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세종연구소(web.sejong.org)에서 발행하는 '정세와 정책' 2000년 5호에 실린 글입니다. 현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연구소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인 듯하여 등록합니다. 북·미, 북·일 관계 현황과 남북정상회담 서동만(외교안보연구원 교수) suhdm12@chollian.net 머리말 페리보고서 발표 이후 북·미 협상이 진전되고 북·일 수교교섭이 개시되다가, 예상을 뛰어넘어 답보상태에 있던 남·북한관계가 정상회담 합의로 비약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 것인가? 북·미, 북·일 관계와 남·북한 관계는 그 선후관계 여하를 둘러싸고 상당히 미묘한 상호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같이 얽혀 있는 3자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년에 발표된 페리보고서로 되돌아가 그 이후 전개된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리보고서의 성격 페리보고서가 상정하는 북한 미사일 문제에 대한 ‘포괄적 접근방식’, 즉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는 주한미군문제 및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북·미 미사일 협상을 분리시키는 처리방식이었다고 해석된다. 이는 한반도문제 해결에 있어서 선 북·미, 북·일 수교, 후 평화체제 구축(주한미군문제 처리)이라는 경로이다. 협상조건에서 볼 때, 북한이 미사일 수출·개발을 포기하는 대신에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조치 해제, 북·미 수교, 북·일 수교가 교환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어떻게 되는지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페리보고서가 상정하는 대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를 전제로 한 것이다. 페리보고서는 당초부터 그 목적을 미국의 대북 정책을 재조정하는 데 설정하고 있으며,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라는 미국의 세계전략과 관련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페리보고서는 북한이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의 요구와 북한의 요구를 같이 충족시키는 ‘포괄적 접근’을 취하되, 북한의 태도를 하나 하나 확인하며 미국은 상호주의에 입각, 점진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간다는 것이다. 페리보고서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남·북한과 미국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는 주한미군 및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페리보고서와 어떤 관련을 갖는가 하는 데 있다. 여기서 페리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남북한 양측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련의 사건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 내지 성격의 변화를 원한다고 발언함으로써 내외에 논란을 일으킨 사실이다. 이는 페리보고서 속에 주한미군문제를 넣음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경로를 포함시키려고 했던 의도였다고 추측된다. 이것이 상정하는 것은 북·미 협상이 남북정상회담-남북기본합의서 이행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코스, 즉 남·북한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코스이다. 그러나 이 경로는 주한미군의 현상변경을 수반하기 때문에 시기상조란 이유로 내외의 반대에 부딪혀 수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페리보고서 성사 여부의 불확실성 페리보고서를 평가할 때, 위에서처럼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정도라도 제대로 실현되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해진다. 페리보고서는 그 작성과정에서 한국정부의 대북정책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도 1998년 8월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이후 북한 미사일 위협을 둘러싼 미국 내 초강경 분위기가 전환하여 북·미 베를린 미사일 협상이 타결에 이른 것은 한국정부의 노력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미국과 북한이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간다는 것은 북한 폭격설이 나돌던 상황으로부터 커다란 전환임을 부정할 수 없다. 1994년 제네바 핵합의 이후 북·미관계는 거의 답보상태였다. 부분적이지만 경제제재조치가 해제되고 본격 협상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커다란 진전이다. 한반도 냉전구조는 50년 이상에 걸쳐 굳어진 것이며, 그 속에서 북·미, 북·일 대치관계가 형성되었다. 남·북한 관계 못지 않게 북·미, 북·일 적대관계도 풀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만큼 페리보고서가 상정하는 변화만으로도 그동안 북한이 직면해 온 적대적 조건은 상당히 완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와 가능성을 지닌 페리 프로세스도 실제 북·미 협상과정에서는 그 성사가 쉬운 일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대북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공화당이 우세를 보이는 가운데 내년 4월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 국내정치 상황에서 페리보고서대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을지 불투명하였다. 북한도 이러한 점을 의식하여 일단 미사일 추가 발사 중단이라는 유화적 자세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일본 상황을 보더라도 북·일 수교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북·일 수교교섭은 개시되었으나, 이미 일본 내에서는 북한 위협을 변수로 급속히 보수·우경화가 진행 중이며 납치사건문제로 반북한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북한 미사일 발사 유예 이후 북·미관계 페리 프로세스가 가동되면서 북·미 간에는 1999년 9월에 북한의 미사일 추가 발사 유예 조치에 대하여 미국이 경제제재조치 일부 해제를 약속하고 양측은 미사일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로 합의하였다. 나아가 미국과 북한은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나 백남순 외상 정도의 고위급 인사가 미국을 방문, 북·미 간에 고위급 회담을 가지기로 하였다. 이후 일련의 예비회담을 통하여 북한은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도록 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경제제재조치가 해제되기 위해서는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제외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 눈치를 봐야 하고 차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론의 동향에 신경을 써야 하는 미국 행정부로서 이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던 것이다. 북한측은 미국이 북한을 테러 지원국에서 제외하는 것을 고위급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미국은 북한이 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난 1987년 이래 테러활동에 연루된 바가 없음을 인정하며, 앞으로 테러활동에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서약하고 국제협약에 가입하는 등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일본의 의견을 받아들여 과거 일항기 납치사건으로 평양에 망명 중인 적군파들을 외부로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고위급 회담 의제 문제에서도 미국은 북·미 간 현안 외에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 와 안정 문제도 논의할 것을 전제로 북한이 ARF(아세안지역 포럼)에 가입할 것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북한은 필리핀과의 수교를 통해 ARF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바 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차관방식에 의한 식량 판매를 요청하고 중유 공급을 정기적으로 실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초 고위급 회담 개최까지는 낙관시되던 북·미 관계가 상당한 기복을 겪게 됨에 따라 3월로 점쳐지던 고위급 회담은 계속 늦춰지게 되었다. 더욱이 4월 미국은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던 시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북한의 대이란 미사일 기술 수출을 문제삼고 북한에 대해 새로운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북·일 수교교섭의 개시 1999년 12월 무라야마 방북에서 북·일 양국은 수교교섭에 합의함에 따라 4월 평양에서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5월에 도쿄에서 수교교섭을 속개하기로 되어 있다. 일본정부는 수교교섭에 맞추어 북한에 대해 10만 톤의 쌀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일본 내에서는 납치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보수·우익측 요구가 강해짐에 따라 북한과 일본은 수교교섭이 개시되기 전인 3월 베이징에서 적십자회담을 열었으며, 북한은 납치사건문제 해결에 성의를 다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북송 재일동포 일본인 처 귀향사업도 재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수교교섭 본회담에서 북한은 국교정상화의 전제로서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방안으로서 첫째, 일본정부 최고책임자의 사죄, 둘째, 인적 및 물질적 손해에 대한 보상, 셋째, 문화재 반환 및 보상, 넷째, 재일 조선인의 법적 지위 개선 등 네 가지이다. 일본측은 북·일 양국은 교전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상에는 응할 수 없으며, 청구권방식의 협상에는 응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아가 수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본인 납치사건문제와 미국과의 사이에 진행 중인 미사일문제 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1991-92년 제1차 수교교섭 당시 회담의 나중 국면에서 양보했듯이, 교전당사자로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거나 1945년 이후 전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며, 넓은 의미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또한 제1차 수교교섭 때와 마찬가지로 회담의 나중에 가서 사죄나 보상 문제를 포함하여 현안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전제로 수교를 먼저 맺자는 입장으로 나왔다. 북한의 이러한 타협자세를 보면,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에 얼마나 적극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북·일 수교교섭은 여러 가지 현안을 안고 있으나, 최대의 고비는 역시 납치사건문제 및 미사일문제로 보여진다. 원래 사죄와 보상 문제가 가장 타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졌으나, 1998년 한일공동선언에서 일정한 진전이 생겨 일본이 한국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를 표명함에 따라 이를 북한에게도 적용한다면 타결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수교교섭에 때를 맞추어 납치사건 해결을 추구하는 운동단체의 요구가 강경해지며 정부로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일본측이 이 문제를 수교교섭의 전제로 고집하는 한 현실적으로 수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북·미관계가 아직 진전이 없는 상태라는 점도 회담에는 불리한 환경이 되고 있다. 미국은 핵문제로 북한과 대치상태에 있던 1991-92년 수교교섭 당시와는 달리 이번에는 미국 국내사정이 곤란하다는 점에서 국면에 따라서는 북·일관계가 북·미관계보다 앞서가더라도 이를 용인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납치사건을 둘러싼 일본 내 사정이 이를 허용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 되고 있다. 북한측의 변화와 남북정상회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북·미, 북·일 관계가 대립국면에서 협상국면으로 전환하는 데는 남한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북한도 이를 내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비공식적인 레벨에서 그 뜻을 남한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이 점에 관한 한 남한측 정책의 성실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북·미, 북·일 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남·북한 사이에 일정한 신뢰가 형성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단 협상국면에 들어가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북·미, 북·일 관계 타결이 쉽지 않음을 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남한과의 경제협력이란 커다란 유인 외에도 북·미, 북·일 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남한측이 적극적으로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었고 이에 대해 북한측이 호응하는 결단이 내려졌을 것이다. 당초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으로서는 적어도 주한미군문제의 일정한 타협을 포함하여 정치·군사적인 현안이 타결되는 것을 전제로 생각한 듯하다. 게다가 이미 북한은 1998년부터 외세와의 공조파기 및 합동군사훈련 중지,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운동 자유 보장 등 3개 선행조건 충족을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것은 주한미군문제나 3개 선행조건을 그 전제조건으로 하기보다는 이를 남북대화 및 남·북한 교류·협력과 병행 추진하는 전략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은 그동안 국제화되었던 한반도문제를 남북한 주도로 풀어가기 위한 포석이란 의의를 갖는다. 북한 입장에서는 경제협력을 포함하여 남·북한 고유의 민족문제를 풀어간다는 의미와 함께 북·미, 북·일 관계를 남한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간다는 의미도 갖는다. 남한 입장에서는 우선 그동안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해 왔던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결실을 맺었다는 의미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북한의 대미, 대일 우선전략이 벽에 부딪쳤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었다는 데에 안주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안이한 인식을 가져서는 과거의 ‘조화와 병행의 원칙’을 답습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남한은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이를 지속화하는 노력을 추구하는 동시에 남·북한 협력을 통해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가 실현되도록 한다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가서는 중장기적으로 정치·군사 문제에 관하여 미국도 포함하여 남·북한이 타결을 이루기 위한 준비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