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 2024.01.18
북한의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이 “그 자체가 통일”, “새로운 세계로 가려면 넘어야 할 강”이라는 자민통 논자들
남한 민중은 통일을 위해 북한의 핵 공격을 감내하라는 말인가?
민주노총 주최 한반도 정세토론회의 심각한 정치적 편향성을 우려한다
지난 연말 조선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유사시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 준비”를 지시하며, 남북관계는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고 규정하였다.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북한 헌법에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할 것과 전쟁 시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 위원장, 남한은 이제 동족이 아니니 핵을 쏴도 된다는 말이 하고 싶은가?
수십 년간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 방안이었던 ‘연방제 통일’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를 사실상 폐기하는 이러한 행보는, 2021년 1월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 이래로 일관되게 ‘대남핵전쟁’을 실제 시나리오로 두고 준비하는 북한의 공식적인 수사와 핵·군비 강화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8차 당대회에서 최초로 미국이 아니라 남한, 일본이 타깃일 수밖에 없는 전술핵무기(단거리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또한 북한 내에서 헌법보다 위상이 높은 조선노동당 규약을 개정하여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 통일”이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강위력한 국방력에 의거하여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앞당기는” 것으로 고쳤다. 2022년 3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북미 모라토리엄을 파기하였고, 4월에 ‘대미용 핵’이라는 그간의 주장과 달리 남한을 대상으로 하는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히고, ‘전쟁 억제용 핵’이라는 수사도 버렸다(“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다”). 9월에는 선제 핵공격을 합법화하는 새로운 핵무력정책 법령을 공개했는데, 이 법 서문은 “핵 무력은 영토 완정을 수호한다”고 규정한다.
2023년 북한 당국은 ‘대남전쟁’ 시나리오와 군사훈련까지 공개했는데, 3월에는 전술핵 운용부대가 전술핵 시험용 탄두 장착 탄도미사일 발사 훈련을 했고, 8월에는 지도 위 서울과 계룡대 부근을 가리키는 김 위원장의 사진과 함께 “남반부 전 영토 점령”을 목표로 하는 ‘전군지휘훈련’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같은 시기 탄도미사일 발사도 “대한민국 군사깡패의 중요 지휘 거점과 작전비행장을 초토화해 버리는 전술핵타격훈련”이라고 발표했다.
이 기간, 8차 당대회에서 김 위원장이 개발을 지시한 9가지 무기체계(‘9대 과업’)인 전술핵무기, 고체연료 사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초대형핵탄두, 무인기, 수중발사 핵전략무기, 극초음속미사일, 군사정찰위성, 핵잠수함 등의 개발·실험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2023년 11월에는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한 대가로 얻어낸 기술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군사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발사했는데, 이는 곧 북한 전술핵무기의 ‘눈’이다.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이러한 군사정찰위성을 올해 3개 더 발사하고, 핵물질 생산을 최대화하고 핵탄두를 양산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흐름에 비춰보면 “(남북한은)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는 규정과 대남기구·매체 폐지, 북한 사회 내 통일·화해·동족 개념 제거 등 후속한 흐름들은 대남 핵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같은 민족에게 핵 공격을 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사상적, 법적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한반도를 핵전쟁터로 만들 준비를 해나가며 한국 시민을 위협하는 북한 당국을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사소한 우발적 요인이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북한) 영토, 영해, 영공을 0.001mm만 침범하더라도 전쟁 도발로 간주”한다는 북한 당국의 수사는 접경지역에서의 사소한 빌미로 고강도 무력도발을 감행할 근거를 만드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북한 당국은 한반도를 위험천만한 전쟁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도발 계획을 즉각 멈춰야 한다.
“대사변”은 “비평화적 방도의 통일”, “다극화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자민통 논자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부 ‘자민통’(NL) 논자들은 북한의 행보를 조금도 문제 삼지 않으며, “대사변”, “통일대전(大戰)”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북한이 말하는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은 곧 통일이며, 한반도 전쟁위기는 인류가 더 나은 ‘다극화 세계’로 가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1월 4일 6.15남측위원회 주최로 열린 정책포럼 <북의 조선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 분석과 정세전망>에서 발제를 맡은 장창준 한신대학교 통일평화정책연구센터 소장과 손정목 통일시대연구원 부원장이 이같이 주장한다.
장창준 소장은 “북이 말하는 ‘대사변’은 자주민주통일을 지향하는 활동가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대사변’은 ‘통일대전’과 다르지 않다. 북의 기본 인식은 평화적 방법에 의해서건 비평화적 방법에 의해서건 분단 문제는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미제를 몰아내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싸움에서 북이 승리하면 그 자체가 통일이라는 의미”라며 “언론에서는 이번에 (북한이) 통일 정책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오히려 북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통일 의지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이어 “인류사에서 구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실 굉장히 폭력적인 시기를 지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이런 전쟁위기가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 터널은 지나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분단 체제라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북한은 통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통일 방법을 ‘무력통일’로 바꾼 것인데, 남한 활동가들도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폭력을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대단히 충격적인 주장이다.
손정목 부원장 또한 한반도 전쟁위기에 대해서 “한반도 정세가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하지만, 전 세계적인 흐름을 보면 전체 인민을 위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손 부원장은 발제에서 ‘북중러의 전략적 단결 공고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전 사실상 승리’ 등을 근거로 ‘호혜와 평등의 다극화 세계질서’가 구축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걸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강, 벽, 산을 넘는 중이다. 그 과정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 쉽게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사변’은 남쪽 분들이 ‘그럼 우리는 뭐하지’ 고민할 일은 아니다. ‘대사변’이란 전쟁을 통해 평정한다는 것이고 그 자체가 통일이다. 남쪽에 어떻게 조치를 하냐는 그 뒤의 이야기니까 그걸 우리가 고민하면 머리 아프다”라고 답변했다.
요약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처럼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는 ‘다극화 세계’로 나아가는 진보적 움직임이니 남한 활동가들은 그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가타부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역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인 주장이다.
핵무기는 민간인과 군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간인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 이들은 수많은 무고한 한국 시민이 희생되고 고통받을 ‘핵무기를 동원한 남조선 평정’을 진정으로 “통일”로, “건너야 할 강”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민주노총 주최 한반도 정세토론회의 정치적 편향성이 우려스럽다
이러한 충격적인 인식이 민주노총과 전국민중행동 등 주요 연대체 내에서 ‘정세분석’을 대표하는 현실은 더욱 개탄스럽다. 1월 17일 민주노총과 전국민중행동이 공동주최한 <2024 한반도 정세와 자주통일운동의 전망과 과제> 토론회는 장창준 소장이 대표 발제를 맡고, 함재규 민주노총 통일위원장, 최은아 한국진보연대 자주통일위원장 겸 6.15남측위원회 사무처장이 토론을 맡았다. 한 해 한반도 주요 정세를 다루는 위상의 토론회가 관점과 주체를 ‘자주통일운동’로 한정지었고, 패널 구성도 자민통 논자 일색이다. 120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대중조직의 정세토론이 이렇게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진행되는 것이 우려스럽다.
이 토론회에서 장창준 소장은 “(북한의 통일 포기 여부, ‘두 국가’ 규정, 6.15북측위원회 해체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무의미한’ 논쟁은 보류해야 한다”, “양비론이나 운동론 논쟁으로는 현 국면을 돌파하지 못한다”며 심지어 사회운동 내 논쟁을 배제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토론자인 함재규 통일위원장, 최은아 자주통일위원장도 “자주통일역량 강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대동소이한 주장을 했다.
사회운동은 언제까지 북한 당국과 자민통 논자들의 행태에 침묵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 정세에 대해 엄중히 인식해야 하는 국면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운동은 언제까지 북한의 모든 행동에 면죄부를 줄 것인가? 북한이 남한 전 영역을 타격할 수 있는 전술핵무기를 개발하고 선제핵공격을 법제화하는 현실에 언제까지 눈 감을 것인가? ‘근본 문제’가 무엇이라고 보든, 이러한 현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과 한반도 평화에 대단히 심각한 위협이 아닌가? 북한의 행태에 맹목적인, 자칭 ‘자주통일운동’의 이러한 주장이 사회운동의 정세분석을 대표하고 우리 사회에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킬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가?
한반도 전쟁위기는 절대 가볍게 보거나 묵과해서는 안 될 수준에 이르렀다. 핵전쟁이 민중에게 안길 고통을 “새로운 세계로 가려면 건너야 할 강”으로 미화하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한반도 민중의 삶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대대적인 논쟁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