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0.10.03

정부의 [비정형근로자 보호종합대책] 비판 성명

편집부
■ 이글은 10월4일자 [파견·용역 노동자 노동권 쟁취와 간접고용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성명서입니다.


정부의 근로계약기간 연장방침을 규탄한다
-- [비정형근로자 보호종합대책]은 비정규노동자와 고용불안 양산대책

1. 정부가 10월 4일 경제정책조정회의를 거쳐 소위 [비정형근로자 보호종합대책]을 확정, 올 정기국회에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有期근로계약을 3년까지 허용, 학습지교사·보험설계사·골프장 경기보조원 등에 대해 '근로자에 준하는 자'라는 개념의 도입, 파견노동자에 대한 연장근로·남녀차별·성희롱 방지와 관련 사용사업체의 책임을 명확화하는 것 등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정부의 이런 방침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부방침은 제목만 '비정형근로자 보호'를 내걸고 있을뿐 그 내용은 비정규노동자와 고용불안을 양산하는 정책에 다름아니고, 현행 근로기준법이나 판례보다도 비정규노동자 보호에 있어 더욱 후퇴한 내용을 담고 있다.

2. 우선 정부는 근로기준법 제23조를 개정하여 유기근로계약(즉 계약직 근로계약기간)을 현행 1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23조는 "근로계약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과 일정한 사업완료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기간은 1년을 초과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근로계약기간을 1) 통상의 근로계약(정규직)의 경우는 무기한, 2) 사업완료기간이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경우(건설, 특정 프로젝트 등)는 그 기간까지, 3) 기타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1년까지로 규정한 것이다. 그동안 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3)의 경우인데, 기업이 3개월, 6개월, 11개월 등의 단위로 근로계약을 계속 갱신하여 계약직노동자를 사실상 상시적으로 활용해 온 것이 핵심적 문제였다.
원래 근로기준법 제23조의 취지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근로계약에 구속되지 않고 이직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으로 설명되어 왔지만, 실제 노동자에게는 '이직의 자유'보다는 '고용안정'이 훨씬 절실할 수 밖에 없고,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이 無期근로계약을 노동법의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노동계와 법학계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런 비판을 의식하여 그동안 판례는 1년을 초과하는 근로계약을 체결하였을 때에는 1년이 경과하는 날로부터 무기근로계약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고, 유기근로계약이 반복갱신되어 온 경우는 무기근로계약으로 전환된 것으로 본다는 등의 법리를 통해 부분적으로 비정규노동자를 보호해 왔다. 또 양대노총과 시민사회단체들은 무기근로계약을 원칙으로 하고, 법이 정한 예외적 사유가 있을 경우에 1년에 한하여 계약직을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정기국회에 입법청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3. 그런데 이번에 정부가 밝힌 방침은 그동안의 노동계와 노동법학계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일 뿐 아니라, 대법원 판례보다도 오히려 더 후퇴한 것이다. 정부는 유기근로계약을 1년에서 3년으로 연장함으로써 계약직노동자의 고용기간이 3년까지 연장될 수 있어 고용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기만에 불과하다. 유기근로계약이 3년까지 자유롭게 허용된다는 것은, 기업이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계약직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계약직노동의 상시사용을 통한 정규직 대체가 보다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판례는 유기근로계약이 반복갱신되어 온 경우 무기근로계약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아 왔는데, 정부 방침대로라면 기업은 번거로운 계약갱신 대신 3년까지는 자유롭게 계약직노동자를 사용하고, 3년이 지난 후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동부는 3년 이상 사용한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보완조치를 추가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재정경제부 등이 반대하고 있어 실현가능성이 별로 없는 데다가, "2년 이상 사용한 경우 사용사업체에 직접고용된 것으로 본다"는 파견법 규정이 기업의 탈법·불법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보완조치로서의 실효성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부의 방침은 계약직노동자의 고용보호라는 미명 아래 유기근로계약을 구조적으로 확산시킬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3년마다 해고와 실업의 고통을 겪도록 만드는 '비정규노동자 확산 및 영구화 대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또한 정부의 '비정형근로자 보호종합대책'의 다른 내용들도 함량미달이거나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들 일색이어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학습지교사, 보험설계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 현재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근로자에 준한 자'라는 개념을 신설해 해고·임금체불 등에 대한 대응을 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근로자에 준한 자'가 아니라 '근로자'라는 점에서 이런 대책은 문제를 축소하고 미봉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학습지교사, 보험설계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지입차주 등은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노동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자영업자로 취급받으면서 노동법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양대노총과 제반 시민사회단체는 이런 유형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 개념'을 확대하여 "설사 독립사업자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특정사용자의 사업에 편입되어 종속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대가를 받는 경우는 근로자로 본다"는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었다. 노동계의 개정안이 위장자영업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보편적으로 확대적용하려는 방향인데 반해, 정부의 방침은 '근로자에 준한 자'라는 하위개념에 묶어 둠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노동관계법 적용을 부분배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97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단시간근로자'에 대한 규정이 근로기준법에 추가되었는데, 시간제노동자에 대한 근로기준법의 '비례적 적용'을 통해 실제적인 차별을 정당화시켜 준 것과 마찬가지 개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5. 우리사회에서 비정규노동자와 불안정노동의 확산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섰다. 공식통계만으로도 2000년 8월 현재 임시·일용직 노동자가 674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52%에 이르고 있는 데다가 위장자영업 노동자, 파견 및 간접고용노동자들을 감안한다면 비정규노동자의 규모는 800만 명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비정규노동자의 이러한 비중은 세계적으로 비교해보아도 압도적인 것으로, 최근 OECD의 통계에 따르면 기간제고용 노동자의 비중을 기준으로 한국이 OECD회원국 중 가장 높고 상용노동자의 비중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정부의 이번 방침이 비정규노동자와 고용불안을 더욱 양산하는 대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민주노총과 제반 사회단체들과 함께 비정규직철폐를 위한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대다수 국민대중의 생존권을 파탄내고 있음을 인정하고, 기업의 야만적 이윤추구논리를 일방적으로 편들어주는 노동법 개악시도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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