한다.9) 근대 공화주의 전통이 자유에 접근하는 방식은 현실주의적이지, 유토피아적이지 않다. 근대 공화주의는 인간의 연합에서 통치의 차원이 간단히 폐지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근대 공화국의 두 번째 구성 요소는 "법치"다. 법치가 이름 짓는 정부의 원리는, 만인이 그 앞에서 불평등한 인적 명령들보다는 만인이 [그 앞에서] 평등한 법에 의해 인민들이 통치되는 점을 확신케 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법치는, 그 밖의 점에서는 혁명적인 정치적 자유에 안정적인 정치적 질서를 보장한다. 근대 공화주의 정치 사상의 주요 전통에 따르면, 자유로운 정치적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인민 권력에 연결된 자유의 요소와 법치에 연결된 질서의 요소 사이의 균형이며, 이는 피할 수 없는 긴장을 동반한다.10) 마키아벨리는 [법치가] 일종의 통치라는 데서 유래하는 지배의 요소가 법치에 포함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 통치는 하나의 지배 형태로서, 페팃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종의 비-자의적 간섭에 불과한 것이 아닌데, 이는 그것이 종속(subjection) 관계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법치에서 유래하는 종속은 주인에 의해 노예가 예속되는 자의적 지배와 같진 않다. 그것은 비-자의적이고 비인격적인 종류의 지배로서, 여기에 신민(subject, 주체)들이 예속되는 것은 사적 인격이 아닌 공적 제도에 의해서다. [어쨌거나] 이 때문에 중대한 유보 조항을 달지 않는 한 법치를 비-지배로서의 자유의 이상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2절) 이런 내적 비판에 맞서기 위해 페팃의 공화주의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을 통합함으로써 수정될 필요가 있는데, 이 요소들은 자유와 질서 간의 특유한 창조적 긴장을 재확립한다. 페팃이 재구성하는 공화주의는 분명 그가 정부의 "민주적 분쟁가능성"(contestability)이라 부른 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인민 권력 개념과 재연결될 필요가 있고 그 적용은 확대되어 법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지배와 다투는(contest)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분쟁가능성은 자유로운 정치적 삶의 토대에 놓이고 이로써, 마키아벨리와 그 뒤를 잇는 많은 공화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통일(성)의 달성에 대한 사회적 갈등의 우위라는 주제가 복원된다.(3절) 역으로 근대 국가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담론은, 어떻게 근대 국가를 [국가에] 사전에 투여된 비-지배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역량의 함수(function)로 이해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시민형 군주"(civil prince)로 형상화되는 하나의 응답은, 통치의 기획을 그 자신과 신민 양 쪽의 [안전] 보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근대 국가가 이 통치의 보장을 달성하는 것은 개인적 권리들의 체계라는 형태로서다. 비-지배의 요구에 대한 이 같은 국가 중심적인 응답은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을 정초하지만, 인민의 정치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의 달성을 타협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통치를 보장하는 것은 그것에 대항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4절) 또 다른 응답은 국가로 하여금 인민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특수한] 제도들을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제도들은 인민들이 국가 자체의 내부로부터 통치의 집행(administration, 행정)에 거스르는 것을 허용한다. 이 두 번째 전략을 통해서 국가를 국가 자신에게 대항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식으로 입헌주의가 이해될 때에만 공화국을 말할 수 있다.(5절) 국가를 법적 지배의 원천으로 판정한 후 마키아벨리는 인민 권력 및 지배에 대한 [그것의] 분쟁(contestation)이, 정치적 평등의 인정을 위한 혁명적 투쟁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헌법 외(外)적인 방식으로(extra-constitutionally)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능성을 옹호한다.(6절)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법치를 법의 권위와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인민 권력의 혁명적 잠재력이 법치와 모순에 처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법의 권위와의 관계에서는 사정이 같을 수 없다. 오히려 인민 권력과 법의 권위가 서로를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7절 - 이 글에는 포함되지 않았음.) 자유와 질서, 권력과 통치 간의 균형은 정치적 혁명과 법적 권위 간의 내적 관계를 확립하는 것에 달려 있다. 법치와 비-자의적 지배 지난 절에서 나는, 행위의 선택에서 법이 표현하는 추상적 고려에 부합하는 실천은 (도미니움(dominium, [배타적] 지배권력)이거나 임페리움(imperium, 통치권력)인) 지배에 준거하지 않고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가능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가능성에 상관없이, 법이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는 점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치의 기능을 실행하는 어떤 공적 인격(public person, [공인(公人)]), 절차, 제도와 기술이 없다면 법치도 있을 수 없다. 비인격적 지배가 법치에 들어가는 것은 통치를 통해서다. 따라서 "좋은 법은 그 스스로 어떤 새로운 지배적 강제력(force)을 도입하지 않고서, 정부의 통치권력(imperium)에 동반될 수 있는 지배를 도입하지 않고서 … 인민을 지배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페팃의 가정은 그릇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11) 왜냐하면 "법치"는 (마치 "입헌 국가"나 페어파숭슈타트(Verfassungsstaat, 입헌 국가)처럼) 두 가지 용어[즉 헌법과 국가]를 포함하는 복합적 표현이기 때문인데, 각각은 별개의 문법으로 사용되고 별개의 현실에 관련되는 바, 드워킨(Ronald Dworkin)은 각각을 "법의 근거"(grounds of law)와 "법의 힘"(force of law)이라는 표현 하에 솜씨 좋게 분류한다.12) 전자는 근대 법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데, 이를 위해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 (예컨대 홉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위 이론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지 아니면 (예컨대 칸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의 이론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지에 관해 논의한다. "법의 힘" 논의에 관련되는 것은 법이 요구하는 통치의 종류, 그리고 종속의 종류다. 법과 통치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거나, 따라서 그것들의 내적 관계라는 문제 전체를 무시하게 되면, 법치에서 실행되는 비인격적이거나 합법적인(legal) 지배의 가능성이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법치에 관해 제기될 수 있는 근본적 질문 중 하나는 간단히 말해, 왜 법은 통치를 필요로 하는가이다. 법치에 관해 서로 다른 정식화들을 내놓으면서도 마키아벨리, 홉스, 스피노자, 로크, 그리고 루소 모두가 동의하는 바는, 법의 타당성(validity)(법의 "근거")과 법의 사실성(facticity)이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동시에 양자를 별개로 결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13) 이 사상가들 모두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답변은, 질서가 법에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법의 정의나 권위보다는 통치라는 것이다. 법치의 형식적 특징을 아직까지도 가장 명쾌한 것으로 인정받는 방식으로 설명한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는 이 쟁점을 아주 분명하게 요약한다. "시민적 조건은, 그것이 법(lex, 법률)에 따른 연합이고 법이 스스로를 해석하고 집행(administer)하거나 시행(enforce, 강제하다)할 수 없는 까닭에, 통치 장치를 요청한다."14) 통상 이 통치 장치는 "조건(즉 법(lex))에 일반적이고 적합하게 동의할 것이라는 보증, 최소한 기대를"15) 달성하는 책임을 맡는다. 통치는 질서를 가져오는 것인데, 질서가 없다면 법으로 명문화된 비인격적 조건에 대한 동의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일반화된 동의도, 본연의 의미에서의 법의 "통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16) 질서가 없다면, 법은 (비록 그 근거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설령 주장을 위해 가정하길, 본연의 의미에서의 통치라는 기획은 실질적 목표가 오직 법의 유지에 있을 뿐이며,17) 통치자의 관직을 성립시키는(constitute) 선행 법 없이는 어떤 통치자도 가능하지 않다손 치더라도, 통치가 순전히 규칙(rule)에 동의하는 활동이 아닌 만큼 통치의 실행 자체는 규칙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18) 규칙들을 적용하고 변경하며 시행하거나 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저런 규칙에 동의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없는 행위이고,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성격규정할 수 없는 행위다. 통치 행위가 법의 형태로 수행될 수 없는 까닭은, 최소치로 잡더라도 통치라는 것이, 상황이나 사건이라는 특수자들이 법의 관할에 속하게 하여 원리상 법으로 규정될 수 있게끔 특수자들에 질서를 세우는(order) 실천이기 때문이다. 법 혼자서는 이렇게 질서를 세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통치는 법의 아래나 위에서 발생하지만, 결코 "법 이전에"(before the law)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통치란 본질적으로 무언가나 누군가를 다른 무언가나 누군가에게 종속시키는 실천이다. 통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은 통치에 종속되거나 저항하는 것뿐이다. 마키아벨리와 홉스, 스피노자, 로크나 루소가 이미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언급했듯이, 국가는 그 임무가 질서의 부과인 한에서, 즉 그 업무가 통치의 부과인 한에서, 정의상 법에 의해 포괄적으로 제한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국가는 법치를 실질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 철학의 주요 전통은 질서와 법의 차이에 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 차이의 실존과 그 의미는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아니므로, 나는 다만 두 가지 최근 사례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슈미트(Carl Schmitt)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통치가 법치를 위한 법-상위(以上)적(supra-legal) 조건이라는 관념이다. 슈미트가 볼 때, 모든 법은 "상황의 법"(situational law)이다.19) 모든 법은 질서를, 상황을 전제하며, 이 안에서만 법이 적용될 수 있다. 혼돈 상태에서는 법에 대한 예외만이 존재할 뿐으로, 정의상 어떤 법도 적용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타당성은 중단된다. 법이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 "정상적" 상황인가 아니면 "예외 상태"인가? "주권자는 이 정상적 상황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단호히 판단하는 자다."20) 국가는 그것이 주권적인 한에서, 질서를 확보하여 타당한 법이 적용가능하게 한다.21) 법은 정의상 이 같은 질서를 확립하는 데 무력하다. 비록 슈미트에게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인격체(person)일 뿐이지만, 마찬가지로 자명한 것은 주권적 인격체가 "결정에 대한 독점권"22)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따라서 그 인격이나 결정 모두 사회에서의 개인을 특징짓는 자의적 결정의 일종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의적 권력에 관한 페팃의 정의는 사적이고 자의적인 결정이 타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리킬 뿐이다. 그것은 공적 인격체가 내리는 공적 결정이라는 슈미트적 개념은 고려에 넣지 않는다. 설사 슈미트가 국가와 법의 구별을 끌어내는 방식에 결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입헌적 위기의 시기 곧 "국가는 남아 있으되, 법은 물러난"23) 경우, 이런 식의 구별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자의적 지배와 대비되는 적법한(legitimate) 지배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데 상당한 함의를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푸코는 통치를 법 "아래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법치의 법-하부적(infra-legal) 조건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푸코에게서는 슈미트에게서와는 달리 통치 장치를 통한 질서의 확립은 국가의 주권적 권력과 연관되지 않는다. 규율에 관한 그의 책이 보여주려는 것처럼, "원리상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사법적 형태를 뒷받침했던 것은, 이 같은 미세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 우리가 규율이라 부르는 본질적으로 비평등주의적이고 비대칭적인 이 모든 미시 권력의 체계다."24) 다시 한 번 요점은 규율 권력이라는 것이 "형식적, 사법적 자유들"을 작동시키기 위해 "힘들과 신체들의 순종에 대한 보증"을 활용하는 실제적 형태인가 하는 역사적 사실 문제에 관해 푸코가 옳은가 여부가 아니다. 결정적 지점은 철학적이다. 즉 법이 스스로를 통치 형태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보증"이나 "질서"가 필수적이라는 점, 그리고 질서에 대한 이 같은 필요는 지배의 법-하부적이거나 법-상위적인 지배의 실행을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으며, 이는 법적 주체라는 이유로 법에 종속된 이들의 의존성을 초래하는 권력의 비대칭성과 불평등을 기입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같은 류의 지배는 따라서 비인격적이고 합법적이어서, 법에 제한받지 않는 인격체가 행사하는 자의적 지배라는 페팃의 제한된 지배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다. 법치에 수반되는 통치가 비-자의적 간섭 형태가 아니라 비-자의적 지배 형태인 까닭은, 법적 주체의 "주체성"(subjectivity)이 그 종속(subjection)의 함수, 즉 비평등주의적이고 비대칭적이며 따라서 페팃 자신의 용어법에 따르자면 일종의 지배를 구성하는 권력 관계 안에 서게 되는 개인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통치 앞에 서는 것은 "자연적 장애물" 앞에 서는 것과 같지 않다. 전자는 나를 종속의 상태에 처하게 하거나 굳게 만들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25) 법치를 비-자의적 간섭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물론 법과 그것에 동의하는 행위의 관계를 "간섭"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법은 부사적인 것으로(adverbial), 행위에 "간섭하지" 않고서 그것을 변경시킨다.) 물론 나를 법적 주체로 전환시키는 류의 지배가 나를 노예로 전환시키는 지배와 같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은 여전히 명백하게 하나의 지배 형태다 합법적이고, 비인격적인 지배. 스피노자가 분명히 한 것처럼, 법적 지배에 종속되는 것은 자의적 지배에 종속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의 자기-이익"에 부합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배의 성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26) 그러므로 "적절한 합법적 체제"가 "시민들의 공통적이고, 쉽게 공언될 수 있는 이익을, 오직 그런 이익만을" 쫓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통치의 성격이 지배받는 상태에서 지배받지 않는 상태로 바뀌지는 않는다.27) 자의적 지배 상황에서 내가 종속되는 이유는, 다른 인격체가 내리는 명령의 자의적 지배력(sway, 동요)에 나 자신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합법적, 비-자의적 지배 상황에서 내가 종속되는 이유는, 나를 자의적 지배에서 "면역"(immunize)시키고자 하는 비인격적 절차의 통제에 나 자신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만일 페팃이 말하는 것처럼 법치가 자의적 권력에 대한 나 자신의 "면역력"을 구성하는 규칙의 체계라면, 이 같은 결과는 비-자의적 권력의 지배를 통해서 달성되며, 이 권력 앞에서 비인격적 권력에 대한 나의 객관적 "불안전(성)"(insecurity)은 이 권력이 자의성으로부터 나의 주관적 "안전(성)"(security)을 제공해 주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증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법치는 "자가면역적"(auto-immune) 과정에 무방비상태다(open, [병균 등에 전염될 우려가 있다]).28) 마키아벨리에게서 정치적 통일성과 사회적 불화(discord)의 우위 부패(corruption, [타락])에 관한 그의 복합적 담론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법이 법-하부적이고 법-상위적인 질서 확립에 의존적이라는 점을 비범하게 의식하고 있다.29) "사람들이 선량할 때인 탄생기의 공화국[에서 형성된 법과 질서]은, 사람들이 사악하게 된 후에는 더 이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법은 도시의 사태에 따라 변화할 수 있지만, 질서는 결코 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이는 새로운 법을 불충분하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고착된 채로 남아 있는 질서가 그 법을 부패시키기 때문이다."30) 이 문구가 유창하게 보여주듯, 정치적 연합의 구성원이 타락하는 것은 그 아래서 그들이 살아가고 그들을 "사악하게" 만드는 법적 질서의 불변성과 안정성 바로 그 자체 때문이다. 부패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직접적 이익 추구가 공동체의 주장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자마자 후자를 무시하는 우리의 자연적 성향"31)이 아니라, 현존하는 적법한 질서와 법의 보호 및 외피 아래서 구성원들 간의 불평등이 증가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키너와 페팃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지적했듯, 부패라는 현상은 자유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며, 이는 비-간섭으로서 자유라는 이들의 개념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비장의 수로서 권리를 역설하는 것은 … 우리가 시민으로서 부패했음을 공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비합리성의 자기파괴적 형태를 껴안는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러나 만일 부패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설명이 맞다면, 고전적인 "공민적 공화주의"(civic republicanism)는 이 문제를 극복하는 데 자유주의보다 나을 게 없는데, 왜냐하면 국가의 법질서로 형상화되는 "공공선"(common good)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애국주의")과 "공민적 덕"(civic virtue)에 대한 호소는 애초에 부패를 낳는 형태들을 뒷받침할 뿐이기 때문이다. 법치와 비-자의적 지배의 내적 관계를 인지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법치가 (그에 대한 충성을 유발하는 데 필요한 "공민적 덕"과 "애국주의"를 알맞게 복용하거나 하면) 지배로부터 자유를 성립시키는(constitute) 데 충분하다는 환상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질서에 대한 법의 의존과 여기서 초래되는 자유에 대한 해로운 효과에 관해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비-지배로서 자유는, 질서 보장보다 질서 변화의 우선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비-지배로서 자유는 질서에 대한 저항을 실행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 무질서와 불화, 분쟁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것과 연관된다. 역으로 이는 공민적 덕의 경건함에는 거의 쓸모가 없는 정치적 (변)덕(變德, virt )이라는 관념을 불러들인다.33) 마키아벨리는 법적 지배를 정치 질서의 고착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비-지배를 정치 질서의 비판 심지어 혁명의 함수로 생각할 수 있다. 무질서, 불일치(disagreement), 그리고 갈등은 사회와 정치에게 생산적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도시에는 두 가지 상이한 기질이 발견되는데, 이는 인민이 귀족의 명령을 받거나 지배받지 않기를 바라며, 귀족은 인민을 명령하고 억압하길 바라는 데서 초래된다. 이 두 가지 구별되는 욕구에서 세 가지 중 하나의 결과가 도시에 발생한다: 군주국, 자유[공화국], 방종[무정부상태]이 바로 그것이다."34) 사회적 갈등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재평가가 근대 정치 사상의 발전에 미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첫 번째 주요 혁신은 사회적 분할이 정치적 통일성보다 일차적이라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연합(과 따라서 사회)의 실존은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관계에 근거하는 것이지, 협력의 이성적 관계에 근거하지 않는다. 동의가 아니라 적대가 사회적 유대의 본질이다.35) 두 번째 주요 혁신은 마키아벨리가 사회적 적대에 부여한 성격에 있다. 왜냐하면 만일 적대가 단지 서로를 통치하려는 데 관심을 갖는 행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면, 이 같은 적대는 도저히 사회적 유대를 낳을 수 없고 그 대립물 곧 사회의 퇴락을 낳을 것임을 (최소한 플라톤 이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반론은 마키아벨리의 사회적 적대 개념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인민과 귀족은 자연적(natural, [타고난]) 부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누구건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귀족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고, 누구건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인민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동일한 개인이 다른 시점에 다른 입장을 점할 수도 있다. 소수자가 인민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다수자가 귀족처럼 행세할 수도 있다.(『로마사 논고』에서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국의 역사 및 로마 제국으로의 이행에서 이 같은 양 쪽의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더욱이 비-지배를 욕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일의적일 필요도 없다. 인민과 귀족은 완전히 차별적인 항이다.36) 따라서 일차적인 사회적 갈등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지에 관한 다툼으로 환원할 수 없다. 사회를 관통하는 갈등은 헤게모니 투쟁, 즉 장차 누가 통치할 것인가 에 관한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를 원하는 이들과 비-통치를 원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귀족과 귀족이 아닌 자들의 목적을 검토해 보면, 전자에게는 지배하려는 강한 욕망을, 후자에게는 단지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7)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통일성의 가능성, 따라서 정치적 통치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것은 통치라는 문제에 관한 필연적인 사회적 분할의 실존, 곧 누가 통치할 것인가 가 아니라 도대체 통치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 여부, 그리고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 라는 질문에 관한 필연적인 갈등의 실존에 의거해서다. 이 질문이 열려 있는 한, 사회적 유대는 실존하고 갈등적 유대로 남는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이들이 통치하길 원하거나 아무도 [통치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사고하는 데서 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홉스)과 "공평한 협동 체계"(롤스)라는 대립적이지만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억측들 중 하나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이 질문이 열려 있고 사회가 실존하는 한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로지 정치에 의해서, 그리고 정치로서만 제시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정치는 "공공선"이라는 상상의 초점(focus imaginarius, [실존하지는 않지만, 현실의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지향점.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 예컨대 '신'이나 '영혼', '자유' 등이 대표적 예])을 상실한다. 지배하려는 욕망과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 사이의 모순이 제3의 매개항으로 해소될 수 없으므로, "일반적" 또는 "공통의" 이익이 사회 안에 실존하여, 그것을 따를 수 있는 "적절한 법적 체제"에 원리적으로 분쟁불가능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38)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근대 국가는 지배와 비-지배 사이의 갈등에서 제기되는 요구에 대답하고자 하지만, 이는 오로지 그리고 항상 부분적이고 우연적인 응답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국가의 통치와 정치적으로 다툴지를 국가가 맡아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39) 차라리 국가가 더 잘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국가 안에 항상 이미 투여되어 있는 통치에 대한 분쟁가능성에 더 잘 응답할 수 있을 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 질서의 혁명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정치 질서 설립의 가능성을 조건짓는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근대 정치의 일반 원리를 제출하는데, 이에 따르면 어떤 정치 질서건, 그것이 구성/입헌되고(constituted) 정당화되려면, 반드시 탈구성/입헌(deconstitution)과 탈적법화(delegitimation)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 질서는 스스로의 근본적 우연성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군주론』과 그에 동반되는 근대 국가 이론, 그리고 『로마사 논고』와 그에 동반되는 근대 공화국 이론은 이 근대 정치의 일반 원리에 관한 두 가지 상호보완적 예증이다.40) 시민형 군주(Civil Prince): 자유주의 국가의 계보학을 향하여 일단 이 같은 정치적 통치의 근본적 우연성이 정치적 행위의 지평으로 가정되면, 두 종류의 정치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양 쪽 모두 필수적이고 한 쪽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첫 번째 종류의 정치는 시간을 관통하여 지속하는 국가를 정초함으로써 통치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국가를 '시민형 군주국'(civil principality)으로 규정하는 마키아벨리의 이론은 이 같은 정치를 형상화한다.41) 영속적 국가가 가능한 유일한 조건은 군주가 귀족에 맞서 인민의 편을 드는 것, 그리고 역으로 인민이 국가의 근거가 되어 그 통치를 뒷받침하는 것이다.42) 시민형 군주가 인민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직 자립적인 국가만이 외침(外侵, external war)의 맹격을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43) 여기에는 군주가, 용병과는 대립되는 스스로의 군대를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 수반된다. 즉 군주는 반드시 자신의 인민을 무장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앞서 논했듯 인민은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에 고취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군주의 국가 건설 기획은 극도의 위험을 불러 온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욕망에 무장을 갖춘(whose desire for freedom has been armed) 주체(subject, [신민(臣民), 기체(基體)]), 따라서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주체 위에 국가를 정초하는 것이다. "좋은 군대가 없이 좋은 법률을 가지기란 불가능하고, 좋은 군대가 있는 곳에는 항상 좋은 법률이 있다"44)라는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단언은, "좋은 군대"라는 말로 그가 의미하는 것이 비-지배를 욕망하는 무장한 인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거의 자명해 보인다. 요점은 근대 국가가, 그것을 항상 전복할 수 있는 것 위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군주론』의 역설은, 국가의 기초 자체가 그 혁명적 성격 때문에 그 자체로 국가의 우연성과 불안전성의 원천이 된다는 점이다. 근대 군주 또는 국가가, 그 시작에서부터 (자신과 그 신민에게) "보장"을 제공하는 데 몰두한다는 사실은, 그 근거의 발본적 우연성에서 직접 따라나오는 것이다.45) 마키아벨리는 이 "안전"이 통치 활동을 중단시키지 않고 보장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민형 군주는 스스로를 정초하기 위해, 통치의 실행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상호 보장의 문제로 만드는 국가의 이름이다. 통치의 중단과 대립하는 통치의 보장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시민형 군주국"은 근대 국가의 원(原, proto-)자유주의적 형태가 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위에서 말한 정초의 역설에 대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시한다. [잔혹이] (나쁜 일에 대해서도 '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잘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번에, 스스로를 보장하려는 필연성에서(la necessit dello assicurarsi) 행해질 때다. … 국가를 장악함에 있어 수권자는 그가 행할 필요가 있는 모든 가해행위를 검토해야 하며, 모든 가해행위를 일거에 저지름으로써 이를 매일 되풀이할 필요가 없게 하고, 이를 매일 되풀이하지 않음으로써 인민을 보장하고(assicurare gli uomini) 시혜를 베풀어 인민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 … 이렇게 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손에 항상 칼을 쥐고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새롭게 지속되는 가해 때문에 신민들이 그에게 안심하지 못한다면(assicurare di lui), 결코 스스로를 신민 위에 정초할 수 없을 것이다(fondarsi sopra li sua sudditi).46) 국가와 신민 양 편 모두에 대한 통치의 보장은 세 단계로 달성된다.47) 첫째, 시민형 군주는 잠재적 적수들(rivals)에 맞서 스스로를 보장해야 한다. 이 단계가 설립하는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일정한 영토에 대한 "폭력의 독점"이라 부른 것으로, 근대 국가의 고유한 특성이다. 둘째, 시민형 군주는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 즉 귀족들에게서 나타나는 법-외부적이고 법-하부적인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인민을 보장해야 한다. 페팃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 단계는 사회의 "강자"(powerful)의 지배권력(dominium)으로부터의 보장을 제공한다. 세 번째 단계는 결정적이다. 시민형 군주는 군주 자체에 대해 신민들을 안심시킴으로써, 그들이 국가의 지지대로 행동하게 해야 한다. 페팃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 과업은 국가 자체의 통치권력(imperium)으로부터의 보장을 제공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 마지막 과업을 달성함으로써만 비로소 군주 또는 국가는 본연의 의미에서 "시민적"이 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는 사회의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의 관계에 "시민인륜"(civility)을 가져 왔던 게 될 것이기(will have brought) 때문이다.48) 내가 지금까지 "비-지배적 간섭자"로서의 국가라는 페팃의 관념을 비교해 본 것은, 비-지배로서의 자유가 (특정 사회의 "귀족" 또는 "강자"의 지배권력(dominisum) 및 관료(office-holder)의 통치권력(imperium)이라는 양 쪽의 형태를 취하는) 자의적 간섭의 권력에서 보장하는 것에 불과한지 여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 이 같은 자유를 달성하고자 하는 국가는 적법한 국가 지배의 논리, 즉 마키아벨리의 시민형 군주의 논리에 정확히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아직 공화국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필요조건에는 미달하는 것 같다.49) 내 생각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거둔 가장 중요한 성취는, 시민형 군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과업, 즉 시민 사회(civil society, [문명 사회])의 창출은, 국가 편에서의 체계적 기만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 데 있다. 폭력의 독점을 행사하는 것은, 설사 지배권력(dominium)에 연루된 자들에게 강압을 가해 인민을 편들고자 할 때조차, 신민들을 전혀 안심시키지 못하는 국가의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근대 국가 또는 시민형 군주가 신민을 안심시킬 가망이 있는 "선"의 외양을 스스로 구축하기 위해 "가장(假裝)과 은폐(隱蔽)"(simulation and dissimulation)50)의 경로에 진입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근대 국가는 일찍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장치'라고 불렀던 것이 되어야만 한다.51) 근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요소는, 그것이 행사하는 폭력을 신민들을 위한 권리(right, [정의, 법]), 법적 권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역량에 준거한다. 권리라는 근대적 언어는 사실 통치의 보장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국가 중심적 정치와 분리할 수 없다.52) 도발적으로 제기하자면, "권리를 진지하게 여기는" 것에 가장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는 것은 바로 시민형 군주인데, 왜냐하면 오로지 이 같은 형태 안에서만 그것은, 자기 자신과 신민 모두에게 자신의 통치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처음 두 단계에 행사되는 국가의 권력 독점이 권리의 형태 그것[권리]의 확립이 "시민 사회"를 설립한다 로 스스로를 위장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잊을 수 없는 예증을 제시한다. 나중에 공작[체자레 보르지아]은 이 같은 과도한 귄위(authority, [당국])[귀족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메세르 데 오르코(Messer de Orco)의 친위대(kingly arms)]가 반감을 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지역의 중심부에 가장 뛰어난 재판장이 관장하는 시민 법정을 설치하고, 각 도시의 대표자를 배치했다. … [그리고] 인민들의 반감을 일소시키고 그들을 완전히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제껏 어떤 잔혹이 자행됐다면 이는 공작이 시킨 일이 아니라 그의 대행자의 모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 오르코를, 형을 집행한 나무토막 및 피투성이 칼과 함께 체세나 광장에 전시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본 인민들은 만족을 느끼는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53) 보르지아의 "광경"(spectacle)은 인민과 국가 사이의 상호 보장의 목표가 권리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민들에게 교통하려는 의도를 갖는다.54) 바로 여기에서, 국가를 정초하는 절정의 순간에, 근대적인 정치적 대의제의 온갖 책략을 동반하는 시민적인 최고 법정을 보르지아가 설립하는 것("그리하여 그는 그 지역의 중심부에 가장 뛰어난 재판장이 관장하는 시민 법정을 설치하고, 각 도시의 대표자를 배치했다")의 상징적 중요성이 나온다. 근대 국가에서 상호 보장은 여러 권리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권리의 요체다. 그것은 권리 그 자체의 의미다. 근대 국가에서 권리와 보장 사이의 연관에 관해, 밀은 계발적인 정식화를 제시한다. 나는 줄곧, 피해자에게 머물고 피해로 침해당한(violated) 권리라는 관념을 … 다른 두 요소들이 스스로의 외피로 삼는 형태들 중 하나로 간주해 왔다. 이 요소들은 한 편으로 어떤 지정가능한 인격이나 인격들에 대한 손해이며, 다른 한 편으로 처벌에 대한 요구다. … 이 두 가지 것들은, 권리의 침해를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55) (단지 홉스와 루소, 칸트를 따를 뿐인) 밀의 관념이란, 누구든 개인들의 인격(즉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그들의 동일성)을 침해함으로써 그들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에 대해서 사회가 국가를 통해 모종의 폭력(이나 손해)을 반드시 행사해야 한다는 발상이 권리라는 관념 자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근대적 권리가 근대적 권리인 것은, (사적으로) 강압하는 자를 (공적으로) 강압할 필요, 폭력을 사용하는 자를 침해할 필요 덕분이다. 이 권리의 폭력을 밀은 "법의 힘"이라고 명명했다. 권리와 폭력에 대한 침해(violation of violence, [폭력에 대한 폭력])가 맺는 이 같은 본질적 관계는 데 오르코의 폭력적인 친위대에 대한 보르지아 자신의 침해(violation, 폭력)에 의해 상연되는데(칸은 보다 우아하게 "폭력의 극적 전시"라고 말한다), 전자는 관료의 통치권력(imperim)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만일 신민이 국가에 대해 안심하려면, 시민형 군주는 신민의 편에 서서 [통치권으로부터 신민의 안전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공적 공간에서 피투성이 칼 옆에 전시된 데 오르코의 절단된 신체는, 폭력이 법치 국가(state of right, [권리/정의를 보장하는 국가/상태])56)에 의해 시민적 정치체(body politic)에서 잘려 나갈 것이라는 의미를 상징한다. 그러나 밀의 정식화에서는 가려지고, 마키아벨리의 텍스트에서는 드러나는 것은, (국가가 행사할 "권리를 갖는" 폭력인) 권리의 폭력이 전(前)-합법적인(pre-rightful, [권리/정의를 아직 공인받기 이전의]) 폭력의 사용을 전제해야만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있다"(right itself)는 점, 즉 애초에 "권리"를 낳을 수 있고 이 "권리"의 보호를 위해 국가가 폭력의 이용을 적법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57) 왜냐하면 "권리"의 출현은 전-합법적인 폭력이 스스로에 반해 전도(顚倒)되는 것과 일치하거나 또는 그것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인데, 이는 이중적이다. 첫째, 시민형 군주가 폭력의 독점을 획득하고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봉건 귀족에 대해 수행하는 전-합법적인 폭력적 파괴를 통해서(즉 이 사례에서는, 데 오르코의 "친위대"가 수행한 파괴). 둘째, 국가가 전-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한에서 국가 자체에 대해 수행되는 전-합법적인 폭력적 파괴를 통해서(즉 데 오르코의 처형). 국가의 전-합법적인 폭력을, 국가의 "합법적인 폭력"으로 뒷받침되는 신민들의 권리 형태로 "가장하고 은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국가에 특징적인 "(잘 사용된) 잔혹극"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민형 군주가 폭력을 권리로 어떻게든 변형하려 드는데도, 근대 권리의 설립에 선행하는 전-합법적인 폭력의 흔적은 권리 체계 안에서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 이 흔적의 끈질김은, 근대 법치 국가(state of right)의 두 가지 연관된 특색에서 엿볼 수 있다. 첫째, 비록 근대 법치 국가가 봉건적 귀족성의 파괴를 요구한다손 치더라도, 국가는 지배에 대한 "귀족적" 욕망의 파괴를 함의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없다면 인민들은 더 이상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리 체계는 지배하려는 욕망을 "사적 영역"으로 전환하며, 이 한도 안에서는 모든 이들에게 이 욕망의 추구를 허용한다.(이는 인민들의 기묘한 "귀족화"(ennobling)와 그들의 비-지배에 대한 욕망의 부패를 설명해 준다.) 둘째, 국가는 전-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역량을 항상 수중에 유지하는데, 홉스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이 신민과 계약하도록 두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이 전-합법적인 폭력의 사용에 대한 자연권을 유지하는 시민 사회 안의 유일한 동작주(agent)로 남게 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한 최초의 인물이다. 『군주론』에서 시민형 군주의 분석은, 『로마사 논고』 Ⅰ, 16~18에 나오는 부패와 군주의 도래[확인 요]에 관한 논의와 함께, 근대 국가 또는 시민형 군주가 정의상 "[비-지배로서의] 자유를 되찾으려는 인민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만든다. 평등한 개인적 자유들에 대한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국가는 "명령받거나 억압받지 않으려는" 요구, 인민으로부터 오는 비-지배의 요구를, 마치 그것이 법 앞의 부정적 자유와 형식적 평등에 대한 요구인 것처럼 다룬다. 부정적 자유는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서, 국가가 비-통치의 부정성(negativity)을 부정하는 형태인데, 그 목적은 그것을 하나의 형태, 곧 권리의 형태 국가가 자신의 법적 지배의 도구를 통해서, 즉 "보편적 보장이 포함되는 질서와 법을 만듦으로써" 그것을 보증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시민형 군주]가 우발적으로 이 같은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된다."58)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을 산출하는 것은 중심적 전략인데, 이를 통해 인민에게 비-통치에 대한 욕망의 유사물(simulacrum)을 제공함으로써 국가는 스스로 인민들의 지지를 보장한다. 이 유사물은 시민적 자유와 다르지 않으며, 이를 보장함으로써 국가는 시민 사회의 시민형 군주로 확립된다.59) 근대 공화주의 정치 사상 대부분이, 이 권리들을 보장하는 것이 시민인륜을 달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동시에 주장하면서도, 비-지배로서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담론을 개인적 권리에 대한 담론으로 환원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개인적인 시민적 권리와 "시민형 군주"로서의 근대 국가 간의 이 같은 내적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근대 공화국, 또는 '국가 내부에서 국가를 넘어서는' 근대 국가와 그 시민 사회를 정초하는 기획과는 대조적으로, 근대 공화주의 정치는,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통치의 보장이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라, 차라리 자유를 욕망하는 인민들에게 권력과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비-통치로서의 자유를 정치적 삶에 도입한다는 기획을 갖는다. 정치적 삶에 진입하기 위해서 인민들은 단지 수동적인 법적 기체(subject, [신민]), 국가의 법적 권력의 기초로 기능하는 것을 멈춰야 하며, 통치 업무에 의문을 제기하는 권력을 지닌, 따라서 이 업무를 안전하지 않고(unsafe) 발본적으로 분쟁가능한 사안으로 만들 수 있는, 국가에 저항하는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볼 때, "자유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법은 귀족과 인민의 불일치(disunion)에서 비롯한다."60) 법치가 공화주의적이 되는 것은 그것이 인민 권력에 의거하는 한에서일 뿐이다. 여기서 권력은 비-지배에 대한 욕망의 담지자로서의 인민들이 그것을 통해 국가적 삶에 참여하면서, 적법한 지배의 실행들 곁에서 그를 거스르는 행동과 실천, 그리고 제도와 관련되는데, 전통적으로 [적법한 지배를 실행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입법 권력으로서의) '원로원'의 심의와 (행정 권력으로서의) '군주'(monarch)의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적 법치는, 오직 통치의 심급들과 비-지배에 대한 요구 간의 적대가 법적 지배의 틀 안에 기입되는 조건 하에서만 실존한다. 어떻게 인민의 입장이, 비-지배의 욕망을 타협하여 이를 부정적 자유에 대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설립될 수 있는가? 만일 "인민 권력"이 인민주의적이거나 심지어 민주주의적인 통치 형태와 동일화될 수 없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61) 단순히 국가의 통치에 그치지 않는 정치의 공간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이것들이 바로 『로마사 논고』가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나는 근대 공화주의는 물론 그 혁명적 변종들의 경우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해 제시된 일련의 응답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답은 독창적이며, 근대 입헌주의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즉 인민이 정치적 삶에 진입하는 것은 특수한 제도들을 통해서인데, 이 제도들은 국가 본연의 활동, 곧 통치의 집행(administration, [행정])을 비판한다 즉 그것에 내적 견제(check)를 제공한다. 이 같은 비판 제도의 일반적 정식은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이지만, 이는 오직 그것이 진정한 견제와 균형의 체계로 이해되고 실행되는 한에서, 곧 국가 전체를 인민에 대해서 견제 상태에 놓는다는 관점에서 이 체계에 의해 "정부의 한 부문이 다른 부문의 권력에 저항하고 거스르기 위해 그것에 상당히 능동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을" 때에 한에서다.62) 이 같은 정치적 분쟁의 제도들, 또는 대항-제도들(counter-institutions)은 국가를 분할하여 비-지배의 요구가 발언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63) 마키아벨리는 일련의 충격적인 은유를 제시하여 로마가 공화국이 된 특유한 '형태'를 예시한다. 로마에서 왕을 추방함으로써, 브루투스(Brutus)는 군주제적 정치체의 '머리'를 베어 내고, 이로써 지배(archy)가 더 이상 유일한(mono)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을 것임을 신호했다. 인민 및 인민의 통치에 대한 불화를 위한 장소가 정치적 삶 안에 열린 채로 남겨 진다. 공화국이 시작되는 것은 인민들을 정치적 삶으로 진입시키는 대항-제도들, 예컨대 호민관(護民官, tribunate) 등에 의해 일단 이 같은 불화가 대표(represent, [재현/상연])되고, 이로써 로마에게 또 다른 "심장"(라틴어로 cor, cordis, [그런 점에서 보면 'dis-cord'는 서로 다른 심장들이 어긋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을 주어 원로원의 나머지 심장과 항상 불협화하고(dis-cordantly) 결코 화합하여(in unison) 뛰지 않게 만들 때다.64) 머리가 없는(acephalic, 無頭的) 정치체의 이 두 심장은 공화국에서 노는 두 개의 욕망, 두 개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이 같은 불화(dissensus)는 정치적 삶의 비-일의성(non-univocity), 공화주의적인 정치적 삶이 국가의 선("공공선"(common good))을 그 내적 목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실효적인 '공적 자유'의 실행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65) 로마 공화국 역사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재구성은, 리비우스(Livy), 살루스티우스(Sallust), 그리고 키케로(Cicero)의 영향 하에 [로마 공화국 역사를] 친(親)원로원적으로 읽는 흐름을 체계적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이는 국가 안에서 인민의 비-지배에 대한 욕망을 대표하는 대항-제도의 역할을 강조한다.66) 이 같은 대항-제도의 모범적(paradigmatic) 전형은 호민관이다. 마키아벨리 이전까지 호민관의 창설은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하는 혼합 통치(mixed government)의 이상이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이해를 고려하되 이를 넘어서면서, "인민 행정관에게 통치의 몫을 주는 것 외에도 [호민관은] 로마 자유의 수호자로 구성(constitute)되었다"67)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치적 자유는 국가의 통치를 집행하는 활동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국가의 시각에서 보자면, 호민관은 인민의 일부를 통치의 집행에 추가함으로써 단지 국가 형태를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의 시각에서 보면 호민관은 비-통치로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의 법적 통치 기계를 분해한 것이다. 호민관은 다른 모든 대항-제도들처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법치를 관리하는 국가 장치 안에 기입한다. 호민관의 "힘"(force)은 본질적으로 법이나 행정관의 통치, 즉 국가의 통치권력(imperium)의 통치에 대한 요구를 거부(veto)할 수 있는 권력에 있다. 폰 프릿츠(Karl von Fritz)가 로마 공화국의 이 제도를 분석하면서 보여 주었듯, "호민관이 가진 거부권의 증가는 … 공동체에 부정적 권력들의 과잉을 허용했는데, 그에 견줄 만 한 것은 역사상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거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다."68) 만일 국가 제도가 국가 자체를 비-지배를 추구하도록 "강제"(force)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직 "부정적 권력의 과잉"이라는 형태 아래서만 가능하다. 호민관과 다른 대항-제도들을 통해 정치 형태는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을 실효적으로 내부화하고 자기-견제적이 된다. 이 같은 대항-제도들은 합헌성(constitutionality)의 한계에 위치하면서, 이 한계들을 탈주선(lines of flight)으로 다시 긋는 데 기여한다.69) 엠마뉴엘 레비나스(Emanuel Levinas)의 힘 있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들은 '국가 내부에서 국가를 넘어'(au-del de l' tat dans l' tat)선다.70) 대항-제도들은 정치적 삶의 공화주의적 양식을 구성하는 비-지배로서의 자유의 목소리와 법치의 목소리 사이의 근본적 불화를 표현한다. 정치적 평등, 시민적 평등, 그리고 혁명의 문제 국가의 대항-제도들은 적법한 지배와의 불화를 정치 형태 안으로 내부화한다. 국가에 대한 그것들의 비판은 국가를 자기 자신에 대해 거역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국가 제도들로 머무는 한에서, 대항-제도들은 국가에 대해 외부적 입장에서 국가 전체와 다툴 수는 없다. 하지만 인민 권력 안에는 국가 전체와 다투고, 대항-제도들이 인민에게 부여한 국가 안에서의 참여에서 스스로를 철수시킴으로써, 근대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안정적 지지대를 제거하는 힘이 남아 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 근대 공화주의 전통은 혁명이라고 말한다.71) 이 전통에서 비판과 혁명의 구별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응한다. (법 제정의 공평함, 법 아래서 평등한 보호, 그리고 정당한 법 절차(due process, [미국 헌법 제 5조, 제 14조에 나오는 표현])로 이해되는) 법 앞의 평등을 국가가 아무리 효과적으로 유지한다 하더라도, 이 같은 평등은 질서와 법의 변치 않는 적용이 불평등과 지배의 효과를 낳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의 작업이 보여주듯, 이는 근대 법의 발전에서 상당히 일찍 직관되었는데, 왜냐하면 법 앞의 평등이 개인적 자유에 대한 권리(예컨대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로 정의되고, 이 같은 권리가 경쟁적인 것에서부터 착취적이고 차별적인 것에 이르는 실천들을 재가(裁可)하기 때문에, 배타적이고 엄격하게 형식적 평등을 고수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낳는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72) 승리의 전리품이 삶의 재생산 조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법 앞의 형식적 평등으로 보호받는 실질적 불평등은 지배와 예속의 새로운 관계를 뒷받침하는데, 이는 계급차별주의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에서 초래되는 이른바 "하위적"(subaltern) 인구들이 시민 사회 내부에 계속 실존한다는 점으로 분명해진다.73) 게다가 법 앞의 평등을 정의하는 형식적 권리들은 법에 종속된 이들과 법치 자체 사이의 불평등을 성립시킨다, 즉 이 권리들은 문제삼고 위반하며 새로운 규칙(rule)들을 창안(author)하는 능력보다는, 규칙에 대한 순응과 복종의 습관이라는 특징을 갖는 주체성의 형태를 불러일으킨다. 법적 소송지상주의(litigiousness)의 증가는 법적 통치 체계에 대한 정치적 순응주의의 증가에 상응한다. 하버마스가 정확하게 지적하듯, "기본권이 우리가 오늘날 법적 주체의 사적 자율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오직 이 주체들이 서로를 법의 수신자(addressee)라는 역할로 상호인정하고, 이와 함께 서로에게 지위 이것에 기초하여 그들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74) 그러므로 법 앞의 평등을 정의하는 권리들은, 법의 "수신자"로서의 그들에게 적용되는 법을 "창안하는 자들"(authors)로서 만인이 [갖는] 평등을 도저히 확립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을 창안함에 있어서의 평등이 없다면 "정치적 타율성(他律性, heteronomy)이라는 특징을 갖는 '법치'의 온정주의를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법의 수신자들이 법질서가 자신들에 의해 창출됐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정치적으로 자율적인 입법 행위에 참여하는 한에서다."75) 비-지배로서의 자유의 이상은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개인들 간의 주종 관계를 제거하는 것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이상은, 만인이 저 합법적(legal) 통치 체계, 저 적법한 국가(state, [상태]) 각자가 다른 개인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의 평등한 "노예들"이 되게 할 가능성 역시 제거할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법의 표면 아래에서 발생하는 불평등들을 시정하기 위해 법 앞의 형식적 평등 즉 시민적 평등을, 그 앞에서 시민들이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을 창안할 수 있는 만인의 평등 즉 정치적 평등과 구별하되, 그에 응답할 수 있게 만들 것을 제안한다. 비-지배로서의 자유는 시민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평등을 요구한다. 이 근본적 지점에 관하여 대부분의 후대 공화주의 정치 사상가들은 마키아벨리를 좇는다. 이 때문에 예를 들어 트렌차드(John Trenchard)는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내적 관계를 확인하면서, "어떤 사람도 스스로 만든 법을 위반하지 않은 이상 투옥될 수 없다."76)라고 말한다. 루소는 간결하게 "인민은, 그가 법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법의 창안자여야 한다."77)고 말한다. 일단 양자의 차이가 확립된 다음에는, 혁명의 문제는, 법을 창안하는 정치적 평등은 법 아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 그것은 시민적 평등의 일종인가 아닌가 여부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다. 구성/입헌된 법은 법적 주체를 단순한 "수신자"와 대립되는 법의 "창안자"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누군가를 법의 창안권(authorship)을 행사하는 위치에 놓는 자유와 권력은, 구성/입헌된 법에 의해 정치적 권리의 형태로 주어질 수 있는가? 근대 공화주의의 중요한 조류들의 경우,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는 것 같다. 이 대답 배후의 일반적 가정은, 법의 "창안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법자"(legislator)가 되어야 하고, 입법행위가 법치의 요구 조건 아래 있는 법적으로 설립된 실천이기 때문에, 법은 오직 법의 매개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창안"될 수 있다는 것이다.78) 하버마스는 이 점을 이렇게 말한다. "시민들이 공동입법자의 역할을 점할 때 그들은 매개 오직 그 안에서만 그들의 자율성이 실현될 수 있다 를 더 이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그들이 입법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 주체로서다. 그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게 될지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의 재량이 아니다. 자기입법이라는 민주적 관념은 반드시 법 자체의 매개를 통해서 그 타당성을 획득해야 한다."79) 이 시각에서 보자면, 인민이 권력을 갖는 것은 입법 과정에의 참여라는 그들의 "정치적인 시민적 권리"를 행사하는 한에서다. 이 정치적 권리가 시민적 권리의 일종이며 따라서 법치에 속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는 "사적인 시민적 권리"를 요구하는데 이것이 정의하는 것은 "개인적 권리의 담지자로서 자발적인 시민의 연합에 속하고 필요할 경우 실효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적 인격(legal person)의 지위다. 법적 인격 일반의 사적 자율성 없이는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80) 만일 인민의 구성/입헌 권력이 오로지 법치가 보장하는 정치적인 시민적 권리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이 같은 권력은 단지 구성/입헌된 법의(최종심에서 합법적 구성/입헌의) 가정일 수 있을 뿐이며, 그것에 대해 외부로부터 다툴 수 없다. 결국 법의 "창안권"은 구성/입헌된 법을 변경하거나, 심지어 합법적 헌법(legal constitution)을 수정할 권력은 포함하겠지만, 법적 통치 체계를 혁명화할 권력은 포함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 중에서도,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 그리고 루소에게서, 정치적 평등이 반드시 법 아래 놓여야 한다는 주장을 문제삼는 다른 논증의 윤곽을 그려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법의 "권위"와 법의 "창안권"이라는 문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인민 권력과 그 정치적 평등이 법을 "창안"하는 것은, 입법자의 관직으로서의 입법 권력이 법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후자가 법을 만드는 것은 "법 자체의 매개를 통해서"이며, 법이 "권위를 갖는"(authoritative)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는 법치나 법 앞의 평등의 원리에 부합하여 입법해야만 한다는 것은 별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입법권은 일차적으로 "시민적 권리"이며, 좀 더 한정하자면 "정치적인" [시민적 권리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해하면 이 점은 법의 "권위"가 법 자체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라는 앞서의 직관을 단지 상세하게 설명할 뿐이다. 법적 권위의 본질에 관한 이 같은 직관은 다른 직관과 분리될 필요가 있는데, 그에 따르자면 인민 권력이 표현하는 것은, 입법 활동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의미에서 법을 "만들"거나 "창안"할 수 있는, 시민적이 아닌, 정치적 평등이다. 혁명적인 인민 권력은 법에 기여할(make for) 수는 있지만(그것은 구성/입헌 권력이다), 그러나 입법할 수는 없다.(그것은 구성/입헌된 권력이 아니다.) 정치적 평등의 법-외부적 차원에 관해 사고하는 한 가지 방법은, 법치의 조건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된다. 내가 위에서 주장했듯, 법은 법 자체만을 수단으로 해서는 결코 그 상황을 통치하는 데 이를 수 없으며, 오직 지배 관계를 수반하는 통치의 다양한 실천들을 통해야만 한다. 법이 스스로를 이 같은 위치에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힘의 불평등 그것의 조절이 허용하고 뒷받침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을 창안하는 정치적 평등은 쟁취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인정 투쟁에서 힘 관계의 역전을 필요로 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듯 "사람들의 기록을 검토함으로써" "어떤 공동체에서든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주 점검해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81) }} 이 같은 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의 원리는, 불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되게 할 것이며, 평등한 것은 불평등하게 되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82) 법을 창안하는 정치적 평등은 결코 "시민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 같은 투쟁은 항상 폭력적(이며 때로는 비-폭력적)인 박탈(expropriation)의 요소를 동반해 왔다.83) 만일 정치적 정의에 대한 고전적 이해, 곧 누구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불평등한 것은 불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논리에 따르자면,84) 정치적 평등을 위한 근대 공화주의의 투쟁은 불의하게(unjust)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고전적 이해가 (평등하게, 즉 법에 따라 대우받을 필요가 있는 평등한 이들인) "시민"과 (불평등하게, 즉 법에 준거하지 않고 대우받을 필요가 있는 불평등한 이들인) "노예" 간의 근원적이고 필수적인 분할을 전제하고 오직 그 맥락 안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반면 마키아벨리 및 근대 공화주의 전통에서 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은 다름 아닌 "시민"과 "노예"의 분할을 주제화하고 폐지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노예, 식민지인, 배제된 자 등) 이전에 "불평등한 이"들에 의해 (시민, 식민지배자, 특권세력 등) 이전의 "평등한 이들"을 박탈하는 순간/계기(moment), 즉 "불평등한 이"가 "평등한 이"를 대체하는 또 그 역의 현실적 가능성은, 모든 정치적 질서가 필연적으로 부추기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불평등에 선행하는 만인의 보편적 평등에 대한 상호인정만을 겨냥한다. 이 때문에 정치적 평등을 위한 혁명적 투쟁은 스스로를 완전히 전도하지 않고서는 정치 질서나 합법적 지배의 원리(原理, principle)가 될 수 없다. 공화주의적인 혁명은 순간/계기(moment), 유한하고 되풀이 (불)가능한(iterable)85) 순간/계기 이상은 결코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영속성의 유혹에 굴복한다면, 만일 비-통치의 "국가/상태"(state)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와 모순을 겪게 될 것이며, 인민 권력도 유지하지 못하고 법치도 설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평등을 위한 순간적/계기적 투쟁에서 체험되는 만인의 보편적 평등은, 근대 법이 법 앞에서 선 만인을 평등하게 대우할 수 있기 위한 조건으로 전제하는 평등이다. 법이 각자를 "법 앞에 평등한 이들"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법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만인의 평등이 법에 선행하여(prior) 인정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 법이, 그 힘과 독립적으로 그것이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인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 때 박탈했다가 이제는 박탈당하는 이들, 마찬가지로 한 때는 박탈당했다가 이제는 박탈하는 이들 양 쪽 모두를 장악할 수 있는. 법 "앞의"(before) 정치적 평등이 법 아래의 시민적 평등을 만든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마키아벨리, 그리고 또한 스피노자나 루소처럼, 자신의 공화주의적 통찰을 발전시켰던 이들에게 있어서, 법을 만드는 만인의 정치적 평등은 그 자체로는 법적 또는 헌법적으로 예정될 수 없다. 그것은 합법적 질서와 정치 형태를, 그것 외부에 머무는 기원에 개방하는 평등이다. 마키아벨리가 혁명적 사건을 '시초로의 회귀'(return to beginnings)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어진 법적이고 정치적인 질서를 그 시초로 회귀시키는 운동은 혁명의 운동이다. 혁명에서 법적 질서는 법-외부적인 시초로 되돌려진다. 아렌트가 지적하듯, "새로운 정부를 구성/입헌하기 위해 모인 이들 자체는 위헌적(unconstitutional)이다, 즉 그들에게는 그들이 나서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할 권위가 없다."86) 아렌트가 의미하는 것은 혁명에서 인민들은 권력은 갖지만 권위는 결여한다는 것이다. 구성/입헌 권력은 법적 권위, 구성/입헌된 권력의 토대가 아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하듯, 이 같은 시초로의 회귀 또는 혁명을 통해 "만약 이들 공화국이 스스로를 갱신하지 않는다면 지속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87)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민 권력에서 발견되는 외-합법성(extra-legality), 권위의 부재는. 법의 권위와 모순되기는커녕. 그것의 가장 중요한 자원임에 틀림없다. 인민 권력과 법의 권위 사이의 차이를 지키는 것은 공화주의적인 정치적 삶에 특징적인 자유와 질서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 필요조건이다. [나는 혁명적인 "인민 권력"의 순간적/계기적이지만 되풀이 (불)가능한 회귀를 요청하기 위해서 "법의 권위"가 어떨 필요가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자 한다.] 1) Pettit, Republicanism, 24.본문으로 2) 위의 책, 31.본문으로 3) 위의 책.본문으로 4) 위의 책, 36.본문으로 5) Arendt, "On Violence," 139.[국역: 이후, 1999]본문으로 6)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Virginia Declaration of Rights의 2조에서처럼,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귀속되며, 따라서 인민에게서 유래한다.” 인민 권력은 개인을 “평등하게 자유롭고 독립적”(1조)이라고 정의한 데서 직접 따라 나온다.본문으로 7) Hannah Arendt, On Revolution (New York: Penguin, 1963), 30.[국역: 한길사, 2004] 아렌트는 이소노미아(isonomia, 시민 동권(同權))라는 그리스적 이상을 번역하기 위해 “비-통치”(no-rul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그녀가 해석하는 것처럼, 이 용어는 본래 “통치하려는 것도 통치받으려는 것도 아닌”(위의 책, 285) 욕망을 의미했다. 다른 곳에서 그녀는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평등한, 즉 사실상 통치권(rulership)의 원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정치체”(위의 책, 172)에 관해 말한다.본문으로 8) Arisotle, Politics 1287a15.[국역: 박영사, 2006]본문으로 9) 근대 공화주의가 “혁명적 공화주의”인 이유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David Wootton, ed. Repulicanism, liberty, and commercial society, 1649~1776 (Standford: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94) 기고문들을 보라.본문으로 10) 하버마스는 이 긴장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근대 자연법 이론들은 적법성(legitimation) 문제에 답하기 위해, 한 편으로 인민 주권 원리에, 다른 한 편으로 인권이 보장하는 법치에 준거해 왔다. … 확실히 정치 철학은 인민 주권과 인권 사이의 균형을 실질적으로는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 양 쪽 관념이 갖는 직관적으로 그럴 듯한 공근원성(共根源性, co-originality)은 중도포기된다. J?rgen Habermas, "On the Internal Relation between Law and Democracy," in The Inclusion of the Other (Cambridge: MIT Press, 2001), 258.본문으로 11) Pettit, 앞의 책, 36.본문으로 12) Ronald Dworkin, Law's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110~111.[국역: 아카넷, 2004] 이 책의 제목이 독자들에게 일으킬 법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드워킨이 이 책 어디에서도 “제국”이라는 개념, 즉 “법의 힘”, “통치”의 문제를 “법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연결시켜 논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 보면 재미있다. 이 제목 자체는 해링턴(James Harrington)의 “인간이 아닌 법의 제국”에 출전을 둔다.(Harrington, Commonwealth of Oceana, 20)본문으로 13) 내가 사용하는 것은 하버마스의 어휘인데, 그는 법치를 사고함에 있어 사실성(facticity)과 타당성(validity)의 내적 관계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한 가장 최근의 인물이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은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의 긴장인데 … [이는] 평균적인 법 수용을 보장하는 법의 강압적 힘과, 통치 자체의 적법성 주장을 최초에 옹호하는 … 자기입법이라는 관념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난다.”(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39.[국역: 나남, 2000])본문으로 14) Michael Oakshott, On Human Conduc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143.본문으로 15) 위의 책, 141.본문으로 16) 스피노자가 말하듯, “협약(agreement)의 타당성은 그 유용성에 의존하거니와, 그것이 없으면 협약은 자동 무효가 된다. 따라서, 만일 다른 이가 약속을 어겼을 때 그가 이로움보다 더 많은 해로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가 자신의 약속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점이 특히 적절한 것은 국가의 구성/입헌을 고려할 때다. … 따라서, 비록 인간들이 모든 성실함의 표지를 동원해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맹세한다손 치더라도, 그 약속이 다른 무언가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선의를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Spinoza,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Cambridge: Hackett, 2001], ch. 16, 176)본문으로 17) 물론 의심스러운 가정이다. 법이 스스로를, 그것을 통해 폭력과 전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법을 해석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서 전쟁과 자유의 관계라는 복잡한 질문을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전쟁과 폭력의 추구에 법이 어떻게 기능적인지를 보여주는 다른 논의로는, Walter Benjamin, "Critique of Violence," in Selected Writings. Volume Ⅰ 1913~1926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236~252.[국역: 자크 데리다,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2004 中 부록(139~169)]; 그리고 Michel Foucault, "Il faut d?fendre la soci?t?" (Paris: Gallimard, 1998).[국역: 동문선, 1998]본문으로 18) 예를 들어, 심판이 하는 것처럼, 경기 중 축구 규칙의 적용을 확인하는 것은, 축구 경기를 하는 것, 즉 축구 규칙을 따르는 것과 같지 않다. 축구 규칙을 적용할 때 심판들이 따르는 (축구 규칙 이외의) 다른 규칙 체계가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축구 심판들을 위한 이 “게임의 규칙”은 이를 다루는 별도의 심판을 필요로 할 것이고, 이는 또 다른 규칙 체계에 준거할 것이어서,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심판들이 다른 규칙(lex, 렉스, 법률로서의 법) 체계가 아니라, 무엇이 “옳”고 “정의로”우며 “선한”가(jus, 유스, 정의로서의 법)의 개념 체계에 호소함으로써 판정(ruling)을 내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이 같은 개념이 통치(ruling)의 특성을 변경하겠지만, 통치라는 활동의 종류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가 정의라는 문제와 내적인 관계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이는 통치와 규칙을 따르는 것 사이의 원리적 구별에 반하지 않는다. 덧붙여, 통치의 법(jus)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법률(lex)(게임의 규칙)에 대해 내적인가 아니면 외적인가 여부에 관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통치와 법률(lex)이 이질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인 다음에야 비로소 결정지을 수 있다.본문으로 19) Carl Schmitt, Political Theology (Cambridge: MIT Press, 1988), 13.본문으로 20) 위의 책.본문으로 21) “어떤 형태의 질서도, 어떤 합리적인 적법성이나 합법성도 보호와 복종 없이 실존할 수 없다. ‘보호한다 고로 복종한다’(protego, ergo obligo)는 국가의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다. 이 문장을 체계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정치 이론은 부적합한 단편에 머문다. 홉스는 이를 가리켜 … 그의 Leviathan[국역: 삼성출판사, 1990]의 참된 목적이라고 말했다.”(Carl Schmitt,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52.[국역: 법문사, 1992])본문으로 22) Schmitt, Political Theology, 13.본문으로 23) 위의 책.본문으로 24) 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New York: Vintage, 1979), 222.[국역: 나남출판, 2003]본문으로 25) 페팃이 법치와 비교하는 것은, 간섭하지만 지배하지 않는 “자연적 장애물”이다.("The Domination Complaint, NOMOS, 24에 수록 예정) 그는 또한 법치를 “비-의도적인 방해”라고 지칭한다.본문으로 26) “그러나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인민의 복리가 최고법인 주권 국가에서는, 모든 사안에서 주권적 권력에 복종하는 이는 신민(subject)이라고 불려야지, 자신의 고유한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노예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Spinoza,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ch. 16, 178]본문으로 27) Pettit, "The Domination Complaint," 12.본문으로 28) 정치에서 면역과 자가면역의 논리에 관해서는, 일단 Jacques Derrida, Voyous (Paris: Galil?e, 2003).본문으로 29) 마키아벨리의 “위대한 독창성은 탈적법화된 정치의 연구자라는 데 있다”는 포콕(John Greville Agard Pocock)의 단언은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J. G. A. Pocock, The Machiavellian Momen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163)본문으로 30) Machiavelli, Discourse on Livy, Ⅰ, 18.[국역: 한길사, 2003]본문으로 31) Quentin Skinner, "The republican ideal of political liberty" in Machiavelli and Republicanism, eds. Bock, Skineer and Viroli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304.본문으로 32) 위의 책, 308. 또한 Pettit, Republicanism, ch.8, 곳곳을 보라.본문으로 33) 마키아벨리와 “공민적 인본주의”의 거리에 관해서는, Harvey Mansfield, “Bruni, Machiavel et l'humanisme civique," in L'enjeu Machiavel, eds. G?rald Sfez and Michel Sennelart (Paris: PUF, 2001), 103~121. [역주] 'virt?'를 ‘(변)덕’이라고 번역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주지하듯 virt?에 대당하는 것은 'fortuna'(운, 운명)인데, 『군주론』[국역: 까치글방, 1994] 25장에 나오는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는 유명한 대목 때문에, 또 virt? 자체의 어원(이 단어는 ‘남성’을 뜻하는 라틴어 vir에서 연원한다) 때문에, virt?를 (여성적인 fortuna에 대비되는) 남성적인 덕목, 특히 마키아벨리가 말한 ‘짐승의 덕목’ 중에서도 ‘사자의 힘’으로 해석되곤 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국내의 대표적 해석 중 하나로는 『군주론』에 강정인 교수가 붙인 「부록 2」 195~200pp 및 「역자 해제」를 보라. 그러나 이렇게 되면 virt?와 fortuna의 관계가 상호외재적이 될뿐더러, 마키아벨리의 진의가 잘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명시적으로 문제 삼은 사람 중 한 명이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다. 그는 “참된 “운”은 극단 및 한계의 공백이지만, 그 “머리채를 움켜잡아야” 하는 우연히 마주친 지나가는 여자처럼 등장하는 외부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전적으로 내부이다. 모든 “운”을, 즉 군주라는 개인이 그것으로 그의 감정들을 제어할 수 있는 … 이 내적인 거리, 이 공백, 이 무를(내 자신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이 “취해진 거리의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우의 능력이다(절대로 사자의 힘force이 아니다).”(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새길, p. 190)라고 말하면서, 기존의 virt?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는 말하자면 'virt?-fortuna' 대쌍의 상호외재성을 극복하기 위해 fortuna를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호외재성을 비판하는 다른 방식도 있는데, 그것은 virt?를 ‘남성적인 것’이 아닌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접근에 관해서는 최원, 「마키아벨리, 알튀세르, 페미니즘」(1997)(http://myhome.shinbiro.com/~spinoc의 철학 게시판 4번째 글)을 보라. 지난 호 「책 속의 책」에 소개된 보니 호니히(Bonnie Honig) 역시 유사한 해석을 제기한다. 조금 길지만 관련 대목을 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혹자는 virt?에서 남성적인 윤리를 볼 것이다. “남성”을 뜻하는 라틴어 vir에서 유래한 virt?는, 어쨌거나, 남성적인 장점이며, 마키아벨리와 니체를 비롯하여 이를 칭송하는 이들은, 종종 그것의 강건함을 여성화된 덕목, 여성의 유약함에 나란히 놓는다. 그러나 virt?가 영원히 이 대당에 묶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분란적인 힘이 이 번식력 강한 대당을 고스란히 둘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virt?가 오직 한 가지 형상, 하나의 일의적인 성/성별의 견지에서 식별할 수 있는 남성적(male)이고 남자다운(masculine) 형상에 의해서만 예시된다고 간주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Virt?의 주체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남자다운 남성 전사가 아니라, 여장부(virago) 곧 “사나운 여성”, “회오리바람”, “남자 같은 힘이나 정신을 가진 여성”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되는 인물, 자기 자신 안에서 이 같은 힘과 정신을 남성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지속적인 가능성에 제한을 부과하는 인물이라면 어떻겠는가? virt?가, 과잉과 나머지에 대한 민감함과 함께, 남성적/여성적 따위의 이원적 범주들에 분란과 동요를 일으키는, 이로써 이 범주들의 부적합성들, 한계들, 아포리아들을 지적하는 힘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겠는가? 인간이면서 자연의 힘인 이 여장부, 남성적인 여성은, 아마도 철저히 식별가능하고 범주적으로 확립된 것, 남성적인 전사를 확립하는 범주보다 virt?에 훨씬 적절한 인물일 것이다. 여장부는,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man, [남성])처럼, 전사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마키아벨리의 fortuna처럼 사나운 자연의 힘이며, 회오리바람이기도 하다. 여정부는 마키아벨리의 fortuna보다 덜 철저히 여성화되어 있지만,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은 종종 그렇게 여겨지는 것보다 덜 철저히 남성화되어 있다. 사실, 여성적인 fortuna와 남성적인 virt?라는 묘사를 구조화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성별화된 대당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고 모방적이다.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은 최상의 전반적 장점은 fortuna처럼 될 수 있는 능력, 그녀처럼 변덕스럽고 예측불가능하며 간교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한 남성다움이란 가장 진실된(왜냐하면 가장 거짓되기 때문에?) 여성의 장신구를 교묘하게 쓰고, 장식을 갖추며, 여장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Virt?, 즉 fortuna를 일관되고 잘 후려칠 수 있는 역량은, 그녀 식 게임에서 그녀를 후려치기 위한 재능이다. 비결(trick)은 fortuna보다 더 여성스러운 것, 그녀보다 더 나은 여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virt?적 남성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의 재능은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선을 건널 수 있는 역량, 보통 사람들이 그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의지다.”(Bonnie Honig,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 p. 16) 또 이 글의 필자인 미구엘 바터도 자신의 책 Between Form and Event: Machivelli's Theory of Political Freedom (Dordrecht: Kluwer, 2000) 2부 전체(pp. 131~215)를 할애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역시 위의 입장과 유사한 그러나 물론 훨씬 정교한 접근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p. 184 각주 52에서 한나 피트킨(Hanna F. Pitkin)을 언급하고 본문에서 이 같은 접근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피트킨은 『군주론』의 역자인 강정인 교수가 virt? 문제를 다룰 때 명시적으로 준거하는 이론가이기도 하다.(『군주론』 p. 216 각주 5 참조) Virt?의 통상적 번역어 중 하나는 ('virtue'의 통상적 번역어로서) ‘덕’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앞서 말한 virt?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실제로 호니히나 바터도 virtue의 통상적인 의미와의 대조를 극대화하기 위해 아예 virt?를 번역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실정이다. 호니히나 바터의 예를 고려할 때, 가장 좋은 번역어는 virtue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그것과 가장 분명하게 대조되는 단어일 텐데, 마침 한국어에는 덕과 대조될 수 있는 ‘변덕’이라는 단어가 있다. 다만 기존 한국어 용법에서 ‘덕’과 ‘변덕’이 대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지는 않으며, 또 virt?를 아무런 장치 없이 바로 ‘변덕’이라고만 옮기면 기존 한국어 용법에서 이 단어가 갖는 부정적 의미에 눌려 마키아벨리의 진의가 잘 전달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두 가지 점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마키아벨리의 virt?를 ‘(변)덕’이라고 번역할 것이다.본문으로 34) Machiavelli, The Prince, Ⅸ.본문으로 35) 벨(Pierre Bayle)이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따라 말하듯, “인간 행동의 참된 원리”가 발견되는 곳은 “기질의 성향, 기존 관습의 힘, 그리고 특정 대상들에 대한 예민함이나 취향에 대해 마음이 [느끼는] 지배적 정념이다.” (Pierre Bayle, Various Thoughts on the Occasion of a Comet [Albany: SUNY Press, 2000], 168~169).본문으로 36) “인민”에 관한 비슷한 개념에 관해서는, Jacques Ranci?re, "Ten Theses on Politics," Theory and Event 5:3(2001), 5번 테제를 보라.본문으로 37) Machiavelli, Discourse on Livy, Ⅰ, 5.본문으로 38) 마키아벨리에 대한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의 해석은, 근대 공화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의 토대에 놓인 인민의 욕망과 귀족의 욕망 사이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는 뛰어난 이점을 갖는다. Claude Lefort, Le Travail de l'œuvre Machivel (Paris: Gallimard, 1972), 472~477를 보라; 또한, 정치적 통일성보다 사회적 분할에 부여된 우선권의 견지에서 근대 공화주의를 재구성한 것을 보려면, Claude Lefort, Writing: the Political Test (Duke University Press, 2000). 욕망들의 이질성이 “공동 이익의 논리” 및 모든 시민들이 기본적인 수준에서 동일한 욕망과 공포를 공유한다는 그 전제와 어떻게 대조되는지에 관해서는, 일단 G?rald Sfez, Machiavel, la politique du moindre mal (Paris: PUF, 1999)을 보라. 사회적 갈등의 일차성의 관점에서 본 공화주의에서의 시민권 문제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시각에 관해서는, Christian Lazzeri, "La citoyennet? au d?tour de la r?publique Machiav?lienne" in L'enjeu Machiavel, 73~101을 보라.본문으로 39) 갈등과 불일치의 일차성이라는 견지에서 정치를 정의하려는 또 다른 시도로는, Jacques Ranci?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를 보라.본문으로 40) 이런 의미에서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마키아벨리의 주저 두 편이 동일한 주제를 두 가지 다른 시각에서 다룬 것이라는 그의 일반적 주장 면에서는 완전히 옳다. 스트라우스(그리고 스트라우스가 세운 일반적 개요를 따르는 예컨대 만스필드 등의 다른 독해들과) 나의 차이점은, 결국 이 두 시각들이 무엇인지에 관한 불일치로 요약된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스트라우스가 오해한 것은 “인민”을 정치적 행위자로 정치적으로 정의하는 비-지배에 대한 욕망이다. 스트라우스에게 있어 이 욕망은 (“귀족”을 정치적 행위자로 정의하는 지배하려는 충동(drive)과 유사하면서도 모순적인) 충동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동의 부재, 무기력, 수동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반면 내가 볼 때, 정치적 질료(matter)에 영향을 주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도입한 이중적 시각은, 이 정치적 질료의 분할된 성격, (지배와 저항의) 기본적 욕망의 이원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는 다기원적(多起源的, equiprimordial)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스피노자(마찬가지로 니체와 프로이트)에게서, 코나투스(conatus,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의 이 같은 내적으로 분할된, 또는 적대적인 성격은 아직 보존된다. 이는 홉스에 와서 상실된다. 홉스는 “귀족적”인 욕망만을 인류에게 “자연적”인 욕망(즉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유일한 욕망)으로 인정한다.본문으로 41) Machiavelli, The Prince, Ⅸ.본문으로 42) “따라서 반드시 명심해 둘 점은, 국가를 장악함에 있어, 수권자는 인민들의 복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하고 인민의 마음을 얻을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nel pigliare uno stato, debbe l'occupatore d'esso assicurare gli uomini e guadagnarseli con beneficarli].”(위의 책, Ⅷ)본문으로 43) “어떤 군주국이든 자신의 군대를 가지지 못하면 안전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군주국은 위기 시에 자신을 방어할 힘(virtue)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운에 의존해야 할 뿐이다.”(위의 책, ⅩⅢ)본문으로 44) 위의 책, XII.본문으로 45) 따라서 군주의 시각에서 볼 때, 정치적 활동의 방향은, 국가가 그 토대에 필연적으로 머물게끔 보장하는 데 전적으로 맞춰진다. “현명한 군주라면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시민들이 국가와 군주를 믿고 따르게 하는 수단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의 책, Ⅸ.본문으로 46) 위의 책, Ⅷ본문으로 47) 이 절의 구조와 논리를 경탄스럽게 해석한 것은 르포르의 Le Travail de l'œuvre다. 하지만 나는 이 단계들에 관해 르포르와는 사뭇 다른 독해를 제시할 것인데, 내가 아래에서 보여줄 것과는 달리 르포르는 “잘 사용된 잔혹”의 논리가 어떻게 근대의 개인적 권리 체계의 논리가 되는지를 보지 못한다.본문으로 48) [역주] 여기서 바터는 ‘미래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법이나 제도, 국가의 정초라는 사건이 갖는 시간적 역설을 부각시키기 위해 데리다가 사용하는 ‘전미래’ 시제(이는 프랑스어에서 영어의 ‘미래 완료’에 해당한다)를 차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위의 책, pp. 196~199를 보라.본문으로 49) "The Domination Complaint"에서 페팃은 마키아벨리의 시민형 군주를 면밀하게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회에서 비-지배를 부과하기 위해 국가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가용 전략이 “무장”, “무장해제” 그리고 “보호”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The Domination Complaint," 10) 이는 시민 군주국의 구성/입헌의 세 단계에 들어맞는다.본문으로 50) “싸움에는 두 가지 방도가 있는데, 그 하나는 법률에 의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거한 것이다. 첫째 방도는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둘째 방도는 짐승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로는 종종 불충분하기 때문에, 후자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군주는 모름지기 짐승과 인간[의 방도] 양 쪽 모두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 군주는 짐승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의 기질을 모방해야 한다. … [여우의] 기질은 잘 은폐하여 숨겨야 하며, 뛰어난 가장자와 은폐자[simulatore e dissimulatore]가 되어야 한다.”(Machiavelli, The Prince, ⅩⅧ)본문으로 51) 이 용어는 알튀세르에게서 빌려 온 것인데, 사후에 출판된 후기 저작에서 그는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또는 시민형 군주의 이론을 사용하여, 국가의 힘이나 폭력을 법적 권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근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의 국가가 어떻게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Louis Althusser, Machiavelli and Us (London: Verso, 1999).[국역: 이후, 2001]본문으로 52) 예를 들어 “공적인 강제력을 갖는(coercive) 법 아래 [살 수 있는] 인간의 권리, 그것을 통해 각자가 자신의 몫을 받을 수 있고 다른 이들의 간섭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근거 짓는 것으로 사회 계약을 정의하는 칸트를 보라.(Kant, "On the Proverb: That May Be True in Theory, But Is of No Practical Use," in Kant, Perpetual Peace and Other Essay [Indianapolis: Hackett, 1983], 72).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안전]보장(security)은 시민 사회의 최상의 사회적 개념이다. … 사회 전체가 거기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인격과 권리, 소유의 보호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개념”(Karl Marx, "On the Jewish Question" in Early Writings [New York: Vintage Books, 1975], 230)이라고 단언할 때, 그는 홉스에서 칸트와 밀을 거치는 근대 권리 관념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직관을 진술했을 뿐이다. 안전은 평등한 개인적 자유에 대한 자유의 한 가운데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모든 것을 하고 수행할 수 있는 권리다.”(위의 책, 229)본문으로 53) Machiavelli, The Prince, Ⅵ.나는 보르지아의 “광경”에 대한 빅토리아 칸(Victoria Kahn)의 독해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보르지아와 아가토클레스가 시민형 군주로서의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을 적법화하는 수단에 관한 하나의 동일한 담론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그녀의 기본적 테제를 전반적으로 공유한다.(Victoria Kahn, Machiavellian Rhetoric, ch.Ⅰ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내가 칸과 다른 점은, 나는 여전히 “광경”을 “극”이나 “수사(학)”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고 말하는 편을 선호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알튀세르의 사뭇 복합적인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a href="#home53">본문으로 54) 나는 보르지아의 “광경”에 대한 빅토리아 칸(Victoria Kahn)의 독해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보르지아와 아가토클레스가 시민형 군주로서의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을 적법화하는 수단에 관한 하나의 동일한 담론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그녀의 기본적 테제를 전반적으로 공유한다.(Victoria Kahn, Machiavellian Rhetoric, ch.Ⅰ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내가 칸과 다른 점은, 나는 여전히 “광경”을 “극”이나 “수사(학)”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고 말하는 편을 선호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알튀세르의 사뭇 복합적인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본문으로 55) Mill, Utilitarianism, 52.[국역: 이문출판사, 2002]본문으로 56) [역주] 영어에서 'state of right'라는 관용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독일어에서 'right'에 해당하는 'recht'와 'state'에 해당하는 'staat'의 합성어인 'Rechtsstaat'는 아주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고, 한국어로는 통상 ‘법치 국가’로 새긴다. 'state of right'라는 표현을 통해 바터는 한 편으로 독일식 표현이 갖는 본래적 의미를 연상시키면서도, 동시에 영어에서 아직 관용구로 굳어지지 않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state'와 'right'의 다의적 의미를 활용하려는 것 같다. 이 표현 전후에 나오는 'right' 역시 독일어의 'recht'와 영어의 'right'가 갖는 여러 의미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본문으로 57) 보르지아의 광경은 베버의 국가 정의에 어떻게 이르는지를 보여주는데,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국가에 선행하는 정치적 연합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Herrschaft]의 관계이고, 폭력의 적법한 사용(즉 적법하다고 주장되는 폭력)에 근거한다.” Max Weber, Political Writ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311.본문으로 58)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Ⅰ, 16.본문으로 59) 여기서 시민형 군주국으로서의 근대 국가에 대한 마키아벨리에 관한 나의 분석은, 스키너(Liberty before liberalism, ch. 2)와 페팃(Republicanism, ch. 1) 양 저자가 제시한 일반적 주장에 수렴하는데, 내용인즉슨 자유주의적인 부정적 자유 개념은, 군주제 국가와 국가 이성(Raison d'?tat)의 이익에 이로운 방향으로 비-지배로서의 자유라는 초기의 근대 공화주의적 개념을 중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내 요점은 공화주의적 개념, 그리고 그 자유주의적 중화와 포섭은 근대의 정치적 삶의 필수적 계기라는 것이다.본문으로 60) Discourses on Livy, Ⅰ, 4. 강조는 필자.본문으로 61) “공화국과 민주주의 또는 다수의 지배 사이의 구별에 관한 미국 혁명가들의 역설은 법과 권력의 발본적 분립, 그리고 양자가 서로 다른 기원과 적법화, 그리고 적용 영역을 갖는다는 점에 대한 분명한 인정에 의거한다.”(Arendt, On Revolution, 166)본문으로 62) Bernard Manin, "Checks, balances and boundaries: the separation of powers in the constitutional debate of 1787," in The Invention of the Modern Republic, 31.본문으로 63) 유사하게, 셸든 볼린(Sheldon Wolin)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순환제(rotation)와 추첨에 대해 “제도화를 전복하는 제도”라고 말한다.("Norm and Form," 43)본문으로 64)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주의의 정식에 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한다: auctoritas in senatu, potestas in populo. 군주제적 정치체의 “머리”에 대한 언급은 『로마사 논고』, Ⅰ, 2에 나오고, 인민을 공화국의 “심장”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위의 책, Ⅱ, 30에 나온다.본문으로 65) 인민, 그리고 비-지배에 대한 [인민의] 욕망의 통합이 정치적 삶에 도입하는 비통치성(unruliness)과 불화(dissensus)는, “시민적” 군주로서의 국가가 부과하고 유지하는 “시민” 사회의 구속(stricture)을 정치적 삶이 초과하게 만든다. 시민적 자유에 대한 정치적 자유의 이 같은 초과를 묘사하기 위해 클로드 르포르는 “야생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셸든 볼린은 “탈주적(fugitive) 민주주의”를 사용한다. 자크 랑시에르에게 있어 “인민이 사회의 부분/몫(part)의 셈에 대한 대체보충(supplement)으로서의 주체, ‘몫 없는 자의 몫’라는 특정한 형상으로서의 주체에 준거하는 한에서 정치가 존재한다.(Ranci?re, "Ten Theses on Politics," 테제 6) 이 주제와 교차하는, 마키아벨리에게서 인민에 대한 또 다른 독해는, John McCormick, "Machiavellian Democracy: Controlling Elites with Ferocious Populism,"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95, n. 2 (June 2001): 297~314.본문으로 66) 이는 로마 정치 사상과 로마의 정치적 현실로의 (차이 속의) 마키아벨리의 “회귀”의 의미에 관한 나의 기본적인 해석적 테제다. 나는 이를 나의 책 Between Form and Event: Machivelli's Theory of Political Freedom (Dordrecht: Kluwer, 2000)에서 길게 옹호했다. 마키아벨리와 로마 정치 사상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이해하려는 최근의 주목할 만한 두 편의 시도로는, Vickie Sullivan, Machiavelli's Three Romes (De Kalb, IL: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96)과 J. Patrick Coby, Machiavelli's Romans (New York: Lexington Books, 1999)를 보라. 불행히도 뒤의 책들이 나왔을 때 내 책은 이미 인쇄 중이어서, 그 테제들을 논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67)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Ⅰ, 4. 본문으로 68) Karl von Fritz, The Theory of the Mixed Constitution in Antiqu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4), 209. 폰 프릿츠가 내린 결론은 “로마 공화국의 정치 질서의 …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행위를 방지하는 부정적 권력들의 과다함으로, 이는 귀족적 귀족제(patrician aristocracy)에 맞서는 평민들의 투쟁 과정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위의 책, 219)본문으로 69) 이 같은 대항-제도들의 또 다른 사례 중 특히 중요하고 복잡한 것은, 농지법(Agrarian Law)인데, 이는 사적 소유의 불평등한 분배를 통해 행사되는 식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본문으로 70) 이 표현의 출처는 Emanuel Levinas, Nouvelles lectures talmudiques (Paris: Minuit, 1996)이다.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는 “인민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헌법이 상반된다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기존 헌법을 변경하거나 폐지할 수 있는 인민들의 권리를 허용하는 공화주의 정부의 근본 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Hamilton, Jay, Madison eds., The Federalist Papers [New York: Penguin, 1987], 78)a href="#home70">본문으로 71)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는 “인민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헌법이 상반된다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기존 헌법을 변경하거나 폐지할 수 있는 인민들의 권리를 허용하는 공화주의 정부의 근본 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Hamilton, Jay, Madison eds., The Federalist Papers [New York: Penguin, 1987], 78)본문으로 72) Christopher Hill, Liberty Against the Law: Some Seventeenth-century Controversies (New York: Penguin, 1996)를 보라.본문으로 73) 롤스적인 정의의 “차등 원칙”을 체계적으로 적용한다손 치더라도 이 상황은 교정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정의의 원리는 승리자가 될 기회를 패배자에게 재분배하기는 하지만, 승리할 역량도, 그렇다고 승리적인 결과도 재분배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누구보다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이 보여준 바대로다.(Amartya Sen, Development as Freedom [New York: Anchor Books, 1999], ch. 3. [국역: 세종연구원, 2001]) 어떤 경우라도, 롤스적인 정의의 차등 원칙은 원죄에 시달린다. 그것이 요청하는 기회의 재분배가 보다 공정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권리와 재화를 행사함에 있어 차별적 조건이 부재하는 한에서다. 즉, 정의의 두 번째 원칙이 작동하는 것은 오직 사회에 인종주의나 계급차별주의, 혹은 성차별주의가 없을 때에 한에서인데, 그러나 후자의 실존이 주어진 상황에서는, 그 원리만으로는 이 같은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본문으로 74)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23.본문으로 75) 위의 책, 121.본문으로 76) Trenchard, An Argument, Shewing, that a Standing Army is inconsistent with a Free Government, and absolutely destructive to the English Monarchy (1697).본문으로 77) Rousseau, The Social Contract, Ⅱ, 6.[국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하버마스는 여전히 이 같은 직관을 반향한다. “법적 매개가 정치적 자율성의 행사를 제도화하기 위해 사용되자마자, 이 [개인적 자유의] 권리는 필연적으로 권능을 부여하는(enabling) 조건이 된다.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들은 입법자의 주권을 제한할 수 없는데, 그들이 그녀의 재량에 놓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다. 권능을 부여하는 조건은 그것들이 구성/입헌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제한도 부과하지 않는다.”(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28). 또한 Habermas, "On the Internal Relation Between Law and Democracy," in The Inclusion of the Other, 260~1을 보라.본문으로 78) 이 점에 관한 논쟁 양상에 관해서는, J?rgen Habermas, "Constitutional Democracy: A Paradoxical Union of Contradictory Principles?" Political Theory, vol. 29, n. 6 (December 2001), 766~781. 그리고 같은 책에 있는 A. Ferrara와 B. Honig의 답변을 보라. 정치적 평등의 역설에 관해서는 일단 Christopher Menke, Spiegelungen der Gleichheit (Berlin: Akademie, 2000)를 보라.본문으로 79) Habermas, "On the Internal Relation,“ 260.본문으로 80) 위의 책, 260~261.본문으로 81)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Ⅲ, 1.본문으로 82) 위의 책, Ⅰ, 26~27; Ⅲ, 21~22.본문으로 83) 마키아벨리는 치옴피(Ciompi) 반란에 관한 유명한 서술에서, 정치적 인정을 위한 투쟁에서 박탈의 논리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설명을 준다. 마키아벨리, Florentine Histori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Ⅲ, 13: “그들이 피의 유서깊음―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을 가지고 당신을 낙담케 하지 말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시초를 가지고 있는 고로, 평등하게 유서깊으며 자연에 의해 하나의 양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를 벌거벗기면, 당신은 우리가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옷을 입히고, 그들에게 우리의 옷을 입혀 보라, 그러며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귀족처럼 보일 것이고 그들은 비천하게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오직 가난과 부유함만이 우리를 불평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인간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유의해 본다면, 당신은 거대한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된 모든 자들이 그것들을 사기나 힘으로 획득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취득의 추함을 가리기 위해, 그들은 그것을 품위 있게 만들기 위해 벌이(earnings)라는 그릇된 제목을 기만이나 폭력으로 강탈한 모든 것들에 적용할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신중함이나 지나친 어리석음 때문에, 이 양식들을 꺼리는 자들은 항상 예속이나 가난에 짓눌릴 것이다.”본문으로 84) “정의는 평등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만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평등한 자들에 대해서만 그렇다. 정의는 또한 불평등인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사실 그것은 만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불평등한 자들에 대해서 그렇기 때문이다.”(Aristotle, Politics, 1280a10).본문으로 85) [역주] ‘되풀이 (불)가능한’이라고 새긴 'iterable' 역시 데리다가 정교화한 표현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법의 힘』, pp. 186~188을 보라.본문으로 86) Arendt, On Revolution, 184.본문으로 87)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Ⅲ, 1.본문으로

  • 2007-02-12

    마키아벨리와 공화주의적 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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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1%] 공화주의, 비-지배(Non-Domination), 그리고 법치(Rule of Law) 근대 공화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최근의 시도들 예컨대 페팃(Philip Pettit)의 작업 은 비-지배로서의 자유라는 이상(理想, ideal)과 법치를 강하게 동일시하려고 한다. 내 생각에 근대 공화주의가 비-지배의 이상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훨씬 더 강조하는 것은 국가의 법질서(law and order)에 대립하는 비-지배의 조건으로서 인민의 권력(power of the people)과 자유다. 인민 권력에서 법치로 옮아가는 것은 근대 공화주의보다는 근대 자유주의 전통에서 훨씬 더 많이 유래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마키아벨리에게서는 자유과 법치의 관계에 관한 원(原, proto-)자유주의적 이해방식과 공화주의적 이해방식 양 쪽 모두가 발견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같은 이해방식들을 소묘하면서, 자유와 질서, 인민 권력과 국가 권력, 혁명과 권위의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조건들을 나열해 볼 것이다. 근대 공화주의에 대한 페팃의 재구성에서, 비-지배의 정치적 조건은 거의 전적으로 법치의 유지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페팃이 볼 때 비-지배로서의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강자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음(being secured)으로써 … 자의적 권력들에 간섭(interfere)받지 않는 세계"1)에 사는 것이다. [여기서] 지배란 영향을 받는 사람의 의견과 이익을 따를 필요 없이 "자의적 근거로 피지배자들의 선택에 간섭"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의적 권력에 종속"된 상태로 정의된다.2) 개인들의 자의적 간섭으로부터 "보장하는"(secure) 것은 법 체계의 "비-자의적" 간섭이다. "비-지배적인(non-mastering) 간섭자"3)로 기능하는 법의 통치 말이다. 법은 그 비인격적(impersonal, [비개인적]) 형태 덕분에 타고난 비-자의적 성격을 보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바로 법의 통치를 받는 것이 비-자의적 권력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비-지배로서 자유라는 식의 결론이 뒤따르는 것 같이 보인다. 페팃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적절한 법적 체제(regime) 아래서만 존재할 수 있는 … 지위(status, [신분, 상태])다. 법이 통치자들이 향유하는 권위를 창출하는 것처럼, 법은 시민들이 공유하는 자유를 창출한다."4) 위에서 말한 이상화에 부합하는 몇 가지 측면들이 근대 공화주의에 있는 것은 분명하며, 스키너(Quentin Skinner)와 비롤리(Maurizio Viroli)의 작업 역시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근대 공화주의, 특히 (이 저자들 모두가 근대 공화주의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마키아벨리 안에는 비-지배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이해방식을 주장하는 그 이상(以上)이 있는데, 여기서 지배의 부정은 자의적 지배뿐 아니라 법적 지배에도 투여된다. 공화국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연합의 자유에 관한 가장 간결한 정의 중 하나는 아렌트에서 유래한다. "법치는, 인민 권력에 기초하는 한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를 종식시킬 것이다."5) 이 정식화에 따르면 공화국은 지배로부터의 자유,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의 부재라는 특징을 갖는 정치적 연합이다. 공화국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인민 권력으로,6) 국가나 정부(government, 통치) 형태는 여기에 기초해야만 지배받는 신분[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다. 만일 정부 형태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차이를 확립하는 것이라면, 근대 공화주의 전통에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인민 권력은 이 같은 차이 외부에 있으며,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분할이 없는, 비-통치의 조건 하에 사는"7) 것을 원리적으로 가능케 한다. 비-지배라는 근대 공화주의의 이상이 인민 권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통치 자체의 정당성을 문제삼을 수 있는 근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대적 또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이상이 목표로 삼는 정치적 조건은 "평등한 사람들이 통치 받는 만큼 통치하는 것, 그 결과로서 교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롭다(just)."8)는 것이었다. 고전적 이상이 제시하는 것은 최선의 또는 정의로운 종류의 통치로서, 이는 비-지배라는 근대적 이상과 대조된다. 오직 후자만이 근대 공화주의와 혁명이라는 현상이 항상 연관되는 이유를 해명한다.9) 근대 공화주의 전통이 자유에 접근하는 방식은 현실주의적이지, 유토피아적이지 않다. 근대 공화주의는 인간의 연합에서 통치의 차원이 간단히 폐지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근대 공화국의 두 번째 구성 요소는 "법치"다. 법치가 이름 짓는 정부의 원리는, 만인이 그 앞에서 불평등한 인적 명령들보다는 만인이 [그 앞에서] 평등한 법에 의해 인민들이 통치되는 점을 확신케 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법치는, 그 밖의 점에서는 혁명적인 정치적 자유에 안정적인 정치적 질서를 보장한다. 근대 공화주의 정치 사상의 주요 전통에 따르면, 자유로운 정치적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인민 권력에 연결된 자유의 요소와 법치에 연결된 질서의 요소 사이의 균형이며, 이는 피할 수 없는 긴장을 동반한다.10) 마키아벨리는 [법치가] 일종의 통치라는 데서 유래하는 지배의 요소가 법치에 포함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 통치는 하나의 지배 형태로서, 페팃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종의 비-자의적 간섭에 불과한 것이 아닌데, 이는 그것이 종속(subjection) 관계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법치에서 유래하는 종속은 주인에 의해 노예가 예속되는 자의적 지배와 같진 않다. 그것은 비-자의적이고 비인격적인 종류의 지배로서, 여기에 신민(subject, 주체)들이 예속되는 것은 사적 인격이 아닌 공적 제도에 의해서다. [어쨌거나] 이 때문에 중대한 유보 조항을 달지 않는 한 법치를 비-지배로서의 자유의 이상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2절) 이런 내적 비판에 맞서기 위해 페팃의 공화주의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을 통합함으로써 수정될 필요가 있는데, 이 요소들은 자유와 질서 간의 특유한 창조적 긴장을 재확립한다. 페팃이 재구성하는 공화주의는 분명 그가 정부의 "민주적 분쟁가능성"(contestability)이라 부른 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인민 권력 개념과 재연결될 필요가 있고 그 적용은 확대되어 법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지배와 다투는(contest)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분쟁가능성은 자유로운 정치적 삶의 토대에 놓이고 이로써, 마키아벨리와 그 뒤를 잇는 많은 공화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통일(성)의 달성에 대한 사회적 갈등의 우위라는 주제가 복원된다.(3절) 역으로 근대 국가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담론은, 어떻게 근대 국가를 [국가에] 사전에 투여된 비-지배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역량의 함수(function)로 이해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시민형 군주"(civil prince)로 형상화되는 하나의 응답은, 통치의 기획을 그 자신과 신민 양 쪽의 [안전] 보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근대 국가가 이 통치의 보장을 달성하는 것은 개인적 권리들의 체계라는 형태로서다. 비-지배의 요구에 대한 이 같은 국가 중심적인 응답은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을 정초하지만, 인민의 정치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의 달성을 타협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통치를 보장하는 것은 그것에 대항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4절) 또 다른 응답은 국가로 하여금 인민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특수한] 제도들을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제도들은 인민들이 국가 자체의 내부로부터 통치의 집행(administration, 행정)에 거스르는 것을 허용한다. 이 두 번째 전략을 통해서 국가를 국가 자신에게 대항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식으로 입헌주의가 이해될 때에만 공화국을 말할 수 있다.(5절) 국가를 법적 지배의 원천으로 판정한 후 마키아벨리는 인민 권력 및 지배에 대한 [그것의] 분쟁(contestation)이, 정치적 평등의 인정을 위한 혁명적 투쟁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헌법 외(外)적인 방식으로(extra-constitutionally)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능성을 옹호한다.(6절)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법치를 법의 권위와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인민 권력의 혁명적 잠재력이 법치와 모순에 처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법의 권위와의 관계에서는 사정이 같을 수 없다. 오히려 인민 권력과 법의 권위가 서로를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7절 - 이 글에는 포함되지 않았음.) 자유와 질서, 권력과 통치 간의 균형은 정치적 혁명과 법적 권위 간의 내적 관계를 확립하는 것에 달려 있다. 법치와 비-자의적 지배 지난 절에서 나는, 행위의 선택에서 법이 표현하는 추상적 고려에 부합하는 실천은 (도미니움(dominium, [배타적] 지배권력)이거나 임페리움(imperium, 통치권력)인) 지배에 준거하지 않고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가능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가능성에 상관없이, 법이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는 점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치의 기능을 실행하는 어떤 공적 인격(public person, [공인(公人)]), 절차, 제도와 기술이 없다면 법치도 있을 수 없다. 비인격적 지배가 법치에 들어가는 것은 통치를 통해서다. 따라서 "좋은 법은 그 스스로 어떤 새로운 지배적 강제력(force)을 도입하지 않고서, 정부의 통치권력(imperium)에 동반될 수 있는 지배를 도입하지 않고서 … 인민을 지배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페팃의 가정은 그릇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11) 왜냐하면 "법치"는 (마치 "입헌 국가"나 페어파숭슈타트(Verfassungsstaat, 입헌 국가)처럼) 두 가지 용어[즉 헌법과 국가]를 포함하는 복합적 표현이기 때문인데, 각각은 별개의 문법으로 사용되고 별개의 현실에 관련되는 바, 드워킨(Ronald Dworkin)은 각각을 "법의 근거"(grounds of law)와 "법의 힘"(force of law)이라는 표현 하에 솜씨 좋게 분류한다.12) 전자는 근대 법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데, 이를 위해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 (예컨대 홉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위 이론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지 아니면 (예컨대 칸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의 이론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지에 관해 논의한다. "법의 힘" 논의에 관련되는 것은 법이 요구하는 통치의 종류, 그리고 종속의 종류다. 법과 통치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거나, 따라서 그것들의 내적 관계라는 문제 전체를 무시하게 되면, 법치에서 실행되는 비인격적이거나 합법적인(legal) 지배의 가능성이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법치에 관해 제기될 수 있는 근본적 질문 중 하나는 간단히 말해, 왜 법은 통치를 필요로 하는가이다. 법치에 관해 서로 다른 정식화들을 내놓으면서도 마키아벨리, 홉스, 스피노자, 로크, 그리고 루소 모두가 동의하는 바는, 법의 타당성(validity)(법의 "근거")과 법의 사실성(facticity)이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동시에 양자를 별개로 결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13) 이 사상가들 모두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답변은, 질서가 법에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법의 정의나 권위보다는 통치라는 것이다. 법치의 형식적 특징을 아직까지도 가장 명쾌한 것으로 인정받는 방식으로 설명한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는 이 쟁점을 아주 분명하게 요약한다. "시민적 조건은, 그것이 법(lex, 법률)에 따른 연합이고 법이 스스로를 해석하고 집행(administer)하거나 시행(enforce, 강제하다)할 수 없는 까닭에, 통치 장치를 요청한다."14) 통상 이 통치 장치는 "조건(즉 법(lex))에 일반적이고 적합하게 동의할 것이라는 보증, 최소한 기대를"15) 달성하는 책임을 맡는다. 통치는 질서를 가져오는 것인데, 질서가 없다면 법으로 명문화된 비인격적 조건에 대한 동의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일반화된 동의도, 본연의 의미에서의 법의 "통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16) 질서가 없다면, 법은 (비록 그 근거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설령 주장을 위해 가정하길, 본연의 의미에서의 통치라는 기획은 실질적 목표가 오직 법의 유지에 있을 뿐이며,17) 통치자의 관직을 성립시키는(constitute) 선행 법 없이는 어떤 통치자도 가능하지 않다손 치더라도, 통치가 순전히 규칙(rule)에 동의하는 활동이 아닌 만큼 통치의 실행 자체는 규칙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18) 규칙들을 적용하고 변경하며 시행하거나 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저런 규칙에 동의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없는 행위이고,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성격규정할 수 없는 행위다. 통치 행위가 법의 형태로 수행될 수 없는 까닭은, 최소치로 잡더라도 통치라는 것이, 상황이나 사건이라는 특수자들이 법의 관할에 속하게 하여 원리상 법으로 규정될 수 있게끔 특수자들에 질서를 세우는(order) 실천이기 때문이다. 법 혼자서는 이렇게 질서를 세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통치는 법의 아래나 위에서 발생하지만, 결코 "법 이전에"(before the law)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통치란 본질적으로 무언가나 누군가를 다른 무언가나 누군가에게 종속시키는 실천이다. 통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은 통치에 종속되거나 저항하는 것뿐이다. 마키아벨리와 홉스, 스피노자, 로크나 루소가 이미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언급했듯이, 국가는 그 임무가 질서의 부과인 한에서, 즉 그 업무가 통치의 부과인 한에서, 정의상 법에 의해 포괄적으로 제한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국가는 법치를 실질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 철학의 주요 전통은 질서와 법의 차이에 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 차이의 실존과 그 의미는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아니므로, 나는 다만 두 가지 최근 사례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슈미트(Carl Schmitt)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통치가 법치를 위한 법-상위(以上)적(supra-legal) 조건이라는 관념이다. 슈미트가 볼 때, 모든 법은 "상황의 법"(situational law)이다.19) 모든 법은 질서를, 상황을 전제하며, 이 안에서만 법이 적용될 수 있다. 혼돈 상태에서는 법에 대한 예외만이 존재할 뿐으로, 정의상 어떤 법도 적용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타당성은 중단된다. 법이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 "정상적" 상황인가 아니면 "예외 상태"인가? "주권자는 이 정상적 상황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단호히 판단하는 자다."20) 국가는 그것이 주권적인 한에서, 질서를 확보하여 타당한 법이 적용가능하게 한다.21) 법은 정의상 이 같은 질서를 확립하는 데 무력하다. 비록 슈미트에게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인격체(person)일 뿐이지만, 마찬가지로 자명한 것은 주권적 인격체가 "결정에 대한 독점권"22)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따라서 그 인격이나 결정 모두 사회에서의 개인을 특징짓는 자의적 결정의 일종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의적 권력에 관한 페팃의 정의는 사적이고 자의적인 결정이 타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리킬 뿐이다. 그것은 공적 인격체가 내리는 공적 결정이라는 슈미트적 개념은 고려에 넣지 않는다. 설사 슈미트가 국가와 법의 구별을 끌어내는 방식에 결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입헌적 위기의 시기 곧 "국가는 남아 있으되, 법은 물러난"23) 경우, 이런 식의 구별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자의적 지배와 대비되는 적법한(legitimate) 지배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데 상당한 함의를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푸코는 통치를 법 "아래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법치의 법-하부적(infra-legal) 조건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푸코에게서는 슈미트에게서와는 달리 통치 장치를 통한 질서의 확립은 국가의 주권적 권력과 연관되지 않는다. 규율에 관한 그의 책이 보여주려는 것처럼, "원리상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사법적 형태를 뒷받침했던 것은, 이 같은 미세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 우리가 규율이라 부르는 본질적으로 비평등주의적이고 비대칭적인 이 모든 미시 권력의 체계다."24) 다시 한 번 요점은 규율 권력이라는 것이 "형식적, 사법적 자유들"을 작동시키기 위해 "힘들과 신체들의 순종에 대한 보증"을 활용하는 실제적 형태인가 하는 역사적 사실 문제에 관해 푸코가 옳은가 여부가 아니다. 결정적 지점은 철학적이다. 즉 법이 스스로를 통치 형태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보증"이나 "질서"가 필수적이라는 점, 그리고 질서에 대한 이 같은 필요는 지배의 법-하부적이거나 법-상위적인 지배의 실행을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으며, 이는 법적 주체라는 이유로 법에 종속된 이들의 의존성을 초래하는 권력의 비대칭성과 불평등을 기입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같은 류의 지배는 따라서 비인격적이고 합법적이어서, 법에 제한받지 않는 인격체가 행사하는 자의적 지배라는 페팃의 제한된 지배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다. 법치에 수반되는 통치가 비-자의적 간섭 형태가 아니라 비-자의적 지배 형태인 까닭은, 법적 주체의 "주체성"(subjectivity)이 그 종속(subjection)의 함수, 즉 비평등주의적이고 비대칭적이며 따라서 페팃 자신의 용어법에 따르자면 일종의 지배를 구성하는 권력 관계 안에 서게 되는 개인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통치 앞에 서는 것은 "자연적 장애물" 앞에 서는 것과 같지 않다. 전자는 나를 종속의 상태에 처하게 하거나 굳게 만들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25) 법치를 비-자의적 간섭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물론 법과 그것에 동의하는 행위의 관계를 "간섭"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법은 부사적인 것으로(adverbial), 행위에 "간섭하지" 않고서 그것을 변경시킨다.) 물론 나를 법적 주체로 전환시키는 류의 지배가 나를 노예로 전환시키는 지배와 같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은 여전히 명백하게 하나의 지배 형태다 합법적이고, 비인격적인 지배. 스피노자가 분명히 한 것처럼, 법적 지배에 종속되는 것은 자의적 지배에 종속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의 자기-이익"에 부합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배의 성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26) 그러므로 "적절한 합법적 체제"가 "시민들의 공통적이고, 쉽게 공언될 수 있는 이익을, 오직 그런 이익만을" 쫓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통치의 성격이 지배받는 상태에서 지배받지 않는 상태로 바뀌지는 않는다.27) 자의적 지배 상황에서 내가 종속되는 이유는, 다른 인격체가 내리는 명령의 자의적 지배력(sway, 동요)에 나 자신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합법적, 비-자의적 지배 상황에서 내가 종속되는 이유는, 나를 자의적 지배에서 "면역"(immunize)시키고자 하는 비인격적 절차의 통제에 나 자신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만일 페팃이 말하는 것처럼 법치가 자의적 권력에 대한 나 자신의 "면역력"을 구성하는 규칙의 체계라면, 이 같은 결과는 비-자의적 권력의 지배를 통해서 달성되며, 이 권력 앞에서 비인격적 권력에 대한 나의 객관적 "불안전(성)"(insecurity)은 이 권력이 자의성으로부터 나의 주관적 "안전(성)"(security)을 제공해 주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증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법치는 "자가면역적"(auto-immune) 과정에 무방비상태다(open, [병균 등에 전염될 우려가 있다]).28) 마키아벨리에게서 정치적 통일성과 사회적 불화(discord)의 우위 부패(corruption, [타락])에 관한 그의 복합적 담론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법이 법-하부적이고 법-상위적인 질서 확립에 의존적이라는 점을 비범하게 의식하고 있다.29) "사람들이 선량할 때인 탄생기의 공화국[에서 형성된 법과 질서]은, 사람들이 사악하게 된 후에는 더 이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법은 도시의 사태에 따라 변화할 수 있지만, 질서는 결코 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이는 새로운 법을 불충분하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고착된 채로 남아 있는 질서가 그 법을 부패시키기 때문이다."30) 이 문구가 유창하게 보여주듯, 정치적 연합의 구성원이 타락하는 것은 그 아래서 그들이 살아가고 그들을 "사악하게" 만드는 법적 질서의 불변성과 안정성 바로 그 자체 때문이다. 부패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직접적 이익 추구가 공동체의 주장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자마자 후자를 무시하는 우리의 자연적 성향"31)이 아니라, 현존하는 적법한 질서와 법의 보호 및 외피 아래서 구성원들 간의 불평등이 증가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키너와 페팃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지적했듯, 부패라는 현상은 자유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며, 이는 비-간섭으로서 자유라는 이들의 개념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비장의 수로서 권리를 역설하는 것은 … 우리가 시민으로서 부패했음을 공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비합리성의 자기파괴적 형태를 껴안는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러나 만일 부패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설명이 맞다면, 고전적인 "공민적 공화주의"(civic republicanism)는 이 문제를 극복하는 데 자유주의보다 나을 게 없는데, 왜냐하면 국가의 법질서로 형상화되는 "공공선"(common good)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애국주의")과 "공민적 덕"(civic virtue)에 대한 호소는 애초에 부패를 낳는 형태들을 뒷받침할 뿐이기 때문이다. 법치와 비-자의적 지배의 내적 관계를 인지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법치가 (그에 대한 충성을 유발하는 데 필요한 "공민적 덕"과 "애국주의"를 알맞게 복용하거나 하면) 지배로부터 자유를 성립시키는(constitute) 데 충분하다는 환상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질서에 대한 법의 의존과 여기서 초래되는 자유에 대한 해로운 효과에 관해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비-지배로서 자유는, 질서 보장보다 질서 변화의 우선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비-지배로서 자유는 질서에 대한 저항을 실행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 무질서와 불화, 분쟁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것과 연관된다. 역으로 이는 공민적 덕의 경건함에는 거의 쓸모가 없는 정치적 (변)덕(變德, virt )이라는 관념을 불러들인다.33) 마키아벨리는 법적 지배를 정치 질서의 고착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비-지배를 정치 질서의 비판 심지어 혁명의 함수로 생각할 수 있다. 무질서, 불일치(disagreement), 그리고 갈등은 사회와 정치에게 생산적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도시에는 두 가지 상이한 기질이 발견되는데, 이는 인민이 귀족의 명령을 받거나 지배받지 않기를 바라며, 귀족은 인민을 명령하고 억압하길 바라는 데서 초래된다. 이 두 가지 구별되는 욕구에서 세 가지 중 하나의 결과가 도시에 발생한다: 군주국, 자유[공화국], 방종[무정부상태]이 바로 그것이다."34) 사회적 갈등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재평가가 근대 정치 사상의 발전에 미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첫 번째 주요 혁신은 사회적 분할이 정치적 통일성보다 일차적이라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연합(과 따라서 사회)의 실존은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관계에 근거하는 것이지, 협력의 이성적 관계에 근거하지 않는다. 동의가 아니라 적대가 사회적 유대의 본질이다.35) 두 번째 주요 혁신은 마키아벨리가 사회적 적대에 부여한 성격에 있다. 왜냐하면 만일 적대가 단지 서로를 통치하려는 데 관심을 갖는 행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면, 이 같은 적대는 도저히 사회적 유대를 낳을 수 없고 그 대립물 곧 사회의 퇴락을 낳을 것임을 (최소한 플라톤 이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반론은 마키아벨리의 사회적 적대 개념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인민과 귀족은 자연적(natural, [타고난]) 부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누구건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귀족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고, 누구건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인민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동일한 개인이 다른 시점에 다른 입장을 점할 수도 있다. 소수자가 인민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다수자가 귀족처럼 행세할 수도 있다.(『로마사 논고』에서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국의 역사 및 로마 제국으로의 이행에서 이 같은 양 쪽의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더욱이 비-지배를 욕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일의적일 필요도 없다. 인민과 귀족은 완전히 차별적인 항이다.36) 따라서 일차적인 사회적 갈등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지에 관한 다툼으로 환원할 수 없다. 사회를 관통하는 갈등은 헤게모니 투쟁, 즉 장차 누가 통치할 것인가 에 관한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를 원하는 이들과 비-통치를 원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귀족과 귀족이 아닌 자들의 목적을 검토해 보면, 전자에게는 지배하려는 강한 욕망을, 후자에게는 단지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7)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통일성의 가능성, 따라서 정치적 통치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것은 통치라는 문제에 관한 필연적인 사회적 분할의 실존, 곧 누가 통치할 것인가 가 아니라 도대체 통치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 여부, 그리고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 라는 질문에 관한 필연적인 갈등의 실존에 의거해서다. 이 질문이 열려 있는 한, 사회적 유대는 실존하고 갈등적 유대로 남는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이들이 통치하길 원하거나 아무도 [통치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사고하는 데서 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홉스)과 "공평한 협동 체계"(롤스)라는 대립적이지만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억측들 중 하나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이 질문이 열려 있고 사회가 실존하는 한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로지 정치에 의해서, 그리고 정치로서만 제시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정치는 "공공선"이라는 상상의 초점(focus imaginarius, [실존하지는 않지만, 현실의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지향점.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 예컨대 '신'이나 '영혼', '자유' 등이 대표적 예])을 상실한다. 지배하려는 욕망과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 사이의 모순이 제3의 매개항으로 해소될 수 없으므로, "일반적" 또는 "공통의" 이익이 사회 안에 실존하여, 그것을 따를 수 있는 "적절한 법적 체제"에 원리적으로 분쟁불가능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38)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근대 국가는 지배와 비-지배 사이의 갈등에서 제기되는 요구에 대답하고자 하지만, 이는 오로지 그리고 항상 부분적이고 우연적인 응답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국가의 통치와 정치적으로 다툴지를 국가가 맡아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39) 차라리 국가가 더 잘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국가 안에 항상 이미 투여되어 있는 통치에 대한 분쟁가능성에 더 잘 응답할 수 있을 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 질서의 혁명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정치 질서 설립의 가능성을 조건짓는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근대 정치의 일반 원리를 제출하는데, 이에 따르면 어떤 정치 질서건, 그것이 구성/입헌되고(constituted) 정당화되려면, 반드시 탈구성/입헌(deconstitution)과 탈적법화(delegitimation)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 질서는 스스로의 근본적 우연성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군주론』과 그에 동반되는 근대 국가 이론, 그리고 『로마사 논고』와 그에 동반되는 근대 공화국 이론은 이 근대 정치의 일반 원리에 관한 두 가지 상호보완적 예증이다.40) 시민형 군주(Civil Prince): 자유주의 국가의 계보학을 향하여 일단 이 같은 정치적 통치의 근본적 우연성이 정치적 행위의 지평으로 가정되면, 두 종류의 정치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양 쪽 모두 필수적이고 한 쪽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첫 번째 종류의 정치는 시간을 관통하여 지속하는 국가를 정초함으로써 통치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국가를 '시민형 군주국'(civil principality)으로 규정하는 마키아벨리의 이론은 이 같은 정치를 형상화한다.41) 영속적 국가가 가능한 유일한 조건은 군주가 귀족에 맞서 인민의 편을 드는 것, 그리고 역으로 인민이 국가의 근거가 되어 그 통치를 뒷받침하는 것이다.42) 시민형 군주가 인민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직 자립적인 국가만이 외침(外侵, external war)의 맹격을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43) 여기에는 군주가, 용병과는 대립되는 스스로의 군대를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 수반된다. 즉 군주는 반드시 자신의 인민을 무장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앞서 논했듯 인민은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에 고취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군주의 국가 건설 기획은 극도의 위험을 불러 온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욕망에 무장을 갖춘(whose desire for freedom has been armed) 주체(subject, [신민(臣民), 기체(基體)]), 따라서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주체 위에 국가를 정초하는 것이다. "좋은 군대가 없이 좋은 법률을 가지기란 불가능하고, 좋은 군대가 있는 곳에는 항상 좋은 법률이 있다"44)라는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단언은, "좋은 군대"라는 말로 그가 의미하는 것이 비-지배를 욕망하는 무장한 인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거의 자명해 보인다. 요점은 근대 국가가, 그것을 항상 전복할 수 있는 것 위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군주론』의 역설은, 국가의 기초 자체가 그 혁명적 성격 때문에 그 자체로 국가의 우연성과 불안전성의 원천이 된다는 점이다. 근대 군주 또는 국가가, 그 시작에서부터 (자신과 그 신민에게) "보장"을 제공하는 데 몰두한다는 사실은, 그 근거의 발본적 우연성에서 직접 따라나오는 것이다.45) 마키아벨리는 이 "안전"이 통치 활동을 중단시키지 않고 보장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민형 군주는 스스로를 정초하기 위해, 통치의 실행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상호 보장의 문제로 만드는 국가의 이름이다. 통치의 중단과 대립하는 통치의 보장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시민형 군주국"은 근대 국가의 원(原, proto-)자유주의적 형태가 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위에서 말한 정초의 역설에 대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시한다. [잔혹이] (나쁜 일에 대해서도 '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잘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번에, 스스로를 보장하려는 필연성에서(la necessit dello assicurarsi) 행해질 때다. … 국가를 장악함에 있어 수권자는 그가 행할 필요가 있는 모든 가해행위를 검토해야 하며, 모든 가해행위를 일거에 저지름으로써 이를 매일 되풀이할 필요가 없게 하고, 이를 매일 되풀이하지 않음으로써 인민을 보장하고(assicurare gli uomini) 시혜를 베풀어 인민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 … 이렇게 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손에 항상 칼을 쥐고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새롭게 지속되는 가해 때문에 신민들이 그에게 안심하지 못한다면(assicurare di lui), 결코 스스로를 신민 위에 정초할 수 없을 것이다(fondarsi sopra li sua sudditi).46) 국가와 신민 양 편 모두에 대한 통치의 보장은 세 단계로 달성된다.47) 첫째, 시민형 군주는 잠재적 적수들(rivals)에 맞서 스스로를 보장해야 한다. 이 단계가 설립하는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일정한 영토에 대한 "폭력의 독점"이라 부른 것으로, 근대 국가의 고유한 특성이다. 둘째, 시민형 군주는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 즉 귀족들에게서 나타나는 법-외부적이고 법-하부적인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인민을 보장해야 한다. 페팃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 단계는 사회의 "강자"(powerful)의 지배권력(dominium)으로부터의 보장을 제공한다. 세 번째 단계는 결정적이다. 시민형 군주는 군주 자체에 대해 신민들을 안심시킴으로써, 그들이 국가의 지지대로 행동하게 해야 한다. 페팃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 과업은 국가 자체의 통치권력(imperium)으로부터의 보장을 제공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 마지막 과업을 달성함으로써만 비로소 군주 또는 국가는 본연의 의미에서 "시민적"이 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는 사회의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의 관계에 "시민인륜"(civility)을 가져 왔던 게 될 것이기(will have brought) 때문이다.48) 내가 지금까지 "비-지배적 간섭자"로서의 국가라는 페팃의 관념을 비교해 본 것은, 비-지배로서의 자유가 (특정 사회의 "귀족" 또는 "강자"의 지배권력(dominisum) 및 관료(office-holder)의 통치권력(imperium)이라는 양 쪽의 형태를 취하는) 자의적 간섭의 권력에서 보장하는 것에 불과한지 여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 이 같은 자유를 달성하고자 하는 국가는 적법한 국가 지배의 논리, 즉 마키아벨리의 시민형 군주의 논리에 정확히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아직 공화국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필요조건에는 미달하는 것 같다.49) 내 생각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거둔 가장 중요한 성취는, 시민형 군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과업, 즉 시민 사회(civil society, [문명 사회])의 창출은, 국가 편에서의 체계적 기만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 데 있다. 폭력의 독점을 행사하는 것은, 설사 지배권력(dominium)에 연루된 자들에게 강압을 가해 인민을 편들고자 할 때조차, 신민들을 전혀 안심시키지 못하는 국가의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근대 국가 또는 시민형 군주가 신민을 안심시킬 가망이 있는 "선"의 외양을 스스로 구축하기 위해 "가장(假裝)과 은폐(隱蔽)"(simulation and dissimulation)50)의 경로에 진입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근대 국가는 일찍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장치'라고 불렀던 것이 되어야만 한다.51) 근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요소는, 그것이 행사하는 폭력을 신민들을 위한 권리(right, [정의, 법]), 법적 권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역량에 준거한다. 권리라는 근대적 언어는 사실 통치의 보장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국가 중심적 정치와 분리할 수 없다.52) 도발적으로 제기하자면, "권리를 진지하게 여기는" 것에 가장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는 것은 바로 시민형 군주인데, 왜냐하면 오로지 이 같은 형태 안에서만 그것은, 자기 자신과 신민 모두에게 자신의 통치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처음 두 단계에 행사되는 국가의 권력 독점이 권리의 형태 그것[권리]의 확립이 "시민 사회"를 설립한다 로 스스로를 위장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잊을 수 없는 예증을 제시한다. 나중에 공작[체자레 보르지아]은 이 같은 과도한 귄위(authority, [당국])[귀족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메세르 데 오르코(Messer de Orco)의 친위대(kingly arms)]가 반감을 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지역의 중심부에 가장 뛰어난 재판장이 관장하는 시민 법정을 설치하고, 각 도시의 대표자를 배치했다. … [그리고] 인민들의 반감을 일소시키고 그들을 완전히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제껏 어떤 잔혹이 자행됐다면 이는 공작이 시킨 일이 아니라 그의 대행자의 모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 오르코를, 형을 집행한 나무토막 및 피투성이 칼과 함께 체세나 광장에 전시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본 인민들은 만족을 느끼는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53) 보르지아의 "광경"(spectacle)은 인민과 국가 사이의 상호 보장의 목표가 권리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민들에게 교통하려는 의도를 갖는다.54) 바로 여기에서, 국가를 정초하는 절정의 순간에, 근대적인 정치적 대의제의 온갖 책략을 동반하는 시민적인 최고 법정을 보르지아가 설립하는 것("그리하여 그는 그 지역의 중심부에 가장 뛰어난 재판장이 관장하는 시민 법정을 설치하고, 각 도시의 대표자를 배치했다")의 상징적 중요성이 나온다. 근대 국가에서 상호 보장은 여러 권리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권리의 요체다. 그것은 권리 그 자체의 의미다. 근대 국가에서 권리와 보장 사이의 연관에 관해, 밀은 계발적인 정식화를 제시한다. 나는 줄곧, 피해자에게 머물고 피해로 침해당한(violated) 권리라는 관념을 … 다른 두 요소들이 스스로의 외피로 삼는 형태들 중 하나로 간주해 왔다. 이 요소들은 한 편으로 어떤 지정가능한 인격이나 인격들에 대한 손해이며, 다른 한 편으로 처벌에 대한 요구다. … 이 두 가지 것들은, 권리의 침해를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55) (단지 홉스와 루소, 칸트를 따를 뿐인) 밀의 관념이란, 누구든 개인들의 인격(즉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그들의 동일성)을 침해함으로써 그들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에 대해서 사회가 국가를 통해 모종의 폭력(이나 손해)을 반드시 행사해야 한다는 발상이 권리라는 관념 자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근대적 권리가 근대적 권리인 것은, (사적으로) 강압하는 자를 (공적으로) 강압할 필요, 폭력을 사용하는 자를 침해할 필요 덕분이다. 이 권리의 폭력을 밀은 "법의 힘"이라고 명명했다. 권리와 폭력에 대한 침해(violation of violence, [폭력에 대한 폭력])가 맺는 이 같은 본질적 관계는 데 오르코의 폭력적인 친위대에 대한 보르지아 자신의 침해(violation, 폭력)에 의해 상연되는데(칸은 보다 우아하게 "폭력의 극적 전시"라고 말한다), 전자는 관료의 통치권력(imperim)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만일 신민이 국가에 대해 안심하려면, 시민형 군주는 신민의 편에 서서 [통치권으로부터 신민의 안전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공적 공간에서 피투성이 칼 옆에 전시된 데 오르코의 절단된 신체는, 폭력이 법치 국가(state of right, [권리/정의를 보장하는 국가/상태])56)에 의해 시민적 정치체(body politic)에서 잘려 나갈 것이라는 의미를 상징한다. 그러나 밀의 정식화에서는 가려지고, 마키아벨리의 텍스트에서는 드러나는 것은, (국가가 행사할 "권리를 갖는" 폭력인) 권리의 폭력이 전(前)-합법적인(pre-rightful, [권리/정의를 아직 공인받기 이전의]) 폭력의 사용을 전제해야만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있다"(right itself)는 점, 즉 애초에 "권리"를 낳을 수 있고 이 "권리"의 보호를 위해 국가가 폭력의 이용을 적법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57) 왜냐하면 "권리"의 출현은 전-합법적인 폭력이 스스로에 반해 전도(顚倒)되는 것과 일치하거나 또는 그것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인데, 이는 이중적이다. 첫째, 시민형 군주가 폭력의 독점을 획득하고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봉건 귀족에 대해 수행하는 전-합법적인 폭력적 파괴를 통해서(즉 이 사례에서는, 데 오르코의 "친위대"가 수행한 파괴). 둘째, 국가가 전-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한에서 국가 자체에 대해 수행되는 전-합법적인 폭력적 파괴를 통해서(즉 데 오르코의 처형). 국가의 전-합법적인 폭력을, 국가의 "합법적인 폭력"으로 뒷받침되는 신민들의 권리 형태로 "가장하고 은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국가에 특징적인 "(잘 사용된) 잔혹극"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민형 군주가 폭력을 권리로 어떻게든 변형하려 드는데도, 근대 권리의 설립에 선행하는 전-합법적인 폭력의 흔적은 권리 체계 안에서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 이 흔적의 끈질김은, 근대 법치 국가(state of right)의 두 가지 연관된 특색에서 엿볼 수 있다. 첫째, 비록 근대 법치 국가가 봉건적 귀족성의 파괴를 요구한다손 치더라도, 국가는 지배에 대한 "귀족적" 욕망의 파괴를 함의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없다면 인민들은 더 이상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리 체계는 지배하려는 욕망을 "사적 영역"으로 전환하며, 이 한도 안에서는 모든 이들에게 이 욕망의 추구를 허용한다.(이는 인민들의 기묘한 "귀족화"(ennobling)와 그들의 비-지배에 대한 욕망의 부패를 설명해 준다.) 둘째, 국가는 전-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역량을 항상 수중에 유지하는데, 홉스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이 신민과 계약하도록 두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이 전-합법적인 폭력의 사용에 대한 자연권을 유지하는 시민 사회 안의 유일한 동작주(agent)로 남게 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한 최초의 인물이다. 『군주론』에서 시민형 군주의 분석은, 『로마사 논고』 Ⅰ, 16~18에 나오는 부패와 군주의 도래[확인 요]에 관한 논의와 함께, 근대 국가 또는 시민형 군주가 정의상 "[비-지배로서의] 자유를 되찾으려는 인민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만든다. 평등한 개인적 자유들에 대한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국가는 "명령받거나 억압받지 않으려는" 요구, 인민으로부터 오는 비-지배의 요구를, 마치 그것이 법 앞의 부정적 자유와 형식적 평등에 대한 요구인 것처럼 다룬다. 부정적 자유는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서, 국가가 비-통치의 부정성(negativity)을 부정하는 형태인데, 그 목적은 그것을 하나의 형태, 곧 권리의 형태 국가가 자신의 법적 지배의 도구를 통해서, 즉 "보편적 보장이 포함되는 질서와 법을 만듦으로써" 그것을 보증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시민형 군주]가 우발적으로 이 같은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된다."58)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을 산출하는 것은 중심적 전략인데, 이를 통해 인민에게 비-통치에 대한 욕망의 유사물(simulacrum)을 제공함으로써 국가는 스스로 인민들의 지지를 보장한다. 이 유사물은 시민적 자유와 다르지 않으며, 이를 보장함으로써 국가는 시민 사회의 시민형 군주로 확립된다.59) 근대 공화주의 정치 사상 대부분이, 이 권리들을 보장하는 것이 시민인륜을 달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동시에 주장하면서도, 비-지배로서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담론을 개인적 권리에 대한 담론으로 환원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개인적인 시민적 권리와 "시민형 군주"로서의 근대 국가 간의 이 같은 내적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근대 공화국, 또는 '국가 내부에서 국가를 넘어서는' 근대 국가와 그 시민 사회를 정초하는 기획과는 대조적으로, 근대 공화주의 정치는,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통치의 보장이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라, 차라리 자유를 욕망하는 인민들에게 권력과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비-통치로서의 자유를 정치적 삶에 도입한다는 기획을 갖는다. 정치적 삶에 진입하기 위해서 인민들은 단지 수동적인 법적 기체(subject, [신민]), 국가의 법적 권력의 기초로 기능하는 것을 멈춰야 하며, 통치 업무에 의문을 제기하는 권력을 지닌, 따라서 이 업무를 안전하지 않고(unsafe) 발본적으로 분쟁가능한 사안으로 만들 수 있는, 국가에 저항하는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볼 때, "자유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법은 귀족과 인민의 불일치(disunion)에서 비롯한다."60) 법치가 공화주의적이 되는 것은 그것이 인민 권력에 의거하는 한에서일 뿐이다. 여기서 권력은 비-지배에 대한 욕망의 담지자로서의 인민들이 그것을 통해 국가적 삶에 참여하면서, 적법한 지배의 실행들 곁에서 그를 거스르는 행동과 실천, 그리고 제도와 관련되는데, 전통적으로 [적법한 지배를 실행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입법 권력으로서의) '원로원'의 심의와 (행정 권력으로서의) '군주'(monarch)의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적 법치는, 오직 통치의 심급들과 비-지배에 대한 요구 간의 적대가 법적 지배의 틀 안에 기입되는 조건 하에서만 실존한다. 어떻게 인민의 입장이, 비-지배의 욕망을 타협하여 이를 부정적 자유에 대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설립될 수 있는가? 만일 "인민 권력"이 인민주의적이거나 심지어 민주주의적인 통치 형태와 동일화될 수 없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61) 단순히 국가의 통치에 그치지 않는 정치의 공간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이것들이 바로 『로마사 논고』가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나는 근대 공화주의는 물론 그 혁명적 변종들의 경우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해 제시된 일련의 응답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답은 독창적이며, 근대 입헌주의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즉 인민이 정치적 삶에 진입하는 것은 특수한 제도들을 통해서인데, 이 제도들은 국가 본연의 활동, 곧 통치의 집행(administration, [행정])을 비판한다 즉 그것에 내적 견제(check)를 제공한다. 이 같은 비판 제도의 일반적 정식은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이지만, 이는 오직 그것이 진정한 견제와 균형의 체계로 이해되고 실행되는 한에서, 곧 국가 전체를 인민에 대해서 견제 상태에 놓는다는 관점에서 이 체계에 의해 "정부의 한 부문이 다른 부문의 권력에 저항하고 거스르기 위해 그것에 상당히 능동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을" 때에 한에서다.62) 이 같은 정치적 분쟁의 제도들, 또는 대항-제도들(counter-institutions)은 국가를 분할하여 비-지배의 요구가 발언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63) 마키아벨리는 일련의 충격적인 은유를 제시하여 로마가 공화국이 된 특유한 '형태'를 예시한다. 로마에서 왕을 추방함으로써, 브루투스(Brutus)는 군주제적 정치체의 '머리'를 베어 내고, 이로써 지배(archy)가 더 이상 유일한(mono)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을 것임을 신호했다. 인민 및 인민의 통치에 대한 불화를 위한 장소가 정치적 삶 안에 열린 채로 남겨 진다. 공화국이 시작되는 것은 인민들을 정치적 삶으로 진입시키는 대항-제도들, 예컨대 호민관(護民官, tribunate) 등에 의해 일단 이 같은 불화가 대표(represent, [재현/상연])되고, 이로써 로마에게 또 다른 "심장"(라틴어로 cor, cordis, [그런 점에서 보면 'dis-cord'는 서로 다른 심장들이 어긋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을 주어 원로원의 나머지 심장과 항상 불협화하고(dis-cordantly) 결코 화합하여(in unison) 뛰지 않게 만들 때다.64) 머리가 없는(acephalic, 無頭的) 정치체의 이 두 심장은 공화국에서 노는 두 개의 욕망, 두 개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이 같은 불화(dissensus)는 정치적 삶의 비-일의성(non-univocity), 공화주의적인 정치적 삶이 국가의 선("공공선"(common good))을 그 내적 목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실효적인 '공적 자유'의 실행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65) 로마 공화국 역사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재구성은, 리비우스(Livy), 살루스티우스(Sallust), 그리고 키케로(Cicero)의 영향 하에 [로마 공화국 역사를] 친(親)원로원적으로 읽는 흐름을 체계적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이는 국가 안에서 인민의 비-지배에 대한 욕망을 대표하는 대항-제도의 역할을 강조한다.66) 이 같은 대항-제도의 모범적(paradigmatic) 전형은 호민관이다. 마키아벨리 이전까지 호민관의 창설은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하는 혼합 통치(mixed government)의 이상이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이해를 고려하되 이를 넘어서면서, "인민 행정관에게 통치의 몫을 주는 것 외에도 [호민관은] 로마 자유의 수호자로 구성(constitute)되었다"67)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치적 자유는 국가의 통치를 집행하는 활동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국가의 시각에서 보자면, 호민관은 인민의 일부를 통치의 집행에 추가함으로써 단지 국가 형태를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의 시각에서 보면 호민관은 비-통치로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의 법적 통치 기계를 분해한 것이다. 호민관은 다른 모든 대항-제도들처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법치를 관리하는 국가 장치 안에 기입한다. 호민관의 "힘"(force)은 본질적으로 법이나 행정관의 통치, 즉 국가의 통치권력(imperium)의 통치에 대한 요구를 거부(veto)할 수 있는 권력에 있다. 폰 프릿츠(Karl von Fritz)가 로마 공화국의 이 제도를 분석하면서 보여 주었듯, "호민관이 가진 거부권의 증가는 … 공동체에 부정적 권력들의 과잉을 허용했는데, 그에 견줄 만 한 것은 역사상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거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다."68) 만일 국가 제도가 국가 자체를 비-지배를 추구하도록 "강제"(force)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직 "부정적 권력의 과잉"이라는 형태 아래서만 가능하다. 호민관과 다른 대항-제도들을 통해 정치 형태는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을 실효적으로 내부화하고 자기-견제적이 된다. 이 같은 대항-제도들은 합헌성(constitutionality)의 한계에 위치하면서, 이 한계들을 탈주선(lines of flight)으로 다시 긋는 데 기여한다.69) 엠마뉴엘 레비나스(Emanuel Levinas)의 힘 있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들은 '국가 내부에서 국가를 넘어'(au-del de l' tat dans l' tat)선다.70) 대항-제도들은 정치적 삶의 공화주의적 양식을 구성하는 비-지배로서의 자유의 목소리와 법치의 목소리 사이의 근본적 불화를 표현한다. 정치적 평등, 시민적 평등, 그리고 혁명의 문제 국가의 대항-제도들은 적법한 지배와의 불화를 정치 형태 안으로 내부화한다. 국가에 대한 그것들의 비판은 국가를 자기 자신에 대해 거역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국가 제도들로 머무는 한에서, 대항-제도들은 국가에 대해 외부적 입장에서 국가 전체와 다툴 수는 없다. 하지만 인민 권력 안에는 국가 전체와 다투고, 대항-제도들이 인민에게 부여한 국가 안에서의 참여에서 스스로를 철수시킴으로써, 근대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안정적 지지대를 제거하는 힘이 남아 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 근대 공화주의 전통은 혁명이라고 말한다.71) 이 전통에서 비판과 혁명의 구별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응한다. (법 제정의 공평함, 법 아래서 평등한 보호, 그리고 정당한 법 절차(due process, [미국 헌법 제 5조, 제 14조에 나오는 표현])로 이해되는) 법 앞의 평등을 국가가 아무리 효과적으로 유지한다 하더라도, 이 같은 평등은 질서와 법의 변치 않는 적용이 불평등과 지배의 효과를 낳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의 작업이 보여주듯, 이는 근대 법의 발전에서 상당히 일찍 직관되었는데, 왜냐하면 법 앞의 평등이 개인적 자유에 대한 권리(예컨대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로 정의되고, 이 같은 권리가 경쟁적인 것에서부터 착취적이고 차별적인 것에 이르는 실천들을 재가(裁可)하기 때문에, 배타적이고 엄격하게 형식적 평등을 고수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낳는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72) 승리의 전리품이 삶의 재생산 조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법 앞의 형식적 평등으로 보호받는 실질적 불평등은 지배와 예속의 새로운 관계를 뒷받침하는데, 이는 계급차별주의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에서 초래되는 이른바 "하위적"(subaltern) 인구들이 시민 사회 내부에 계속 실존한다는 점으로 분명해진다.73) 게다가 법 앞의 평등을 정의하는 형식적 권리들은 법에 종속된 이들과 법치 자체 사이의 불평등을 성립시킨다, 즉 이 권리들은 문제삼고 위반하며 새로운 규칙(rule)들을 창안(author)하는 능력보다는, 규칙에 대한 순응과 복종의 습관이라는 특징을 갖는 주체성의 형태를 불러일으킨다. 법적 소송지상주의(litigiousness)의 증가는 법적 통치 체계에 대한 정치적 순응주의의 증가에 상응한다. 하버마스가 정확하게 지적하듯, "기본권이 우리가 오늘날 법적 주체의 사적 자율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오직 이 주체들이 서로를 법의 수신자(addressee)라는 역할로 상호인정하고, 이와 함께 서로에게 지위 이것에 기초하여 그들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74) 그러므로 법 앞의 평등을 정의하는 권리들은, 법의 "수신자"로서의 그들에게 적용되는 법을 "창안하는 자들"(authors)로서 만인이 [갖는] 평등을 도저히 확립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을 창안함에 있어서의 평등이 없다면 "정치적 타율성(他律性, heteronomy)이라는 특징을 갖는 '법치'의 온정주의를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법의 수신자들이 법질서가 자신들에 의해 창출됐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정치적으로 자율적인 입법 행위에 참여하는 한에서다."75) 비-지배로서의 자유의 이상은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개인들 간의 주종 관계를 제거하는 것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이상은, 만인이 저 합법적(legal) 통치 체계, 저 적법한 국가(state, [상태]) 각자가 다른 개인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의 평등한 "노예들"이 되게 할 가능성 역시 제거할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법의 표면 아래에서 발생하는 불평등들을 시정하기 위해 법 앞의 형식적 평등 즉 시민적 평등을, 그 앞에서 시민들이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을 창안할 수 있는 만인의 평등 즉 정치적 평등과 구별하되, 그에 응답할 수 있게 만들 것을 제안한다. 비-지배로서의 자유는 시민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평등을 요구한다. 이 근본적 지점에 관하여 대부분의 후대 공화주의 정치 사상가들은 마키아벨리를 좇는다. 이 때문에 예를 들어 트렌차드(John Trenchard)는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내적 관계를 확인하면서, "어떤 사람도 스스로 만든 법을 위반하지 않은 이상 투옥될 수 없다."76)라고 말한다. 루소는 간결하게 "인민은, 그가 법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법의 창안자여야 한다."77)고 말한다. 일단 양자의 차이가 확립된 다음에는, 혁명의 문제는, 법을 창안하는 정치적 평등은 법 아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 그것은 시민적 평등의 일종인가 아닌가 여부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다. 구성/입헌된 법은 법적 주체를 단순한 "수신자"와 대립되는 법의 "창안자"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누군가를 법의 창안권(authorship)을 행사하는 위치에 놓는 자유와 권력은, 구성/입헌된 법에 의해 정치적 권리의 형태로 주어질 수 있는가? 근대 공화주의의 중요한 조류들의 경우,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는 것 같다. 이 대답 배후의 일반적 가정은, 법의 "창안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법자"(legislator)가 되어야 하고, 입법행위가 법치의 요구 조건 아래 있는 법적으로 설립된 실천이기 때문에, 법은 오직 법의 매개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창안"될 수 있다는 것이다.78) 하버마스는 이 점을 이렇게 말한다. "시민들이 공동입법자의 역할을 점할 때 그들은 매개 오직 그 안에서만 그들의 자율성이 실현될 수 있다 를 더 이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그들이 입법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 주체로서다. 그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게 될지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의 재량이 아니다. 자기입법이라는 민주적 관념은 반드시 법 자체의 매개를 통해서 그 타당성을 획득해야 한다."79) 이 시각에서 보자면, 인민이 권력을 갖는 것은 입법 과정에의 참여라는 그들의 "정치적인 시민적 권리"를 행사하는 한에서다. 이 정치적 권리가 시민적 권리의 일종이며 따라서 법치에 속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는 "사적인 시민적 권리"를 요구하는데 이것이 정의하는 것은 "개인적 권리의 담지자로서 자발적인 시민의 연합에 속하고 필요할 경우 실효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적 인격(legal person)의 지위다. 법적 인격 일반의 사적 자율성 없이는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80) 만일 인민의 구성/입헌 권력이 오로지 법치가 보장하는 정치적인 시민적 권리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이 같은 권력은 단지 구성/입헌된 법의(최종심에서 합법적 구성/입헌의) 가정일 수 있을 뿐이며, 그것에 대해 외부로부터 다툴 수 없다. 결국 법의 "창안권"은 구성/입헌된 법을 변경하거나, 심지어 합법적 헌법(legal constitution)을 수정할 권력은 포함하겠지만, 법적 통치 체계를 혁명화할 권력은 포함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 중에서도,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 그리고 루소에게서, 정치적 평등이 반드시 법 아래 놓여야 한다는 주장을 문제삼는 다른 논증의 윤곽을 그려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법의 "권위"와 법의 "창안권"이라는 문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인민 권력과 그 정치적 평등이 법을 "창안"하는 것은, 입법자의 관직으로서의 입법 권력이 법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후자가 법을 만드는 것은 "법 자체의 매개를 통해서"이며, 법이 "권위를 갖는"(authoritative)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는 법치나 법 앞의 평등의 원리에 부합하여 입법해야만 한다는 것은 별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입법권은 일차적으로 "시민적 권리"이며, 좀 더 한정하자면 "정치적인" [시민적 권리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해하면 이 점은 법의 "권위"가 법 자체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라는 앞서의 직관을 단지 상세하게 설명할 뿐이다. 법적 권위의 본질에 관한 이 같은 직관은 다른 직관과 분리될 필요가 있는데, 그에 따르자면 인민 권력이 표현하는 것은, 입법 활동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의미에서 법을 "만들"거나 "창안"할 수 있는, 시민적이 아닌, 정치적 평등이다. 혁명적인 인민 권력은 법에 기여할(make for) 수는 있지만(그것은 구성/입헌 권력이다), 그러나 입법할 수는 없다.(그것은 구성/입헌된 권력이 아니다.) 정치적 평등의 법-외부적 차원에 관해 사고하는 한 가지 방법은, 법치의 조건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된다. 내가 위에서 주장했듯, 법은 법 자체만을 수단으로 해서는 결코 그 상황을 통치하는 데 이를 수 없으며, 오직 지배 관계를 수반하는 통치의 다양한 실천들을 통해야만 한다. 법이 스스로를 이 같은 위치에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힘의 불평등 그것의 조절이 허용하고 뒷받침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을 창안하는 정치적 평등은 쟁취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인정 투쟁에서 힘 관계의 역전을 필요로 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듯 "사람들의 기록을 검토함으로써" "어떤 공동체에서든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주 점검해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81) }} 이 같은 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의 원리는, 불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되게 할 것이며, 평등한 것은 불평등하게 되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82) 법을 창안하는 정치적 평등은 결코 "시민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 같은 투쟁은 항상 폭력적(이며 때로는 비-폭력적)인 박탈(expropriation)의 요소를 동반해 왔다.83) 만일 정치적 정의에 대한 고전적 이해, 곧 누구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불평등한 것은 불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논리에 따르자면,84) 정치적 평등을 위한 근대 공화주의의 투쟁은 불의하게(unjust)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고전적 이해가 (평등하게, 즉 법에 따라 대우받을 필요가 있는 평등한 이들인) "시민"과 (불평등하게, 즉 법에 준거하지 않고 대우받을 필요가 있는 불평등한 이들인) "노예" 간의 근원적이고 필수적인 분할을 전제하고 오직 그 맥락 안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반면 마키아벨리 및 근대 공화주의 전통에서 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은 다름 아닌 "시민"과 "노예"의 분할을 주제화하고 폐지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노예, 식민지인, 배제된 자 등) 이전에 "불평등한 이"들에 의해 (시민, 식민지배자, 특권세력 등) 이전의 "평등한 이들"을 박탈하는 순간/계기(moment), 즉 "불평등한 이"가 "평등한 이"를 대체하는 또 그 역의 현실적 가능성은, 모든 정치적 질서가 필연적으로 부추기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불평등에 선행하는 만인의 보편적 평등에 대한 상호인정만을 겨냥한다. 이 때문에 정치적 평등을 위한 혁명적 투쟁은 스스로를 완전히 전도하지 않고서는 정치 질서나 합법적 지배의 원리(原理, principle)가 될 수 없다. 공화주의적인 혁명은 순간/계기(moment), 유한하고 되풀이 (불)가능한(iterable)85) 순간/계기 이상은 결코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영속성의 유혹에 굴복한다면, 만일 비-통치의 "국가/상태"(state)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와 모순을 겪게 될 것이며, 인민 권력도 유지하지 못하고 법치도 설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평등을 위한 순간적/계기적 투쟁에서 체험되는 만인의 보편적 평등은, 근대 법이 법 앞에서 선 만인을 평등하게 대우할 수 있기 위한 조건으로 전제하는 평등이다. 법이 각자를 "법 앞에 평등한 이들"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법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만인의 평등이 법에 선행하여(prior) 인정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 법이, 그 힘과 독립적으로 그것이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인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 때 박탈했다가 이제는 박탈당하는 이들, 마찬가지로 한 때는 박탈당했다가 이제는 박탈하는 이들 양 쪽 모두를 장악할 수 있는. 법 "앞의"(before) 정치적 평등이 법 아래의 시민적 평등을 만든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마키아벨리, 그리고 또한 스피노자나 루소처럼, 자신의 공화주의적 통찰을 발전시켰던 이들에게 있어서, 법을 만드는 만인의 정치적 평등은 그 자체로는 법적 또는 헌법적으로 예정될 수 없다. 그것은 합법적 질서와 정치 형태를, 그것 외부에 머무는 기원에 개방하는 평등이다. 마키아벨리가 혁명적 사건을 '시초로의 회귀'(return to beginnings)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어진 법적이고 정치적인 질서를 그 시초로 회귀시키는 운동은 혁명의 운동이다. 혁명에서 법적 질서는 법-외부적인 시초로 되돌려진다. 아렌트가 지적하듯, "새로운 정부를 구성/입헌하기 위해 모인 이들 자체는 위헌적(unconstitutional)이다, 즉 그들에게는 그들이 나서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할 권위가 없다."86) 아렌트가 의미하는 것은 혁명에서 인민들은 권력은 갖지만 권위는 결여한다는 것이다. 구성/입헌 권력은 법적 권위, 구성/입헌된 권력의 토대가 아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하듯, 이 같은 시초로의 회귀 또는 혁명을 통해 "만약 이들 공화국이 스스로를 갱신하지 않는다면 지속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87)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민 권력에서 발견되는 외-합법성(extra-legality), 권위의 부재는. 법의 권위와 모순되기는커녕. 그것의 가장 중요한 자원임에 틀림없다. 인민 권력과 법의 권위 사이의 차이를 지키는 것은 공화주의적인 정치적 삶에 특징적인 자유와 질서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 필요조건이다. [나는 혁명적인 "인민 권력"의 순간적/계기적이지만 되풀이 (불)가능한 회귀를 요청하기 위해서 "법의 권위"가 어떨 필요가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자 한다.] 1) Pettit, Republicanism, 24.본문으로 2) 위의 책, 31.본문으로 3) 위의 책.본문으로 4) 위의 책, 36.본문으로 5) Arendt, "On Violence," 139.[국역: 이후, 1999]본문으로 6)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Virginia Declaration of Rights의 2조에서처럼,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귀속되며, 따라서 인민에게서 유래한다.” 인민 권력은 개인을 “평등하게 자유롭고 독립적”(1조)이라고 정의한 데서 직접 따라 나온다.본문으로 7) Hannah Arendt, On Revolution (New York: Penguin, 1963), 30.[국역: 한길사, 2004] 아렌트는 이소노미아(isonomia, 시민 동권(同權))라는 그리스적 이상을 번역하기 위해 “비-통치”(no-rul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그녀가 해석하는 것처럼, 이 용어는 본래 “통치하려는 것도 통치받으려는 것도 아닌”(위의 책, 285) 욕망을 의미했다. 다른 곳에서 그녀는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평등한, 즉 사실상 통치권(rulership)의 원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정치체”(위의 책, 172)에 관해 말한다.본문으로 8) Arisotle, Politics 1287a15.[국역: 박영사, 2006]본문으로 9) 근대 공화주의가 “혁명적 공화주의”인 이유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David Wootton, ed. Repulicanism, liberty, and commercial society, 1649~1776 (Standford: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94) 기고문들을 보라.본문으로 10) 하버마스는 이 긴장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근대 자연법 이론들은 적법성(legitimation) 문제에 답하기 위해, 한 편으로 인민 주권 원리에, 다른 한 편으로 인권이 보장하는 법치에 준거해 왔다. … 확실히 정치 철학은 인민 주권과 인권 사이의 균형을 실질적으로는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 양 쪽 관념이 갖는 직관적으로 그럴 듯한 공근원성(共根源性, co-originality)은 중도포기된다. J?rgen Habermas, "On the Internal Relation between Law and Democracy," in The Inclusion of the Other (Cambridge: MIT Press, 2001), 258.본문으로 11) Pettit, 앞의 책, 36.본문으로 12) Ronald Dworkin, Law's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110~111.[국역: 아카넷, 2004] 이 책의 제목이 독자들에게 일으킬 법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드워킨이 이 책 어디에서도 “제국”이라는 개념, 즉 “법의 힘”, “통치”의 문제를 “법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연결시켜 논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 보면 재미있다. 이 제목 자체는 해링턴(James Harrington)의 “인간이 아닌 법의 제국”에 출전을 둔다.(Harrington, Commonwealth of Oceana, 20)본문으로 13) 내가 사용하는 것은 하버마스의 어휘인데, 그는 법치를 사고함에 있어 사실성(facticity)과 타당성(validity)의 내적 관계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한 가장 최근의 인물이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은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의 긴장인데 … [이는] 평균적인 법 수용을 보장하는 법의 강압적 힘과, 통치 자체의 적법성 주장을 최초에 옹호하는 … 자기입법이라는 관념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난다.”(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39.[국역: 나남, 2000])본문으로 14) Michael Oakshott, On Human Conduc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143.본문으로 15) 위의 책, 141.본문으로 16) 스피노자가 말하듯, “협약(agreement)의 타당성은 그 유용성에 의존하거니와, 그것이 없으면 협약은 자동 무효가 된다. 따라서, 만일 다른 이가 약속을 어겼을 때 그가 이로움보다 더 많은 해로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가 자신의 약속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점이 특히 적절한 것은 국가의 구성/입헌을 고려할 때다. … 따라서, 비록 인간들이 모든 성실함의 표지를 동원해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맹세한다손 치더라도, 그 약속이 다른 무언가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선의를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Spinoza,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Cambridge: Hackett, 2001], ch. 16, 176)본문으로 17) 물론 의심스러운 가정이다. 법이 스스로를, 그것을 통해 폭력과 전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법을 해석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서 전쟁과 자유의 관계라는 복잡한 질문을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전쟁과 폭력의 추구에 법이 어떻게 기능적인지를 보여주는 다른 논의로는, Walter Benjamin, "Critique of Violence," in Selected Writings. Volume Ⅰ 1913~1926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236~252.[국역: 자크 데리다,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2004 中 부록(139~169)]; 그리고 Michel Foucault, "Il faut d?fendre la soci?t?" (Paris: Gallimard, 1998).[국역: 동문선, 1998]본문으로 18) 예를 들어, 심판이 하는 것처럼, 경기 중 축구 규칙의 적용을 확인하는 것은, 축구 경기를 하는 것, 즉 축구 규칙을 따르는 것과 같지 않다. 축구 규칙을 적용할 때 심판들이 따르는 (축구 규칙 이외의) 다른 규칙 체계가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축구 심판들을 위한 이 “게임의 규칙”은 이를 다루는 별도의 심판을 필요로 할 것이고, 이는 또 다른 규칙 체계에 준거할 것이어서,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심판들이 다른 규칙(lex, 렉스, 법률로서의 법) 체계가 아니라, 무엇이 “옳”고 “정의로”우며 “선한”가(jus, 유스, 정의로서의 법)의 개념 체계에 호소함으로써 판정(ruling)을 내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이 같은 개념이 통치(ruling)의 특성을 변경하겠지만, 통치라는 활동의 종류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가 정의라는 문제와 내적인 관계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이는 통치와 규칙을 따르는 것 사이의 원리적 구별에 반하지 않는다. 덧붙여, 통치의 법(jus)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법률(lex)(게임의 규칙)에 대해 내적인가 아니면 외적인가 여부에 관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통치와 법률(lex)이 이질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인 다음에야 비로소 결정지을 수 있다.본문으로 19) Carl Schmitt, Political Theology (Cambridge: MIT Press, 1988), 13.본문으로 20) 위의 책.본문으로 21) “어떤 형태의 질서도, 어떤 합리적인 적법성이나 합법성도 보호와 복종 없이 실존할 수 없다. ‘보호한다 고로 복종한다’(protego, ergo obligo)는 국가의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다. 이 문장을 체계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정치 이론은 부적합한 단편에 머문다. 홉스는 이를 가리켜 … 그의 Leviathan[국역: 삼성출판사, 1990]의 참된 목적이라고 말했다.”(Carl Schmitt,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52.[국역: 법문사, 1992])본문으로 22) Schmitt, Political Theology, 13.본문으로 23) 위의 책.본문으로 24) 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New York: Vintage, 1979), 222.[국역: 나남출판, 2003]본문으로 25) 페팃이 법치와 비교하는 것은, 간섭하지만 지배하지 않는 “자연적 장애물”이다.("The Domination Complaint, NOMOS, 24에 수록 예정) 그는 또한 법치를 “비-의도적인 방해”라고 지칭한다.본문으로 26) “그러나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인민의 복리가 최고법인 주권 국가에서는, 모든 사안에서 주권적 권력에 복종하는 이는 신민(subject)이라고 불려야지, 자신의 고유한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노예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Spinoza,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ch. 16, 178]본문으로 27) Pettit, "The Domination Complaint," 12.본문으로 28) 정치에서 면역과 자가면역의 논리에 관해서는, 일단 Jacques Derrida, Voyous (Paris: Galil?e, 2003).본문으로 29) 마키아벨리의 “위대한 독창성은 탈적법화된 정치의 연구자라는 데 있다”는 포콕(John Greville Agard Pocock)의 단언은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J. G. A. Pocock, The Machiavellian Momen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163)본문으로 30) Machiavelli, Discourse on Livy, Ⅰ, 18.[국역: 한길사, 2003]본문으로 31) Quentin Skinner, "The republican ideal of political liberty" in Machiavelli and Republicanism, eds. Bock, Skineer and Viroli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304.본문으로 32) 위의 책, 308. 또한 Pettit, Republicanism, ch.8, 곳곳을 보라.본문으로 33) 마키아벨리와 “공민적 인본주의”의 거리에 관해서는, Harvey Mansfield, “Bruni, Machiavel et l'humanisme civique," in L'enjeu Machiavel, eds. G?rald Sfez and Michel Sennelart (Paris: PUF, 2001), 103~121. [역주] 'virt?'를 ‘(변)덕’이라고 번역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주지하듯 virt?에 대당하는 것은 'fortuna'(운, 운명)인데, 『군주론』[국역: 까치글방, 1994] 25장에 나오는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는 유명한 대목 때문에, 또 virt? 자체의 어원(이 단어는 ‘남성’을 뜻하는 라틴어 vir에서 연원한다) 때문에, virt?를 (여성적인 fortuna에 대비되는) 남성적인 덕목, 특히 마키아벨리가 말한 ‘짐승의 덕목’ 중에서도 ‘사자의 힘’으로 해석되곤 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국내의 대표적 해석 중 하나로는 『군주론』에 강정인 교수가 붙인 「부록 2」 195~200pp 및 「역자 해제」를 보라. 그러나 이렇게 되면 virt?와 fortuna의 관계가 상호외재적이 될뿐더러, 마키아벨리의 진의가 잘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명시적으로 문제 삼은 사람 중 한 명이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다. 그는 “참된 “운”은 극단 및 한계의 공백이지만, 그 “머리채를 움켜잡아야” 하는 우연히 마주친 지나가는 여자처럼 등장하는 외부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전적으로 내부이다. 모든 “운”을, 즉 군주라는 개인이 그것으로 그의 감정들을 제어할 수 있는 … 이 내적인 거리, 이 공백, 이 무를(내 자신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이 “취해진 거리의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우의 능력이다(절대로 사자의 힘force이 아니다).”(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새길, p. 190)라고 말하면서, 기존의 virt?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는 말하자면 'virt?-fortuna' 대쌍의 상호외재성을 극복하기 위해 fortuna를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호외재성을 비판하는 다른 방식도 있는데, 그것은 virt?를 ‘남성적인 것’이 아닌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접근에 관해서는 최원, 「마키아벨리, 알튀세르, 페미니즘」(1997)(http://myhome.shinbiro.com/~spinoc의 철학 게시판 4번째 글)을 보라. 지난 호 「책 속의 책」에 소개된 보니 호니히(Bonnie Honig) 역시 유사한 해석을 제기한다. 조금 길지만 관련 대목을 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혹자는 virt?에서 남성적인 윤리를 볼 것이다. “남성”을 뜻하는 라틴어 vir에서 유래한 virt?는, 어쨌거나, 남성적인 장점이며, 마키아벨리와 니체를 비롯하여 이를 칭송하는 이들은, 종종 그것의 강건함을 여성화된 덕목, 여성의 유약함에 나란히 놓는다. 그러나 virt?가 영원히 이 대당에 묶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분란적인 힘이 이 번식력 강한 대당을 고스란히 둘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virt?가 오직 한 가지 형상, 하나의 일의적인 성/성별의 견지에서 식별할 수 있는 남성적(male)이고 남자다운(masculine) 형상에 의해서만 예시된다고 간주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Virt?의 주체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남자다운 남성 전사가 아니라, 여장부(virago) 곧 “사나운 여성”, “회오리바람”, “남자 같은 힘이나 정신을 가진 여성”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되는 인물, 자기 자신 안에서 이 같은 힘과 정신을 남성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지속적인 가능성에 제한을 부과하는 인물이라면 어떻겠는가? virt?가, 과잉과 나머지에 대한 민감함과 함께, 남성적/여성적 따위의 이원적 범주들에 분란과 동요를 일으키는, 이로써 이 범주들의 부적합성들, 한계들, 아포리아들을 지적하는 힘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겠는가? 인간이면서 자연의 힘인 이 여장부, 남성적인 여성은, 아마도 철저히 식별가능하고 범주적으로 확립된 것, 남성적인 전사를 확립하는 범주보다 virt?에 훨씬 적절한 인물일 것이다. 여장부는,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man, [남성])처럼, 전사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마키아벨리의 fortuna처럼 사나운 자연의 힘이며, 회오리바람이기도 하다. 여정부는 마키아벨리의 fortuna보다 덜 철저히 여성화되어 있지만,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은 종종 그렇게 여겨지는 것보다 덜 철저히 남성화되어 있다. 사실, 여성적인 fortuna와 남성적인 virt?라는 묘사를 구조화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성별화된 대당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고 모방적이다.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은 최상의 전반적 장점은 fortuna처럼 될 수 있는 능력, 그녀처럼 변덕스럽고 예측불가능하며 간교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한 남성다움이란 가장 진실된(왜냐하면 가장 거짓되기 때문에?) 여성의 장신구를 교묘하게 쓰고, 장식을 갖추며, 여장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Virt?, 즉 fortuna를 일관되고 잘 후려칠 수 있는 역량은, 그녀 식 게임에서 그녀를 후려치기 위한 재능이다. 비결(trick)은 fortuna보다 더 여성스러운 것, 그녀보다 더 나은 여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virt?적 남성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virt?적 인간의 재능은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선을 건널 수 있는 역량, 보통 사람들이 그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의지다.”(Bonnie Honig,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 p. 16) 또 이 글의 필자인 미구엘 바터도 자신의 책 Between Form and Event: Machivelli's Theory of Political Freedom (Dordrecht: Kluwer, 2000) 2부 전체(pp. 131~215)를 할애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역시 위의 입장과 유사한 그러나 물론 훨씬 정교한 접근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p. 184 각주 52에서 한나 피트킨(Hanna F. Pitkin)을 언급하고 본문에서 이 같은 접근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피트킨은 『군주론』의 역자인 강정인 교수가 virt? 문제를 다룰 때 명시적으로 준거하는 이론가이기도 하다.(『군주론』 p. 216 각주 5 참조) Virt?의 통상적 번역어 중 하나는 ('virtue'의 통상적 번역어로서) ‘덕’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앞서 말한 virt?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실제로 호니히나 바터도 virtue의 통상적인 의미와의 대조를 극대화하기 위해 아예 virt?를 번역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실정이다. 호니히나 바터의 예를 고려할 때, 가장 좋은 번역어는 virtue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그것과 가장 분명하게 대조되는 단어일 텐데, 마침 한국어에는 덕과 대조될 수 있는 ‘변덕’이라는 단어가 있다. 다만 기존 한국어 용법에서 ‘덕’과 ‘변덕’이 대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지는 않으며, 또 virt?를 아무런 장치 없이 바로 ‘변덕’이라고만 옮기면 기존 한국어 용법에서 이 단어가 갖는 부정적 의미에 눌려 마키아벨리의 진의가 잘 전달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두 가지 점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마키아벨리의 virt?를 ‘(변)덕’이라고 번역할 것이다.본문으로 34) Machiavelli, The Prince, Ⅸ.본문으로 35) 벨(Pierre Bayle)이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따라 말하듯, “인간 행동의 참된 원리”가 발견되는 곳은 “기질의 성향, 기존 관습의 힘, 그리고 특정 대상들에 대한 예민함이나 취향에 대해 마음이 [느끼는] 지배적 정념이다.” (Pierre Bayle, Various Thoughts on the Occasion of a Comet [Albany: SUNY Press, 2000], 168~169).본문으로 36) “인민”에 관한 비슷한 개념에 관해서는, Jacques Ranci?re, "Ten Theses on Politics," Theory and Event 5:3(2001), 5번 테제를 보라.본문으로 37) Machiavelli, Discourse on Livy, Ⅰ, 5.본문으로 38) 마키아벨리에 대한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의 해석은, 근대 공화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의 토대에 놓인 인민의 욕망과 귀족의 욕망 사이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는 뛰어난 이점을 갖는다. Claude Lefort, Le Travail de l'œuvre Machivel (Paris: Gallimard, 1972), 472~477를 보라; 또한, 정치적 통일성보다 사회적 분할에 부여된 우선권의 견지에서 근대 공화주의를 재구성한 것을 보려면, Claude Lefort, Writing: the Political Test (Duke University Press, 2000). 욕망들의 이질성이 “공동 이익의 논리” 및 모든 시민들이 기본적인 수준에서 동일한 욕망과 공포를 공유한다는 그 전제와 어떻게 대조되는지에 관해서는, 일단 G?rald Sfez, Machiavel, la politique du moindre mal (Paris: PUF, 1999)을 보라. 사회적 갈등의 일차성의 관점에서 본 공화주의에서의 시민권 문제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시각에 관해서는, Christian Lazzeri, "La citoyennet? au d?tour de la r?publique Machiav?lienne" in L'enjeu Machiavel, 73~101을 보라.본문으로 39) 갈등과 불일치의 일차성이라는 견지에서 정치를 정의하려는 또 다른 시도로는, Jacques Ranci?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를 보라.본문으로 40) 이런 의미에서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마키아벨리의 주저 두 편이 동일한 주제를 두 가지 다른 시각에서 다룬 것이라는 그의 일반적 주장 면에서는 완전히 옳다. 스트라우스(그리고 스트라우스가 세운 일반적 개요를 따르는 예컨대 만스필드 등의 다른 독해들과) 나의 차이점은, 결국 이 두 시각들이 무엇인지에 관한 불일치로 요약된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스트라우스가 오해한 것은 “인민”을 정치적 행위자로 정치적으로 정의하는 비-지배에 대한 욕망이다. 스트라우스에게 있어 이 욕망은 (“귀족”을 정치적 행위자로 정의하는 지배하려는 충동(drive)과 유사하면서도 모순적인) 충동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동의 부재, 무기력, 수동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반면 내가 볼 때, 정치적 질료(matter)에 영향을 주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도입한 이중적 시각은, 이 정치적 질료의 분할된 성격, (지배와 저항의) 기본적 욕망의 이원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는 다기원적(多起源的, equiprimordial)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스피노자(마찬가지로 니체와 프로이트)에게서, 코나투스(conatus,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의 이 같은 내적으로 분할된, 또는 적대적인 성격은 아직 보존된다. 이는 홉스에 와서 상실된다. 홉스는 “귀족적”인 욕망만을 인류에게 “자연적”인 욕망(즉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유일한 욕망)으로 인정한다.본문으로 41) Machiavelli, The Prince, Ⅸ.본문으로 42) “따라서 반드시 명심해 둘 점은, 국가를 장악함에 있어, 수권자는 인민들의 복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하고 인민의 마음을 얻을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nel pigliare uno stato, debbe l'occupatore d'esso assicurare gli uomini e guadagnarseli con beneficarli].”(위의 책, Ⅷ)본문으로 43) “어떤 군주국이든 자신의 군대를 가지지 못하면 안전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군주국은 위기 시에 자신을 방어할 힘(virtue)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운에 의존해야 할 뿐이다.”(위의 책, ⅩⅢ)본문으로 44) 위의 책, XII.본문으로 45) 따라서 군주의 시각에서 볼 때, 정치적 활동의 방향은, 국가가 그 토대에 필연적으로 머물게끔 보장하는 데 전적으로 맞춰진다. “현명한 군주라면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시민들이 국가와 군주를 믿고 따르게 하는 수단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의 책, Ⅸ.본문으로 46) 위의 책, Ⅷ본문으로 47) 이 절의 구조와 논리를 경탄스럽게 해석한 것은 르포르의 Le Travail de l'œuvre다. 하지만 나는 이 단계들에 관해 르포르와는 사뭇 다른 독해를 제시할 것인데, 내가 아래에서 보여줄 것과는 달리 르포르는 “잘 사용된 잔혹”의 논리가 어떻게 근대의 개인적 권리 체계의 논리가 되는지를 보지 못한다.본문으로 48) [역주] 여기서 바터는 ‘미래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법이나 제도, 국가의 정초라는 사건이 갖는 시간적 역설을 부각시키기 위해 데리다가 사용하는 ‘전미래’ 시제(이는 프랑스어에서 영어의 ‘미래 완료’에 해당한다)를 차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위의 책, pp. 196~199를 보라.본문으로 49) "The Domination Complaint"에서 페팃은 마키아벨리의 시민형 군주를 면밀하게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회에서 비-지배를 부과하기 위해 국가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가용 전략이 “무장”, “무장해제” 그리고 “보호”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The Domination Complaint," 10) 이는 시민 군주국의 구성/입헌의 세 단계에 들어맞는다.본문으로 50) “싸움에는 두 가지 방도가 있는데, 그 하나는 법률에 의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거한 것이다. 첫째 방도는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둘째 방도는 짐승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로는 종종 불충분하기 때문에, 후자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군주는 모름지기 짐승과 인간[의 방도] 양 쪽 모두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 군주는 짐승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의 기질을 모방해야 한다. … [여우의] 기질은 잘 은폐하여 숨겨야 하며, 뛰어난 가장자와 은폐자[simulatore e dissimulatore]가 되어야 한다.”(Machiavelli, The Prince, ⅩⅧ)본문으로 51) 이 용어는 알튀세르에게서 빌려 온 것인데, 사후에 출판된 후기 저작에서 그는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또는 시민형 군주의 이론을 사용하여, 국가의 힘이나 폭력을 법적 권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근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의 국가가 어떻게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Louis Althusser, Machiavelli and Us (London: Verso, 1999).[국역: 이후, 2001]본문으로 52) 예를 들어 “공적인 강제력을 갖는(coercive) 법 아래 [살 수 있는] 인간의 권리, 그것을 통해 각자가 자신의 몫을 받을 수 있고 다른 이들의 간섭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근거 짓는 것으로 사회 계약을 정의하는 칸트를 보라.(Kant, "On the Proverb: That May Be True in Theory, But Is of No Practical Use," in Kant, Perpetual Peace and Other Essay [Indianapolis: Hackett, 1983], 72).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안전]보장(security)은 시민 사회의 최상의 사회적 개념이다. … 사회 전체가 거기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인격과 권리, 소유의 보호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개념”(Karl Marx, "On the Jewish Question" in Early Writings [New York: Vintage Books, 1975], 230)이라고 단언할 때, 그는 홉스에서 칸트와 밀을 거치는 근대 권리 관념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직관을 진술했을 뿐이다. 안전은 평등한 개인적 자유에 대한 자유의 한 가운데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모든 것을 하고 수행할 수 있는 권리다.”(위의 책, 229)본문으로 53) Machiavelli, The Prince, Ⅵ.나는 보르지아의 “광경”에 대한 빅토리아 칸(Victoria Kahn)의 독해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보르지아와 아가토클레스가 시민형 군주로서의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을 적법화하는 수단에 관한 하나의 동일한 담론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그녀의 기본적 테제를 전반적으로 공유한다.(Victoria Kahn, Machiavellian Rhetoric, ch.Ⅰ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내가 칸과 다른 점은, 나는 여전히 “광경”을 “극”이나 “수사(학)”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고 말하는 편을 선호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알튀세르의 사뭇 복합적인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a href="#home53">본문으로 54) 나는 보르지아의 “광경”에 대한 빅토리아 칸(Victoria Kahn)의 독해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보르지아와 아가토클레스가 시민형 군주로서의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을 적법화하는 수단에 관한 하나의 동일한 담론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그녀의 기본적 테제를 전반적으로 공유한다.(Victoria Kahn, Machiavellian Rhetoric, ch.Ⅰ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내가 칸과 다른 점은, 나는 여전히 “광경”을 “극”이나 “수사(학)”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고 말하는 편을 선호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알튀세르의 사뭇 복합적인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본문으로 55) Mill, Utilitarianism, 52.[국역: 이문출판사, 2002]본문으로 56) [역주] 영어에서 'state of right'라는 관용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독일어에서 'right'에 해당하는 'recht'와 'state'에 해당하는 'staat'의 합성어인 'Rechtsstaat'는 아주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고, 한국어로는 통상 ‘법치 국가’로 새긴다. 'state of right'라는 표현을 통해 바터는 한 편으로 독일식 표현이 갖는 본래적 의미를 연상시키면서도, 동시에 영어에서 아직 관용구로 굳어지지 않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state'와 'right'의 다의적 의미를 활용하려는 것 같다. 이 표현 전후에 나오는 'right' 역시 독일어의 'recht'와 영어의 'right'가 갖는 여러 의미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본문으로 57) 보르지아의 광경은 베버의 국가 정의에 어떻게 이르는지를 보여주는데,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국가에 선행하는 정치적 연합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Herrschaft]의 관계이고, 폭력의 적법한 사용(즉 적법하다고 주장되는 폭력)에 근거한다.” Max Weber, Political Writ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311.본문으로 58)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Ⅰ, 16.본문으로 59) 여기서 시민형 군주국으로서의 근대 국가에 대한 마키아벨리에 관한 나의 분석은, 스키너(Liberty before liberalism, ch. 2)와 페팃(Republicanism, ch. 1) 양 저자가 제시한 일반적 주장에 수렴하는데, 내용인즉슨 자유주의적인 부정적 자유 개념은, 군주제 국가와 국가 이성(Raison d'?tat)의 이익에 이로운 방향으로 비-지배로서의 자유라는 초기의 근대 공화주의적 개념을 중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내 요점은 공화주의적 개념, 그리고 그 자유주의적 중화와 포섭은 근대의 정치적 삶의 필수적 계기라는 것이다.본문으로 60) Discourses on Livy, Ⅰ, 4. 강조는 필자.본문으로 61) “공화국과 민주주의 또는 다수의 지배 사이의 구별에 관한 미국 혁명가들의 역설은 법과 권력의 발본적 분립, 그리고 양자가 서로 다른 기원과 적법화, 그리고 적용 영역을 갖는다는 점에 대한 분명한 인정에 의거한다.”(Arendt, On Revolution, 166)본문으로 62) Bernard Manin, "Checks, balances and boundaries: the separation of powers in the constitutional debate of 1787," in The Invention of the Modern Republic, 31.본문으로 63) 유사하게, 셸든 볼린(Sheldon Wolin)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순환제(rotation)와 추첨에 대해 “제도화를 전복하는 제도”라고 말한다.("Norm and Form," 43)본문으로 64)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주의의 정식에 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한다: auctoritas in senatu, potestas in populo. 군주제적 정치체의 “머리”에 대한 언급은 『로마사 논고』, Ⅰ, 2에 나오고, 인민을 공화국의 “심장”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위의 책, Ⅱ, 30에 나온다.본문으로 65) 인민, 그리고 비-지배에 대한 [인민의] 욕망의 통합이 정치적 삶에 도입하는 비통치성(unruliness)과 불화(dissensus)는, “시민적” 군주로서의 국가가 부과하고 유지하는 “시민” 사회의 구속(stricture)을 정치적 삶이 초과하게 만든다. 시민적 자유에 대한 정치적 자유의 이 같은 초과를 묘사하기 위해 클로드 르포르는 “야생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셸든 볼린은 “탈주적(fugitive) 민주주의”를 사용한다. 자크 랑시에르에게 있어 “인민이 사회의 부분/몫(part)의 셈에 대한 대체보충(supplement)으로서의 주체, ‘몫 없는 자의 몫’라는 특정한 형상으로서의 주체에 준거하는 한에서 정치가 존재한다.(Ranci?re, "Ten Theses on Politics," 테제 6) 이 주제와 교차하는, 마키아벨리에게서 인민에 대한 또 다른 독해는, John McCormick, "Machiavellian Democracy: Controlling Elites with Ferocious Populism,"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95, n. 2 (June 2001): 297~314.본문으로 66) 이는 로마 정치 사상과 로마의 정치적 현실로의 (차이 속의) 마키아벨리의 “회귀”의 의미에 관한 나의 기본적인 해석적 테제다. 나는 이를 나의 책 Between Form and Event: Machivelli's Theory of Political Freedom (Dordrecht: Kluwer, 2000)에서 길게 옹호했다. 마키아벨리와 로마 정치 사상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이해하려는 최근의 주목할 만한 두 편의 시도로는, Vickie Sullivan, Machiavelli's Three Romes (De Kalb, IL: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96)과 J. Patrick Coby, Machiavelli's Romans (New York: Lexington Books, 1999)를 보라. 불행히도 뒤의 책들이 나왔을 때 내 책은 이미 인쇄 중이어서, 그 테제들을 논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67)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Ⅰ, 4. 본문으로 68) Karl von Fritz, The Theory of the Mixed Constitution in Antiqu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4), 209. 폰 프릿츠가 내린 결론은 “로마 공화국의 정치 질서의 …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행위를 방지하는 부정적 권력들의 과다함으로, 이는 귀족적 귀족제(patrician aristocracy)에 맞서는 평민들의 투쟁 과정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위의 책, 219)본문으로 69) 이 같은 대항-제도들의 또 다른 사례 중 특히 중요하고 복잡한 것은, 농지법(Agrarian Law)인데, 이는 사적 소유의 불평등한 분배를 통해 행사되는 식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본문으로 70) 이 표현의 출처는 Emanuel Levinas, Nouvelles lectures talmudiques (Paris: Minuit, 1996)이다.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는 “인민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헌법이 상반된다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기존 헌법을 변경하거나 폐지할 수 있는 인민들의 권리를 허용하는 공화주의 정부의 근본 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Hamilton, Jay, Madison eds., The Federalist Papers [New York: Penguin, 1987], 78)a href="#home70">본문으로 71)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는 “인민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헌법이 상반된다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기존 헌법을 변경하거나 폐지할 수 있는 인민들의 권리를 허용하는 공화주의 정부의 근본 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Hamilton, Jay, Madison eds., The Federalist Papers [New York: Penguin, 1987], 78)본문으로 72) Christopher Hill, Liberty Against the Law: Some Seventeenth-century Controversies (New York: Penguin, 1996)를 보라.본문으로 73) 롤스적인 정의의 “차등 원칙”을 체계적으로 적용한다손 치더라도 이 상황은 교정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정의의 원리는 승리자가 될 기회를 패배자에게 재분배하기는 하지만, 승리할 역량도, 그렇다고 승리적인 결과도 재분배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누구보다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이 보여준 바대로다.(Amartya Sen, Development as Freedom [New York: Anchor Books, 1999], ch. 3. [국역: 세종연구원, 2001]) 어떤 경우라도, 롤스적인 정의의 차등 원칙은 원죄에 시달린다. 그것이 요청하는 기회의 재분배가 보다 공정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권리와 재화를 행사함에 있어 차별적 조건이 부재하는 한에서다. 즉, 정의의 두 번째 원칙이 작동하는 것은 오직 사회에 인종주의나 계급차별주의, 혹은 성차별주의가 없을 때에 한에서인데, 그러나 후자의 실존이 주어진 상황에서는, 그 원리만으로는 이 같은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본문으로 74)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23.본문으로 75) 위의 책, 121.본문으로 76) Trenchard, An Argument, Shewing, that a Standing Army is inconsistent with a Free Government, and absolutely destructive to the English Monarchy (1697).본문으로 77) Rousseau, The Social Contract, Ⅱ, 6.[국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하버마스는 여전히 이 같은 직관을 반향한다. “법적 매개가 정치적 자율성의 행사를 제도화하기 위해 사용되자마자, 이 [개인적 자유의] 권리는 필연적으로 권능을 부여하는(enabling) 조건이 된다.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들은 입법자의 주권을 제한할 수 없는데, 그들이 그녀의 재량에 놓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다. 권능을 부여하는 조건은 그것들이 구성/입헌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제한도 부과하지 않는다.”(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28). 또한 Habermas, "On the Internal Relation Between Law and Democracy," in The Inclusion of the Other, 260~1을 보라.본문으로 78) 이 점에 관한 논쟁 양상에 관해서는, J?rgen Habermas, "Constitutional Democracy: A Paradoxical Union of Contradictory Principles?" Political Theory, vol. 29, n. 6 (December 2001), 766~781. 그리고 같은 책에 있는 A. Ferrara와 B. Honig의 답변을 보라. 정치적 평등의 역설에 관해서는 일단 Christopher Menke, Spiegelungen der Gleichheit (Berlin: Akademie, 2000)를 보라.본문으로 79) Habermas, "On the Internal Relation,“ 260.본문으로 80) 위의 책, 260~261.본문으로 81)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Ⅲ, 1.본문으로 82) 위의 책, Ⅰ, 26~27; Ⅲ, 21~22.본문으로 83) 마키아벨리는 치옴피(Ciompi) 반란에 관한 유명한 서술에서, 정치적 인정을 위한 투쟁에서 박탈의 논리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설명을 준다. 마키아벨리, Florentine Histori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Ⅲ, 13: “그들이 피의 유서깊음―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을 가지고 당신을 낙담케 하지 말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시초를 가지고 있는 고로, 평등하게 유서깊으며 자연에 의해 하나의 양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를 벌거벗기면, 당신은 우리가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옷을 입히고, 그들에게 우리의 옷을 입혀 보라, 그러며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귀족처럼 보일 것이고 그들은 비천하게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오직 가난과 부유함만이 우리를 불평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인간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유의해 본다면, 당신은 거대한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된 모든 자들이 그것들을 사기나 힘으로 획득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취득의 추함을 가리기 위해, 그들은 그것을 품위 있게 만들기 위해 벌이(earnings)라는 그릇된 제목을 기만이나 폭력으로 강탈한 모든 것들에 적용할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신중함이나 지나친 어리석음 때문에, 이 양식들을 꺼리는 자들은 항상 예속이나 가난에 짓눌릴 것이다.”본문으로 84) “정의는 평등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만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평등한 자들에 대해서만 그렇다. 정의는 또한 불평등인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사실 그것은 만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불평등한 자들에 대해서 그렇기 때문이다.”(Aristotle, Politics, 1280a10).본문으로 85) [역주] ‘되풀이 (불)가능한’이라고 새긴 'iterable' 역시 데리다가 정교화한 표현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법의 힘』, pp. 186~188을 보라.본문으로 86) Arendt, On Revolution, 184.본문으로 87) Machiavelli, Discourses on Livy, Ⅲ, 1.본문으로

  • 2007-02-12

    얼치기 마르크스주의자가 버리지 않은 책, 버릴 수 없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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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즈끼 순류, 『선으로의 초대: Zen Mind, Beginner's Mind』 [%=사진1%]#0. 흔적 없이 "무엇을 할 때는 잘 타는 모닥불처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자신을 완전히 태워 버려야 합니다." #1. 글을 쓰고 싶긴 했는데, 요즘 사춘기 소년과 유사한 고민으로 마음도 어지러운데, 차후에 성장의 기쁨을 느낄 일기장도 아닌, 후회한들 돌이켜 고칠 수도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다. 처음엔 그랬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전 글들을 대충 읽어보았다. 아무래도「책과 나」는 다른 글들보다 실존적인 내용으로 많이들 채워지고 있었다.「갈월동기행」과「서평」사이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글이라면, 보여주고 싶지 않는 내밀 일기의 파편과 약간의 무게감이 절묘한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영 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결국 논리가 보이지 않는 잡상을 이곳에서 채우게 되어 미안하기만 하다. 어지럽다면 나의 지금의 삶에 원인이 있을 것이고,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싶은 나의 '결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나의 '선택'은 『사회운동』과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느낌을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나의 모습이거늘. 솔직하게 말하자. "禪은 나에게는 취미이고, 삶이라고." 그리고 혹시나 궁색한 변명 하나만 더 달자. "이 글을 쓰는 내게 마르크스주의는 알리바이가 아니라고." #2. 내 사춘기의 시작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얼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매우 관념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책을 뒤덮고 있는 '삶의 고통'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헤르만 헤세같이 파릇한 고민으로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의지로 만들어진 세계의 고통을 불행하게도 먼저 맛보았던 것이다. 이후 니체를 읽고 불교와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 지금도 나에게 관념적인 성향이 있다면 불행했던 사춘기에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읽고,『독일 고전철학의 종말』,『공산주의자 선언』등을 읽으면서 미망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나는 꽤나 오랫동안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춘기의 특징은 '향아적(向我的)'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를 향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대학을 처음 들어가던 그 시절도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가 가사에 철철 넘쳐나던 듀스와 서태지의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모 대학의 대동제에서 대중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그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열사(烈士)들의 원혼마저도 랩퍼들의 노래가락으로 묻혀가는 그런 분위기였다. #3.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철학학습을 할 때 읽는 책인 이진경 씨의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서문에서,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사상이다.' 라고 쓰고 있다(얼마 전 서점에서 재판을 얼핏 봤는데 이 구절은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윤소영 선생도 말했지만, 그 당시 한국사회에선 '부정'과 '침묵', '고백'이 주류를 이루었으니... 이런 물이 어느 정도 쓸려가고 나서야 현덕 형을 통해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인식하고 자기비판하며 쇄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 중에 태길 형도 있었다. 형들과 같이 학습하면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나의 오류를 극복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본뜻을 감지하게 되면서, 남들이 버린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에 지식의 학습으로만 생각했던 독서행위가 실천적 경험을 통해 삶의 구체적인 지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비단 나만의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학문이 아니다. 이는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지식인들에 대한 공포의 미학'이라고 태길 형이 일갈하듯, 어느 순간 '공포의 미학'은 나의 삶 자체가 되어버렸다. #4. 결국 운동도 '관계맺음', 쉽게 말해 사람과 사람의 교통(交通)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맺음의 과정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애로운 관계를 특권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범했던 오류들을 광정하는 차원에서 필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애로운 관계맺음'은 역설적으로 '단절'을 낳기도 하는 것 같다. '조심스러움'은 있어도 '적극적인 개입'은 사라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우애로운 소통은 서로에 대한 여유에서부터 출발한다. 관계는 '나'의 소멸을 전제로 하며, 그런데 자신의 소멸과 타인에 대한 여유는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의 현존은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의 모습을 궁극적으로 바꾸어내기 위해서 '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사회적 존재, 우리가 현재를 지양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소통을 위한 방편인 셈이다. 최소한 '나'에게서 증명된 이러한 깨달음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 禪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탁월한 명상서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줌과 아울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양하며 궁극적으로 나를 소멸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5. 과거 나는 이러한 것을 헛소리로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을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도 이런 말을 함부로 못했다. 내가 억울하게 관념론자라고 치부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최소한 나 자신의 경험적 확증 때문인지 그들의 말은 무시할 정도로 확고해졌지만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 책을 소개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난 이 책을 유초하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생활 속에서 선생을 대하면서 나의 본모습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난 무척 괴로웠고, 다시금 사춘기로 접어들어 향아적 고민에 휩싸여 구원의 심정으로 이 책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중단했던 명상을 조금씩 실천해 갔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가 소멸하고 '관계'만 남게 되었다. 참으로 역설적인 '얻음'이었다. #6. 스즈끼의 책은 지식이 아니다. 그냥 자신을 '그대로 비추게끔' 도와주는 책이다. 불교적 냄새가 나는 것은 무시해도 좋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니까. 최소한 이 책이 세속적 의미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덧붙인다. 장황하고 잡스런 서언(序言)은 그만두자. #7. 자신을 보는 방법을 말함에 번잡스러움이 없다. 스즈끼는 매우 실제적이고 단순한 방법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바르게 앉아 좌선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스즈끼는 이 또한 절대화하지 않는다. 하등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덧붙여 나는 의심할 바 없이 비약하여 믿는다. 이것이 '보편적 인간'의 '자유로운 교통'의 지침이 될 수 있다고... 회원 분들에게『자본』만큼이나 두고두고 읽기를 감히 권한다. 우리에게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으니....

  • 2007-02-12

    얼치기 마르크스주의자가 버리지 않은 책, 버릴 수 없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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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즈끼 순류, 『선으로의 초대: Zen Mind, Beginner's Mind』 [%=사진1%]#0. 흔적 없이 "무엇을 할 때는 잘 타는 모닥불처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자신을 완전히 태워 버려야 합니다." #1. 글을 쓰고 싶긴 했는데, 요즘 사춘기 소년과 유사한 고민으로 마음도 어지러운데, 차후에 성장의 기쁨을 느낄 일기장도 아닌, 후회한들 돌이켜 고칠 수도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다. 처음엔 그랬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전 글들을 대충 읽어보았다. 아무래도「책과 나」는 다른 글들보다 실존적인 내용으로 많이들 채워지고 있었다.「갈월동기행」과「서평」사이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글이라면, 보여주고 싶지 않는 내밀 일기의 파편과 약간의 무게감이 절묘한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영 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결국 논리가 보이지 않는 잡상을 이곳에서 채우게 되어 미안하기만 하다. 어지럽다면 나의 지금의 삶에 원인이 있을 것이고,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싶은 나의 '결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나의 '선택'은 『사회운동』과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느낌을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나의 모습이거늘. 솔직하게 말하자. "禪은 나에게는 취미이고, 삶이라고." 그리고 혹시나 궁색한 변명 하나만 더 달자. "이 글을 쓰는 내게 마르크스주의는 알리바이가 아니라고." #2. 내 사춘기의 시작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얼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매우 관념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책을 뒤덮고 있는 '삶의 고통'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헤르만 헤세같이 파릇한 고민으로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의지로 만들어진 세계의 고통을 불행하게도 먼저 맛보았던 것이다. 이후 니체를 읽고 불교와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 지금도 나에게 관념적인 성향이 있다면 불행했던 사춘기에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읽고,『독일 고전철학의 종말』,『공산주의자 선언』등을 읽으면서 미망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나는 꽤나 오랫동안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춘기의 특징은 '향아적(向我的)'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를 향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대학을 처음 들어가던 그 시절도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가 가사에 철철 넘쳐나던 듀스와 서태지의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모 대학의 대동제에서 대중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그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열사(烈士)들의 원혼마저도 랩퍼들의 노래가락으로 묻혀가는 그런 분위기였다. #3.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철학학습을 할 때 읽는 책인 이진경 씨의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서문에서,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사상이다.' 라고 쓰고 있다(얼마 전 서점에서 재판을 얼핏 봤는데 이 구절은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윤소영 선생도 말했지만, 그 당시 한국사회에선 '부정'과 '침묵', '고백'이 주류를 이루었으니... 이런 물이 어느 정도 쓸려가고 나서야 현덕 형을 통해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인식하고 자기비판하며 쇄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 중에 태길 형도 있었다. 형들과 같이 학습하면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나의 오류를 극복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본뜻을 감지하게 되면서, 남들이 버린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에 지식의 학습으로만 생각했던 독서행위가 실천적 경험을 통해 삶의 구체적인 지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비단 나만의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학문이 아니다. 이는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지식인들에 대한 공포의 미학'이라고 태길 형이 일갈하듯, 어느 순간 '공포의 미학'은 나의 삶 자체가 되어버렸다. #4. 결국 운동도 '관계맺음', 쉽게 말해 사람과 사람의 교통(交通)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맺음의 과정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애로운 관계를 특권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범했던 오류들을 광정하는 차원에서 필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애로운 관계맺음'은 역설적으로 '단절'을 낳기도 하는 것 같다. '조심스러움'은 있어도 '적극적인 개입'은 사라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우애로운 소통은 서로에 대한 여유에서부터 출발한다. 관계는 '나'의 소멸을 전제로 하며, 그런데 자신의 소멸과 타인에 대한 여유는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의 현존은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의 모습을 궁극적으로 바꾸어내기 위해서 '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사회적 존재, 우리가 현재를 지양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소통을 위한 방편인 셈이다. 최소한 '나'에게서 증명된 이러한 깨달음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 禪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탁월한 명상서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줌과 아울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양하며 궁극적으로 나를 소멸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5. 과거 나는 이러한 것을 헛소리로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을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도 이런 말을 함부로 못했다. 내가 억울하게 관념론자라고 치부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최소한 나 자신의 경험적 확증 때문인지 그들의 말은 무시할 정도로 확고해졌지만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 책을 소개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난 이 책을 유초하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생활 속에서 선생을 대하면서 나의 본모습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난 무척 괴로웠고, 다시금 사춘기로 접어들어 향아적 고민에 휩싸여 구원의 심정으로 이 책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중단했던 명상을 조금씩 실천해 갔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가 소멸하고 '관계'만 남게 되었다. 참으로 역설적인 '얻음'이었다. #6. 스즈끼의 책은 지식이 아니다. 그냥 자신을 '그대로 비추게끔' 도와주는 책이다. 불교적 냄새가 나는 것은 무시해도 좋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니까. 최소한 이 책이 세속적 의미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덧붙인다. 장황하고 잡스런 서언(序言)은 그만두자. #7. 자신을 보는 방법을 말함에 번잡스러움이 없다. 스즈끼는 매우 실제적이고 단순한 방법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바르게 앉아 좌선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스즈끼는 이 또한 절대화하지 않는다. 하등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덧붙여 나는 의심할 바 없이 비약하여 믿는다. 이것이 '보편적 인간'의 '자유로운 교통'의 지침이 될 수 있다고... 회원 분들에게『자본』만큼이나 두고두고 읽기를 감히 권한다. 우리에게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으니....

  • 2007-02-09

    범개혁세력 주요 인사들 최근 입장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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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어떻게 만회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범개혁진영 내에서 각종 '책략'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최근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된 주요 인사들의 입장 및 이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을 모아 봤습니다. 오늘자 한겨레 기사를 참고하시면 아래에 첨부된 논쟁의 대략적인 구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최장집 - 한겨레 인터뷰 - 경향신문 인터뷰 - 프레시안 강연 2. 조희연 - 레디앙 기고문 : 최장집 비판 3. 손호철 - 레디앙 기고문 : 조희연의 최장집 비판에 대한 비판 4. 창조한국 미래구상(준) 각종 자료 모음 - 1월 12일 시국토론회 정대화 발제문 - 발족선언문 - 경향신문 대담 기사 5. 안희정 - 오마이뉴스 인터뷰 6. 이병천 - 레디앙 기고문 : 최장집-조희연-손호철 논쟁에 대한 논평 7. 조희연 - 레디앙 기고문 : 손호철에 대한 재반론 <참고> [한겨레] ‘정치위기 진단’ 진보학자들 논쟁 불붙었다 (2007.2.9) : 최장집 교수 “한나라에 정권 넘겨야” 일파만파 : 조희연-손호철 교수, 반박-재반박 뜨거운 설전 한국 정치 위기 진단을 놓고 진보학계의 지도급 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사이에 논쟁이 불붙었다. 논쟁에 불을 댕긴 쪽은 조희연 교수다. 조 교수는 <한겨레> 인터뷰(1월22일치 4면) 등 여러 매체에서 최장집 교수가 한 발언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인터넷 진보매체 <레디앙>에 기고했고, 이에 대해 손호철 교수가 조 교수의 주장을 일면 동조하고 일면 비판하는 글을 같은 매체에 기고하자 조 교수가 다시 손 교수를 반비판하면서 논쟁의 판이 커졌다. 애초 쟁점을 제공한 최 교수의 논지를 요약하면 노무현 정부는 무능력과 비개혁 때문에 실패했으며, 실패한 이상 특단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한나라당으로 정권을 넘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으로, 사회적 갈등을 제도정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운동정치(포퓰리즘=민중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정치를 무력화한 데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의 이런 주장에서 출발한 세 학자의 논쟁을 진행 순서대로 정리해본다. 조희연의 최장집 비판=조 교수는 최 교수가 한국 정치의 위기에 대한 ‘지적’은 올바르게 했지만 ‘진단’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원인은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정당과 국회를 배제한 데 실패 원인이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조 교수는 사회적 힘을 이끌어내는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하지 못한 데 참여정부 실패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로 갈등을 수렴하는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저항을 돌파하는 제도정치 바깥의 사회적 힘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확언했다. 민중주의란 정당이나 국회 등 제도권 정치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고 대중과 결합하는 전략을 가리킨다. 진보적 민중주의는 ‘사회경제적 개혁’을 급진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그러려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르는 대중의 분노를 급진적 방향으로 키워야 한다고 조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가 정상화하고 그 제도적 틀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민중주의적 사회운동’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조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문제를 진보세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타자의 문제’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과 열린우리당 등 중도자유주의세력을 포함한 진보·개혁 세력 전체가 지닌 본질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문제의 하나로 그는 노무현 정부가 ‘헤게모니 정치’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 참여정부는 지나치게 정체성에 집착해 집권 기반을 협소화했을 뿐, 보수적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 함께 가는 기반확대 전략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호철의 반론=손호철 교수는 조 교수의 최장집 비판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자유주의 세력이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줘야 한다”는 최 교수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었다. 손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이 역설적으로 긍정적 요소가 있다며, 정권이 넘어가면 오히려 한국정치가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 한나라당식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사회적 양극화와 민중 생존의 파탄을 경험”하면 “문제의 핵심이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럴 때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에게서 대안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 교수가 말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를 다시 거론한 손 교수는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안에서까지 ‘한나라당에 권력이 넘어가도 좋으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문제를 풀려는 것은 코미디”라며 “이제 유치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이 논리에 ‘두려움의 동원 논리’가 여전히 있다는 인식이 깔린 반론인 셈이다. 조희연의 재반박=이에 조 교수는 “우리 현실의 복합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손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 긍정 논리는 최 교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한나라당 집권 촉진 운동을 해야 한다는 오해도 나올”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손 교수의 논리는 “한국 자본주의가 더 파국적인 상황을 맞아야 대중이 더욱 급진화하고 변혁운동 기반이 강화된다는 1980년대식 인식을 떠올리게 한다”며 매우 위험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은 한국에서 ‘신보수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1930년대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한 뒤 긴 파시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진보세력에게 불리한 상황만 안겨줄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2004년 탄핵반대 투쟁에서 확인됐듯이 올바른 일반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진보세력의 공간도 확장시킨다며, “탄핵반대 투쟁이 열린우리당에게만 혜택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대약진에도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007년 대선도 마찬가지”라며 “현재와 같은 구도로 지속되는 것이 좋은가, 한나라당의 패권적 구도가 흔들리는 것이 진보정당의 약진에 좋은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라”고 주문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