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지난해 9월 시사저널에 실렸던 글로서, 북미 베를린회담 타결및 페리보고서를 배경으로 하여 향후 북미간의 협상의 쟁점과 전망을 간략히 분석한 글입니다. 일본 배상금 받으면 북한“고생 끝” "시사저널" 1999년 9월 22일 김석진(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포괄 협상안의 가장 큰‘떡’은 북한·일본 수교 자금 베를린 미·북한 고위급 회담이 타결된 데 이어 마침내 페리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요약본만 발표하고 본문은 ‘비공개’ 대상으로 분류했다. 본문이 공개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민감한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본래 협상안이란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협상 과정에서 조율해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법이다. 페리 북한 정책 조정관은 이미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해 이른바 ‘페리 권고안’을 설명한 바 있다. 그 골자는 북한이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배치·수출을 완전 포기할 경우, 한·미·일 3국이 북한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고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협상 과정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겠지만,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으로는 △식량 및 에너지 지원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 추가 완화 내지 해제 △경제개발 사업 지원 및 경제 협력 강화 △국제 기구의 개발 차관 제공 △일본의 대북 배상금 지불 등이 제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포괄 협상이 성공할지를 점쳐 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경제 지원이 북한 처지에서 볼 때 과연 어느 만큼 매력적인 것인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식량 지원 확대는 북한의 식량난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최근 수년간 북한의 연간 곡물 가용량은 국내 공급량 3백50만∼3백80만t, 외부 도입량 백여만t을 합해 4백50만∼5백여 만t으로, 단순 생존을 위한 최저 수요량인 4백80만t을 겨우 충족할 뿐, 최소 영양 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수요량인 6백만∼6백50만t에는 크게 모자라는 수준이었다. 북한, 한국의 대규모 지원 꺼릴 듯 가령 미국이 매년 백만t씩 지원을 보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북한의 연간 곡물 가용량은 최소한 5백만t을 넘게 되어 기아 상태에서는 확실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나, 영양 실조 상태는 여전히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4자 회담이나 금창리 사찰 등 이슈가 있을 때마다 미국이 수십만t씩 식량을 지원했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지원 규모를 연간 백만t 정도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의회가 북한 관련 예산 지출에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이상의 파격적인 지원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둘째,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 완화는 9월12일 베를린 회담이 타결됨에 따라 곧 실행될 예정이다. 앞으로 포괄 협상이 성공한다면 제재 완화 폭이 점점 넓어져, 결국 완전 해제되는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 제재가 풀린다 해도 가까운 시일에 미·북한간 교역 및 투자가 쉽게 활성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북한산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려면 전면적인 재산업화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이며, 북한 같은 소규모 후진국은 미국 기업들의 투자 대상지로는 별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경제 개발 사업 지원과 경협 강화는 주로 한국에서 맡아야 할 몫이다. 이에 대해 세부적인 안은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한국 정부는 대체로 농업 개발 지원과 산업기술 개발 지원 및 경협 사업에 대한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지원 규모는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북한 당국은 남북 간의 인적 접촉이 뒤따르는 지원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국제 기구의 차관 제공과 일본의 배상금 지불인데, 지난 5월 페리 방북을 앞두고 일부 언론이 보도한 ‘백억 달러 지원설’도 바로 이 두 사안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것이다. 즉 한·미·일 3국이 포괄 협상을 수용하는 대가로 북에 제공할 자금의 최대치인데, 그 중에는 북한과 일본이 수교할 경우 일본이 북한에 주어야 할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또 여기서 모자라는 부분은 아시아개발은행(ADB)이나 세계은행(IBRD) 등 국제 금융 기구가 북한에 제공하는 장기 저리 차관으로 메우되, 이에 대해서는 한·미·일 3국이 지급 보증을 서는 방안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일본 배상금 북한에 유입되면 남북 경협 차질 물론 국제 금융 기구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고 나름의 기준과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포괄 협상 타결이 반드시 국제 기구의 차관 제공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베트남이 대미 관계를 개선한 뒤 94년부터 97년까지 세계은행으로부터 16억 달러 차관을 받았던 선례에 비추어 볼 때, 북한도 연간 수억 달러를 빌릴 가능성이 크다. 대일 수교에 따른 배상금은 이와 비교할 수없을 만큼 규모가 크다. 한국이 60년대 일본과 수교하는 과정에서 받았던 자금 규모를 고려할 때, 북한이 받아야 할 배상금은 50억∼백억 달러가 된다는 것이 통설이다. 예를 들어 일본이 5년간 매년 15억 달러씩 모두 75억 달러를 북한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타결한다고 가상해 보자. 15억 달러는 한국은행이 추정한 98년 북한 GDP 1백26억 달러의 12%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또 지난해 유엔개발계획(UNDP)은 북한의 ‘농업 생산 회복을 위한 행동계획’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해외 자금을 3억 달러로 평가했는데, 이 가운데 1억 달러는 비료공장 2개의 설비 교체·보수를 위해 필요한 자금이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매년 15억 달러 정도의 자금이 들어간다면, 농업·제조업·인프라스트럭처 등 주요 경제 부문을 경제 위기가 발생한 90년대 초 이전 수준으로 정상화하기에 충분한 규모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북한은 앞으로 수년간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 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처럼 일본의 대북 배상금 지급은 앞서 말한 미국·한국의 경제 지원이나 경제 협력에 비해 월등한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보이며, 북한의 경제 회생을 위해 필요한 투자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북한 당국이 ‘페리 권고안’에 따른 협상안을 간단히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대북 포괄 협상의 성공 여부는 북·일 수교와 일본의 대북 배상금 지불 문제가 얼마나 원만하게 해결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만약 대북 포괄 협상이 성공한다면, 그 뒤의 남북 관계는 우리가 생각해온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까지 한국 정부나 기업들은 북한과 대규모로 교역하거나 투자함으로써 북한 경제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국가는 한국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배상금을 중심으로 북한의 경제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한국보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주도권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 당국도 막대한 자금을 쓸 수 있게 되면, 남북 경협에 종전만큼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다. 북한 당국은 남한과의 교류가 자신들의 체제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포괄 협상은 성공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성공한다 해도 반드시 남북 관계에 좋은 영향만 미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한국 정부의 북한 포용 정책이 목표로 삼고 있는 남북 간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과 평화 공존은, 현재 미국이 주도해 진행하고 있는 대북 포괄 협상만으로는 달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새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진정한 평화 통일의 길로 가기 위해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먼 것 같다. 김석진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