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정신 계승!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철폐!”
깃발 들고 흔들림 없이 전진하자.
죽음의 공장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가 ‘하청 철폐’를 염원하며 분신하
신지 오늘로 29일이 되었다. 그의 분신은 한 점 불꽃이 되어 인터기업 노
동자들의 작업거부 투쟁으로, 하청노동조합의 지프크레인 점거투쟁으로,
조광한-진용기 공개조합원 선언으로, 열사추모 촛불집회로, 인터기업 박규
영-김태영 공개조합원 선언과 현장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열사의 유지
를 받들고자 하는 현중 하청노동자들과 하청노조 그리고 연대하는 동지들
에 의해 열사투쟁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불씨를 살려가고 있다.
한달여 동안 열사투쟁은 갖가지 굴곡을 거치면서도 당당하게 전진해왔
다. 하지만 현재 투쟁의 폭과 수위를 더 이상 확장시키고 있지는 못하다.
그 이유는, 전체 민주노조운동이 사측과 한 몸이 되어 열사의 분신을 비방
하고 왜곡해온 탁학수 집행부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
다. 또한 ‘10년 무쟁의’라는 사측의 막강한 현장통제력을 뚫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직영활동가들의 과감한 결단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
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장의 하청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투쟁에 나
설 수 있는 기회와 경로가 전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면
이 속에서 故 박일수 열사 분신대책위(위원장 이헌구 울산지역본부장)는
3월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중노조에 대한 중징계를 요청”하는 것과
동시에 “현중노조의 참여를 사측이 원한다면 받아들일 것”이라고 하였
다. 즉 “현중노조는 결코 교섭의 주체일 수 없음”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대신 ‘조건없는 교섭, 현중노조 참가허용’과 금속연맹에의 현
중노조 집행부 징계안 제출을 맞바꾸기 한 것이다. 대책위는 탁학수 집행
부에 대한 징계 조치와 교섭주체로의 권한 인정이 마치 분리될 수 있는 사
안인양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일보후퇴이며 민주노조운동에 대
한 배신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위로부터 상급단체의 제명 조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어용노조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쟁취되어왔고 또 앞으
로도 그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중하청노조와 지역활동가들의 거센 반발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교섭을 위한 테이블이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열사투쟁은 ‘새로운 국면’
에 들어섰다. 하청노조는 대책위의 ‘3.8 교섭주체 결정’을 재논의할 것
을 요구하면서 연좌시위도 불사했지만, 어제(3월 13일) 현중노조와 대책위
는 공동교섭을 위한 테이블을 가졌다. 대책위는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겠다
고 말한다. 현중하청노조 역시 대책위 탈퇴보다는 협상테이블 참여를 통
해 압박과 견제를 한다는 생각이다.
투쟁의 원칙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열사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견지해야 할 원칙들
을 되새겨야 한다.
첫째, 박일수 열사투쟁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2003~4년 대공장 하
청투쟁의 연장임과 동시에 어용노조에 대한 흔들림 없는 태도로써 ‘민주
노조 사수’를 위한 전체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열사의 분신으로부터 촉발되었지만 유가족 위로금 보상과 하청
노동자 근로조건 개선으로 멈출 수 없는 투쟁이다. 무쟁의 10년의 현대중
공업 현장을 자본의 통제와 죽음의 망령으로부터 앗아와 새롭게 재편하는
투쟁이며, 갈수록 후퇴하고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복원하고 새로운
계급주체들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투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용노
조 분쇄! 민주노조 사수!”라는 투쟁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은 현중 뿐 아니라 지하철, KT, 기아 노조집행부를
포함해 대공장 운동 전반이 실리주의화 되고 있다. 작금의 탁학수 집행부
의 노골적인 어용행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울산지역의 화섬사업장
과 미포조선 그리고 도시철도 등 공공사업장들에서 어용들이 노민추로 가
장하여 민주파 집행부를 압박하고 조합원들의 의식을 교란하고 있다. 이
런 현실 속에서 이번 열사투쟁은 이수호 4기 집행부와 전체 민주노조운동
이 어용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
며 향후 민주노조운동의 향방을 규정지을 것이다.
전국의 계급적 활동가들은 이번 열사투쟁에서 반드시 어용노조에 대한 폭
로와 타격을 통해 민주노조 사수의 기치를 치켜들어야 한다. 작년 열사투
쟁과 같이 내 현장도 급급하다고 해서 전국적인 투쟁을 외면하는 것이 반
복되어선 안된다. 현중 열사투쟁의 패배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또 한
번 크게 후퇴시킬 것이다. 현시기 우리의 투쟁은 비록 완전히 승리할 수
없다 하더라도 계급적 활동가들의 투지와 힘을 한데 모아 자본의 탄압과
어용의 득세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현시기 하청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받아 안고 아래로부터 자주
적인 투쟁을 만들어갈 주체는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 즉 ‘비정규직(사내
하청) 노동조합’이어야 한다.
그동안 비정규직, 특히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규직 노동
조합의 직, 간접적으로 의존해온 면이 적지 않았다. 2001년도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포함해 전국적인 비정규직 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것
은, ‘정규직의 지지, 지원’ 없는 비정규직 투쟁은 패배한다는 수동성이
었다. 우리는 그것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이라는 말로 애써
위안해왔을 뿐이다.
2003~4년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정규직 노동조합의 지
지, 지원이 없고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해보이고 있는
듯하다(현자 아산, 현자 울산, 금호타이어 투쟁이 그러했다). 하지만 분명
히 다른 것은, 현자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뚜렷하게 보여주듯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에 기반한 성과들이 축적되고 있고 그 속에서 새
로운 계급주체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최근 현자에서 직가입이
또다시 유보된 것은 하청노동자들이 더 이상 정규직에 대한 의존으로써가
아니라 자주적인 투쟁을 통해서 나아가야 함을, 그럴 때에만 정규직 노동
자들과의 공동투쟁 또한 가능함을 입증해주었다.
현중 열사투쟁에서도 하청투쟁의 ‘자주성의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되어
야 한다. 현재까지 현중 직영노조 탁학수 집행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교
섭권을 자신에게 위임하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노총 이
수호 위원장은 노-노 갈등을 우려한다면서 탁학수 집행부에게 면죄부를 주
려하고 있다. 한편 대책위는 “징계는 징계, 협상은 협상”이라는 현실론
으로 어용노조와의 투쟁을 회피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어용노조의 선처
나 도움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숨죽이고 있는 수천, 수만의 ‘쥐새끼’ -
박일수 열사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들이 나설 때까지 하청노조와
계급적 활동가들은 투쟁의 깃발을 지켜야 한다.
셋째, “지도부가 투쟁하지 않는다면 투쟁지도부는 새롭게 재편되어야 한
다”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현중노조와 공동교섭을 추진하면서 이헌구 대책위원장은 “(협상을 통
해) 하청노조 활동보장만큼은 반드시 쟁취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
나 지금까지 하청노조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중자본의 행태
로 볼 때 ‘문구상’의 것 이상을 과연 얻을 수 있겠는가? 3자 협상의 결
과는 뻔하다.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하청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을 위해 노력한다” 정도일 것이다.
현중자본은 열사투쟁으로 인하여 무쟁의 10년의 강고한 현장장악력이 깨
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또 열사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하청
노조’의 존재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끝까지 열사를 부정
하고 하청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협상을 통해 무언가
를 쟁취해 보겠다는 이헌구 대책위원장의 발언은 비현실적인 주관적 바램
이거나 혹은 하청노조 및 투쟁하는 대중을 기만하는 관료적 술책일 수밖
에 없다.
투쟁을 회피한다면 더 이상 지도부가 아니다. 투쟁하지 않는 지도부 대
신 새롭게 투쟁의 구심을 형성하는 것 - 이것이 바로 민주노조운동의 자랑
찬 역사이자 정신이어 왔다. 민주노총과 대책위 마저 열사정신을 훼손하
고 더 이상 투쟁하지 않는다면, 전국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이고 전투적
인 활동가들이 열사정신 계승을 위해 투쟁으로 떨쳐나서야 한다. 오늘 울
산 현대공화국에서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우리의 힘과 투지를 발휘하
자! 투쟁!
새로운 계급주체의 네트워크
사회주의노동자신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