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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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연합'이 주도하는 제국의 무질서를 비판한다

전국민중대회에 부쳐

사회진보연대
3월 21일 침공이 시작된 이래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명명된,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맹폭이 이라크에 가해졌다. 지금까지 약 4000여명의 희생자가 속출했고 그 중 대다수는 어린이와 여성 등 민간인이라는 소식이 타전되고 있다.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대량학살이 자행된 20세기와는 달리 21세기의 전쟁은 첨단정밀무기체계에 의한 '깨끗한 전쟁'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은 잠시. 500만명이 거주하는 바그다드에 집중 포격이 가해졌고 이내 거리는 검은 연기와 붉은 피로 뒤덮였다. 바쁘게 오가는 구급차의 경적 소리와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찢어질 듯한 절규는 최첨단 정밀타격 최소파괴무기가 실은 무차별 대량살상무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아비규환... "충격과 공포"마저 일상이 되어 차라리 둔감해진, 이 참혹한 역설이 바로 이라크 민중의 현실이다. 이제 "충격과 공포"로 이라크의 해방을 가져오겠다는 미국의 새빨간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이라크 민중의 참상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라크에 가해지는 "충격과 공포"에 의해 세계질서가 덩달아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충격과 공포" 작전은 비단 이라크를 겨냥한 순수 군사적전으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지역적 강국'들이나 초강제국으로서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준(準)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일종의 상징적 공포를 안겨주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지난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 편에 설 것인가, 테러국 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했듯이 '이번 침략에 동참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아군과 적군으로 양분하고 있다.


'의지연합' ― 굴종할 것인가, 배제될 것인가

미국은 침공 개시 전부터 이미 "의지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이라는 신개념을 통해 국제법이나 유엔, 나토와 같은 국제질서에 결박당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와 의지에 따라 쟁점별로 '유연하게' 동맹체제를 구축할 것을 천명했다. 1990년대말 부시 정권의 등장 이후 주로 미 군부나 공화당의 두뇌집단(think tank)들이 새로운 동맹체제를 구상하는 맥락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의지연합'이란, 요컨대 미국의 방침에 동조, 지지하는 국가들끼리의 동맹관계라는 뜻이다. 예컨대, 2002년 9월 '국가안전보장전략문서'를 통해 선제공격론을 정식화하며 유엔은 물론 나토 등 종래의 동맹체제를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부시 독트린'은 그 전형적인 사례다.
물론 현재로서는 미국의 일방적 힘과 의지에 의존한 "의지연합"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유엔과 국제법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국제질서를 대체, 새로운 국가간 체계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911이후 체계화된 '예방전쟁' 전략을 십분 감안한다면, '의지연합'이 당분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주요한 축을 담당할 것이라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 징후는 이번 침공을 앞둔 상황에서 공공연히 터져나온 미국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미국무장관 파월은 지난 3월 5일 <전략 및 국제 연구 센터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중대한 위협에 처했다고 확신해서 유엔 안보리가 제재를 가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유엔 안보리가 제재를 가할 수 없다면, 그리고 가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미국의 안전은 물론 지역 및 세계의 안전을 위해, '의지연합'과 함께 행동할 선택지를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미국의 이해를 확고히 관철시키는데 기존의 국제질서가 방해물이 된다면 이조차 무시할 수 있다는 일방적 경고인 셈이다. 리처드 펄 미국방자문위원회 위원장은 한술 더 떠 지난 3월 21일 캐나다 <내셔널 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적극 승인하지 않은 유엔 안보리에 맹공을 가한 뒤, "이제 금세기는 새 방식에 의한 새 세계 질서를 희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이라크 침공은 '의지연합'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출발점이다. 미국은 자신의 전쟁을 지지, 지원하는 국가(미국은 이 명단 자체를 '의지연합'이라고 지칭한다)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명확히 구분, 향후 자신을 중심으로 재편될 국제 질서에서 후자를 배제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의지연합"에 가담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크게 분기하는 중이다. 선택지는 굴종할 것인가, 배제될 것인가라는 오직 두 개의 항뿐이다.


이라크전의 전망 ― 세계의 체계적 불안정성의 도래

그러나 미국을 비롯, '의지연합'이 주도하는 이라크 침공은 장기적으로 세계질서의 불안정성을 높이고 신중세적 무질서가 창궐하는 효과를 낳을 공산이 크다.
비록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측면이 적지 않지만,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전쟁은 자칫 장기전으로 돌입할 태세다. 작전 초기부터 미군은 적지 않은 손실을 경험하고 있다. 정작 전쟁이 발발하면 내전을 일으킬 것이라던, '후세인 독재 체제 하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이 연합군에 맞서 항거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전쟁의 참화가 끊이지 않았던, 따라서 전쟁은 곧 삶의 일부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조용한 분노'를 쌓아왔던 것이다.
또 장기불황의 침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세계경제가 '전시경제'를 통해 회복되리라는 전망 역시 어둡다. 누적된 지정학적 사안 역시 이번 침공을 통해 그 모순이 더욱 첨예해질 것이 분명하다. 미국이 비록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친미자유정권을 수립한다해도, 그 유지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며 되레 중동 전역에서 이슬람 민족주의 혹은 강경 원리주의 세력의 부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유라시아 전역에서 안보의 불안정성은 증폭될 것이다. 미국의 예방전쟁에 거부감을 느끼는 러시아와 중국·프랑스·독일과 같은 아류 제국들의 반발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며 중동 패권을 둘러싼 지역적 갈등은 심화될 것이다. 당분간 미국을 좇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을 적과 아로 나누며 무소불위의 군사력으로 패권을 강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목적하는 자국의 안보와 시민의 안전은 점차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결국 '의지연합'이 상징하는 오늘날 세계질서는 '체계적 불안정'으로 묘사될 수 있을 따름이다. 전쟁의 성패와 무관하게 세계 질서는 이전과는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911 이후 미국이 보여준 일련의 과정, 즉 세계질서를 주도하던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질서를 폐기한 것은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 무엇인지를 의심케 하기 충분했다. 징벌과 폭력이 잠재된 군사적 수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노선 역시 항시적인 위험과 불안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2차 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기구들이 자명한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의지연합"이 주도할 새로운 세계질서가 이전 세기에 비해 평화와 안전을 안겨주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노무현 정권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명분이나 논리보다는, 대단히 전략적이고도 현실적인 판단"이라며 파병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의지연합'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절박감을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선택은 장기적으로 세계질서와 한반도에 중대한 위험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미 "이라크 다음은 이란, 시리아, 북한"이라는 미국의 위협이 이라크 침공으로 현실화된 마당에 이라크 침공을 지지함으로써 한반도 위기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노무현의 발언은 자가당착일 따름이다. 더구나 파병찬성론자들이 주된 근거로 제시하듯, 파병을 통해 얻게 될 '국익'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종전 후 초기 복구사업과 관련한 계약은 이미 미국계 7개 업체로 한정되어 있으며 통상 전후 복구사업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온 국제기구나 비정부기구(NGO)는 초기단계부터 배제된 상태다. 재계 스스로도 '전쟁 기여도'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참여나 하청이 가능할 뿐이라고 밝히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이라크 침공을 '이라크 자유'라 지칭하는 미국이, 이라크와 후세인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는 북한 및 김정일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북한의 자유'라는 작전명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작금의 한반도 핵위기를 조장한 주범이 제네바 합의를 고의로 위반한 미국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한 상황에서, 북을 '벼랑끝 전술'로 내몰 뿐인 '한미공조 강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보장받겠다는 그의 주장은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오히려 현재 미국이 구가하는 세계패권을 용인함으로써, 혹은 적극적으로 방조함으로써 한반도의 위기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또 노무현은 이라크와 북한은 다르다며 부시의 패권적 세계전략에서 한반도는 빗겨 갈 것이라 주장한다. 미국을 포함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세력은 전쟁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주요한 근거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아랍 내에서 반미감정이 격화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략을 감행하는 제국의 모습이다. '예방-선제공격'이라는 새로운 세계 전략 앞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집착해 온 원칙과 질서 뿐 아니라 자신의 지정학적 이해의 일부마저도 과감히 희생하는 것이 지금의 미국이다. 이러한 숨김없는 야욕을 싣고 날아가는 미사일과, 폭격의 현장에 쓰러져 있는 주검이라는 이 명명백백한 현실 앞에서, 어디에 또 다른 현실이 있으며, 전략적 선택이 있단 말인가?


침공 중단! 파병 철회! 전국민중대회로 나아가자

25일에 이어 28일 다시 한번 국군파병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것은 일단 반전 투쟁의 소중한 성과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지배세력들은 '의지연합'에 복속되지 않고 과연 남한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집요하게 공격할 것이다. 현실주의를 가장하여 허구적 이익을 좇으라고 강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의 무질서와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는 주범이 바로 미국의 패권적 군사전략에 있으며 이를 제어하지 않는 이상,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는 요원한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국익'은 '의지연합'에 종속적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제국에 맞서 싸울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서로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세계 각지에서 거세게 일어나는 반미-반전 시위대열의 함성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하등의 명분도, 정당성도 없음을 재차 웅변하고 있다. 이제 민중대회로 집결하자. 한국군 파병을 막아내고, 이라크 침략 전쟁을 중단시키자. 우리 자신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지금도 미군의 무차별한 폭격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한다.
주제어
평화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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