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무기는 곧 핵전쟁의 유발 요인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혹자는 현재의 한반도 전쟁 위험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닮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쿠바 미사일 위기란 무엇이었나?
미국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이 벌어졌다면 단시간 내에 최소 1억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과연 인류 역사의 최고 위험이라 불릴 만했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려는 미국의 시도, 즉 19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몽구스 작전)이 실패한 후, 1962년 5월 소련 흐루시초프는 미국의 쿠바 침공을 억제하기 위해 쿠바에 소련 핵미사일을 배치한다는 구상을 제안했다. 7월에 흐루시초프와 카스트로는 비밀합의를 체결했고 미사일 기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에 대한 맞대응이기도 했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 U-2 정찰기는 준중거리 미사일(사거리 1,000-2,500km) 기지와 중거리 미사일(사거리 2,500-3,5000km) 기지 건설 장면을 촬영했다. 이로부터 13일 간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공중과 해상을 통해 쿠바를 공격하는 계획을 검토했으나 군사봉쇄를 선택했다. (케네디 정부는 여러 이유 때문에 이른 ‘격리’라고 불렀다.) 미국은 공격용 무기가 쿠바에 전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고 쿠바에 건설 중이거나 완성된 소련 미사일 기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10월 24일, 후르시초프는 봉쇄는 인류를 핵전쟁의 심연으로 몰아넣은 공격행위라 규정하며 맞대응했으나, 비밀협상 채널이 개설되었다. 이 와중에 소련 선박은 봉쇄를 뚫기 위한 시도를 지속했고 미국은 해군 전함에 경고사격 후 발포하라는 명명을 내렸다. 10월 27일 미국 U-2 정찰기가 격추되면서 즉각적 보복조치가 검토되었으나 케네디는 협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8일 양국은 극적으로 협상 타결에 도달했다. 소련은 쿠바의 공격무기를 해체하여 소련으로 되돌려 보내며 이를 국제연합을 통해 검증하고, 미국은 쿠바를 결코 침공하지 않는다고 공개 선언한다는 것이 공개된 합의였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에 대항에 터키와 이탈리아에 배치한 핵탄두 장착 중거리미사일 주피터를 해체하다는 비밀합의도 제공해야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세계 외교사의 전설로 남아 있고 국제정치학이나 협상학에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 후 50년 동안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수만 페이지의 해석과 분석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미국과 소련 핵전력의 포괄적 전투서열을 다룬 것은 거의 없다. 1962년 10월 중반부터 쿠바 해상봉쇄가 끝나는 1962년 11월 20일까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중 일부는 높은 수준의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무기 체계 상태를 상세히 평가하면 위기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그 결과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그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위험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번 글에서는 『핵과학자회보』에 실린 로버트 S. 노리스와 한스 M. 크리스텐의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11월의 핵 전투서열」을 소개하며 당시에 발발할 수도 있었던 세계 핵전쟁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검토한다. 그로부터 한반도 전쟁 위험에 관한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위험성 평가
위기가 최고조가 달할 당시 미국은 약 3,500개의 핵무기가 명령에 따라 사용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아마도 300-500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많은 규모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양측의 6개 정도의 미사일로도 파국이 벌어질 수 있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와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핵전쟁을 시작할 의도가 없었고 핵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시도를 다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들이 예측할 수 없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1962년 10월 전면 핵전쟁이 발발했을 가능성을 계측하기 위해선 양국의 핵전력 전투서열을 쿠바 인근 지방의 핵전력, 유럽 지역의 핵전력, 세계전력이란 세 범주로 나눠 검토해야 한다. 지방 전력은 쿠바 내부 또는 그 주변에 배치될 수 있는 핵무기를 뜻한다. 지역전력은 유럽에 배치되어 소련의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미국 전술핵무기와 소련 서부에 배치되어 유럽의 목표물을 조준한 소련 핵무기를 말한다. 세계전력은 세계적 핵전쟁에 사용되는 전략핵무기로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장거리 폭격기로서, 이는 미국과 소련, 상대방 영토에 도달할 수 있다.
쿠바 인근 지방의 핵전력
쿠바 또는 그 인근에서 핵무기가 사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나리오는 쿠바를 침입한 미군을 격퇴하기 위해 소련이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만약 미국 군인이 피살되었다면 미국은 보복하고 소련은 그에 대응해야 했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봉쇄가 개시된 10월 24일 시점에 쿠바에는 다섯 개 유형의 핵탄두 158개가 배치되었거나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는 1990년대 초반까지 미국이 정확히 몰랐던 사실이다. 그 중 95~100개가 사용될 수 있는 상태였다. 중거리 탄도미사일 SS-5는 쿠바에 도착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SS-4 중 6-8기가 작전태세에 도달했다. 또한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폭격기 IL-28(일류신-28)은 아직 나무상자에 담겨 있었다. 가장 수가 많고 위험한 사용가능 핵무기는 대지 순항미사일, FKR-1 2개 연대를 위한 80개의 핵탄두였다. 만약 미국이 침공했다면 이 미사일이 관타나모의 미 해군기지와 쿠바 해안의 미군 해병대 합동부대를 공격했을 것이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미국의 쿠바 침공을 위한 핵무기 계획이다. 작전계획이 처음 수립되었을 때는 미 합동참모부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으나 10월 31일에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한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을 지휘하는 대장 이사 플리예프가 FROG 단거리 미사일(일명 루나)이나 FKR-1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논쟁이 많다. 그러나 학자인 스티븐 자로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최근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크레믈린의 특별한 허가가 없다면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 지휘부가 FRK, 루나, IL-28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증거를 볼 때 모스크바는 핵무기 사용을 막을 수 있는 실제적인 기술적 수단이 없었고, 쿠바 지휘부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핵무기 보관 부대의 동의라는 조건에서 모스크바의 승인 없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소련의 전술핵무기 배치가 핵전쟁 억지라는 목적을 지닌 게 아니라 실제 사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은 전술핵무기의 존재를 공개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전술핵무기의 존재는 소련이 붕괴한 후 1990년대 초반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전술핵무기는 소련이 쿠바를 침공할 때 사용하기 위해 배치되었고 미국의 정보기구는 당시에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미국으로서는 준중거리 미사일 SS-4가 미국 도시를 조준하는 게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다.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부대의 지휘자였던 이고르 스테첸코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미사일 해체 지시가 내려온 10월 28일 시점에 6-8기만이 작전태세에 도달할 수 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미사일이 미국 도시 중 어디를 조준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동부해안을 따라, 사거리 1,300km 내에는 북쪽으로는 워싱턴디시, 서쪽으로는 뉴올리언즈, 휴스턴, 달라스, 북서쪽으로 신시내티가 있다. 정확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도시 내부 또는 주변에서 1 메가톤의 폭파로 수십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유럽지역 핵전력
유럽 전역(戰域)에서 미국과 나토, 소련은 준중거리 미사일, 중거리 미사일, 전폭기를 보유했다. 만약 핵전쟁이 유럽과 소련 서부 지역에 한정된다면 양측이 보유한 핵무기 규모는 비슷했다. 하지만 핵전쟁에 관한 미국의 최고 작전계획인 단일통합작전계획(SIOP)에 따라 대서양 사령부와 유럽사령부의 작전계획이 통합되었기 때문에 핵전쟁이 유럽과 소련 서부에 한정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SIOP은 사령부들의 중복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공격목표를 조정하려고 도입되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유럽의 역할을 검토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1962년 미국은 약 4,375개의 핵무기를 유럽에 배치했다. 대부분은 전술핵무기로, 155mm 포탄과 203mm 포탄,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 핵지뢰, 단거리 미사일로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약 10%, 도는 450개의 핵무기가 탄도미사일(토르, 주피터), 순항미사일(마타도르, 메이스), 미공군 전폭기, 미해군의 항공모함 탑재기에 배치되었다. 미국과 나토의 전폭기는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영국, 네덜란드의 기지와 미국 6함대 항공모함에 배치된 핵폭탄을 공급 받을 수 있었다.
소련은 550개의 SS-4, SS-5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수는 유럽의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었고, 일부는 태평양 연안 지역의 미군 기지와 미국의 동맹국을 겨냥했을 것이다. 소련의 전폭기도 서유럽을 타격할 임무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세계 핵전력
만약 쿠바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었다면 핵전쟁의 단계적 상승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전략핵무기의 사용가능성도 상당히 컸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쿠바에서 서반구 어떤 국가로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소련이 미국에 공격을 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게 우리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 이는 소련에 대한 전면적 보복 대응을 요구할 것이다.”
1962년 시점에서 미국의 전략 핵전력 규모는 소련보다 수 배 더 컸고, 훨씬 더 신뢰성이 높았다. 예를 들어 10월 시점에 완전히 준비를 갖춘 3,500개의 핵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이는 도합 6,300 메가톤의 위력을 지녔다. 경계 태세가 최고조에 오른 11월 4일에 미국 전략 공군 사령부는 1,479개의 폭격기, 182개의 탄도미사일, 총합 2,952개의 핵무기와 1,003개의 공중급유기를 대기시켜서 보복공격을 준비했다.
소련은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약 42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했다.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은 보유하지 못했다. 160개의 장거리 폭격기는 무시무시한 미국-캐나다 공중방어체계에 대면해야 했다. 미국-캐나다 방어체계는 공대공 요격 핵미사일을 탑재한 전투기, 지대공 요격미사일 BOMARC,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로 구성되었다. 소련의 장군 아나톨리 그리코프에 따르면 흐루시초프와 그의 군사고문은 1962년 시점에 “미국의 전략 핵전력이 소련보다 17 대 1로 앞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새로운 인식
쿠바 미사일 위기는 양측의 핵전력이 상대적으로 미완성된 무기경쟁의 초기 단계에 전개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과 소련의 핵전력이 대략적으로 평형성을 갖추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경쟁이 더욱 위험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제 우발적이든 아니면 고의적이든 간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폭포효과로 인해 곧바로 대재앙을 낳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조치들은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하며, 별로 과격하지 않은 대응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혹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반도 전쟁위험에 주는 교훈을 위기를 이겨내는 리더십이나 협상의 기술에서 찾는다. ‘합리적 선택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라’, ‘열린 토론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라’, ‘오해가 생겼을 때 바로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소통경로를 확보하라’ 등등. 물론 이는 어떤 위기에 대처했을 때나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주는 교훈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핵무기를 개발 또는 도입해 배치하려는 구상이나 고도의 핵무기 체계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핵전쟁 유발요인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나 협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핵위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핵전쟁이 벌어질 위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세계적 핵전력은 북한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핵개발 계획을 자극한다. 역으로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은 미국의 한반도 핵우산 정책, 즉 북한에 대한 핵공격 계획을 영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핵무기는 억지력의 원천이 아니라 전쟁 유발의 원천이 된다. 바로 이 사실이 남과 북의 민중이 분명히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