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국제동향 | 2023.11.17

②북한 체제 자체에는 진보적인 면도 있지 않나요?

<반핵·반권위주의 국제민중연대를 위하여>

사회진보연대

북한의 핵무장, 인권탄압, 3대세습을 고려하면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라거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어떤 진보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북한의 인권위기는 ‘혁명 수호’를 명분으로 법치주의 대신 ‘혁명적 폭력’을 정당화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결함에서 비롯하였으며, 북한 세습정권의 통치를 보장하기 위해 자유권을 탄압하고 핵무장을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심화되었습니다.

 
한국의 진보적 사회운동 대다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를 넘어 대안을 만드는 활동을 지향해왔으며, 197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해온 미국 헤게모니를 비판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 체제 및 미국과 대립해 온 북한 체제의 문제를 평가하는 문제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NL 그룹은 북한 체제가 남한과 같은 자본주의, 미국에 종속된 국가들보다 더 우월하고 진보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언론에도 많이 보도된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국민주권연대의 ‘백두칭송위원회’나 ‘김정은 위인맞이 환영단’뿐만 아니라 “2020년 북은 코로나 발생율 0%, 국격 100%, 이렇게 두 마리 토끼 다 잡은 유일국가”(김광수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국가와 지도자, 그리고 인민이란 무엇인가?”, 2020.12.31.)라는 ≪민플러스≫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이러한 주장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은 수령제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방식의 권력체제 … 수령제 사회주의는 수령(지도자)-당-인민대중의 일심단결을 강조하며 당내 분파와 권력투쟁을 인정하지 않는다. … 검증되지 않은 젊은 지도자(김정은)에 대해 세간의 우려는 컸다. 그러나 … 북녘 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을 혁신 … 무엇보다 군사외교적인 면에서 5년 여의 집중적인 (핵)개발과 대결을 통해 2017년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고 북미관계 정상화의 길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현재 사회주의 강국 건설, 비핵화와 국제평화 선도, 대등하고 평화적인 북미관계 지향을 내세우고 있다. - 2018년 민주노총 소책자 『평양, 모른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2018 노동자가 알아야 할 북녘 이야기』 중
 
민주노총 유관사업을 보더라도, 민주노총이 2018년 발간한 『평양, 모른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2018 노동자가 알아야 할 북녘 이야기』 소책자는 북한의 ‘수령제 사회주의’ 체제와 김정은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특히 2017년 북한의 ‘핵무력 완성’은 ‘북미관계 정상화’의 길이었다고 명시합니다.
 
민주노총의 인터넷 매체 ≪노동과 세계≫에 연재된 <최재영의 북녘노동자 이야기>(2020.05.20.)도 “어린 시절 꿈이 노동자가 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북에서의 노동자들은 직업적인 면에서 확고하고 안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반면) 자본주의 남측사회에서는 많은 이들이 ‘회장님’, ‘사장님’으로 불리는 것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조선노동당) 당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본가들이 이끌어가는 남측사회와는 달리 북측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며 노동자를 대변하는 단체임을 알아야 한다.”와 같이 북한 체제가 더 노동자 친화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해도 이러한 북한 체제 찬양은 우리의 직관에 반합니다. 북한에 심각한 인권위기가 존재하며 남한보다 살기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일반적 상식 때문입니다. 남에서 북으로 가는 사람은 없어도, 북에서 남이나 제3국으로 탈출하는 사람은 많다는 경험적 사실도 이를 방증합니다. 서문에서 언급했듯, 북한에 대해 논할 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주제는 북한의 핵무장과 주변국 위협, 북한인권, ‘3대세습’입니다. 이 중 핵무장에 관해서는 앞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나머지 두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북한인권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1) 사회운동은 북한인권 문제의 존재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 정권은 북한인권 문제 제기에 대해 “서방의 모략, 위선”, “내정간섭”이라는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이는 NL 주류의 관점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진보당은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잣대로 다른 국가들의 인권 상황을 평가하지 말고 국제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인권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유엔 안보리 ‘북한인권’ 회의 무산의 의미”, 민중당(현 진보당) [정책과 논점] 2018-39호, 2018.12.14.).
 
그러나 1990년대 이래로 북한인권 위기는 UN 차원에서 심각하게 조사하고 제기하는 쟁점입니다. 여러 교차검증을 통해 심각한 위기가 실존한다고 밝혀진 문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북한 내부 정보에 대한 접근이 힘든 상황에서 북한인권 관련 담론은 과장 내지 악용된 측면도 있지만, 북한인권 문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이 문제를 사실의 영역에서 다루지 않고 ‘운동의 이해(利害)’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사회운동이 북한인권 문제를 외면하고 진보의 관점에서 제시하지 못하면서 북한인권 담론이 더욱 왜곡된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모든 문제제기를 ‘내정간섭’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인류가 보편적인 합의를 추구해 온 인권을 개별 국가가 보장하지 못하거나 침해한다면 국제사회와 세계 사회운동이 개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북한의 사례가 그렇듯 많은 경우 인권탄압의 주체는 각국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2월 17일 제네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마이클 커비 UN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위원장이 최종보고서를 들고 있다. 커비 위원장은 “북한 정권의 인권침해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될 수 있는 ‘반인도적 범죄’며 그 책임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에게 있다”고 밝혔다. COI는 김 위원장에게 보고서 전문과 인권침해 중단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2) 자유 없이 평등이 가능할까요?
 
북한 정권은 인권 담론을 서구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자유권, 정치권을 중시하는 서구식 인권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지도자와 인민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북한 사회”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식 인권’, ‘사회주의 인권’을 내세우지만, 북한 사회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 기준에도 미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적으로, 《노동신문》의 ‘우리식 인권’ 해설을 보면(“참다운 인권옹호를 위하여”, 《노동신문》, 1995.06.24.) “사회주의 인권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적대분자들과 인민의 리익(이익)을 침해하는 불순분자들에게까지 자유와 권리를 주는 초계급적 인권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대부분 자본주의 국가가 ‘천부인권’, 즉 모든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절대 박탈해서는 안 될 보편적 권리가 있다는 개념을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수용하는 것과 다릅니다.
 
인권에 있어 정치적인 자유권보다 경제적인 사회권을 강조하고,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권리, 특히 국가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은 북한만이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유한 논리였으므로 이 부분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산과 관련된 사회관계와 물질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서 온전히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적, 즉 “평등 없이 자유 없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합니다.
 
그러나 사회권과 평등을 우선시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인권 논의 또한 역사 속에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민중이 사회적, 경제적 권리 신장을 도모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유 없이 평등 없다”도 타당했던 것입니다. (UN은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선언 및 행동강령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은 불가분, 상호의존, 상호연관 관계이며 개인들이 둘 중 하나만으로 온전히 인권을 향유할 수 없음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정했습니다.)
 
사회권은 단순히 “모든 인민이 기와집에서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사는 부유한 생활”(1962년 김일성 북한 수상의 발언)을 누리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도층의 선정(善政)으로 인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자는 꿈은 현대 이전의 왕조국가들도 이상향으로 삼았던 개념입니다. 노동자가 실질적으로 경제 운영과 분배의 주체가 되어야, 즉 생산수단의 소유가 사회적으로 이뤄지고, 노동자가 생산과정과 잉여생산물의 사용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어야 사회주의의 맥락에서 사회권이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주권’도 그 국가공동체를 이루는 개인들이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국가의 정책 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면 정당하게 구성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용어 소개

자유권이란?
인간이 누려야 할 시민적, 정치적 권리들로, 생명권, 고문 금지, 노예 금지, 자의적 체포와 구금 금지, 이동과 거주의 자유, 재판에서의 평등과 무죄추정의 권리, 사생활 보호,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의견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정치참여 권리 보장 등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규약)은 1966년 12월 16일 UN총회에서 채택되어 1976년 3월 23일 발효되었습니다. 남한과 북한 모두 자유권규약을 비준한 당사국입니다.

사회권이란?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합당한 삶을 누리는 데 있어 기본적인 인권들로, 노동권,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식량권, 교육권, 주거권, 건강권, 사회보장권 등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는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규약)은 1966년 12월 16일 UN총회에서 채택되어 1976년 1월 3일 발효되었습니다. 남한과 북한 모두 사회권규약을 비준한 당사국입니다.
 
그러나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노동자 인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당-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노동자들이 생산과정과 잉여생산물을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은 자본주의 사회와 같았습니다. 공식적인 노동조합은 당의 방침과 생산계획을 노동자들에게 하달하는 ‘전달벨트’로 전락합니다. 그럼에도 ‘노동자국가’에서 국가 공식 노동조합 밖의 또 다른 노동조합은 어불성설이라는 이유로 자주적인 노동자조직 결성이 금지됩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에서조차 부분적으로 보장되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파업권)의 ‘노동3권’이 보장되지 않는 역설이 발생했습니다. (UN 사회권규약 제8조 제1항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하며,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을 규정합니다.)
 
이와 같이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관리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조합은 국가의 예속기관으로 전락하자, 자유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는 요구가 곳곳에서 분출됩니다. 이러한 자유노조 운동은 초창기에 반체제적 목표보다는 ‘성공적인 공산주의의 건설을 돕고 관료주의와 투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음에도 엄청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폴란드와 같이 자유노조(연대노조) 운동이 성공하여 민주화운동을 이끈 사례도 있습니다.
 
3) 자주적 노동자 조직이 없는 북한이 노동자국가일 수 있을까요?
 
오늘날 북한에도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대표하는 자주적 노동조합이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노동권도 부재합니다. 북한의 유일한 노동자 단체는 조선직업총동맹(직총)입니다. 직총은 그간 민주노총의 교류 대상이었으나, 민주노총이나 여타 국가의 노동조합과 같은 자주적 노동조합이 아닙니다.
 
북한 정치사전(1986년)과 조선대백과사전(2000년)에 의하면, 직총의 기능과 역할은 김일성의 항일혁명전통을 계승하여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직총 규약은 “조선노동당의 옹호자이며 당의 영도 하에 모든 활동을 전개한다. 노동계급의 통일과 단결을 강화하며 그들을 당주위에 결속시켜 당이 제기한 혁명임무 수행에로 조직·옹호하며, 매시간 당이 제시한 과업을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이와 같이 직총은 조선노동당의 강력한 통제 속에 운영되고 있으며, ‘당과 노동계급을 연결시키는 인전대(전달벨트)’, ‘동맹원들에 대한 사상 교양 단체’의 역할을 합니다. 북한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조합의 역할과는 한참 거리가 멉니다.
 
2016년 10월 27일 평양 김일성, 김정일 동상 앞, 35년 만에 열린 조선직업총동맹 7차 대회의 모습. 1947년 북한 내 ‘노동조합 성격 논쟁’에서, 일제시대 함경남도에서 오랫동안 노동조합 조직가로 활동하며 1929년 원산총파업을 후원한 토착 공산주의자 오기섭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노동국장은 산업이 국유화되었더라도 완전히 사회주의로 이행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여전히 계급적 대립이 있을 수 있으며, 이때 노동자들의 유일한 조직인 노동조합(직업총동맹)은 국가에 종속되는 대신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 위원장은 “노동자는 국유화된 산업경제기관에 반대하여 투쟁할 수 없다”며 오기섭을 공격했고, 오기섭은 1958년 숙청되었다. [출처: 조선중앙통신]
 
4)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인권탄압?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자유권 침해는 법 외적인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형법 체계를 통해 ‘합법적’으로 이뤄진 측면이 크다는 데 유의해야 합니다. 소련의 형법은 “사회주의적 관계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보호, 강화, 발전”시킨다는 목적으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이는 ‘혁명적 폭력’으로 정당화됩니다. ‘당의 지배’가 ‘법의 지배’(법치주의)에 우선하게 됩니다. 현대 형법의 기본 원리로 여겨지는 죄형법정주의가 “공산주의 혁명의 목적상 사회에 위험한 행위는 실정법을 떠나 처단할 수 있다”는 규정으로 사실상 폐기된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법 인식은 특히 스탈린 통치기 대규모 인권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범인의 ‘계급적 소속, 반혁명 목적’에 따라 ‘사회적 위험성’을 평가하고, 실제 행위가 아니라 범인이 얼마나 위험하냐에 따라 형벌을 정하라는 규정은 수많은 이가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나 출신성분만으로 가혹한 처분을 받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회적 위험성’이 있다고 간주된 이들은 재판도 없이, 따라서 제대로 된 항변의 기회도 없이 유형, 추방, 정치범수용소(악명 높은 ‘굴라크’)로 내몰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혁명범죄’의 범위는 갈수록 커져, “직접 반혁명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용인하는 경우, 또는 행위결과의 사회적 위험성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경우”, 즉 미필적 고의, 과실까지 확대됩니다. 이는 소련 인민들이 혹시 모를 처벌을 피하고자 주변 사람을 더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 용어 소개

법치주의(법의 지배)란?
‘법치’라고 하면 “반드시 법을 지켜라”는 말로 생각하기 쉽지만, 현대 국가들의 기본적인 원리인 법치주의는 사람의 주관이나 폭력이 아니라, 명확하게 규정된 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정한 지도자나 세력이 자의적으로 지배를 하거나 시민의 인권과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국가권력을 제한, 통제하는 목적이지요. 예를 들어, 영국의 역사를 보면 법(마그나 카르타, 권리장전 등)을 통해 왕이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하고 사람들을 구속, 처벌하는 것을 제한하고, 왕도 이 법을 따르도록 한 과정에서 법치주의와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합니다.

죄형법정주의란?
현대 형법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죄형법정주의’는 법치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어떤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그 범죄와 형벌이 법에 규정되어 있어야 하며 법관은 이에 근거해서 판결해야만(유추해석 금지)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없으면 사람들은 행위 당시에는 나중에 처벌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었던 행위로 처벌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정권이나 정책이 바뀔 때마다 형법이 정적을 처단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동일한 문제가 북한에서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는 스탈린 통치기에 대한 비판과 법 개정, 정치범 사면·복권도 가능했으나,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 주석과 그 측근이 갈수록 권력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흘러왔기 때문입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에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 시도가 실패하였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숙청이 이어지면서 조선노동당 내 김일성 비판 세력이 전부 제거되었습니다. 김일성 1인지배체제가 이렇게 확립되어 지속되었고 이는 김정일, 김정은에게로 세습되었습니다.
 
북한에서도 ‘당의 지배’가 ‘법의 지배’에 우선합니다. 1958년 김일성 수상은 “우리나라의 법은 우리 국가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무기입니다. 법은 정치의 표현이기 때문에 정치에 복종되어야 하며 그것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당의 령도(영도)를 떠나서 법에만 복종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법에 복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법을 왜곡하자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이와 같이 북한의 사법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독재실현에 복무하는 법을 해석·적용하고 집행하는 재판기관들의 권력적 활동”으로 여겨지며, 그러므로 사법기관은 조선노동당의 영도를 충실히 따라야 합니다.
 
북한 형법 또한 반국가범죄, 반혁명범죄, 반민족범죄를 엄중히 처벌하는데, 앞서 보았듯 북한은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북한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범죄들은 무제한의 공소시효가 부여되며, 2004년 형법 개정 이전에는 국가전복음모죄, 테러죄, 국가반역죄(탈북 관련 행위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민족반역죄에 대한 처벌은 오로지 사형뿐이었습니다. 1950년 제정 당시부터 2004년 개정 이전까지는 형법이 죄형법정주의를 명시적으로 부정했는데, 이는 “법이 미리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하여 사회적 위험성이 있는 행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구에 배치된다”는 식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권력세습과 정권 유지의 어려움은 탄압의 강화로 이어졌는데, 일례로 북한은 여러 차례 형법 개정을 통해 사형을 부과할 수 있는 범죄의 수를 늘려왔습니다. 코로나19 위기로 통치력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도 북한 당국은 법규범 강화로 대응했습니다. 사회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2022년 형법을 개정했고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년), 청년교양보장법(2021년), 혁명사적사업법(2021년), 평양문화어보호법(2023년) 등을 제정했습니다. 비상방역법, 마약범죄방지법 등의 특별법을 제정하고 최고형을 사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존엄모독죄’, 한국 영화 시청·열람 행위나 방역조치 위반도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가 되었습니다. (이는 UN 자유권규약이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되는’ 사유로 규정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2022년 8월 안토니우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UN총회를 앞두고 발간된 UN 『북한 인권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엄격한 코로나19 통제로 북한 주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탄압이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리하면, ‘법 앞의 만민 평등’을 뜻하는 현대 법치주의가 아니라 ‘혁명적 폭력’의 정당화를 따른 북한 형법은 결국 정치적 탄압과 통제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그 결과 정치범수용소, 즉결처형·공개처형과 같은 극단적 인권탄압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 1월 2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현황. [출처: 연합뉴스]
 
5) 북한 내 극단적 자유권 탄압의 사례들
 
① 정치범수용소
  2014년 UN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북한에서 중대한 정치적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진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해 반국가 범죄자와 형법 집행을 위한 교화소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조사로 파악된 정치범수용소는 총 11곳으로, 이중 2023년 현재까지 운영되는 것으로 파악되는 시설은 5곳(평안남도 2곳, 함경북도 2곳, 함경남도 1곳)입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연좌제’에 따라 가족을 함께 수용하면서 여러 ‘리’나 하나의 ‘구’에 해당할 만큼 넓어진 마을 형태와, 정치범 본인만 수용되는 교화소 형태가 있습니다. 수용자들은 탄광, 금광 등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졌습니다.
  ‘정치범’의 수용 이유는 출신성분 문제, 소위 ‘말 반동’ 등 김일성, 김정일 권위 훼손과 관련된 문제, 간첩행위, 종교활동, 북한 내 권력다툼이나 기관원의 횡령 등 비위와 관련된 문제, 남한행을 시도했거나 가족이 탈북하여 남한에 거주하는 경우, 남한 거주자와의 통화 등 남한 관련 문제 등이 보고되었습니다. 수용자의 식량, 주거, 생활, 의료 환경은 물론 매우 열악하며, 공개처형과 강제노동이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② 즉결처형·공개처형
  생명권은 모든 인권의 기본이며, 인간의 생명을 국가가 자의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어야만 합니다(UN 자유권규약 제6조). 이에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따라 즉결처형과 같은 초법적·약식·자의적 처형은 금지됩니다(자유권규약 제14조). 설령 가장 중한 범죄에 대하여 권한 있는 법원의 최종판결에 의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해도, 사형집행 공개는 자유권규약 제7조가 금지하는 ‘잔혹하고 비인도적이며 굴욕적인 형벌’이며 이를 목격하는 이들에게도 심각한 인권탄압입니다.
  그러나 UN,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단체, 통일부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에서 즉결처형·공개처형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국경지역에서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즉결처형 사례가 계속 보고되고 있으며, 북한 내에서 공개처형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2020년까지 매년 수집되었습니다. 대체로 공개처형은 운동장 등에서 총살로 실시되고, 주민은 학교, 기업소, 인민반을 통해 동원되어 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보고됩니다. 북한은 2019년 5월 UN 인권이사회 국가별정례인권검토(UPR) 실무그룹 제33회기 제8차 회의에서 “사형은 희생자의 유가족과 다른 관련자들의 강력한 요청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집행되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라고 답변하며 공개처형이 실시되고 있음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핵 개발과 인민의 식량권, 건강권 중에 무엇이 중합니까?
 
북한은 자유권에 대한 문제 제기를 회피하며 사회권을 강조합니다. 인권 실현의 물질적 기초인 식량, 건강 등을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북한 체제가 자본주의 국가보다 인권이 더 잘 보장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와집에 비단옷”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북한에서 사회권의 일환이자 생명권과 직결되는 기본적 권리인 식량권, 건강권이 잘 보장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1990년대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초유의 식량위기를 겪었고, 현재에도 식량, 의료 사정이 좋지 않다는 정황은 김 위원장의 발언을 비롯하여 북한의 공식적인 매체들에서 여러 차례 드러납니다.
 
먼저, 북한은 인민에게 필수적인 식량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2022 세계기아지수에서 북한은 24.9점으로 심각 단계, 조사 대상국 121개국 중 97위입니다. 식량농업기구(F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유엔아동기금(UNICEF), 세계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가 공동으로 발간한 ‘2022 세계식량 안보 및 영양 현황’에 따르면 2019∼2021년 북한의 영양부족 인구는 총 1,07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1.6%입니다. 이는 지난 2004∼2006년 810만 명에서 약 260만 명 가량 증가, 비율로는 33.8%에서 8%p 가까이 증가한 것입니다. WHO, UNICEF가 발간한 『2021 세계 영양 보고서』는 북한 내 5세 미만 아동의 발육 부진 비율을 19.1%로 추산했습니다.
 
건강권의 경우, 과거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복지인 무상의료제와 예방의료는 현재로서는 유명무실합니다. 개인이 의료서비스에 대한 물질적 대가를 지불하거나 음지에서 개인적으로 영업하는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고됩니다. (의료인력이 국가가 지급하는 봉급을 통해 생계를 꾸리기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므로 이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2022년 WHO와 UNICEF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코로나19 봉쇄 상황에서 외부의 지원을 거부하면서 2021년 북한의 디프테리아, 백일해, 파상풍 예방을 위한 DPT 백신접종률은 2020년 98%에서 42%로 급감했고, B형 간염 접종률과 B형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 접종률도 97%에서 41%, 수막구균 접종률도 99%에서 42%로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2020년 98%였던 소아마비 백신 접종률은 무려 17%로 하락했습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0%인 단 2개국이 바로 아프리카의 독재국가 에리트레아와 북한이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 당국이 핵·미사일 개발 노선을 고수하면서 이와 같은 식량위기와 보건위기를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2016~2017년 연이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은 UN과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제재를 낳았고, 이는 북한의 경제위기와 고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런 경제위기를 언제까지고 견디자는 ‘자력갱생’ 노선을 2021년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정식화하고, 계속해서 비핵화 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은행이 7월 발표한 ‘2022년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국민총소득(명목 GNI)은 36.7조 원으로 남한의 1.7%에 그쳤으며, 연속해서 역성장(마이너스 성장) 추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위기에서도 북한 당국은 국제사회의 개입 여지를 최대한 피했는데, 특히 백신을 제공하겠다는 다양한 제안을 거부하여 북한 주민이 백신을 전혀 접종하지 않은 채로 코로나19 감염에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했습니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경제위기가 대기근으로 이어지던 때에도, 다른 국가라면 선택했을 대외 교역·투자 확대, 원조 요청, 경제관리 개혁을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식량원조가 개시된 이후에도 북한 당국이 그 덕분에 절약된 외화를 식량 추가 수입에 쓰지 않고 군수용품이나 상류층을 위한 사치품 수입에 할당했으며,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2000년까지 대기근이 이어지는 상황을 피하고 최소 생존수준을 넘어서 정상적인 수준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스테판 해거드·마커스 놀랜드, 『북한의 선택』, 매일경제신문사, 2008.). 북한 당국의 이러한 행보는, 결국 인민의 식량권·건강권, 나아가 생명권 그 자체보다 정권의 안위를 정책 목표의 가장 우선순위로 보이게 합니다.
 
현재에도 식량과 보건 환경 개선에 쓰일 수도 있을, 북한 경제의 너무나 막대한 부분이 군사비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노동자민중이 정책 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부재한 현실도 문제입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21년 연감』에 따르면, 북한은 2020년 세계 평균 GDP 대비 군사비 비율(2.4%)보다 10배 이상, 즉 GDP의 20% 이상을 군사비에 쏟고 있습니다. 2022년 6월 한국국방연구원의 「북한 미사일 발사비용 추계」는 북한이 2022년 상반기에 발사한 미사일 33발의 비용을 북한 전체 인구에 접종하기 충분한 코로나19 백신과 식량 부족분의 상당 부분을 구입할 수 있는 규모로 추정합니다.
 
 
핵 문제 해결 없이는 어려운 북한의 경제 발전
 
북한경제의 장기적 성장과 어긋나는 대중국 무역의존성 심화
 
김정은 시대의 북한 경제는 이미 북한 전체 대외무역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대중국 무역이나 UN 대북제재를 우회하는 중국의 원조 없이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대중국 무역 의존 현상은 북한 관광이 중단되고 남북관계가 경색에 빠진 2010년부터 시작했지만, 2016~2017년 북한의 핵·ICBM 실험으로 UN 대북제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북한 경제가 고립되면서 유일한 길로 남았습니다.
 
각 국가별 북한 수출 RFI(인적, 물적 자본) 추이(2000년~2015년)
특정 국가가 무역을 통해 성장에 필요한 요소들을 축적하는지 평가하는 척도로 ‘현시 요소 집약도’(RFI)가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북한이 과거 한국과 일본에 수출했던 제품들의 RFI는 대중국 수출품에 비해 인적, 물적 자본 측면 모두에서 월등히 높았다. 이는 북한경제의 성장에는 대중국 교역이 아니라 대한국, 대일본 교역이 유리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반면 북한의 대중국수출 RFI는 인적, 물적 모두에서 2000년 이후 꾸준히 하락했다. [출처: KDI]
 
미중 전략적 경쟁 속에서 북한은 앞으로도 비핵화와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는 대신, UN 대북제재를 제대로 지킬 생각이 없는 중국과의 교역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어 핵 개발을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 의존 전략은 북한경제의 진정한 ‘성장’, ‘자주’와 역행하는 효과를 낳을 공산이 큽니다. 북한의 대중국 무역은 가공을 거치지 않은 천연자원을 파는 수출구조라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의 투자와 기술 개발·교육·훈련을 위축시키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은 장기적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북핵 문제 해결 없이는 남북경제협력도 불가능
 
통일경제는 중국의 일대일로와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의 결합을 통해, 유라시아 경제를 연결하는 중심축으로 부상할 수 있다. 통일경제는 우리 민족의 자주와 민족대단결을 실현하는 자주통일정치를 구현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토대를 제공한다. 성립기에는 외세의 제재와 봉쇄의 압박을 견뎌내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할 것이며, 정착기에는 통일국가의 물질적 담보로 작용할 것이다. 통일경제는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항구적 평화체제를 보장하는 경제적 기반으로 작용할 것이며, 전망적으로는 자주, 친선, 평화에 입각한 대외경제관계, 국제경제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데서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할 것이다. 
자립적 민주경제, 자립적 통일경제는 진보민중진영의 대안경제전략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가장 과학적인 대안이며, 둘째로 유일한 대안이며, 셋째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에 있다. 오직 통일경제만 중미분리시대의 지정학적 딜레마를 지정학적 축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자립적 민주경제, 자립적 통일경제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즉각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 민주노총 총서 2021-03 『탈세계화 시대 한국경제 구조 진단 - 예속과 불평등을 중심으로』 중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파기 이후 남북미 간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임에도, 여러 NL론자와 민주노총 통일위원회 등은 민족경제·남북통일경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부설 민주노동연구원과 서비스연맹이 2021년 8월 발간한 총서 『탈세계화 시대 한국경제 구조 진단 –예속과 불평등을 중심으로』의 결론인 ‘자립적 민주경제와 통일경제에 대한 모색’에서 필자인 김장호 ≪민플러스≫ 편집국장은 남북한 공동의 ‘자립적 민주경제와 통일경제’, 나아가 이를 통한 ‘연방형 경제공동체’라는 통일 방안을 한국 경제의 진보적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2021년 11월 ‘요소수 대란’ 당시 민주노총 성명 “요소수 대란,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근본대책을 마련하라”는 민주노동연구원, 서비스연맹 총서와 같은 맥락의 정세인식을 드러냅니다. 성명은 요소수 대란의 근본대책이자, 양경수 집행부가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의 목표로 제시하는 ‘한국사회 대전환’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수출중심, 무역중심 경제구조의 근본적 전환”과 “불평등한 대외관계, 불균형한 경제구조의 전환”을 제시합니다. ≪민플러스≫의 “제2, 제3의 요소수 대란을 겪지 않으려면”(2021.11.12.)은 이 주장을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이 글은 “중미대결”로 글로벌 공급망, 물류망이 붕괴하는 현재는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고 탈세계화, 자주화의 시대가 오고 있는” 때인데, 이에 대한 대안이 바로 “자립형 통일경제”라고 합니다. “북은 세계 자원의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종류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그 양과 질 면에서도 손꼽힌다. 남과 북이 원자재 자립을 실현하는 방향에서 협력한다면 세계경제의 급격한 변화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통일경제는 자립경제를 지향해야 한다. 내수기반 자립경제는 과잉수요를 줄이고 건전한 소비패턴을 만들게 한다. 최근 러시아에서 맥도날드, 스타벅스가 철수하면서 러시아식 맥도날드, 스타벅스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모든 나라가 자기식의 수요공급체계를 가져가야 국력에 맞게 생산과 공급, 수요와 소비를 적절하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통일경제는 에너지, 원자재 강국의 길, 설계와 소재·부품·장비 강국의 길이다. 남과 북이 힘을 합치면 관광대국으로 갈 수 있다. 한반도와 만주·러시아 극동을 연결하면 지속가능한 내수 경제가 가능하다. 
- 2023년 민주노총 노동자 통일교과서4 『위기의 한국사회, 노동자의 활로찾기』 중
 
2023년 민주노총 노동자 통일교과서4의 결론 또한 지금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무너지는 ‘탈세계화’ 시대로, 일시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촉발되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노동자의 일자리와 임금이 늘어나고 “기형적인 대외 의존형 경제에서 벗어나 내수기반의 경제구조로 전환한다”고 설명합니다. 유일한 대안이자 강국의 길로서 자주적 민주경제, (남북)통일경제, 자립적 경제건설모델을 주장하며 이런 100년 만에 찾아온 기회의 성패는 노동자의 직접정치, 자주통일운동에 달려 있다고 끝맺습니다. 그러나 남북한 간 상이한 사회·경제구조와 현격한 경제력 차이, 북한의 핵무장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세계 경제와 다방면으로 통합되어 있는 한국 경제의 현실 등을 고려했을 때, 오직 남북통일경제만이 이 시대의 유일하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주장을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현 국면은 북핵 문제 해결 없이는 이런 구상의 첫 단계가 되는 남북경제협력 정책조차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정경연계’, 즉 북핵으로 인한 경제제재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정경분리’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은 누구보다 남북경협 의지가 컸으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사례가 잘 보여줍니다. 북한도 2020년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상징적 사건이 보여주듯 남북협력에 적극적이지 않은 국면이며, 앞서 언급했듯 중국과의 교역에 의존하는 노선을 택했습니다. 설령 남북경협이 활발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북핵 문제가 심화하면 국제사회는 대북제재를 강화할 수밖에 없고, 한국 경제는 그 영향을 직격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사회 대전환’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물은 북핵인 셈입니다.
 
 
3대 세습을 넘어 4대 세습으로 가는 국가가 진보적입니까?
 
“우리 당과 혁명의 명맥을 백두의 혈통으로 영원히 이어나가자”?
 
다음으로 권력세습 문제를 보겠습니다. 혈통에 따른 북한 최고지도자의 승계는 북한 체제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북한 주체사상의 수령론과 후계자론은 혈통승계를 정당화합니다. 이를 명문화하는 것이 북한 헌법과 조선노동당 규약보다 상위에 있는, 즉 초헌법적인 최고규범인 ‘당의 유일적 령도(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1974년 김정일 부자세습을 준비하며 처음 제시되었습니다. 10대 원칙 제10조는 “김일성이 개척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이끌어온 주체혁명위업, 선군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하여야 한다”고 혈통승계를 규정합니다. 제10조 제2항은 “우리 당과 혁명의 명맥을 백두의 혈통으로 영원히 이어나가며 주체의 혁명전통을 끊임없이 계승발전시키고 그 순결성을 철저히 고수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는데, 김일성 일가를 일컫는 이른바 ‘백두혈통’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표현은 2013년 김정은 정권이 ‘원칙’을 개정하며 추가했는데, 정권 초기 취약한 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혈통을 부각시키는 의도로 추정됩니다.
 
김일성 주석, 김정일 총비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같은 혈통이라는 점을 가지고 ‘세습제도’라고 하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돈과 권력을 극소수의 특정집단이 독점하는 사회에서는 ‘금수저’ 논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북에서는 혈통이 같다는 사실은 더 탁월한 능력을 가질 수 있고 더 많은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 안호국 시사평론가, “차별화가 없는 정치”, ≪민플러스≫, 2018.10.11.
 
위에 인용한 ≪민플러스≫ 글처럼, NL 일각은 북한은 남한과 다른 사회이므로 북한의 혈통승계를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혈통을 통해 초유의 ‘3대 세습’으로 정권을 물려받은 김정은 위원장과 그 여동생인 김여정 부부장 등은 입헌군주제 국가에서처럼 상징적인 지위를 맡은 것도 아니고, 북한 체제의 핵심 권력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2022년 9월 핵무력법령으로 핵무기 사용 권한까지 오롯이 김정은 위원장이 가진 상황입니다. 이와 같이 3대 세습 정권에 권력을 집중시킨 북한 체제는 그 근간 자체가 부정적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습니다.
 
2023년 2월 14일 북한 조선우표사가 공개한, 김 위원장의 딸 김주애가 등장하는 우표 도안. ‘존귀하신 자제’란 문구와 김주애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발사를 참관하는 사진을 담았다.
 
북한의 역사를 보면, 김일성 주석과 측근이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그 아들, 손자가 물려받는 과정에서 대규모 숙청과 인권 탄압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탈냉전 거부와 핵무장으로 나아갔습니다. 특별한 업적이 없으며 북한 대중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당시 세계 최연소 국가지도자였던 만 27세 김정은이 정권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는 김 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 처형 사건(2013년), 이복형인 김정남 피살 사건(2017년) 등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세습정치를 “북한은 지도자와 인민이 일체화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체로 돌아가는 사회”(《민플러스》, 2020.06.13.)이니 문제없다는 식으로 강변하는 주장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 용어 소개

주체사상·수령론·후계자론이란?
김일성 1인 절대권력을 확고히 하고, 이를 아들 김정일에게 세습하는 것을 정당화한 이론들입니다. 조선노동당 규약은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명시하는데, 이 김일성-김정일주의의 근간이 1972년 북한 헌법에 명문화된 ‘주체사상’입니다. 주체사상은 간단히 말해 “인민대중이 혁명과 건설의 주체”라는 주장이나, 핵심은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 한다”는 ‘수령론’과의 연결입니다. 심지어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따르면 생명체의 뇌수가 각 기관을 조절하고 지휘하듯, 수령(김일성 주석)은 한 생명체처럼 사회정치적 집단으로 결합된 인민대중의 “최고뇌수”, 즉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 누가 수령을 하냐 했을 때, ‘후계자론’은 수령의 후계자는 수령의 모든 것을 체현하고 수령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이는 곧 “수령의 아들이자 곁에서 통치를 분담한 김정일보다 더 적합한 후계자가 누가 있겠냐”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4대 세습을 위해 남한과의 분리 정책을 취하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 중심의 북한 체제 유지를 위한 사상·정보·문화통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현재 북한 형법 제64조는 공화국 ‘존엄모독죄’에 대해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정은 종전 형법에는 없던 것으로 2022년에 생겼습니다. 2021년 4월 30일 제정된 ‘혁명사적사업법’ 제3조는 김일성 일가의 유일영도체계 수립을 혁명사적사업의 기본원칙으로 천명하고, 제2조는 혁명역사와 혁명업적을 계승·발전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김일성, 김정일과 함께 김정은을 명시합니다. 북한 법규에서 개인 우상화의 대상으로 김정은이 명시된 것은 이 법이 처음으로 파악됩니다. 2022년 11월 진행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7형 시험발사 때는 김 위원장의 딸인 김주애의 모습이 최초로 공개되었고, 김주애는 이후 여러 차례 무기 시험, 열병식 등에 등장했으며 올해 2월 ‘김주애 우표’까지 발행되었습니다. 이는 ‘3대 세습’을 넘어 ‘4대 세습’으로까지 이어지는 권력세습과 이를 보증할 핵무장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 NL론은 남북한은 하나의 민족이고 하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민족 모순’, ‘분단 모순’ 해소를 주장했고, NL 주류는 여전히 이러한 관점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진보연대는 “한미동맹의 가장 큰 문제는 민족을 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남북은 두 개의 국가이기 이전에 통일을 해야만 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규정합니다(한국진보연대, 전국민중행동(준), 『2021년 815 투쟁 자료집』).
 
그러나 앞서 보았듯 북한 당국이 같은 민족인 남한을 적으로 간주하고 남한에 대한 핵 공격 의사를 드러내는 상황임을 차치하고서라도, 정작 북한에서는 세습정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측면에서 북한을 남한과도 구별되는 특수한 공동체로 형상화하는 흐름이 커지고 있습니다. 김정은 정권의 공개활동에서는 통일이나 민족 같은 용어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반면 ‘조국’, ‘국가’는 강조됩니다(서보혁, 「김정은 정권의 통일정책은 없다?」, 통일연구원, 2023.07.10.). 한 마디로, 현재 북한 당국은 ‘우리민족(한민족) 제일주의’보다 ‘우리국가(북한) 제일주의’를 더 선호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국가 제일주의’는 김정은 정권에서 제창된 것으로, 국가, 국기, 국화, 국조 등 국가상징물의 중요성 강조 등을 통해 북한의 독자적인 ‘국가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국통일대전 준비’를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남북통일이 북한 당국의 정책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김정은 정권의 독자적인 통일 방안이 제시된 적 없다는 점과 2018년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에 새로운 통일 논의가 없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한에 대해 노골적인 핵 위협을 가하고, 2021년 대남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해체를 시사하고, 올해 7월에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의향에 대해 남북관계가 아니라 제3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외무성이 담화를 내는 것도, 남한과의 분리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23년 9월 8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수립일(9.9절) 75주년 기념 행사에 등장한 “우리국가 제일주의” 표어. [출처: 노동신문]
 
사실 북한 정권이 ‘조선민족’(북한에서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 대신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을 강조한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미 1995년에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라는 주장이 등장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정권을 잡은 후 첫 공개연설에서 “김일성 민족의 백년사”를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어떠한 진보성은커녕, 현대 이전의 ‘왕조국가’를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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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NL 주류는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여전히 북한 정권을 한반도 ‘민족해방’과 변혁의 지도세력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국제정세의 주요 지점인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전략적 경쟁, 대만 문제 등을 해석하는 데에도 북한 정권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남한과 세계 시민의 민주주의, 평화와는 배치되는 주장으로 사회운동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들의 국제정세 인식과 이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제어
평화 국제
태그
북한 북핵 우크라이나 전쟁 다극체제 반핵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