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5-09-03

    여성 이주의 현황과 쟁점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경을 넘어선 이주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주의 여성화’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주 여성의 숫자는 이주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전체 80여만 명의 이주 인구 중 대략 35% 정도가 여성이다. 물론 이주 여성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여성의 이주를 촉진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여성 이주의 확대 양상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각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주 노동의 주요 수입국인 중심부 국가들의 경우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활성화되고 첨단 금융산업과 하인노동으로 노동의 양극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정부, 보모와 같은 재생산노동, 시설관리, 청소 등의 하층 노동에 이주 여성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확대, 성산업의 유례없는 팽창 역시 여성 이주를 확대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제하는 급격한 농업개방은 송출국과 유입국 모두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주 여성의 문제는 금융세계화 질서 속으로 민족국가가 위계화된 형태로 통합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 성산업, 가족제도 등을 통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호 결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지난 5월 말 ‘이주여성의 현실과 문제’를 주제로 월례포럼을 진행했다.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과 이주여성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씨가 ‘인신매매와 성착취-아시아 이주와 한국의 이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주셨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유입경로와 형태, 현황과 문제점, 이주 여성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대안과 현재 진행 중인 활동 등을 중심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특히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이주 여성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었는데, 여성위원회 차원에서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의 문제에 비해 평소 접근이 부족했던 주제였던 만큼 여러모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정리가 매우 늦었지만 이주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있게 가져가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 글을 싣는다. 김민정 씨의 발제와 토론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주 여성에 대한 여성위원회의 고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이 작성되었다. 셋째 아이 출산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양에서 먼 걸음 해주셨던 김민정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시아에서 여성이주의 특성 아시아 내에서 이주 노동 송출국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고, 수입국은 대부분 중동지방 국가들인데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약 1,000만 명 수준에 이른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유입숫자가 적은 편이다. 통상 이주 노동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주요 요인이 노동시장 내의 수요 및 자본력(기술력), 임금수준, 송출 비용 정도인데, 한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선호가 있기는 하지만, 송출비용이 워낙 막대하고 일정한 기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되는 조건을 가진 중동지방으로 이동이 집중된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내에서의 여성 이주는 앞서 언급한 여성 이주의 국제적 추세와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다소 다른 양상도 함께 보인다. 아시아 내에서 여성 이주는 주로 제조업 부문의 노동과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주를 이룬다.1) 아시아에서 이주 노동과 국제결혼을 촉진하는데 있어 대만의 역할은 매우 컸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를 활성화했는데, 그에 따라 제조업의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값싼 이주 노동이 대거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만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 국제결혼중개업이 형성되었고, 대만의 하층 노동자계급과 몰락한 농촌의 남성들이 그 수요층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대만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은 약 40만 명에 달한다. 한편 국제결혼을 위한 이주 여성의 주요 송출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만의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으로 진출한 대만남성들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결혼을 산업화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개방정책과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제결혼은 국가 차원의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으로 확대된다. 여성 이주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확대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 이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조건이 많다. 이는 국제결혼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여성 이주의 제약 조건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 현실과 결합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주노동의 형태, 결혼 여부에 따른 제약, 교육수준으로 인한 제약, 성산업으로의 유입 가능성 등이 여성 이주의 조건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경우 국가가 정책적으로 미혼 여성의 국제이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국가들의 이주여성은 대부분 3·40대 기혼여성들이다. 최근 국제결혼의 주요 대상국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의 경우 2차 산업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으며, 저학력에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경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매우 많다(명목상 기술력이 이유가 되지만 실제로는 현재 한국의 2차 산업 구조가 남성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이유가 크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여성 이주의 형태는 저임금 2차 산업과 서비스산업, 국제결혼 등으로 집중된다. 남성 이주에 비해서도 매우 취약한 여성 이주의 조건은 여성의 비공식 이주를 증가시키는데, 이로써 성산업으로의 유입이나 인신매매의 위험이 생겨난다. 실제 전 세계 여성 인신매매의 1/3이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이주에 나섰던 태국여성이 서아프리카의 성산업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현황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은 전체 이주자 중 약 37%에 이른다. 13만 명 정도가 2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13만 명, E6 비자(공연예술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가 대략 1,200~1,300명 수준이다. 한국남성들의 국제결혼은 199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 600여명 수준에서 2004년에는 연간 25,500여명으로 확대된다(아래 계속해서 제시될 통계수치는 통계청과 법무부 자료를 따른 것이다). 국적별 분포를 보면, 2004년을 기준으로 중국이 70%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조선족들로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선호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베트남(9.6%), 일본(4.8%), 필리핀(3.8%)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길거리 광고가 등장할 만큼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은 수치상으로 그리 큰 비중은 아니지만, 여타 국가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1년 사이(2003년~2004년) 감소한 것에 비해 거의 유일하게 증가세(2003년의 경우 7.3%)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의 체감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한국 남성과 이주 여성의 국제결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농촌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례에 집중되는데,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르다.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2004년 기준으로 서울이 25%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23%), 부산(7%), 인천(6%) 등 대도시가 주를 이룬다. 반면 농촌지역이 많이 포함되는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경우 3~4% 수준이다. 초혼과 재혼 등을 기준으로 한 결혼 종류에 따른 구분을 보면, 2001년 당시 초혼이 6,700여명, 재혼이 3,200여명이었는데 그 후 재혼의 사례가 단기간에 꾸준히 상승하여 2004년이 되면 각각 13,700여명과 11,600여명으로 비슷한 비율에 이르게 된다.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의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흔한 경우가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한 유입이다.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에서 남성은 상대 여성의 가족에게 전달되는 지참금과 방문절차 비용, 중개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대략 1,400만 원 정도를 소요한다. 이 외에 통일교 등 종교단체의 알선을 통한 결혼이나 국제결혼을 한 당사자의 개인적 소개를 통한 결혼, 아주노동자 생활 과정에서 만난 사람끼리의 연애결혼 등이 있다. 국제결혼의 일부는 안정적인 거주기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장결혼이다. 이 경우 한국에서 취업 이후 벌어들일 소득을 고려하여 선불-후불 분납제도를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 때 상호 얼굴 한번 대면한 적 없는 서류상의 ‘종이남편’은 이 비용의 일부를 할당받는다. 성산업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가장 많은 경로가 E6 비자를 통한 입국2) 이고, 그밖에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미등록 상태로 장기체류 하는 경우,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를 통한 유입 등의 경로가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업화된 형태의 국제결혼은 결혼이 성사되고 실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배우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 인신매매적 요소, 결혼 중개업체의 횡포 등이 대표적인 위험들이다. 많은 상담사례에서 여성에게 ‘한국에서는 농부가 부자이고 존경받는 직업이다’, ‘한 달에 300달러씩 친정에 송금해주겠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얘기나 가족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가 드러났다. 남성의 한 두 차례 방문으로 성혼이 이루어지고 대부분 그 방문에서 중개업체들이 성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치 않는 성관계, 임신 같은 성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소요된 모든 비용을 여성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폭력적 조건 속에서 여성들은 결혼여부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최근 베트남처럼 국제결혼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결혼중개업체가 송출국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모집하고 합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합숙생활 자체가 감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강제적 조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인신매매적 요소가 다분하며, 실제 합숙 이후 성산업으로의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갈취는 이 밖에도 매우 다양하다. 성관계 경험여부에 따라서 여성의 가족에게 차등적으로 지참금을 지불하는 사례도 있고, 처녀막 재생 수술을 종용하기도 하며, 금품을 갈취하기도 하는 등 여성 이주의 과정에는 매우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이주한 여성의 생활조건과 지위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과정에서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주 이후 한국에서의 삶 또한 결코 순탄치 않다.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성은 대부분 불안정한 직업, 빈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거나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소농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여성들이 처하는 일차적인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에서 기인한다(최근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제결혼 부부 중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는 가구가 52%, 끼니를 굶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 16%에 이르고 있다). 극도의 내핍생활을 감당하거나 한국 여성에 비해 열등한 조건으로 취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의 이탈을 우려하여 취업은 남편의 동의 하에서만 가능하며, 조선족들의 경우 서비스업으로 취업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오히려 ‘돈 벌어올 것’을 강요받거나 그를 목적으로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경우나 재생산노동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앞서 남성의 초혼과 재혼 등의 결혼 형태에 따른 분포를 살펴보았는데, 재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징적으로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결혼을 하는 이주여성들의 연령이 대부분 20대 초·중반이고 종종 10대 후반도 있는데, 재혼을 하는 한국 남성의 경우 4~50대 어떤 경우 60대에 이른다. 이 경우 이주 여성들은 무급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의 제공자나 다름없는데, 실제로 연로하고 병든 부모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남성이 적지 않다. 단기 가정부, 간병인을 고용하느니 비용 면에서도 오히려 저렴하고 기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기 고용인을 고용하는 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연령대가 높은 남성들의 사례 또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에만 한정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성적학대, 구타와 같은 신체적 학대, 재생산노동과 유급 노동의 이·삼중 부담, 문화·언어·민족적 차이 등을 악용한 언어·정서적 학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도 이주 여성들에게 그것은 곧 불법체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이탈을 한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쉼터 체류자들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여성들은 대부분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직·간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생활의 문제, 문화적 차이, 외국인 혐오증, 국제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적 인식은 이주 여성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되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 데 있어 한계로 작용한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은 그 형태와 절차가 ‘노골적으로’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주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의 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의 법·제도 또한 이주 여성들을 취약한 지위로 내몰고 있다. 이주 여성의 신분보장과 거주, 기본적 권리와 관련되는 법·제도로는 국적법, 출입국관리법, 그밖에 공공서비스 차원의 기본권의 문제가 있는데, 신분보장 및 거주의 권리는 결혼지속 여부에 철저히 종속된다. 심지어는 배우자가 위장결혼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결혼관계를 청산할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이때도 결국 여성은 불법체류자로 내몰릴 뿐이다. 그밖에 의료, 교육, 소득보조 등 공공서비스 혜택에서 이주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국제결혼의 경우 ‘결혼’의 한 형태라는 이유로 이주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인신매매적 요소 등에 대한 법·제도적 차원에서 규제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또한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이주여성운동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3) 국적 취득 이전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 적용, 각종 상담 및 교육 등에 대한 지원 확대와 관련된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이주가 제기하는 쟁점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이 동남아시아의 빈국 출신임을 보아 알 수 있듯, 이 여성들에게 이주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진입하는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고국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주를 감행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고학력, 전문직 종사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부양이나, 빈곤탈출, 자식에게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동기로 국제결혼을 결심한다. 여성이주의 형태 중 국제결혼의 경우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쟁점은 국제결혼이 여성매매 또는 성매매와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편에는 국제결혼이 ‘노골적으로’ 상품화되어 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가족의 압력, 중개업체의 폭력이 개입되고 실제 인신매매도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성매매와 다름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에는 이미 현실에 다수가 존재하는 결혼의 한 형태라는 점과 빈곤이 여성들에게 일반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제결혼이 이주 여성들이 선택한 하나의 대응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의 곁가지에는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자들이 대부분 한국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노골적으로’ 상품화된 결혼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언제부턴가 성행하기 시작한 국내의 수많은 결혼중개업체들을 통한 결혼은 국제결혼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이와 같은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형태가 등장할 만큼 결혼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현실에서 이주 여성과 토착 거주 여성은 그 삶의 조건과 양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점이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 여성이 가족제도 내에서의 억압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 민족국가 내부에서 배제의 대상이라면 이주 여성은 외적 배제라는 또 다른 조건이 결합된 매우 중층적인 억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무급 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이주 여성의 지위와 재생산노동과 임금노동(또는 농사일)의 병행이라는 역할은 사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위이며 역할이다. 또한 이주여성에게 가해지는 동정과 성적인 이유에서의 멸시라는 이중적 시각은 어느 사회에서건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보호받을 자격 있는/없는 인간’이라는 이분법의 변형된 판본이다. 따라서 국제결혼이 성매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본질적인 쟁점일 수 없다.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이주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가족제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제결혼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주의 형태라는 사실은 여성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인 가족의 역할을 사고할 때만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인간적인 국제결혼’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이주여성이 국적과 결혼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여성으로서, 노동자·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여성을 국적에 따라 차별·배제하고 자본에게만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1) 중심부 국가의 경우처럼 재생산노동을 위한 여성 이주가 아시아에서 확대되기는 힘든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역할은 국내 여성들의 저임금 일자리로 제공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조선족들의 경우가 상류층의 가정부로 고용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본문으로 2) E6 비자를 통해 입국해 성산업으로 유입된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의 문제가 사회화되자, 정부는 2003년 6월부터 무용수들에 대한 E6비자 발급을 중단했고, 그 후 E6 비자를 통한 입국은 급감하였다. 본문으로 3) 지금까지는 결혼중개업체의 존립에 대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에는 국내결혼중개업체는 신고제로, 국제결혼중개업체는 허가제로 양성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주여성운동에서는 중개업체에 대한 허가제/금지/불법화 등의 선택지를 검토한 끝에 ‘결혼’의 속성을 고려하여, 허가제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2005-09-03

    여성 이주의 현황과 쟁점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경을 넘어선 이주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주의 여성화’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주 여성의 숫자는 이주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전체 80여만 명의 이주 인구 중 대략 35% 정도가 여성이다. 물론 이주 여성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여성의 이주를 촉진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여성 이주의 확대 양상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각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주 노동의 주요 수입국인 중심부 국가들의 경우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활성화되고 첨단 금융산업과 하인노동으로 노동의 양극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정부, 보모와 같은 재생산노동, 시설관리, 청소 등의 하층 노동에 이주 여성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확대, 성산업의 유례없는 팽창 역시 여성 이주를 확대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제하는 급격한 농업개방은 송출국과 유입국 모두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주 여성의 문제는 금융세계화 질서 속으로 민족국가가 위계화된 형태로 통합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 성산업, 가족제도 등을 통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호 결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지난 5월 말 ‘이주여성의 현실과 문제’를 주제로 월례포럼을 진행했다.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과 이주여성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씨가 ‘인신매매와 성착취-아시아 이주와 한국의 이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주셨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유입경로와 형태, 현황과 문제점, 이주 여성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대안과 현재 진행 중인 활동 등을 중심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특히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이주 여성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었는데, 여성위원회 차원에서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의 문제에 비해 평소 접근이 부족했던 주제였던 만큼 여러모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정리가 매우 늦었지만 이주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있게 가져가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 글을 싣는다. 김민정 씨의 발제와 토론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주 여성에 대한 여성위원회의 고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이 작성되었다. 셋째 아이 출산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양에서 먼 걸음 해주셨던 김민정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시아에서 여성이주의 특성 아시아 내에서 이주 노동 송출국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고, 수입국은 대부분 중동지방 국가들인데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약 1,000만 명 수준에 이른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유입숫자가 적은 편이다. 통상 이주 노동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주요 요인이 노동시장 내의 수요 및 자본력(기술력), 임금수준, 송출 비용 정도인데, 한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선호가 있기는 하지만, 송출비용이 워낙 막대하고 일정한 기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되는 조건을 가진 중동지방으로 이동이 집중된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내에서의 여성 이주는 앞서 언급한 여성 이주의 국제적 추세와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다소 다른 양상도 함께 보인다. 아시아 내에서 여성 이주는 주로 제조업 부문의 노동과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주를 이룬다.1) 아시아에서 이주 노동과 국제결혼을 촉진하는데 있어 대만의 역할은 매우 컸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를 활성화했는데, 그에 따라 제조업의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값싼 이주 노동이 대거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만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 국제결혼중개업이 형성되었고, 대만의 하층 노동자계급과 몰락한 농촌의 남성들이 그 수요층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대만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은 약 40만 명에 달한다. 한편 국제결혼을 위한 이주 여성의 주요 송출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만의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으로 진출한 대만남성들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결혼을 산업화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개방정책과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제결혼은 국가 차원의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으로 확대된다. 여성 이주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확대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 이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조건이 많다. 이는 국제결혼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여성 이주의 제약 조건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 현실과 결합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주노동의 형태, 결혼 여부에 따른 제약, 교육수준으로 인한 제약, 성산업으로의 유입 가능성 등이 여성 이주의 조건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경우 국가가 정책적으로 미혼 여성의 국제이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국가들의 이주여성은 대부분 3·40대 기혼여성들이다. 최근 국제결혼의 주요 대상국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의 경우 2차 산업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으며, 저학력에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경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매우 많다(명목상 기술력이 이유가 되지만 실제로는 현재 한국의 2차 산업 구조가 남성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이유가 크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여성 이주의 형태는 저임금 2차 산업과 서비스산업, 국제결혼 등으로 집중된다. 남성 이주에 비해서도 매우 취약한 여성 이주의 조건은 여성의 비공식 이주를 증가시키는데, 이로써 성산업으로의 유입이나 인신매매의 위험이 생겨난다. 실제 전 세계 여성 인신매매의 1/3이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이주에 나섰던 태국여성이 서아프리카의 성산업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현황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은 전체 이주자 중 약 37%에 이른다. 13만 명 정도가 2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13만 명, E6 비자(공연예술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가 대략 1,200~1,300명 수준이다. 한국남성들의 국제결혼은 199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 600여명 수준에서 2004년에는 연간 25,500여명으로 확대된다(아래 계속해서 제시될 통계수치는 통계청과 법무부 자료를 따른 것이다). 국적별 분포를 보면, 2004년을 기준으로 중국이 70%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조선족들로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선호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베트남(9.6%), 일본(4.8%), 필리핀(3.8%)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길거리 광고가 등장할 만큼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은 수치상으로 그리 큰 비중은 아니지만, 여타 국가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1년 사이(2003년~2004년) 감소한 것에 비해 거의 유일하게 증가세(2003년의 경우 7.3%)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의 체감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한국 남성과 이주 여성의 국제결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농촌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례에 집중되는데,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르다.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2004년 기준으로 서울이 25%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23%), 부산(7%), 인천(6%) 등 대도시가 주를 이룬다. 반면 농촌지역이 많이 포함되는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경우 3~4% 수준이다. 초혼과 재혼 등을 기준으로 한 결혼 종류에 따른 구분을 보면, 2001년 당시 초혼이 6,700여명, 재혼이 3,200여명이었는데 그 후 재혼의 사례가 단기간에 꾸준히 상승하여 2004년이 되면 각각 13,700여명과 11,600여명으로 비슷한 비율에 이르게 된다.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의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흔한 경우가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한 유입이다.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에서 남성은 상대 여성의 가족에게 전달되는 지참금과 방문절차 비용, 중개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대략 1,400만 원 정도를 소요한다. 이 외에 통일교 등 종교단체의 알선을 통한 결혼이나 국제결혼을 한 당사자의 개인적 소개를 통한 결혼, 아주노동자 생활 과정에서 만난 사람끼리의 연애결혼 등이 있다. 국제결혼의 일부는 안정적인 거주기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장결혼이다. 이 경우 한국에서 취업 이후 벌어들일 소득을 고려하여 선불-후불 분납제도를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 때 상호 얼굴 한번 대면한 적 없는 서류상의 ‘종이남편’은 이 비용의 일부를 할당받는다. 성산업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가장 많은 경로가 E6 비자를 통한 입국2) 이고, 그밖에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미등록 상태로 장기체류 하는 경우,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를 통한 유입 등의 경로가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업화된 형태의 국제결혼은 결혼이 성사되고 실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배우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 인신매매적 요소, 결혼 중개업체의 횡포 등이 대표적인 위험들이다. 많은 상담사례에서 여성에게 ‘한국에서는 농부가 부자이고 존경받는 직업이다’, ‘한 달에 300달러씩 친정에 송금해주겠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얘기나 가족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가 드러났다. 남성의 한 두 차례 방문으로 성혼이 이루어지고 대부분 그 방문에서 중개업체들이 성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치 않는 성관계, 임신 같은 성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소요된 모든 비용을 여성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폭력적 조건 속에서 여성들은 결혼여부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최근 베트남처럼 국제결혼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결혼중개업체가 송출국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모집하고 합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합숙생활 자체가 감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강제적 조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인신매매적 요소가 다분하며, 실제 합숙 이후 성산업으로의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갈취는 이 밖에도 매우 다양하다. 성관계 경험여부에 따라서 여성의 가족에게 차등적으로 지참금을 지불하는 사례도 있고, 처녀막 재생 수술을 종용하기도 하며, 금품을 갈취하기도 하는 등 여성 이주의 과정에는 매우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이주한 여성의 생활조건과 지위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과정에서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주 이후 한국에서의 삶 또한 결코 순탄치 않다.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성은 대부분 불안정한 직업, 빈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거나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소농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여성들이 처하는 일차적인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에서 기인한다(최근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제결혼 부부 중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는 가구가 52%, 끼니를 굶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 16%에 이르고 있다). 극도의 내핍생활을 감당하거나 한국 여성에 비해 열등한 조건으로 취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의 이탈을 우려하여 취업은 남편의 동의 하에서만 가능하며, 조선족들의 경우 서비스업으로 취업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오히려 ‘돈 벌어올 것’을 강요받거나 그를 목적으로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경우나 재생산노동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앞서 남성의 초혼과 재혼 등의 결혼 형태에 따른 분포를 살펴보았는데, 재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징적으로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결혼을 하는 이주여성들의 연령이 대부분 20대 초·중반이고 종종 10대 후반도 있는데, 재혼을 하는 한국 남성의 경우 4~50대 어떤 경우 60대에 이른다. 이 경우 이주 여성들은 무급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의 제공자나 다름없는데, 실제로 연로하고 병든 부모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남성이 적지 않다. 단기 가정부, 간병인을 고용하느니 비용 면에서도 오히려 저렴하고 기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기 고용인을 고용하는 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연령대가 높은 남성들의 사례 또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에만 한정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성적학대, 구타와 같은 신체적 학대, 재생산노동과 유급 노동의 이·삼중 부담, 문화·언어·민족적 차이 등을 악용한 언어·정서적 학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도 이주 여성들에게 그것은 곧 불법체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이탈을 한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쉼터 체류자들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여성들은 대부분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직·간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생활의 문제, 문화적 차이, 외국인 혐오증, 국제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적 인식은 이주 여성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되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 데 있어 한계로 작용한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은 그 형태와 절차가 ‘노골적으로’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주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의 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의 법·제도 또한 이주 여성들을 취약한 지위로 내몰고 있다. 이주 여성의 신분보장과 거주, 기본적 권리와 관련되는 법·제도로는 국적법, 출입국관리법, 그밖에 공공서비스 차원의 기본권의 문제가 있는데, 신분보장 및 거주의 권리는 결혼지속 여부에 철저히 종속된다. 심지어는 배우자가 위장결혼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결혼관계를 청산할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이때도 결국 여성은 불법체류자로 내몰릴 뿐이다. 그밖에 의료, 교육, 소득보조 등 공공서비스 혜택에서 이주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국제결혼의 경우 ‘결혼’의 한 형태라는 이유로 이주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인신매매적 요소 등에 대한 법·제도적 차원에서 규제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또한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이주여성운동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3) 국적 취득 이전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 적용, 각종 상담 및 교육 등에 대한 지원 확대와 관련된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이주가 제기하는 쟁점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이 동남아시아의 빈국 출신임을 보아 알 수 있듯, 이 여성들에게 이주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진입하는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고국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주를 감행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고학력, 전문직 종사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부양이나, 빈곤탈출, 자식에게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동기로 국제결혼을 결심한다. 여성이주의 형태 중 국제결혼의 경우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쟁점은 국제결혼이 여성매매 또는 성매매와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편에는 국제결혼이 ‘노골적으로’ 상품화되어 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가족의 압력, 중개업체의 폭력이 개입되고 실제 인신매매도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성매매와 다름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에는 이미 현실에 다수가 존재하는 결혼의 한 형태라는 점과 빈곤이 여성들에게 일반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제결혼이 이주 여성들이 선택한 하나의 대응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의 곁가지에는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자들이 대부분 한국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노골적으로’ 상품화된 결혼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언제부턴가 성행하기 시작한 국내의 수많은 결혼중개업체들을 통한 결혼은 국제결혼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이와 같은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형태가 등장할 만큼 결혼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현실에서 이주 여성과 토착 거주 여성은 그 삶의 조건과 양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점이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 여성이 가족제도 내에서의 억압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 민족국가 내부에서 배제의 대상이라면 이주 여성은 외적 배제라는 또 다른 조건이 결합된 매우 중층적인 억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무급 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이주 여성의 지위와 재생산노동과 임금노동(또는 농사일)의 병행이라는 역할은 사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위이며 역할이다. 또한 이주여성에게 가해지는 동정과 성적인 이유에서의 멸시라는 이중적 시각은 어느 사회에서건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보호받을 자격 있는/없는 인간’이라는 이분법의 변형된 판본이다. 따라서 국제결혼이 성매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본질적인 쟁점일 수 없다.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이주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가족제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제결혼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주의 형태라는 사실은 여성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인 가족의 역할을 사고할 때만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인간적인 국제결혼’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이주여성이 국적과 결혼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여성으로서, 노동자·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여성을 국적에 따라 차별·배제하고 자본에게만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1) 중심부 국가의 경우처럼 재생산노동을 위한 여성 이주가 아시아에서 확대되기는 힘든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역할은 국내 여성들의 저임금 일자리로 제공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조선족들의 경우가 상류층의 가정부로 고용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본문으로 2) E6 비자를 통해 입국해 성산업으로 유입된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의 문제가 사회화되자, 정부는 2003년 6월부터 무용수들에 대한 E6비자 발급을 중단했고, 그 후 E6 비자를 통한 입국은 급감하였다. 본문으로 3) 지금까지는 결혼중개업체의 존립에 대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에는 국내결혼중개업체는 신고제로, 국제결혼중개업체는 허가제로 양성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주여성운동에서는 중개업체에 대한 허가제/금지/불법화 등의 선택지를 검토한 끝에 ‘결혼’의 속성을 고려하여, 허가제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2005-09-03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1) 제임스 페트라스·티모시 F. 하딩 *번역: 윤 여 협(회원)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지배는 한편으로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증가와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좌파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강조하는 분석은 동반한다. 많은 필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면서 시장의 지배와 ‘세계화’는 급진적 좌파를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다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소비에트 시대 공산주의의 붕괴, 1980년대 게릴라운동의 소멸, 수많은 좌파운동 조직들의 자유민주적 정치운동으로의 전환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분석은 유효성이 없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이전 좌파운동의 형태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자율적이고 새로운 혁명적 좌파가 부활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여기서 새로운 혁명적 좌파와 이전의 좌파를 구별하는 것은 이러한 주장에 실체를 부여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우리는 분석을 위해 남미 좌파의 세 번의 물결을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 물결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운동이며, 두 번째 물결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운동이다. 세 번째 물결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운동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좌파운동은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저강도전쟁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압살 당했고 일부는 체제에 흡수되었다. 당시 칠레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극단적 자유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이다.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운동>(MAS) 지도자인 테오도로 페트코프는 국제화폐기금(IMF)이 권장하는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하였고, 볼리비아의 <혁명적 좌파운동>(MIR)은 전임 우익 독재자인 휴고 반제르와 동맹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약자본이 돈 세탁을 하는 데 깊이 연루되어있다. 이 세대는 거의 예외 없이 비판적 활동가의 기준이 되는 운동성을 상실하였고, 그 구성원들은 새로운 대중봉기를 진압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좌파운동의 두 번째 물결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FMLN), 브라질 <노동자당>(PT), 과테말라의 <혁명적민족연합>(UNRG)이 주도한 운동으로서 중앙아메리카와 브라질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시장과 선거정치의 요구에 부합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지도자들은 우익 차모로(Chamorro) 체제와 동맹을 맺고 민중의 저항을 압살했으며, 멕시코의 전임 대통령인 카를로스 살리나스와 연계를 맺고 과거 조직의 지도자들이 공직기간 동안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들은 기껏해야 선거주의적 전망을 갖는 개혁주의자들이다. 1999년 대통령선거에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후보자는 어떠한 구조개혁(남미에서 구조개혁의 문제는 원래 부패하고 매판적인 사회경제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좌파가 제기했음 - 역자)에도 반대하는 자본주의 현대화 강령을 제안하였다. 과테말라의 UNRG는 조직을 서둘러 합법화하고 몇 개의 국회의석을 획득하기 위해 선거정당을 조직하였으며, 소농의 사회적 요구와 인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개혁프로그램과 대중 지지기반을 보유했지만 “재분배적” 접근을 옹호하는 급진적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사실상 방기하였다. 멕시코의 <민주혁명당>(PRD)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널리 수용하였고, 1980년 이전 공식정당들의 부르주아 인민주의 연합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마디로 1980년대의 혁명주의자들은 1990년대에 선거 개혁주의자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과거 혁명주의 그룹들은 상파울로 포럼의 다수를 구성하는 다른 선거 야당 그룹들과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느슨한 연합에 참가하게 되었다. 과거 혁명주의자들과 선거연합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악영향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주장을 하였지만 부의 토대와 이를 지탱하는 국제적 금융연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고 있다. 정당들과 [선거]연합들 중 그 누구도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제기하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그들은 자본주의 위기와 수탈의 효과를 완화하는 규제 메커니즘으로서 국가를 재도입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남미 좌파의 두 번째 물결이 지닌 기본적인 약점은 토지 보유와 자본 소유관계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요구, 은행 및 대외무역 통제에 대한 요구를 버리면서 우익과 타협하려는 경향이다. 그들은 무력한 의회 내 반대 세력으로서 기능하면서 [정부·여당에 대한] 혹평과 비난으로 그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 점차 대중적 토대로부터 분리되고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보수적 모습을 드러내면서 두 번째 남미 좌파는 선거 캠페인과 떨어진 대중투쟁에 개입할 수 없거나 이를 내켜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은 <민주혁명당>의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가 멕시코시티 선거에서 승리하고 그 후 집권을 통해 그에게 투표한 중요한 지지세력들에게 혼란을 주고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같은 시기에 브라질 <노동자당>이 집권한 포르투 알레그레 시 정부는 예산배정 우위를 공식화하면서 기층의 농민에 기초하여 효과적인 도시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사회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강화하고 확장하였다. 남미 좌파의 세 번째 물결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와 기존 중도 좌파 선거정당과 선거연합체들의 무능력·무책임에 대한 대응으로서 일어났다. 베네수엘라를 제외하고, 세 번째 물결은 선거기간 전후를 경과하는 동안에도 선거정치보다 직접행동을 우위에 두는 운동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토지, 공공건물, 공장, 관청을 점거하면서 자율적인 자기통치를 위한 권력중심을 세워냈다. 이들은 2세대 운동의 권위주의적이고 제한적인 선거정치의 외부를 조직함으로서 사회구성원들의 생활에 기초한 즉각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브라질의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파라과이의 <전국농민연맹>,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코카재배농민을 가리킴 - 역주)소농연맹>, 에콰도르의 <전국노동자농민연합>(FENOC),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아르헨티나의 반체제지역 노동조합·시민운동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물결은 기존 중도좌파와 선거야당들과는 구별되는 몇몇 사회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들은 소작농들, 인디안들, 소농민들, 무토지농업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농촌에 기원을 둔다. 에릭 홉스봄과 같은 관찰자들의 예측과는 달리 농촌 노동력의 상대적 쇠퇴가 정치적 구성요소로서 소농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반대로 그들은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에서 가장 중심에 있다. 오늘날 소농과 농업 노동자운동의 지도자들은 과거 운동의 지도자들과는 매우 상이하다. 그들은 훨씬 단련되었고, 국제주의자이며, 도시의 정치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 그들은 국제회의들에 참가하고 전국적 논쟁에 개입하며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도시의 운동들, 노동조합, 선거정당들과 협상한다. 새로운 운동의 성장과 응집력은 운동 지도자들의 지도력과 직접행동의 정치가 지닌 역동적 매력과 농촌에서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수단들의 극단적 약탈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일단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정치방식에서 중도좌파 선거연합과 다르다. 즉 결과에 반응하는 대신 새로운 운동은 “(정치적) 현실을 야기하고 있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은 미경작된 거대한 토지를 점거하고, 사파티스타는 일당지배 국가(멕시코에서 <제도혁명당>(PRI)의 70여 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가리킴 - 역자)의 과도한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자기-통치의 공동체를 조직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중앙체제와 독립적으로 생산과 분배의 연계망을 세웠으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과 <민족해방군>(ELN)는 콜롬비아 지역의 40%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에콰도르의 소농-인디오 운동은 대통령 압달라 부카람을 부패 책임을 물어 퇴임시키고, 후임 대통령이 IMF 자유시장 의제를 실행하려는 시도를 저지하였다. 오늘날 사회정치운동들은 거시적 사회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투쟁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대중 계급들의 직접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들을 제출하고 있다. 무능한 소수자로서 전통적 중도좌파 선거 정치인들은 영원히 새로운 선거만 기다리는 반면 인민계급 다수의 지지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다. 소수의 중간계급 전문가들이 계획을 세우고 수직적 결정구조를 통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하는 1980년대 게릴라운동 방식과는 달리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대중 총회, 협의회, 기층 성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산디니스타-FMLN-UNRG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정부와의] 평화협정에 대한 거부이며, 과거 게릴라조직 지도자들과 중간계급 간부들이 선거를 통한 지위상승을 노리며 인민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선거주의로 이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다.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과거의 전달 모형(대중운동은 정당의 지침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라는 관념 - 역자)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거정당에 대해 독립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운동들 간에 동맹을 맺으며, 선거정당들을 지지할 수 있으나(MST는 종종 진보적인 PT당 후보를 지지한다), 그 결정은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물리적 투쟁을 제한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의 수많은 지도자들 나이는 대부분 20세에서 35세 사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로서 종파적인 이데올로기 갈등과 이전 [운동]세대를 향한 충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민족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들의 국제적 연계는 자유로운 연합과 교환, 연대에 기초하고 있다. 외부의 ‘혁명 중앙’으로부터 ‘계시’는 없다. 구성원 다수는 인민계급 출신이며(외부 전문가들이 아니다) 스스로 단련되었다.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은 ‘전위’가 아니라 ‘운동의 재원’으로서 참여한다. 사회정치운동들은 부문적 개혁을 넘어서서 민족적 변혁에 이르는 광범위한 의제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점차 그들은 토지소유 관계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국가 전체와 엘리트 계급 내 지지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수많은 농촌 기반 운동들은 민족적 강령과 전략을 정식화하였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일당 국가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판을 정교하게 수행하고, 소농과 인디오들의 자율적 공동체와 지역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민중 전략을 포함하는 탈집중화된 대안을 정식화하였다. MST는 새로운 ‘브라질 프로젝트’를 정식화하고 주요 도시의 빈민가에 거주하는 민중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지역 기반의 정당인 ‘인민주권 총회’를 결성하여 지역선거를 휩쓸면서 의회에서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기찬 강령을 공식화하였다. 많은 필자와 분석가들은 낮은 임금과 어떠한 사회급여도 없이 노동자들이 고용된 거대한 ‘비공식 부문’의 성장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그들은 비공식 부문의 성장은 지위가 하락하는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계급투쟁보다 개인적인 해결책을 추구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다른 관찰자들은 점증하는 권위주의적 지배 스타일을 언급한다. 이러한 지배 스타일은 행정부가 명령을 통해 지배하며, 자신의 재선출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을 교체하려고 입법부를 조종하며, ‘자유시장’ 정책을 추구하여 유권자와 의회를 주변화한다. 이런 통치 스타일의 함의는 선거 공약을 배반하더라도 사기 당한 유권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동적 농촌운동들은 강령, 전략, 투쟁을 조정하는 <라틴아메리카 농촌조직 대회>(CLOC)에 가입해 있다. 그 안에서 젠더 평등은 더욱 발전하고 있으며, 40퍼센트 이상의 대표들이 여성이다. 실제로 종족성, 젠더, 그리고 계급적 사안은 농촌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이 수행하는 선도적인 역할과 결합된다.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변혁을 지향하는 민족적인 정치프로젝트와 제휴해야 한다고 명확히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직접적인 사회적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운동들은 무기력에 빠지고 체제로 포섭될 것이라고 깨닫고 있다. [좌파의 세 번째] 세대의 창의력은 열린 민주주의 구조를 통해 제도적 또는 제도를 넘어서는 ‘정치’를 직접적 사회행동과 결합하는 능력이다. 오늘날 [남미 운동이 극복해야 할] 가장 거대한 도전은 농촌에서 형성된 기존 투쟁의 영역을 넘어서 도시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유사한 운동들과 동맹과 연합을 맺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농촌지역들은 체제에 포섭되지 않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의 기폭제로서 성공적 사례가 되었다. 저항으로부터 정치로,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행동으로, 부문적 개혁으로부터 민족-민중적 혁명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시작되었다. 신자유주의는 라틴아메리카 남부 원뿔지대(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 역자)에서 군사독재가 뿌린 민중의 피로부터 출현했다. 신자유주의는 국제금융기구의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는) 집행관들과 현임 대통령들에 의해 유지·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대통령 궁에서 쓰이지 않는다. 좌파운동은 치아파스 산맥으로부터 브라질 대농장으로, 파라과이 분지로부터 볼리비아 차파레 계곡에 이르기까지 반격을 가하고 있다. 1) James Petras and Timothy F. Harding, "Introduction", Latin America Perspective, Issue 114, Vol. 27 No. 5, September 2000, pp.3-10. 본문으로

  • 2005-09-03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1) 제임스 페트라스·티모시 F. 하딩 *번역: 윤 여 협(회원)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지배는 한편으로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증가와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좌파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강조하는 분석은 동반한다. 많은 필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면서 시장의 지배와 ‘세계화’는 급진적 좌파를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다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소비에트 시대 공산주의의 붕괴, 1980년대 게릴라운동의 소멸, 수많은 좌파운동 조직들의 자유민주적 정치운동으로의 전환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분석은 유효성이 없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이전 좌파운동의 형태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자율적이고 새로운 혁명적 좌파가 부활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여기서 새로운 혁명적 좌파와 이전의 좌파를 구별하는 것은 이러한 주장에 실체를 부여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우리는 분석을 위해 남미 좌파의 세 번의 물결을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 물결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운동이며, 두 번째 물결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운동이다. 세 번째 물결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운동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좌파운동은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저강도전쟁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압살 당했고 일부는 체제에 흡수되었다. 당시 칠레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극단적 자유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이다.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운동>(MAS) 지도자인 테오도로 페트코프는 국제화폐기금(IMF)이 권장하는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하였고, 볼리비아의 <혁명적 좌파운동>(MIR)은 전임 우익 독재자인 휴고 반제르와 동맹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약자본이 돈 세탁을 하는 데 깊이 연루되어있다. 이 세대는 거의 예외 없이 비판적 활동가의 기준이 되는 운동성을 상실하였고, 그 구성원들은 새로운 대중봉기를 진압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좌파운동의 두 번째 물결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FMLN), 브라질 <노동자당>(PT), 과테말라의 <혁명적민족연합>(UNRG)이 주도한 운동으로서 중앙아메리카와 브라질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시장과 선거정치의 요구에 부합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지도자들은 우익 차모로(Chamorro) 체제와 동맹을 맺고 민중의 저항을 압살했으며, 멕시코의 전임 대통령인 카를로스 살리나스와 연계를 맺고 과거 조직의 지도자들이 공직기간 동안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들은 기껏해야 선거주의적 전망을 갖는 개혁주의자들이다. 1999년 대통령선거에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후보자는 어떠한 구조개혁(남미에서 구조개혁의 문제는 원래 부패하고 매판적인 사회경제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좌파가 제기했음 - 역자)에도 반대하는 자본주의 현대화 강령을 제안하였다. 과테말라의 UNRG는 조직을 서둘러 합법화하고 몇 개의 국회의석을 획득하기 위해 선거정당을 조직하였으며, 소농의 사회적 요구와 인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개혁프로그램과 대중 지지기반을 보유했지만 “재분배적” 접근을 옹호하는 급진적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사실상 방기하였다. 멕시코의 <민주혁명당>(PRD)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널리 수용하였고, 1980년 이전 공식정당들의 부르주아 인민주의 연합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마디로 1980년대의 혁명주의자들은 1990년대에 선거 개혁주의자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과거 혁명주의 그룹들은 상파울로 포럼의 다수를 구성하는 다른 선거 야당 그룹들과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느슨한 연합에 참가하게 되었다. 과거 혁명주의자들과 선거연합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악영향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주장을 하였지만 부의 토대와 이를 지탱하는 국제적 금융연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고 있다. 정당들과 [선거]연합들 중 그 누구도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제기하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그들은 자본주의 위기와 수탈의 효과를 완화하는 규제 메커니즘으로서 국가를 재도입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남미 좌파의 두 번째 물결이 지닌 기본적인 약점은 토지 보유와 자본 소유관계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요구, 은행 및 대외무역 통제에 대한 요구를 버리면서 우익과 타협하려는 경향이다. 그들은 무력한 의회 내 반대 세력으로서 기능하면서 [정부·여당에 대한] 혹평과 비난으로 그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 점차 대중적 토대로부터 분리되고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보수적 모습을 드러내면서 두 번째 남미 좌파는 선거 캠페인과 떨어진 대중투쟁에 개입할 수 없거나 이를 내켜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은 <민주혁명당>의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가 멕시코시티 선거에서 승리하고 그 후 집권을 통해 그에게 투표한 중요한 지지세력들에게 혼란을 주고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같은 시기에 브라질 <노동자당>이 집권한 포르투 알레그레 시 정부는 예산배정 우위를 공식화하면서 기층의 농민에 기초하여 효과적인 도시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사회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강화하고 확장하였다. 남미 좌파의 세 번째 물결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와 기존 중도 좌파 선거정당과 선거연합체들의 무능력·무책임에 대한 대응으로서 일어났다. 베네수엘라를 제외하고, 세 번째 물결은 선거기간 전후를 경과하는 동안에도 선거정치보다 직접행동을 우위에 두는 운동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토지, 공공건물, 공장, 관청을 점거하면서 자율적인 자기통치를 위한 권력중심을 세워냈다. 이들은 2세대 운동의 권위주의적이고 제한적인 선거정치의 외부를 조직함으로서 사회구성원들의 생활에 기초한 즉각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브라질의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파라과이의 <전국농민연맹>,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코카재배농민을 가리킴 - 역주)소농연맹>, 에콰도르의 <전국노동자농민연합>(FENOC),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아르헨티나의 반체제지역 노동조합·시민운동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물결은 기존 중도좌파와 선거야당들과는 구별되는 몇몇 사회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들은 소작농들, 인디안들, 소농민들, 무토지농업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농촌에 기원을 둔다. 에릭 홉스봄과 같은 관찰자들의 예측과는 달리 농촌 노동력의 상대적 쇠퇴가 정치적 구성요소로서 소농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반대로 그들은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에서 가장 중심에 있다. 오늘날 소농과 농업 노동자운동의 지도자들은 과거 운동의 지도자들과는 매우 상이하다. 그들은 훨씬 단련되었고, 국제주의자이며, 도시의 정치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 그들은 국제회의들에 참가하고 전국적 논쟁에 개입하며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도시의 운동들, 노동조합, 선거정당들과 협상한다. 새로운 운동의 성장과 응집력은 운동 지도자들의 지도력과 직접행동의 정치가 지닌 역동적 매력과 농촌에서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수단들의 극단적 약탈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일단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정치방식에서 중도좌파 선거연합과 다르다. 즉 결과에 반응하는 대신 새로운 운동은 “(정치적) 현실을 야기하고 있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은 미경작된 거대한 토지를 점거하고, 사파티스타는 일당지배 국가(멕시코에서 <제도혁명당>(PRI)의 70여 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가리킴 - 역자)의 과도한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자기-통치의 공동체를 조직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중앙체제와 독립적으로 생산과 분배의 연계망을 세웠으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과 <민족해방군>(ELN)는 콜롬비아 지역의 40%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에콰도르의 소농-인디오 운동은 대통령 압달라 부카람을 부패 책임을 물어 퇴임시키고, 후임 대통령이 IMF 자유시장 의제를 실행하려는 시도를 저지하였다. 오늘날 사회정치운동들은 거시적 사회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투쟁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대중 계급들의 직접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들을 제출하고 있다. 무능한 소수자로서 전통적 중도좌파 선거 정치인들은 영원히 새로운 선거만 기다리는 반면 인민계급 다수의 지지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다. 소수의 중간계급 전문가들이 계획을 세우고 수직적 결정구조를 통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하는 1980년대 게릴라운동 방식과는 달리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대중 총회, 협의회, 기층 성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산디니스타-FMLN-UNRG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정부와의] 평화협정에 대한 거부이며, 과거 게릴라조직 지도자들과 중간계급 간부들이 선거를 통한 지위상승을 노리며 인민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선거주의로 이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다.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과거의 전달 모형(대중운동은 정당의 지침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라는 관념 - 역자)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거정당에 대해 독립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운동들 간에 동맹을 맺으며, 선거정당들을 지지할 수 있으나(MST는 종종 진보적인 PT당 후보를 지지한다), 그 결정은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물리적 투쟁을 제한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의 수많은 지도자들 나이는 대부분 20세에서 35세 사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로서 종파적인 이데올로기 갈등과 이전 [운동]세대를 향한 충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민족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들의 국제적 연계는 자유로운 연합과 교환, 연대에 기초하고 있다. 외부의 ‘혁명 중앙’으로부터 ‘계시’는 없다. 구성원 다수는 인민계급 출신이며(외부 전문가들이 아니다) 스스로 단련되었다.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은 ‘전위’가 아니라 ‘운동의 재원’으로서 참여한다. 사회정치운동들은 부문적 개혁을 넘어서서 민족적 변혁에 이르는 광범위한 의제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점차 그들은 토지소유 관계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국가 전체와 엘리트 계급 내 지지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수많은 농촌 기반 운동들은 민족적 강령과 전략을 정식화하였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일당 국가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판을 정교하게 수행하고, 소농과 인디오들의 자율적 공동체와 지역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민중 전략을 포함하는 탈집중화된 대안을 정식화하였다. MST는 새로운 ‘브라질 프로젝트’를 정식화하고 주요 도시의 빈민가에 거주하는 민중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지역 기반의 정당인 ‘인민주권 총회’를 결성하여 지역선거를 휩쓸면서 의회에서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기찬 강령을 공식화하였다. 많은 필자와 분석가들은 낮은 임금과 어떠한 사회급여도 없이 노동자들이 고용된 거대한 ‘비공식 부문’의 성장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그들은 비공식 부문의 성장은 지위가 하락하는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계급투쟁보다 개인적인 해결책을 추구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다른 관찰자들은 점증하는 권위주의적 지배 스타일을 언급한다. 이러한 지배 스타일은 행정부가 명령을 통해 지배하며, 자신의 재선출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을 교체하려고 입법부를 조종하며, ‘자유시장’ 정책을 추구하여 유권자와 의회를 주변화한다. 이런 통치 스타일의 함의는 선거 공약을 배반하더라도 사기 당한 유권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동적 농촌운동들은 강령, 전략, 투쟁을 조정하는 <라틴아메리카 농촌조직 대회>(CLOC)에 가입해 있다. 그 안에서 젠더 평등은 더욱 발전하고 있으며, 40퍼센트 이상의 대표들이 여성이다. 실제로 종족성, 젠더, 그리고 계급적 사안은 농촌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이 수행하는 선도적인 역할과 결합된다.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변혁을 지향하는 민족적인 정치프로젝트와 제휴해야 한다고 명확히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직접적인 사회적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운동들은 무기력에 빠지고 체제로 포섭될 것이라고 깨닫고 있다. [좌파의 세 번째] 세대의 창의력은 열린 민주주의 구조를 통해 제도적 또는 제도를 넘어서는 ‘정치’를 직접적 사회행동과 결합하는 능력이다. 오늘날 [남미 운동이 극복해야 할] 가장 거대한 도전은 농촌에서 형성된 기존 투쟁의 영역을 넘어서 도시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유사한 운동들과 동맹과 연합을 맺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농촌지역들은 체제에 포섭되지 않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의 기폭제로서 성공적 사례가 되었다. 저항으로부터 정치로,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행동으로, 부문적 개혁으로부터 민족-민중적 혁명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시작되었다. 신자유주의는 라틴아메리카 남부 원뿔지대(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 역자)에서 군사독재가 뿌린 민중의 피로부터 출현했다. 신자유주의는 국제금융기구의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는) 집행관들과 현임 대통령들에 의해 유지·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대통령 궁에서 쓰이지 않는다. 좌파운동은 치아파스 산맥으로부터 브라질 대농장으로, 파라과이 분지로부터 볼리비아 차파레 계곡에 이르기까지 반격을 가하고 있다. 1) James Petras and Timothy F. Harding, "Introduction", Latin America Perspective, Issue 114, Vol. 27 No. 5, September 2000, pp.3-10. 본문으로

  • 2005-07-29

    WTO에 반대한다!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즉각 중단하라!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WTO에 반대한다!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즉각 중단하라! 오늘부터 7월 29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WTO 일반이사회가 개최된다. 작년 이맘 때 WTO 일반이사회에서 도하개발의제(DDA) 기본골격을 전격 합의한 이후, 회원국들은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 질주해왔다. 그리고 이번 7월 일반이사회를 계기로 DDA협상의 세부원칙(Modality) 초안을 마련하고 12월 홍콩 6차 각료회의에서 세부원칙을 완성시켜 2006년 말-2007년 초에 새로운 무역질서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WTO 도하개발의제 세부원칙을 타결하고 새로운 무역질서를 출범시킨다는 것은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 질서에 맞게 재편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전 세계 노동자․민중을 빈곤과 착취, 차별로 몰고 간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 공세는 앞으로 확대될 것이다. WTO는 우리의 삶 모든 부분까지 통제할 수 있으며, 도하개발의제라는 WTO의 새로운 무역규범은 집행권, 사법권, 입법권을 갖춘 그야말로 ‘초국적 자본을 위한 전 지구적 헌법’이다. 그러나 WTO에 반대하는 전 세계 민중들의 저항, 그리고 WTO 내 개발도상국과 최빈국들의 반발로 WTO 협상이 순조롭지만은 않다. 지난 5차 칸쿤 각료회의는 결렬되었고, 작년 7월 기본골격은 다자주의 원칙을 무시한 ‘이해당사자 5개국’의 비민주적 강압에 의해 간신히 통과되었다. 지금도 미국과 유럽은 초국적 농기업에게만 유리한 수출보조금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해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계속 비난을 사고 있으며, 지난 5월 말이 기한이었던 서비스협상 2차 양허안을 제출한 나라도 한국을 비롯해 현재 24개국에 불과하다. 또한 비농산물시장접근(NAMA) 협상도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갈등 때문에 합의가 힘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7월 8일 WTO 사무총장 수파차이 파닛츠팍티는 주 제네바 대표들 간 비공식 회담에서 “홍콩을 향하는 매우 중대한 시기인데 (협상) 진척도가 불충분하다”면서 “협상이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세계 민중들의 저항이 갈수록 더욱 거세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WTO의 위기가 증폭되고 정당성은 땅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WTO반대”를 외쳐온 민중들이 오히려 정당하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그럼에도 미국과 유럽연합 등 주요 선진국들은 이런 저항과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모든 협상 분야에서 초국적 자본의 이해만을 강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작년과 같이 미국과 유럽연합 주도로 ‘이해당사자 5개국’과 같은 집단이 세부원칙 초안을 ‘날치기 통과’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런 WTO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충성이다. 쌀관세화 유예를 얻어낸다는 미명 하에 이면합의까지 해주고 추곡수매제 폐지 등을 통해 쌀개방을 촉진하고 있다. 또한 서비스협상 2차 양허안을 기한 내 제출한 4개국에 한국이 포함된다. 나아가 싱가포르 및 EFTA, 일본, 아세안에 이어 캐나다와 인도 등과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교육과 의료 시장화, 기간산업․물․생명체 사유화, 비정규직을 확대하기 위한 법안을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우리사회의 체질을 내부로부터 바꾸는 것이라면, WTO와 자유무역협정은 이를 국제법으로 보증하고 외부로부터 다시 한번 강제하는 것이다. WTO에 맞선 저항은 그야말로 전지구적이다. 바로 지금,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WTO 일반이사회 반대”를 내걸고 유럽 사회운동 활동가와 노동조합들이 ‘민중 일반이사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 농민 25명도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9월 10일은 칸쿤에서 “WTO는 농민을 죽인다!”를 외친 후 자결한 이경해 열사의 2주기로,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WTO 반대 투쟁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10월 일반이사회에 맞선 시위가 전개될 것이며, 11월 부산에서 개최되는 아펙 정상회담도 전민중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이런 흐름은 12월 13일부터 18일까지 홍콩에서 개최되는 6차 각료회의에서 최절정을 맞이할 것이다. 홍콩 각료회의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는 이미 국제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 속에서 한국 민중진영은 홍콩 각료회의에 농민, 노동자, 학생,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투쟁단을 파견해 전세계 민중들과 함께 투쟁할 것임을 밝힌다.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투쟁단은 전세계에서 모여든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빈민, 이주노동자와 환경활동가와 함께 WTO를 기필코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우리는 WTO 일반이사회 세부원칙 초안 통과에 반대하며 다음을 요구한다. 하나,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즉각 중단하라! 하나, 전세계 민중을 파멸로 몰아가는 WTO를 해체하라! 하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즉각 중단하라! 2005년 7월 27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중행동 (준)

  • 2005-07-29

    G8 외채탕감 계획의 기만성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영국 스코틀랜드 글렌이글스에서 7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린 G8(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러시아) 정상회담이 막을 내렸다. 런던 테러사건이 발생해 언론의 초점에서 다소 멀어지긴 했지만 이번 정상회담의 주 의제는 아프리카의 빈곤과 기후변화였다. 이에 따라 회담에 참석한 8개국 정상들이 서명한 글렌이글스 공동성명도 '기후변화, 에너지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아프리카'로 나뉘어 정리되어 있다.1) 이번 회담에서는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별 진전이 없었고,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들의 외채탕감에 대해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성과가 있었다는 외채탕감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것이 진정한 성과라 할만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의 일환으로서 외채탕감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외채탕감운동 외채탕감 요구는 1996년 G7 정상회담 이후 사회운동단체들의 시위의 단골메뉴였다. 이번에도 '빈곤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자'(Make Poverty History, MPH)) 조직위 주최 에딘버러 시위에 20만 이상이 모여들었는데 일부에서는 2002년 제노아 시위보다 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의 외채를 탕감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를 늘리라고 정상회담에 압력을 넣기 위해 G8 국가들의 주요 8개 도시와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를 이어가면서 진행한 마라톤 공연 '라이브 에잇'(Live 8)2)에도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런던 20만, 미국 필라델피아 100만 등 9개 도시 150만) 혹은 간접적으로(전세계 20-30억명 텔레비전 시청) 참여하였다. 외채탕감운동은 국제 채권자들이 1996년 과중채무빈국(HIPC) 외채탕감 방안을 논의하기로 동의하면서 활성화되는데, 1998년 11월 17일 로마에서 38개국 '쥬빌리 2000' 단체들과 12개 국제조직이 모여 최초의 '쥬빌리 2000' 국제회의를 열었다. 쥬빌리는 성서에서 유래하는데 죄수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50년마다 돌아오는 '기쁜 해', 즉 희년(禧年)이다. 단어에서 보다시피 이 쥬빌리 2000 운동은 선진국 종교계에서 시작한 시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운동이었다. 1998년 회의에서는 상환불가능한 외채, 원금을 실질적으로 이미 상환한 외채, 부적절하게 기획된 정책과 프로젝트로 인한 외채, 부정한 외채와 독재정권에 의해 발생한 외채를 2000년까지 탕감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쥬빌리 2000 운동은 1999년 쾰른 G7 정상회담을 겨냥하여 수만명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하여(?) G7회의에서는 HIPC의 2000억불에 해당하는 외채 중에서 700억불을 탕감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런 운동 과정에서 외채탕감운동이 쥬빌리 2000(J2)과 쥬빌리 사우쓰(JS)로 나뉘어 지는데 그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J2는 북반구 국가들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북반구에서 주도하고 있는 운동인 반면, JS는 남반구 국가의 시민사회에 외채문제를 환기시키고 남쪽 국가들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는 운동이다. 둘째, J2는 외채의 규모를 축소시키려는 목적에서 단기간 진행되는 운동인 반면, JS는 외채를 고질적인 문제로 만드는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기에 걸친 운동이다. 그리고 JS는 G7회의에서 결정되고 IMF/세계은행에 의해 승인된 HIPC 외채탕감방안을 거부하고 모든 개도국의 외채 탕감을 옹호한다. 외채탕감의 규모는? 이번 회담에서 탕감하기로 한 외채는 18개국(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 베냉 등 14개국, 중남미 볼리비아, 니카라과 등 4개국)이 국제화폐기금(IMF), 세계은행, 아프리카개발기금에 진 빚 400억불이다. 이들 국가는 1996년에 시작되고 1999년에 수정된 '과중채무빈국 방안'3)에 의해 '종결시점'에 도달한 과중채무빈국이다. 이외에도 '결정시점'에 도달한 카메룬 차드 등 9개국과 라오스 미얀마 수단 등 '결정시점'에 도달하지 않은 11개국도 '종결시점'에 이르면 외채탕감을 받게 되는데 그 규모가 각각 110억 달러와 40억 달러로 합해서 150억 달러가 된다. 이 금액과 400억 달러를 합하면 총 55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정도 규모가 얼마나 미미한 규모인지 각종 통계치와 비교를 해 보기로 하자.4) 첫째, HIPC 38개국 총 외채는 현재 1,670억불이고, 이 중 1,370억불이 공적 기관에 대한 채무다 (550억 달러 이외의 공적 외채는 다른 기관, 예를 들어 아메리카개발은행이나 쌍무적 채권기관에 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이들 나라가 550억 달러를 다 탕감 받는다 해도 여전히 1,000억 달러 이상의 외채를 지고 있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쥬빌리 법5)이 다자기구 외채 100% 탕감이 필요하다고 꼽은 50개국이 지고 있는 외채는 3,830억 달러이다. 이 중 2950억불이 공적 채권기관에 대한 외채이고, IMF와 세계은행에만 진 외채가 820억불이다. 셋째, 영국 원조기관들이 '새천년 발전 목표'(MDGs)를 달성하는 첫 단계로서 외채탕감이 필요하다고 꼽은 62개 저소득 국가들이 지고 있는 외채는 5000억불 이상이고 이들 중 4,460억 달러를 공적 채무기관에 지고 있고, 아이엠에프와 세계은행에게만 지고 있는 빚이 1,400억불이다. 넷째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국가들의 총외채는 2080억불이다. 다섯째, 모든 개도국의 총외채는 2조 4천억달러이다.6) 여섯째, G8 국가들이 매년 군사예산으로 사용하는 규모에 비춰보자. 예를 들어 2004년 미국의 군사예산은 4,000억 달러이고,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6개국의 군사예산은 1,914억 달러였다. 그런데 외채 탕감은 향후 몇 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고 따라서 매년 탕감되는 액수는 불과 10-20억불뿐이다. 그 규모가 얼마나 작은지 확연히 드러난다. 참고로 G8 국가들은 남반구 국가들의 쌍무적 다자적 외채에 대한 이자로만 매년 미화 230억달러를 거둬들인다. 결정적으로는 벨기에의 '제3세계 외채탕감위원회'의 다미엔 밀레와 에릭 뚜상에 의하면 이번에 탕감하기로 한 18개국의 400억달러 외채는 이미 악성외채여서 시장에서는 대폭 할인되어 평가되는데 미국의 방식(92% 할인율 적용)에 의하면 32억 달러에 불과하다고 한다. 다른 문제점들 이번 G8 외채탕감방안은 그 규모가 매우 적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외채탕감 조건이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HIPC 방안은 외채탕감을 받기 위해서 '결정시점'과 '종결시점'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각국은 IMF와 세계은행이 승인하는 '빈곤경감 전략문서'(PRSP)를 마련해야하고, IMF의 '빈곤경감 및 성장촉진책(PRGF)과 같은 대출협약을 포함해서 여타 IMF와 세계은행의 대출협약에 있는 조건들에 순응해야 한다. 이런 PRSP와 PRGF에 담겨있는 조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교육, 보건 같은 사회적 비용을 줄여 재정적자를 감축할 것, 전력, 전기 전화, 물, 의료 등을 민영화할 것,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할 것, 외국인 투자에 대한 장벽을 제거할 것, 공공부문 규모를 줄이고 노조조직을 어렵게 만들 것, 외화획득을 위해 수출(자연자원 수출을 포함하여)을 늘릴 것, 무역과 투자를 차별 없이 자유화할 것, 생활필수품에 대한 보조금을 제거할 것 등이다. 다음으로는 이번에 탕감조치를 받았고 앞으로 받을 예정이 38개국은 외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남반부 국가들 160개국 중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백 번 양보해서 매우 긴급한 나라들 외채를 탕감한다 하더라도 쓰나미 피해국이나 아이티 같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들의 외채가 탕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다른 중요한 채권기관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 개발은행과 아시아 개발은행이 그것들이다. 외채를 탕감 받게 되는 4개 중남미 국가들(볼리비아 가이아나 온두라스 니카라과)은 아메리카 개발은행에 이후 5개년에 걸쳐 약 14억불의 외채원리금 상환을 해야 할 것이다. 라오스는 HIPC에 있는 유일한 아시아 국가인데, 부탄, 베트남,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필리핀 등 다른 아시아 국가도 심각하게 외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주로 아시아 개발은행에 외채를 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쥬빌리 사우쓰 등 거의 모든 외채탕감운동단체들이 요구해 온 증오스럽고 불법적인 성격의 외채는 무시되었다. 예를 들면 남미 독재국가, 남아공의 인종차별국가, 필리핀의 마르코스 치하의 외채 등이 그것들이다. 글을 맺으며 앞에서 보았다시피 이번 G8 회담에서의 외채탕감은 그 규모가 미미할 뿐만 아니라 이미 기진맥진하여 외채를 갚을 수 없는 나라들에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세계화로의 편입을 조건으로 탕감한 것이다. 또한 지난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 실패할 때 베넹, 부르키나파소 등 서아프리카 4개국이 문제삼은 면화보조금도 한 원인이 되었는데 이번 외채탕감이 12월 홍콩 WTO 협상을 앞두고 아프리카 빈국들을 입막음하자는 차원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까? 아무튼 이번 외채탕감은 중심부 국가의 이익과 초민족적 자본의 이익을 조금도 침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한편 '라이브 8' 공연 주최측과 거대 비정부기구들이 청원식 운동을 펼치면서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당사자인 미국, 영국 등 G8 지배세력에 단호히 맞서지 않은 것은 이들의 한계라 할지라도, 이에 부지불식간에 끌려 들어간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세력 또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안세계화 운동단체 AIDC의 말을 들어보자. "G8 정상회담의 결과는 세계화의 이면인 전쟁과 군사주의에서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면서 세계화에 인간적인 면모로 채색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사회정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포섭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략을 다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G8과 함께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하는 우리 정부들에 대항해 싸우는 동시에 G8과 그들이 지도하는 WTO, 아이엠에프, 세계은행 등의 정당성을 허무는 우리의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MPH의 지배적인 추진주체는 반세계화 운동, 세계사회포럼, 세계 곳곳의 대중적인 사회운동들의 어마어마한 성장을 가져다준 이런 전략에 등을 돌렸다. 유명인사들, 업계거물 및 조언자들은 실천, 조직화 및 저항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7)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이를 극복하겠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개도국 발전, 성장, 빈곤퇴치 등 어느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이제는 전쟁을 병행하고 있다.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이 애초에 외채를 구조적인 문제로 본 바에야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쟁을 통해 남반구 민중에 대한 지배와 공격을 강화하는 세계의 지배세력들에게 청원하는 방식의 운동에 이끌리지 말고8) 일국적 세계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통한 변혁운동과 결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번 G8 회담 및 이에 대한 대응의 교훈이 아닐까 한다. 1) 원문은 http://www.fco.gov.uk/files/kfile/postg8_gleneagles_communique.pdf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약 20년 전에도 '라이브 에이드'(Live Aid)를 기획했던 아일랜드 출신 록가수 밥 겔도프가 기획한 이 공연에는 엘튼 존, 폴 매카트니, 마돈나, U2 등 유명한 대중가수들과 넬슨 만델라 등이 출연했다. 영어로 '8'은 '에잇'인데 '원조'를 뜻하는 'aid(에이드)'와 발음이 유사하다. '라이브 8'은 '라이브 에이드'(원조를 위한 라이브 공연)이기도 한 것이다. 본문으로 본문으로 4) http://www.jubilieeusa.org/press_room/firststep.pdf와 http://www.jubileesouth.org/upload1/jsstatementforg8.pdf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5) 2005년 3월 미국 하원에 제출된 법안으로 정식 명칭은 ''2005년 정의, 외채탕감 이해, 그리고 형평에 관한 법률'(Justice and Understanding By International Loan Elimination and Equity Act of 2005')이다. 6월 현재 75명의 양당 의원이 발기인으로 되어 있다. 본문으로 6) 80년대 후반 남미 외채위기 이후 외채조정방안으로 등장한 베이커플랜은 외채를 주식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외채문제 폭발을 지연시켰는데 이로 인해 반주변-주변부의 외채는 주식형태로 많이 바뀐 상태이다(외채-주식 전환). 즉 외채규모는 현재 초민족적 자본의 지배로 인해 반주변-주변부가 처한 문제의 실상을 다 보여주지는 못한다. 특히 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한국 등 반주변부에서 그렇다. 이런 나라에서는 초민족적 자본의 이탈(capital flight)로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이 붕괴하면서 위기가 도래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본문으로 7) http://www.aidc.org.za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8) 이를 위해서는 청원방식의 외채탕감운동을 재고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HIPC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위기와 비극의 주된 요인을 구조적 요인, 즉 식민지이전 및 식민지 유산, 미국 주도 세계자본주의의 수익성 및 정당성 위기와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실질금리 인상을 통한 개도국과의 국제 화폐자본 유치 경쟁, 제조업 제품 수입증대를 통한 경상수지 적자 누적, 동아시아 원조 및 역개방정책)으로 보는 세계체계론자 아리기는 아프리카 각국 정부가 70년대 중반 이후 위기를 근본적으로 회피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위기의 영향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중 하나가 세계은행이 지시한 조건으로 채무재조정을 하기 보다는 디폴트(지불정지)를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디폴트는 단기적으로는 위기를 낳았을지 모르겠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파괴적인 영향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지오반니 아리기, 〈아프리카의 위기 : 세계체계적인 그리고 지역적인 양상들〉, 《사회진보연대》, 2002년 11월호, 2003년 1-2월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박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