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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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항복선언

파병결정은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킬 최악의 선택

사회진보연대
지난 3월 5일 미 백악관은 괌에 추가 배치한 24대의 B1, B52 폭격기는 공격임무를 띠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이 1994년 제네바합의로 동결되었던 영변지역의 핵시설(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을 폭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으로 큰 파문이 벌어졌다. 또한 3월 4일부터 한 달간 진행된 한미연합훈련이 마무리된 후에도, F-117 스텔스 폭격기와 F-15E 이글 전투기와 육군특별기동대가 잔류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미국은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군사적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의 이런 행동의 목적은 남한에서 막연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다(미국의 ‘충격과 공포’ 작전은 동맹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북한이 새로운 방식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식의,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도 공포감을 부추기는 행동이기는 매 한 가지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원해야 된다는 노무현 정부의 주장은, 추상적이고도 모호한 ‘국익’이란 명분을 내세운 것이지만, 결국 막연한 공포감에 기반한 것이다. 노무현이 국회 본회의를 앞둔 연설에서 “대등한 한미관계는 국민의 생존이 안전하게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라고 말한 것은 ‘대등한 한미관계는 국민생존을 위협하는 일’이라는 의미로서, 노골적으로 국민들을 협박한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해야만,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한반도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렉산더가 단 칼에 잘라낸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본질은 단순하고 해결책도 존재한다. 단, 이는 한국정부가 미국의 일방주의와 군사주의를 거부할 때에만 가능하다. 칼을 들지 않는다면 노무현 정부는 점점 더 부시정부가 끌고 들어간 미로에서 헤맬 것이다. 아니 이미 그 길로 들어섰다.


북한은 과연 농축우라늄 핵무기를 개발했는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동아시아태평양차관보가 북한을 다녀간 후,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농축우라늄에 기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 “강석주 부주석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과 북한이 원심분리기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알루미늄을 수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북한 외무성 관리는 미국 쪽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이 주장한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무기 제조계획을 부정했다.” “(미국은) 근거라고 한 위성사진도 내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북한 외무성 관리는 강석주 부주석의 당시 발언이 “지금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미국이 계속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의미였다고 덧붙였다(앞서 “강석주 부주석이 그렇게 말했다”라는 미국의 발표는 ‘가지게 되어 있다’는 북한식 표현을 의도적으로 오해한 결과인데, 본래 이는 ‘곧 가지게 된다’가 아니라 ‘가질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알루미늄 수입은 어떤가? 이는 현재 미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대인 이라크의 사례를 살펴보는 게 유용하다. 2002년 9월 미국 <뉴욕타임즈>는 이라크가 우라늄 농축을 목적으로 가스 원심분리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 원심분리기의 외장재인 알루미늄 배관을 구입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 방송에 출연하여 “정말로 오직 핵무기 원심분리기에만 적합한 설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국의 핵과학교육재단에서 발행하는 <핵과학자회보>는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라크가 수입하려 한 품목은 재래식 무기나 산업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무기에 사용될 경우 기껏해야 재래식 로켓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미국이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의 증거로 제시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품목인 코발트 파우더, 고강도 알루미늄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북한의 농축우라늄 문제는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도 이와 유사한 사례였다. 1998년 10월경부터 미국은 위성사진을 근거로 평북 금창리 지역에서 비밀 핵시설을 건설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고, 모든 언론은 연일 떠들썩하게 핵위기론을 제기했다. 온갖 소란이 벌어졌지만 1999년 5월, 미국 조사단은 의혹 시설에 대한 현장 방문 끝에 이는 핵시설과 무관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000년 5월에도 2차 방문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자신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것이 무안했던지, ‘현장방문이 이루어질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므로 북한이 사태를 은폐할 시간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뉘앙스로 정리했다.
한편, 북한과 미국의 핵 전문가들이 지난 2월말 베를린에서 비공식적으로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1999년 금창리 지하시설 의혹 때와 마찬가지로 미 조사단을 현지에 받아들여 핵 계획 포기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고집했다(금창리의 경우에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방문의 대가로 일련의 경제 보상 조치가 있었다. 부시정부가 IAEA 사찰을 주장하는 것은 이를 피하기 위해서다).


한국 정부가 제시한 북핵 해법은 무엇이었나?

‘북핵 위기론’이 미국에 의해 조장, 고조되는 가운데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은 미국을 방문, 콜린 파월 국무부장관과 함께 북핵 해법에 대해 협의했다. 그런데 이들이 논의했다던 북핵 해법은 지금까지 언론에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윤영관 장관의 제안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고 파월 장관이 대답했다는 것은 그가 북한 문제에 대해 사실상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뜻이다. 현재 미국의 고위 관료들은 아무도 한반도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위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주장이 그저 “흥미로울” 따름이다(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은 “우리는 지금 대북정책이 없다”고 말했다. ‘나쁜 정책’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페리보고서가 검토했던 ‘무시’ 전략이 실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대신 前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레이니가 최근 미국의 <외교관계협의회>에 기고한 글을 살펴보면, 한국정부와 클린턴 정부의 ‘접촉정책’(햇볕정책)의 주요 정책가들이 제시하는 대안을 대략 추측할 수 있다(그는 특별보고서 작성팀의 책임자인 모튼 아브라모위츠 등 네 명과 함께 4월 중순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핵심은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벌여야 하지만 미국이 ‘직접 보상을 주는’ 형태는 안 된다는 것이다(이는 페리보고서와 동일하다).
협상의 1단계는 남한과 북한,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공식적으로 한반도 전체의 안보와 안정을 보장하는 포괄적 합의를 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2단계는 여러 소단계로 이루어지는데,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IAEA를 통한 사찰을 허용하며, 앞서 6개국이 모은 재정적 보상을 대가로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생산■실험을 포기하며, IAEA가 북한이 모든 핵무기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북한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포괄적 합의가 이루어진 5년 후 시점에서 동북아안보포럼을 결성하는 것이다. 각각의 과정은 서로 분리된 합의나 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맺고 관계정상화를 이루며, KEDO는 애초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협상 로드맵은 큰 틀에서 볼 때 페리보고서로 복귀하자는 것인데, 차이점은 일본■중국■러시아를 끌어 들여서 그 비용을 분담시키는 것이다. 페리보고서의 핵심은 미국의 유일한 관심사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제거라는 것이요(북한경제의 개혁은 부차적인 관심사다), 또 동북아에서 미군의 군사력 증강을 꾸준히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즉 핵-미사일 프로그램 제거에 소모되는 비용은 주변 국가에게 분담시키고(북한 경제위기의 관리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은 협상 의제에 연루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다자주의’를 확대하는 것은 미국이 충분히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한반도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이상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은 북한 농축우라늄 파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의 전례를 충분히 따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결은 기존에 페리보고서가 제시한 협상틀에 준하여 검토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문제가 진전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집권 이후 북한과 그 어떤 공식적인 외교접촉도 시도하지 않는 부시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미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와 이란, 북한이 서로 모종의 관련을 맺는 것처럼 묘사했다. “선제공격을 통한 방어”(preemptive defence)라는 군사 교리를 만들어 미국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방어를 위한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UN의 무기사찰단이 별다른 제지 없이 사찰 활동을 벌이는 와중에, 독자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결정했다. 미국은 뚜렷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제네바합의 파기를 선언했고 중유공급을 중단했다(금창리의 경우, 제네바합의의 틀이 유지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역시 분명한 근거도 없이, 북한이 영변지역 핵시설을 재가동할 수 있다면서, 그 시설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 옵션을 세워야 한다고 일부러 언론에 흘리고 다녔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부시 행정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방법 밖에 없다.
북한은 농축우라늄 기술 개발이 미국의 악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는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이 독단적인 행각을 펼치는 것을 제한할 수 있는 외교적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또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거부하고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미국에 굴종하여 파병을 선택했고, 이는 현재 상황에서 최악의 선택일 뿐이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노무현 정부를 누가 구원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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