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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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폭력운동의 대열로 나아가자

3. 8 여성의 날을 맞아 운동사회 성폭력문제를 다시 보며

편집부
3.8, 여성이 주체로 선다는 것

1908년 미국에서 공장기숙사 화재사건으로 분노한 방직여성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평등한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었던 그 때. 여성들은 투쟁의 주체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100년이 가깝게 지나도록 여성은 여전히 2중, 3중의 차별과 고통을 받으며 투쟁의 선두에 나설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가장 먼저 잘려나간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IMF이후 계속 취업전선에서 배제당하는 여학생들의 노동권, 성폭력으로 유린당한 여성장애인들의 현실은 여성들의 투쟁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조금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과 폭력, 억압은 새삼 운동사회의 화두로 제기되고 있으며 사회구조의 모순이 가장 중첩된 위치로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이고도 근본적인 투쟁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3월 8일 여성의날, 우리는 그 서늘한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보고자 한다.

공개된 성폭력사건 16사례를 다시 본다

작년 12월 11일 운동사회 성폭력실상을 고발한 100인위원회의 성폭력사건들이 공개되고 우리는 '그나마 진보'적인 운동사회가 성폭력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각인했다. 그 사례들은 그 자체로 그동안 소리없이 침묵하고 화해를 강요당했던 여성활동가들이 최소한의 목소리를 내고자하는 몸부림이자 저항이었다. 가해자실명공개의 비난을 무릅쓰고, 폐쇄적이고 비좁은 운동사회내에서 수년간 감수해온 피해자들의 고통을 드러내면서 우리내부의 환부를 똑바로 직시하고 바라볼 수 있게끔 한 것이 100인의 성폭력사례공개였다. 100인위의 활동은 여성으로서, 활동가로서 이들이 져야했던 고통을 대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그 어느 것보다 정당한 것이었기에 마땅히 지지하며 옹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건공개가 3개월에 접어드는 지금 사건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운동단체를 찾아볼 수는 없다. 오히려 사건공개 이후 가해자들에게 쏟아진 온정주의적 시각들, 그리고 성폭력의 개념을 혼동하고 다시금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2차, 3차의 가해, 그리고 여전히 횡행하는 조직보위의 논리와 당면투쟁의 선차성 논리 속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여전히 숨을 죽인 채 이 모든 상황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아주 극소수 몇단체들이 성폭력사건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을 뿐, 운동진영에서 책임있는 단체들은 오히려 이를 몇줄의 성명서로 넘기거나 아예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공개된 성폭력사건의 해결이 지연되면서 버젓이 가해자가 민주노총 부위원장으로 당선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피해자가 있는 곳에서조차 해당사건을 비아냥거리며 희화화시키는 경우도 횡행한다. 이는 운동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일천한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가히 충격적인 100인위의 사건공개과정도 잠시 뿐, 운동사회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기는커녕, 결국 현실에서 드러나는 활동가들의 인식과 행동은 여전히 그 남성중심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사건해결을 가로막는 다양한 논리들

봇물처럼 쏟아지는 성폭력사례들과 공개된 사례들 외에 은밀하게 회자되는 또다른 성폭력 사례들. 이 예측할 수 없는 지뢰밭(!)속에서 사회운동단체들이 그저 '감당할 수 없다'거나 '누가 남아날 수 있겠느냐'는 따위의 논리를 갖다댄다면, 결국 성폭력사건의 실질적인 해결의 의지가 없음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보를 말하는 운동단체로서 성폭력을 해결하자는 일정수준의 명분과 체면은 세우되, 돌아서서는 가해자를 옹호하고 본질적인 사건해결에 주저하는 조직보위 논리는 항상적으로 숨어있다. 운동사회에서 자신과 함께 운동을 일궈왔던 여성동지들을 지지, 옹호하지 못하고 왜곡된 성의식에 물든 스스로의 모습을 재무장하지 않는다면, 당장 투쟁 속에서 부르짖는 평등과 진보는 결국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
KBS노조부위원장 강철구 성폭력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음모론, 조직보위논리 그리고 선거를 통해 드러난 노조지도부의 관료성 등을 보면서도 우리는 성폭력사건이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지도부는 당장의 선거를 위해 피해자들에게 '선거출마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하게 했고, 정치적 립서비스를 남용하며 그 당시에만 피해자들의 입막음을 위해 급급해했다. 결국 피해자들이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을 때는 당장 표정을 바꾸며 다시 피해자들에 대한 공격을 서슴없이 일삼았던 것이 노조지도부의 모습이었다.
사회운동단체가, 특히나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일수록 성폭력사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출하기를 주저하며, 오히려 이를 적대적으로 인식하면서 투쟁의 걸림돌로 규정하는 것은 운동사회의 오랜 관성이었다. 특히 성폭력사건을 접수한 지도부는 성폭력사건에 대해 함구령을 지시하거나 사건자체가 지도부에 흠집을 내려는 음모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혹은 가해자의 운동헌신성을 성폭력사건과 비교하며 한번의 실수로 매장할 수는 없다는 식의 조직보위논리가 주된 가해자옹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공개된 사건 중 이일재사건의 경우 민주노총은 이 사건에 대한 함구령을 내리고, 지도위원사퇴를 권고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을 뿐만 아니라, 송보순사건의 경우 보건의료노조지도부는 '피해자공동책임론' 운운하며 가해자를 비호한 바 있었다.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한 조직보위이며, 누구를 위한 운동보위인가? 당장의 투쟁에 승리하기 위해 눈앞에 있는 피해자를 벼랑끝으로 내몰고 가해자의 잘못을 용인하고 은폐할수록, 그것은 더욱 운동진영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전체운동의 발목을 잡을 것임을 모르는가?

성폭력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자

성폭력사건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논리는 '성폭력이 아니라 성관계다', '그 여성활동가는 당해도 싸다 혹은 평소 활동태도가 좋지 않았다', '내여자 내맘대로 하겠다는데',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나쁜 짓일 줄 몰랐다' 등이다. 이러한 인식은 남녀활동가들의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되어있으면서 성폭력자체를 정당화하는 주된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데, 운동사회에 존재하는 성관념의 인식은 대부분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적 형태가 상존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프리섹스를 합리화하며 친밀한 관계, 신뢰하는 동지관계에서 합의를 강제하면서 자행되는 성폭력은 정병도사건과 이영주사건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가해자들은 자신의 지위와 관계에 대한 신뢰까지 악용하는 양상까지 보인다. 남녀의 성적 역할을 분업화시키고 여성활동가에게 어머니로서의 포용력과 화해를 강요하는 논리 또한 운동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보수주의적 경향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지속되는 구조적 요인은 운동사회내의 가부장성으로 인해 가능하다. 생활과 일상활동에서 내재화된 가부장성은 성폭력사건의 해결에서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여성해방의 견결한 연대단위임을 자처하면서 정작 사건해결에 있어서 피해자의 진술을 수용하지 않는 모습, 가능한 수준에서 '정 요구하면 하겠다'는 식의 수동적인 자세들은 오히려 철저히 가해자를 옹호하는 논리보다도 더욱 기회주의적인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 안에 내면화된 이러한 이중적 인식은 사실상 이중적인 성관념에 기반하고 있으며, 정작 말과 행동에서 괴리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입으로 성폭력근절을 말하고 지지하겠다면서,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건해결에 미온적 태도를 취한다면, 이보다 더한 자기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게다가 운동단체들이 경찰과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사건이나 성희롱사건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입장과 성명으로 사태해결을 촉구하면서도 정작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대기를 주저하는 자기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은 성폭력에 대한 관점을 올바로 내재화하지 못한 채, 성폭력사건을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세상의 절반과의 연대, 반성폭력운동에 나서야 한다

성폭력문제, 특히 운동사회에서의 성폭력문제는 단순히 가해자개인에 대한 처벌과 단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실질적인 해결은 비단 100인위나 몇몇 여성활동가들의 몫이 아니며, 관련단체들의 징계로만 끝나는 것도 아니다. 문제상황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적확하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전환하기 위한 진지한 평가와 뼈를 깎는 재무장이 필요하다. 이에 우리는 100인위의 문제제기가 갖는 그 자체의 의미를 지지하며, 이들의 운동이 지지, 옹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우리는 성폭력에 대해 여성의 시각으로 관점을 재정립함으로써, 반성폭력운동의 대열에 동참할 것이다. 억압과 모순에 저항하는 투쟁에 여성이 운동주체로서 나설 때, 이를 옹호하고 지지하지 못한다면 이미 그 운동은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과 연대하려는, 운동사회 성폭력근절을 위한 전체구성원들의 결의와 실천이 수사로만 존재한다면, 운동을 통한 사회변혁의 희망을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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