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 2024.12.27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하는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탄핵소추안 통과가 숨 가쁘게 이뤄졌다. 대체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사후 처리 문제가 12월 3일 이후의 주된 흐름이었다면, 또 다르게는 현행 ‘87년 체제’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며 개헌을 이야기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현재 다양한 인사가 87년 체제가 반복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핵심 원인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지목하며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는 개헌을 말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게재된 “‘윤 폭주’끝내기, 개헌 국민투표가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는 쉽지는 않겠지만, 여야가 합의해 분권형 개헌을 해야 하며, 지금이 적기라는 여러 정치평론가의 주장을 소개했다. 《한겨레》에 실린 “내란의 뿌리를 뽑으려면”은 현행 헌법이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을 최대한 집중시키려 했던 제3공화국 군정 헌법을 그대로 계승했다면서, 권한분산을 통해 ‘장기 제3공화국 시대’를 끝내자고 주장한다. 《조선일보》는 “5년 단임 대통령 8명 중 5명 탄핵·구속... 승자독식 안 바꾸면 비극 계속”에서 문희상 전 국회의장, 정의화 전 국회의장, 김영수 영남대 교수,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 실장의 개헌과 관련한 주장을 소개한다. 문 전 의장은 의회주의를 강조하며 대통령 권한의 분산을 이야기했고, 정 전 의장은 외치는 대통령, 내치는 총리가 하는 포르투갈식 ‘반(半) 대통령제’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의원내각제가 가장 좋지만, 차선으로는 대통령의 의회해산권,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지역주민이 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춘 4년 중임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 실장은 대통령의 실질적 권한이 더 세질 수 있는 중임제보다는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도입이 더 낫다고 주장하면서,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고쳐 정치적 대립을 완화해 대통령제 운용 방식에도 긍정적 변화를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면 관계상 모두 소개할 수 없지만, 언급한 글 외에도 진보언론, 보수언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개헌이 필요하며, 지금이 적기라고 역설하는 전문가 다수의 주장을 싣고 있다. 그렇다면 개헌을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정치권의 동향은 현재 어떠한가.
여야를 막론한 개헌 논의 제기
이번 계엄 사태 이후 개헌 논의는 여권에서 주로 제기됐다. 우선 계엄 사태가 발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5일, 국민의힘 소속 5명의 의원(김재섭, 김상욱, 김소희, 김예지, 우재준)은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임기 단축 개헌을 요구했다. 권성동 의원은 12월 18일, 이재명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3차례의 대통령 탄핵소추를 거론하며 “대통령 중심제가 과연 우리의 현실과 잘 맞는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 전부 아니면 전무 게임인 대통령제를 좀 더 많은 국민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고 상생과 협력을 할 수 있는 제도로의 변경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개헌 필요성을 언급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도 문제겠지만, 승자독식의 의회 폭거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허용하는, 이른바 87헌법 체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며 정치권의 개헌 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여당은 곧 구성될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에 맞춰 개헌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구상이 있다고 알려졌다.
한편 야권의 여러 인사도 개헌 필요성에 관해 제기하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달 27일, 대한민국헌정회 주최로 열린 ‘정치선진화를 위한 헌법개정 대토론회’에 참석해 “개헌은 대한민국의 길을 새롭게 여는 일, 헌법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계엄 이후인 12월 20일에도 외신과의 기자회견에서 이번 윤 대통령의 일은 헌법이 부족해 벌어진 일은 아니기에 구분이 필요하지만,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권력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울산, 경남지역의 대표적인 야권주자인 김두관 전 의원은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에서 주최한 특별 강연에서 분권 개헌을 주제로 개헌문제를 언급했다.
개헌에 반대하는 야권의 유력 인사들
이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가운데,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지도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개헌 논의에 선을 긋고 있다. 앞서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이 이재명 대표와 만나는 자리에서 개헌을 언급했다고 했는데, 이재명 대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어진 비공개 자리에서도 권 대행은 대통령제의 한계를 언급하며 개헌 논의를 재차 말했지만, 이 대표는 가타부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친명계 좌장으로 알려진 정성호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개헌은 “느닷없는 얘기”라면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탄핵 심판을 지연시키기 위한 국민의힘의 전략적 차원”이라고 개헌 논의를 일축했다. 추미애 의원 역시 개헌 논의가 여당의 탄핵 “보이콧 차원에서 꺼낸 것”이라면서 “빨리 탄핵하고 나면 별도로 개헌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 지도부와 가까운 유력 인사의 발언이 이러한 가운데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도 “지금 당장 개헌안에 대한 의견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거나 “비상계엄 사태의 위법성에 대한 수사와 탄핵 심판이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개헌 논의는 옳지 않다”며 언론에 개헌에 대한 지도부의 부정적인 기류를 전했다.
한편 최근 대선 출마를 시사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역시 “지금 개헌 얘기가 나오는 건 시간 끌기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며, 개헌 논의는 “권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 권력 구조를 바꾼다고 많은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고 본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개헌 실패 역사를 반복하는가
개헌을 주장하는 여권이나, 개헌에 반대하는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야권 유력주자나 모두 정략적 이해득실을 따진 주장임은 명확하다. 여권으로서는 탄핵국면을 개헌국면으로 전환해 정국 주도권을 어느 정도는 되찾고, 현행 체제를 유지했을 때 재집권 가능성은 극히 낮으니 권한을 분산해 자기 몫을 챙기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반대로 야권 유력주자, 특히 이재명 대표는 곧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자신의 권한을 굳이 분산해야 하느냐에 있어서 유인을 느끼지 못한다. 또 탄핵국면이 개헌국면으로 전환되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으니 현상을 유지하는 게 나쁜 선택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이 대립 구도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미 꽤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음에도 언제나 개헌에 실패했던 과거에 펼쳐졌던 구도와 정확히 같다. 즉 개헌 논의는 정국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여권과 차기에 집권 가능성이 존재하는 유력 인사 사이의 갈등 끝에 결국 실패하는 역사를 반복해왔다. 바로 직전 사례인 박근혜 대통령 탄핵국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블랙홀’ 같은 개헌 논의는 좋지 않다며 개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일관하다가 미르재단, 최순실 의혹 등 본인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의혹 제기가 시작되자 돌연 개헌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유력 대선 주자로 꼽히던 문재인 전 대표, 안철수 의원은 정부 주도의 개헌에 반대했고, 그 과정에서 일명 ‘분권형 개헌 저지 보고서’가 친문계를 중심으로 회람됐다는 의혹이 폭로되기도 했다. 결국 시간이 흘러 이들도 개헌 찬성으로 선회했지만,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문재인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는 대통령 발의 형식으로 개헌안을 제출하고, 그 개헌안이 곧 폐기됨으로써 형식적으로 공약을 이행했을 뿐이었다.
이 사례를 비롯해 87년 이후 개헌 논의는 각각의 정략적 이해 속에서 제기되고, 폐기되었다. 따라서 개헌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특정 정치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니냐는 비판 혹은 비난에서 자유롭기 힘든 조건이 됐다. 현재도 이런 조건은 개헌을 주장하는 이들의 운신의 폭을 제약하고 있다. 그러나 개헌 논의는 국가의 뼈대에 관한 것이다. 특정 정치세력과 관련한 단기적인 이해타산을 논하는 것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장기적 시야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 여러 언론에서 지적하듯 헌법상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예외 없이 불행한 사태를 반복해서 맞이하는 건 이 체제가 더는 유지되기 어렵다는 상징이다. 87년 체제 개혁은 여야의 정략적 이해를 떠나 시대적 과제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
구체적인 권력 구조 개편은 논의를 통해 합의를 만들어가야 하겠지만, 그만큼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건 다수가 동의하는 과제다. 여기서 대통령 권한분산의 핵심은 국회로의 권한분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 국회는 국민의 신뢰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계엄 이전 국회의 행태를 비판하며 입법부 권한이 이미 비대하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국회가 ‘행정부 발목잡기’ 외에 그 권한을 활용해 의미있는 활동을 했던 걸 쉽게 떠올릴 수 있는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왜 그런가. 행정부 발목잡기 외에 눈에 띄는 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건 그만큼 다른 분야의 권한이 과소하고, 책임도 적기에 능력마저 저하한 악순환의 결과가 아닌가. 그렇다면 오히려 국회로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함으로써 국회의 책임을 키우고 나아가 국회의 능력도 제고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미국의 의회는 예산편성권을 갖는다. 이 권한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의회 내 의회예산처가 설치되어 의회의 전문성을 뒷받침하고, 이를 통해 집행에 대해 더욱 전문적인 관리 감독도 추구할 수 있다. 의회가 예산을 편성한다는 건 그만큼 집행에 있어서 의회 역시 일정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리는 단순히 다른 권부의 발목만 잡는 원리가 아니라 상호 견제하되, 국정 운영에 있어 권부 간 정치적 타협과 협력도 충분히 도모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원리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권한의 분산은 필요하다.
한편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개헌 논의가 결국 권력구조 개편에 국한되어 노동자 민중과는 관련이 없거나 심지어 지배 체제를 강화할 뿐이라며 기본권을 중심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권리의 제기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권리의 확장도 필요한 과제다. 그렇지만 헌법에 권리를 나열함으로써 권리를 보장한다는 관념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역시 미국의 경우를 참고할 수 있다. 미국 수정헌법은 ‘미국의 권리장전’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 10조에는 “본 헌법에 의하여 미합중국에 위임되지 아니하였거나, 각 주에게 금지되지 아니한 권한은 각 주나 인민이 보유한다”고 명시한다. 즉 수정헌법은 이미 인민이 보유한 권리를 재확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열되지 않았다고 권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권리를 나열해야만 한다는 관념은 왕이 백성에게 이러저러한 권리를 내려준다는 ‘흠정헌법’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권리의 보장은 사회 전반의 변화와 함께하는 것이며, 사회운동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해왔다. 알다시피 사회 변화의 결과가 헌법에 반영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다시 말해, 헌법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하여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헌법에 새롭게 명시된다고 해서 사회의 관습, 문화가 곧바로 그것에 맞춰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법과 제도로써 권력의 배분과 행사를 제한한다는 헌정주의의 핵심 문제의식을 상기해 본다면, 권력 구조 개편 논의가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어 결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없다.
87년 체제가 성립한 후, 우리는 그 깊이가 달랐을 수는 있어도 여덟 번의 수렁에 빠졌던 셈이다. 그리고 저 앞에 깊이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아홉 번째 수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번 기회도 놓치며 결국 수렁에 빠져 허우적댈 것인가. 개헌을 통한 87년 체제 극복 논의가 절실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