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0.05.09

기획 연재 - 불안정노동자 조직화 사례와 평가 3

편집부
(2) 고용관계의 간접화의 경우 : 용역/ 파견/ 사내하청 노동자

① 사내하청 노동자 조직화 사례

ꋫ한국중공업 하청 (주)성경 투쟁사례 (1996.6.20 - 1996.8.20)

(주)성경은 마창지역의 한국중공업 사내 하청으로 기계공장, 중기계공장, 조립공장에 인력을 파견하는 업체이다. 직영과 함께 일하는 경우와 공정 하나를 맡아 직영 반장의 관리하에 작업하는 두 형태가 있었고 노동자수는 60여 명 정도였다. 투쟁의 발단은 기계공장에서 상용직이 일용직으로 재입사하는 것을 전제로 시급을 올려주고 대신 400%의 상여금을 없애겠다는 회사측의 발표가 있으면서부터였다. 시급을 공개하지 않고 알아서 하겠다는 회사측의 발표는 노동자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노동자들은 협상을 통해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기계공장노동자들의 투쟁은 기본급과 수당 인상, 일용직으로의 전환 금지, 근로기준법 준수 요구와 단체협상 요구로 바뀌어 갔다. 이 과정에서 핵심 노동자에 대한 해고가 이루어지고 결국 기계공장노동자들의 단체교섭은 시급인상을 전제로 한 일용직으로의 재고용, 의료보험료 1만원 지급 수준에서 타결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중공업 노동조합의 지원으로 기계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선전이 이루어졌고 또 성경을 압박하여 교섭테이블로 앉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계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조립공장으로 확대되었고 이들은 주로 성경의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고소고발에 집중하였다. 결국 한국중공업은 성경에 계약해지를 통보하였고, 이후 투쟁은 법정투쟁외에 그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ꋫ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파업투쟁사례 (1996.10.25 - 1996.11.4)

1996년 10월 당시 울산의 현대중공업에는 7,000명 정도의 사내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로환경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파업투쟁을 진행한 곳은 노동자 70명 정도가 고용된 ‘상선’이라는 사내하청회사로서 현대중공업의 족장설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파업은 “현대중공업노조에서 확보한 단체협약을 공동으로 적용하라”는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토요일 격주휴무제 적용’ ‘상여금 100%인상’ ‘시급 500원 인상’ ‘수당 2만원 인상’ 등을 상선에 요구하며 잔업을 거부하였고 회사가 요구에 응하지 않자 총파업에 돌입했다. 상선 노동자들의 경우 작업 자체가 조장의 주도 아래 집단적으로 하는 일이었던 만큼 투쟁을 지도했던 것도 조장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조장들은 투쟁을 확대시켜 다른 사내하청 업체 노동자들과도 연대하거나 직영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는 것, 심지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 자체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11월 4일 회사측이 제시한 “시급 400원 인상, 격려금 15만원, 위험수당 1만원 인상, 고소고발 취하, 이후 불이익처분 않는다”는 안을 받아들이고 투쟁은 종결되었다. 상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여타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으로까지 확대되지는 못했지만, 이 투쟁을 계기로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 모임이 만들어 졌으며, 이후 울산지역 비정규직 노동자 모임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ꋫ 아시아자동차 용역하청노동자 투쟁사례

아시아자동차에는 1997년 당시 16개 용역하청회사에 1,400여명의 용역하청노동자들이 있었다. 직영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조립과 생산라인에서 일했던 용역하청노동자들의 급여는 정규직의 50%정도의 수준이었고 근로기준법은 물론 사회보험을 적용받지 못했다. 97년 7월 29일, 용역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이 지급되지 않으면서 이들은 집단적으로 잔업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잠시동안 생산라인이 멈추게 되었다. 97년 하계휴가가 끝나면서 용역하청노동자들을 대폭 정리한다는 말이 떠돌았고 결국 1,000여명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장을 떠났다. 결국 아시아자동차에서는 9월 5일까지 용역하청노동자를 전원 철수시키라는 공문을 발송했고, 8월 30일부로 용역하청노동자 전원이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8월 28일, 몇사람이 개별적으로 광주지역금속노조에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를 만든다. 8월 29일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감시속에서도 중식집회가 진행되었다. 8월 30일 해고통보를 받고 출근투쟁을 하였으며 50여명이 동참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시아자동차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사업장으로 선정된 상황에서 출근투쟁은 힘을 갖기 어려웠고 결국 체불임금과 퇴직금 지급, 해고수당 지급, 그간 지급안된 각종 수당 지급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바뀌었고 98년 1월 이 요구는 대부분 해결되었다. 아시아자동차 용역하청노동자들의 투쟁사례에서 주목할 것은 당시 아시아자동차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사업장으로 선정되고 광주지역사회에서 ‘아시아자동차 살리기’운동이 벌어지면서, 용역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냉담한 시각 속에 고립되었다는 점이다.

ꋫ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조합 투쟁사례

한라중공업은 부도 이후 5000여 명의 직영 조합원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고 사내하청노동자들도 애초 3000여 명에서 1300명으로 축소된 상황이었다. 평균 3개월 가량 임금이 체불된 상태였고 직영에는 유급휴가, 사내하청에는 무급휴가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99년 5월이 되면 모든 사내하청업체가 정리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99년 3월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완전청산” “무급휴직 철폐”등을 핵심요구로 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는 한라중공업이 소재한 전지역 사내하청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노조의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노동조합이 결성되자마자 노조 집행부에 대한 납치와 협박, 한라중공업에 의한 현장출입 봉쇄 등 노조의 일상활동을 전개할 수 없을만큼 탄압을 받았다. 한편 한라중공업 노조는 99년 8월 10일부터 72일간의 전면적 공장점거와 파업투쟁을 단행하여 결국 인수회사(현대)로부터 단체협약 승계, 임금체불 조기청산, 해고자 복직 등을 쟁취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파업과정에 사내하청 노동조합도 적극 결합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이미 상당수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떠난데다가 현장출입이 통제되면서 파업투쟁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9월 초 한라중공업 노조가 옥쇄파업에 돌입하면서 사내하청노조도 현장 안에 농성장을 설치하려 했지만, 하청노조의 현장출입이 사측의 교섭결렬의 명분이 될 것을 우려한 한라중공업 노조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했다. 하청노조는 한라중공업 노조의 요구안이 작성되기 전에 하청노조의 요구를 삽입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한라중공업 노조로부터 현실적으로 책임질 수 없지만 교섭을 진행하면서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결국 사내하청노조의 요구삽입이나 공동투쟁은 실행되지 못했고, 한라중공업의 파업 종료와 함께 사내하청노조의 투쟁도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노조의 투쟁은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에 대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 계기가 되었다. 사내하청노조는 출발부터 한라중공업 노조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은 경우였지만, 실제 노조가 설립된 이후나 파업투쟁의 과정에서 한라중공업 노조와 상당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특히 하청노동자들의 요구를 함께 제시하고 싸운다는 것은 조합원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고, 투쟁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인식된 사실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한라하청노동조합의 경우 그동안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경험을 바탕으로 출발부터 지역노조의 형태로 조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의 악랄한 탄압과 현장출입 통제로 실제적인 조직화를 이루지 못했다.

<평가>
◦ 이제까지 노동조합운동은 사내하청의 확산을 비롯한 불안정노동자의 확산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정립해내지 못했다. 단순하지만 힘들고 위험한 작업에 사내하청노동자들이 투입되는 것을 방관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감원이나 배치전환의 일차적 대상으로 사내하청노동자들을 지목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원청 노동자들에게도 하청노동으로의 전환이 강요되는가 하면 만성적인 인력부족으로 노동강도가 크게 강화되고 있고, 이에 대한 현장통제력도 훼손되어가고 있다.
◦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의 문제의식을 실천적으로 확산시켜온 의의를 가지고 있다. 1996년의 초기투쟁에서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이나 직영 노동조합과의 연대투쟁의 문제에 소극적 자세를 보이던 것이 이후 한라하청노조의 경우와 같이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특히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문제는 결국 원청회사를 상대로 싸워 풀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강고해지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한라하청이나 볼보비정규직노조와 같이 사내하청노조의 포괄대상을 원청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내하청노동자들로 확대하려는 시도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불안정노동자들의 문제는 누구보다도 먼저 불안정노동자들 스스로의 단결과 투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도 커다란 성과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단결은 원청과 하청 모두의 공격으로 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원청업체가 일방적 계약해지를 통해 사내하청 노조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대응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다. 하나의 방안으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지역노조나 단일노조, 산별노조의 형식으로 가능한한 큰 범위로 조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라하청노조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보다 중요한 문제는 원청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이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실제 원청업체의 노조파괴시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연대투쟁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현대중공업이나 한라중공업처럼 현장조직에 사내하청 활동가를 참여시킬 수도 있고, 원청노조의 활동가들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직접 지원할 수도 있다. 또 대부분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위험한 공정에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안전장비지급이나 안전교육이 실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원청과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산업안전보장 요구를 제기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원청의 노동자들에게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정확히 인식시키고 이 문제를 방관하면 원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끊임없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사내하청노동자와 원청노동자들간의 처지와 의식의 괴리를 이유로 연대투쟁에 소극적이지만 한일내장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는 노동조합의 의식적 활동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주제어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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