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아메리카니즘 -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와 미국정치의 현실 - 저자: 사회화와 노동 편집부 출처: 사회화와 노동 66호 2000년 11월 14일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심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미국의 세계전략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전략이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이는 단지 민주-공화 양당 후보 중 누가 당선이 되느냐하는 문제는 아니다. 선거를 전후한 과정에서 미국 내의 각종 정치·사회세력들이 어떻게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전략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선거 후의 실제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신자유주의 노선이 미국 내 정치전략상으로는 어떻게 드러났는가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번 플로리다 재검표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으킨 (독자적인) 정세적 효과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즉, 재검표 사건이 있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정치적 쟁점과 지형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두가지 점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 글에서는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에 대해 생각해 볼 몇가지 측면을 지적하기로만 한다.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에서 다룰 것을 약속한다.) 미국대선, 법정투쟁으로?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시점까지도, 미국대통령선거가 어떻게 끝날지 매우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부재자 투표의 도착 마감일 때문에 플로리다주의 최종 개표 결과 발표는 최소한 11월 17일을 넘겨야 한다는 점, 그리고 11월 18일이 되면 최종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시 확실한 사실은, 18일에 어떤 발표를 하게 되더라도, '나비' 모양의 투표용지에 대한 민주당원들의 항의, 수작업을 통한 재검표 허용 여부에 대한 찬반양론 등, 법적인 해석에 대한 논란 가능성이 여전히 남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는 미국 대선의 결과가 대중의 직접적인 투표결과가 아니라, 투표 및 검표 과정에 대한 '법정'의 판결에 따라 좌우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그 최종적 결과가 도출되기 전까지 사태가 장기화되는, 미국 헌정 사상 초유의 상황으로까지 발전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게다가 플로리다주에서 12월 12일까지 선거인단 구성을 마무리짓지 못할 경우, 이를 제외한 상태에서라도 대통령선출을 강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사안들을 코미디의 소재로 만들기 좋아하는 미국의 어떤 논객은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될수록 미국 국민은 대통령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익살을 떨기도 하지만, 사태는 최소한 그것보다는 더 심각해질 개연성도 있는 셈이다. 재검표 사태가 발생한 직후, 언론은 절호의 기회라도 맞이한 듯 극단적인 상황까지를 염두해 둔 시나리오들을 연일 그려내곤 하였다. 하지만 사태의 실마리가 쉽게 풀리지 않자, 오히려 지금은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주고 고조된 미국인들의 심경을 누그러뜨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또 미국 언론은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이 맞붙은 대통령선거를 거듭 상기시키고 있다. 이때에도 케네디는 0.2% 차로 승리를 거뒀지만 하와이 등지에서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이때 닉슨후보 측이 즉각 패배를 시인함으로써 사태가 더 이상 비화되지 않았다. 결국 언론은 한쪽 후보가 대단한 결단력을 발휘해 용퇴함으로서 일단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논자에 따라서 그 후보가 부시이어야 할지, 또는 고어이어야 할지 입장이 갈리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후보들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타이밍의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이번 사태는 단지 우연적으로 불운한 사건들의 결합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다. 투표에 들어가기 전부터 양후보간의 박빙의 승부가 예견되었고 각 정당의 기층조직에서 격정적인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예견될 수 있었다. 따라서 플로리다주 재검표 과정에서 밝혀진 여러 사건들중, 특히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흑인들의 투표가 조직적인 방식을 통해 가로막혔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재 최대의 관심지역인 팜비치카운티에서 흑인들이 유권자 명부 뿐 아니라 규정에도 없는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으면서 투표를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로리다는 소득수준 상에서 미국내 최상층에 속하지만 지역별로 슬럼가가 형성되어 흑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참정권이 비단 이번 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공공연하게 침해되었으며, 단지 이번 플로리다 사태로 인해 밖으로 알려졌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는 미국인들이 '본원적'으로 합의되었다고 주장되는 '기회균등'의 평등관(기회의 평등은 인정하되, 결과의 평등은 반대하는 '반평등적' 평등관)에조차 미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 선거의 쟁점과도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미국 대선에서의 쟁점은 다른 선거가 구분되는데, 대선은 주로 국방, 조세, 사회정책이 부각된다. 이번 대선에서 첨예한 쟁점이 있었다면 사회보장정책 문제였다. 그런데 미국 사회에서의 사회보장을 둘러싼 논쟁은 단지 보다 많은/적은 국가의 책임과 같은 양적인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뛰어 넘는다. 즉 이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대립으로 쉽게 비화되며, 여기에는 주로 인종주의/성차별주의에 문제가 개입된다. 다시 말해 부시의 정책은 '사회보장에서 개인의 선택범위를 넓히자'는 주장과 같이, 사회보장의 문제를 시장-개인주의적 성격으로 규정한다. 이는 곧 시장의 방식으로 구현되는 사회보장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들을 노력하지 않는 무능력·무기력한 자로 손쉽게 낙인찍어 버리게 된다. 즉 인종적·성적 차별의식이 보수주의적 정책논리와 공명하게 된다. 한편 대통령선거제도를 비롯하여 미국의 정치제도가 이러한 사회보수화의 경향을 굳히는데 크게 기여한다는 점도 이번 선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특히 선거인단 제도의 존재로 인해 전체 득표율이 선거결과에 직접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선거인단 독식제로 인해 민주-공화 양당 이외의 제3세력의 등장이 구조적으로 제약된다는 점 등이 언급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본원적으로 보수적인 미국의 헌법(1787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어느 제헌회의 구성원이 "대중에게 대통령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마치 장님에게 색깔을 선택하게 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표현했던 바와 같이, 선거인단 제도는 대중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제도였다. 연방판사를 임명하는데에는 대중들이 어떤 영향력도 행사될 수 없었다. 연방의회 역시, 단원제 의회 대신에, 강력한 힘을 갖는 6년 임기의 상원을 두는 양원제를 채택하였다. (대통령, 상원의원, 하원의원들의 임기가 서로 엇갈리는 것은 급작스러운 정치적 변화를 예방하는 의미가 있었다.) 물론 20세기에 들어 참정권의 확대가 크게 확장되었지만 이에 조응해, 공화당-민주당 양당 이외의 제3후보의 선거등록 및 자금조달이 현저하게 불리하도록 지속적으로 선거법이 개정되었다. 상처입은 아메리카니즘 대권의 공백과 양당간의 격렬한 투쟁, 또는 선거의 기층에서 이루어지는 공공연한 인종차별과 부정, 사회정책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대립,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정치제도. 이번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는 오늘날의 미국 정치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양당의 태도가 절제되지 않는다면 그 폭발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예상하기 힘들다. 불과 몇백표 차의 승부는 양후보에게 큰 유혹이지만(그들이 선거에 쏟아부은 3조 3천억원의 선거자금을 생각해보라!), 사태가 지속되면 양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동일시도 굳어지고, '국론'의 분열은 장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최후의 타협책이 모색된다면, 그것은 결국 언론에서 제기하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명예로운 승자와 명예로운 패자라는 미국 대선의 고전적인 등식에 대입해내기 위한 드라마적 계기(특히 미국의 헌법과 건국정신을 존중한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관건적이다), 정책적 타협점을 만들려는 전문가들의 작업들이 가동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으로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과거와는 다른 역사가 될 것이다. 미국만은 예외라는 그들의 자기숭배, 아메리카니즘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