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 2024.12.19
사법의 시간, 그럼 정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17~18년 왜 개헌에 실패했는가 되돌아 보아야
2024년 12월 14일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2월 16일 헌법재판소는 첫 변론 준비 기일을 12월 27일에 열기로 했다. 헌법재판소는 현 6인 체제로 심리와 변론 모두 가능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다른 한편 검찰 특별수사본부와 공조수사본부(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국방부 조사본부) 각각 내란죄 혐의 수사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 이제 권한이 정지된 윤 대통령의 운명은 헌법재판소와 수사기관에 달려 있는 만큼,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후 ‘사법의 시간’이 도래했다는 평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때 ‘정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정치가 해야 할 일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냐, 또는 벌어질 수 있었냐는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보아야 한다.
정치지도자에게 필요한 덕성과 자질
여러 논자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윤 대통령 개인의 결함에서 찾아보기도 한다. 강준만 교수는 「윤석열은 왜 그랬을까」(《경향신문》, 2024년 12월 10일)에서 비상계엄 선포의 진짜 이유를 두고 “윤석열의 성격에서 이유를 찾으려는 분석이 가장 유력한 것 같다”고 말한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에 다혈질 기질”에다가, “남의 말을 안 들을 뿐만 아니라 청개구리 본성마저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국정운영 전 분야에 걸쳐 참모·측근·지인의 고언을 원천봉쇄함으로써 자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탄 셈이었다.” 여기에 정적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판단이 흐려질 대로 흐려져 계엄선포에 이르게 되었다.
노원명 기자가 쓴 「술에 취한 지도자, 운명에 취한 지도자」(《매일경제》, 2024년 12월 15일)는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소문을 상기시키며 “지도자의 음주가 위험한 이유는 감정과 판단을 흐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술은 사람을 가리는 취미활동이어서 멤버 구성이 배타적이다. 번개 치는 상대는 늘 친윤뿐이다. 혹은 충암고 동문.” 즉 자기 말이라면 무엇이든 동조할 사람들과, 게다가 술을 마시며 국사를 논하다 보면 극단적 결론에 이르기 쉽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자는 술에 취하는 것보다 “자신의 운명에 취하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 때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고속승진했고, 조국 사태로 단번에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으며, 정치에 도전한 지 몇개월 만에 대통령이 됐다.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운명에 취해 지독히도 오만한 에고이스트가 탄생했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 개인의 결함에서 이번 사태의 발단을 찾아보려는 이러한 진단은 나름대로 모두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성과 자질은 무엇인지, 지도자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되돌아보며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왜 우리의 정치 시스템은 특정 정치인을 검증하거나 걸러내지 못하는가, 또는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과 행동방식을 이끌어내지 못하는가. 즉 정치 시스템, 제도의 결함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정당이 왜 안전판 역할을 못하는가
먼저 ‘정당이 왜 안전판 역할을 못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최근 정당의 특징적 행태를 살펴봐야 한다. (범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만성적인 경제위기가 기존 정당체계의 위기, 즉 중도 보수주의 정당, 중도 자유주의/사민주의 정당의 득표력 동반 약화, 전통적인 지지층의 해체로 이어졌던 19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첫째로, 정당이 선거에서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당원으로서 경력을 쌓은 인사보다는 이러저러한 계기로 갑작스레 인기를 얻게 된 유명인사를 외부에서 영입해 후보로 내세우는 전략을 채택하는 빈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사실 언론사도 이런 흐름에 조응하는데, 정당 외부 인사더라도 대선후보 물망에 오르기 시작하면, 바로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조사’와 같은 것을 시행해 지지율 추이를 시시각각 보도하여 화제를 이어간다.
둘째로, 정당은 공직자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득표율을 고려하여 당원이 아닌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들이 의사결정에 미치는 비중을 점점 더 높여갔다. 대표적인 제도가 개방형 경선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정치경력이 별로 없는 당 외부 인사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는 정치의 ‘인물중심화’(personalization)를 촉진했다. 그러다보니 오랜 정당활동, 공직활동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개인의 스타성에 힘입어 선거에 당선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이런 정치인이 모두 정치인으로서 덕성과 자질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정당의 안전판 역할은 분명히 축소된다.
이런 식으로 선거정치가 작동하니, 선거에서나 선거 후 국정운영에서나 정당이 차지하는 역할이 점점 더 약화되었다. 물론 선거 때 필요한 자금력이나 조직력에서 정당의 역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당은 정치가의 토대라기보다는 ‘도약대’ 정도로 변화했다. 선거캠프는 정당과 별도로 정치자금을 모집할 수 있고 (국고보조금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게다가 정당 외부의 ‘선거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운영될 수도 있다. 그러니 선거 후 당선자의 참모진이 정당 외부의 캠프 출신 인사들로 구성될 수도 있다. 대통령 당선자의 경우 여기에 대통령 비서진 외 내각도 포함된다. 즉 정당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단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2017년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당시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국무위원 등 공직 인선에 당의 추천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인사추천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초 ‘더불어민주당 정부’라는 기조에 따라 인사와 정책에 대해 당과 협의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구체적인 준비를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는 침묵이란 형태로 거부의사를 밝혔고, 추 대표는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인사추천위원회 구성을 포기했다. 즉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라도, 심지어 대통령이 선거 전에 약속을 했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에 직접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게 확인되었다.
게다가 국회의원 수준이 아니라, 대통령과 같이 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된 당선자나, 다음 번에 당선이 유력한 후보자는 정당을 본인을 따르는 세력을 중심으로 재편할 힘마저 보유하게 된다. 윤석열 당선자는 취임한 후 당이 국정수행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즉 본인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당 대표를 여러 차례 갈아치우도록 원내와 원외를 동원해 압력을 행사하여 결국 ‘친윤그룹’을 형성했다. 이재명 낙선자는 본인이 직접 당 대표가 되어 ‘비명횡사’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지지자 일색으로 당을 재편해버렸다.
요약해보면, 선거운동의 무게중심이 정당에서 정치인 개개인으로 이동하면서 반짝 스타가 공직선거에 등장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정치인이 오랜 정당활동이나 공직활동을 통해 검증되거나, 또는 이를 통해 정치인으로서 필요한 덕성과 자질을 키워가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러다 보니 그런 정치인이 당선된 후 정당의 틀을 벗어나 당선자 개인의 선호나 친소관계에 따라 핵심 통치집단을 구성하게 된다. 심지어 정당 자체도 대통령 당선자나 유력 후보자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정당은 권력자의 독단을 제어하는 안전판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자의 도구로 변질된다.
물론 이런 경향은 대통령제를 채택한 곳이나 내각제를 채택한 곳이나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기존 정당의 정치적 정당성에 가하는 압력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당정치, 의회정치의 뿌리가 깊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서 그 정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당정치, 의회정치의 성숙도를 무시할 수 없다.
왜 내각과 국무회의는 대통령을 견제할 수 없나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에는 계엄 발동의 절차적 요건인 국무회의 심의를 거쳤느냐는 문제가 하나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이는 보도가 엇갈리다가 겨우 정족수만 맞춰서 요식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자 참석한 국무위원 중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냐, 누구는 왜 없었냐로 초점이 이동했다. 계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근거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국무회의가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막을 본질적 권한이 없다는 문제가 남는다.
현행 헌법의 경우, “국무회의는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심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책에 대해 토의를 할 수는 있지만 결정권은 없다. 하지만 한국 역사에 존재했던 헌법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의 국무에 관한 행위는 문서로 해야 하며 모든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가 있어야 한다”(66조)고 규정 했다. 즉 국무총리와 국무의원의 동의를 확인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또한 “국무원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기타의 국무위원으로 조직되는 합의체로서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 중요 국책을 의결한다”(68조), “국무회의의 의결은 과반수로써 행한다. 의장(대통령)은 의결에 있어서 표결권을 가지며 가부동수인 경우에는 결정권을 가진다”(71조)고 규정했다. 만약 대통령의 의사에 국무위원 과반수가 반대하면 승인될 수 없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제헌헌법을 무시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한국적 원형을 세웠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4·19 이후 개헌은 내각책임제를 도입했다. 당시에는 내각제에 반대하면 곧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대통령중심제 폐지, 내각제 도입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높았다. 그래서 1960년 헌법은 “행정권은 국무원에 속한다. 국무원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조직한다”, 행정권에 속하는 핵심 사항은 “국무회의의 의결을 경하여야한다”고 규정했다.
국무회의의 위상이 격하된 것은 1962년 11월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안한 ‘3공화국’ 헌법이다. 이때 “국무회의는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심의한다”는 문안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1980년 헌법에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7년 직선제 개헌 때도 살아 남았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국무회의의 관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987년 헌법은 1963년 헌법과 몹시나 닮아있다. 그래서 1987년의 민주화가 1963년 헌법에 담긴 대통령의 독재적 권한을 극복하지 못했다, 달리 표현하면 ‘군정종식을 넘어, 독재종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독재적’이라는 수식어가 가능할 정도로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을 그대로 둘 것이냐는 문제에 직면했다.
혹자는 1987년 개헌 이후, 윤 대통령 말고 누가 또 비상계엄을 선포했냐며, 1987년의 대통령중심제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실패한 대통령’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는 과도한 권한이 오히려 대통령을 실패로 몰아넣는 메커니즘이란 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단적으로, 시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방대한 행정기관, 전문가들이 보고서를 쏟아 내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에다가, 음지에서 활동하는 각종 정보기관까지 갖추고 있는 정부의 최고지도자가 왜 종종 가장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곤 하는가. 즉 견제와 균형이 존재하지 않을 때 오히려 권력자는 오류를 정정할 기회를 상실하고, 판단의 편향이나 주체적 환상 속에서 실패의 길을 걷게 된다.
선거불복의 정치문화와 만성적인 헌정위기
비상계엄 발표를 시작으로 윤 대통령이 여러 차례 낸 담화문은 대통령이 지금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많지만, 선관위에 대해 언급한 내용도 그 중 하나다.
12월 12일 윤 대통령의 담화는 이러했다. “민주주의 핵심인 선거를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이 이렇게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들이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선관위는 헌법기관이고, 사법부 관계자들이 위원으로 있어 영장에 의한 압수수색이나 강제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국방장관에게 선관위 전산시스템을 점검하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이 담화는 윤 대통령이 부정선거론을 유포하는 극우 유튜버의 세계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왜 그러했나. 비상계엄 담화에 답이 있다. 그는 본인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범죄자 집단의 소굴”, “패악질을 일삼아온 망국의 원흉”이라고 규정하고,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정치적 경쟁 세력을 ‘용납할 수 없는 악’으로 규정하는 한 정치가 기능할 리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악의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는가라는 문제로 넘어가면, 결국 그 답을 ‘부정선거’에서 찾는 극히 간편한 논리회로가 작동한다.
정치적 경쟁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양극화라는 정치문화적 환경은 부정선거론과 짝을 이룬다. 《주간경향》의 「극우 유튜버처럼 왜 대통령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사로잡혔을까」(2024년 12월 14일)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낙선에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한 김어준 씨의 논리와 현재 극우 유튜버의 논리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다만 좌파진영은 2012년 이후 선거결과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한 반면, 우파 쪽은 싹을 잘라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부정선거론은 사실상 선거불복의 한 가지 형태라는 점에서 지극히 유해하다. 앨버트 첸이 편집한 『21세기 초, 아시아의 헌정주의』(2014)는 아시아 각국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얼마나 헌정주의의 진전이 있었는가를 평가한다. 그런데 저자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만큼이나 각 정치세력이 선거결과에 승복하는 게 헌정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각국에서 민주화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지배적 정치세력과 이에 도전하는 신흥 정치세력이 격렬한 갈등을 벌이면서, 상대방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강력한 심리가 작동한다. 이는 집권세력에 의한 야당의 정치활동에 대한 방해나 탄압, 야당의 부정선거 제기로 곧잘 이어진다. 이러한 갈등은 여소야대 국면이 도래하면 폭발한다. ‘상대방의 실패가 곧 나의 성공’이라는 판단기준에 따라, 야당은 정부를 마비시키기 위해 온갖 시도를 반복하고, 대통령은 비상권한으로 대항하곤 한다. 비상계엄을 전후로 한 한국 사례는 아시아의 여러 사례 중 대표적이고도 극단적인 사례의 하나로 틀림없이 기록될 것이다.
이는 분명히 헌정위기라 칭할 만하다. 헌정의 원리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정치적 결정이 독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방지하여 최선의 답을 찾는 정치적 과정을 보장하는 것이지, 정치세력이나 권력기관이 권한을 남용하여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양극화, 선거불복의 정치문화가 항상 비상계엄과 같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 선거불복이 극단적 행동을 선택한 권력자의 심리 속에 토대로 자리잡고 있었고, 사후적으로도 그러한 행위를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집단들의 논리에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반드시 부정선거론이 동원되지 않더라도, 정치양극화와 선거불복의 정치문화는 상대적으로 ‘저강도’의 헌정위기, 헌정마비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다. 이는 여야, 어느 정치세력을 막론하고 숙고해야 할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후, 왜 개헌은 실패했나: 차기 유력 대선주자는 또 개헌을 거부할 것인가?
지금까지 어떻게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냐, 또는 벌어질 수 있었냐는 문제를 살펴보면서 정치가 해야할 일을 찾고자 했다. 요약하면, 대통령 본인의 개인적 결함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성과 자질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하지만, 이는 왜 우리 사회는 정치인 개개인을 검증하거나, 또는 바람직한 덕성과 자질을 갖추도록 키워내는 정치시스템을 발전시키지 못했느냐는 문제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정당정치, 의회정치의 성숙도가 작용을 한다. 정당정치, 의회정치가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곳일수록 정치의 중심이 정당보다 선거전문가 조직으로 이동하고, 정당은 안전판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최고권력자의 사당(私黨)으로 변질된다. 또한 우리의 정치시스템은 특정 개인이 정치권력의 최정상에 진입한 후 이를 견제할 만한 수단이 부족하다. 1987년 헌법에 내장된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은 1963년에 시행된 박정희 시대의 3공화국 헌법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그 자신의 권력을 견제하게 할 수단을 배제한 제왕적 대통령은 오히려 실패한 대통령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고 정당정치, 의회정치를 뿌리내리게 할 제도적 변화, 즉 개헌이라는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덧붙여 제도적 변화에 못지않게 정치문화가 성숙될 필요가 있다. 1980-90년대 민주화로 점진적으로 이행한 곳들의 사례를 보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만큼이나 선거결과에 대한 승복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정치양극화라는 조건에서 선거불복의 정치문화는 만성적인 헌정위기를 낳을 수 있다. 특히나 여소야대라는 조건에서 선거불복의 정치적 심리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리를 훨씬 뛰어넘어 행정부와 의회 각각의 권한 남용이라는 형태로 저강도의 헌정마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결론에 덧붙여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후에 터져나온 개헌 논의가 왜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느냐는 문제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2017년 12월 9일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여야 원내대표는 다음 해 1월에 국회 헌법개정특위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거의 매 정부마다 개헌 논의가 무성했으나, 실제로 국회에 개헌 특위가 구성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가온 조기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지금은 개헌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반대했고, 결국 대선 전 개헌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개헌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여전히 높았기 때문에, 문재인 후보는 ‘대선 후 개헌’을 약속했다. 하지만, 2018년 문 대통령은 국회를 설득하려는 뚜렷한 노력 없이, 국회를 우회하여 ‘대통령 발의’라는 형식으로 개헌안을 제출했다. 약속을 이행하는 모습을 연출했을 뿐, 진심으로 개헌을 추진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제출된 개헌안에는 대통령의 권한 분산을 위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거칠게 정리해보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후의 개헌 제안은 차기 유력 대선주자의 거부로 실패한 셈이다.
그런데 이는 1987년 이후 반복된 패턴이기도 했다. 1990년 노태우 정부 시기 3당합당의 전제조건이었던 내각제 개헌은 당내 유력 대선주자였던 김영삼 씨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노무현 정부 때 노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 즉 대통령 연임제를 도입하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시기를 맞추어 극단적 여소야대를 피해 보자는 제안은 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을 기회로 다음 대선을 노리는 야당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개헌 논의는 여당 내 유력 대선주자 박근혜 씨의 거부로, 박근혜 정부 시절 김무성 여당 대표의 개헌 제안은 박 대통령 본인의 거부로 물거품이 되었다.
즉 1987년 이후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보자는 개헌 논의는 본인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는 차기 유력 대선주자의 거부 때문에, 또는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는 일이라고 인식하는 현직 대통령의 무시 때문에 어떤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이처럼 익숙한 패턴이 이번에도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찌 보면, 2017년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야말로 개헌에 찬성하는 여론이 터져나왔다는 점에서나, 국회에 정식으로 헌법개정특위가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개헌에 가장 근접했던 때였다. 과연 이번에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 시민이, 사회운동이 불과 6-7년 전에 있었던 개헌의 실패를 얼마나 무겁게 생각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사법의 시간’,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 이번 글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