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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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일 참관을 위한 정당·종교·사회단체의 방북에 즈음하여

편집부
10월 9일 고려민항 특별기를 통한 방북

지난 10월 4일 북한은 '정부 정당 단체 합동회의'의 명의로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일에 남한의 주요 정당·종교·사회단체를 초청하였으며, 이에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전국연합과 범민련남측본부, 민가협 등 13개 단체는 북한의 초청에 응하기 위해 방북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10월 9일 11개 단체와 개인 방북자를 포함하여 42명이 고려민항 특별기편으로 김포공항 국제선을 통해 방북하였다. 정부는 애초에 이들의 방북을 우회적으로 무산시키려는 방침이었으나 내부의 의견조율과 북한의 강력한 요청으로 최종 방침을 바꾸어 방북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으로 이적단체 규정을 받은 한총련과 범민련남측본부의 방북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재판에 계류 중이라는 이유로 민주노총과 전농, 민주노동당 대표의 방북을 허락하지 않고 방북 참가자들에게 정치적 활동을 자제하겠다는 각서를 받는 이후에야 방북을 승인하였다. 비록 국가보안법이라는 마녀사냥의 잣대를 다시 한번 부활시켜 일부 방북 신청 단체과 개인을 배제하고, 정치적 각서를 요구하는 파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회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은 이번 방북에 대해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번 방북이 6·15남북공동선언의 정신에 근거하여 민족의 화해와 교류, 협력을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된다는 것이 환영과 지지의 기본 요지였다.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에 즈음한 우리의 단상

지난 10여년간 동구 사회주의권의 연쇄적인 붕괴, 제국주의의 지속되는 봉쇄 정책, 가혹한 경제위기를 겪어온 북한이 이제 새로운 변화와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번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행사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에 즈음하여 남한 사회단체 주요 인사들의 방북이 성사된 것을 보며 여러 소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번 사회단체 방북이라는 계기는, 냉전과 반공의 굴레 아래 '악마주의'적 선동의 대상이었던 북한과 조선노동당이 이제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 그래서 비판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는 그리고 금기시되거나 성역화될 수도 없는 ― 하나의 현실적 실체로 나타나는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과거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냉전과 반공이 절대정신으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북한과 조선노동당이라는 정치적 실체를 어두운 그늘과 닫혀진 밀실에서 바라보고 판단하여 왔다. 비록 그 상황이 우리 민중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와 지배권력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그 판단에서 우호적이거나 비판적이라는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사회적 밀실과 어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방북사건은 하나의 사회적 금기와 사회적 밀실이 해체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남한사회의 진보세력과 민중운동이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에 즈음하여 북한과 조선노동당의 역사적 공과를 밀실이 아닌 광장에서 평가, 분석, 발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현재의 방북과 지난 94년 김일성주석 사망 당시의 '조문 파동'을 돌이켜 보면 당시의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마녀사냥의 광기에 휩싸인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었던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본다면 이번 방북으로 인해 정부와 지배권력이 치명타를 입었거나 통일의 획기적 국면으로 전환되었다고 사고하는 것 또한 위험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면 지배권력은 필요하다면 언제나 조문파동과 같은 마녀사냥을 다시 시도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이번 북의 초청에 대해 전면적 봉쇄와 억압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이번 사회단체의 방북이 현 지배권력의 대북정책, 통일정책과 대립 충돌하거나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사건을 절대시하거나 과장할 의사가 없다. 또한 우리는 이번 방북이 어떤 사변적 의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번 방북이 어떠한 사회적 효과를 낳을 것인가에 있다. 물론 이 또한 주관적 열망으로 분칠해서도 안될 것이다. '조선노동당 기념일' 참관을 위한 '합법적' 방북이 가능해진 주객관적인 요인이 있듯이 방북의 사회적 효과가 우리 남한 사회와 민중운동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 주객관적 상황을 검토하면서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혼란과 격정 속에서 잊혀져서는 안될 것들

이번 방북은 남북 정부 당국자들간의 만남이나 정치, 군사, 경제 관련 인사들의 만남과는 달리 주요 사회단체의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정부의 탄압과 억압이 아닌 정부의 승인 아래 진행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적 사건이다. 이를 "자주교류 운동의 획기적 사건이자 6·15남북공동선언의 실천적 이행이며, 서로의 체제를 상호인정하고 존중하는 연방통일조국을 앞당기기 위해 분단의 장벽을 또 하나 허무는 쾌거"라고 통일운동단체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각을 달리한다.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전한반도 차원에서 민중적이고 진보적인 사회변혁이 진행되면서 민중주권을 확립해가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이를 단순히 남과 북의 당국자 회담과 정치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일정으로 사고한다면, 그리고 이를 압박하고 촉구하는 것으로 민간의 자주교류운동을 위치짓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통일도, 민중적 통일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시각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한 정치적 주체로서 북한이 취하고 있는 '통일정책'과 '대남정책'에 대해서 비판적 견해를 밝혀왔다. 물론 남한의 군사정권과 김영삼,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지배권력에 대한 반대와 저항은 전제되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의 연방제에 대해 '통일방안'은 그것의 완결적이고 논리적인 구조에 의해 그 올바름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 지배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구조를 혁파하고 민중의 민주주의를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통일의 과정이며, 이것이 전제될 때 연방제라는 통일의 '형식'은 진정한 통일의 '내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시각인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우리는 남북공동선언에서 북한의 연방제의 낮은 단계 방안과 남한의 국가연합 방안이 상호 공통적인 지점이 존재한다는 합의에 의혹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비판은 국가연합의 정치적 논리와 연방제의 논리가 애초에는 동질적이거나 공통적인 요소보다는 상호 대립하고 모순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공동선언의 합의 내용은 '연방제의 국가연합화'로 귀결되든, '국가연합의 연방제화'로 귀결되든 하나의 수렴방향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 누구의, 어떤 세력의 정치적 주도력이 관철되고 있는가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교류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며, 정치적 의미와 방향성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는 "통일의 길을 더욱 넓히고 한층 튼튼히 하는 일은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사상과 제도, 신앙과 종교, 마침내 남과 북의 차이를 뛰어 넘어 6·15 남북공동선언을 따라 모든 이들이 하나처럼 단결하는 것"(방북단의 성명서)이라는 시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은 자주교류를 절대선으로 사고하면서, 그것이 상황적 배경과 계급관계의 지형에 따라 상호 적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정주영의 방일과 민중진영의 방북이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해인 것이다. 우리는 정상회담을 필두로 사회단체 주요 인사들의 방북이 허용되고, 남북간의 상호 교류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일련의 흐름이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실천이 아닌 지배권력의 전략적 구도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에 즈음한 사회단체 인사들의 합법적 방북이 그동안 일방적으로 금기시되었던 북한과 조선노동당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의견들이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장에서 펼쳐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냉전·반공·반북적 시각이 아니라 남한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진보적 시각에서 북한과 조선노동당을 분석하고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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