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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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을 넘어 전선으로!

이른바 '사회주의 정치세력화'와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에 대하여

편집팀


이 글은 최근 제기된 '사회주의 정치세력화' 및 '사회주의 독자 후보'의 기치를 규정하고 있는 전제를 비판하고 대선시기 전국적인 대중투쟁 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일 계획을 논하기 위해 쓰여졌다. 사회당이라는 특정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라는 기치가 지난 '잃어버린 10년'의 한계와 오류를 집약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한계와 오류에 관해서는 지난 10년을 살아 낸 어떤 정치세력도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문제는 고질적인 분열주의와 고립주의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당만의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치세력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난 10년간 민중들 사이에 일반화된 분열과 고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정치세력들의 분열과 고립은 오직 민중들의 분열과 고립을 극복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 민중의 분열과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


잘라 말하자. "오늘날 노동자 민중들은 왜 분열하거나 단결을 지속하지 못하는가?" 이 서늘한 물음을, 도덕적 비난이나 무기력한 승인으로 회피하지 말자. 그/녀들의 단결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도래할 장미빛 미래 따위로 여기면서 억압하지도 말자. 차라리 모든 정치적 사고 및 행위의 가장 긴급하고 중심적인 문제 혹은 과제로 받아들이자.
경제 위기로 인한 삶의 불안정화는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테지만, 그러나 불충분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삶의 불안정화가 그것을 초래하는 원인에 맞서 민중들의 단결로 이어질 수도 있고, 이는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수많은 혁명들에 의해 실천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요소가 있다. 특히 단결의 조건으로서 정치적 보편성 혹은 정치전선의 해체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본다. 정치적 보편성은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갖고 있는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이들 사이의 교통이 가능할 수 있도록 각자의 정체성(identity, 동일성)을 상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갈등을 없애지는 않지만 갈등이 적합하게 해결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또한 그것은 단결과 투쟁을 통해 쟁취된 보편적 권리가 지속될 수 있는 우애를 창출한다. 정치적 보편성이 민중의 단결 및 그것의 지속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기능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보편성으로 들 수 있는 것은 80년대의 '반파쇼 민주주의'다. 그것은 군부독재정권의 비정통성과 폭압성에 맞선 민중들의 단결에 중요한 조건이 되었고, 87년 6월 항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6월 항쟁에 뒤이은 7·8·9 노동자대투쟁 및 대선을 거치면서 반파쇼 민주주의는 명확한 계급적 분화를 겪고, 자유민주주의(혹은 개혁주의)와 민족/민중민주주의로 나뉘기에 이른다. 민족/민중민주주의는 반파쇼 민주주의의 성과를 급진적으로 영유하는 가운데, 199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벌어졌던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1991년, 그것이 암묵적·실질적으로 동일시했던 정치적 보편성으로서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이를 전후하여 몰아친 정권의 탄압 속에서 민족/민중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에 이르게 된다. 자유민주주의의 경우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는 그리 강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다가 민족/민중민주주의가 쇠퇴하는 틈을 타 스스로 반파쇼 민주주의의 적자를 참칭하면서 양대 문민정권을 출범시킨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이들의 반민중성은 민중들에 의해 피와 눈물로 체험되었고, 이제 우리는 개혁세력의 붕괴 및 (노무현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전혀 예외일 수 없는) 국가권력의 반동적 재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시간의 흐름상 민족/민중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동시적 실패의 중간 즈음에 IMF 경제위기가 놓인다. IMF 이후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대중들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스스로 깨달았고 각자의 방식으로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족/민중민주주의의 해체로 인해 교통과 연대의 가능성이 축소된 상황에서 민중들의 단결과 조직적 대응은 여의치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신이 IMF의 진두지휘 하에 민생파탄 민주압살을 집행하는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것에 기대봤자 처절한 배신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이 살아 남기 위해 분열을 택하거나 단결을 지속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을 비롯한 계급대중운동의 고질적 병폐로 제기되는 '실리주의'란 실상 이와 같은 (지도부에 국한되지 않는) 민중들의 일반적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다.
각 주체들이 생존을 위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는 더욱 심화된다. 노동자 대중들은 서로간에 교통과 연대를 강화하여 스스로의 역량을 증대하기 어려워지고 경쟁을 통해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이들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배타적 역량의 증대에 몰두한다. 이를 위해 각 주체들은 경쟁에 매진하여 특정한 정체성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절대화·배타화된다. 자연히 정체성들의 갈등이 심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정치적 보편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시점이 되면 주체들의 상호파괴가 지배적 상태가 되고 관계(및 정치) 자체를 거부하고 불신하는 심각한 정치적 무기력화 및 냉소주의가 초래된다. 민중들이 집단적 실천을 통해 공동의 미래를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 상태. 이는 모든 정치의 무덤이다.


'정체성의 정치'와 '사회주의 정치세력화'


민중들이 겪고 있는 분열과 정치적 무기력화는 정치세력들 안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조합주의 내지 종파주의가 강화되는 한편으로 정치적 활력이 심각하게 축소되며, 양자는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형성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정치세력들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 보편성을 새롭게 구성하기보다 정체성을 절대화하고 그에 의지하여 경쟁에서 이기려는 경향이 강화된다.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도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중에서 특히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동지들은 이러한 경향이 봉착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내놓은 [통일좌파] 문건을 통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기본 노선이 '좌파'(최근에는 '사회주의')라는 정체성을 절대화하고 이에 입각하여 동맹과 배척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좌파'라는 정체성의 보수적 성격이다. 그것은 정세에 대한 '현재적' 개입 방식과 효과에 의해 매번 상대화/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설정된 특정한 '기원' 이래 불변의 정신으로 계승되는 '족보적'인 개념이다. 이는 "좌파(혹은 우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전혀 상이한 이해방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이것을 해당 정세에 대한 판단 및 계획에 대한 물음으로 간주하고, 다른 편에서는 "누구는 옛날에 무슨 일을 했고, 누구는 어디에서 어떻게 갈라져 나온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해한다. 현재적 입장이 아니라 특정한 과거의 공유 여부에 따라 규정되는 정체성. 이는 강한 의미에서 퇴행적인 것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92년 대선투쟁을 좌파(라는 정체성)의 기원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은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폭로한다. 기실 92년 대선투쟁은 91년 5월 계투의 패배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양대 사건으로 민족/민중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정치적 보편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기 전 자신의 명예를 걸고 치룬 최후의 전투였다. 92년 대선투쟁은 새로운 보편성을 낳지 못했고, 이는 지난 10년간 지속된 전선의 상황을 통해 냉혹히 입증된다. 정치적 보편성이자 전략노선의 이름으로서 민족/민중민주주의는 좌파라는 아주 모호한 정체성으로만 명맥을 유지했고, 96-97 총파업과 IMF 경제위기 이전까지 활로를 찾지 못했음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사실이다. 요컨대 92년 대선투쟁이 좌파의 기원이라는 것 자체는 정확하나, 그것은 [통일좌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존의 정치적 보편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명료한 정체성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는 비단 좌파나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세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92년 이후'의 모든 정치세력에게 공히 적용되는 한계로서,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와 민족/민중민주주의의 동시적 위기를 '진보주의'(혹은 진보-보수 전선)라는 정체성으로 착취한 NGO 운동이나, 진보정당-산별노조 양날개론을 제기한 정치세력화 운동 역시 이 문턱을 전혀 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난 10년은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 이후 새로운 보편성을 구성하지 못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더 혹은 덜 실패해 왔던 시기로 보아야 한다. 2002년 각 정치세력은 지난 10년의 한계를 공통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어느 입장을 선험적으로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보편성을 구성하기 위해 교통하고 연대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정치세력화 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며,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비판하는 것 역시 동일한 준거에 입각해 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런 태도가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성하기 위한 교통과 연대를 봉쇄한다는 데 있다. 최근 그들이 좌파 개념의 모호성을 사회주의 개념을 빌어 채우려 드는 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사회주의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대화함으로써 교통의 호조건을 만들기보다, 역으로 정체성에 종속되어 권위를 빌려주는 도구로 착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는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되고 내용을 비워낸 일종의 '초월자' 혹은 그들의 독창적 표현에 따르자면 '술어적 개념'으로 변질되어, 반성과 전화의 노력이 닿을 수 없는 천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실상 그것의 철학적 심오함에 대해 알 수 없으나, 실천적으로 볼 때 그것은 실용주의와 종파주의라는 속류적인 목적에 복무한다. 자신들이 볼 때 좌파 내지 사회주의라는 자의적 경계 안에 있는 주체들에 대해서는 실용주의로, 경계 밖에 있는 주체들에 대해서는 근거가 불충분한 비난으로 일관하는 종파주의로 변신한다. 혹은 역으로 경계 안에 있는 주체들의 고민과 실천은 결국 다 스스로의 정체성(소위 '사회주의')으로 수렴될 것이고 그래야 한다는 종파주의로, 경계 밖에 있는 주체들은 어차피 다 똑같은 부류라는 판단에서 귀결되는 '유연한' 실용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이들에게 정체성(역량)의 상대화(축소)는 곧 역량(정체성)의 축소(상대화)고, 정체성(역량)의 절대화(확대)는 곧 역량(정체성)의 확대(절대화)이다. 이들이 정체성의 상대화를 전제하는 정치적 보편성 구성에 반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서는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킬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위기의 구성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은 다수 운동진영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이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체성의 정치에 내재한 객관적 가능성이다. 조합주의이든, 사민주의이든, 민족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혹은 또다른 무엇이든 말이다. 각 주체들의 교통과 연대, 그 전제로서 기존의 정체성을 상대화하려는 사고와 실천만이 민중운동의 단결을 복원하고 대중투쟁전선을 구축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다.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진실


현재의 분열상 및 그것의 반영이자 악화요소로서 '정체성의 정치'를 지양하고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성하는 데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은 하나의 유력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지연하고 관리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전략이자 이데올로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 위기'를 하나의 전제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 위기가 도래한 지금, 현 체제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전향적인 대안은 신자유주의다. 부르주아가 말하는 "대안은 없다!"는 구호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하지만 가장 전향적인 대안조차 유례없는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중들의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를 수시로 침해하지 않는 한 욕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지배계급 스스로 현재 위기의 깊이와 강도를 알기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이는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상처입은 이리가 더 사나운 법이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끊임없이 내몰리고 동시에 야만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이때 그들의 요구는 운동의 전성기에 비해 아주 소박한, 주로 생존에 관한 기본적인 요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물질적 팽창기에는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의 체제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여력을 대폭 상실하였다. 체제가 유지되는 한 '개량의 물적 토대'가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그것이 심각하게 취약해진 것은 객관적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 체제의 심장부에 내장된 모순의 지양(이행) 사이의 거리를 무한히 가깝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유효하게 진행하는 것과 체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다.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주창하는 이들은 '반자본주의' 내지 소위 '사회주의' 기치를 중심으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과 별개의 전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부적합한 대응으로서 정체성의 정치를 퇴행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재 '신자유주의 반대'를 말하지 않는 정치세력은 아무도 없다. 소위 '조합주의'이든, '사민주의'이든, '민족주의'이든, 자칭 '사회주의'든 말이다. 동시에 적합한 투쟁을 조직하는 세력 역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 '체제의 모순을 어떻게 전화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바, 최소한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억압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적합하게 다루지 못하고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관건은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광범위하게 구축하는 가운데 현 체제의 일반적 위기를 전화시키는 문제를 전 민중의 과제로 제기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각 운동세력과 계급 대중들이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합의하지 않는다 해도, 투쟁의 과정에서 문제의 회피불가능성을 인식하고, 기존의 정치적 입장을 '실천적으로 배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이렇듯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은 정세적으로 기존의 정체성을 전반적으로 상대화하고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성할 수 있는 유력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특히 IMF-DJ 5년 동안 계급 대중의 단결 없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울 수 없음을 피눈물로 배워야 했다. 하물며 개혁세력이 붕괴하면서 김대중 정권보다 훨씬 더 반동적인 방식으로 권력이 재편되려 하는 지금, 전선 구축 없이 2003년을 맞게 된다면 '잃어버린 10년'을 넘어서려는 그동안의 필사적인 노력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이 누구의 주관적 상황도 고려해 주지 않는 정세의 냉혹함이 아니던가.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의 주요 계기로 공동투쟁본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현재 반제-반신자유주의 기치 하에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이 발족했고, 공투본 결성 논의가 진행 중이다. 우리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에 있어 이 계기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가지 이유를 말하겠다.
우선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에 뼈와 살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선 구축은 계급대중들의 구체적인 투쟁과 결합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반기 투쟁의 핵심 동력은 WTO에 반대하는 농민 투쟁이다. 단언컨대 '이 투쟁에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 없이 하반기 투쟁을 힘있게 전개할 수 없으며, 하반기 투쟁을 준비하는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사고하지 못하면서 전선을 구축하겠다는 것은 몽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 투쟁을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무역기구인 WTO에 대한 반대, 이를 주도적으로 집행할 민주당과 한나라당, 재계를 아우르는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단호한 반대로 조직하고, 노동자·농민·여성을 단일한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계기로 만들어 내자.
둘째,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의 문제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논쟁의 계기로서 대선 국면을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민중경선'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우려 지점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 혹자는 민중경선이 범추와 같은 상층 논의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한다. 누구는 민주노동당과 다수 노동조합원들이 보이고 있는 실리적인 태도가 공투본의 투쟁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민중경선은 정확히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기된 것이다. 우리는 상층의 협의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비판하며, 더 나아가 후보전술 자체는 기본적으로 부차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논쟁과 토론의 권리를 되돌려 주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 및 급진화를 동시에 꾀하는 것이다. 물론 공투본은 현재 운동의 지형을 전변시키지는 못할지라도, 미약하나마 2002년 하반기 투쟁의 조건을 바꾸어내고, 대중투쟁을 일구어가는 계획으로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계기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계급대중들을 견인하지 않는다면 언제 대중적 영향력을 확장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정체성의 정치'의 관성에서 과감히 벗어나 운동진영의 입장을 보편화하는 체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이 과연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사민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사민주의는 물론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비판의 형태를 취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는 전통도 깊지 않고, 그것의 논리 역시 일관되지 않다. 그것이 세력화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전의 정치적 보편성이 해체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편으로 사민주의 전통의 부재로 인해 아직 그것의 한계가 대중적으로 폭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민주의에 대한 적합한 비판은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축해 내고, 다른 편으로 사민주의의 불가능성을 각각의 구체적 계기 속에서 폭로해 내는 것이다. 오직 이 과정에서만 사민주의는 분할·급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적합한 형태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안에서의 사상·실천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민중경선이라는 한 번의 계기를 통해 이같은 중대한 과제가 완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계기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계기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선 시기를 넋 놓고 보낸 후 2003년 반동적 권력 재편을 맞이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격이다. 전선 구축 없이 새 정권을 맞았다가 운동의 성과를 몇 년 이상 후퇴시킨 것은 김대중 정권 때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사실 이 점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기까지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사이에 대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선에 개입하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믿지 않는 장밋빛 미래를 유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2003년 이후 어떻게 싸워갈 것인가를 토론하고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즉 민중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투쟁의 중요성을 광범위하게 알리고 투쟁의 과제를 공유하는 것이 관건이지, 이전에 전개해 왔던 투쟁을 이번에도 보편화시키지 못한 채 몇 달 더 끌고 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대선은 '반신자유주의 정치강령'을 토론하고 공유하는 데 보다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 S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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