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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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부문 노동조합 발전전망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며

노동조합 운동의 실리주의적 노선은 가능한 길인가

편집부
본격적으로 하반기 투쟁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임박해 왔다. 그러나 상반기 투쟁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하나의 거대한 ‘벽’에 부딪치고 있다. ‘김대중정권 퇴진’ 투쟁기조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평가가 그것이다. 예컨대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에서 김대중정권 퇴진 투쟁은 너무나도 과도한 투쟁 요구였다”는둥,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은 그에 걸맞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둥, 나아가 “노사정위를 탈퇴하고 심지어 국가보조금조차 받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발상이다”라는 식의 우익적 평가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민주노총의 투쟁기조와 전망을 둘러싼 논의 자체는 별반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둘러싸고 한 바탕의 논쟁이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논의가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의 전망과 과제를 둘러싸고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최근 전력, 통신, 지하철, 도시철도, 정투연맹을 주축으로 하여 개최된 “공공부문 노동조합 발전을 위한 토론회”, 그리고 3차에 걸쳐 진행된 공공포럼, 그리고 민주노총의 ‘공식’(?) 정책단위로 인정받아 온 한노사연의 기관지 등을 통해 제기되고 있는 논점은 상당히 ‘파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현단계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 방향, 투쟁 주체 형성의 문제는 한국사회 노동조합 운동이 처한 조직적․주체적 위기라는 조건에서 필연적인 논의 주제일 것이다. 그 동안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어 왔던 대공장․지역집중 운동의 상대적 위축이 가져오는 주체 역량의 소진은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의 성장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역시도 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사유화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차분히 돌아보아야 한다.
공공부문의 특수성인 전국적이자 거대한 노동조합의 규모와 양상, 국가기간산업으로서 가지는 국가의 통제와 파업의 파괴력, 대정부 투쟁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조건 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국적으로 산개되어 있는 사업장의 특성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민주적․주체적 운영에서의 난제, 국가의 직․간접적 통제가 가져오는 개별 사업장에서의 노자 관계의 왜곡, 결국 노동조합 운동 역시도 공기업의 관료적 운영 행태를 일정하게 답습하게 되는 현실적 한계들을 어떻게 타파해나갈 것인가? 공기업이 가지는 국가기간산업으로서의 특성, 나아가 공공성 문제에 대해 전술적․전략적 측면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은 상당히 상이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8월23일 개최된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을 위한 토론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기되었다. 공공부문 운동의 성장 → 대정부 투쟁진지의 성장 → 교섭력의 집중과 확장 → 지역적․업종별 노사정위원회 재편과 참여 → 양노총을 경유하지 않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 → 공공산별의 건설 → 시민적․대사회적 연대의 강화 등의 논점을 가져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정에 허울좋은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 ‘참여적 노사관계’, 그리고 ‘정치적 노동조합주의’, ‘사회적 합의주의’ 등이 결합시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공공부문 운동이 가지는 특수한 조건과 그 조건이 양산하는 한계적 지점을 오히려 과도하게 발전의 근거로 사고하는 한계를 지닌다. 즉,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가지는 대정부 투쟁의 용이함을 부각시켜, 이를 위해 협상력 향상을 위한 양적 연대의 확장, 사회적 연대의 확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노동조합 운동을 지극히 ‘실리주의’적인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교섭구조로서의 ‘노사정위원회’, 교섭력 확보를 위한 전제로서의 새로운 주체 형성, 그리고 연대의 확장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노사정위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공공부문의 경우, 정부가 직접적 사용자인데도 사용자가 사실상 분산되고, 교섭구조가 파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사정위원회는 주요한 대화채널이며, 노사정위원회를 배제 혹은 해체시키자는 주장은 공공부문에 있어 교섭창구를 해체시키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적 합의주의’와 ‘노동 참여적 노사관계’의 발전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자 간에 형성되는 제 조건, 합의라고 명명되는 그 조건 자체도 철저히 계급관계의 힘을 반영한다. 더욱이 자본주의 위기적 국민에서 자본의 우위 하에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노동에 대한 치열한 관리전략이 관철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합의 구조는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동력과 물리력에 기반하지 않는 한 결코 대등한 합의일 수 없다. 노사정 합의구조의 전형으로 운위되는 서구의 경우조차도 합의는 어디까지나 노동자계급의 가열찬 투쟁의 결과물이자, 자본 재생산을 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모순적 발전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노동조합 운동을 놓고 ‘교섭 불가’라는 극단적 처방을 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 노동조합 운동은 기업별이건 아니건 이미 합의․협의․협상의 테이블이 전제되어 있는 조직이다. 문제는 합의 자체가 강요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투쟁력에 뒷받침하지 않은 교섭력의 증가는 결국 노동조합의 상층정치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현재와 같이 대중의 투쟁력과 지도력이 합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 불신의 고리는 더욱 커진다. 물론 임금인상 투쟁에서 대중적 투쟁력과 상층 교섭이 별개의 문제라고 볼 수 없듯이 전체 노동운동 차원의 상층 테이블,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에서의 합의 테이블이 일정한 ‘조건’ 하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의 투쟁력 고양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합의 자체만이 부각되었을 때, 이 교섭테이블에서의 노동자들의 주장을 이빨빠진 호랑이의 호령으로 전락할 뿐이다.


공공산별→양노총의 연대→제 3노총 건설→교섭력의 확장 등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다시금 기업별 노조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발전 과정에서 기업별 노조 체계는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통일을 일궈나가기 위한 과정에서의 특수한 조건이었으며, 산별 노조 역시 계급운동의 발전을 확대하고 노동조합 운동을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조건을 진일보 시켜낸다는 점에서 유리한 ‘조건’일 것이다. 기업별 노조를 만악의 근원으로 상정하고, 교섭력 확보를 위해 산별로 시급히 가자는 주장은 목욕물 버리다 애까지 버리는 주장일 수 있다. 산별이라는 조합운동의 발전된 지도적 구심을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중요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노동조합의 ‘실리주의’적 전망과 결부되어, 이를 위한 대정부 교섭력 확보, 교섭력 확보의 전제로서의 노동조합의 양적 연대의 확장, 양노총을 경유하지 않은 새로운 주체 형성, 결과적으로 공공산별과 제3노총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정부 투쟁이 교섭창구를 만들고, 교섭력 확보를 위해 양적으로 수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대정부․대자본 투쟁의 내용과 전술․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더욱이 한국사회 노동조합 운동의 지나친 전투성은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 나아가 자본주의 역사의 발전에서 노동자계급이 지나치게 전투적이었고, 불필요한 마찰을 벌인 적이 있었던가. 우리의 투쟁은 철저히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민주화를 쟁취하기 투쟁이었다. 더욱이 산별은 기업별 조직형태에서 조금 더 발전하면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를 갖는 조직이다. 산별은 계급적 요구를 가지고 투쟁하는 조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계층적 분할 정책을 극복하고 노동자계급 내부에서조차 확연히 드러나는 다양한 요구와 불만을 노동자 ‘계급’의 요구로 상승시켜내야 하는 조직이다. 산별노조는 개별 기업 내, 동종업종 내에서 획득되는 의식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의식과 결합을 요구하는 조직이며, 이를 위한 투쟁의 산물이다. 산별노조로의 이행은 계급조직으로서의 노조의 성격을 가장 충분하게 발현할 수 있을 만큼의 조직적 성숙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기업별 단결→지역별 단결→업종별 단결→산업별 단결로 나아가는 합법칙적이고, 수학적인 경로는 가능하지 않다. 업종별 공투를 잘하고, 다양한 연대투쟁을 ‘개발’하는 것으로 산별 요구를 모아내자는 입장은 산별노조를 산업별․업종별․직업별 노동자들의 공통적인 이해와 요구에 근거해 투쟁하는 조직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더욱이 산업별 이해란 무엇이며,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공공부문이 에너지 산별을 만들고, 산별 교섭을 할 때 산별의 공통적 요구는 무엇인가. 여기서 ‘산별 이해’란 대정부 투쟁이 용이한 조건, 그리고 공공서비스의 제공일 뿐인가.


공공성 쟁취, 국민의 지지와 대시민 연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 동안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구조조정 저지 투쟁을 앙상한 반대투쟁으로 비춰지게 했고, 공공성 쟁취를 위해 대국민적․대시민적 연대 투쟁을 하지 못했으며, 이 속에서 국민과 시민을 볼모로 한 투쟁을 전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공공부문이 공공성 쟁취 투쟁을 못하고, 앙상한 구조조정 저지 투쟁만을 했기 때문에 주춤했다고 볼 수 있는가? 과연 노동조합이 경제적 투쟁에 매몰된 채 공공성 투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던 것인가? 노동자들이 생존권 투쟁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시민적․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사회적 연대를 이루지 못했던가? 그 어떤 노동자도 대중을 볼모로 한 채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겠다는 간악한 발상을 하고 있지 않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생존권 쟁취를 위해, 나아가 공공성 쟁취를 위해, 파업이라는 전술적 무기를 채택할 뿐이다. 그리고 그 파업이 진행된다면, 국민과 시민을 한 순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편함을 선동하고, 이 속에서 이득을 얻는 것은 정권과 자본이다. 이러한 선동을 통해 노동자 투쟁의 의미를 해체시키고, 결과적으로 투쟁을 말살시키고자 하는 것은 정권과 자본의 ‘힘’이며, 그들의 전술이다.
이런 식으로 공공성을 해석하다보니 시민사회와의 연대는 관건이 된다. 그렇다면 이 공공성의 수혜자이자, 연대의 대상으로서의 시민, 시민사회 영역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 공공서비스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가장 헌신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주입받아온 의식이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공공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공성의 수혜자인 시민․국민의 그 ‘단기간의 불편’을 두려워해야 하며, 착취강도를 높여야 한다. 결국 투쟁의 시기가 도래했을 때, 공공성 확대를 위해 연대해야 할 ‘친구’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착취를 용인하고 강화를 주장하는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공성은 노동자․민중의 보편적 생존권의 시각에서 다시금 바라보아야 한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노동자 계급의 전망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보편적 생존권, 국가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통제력의 문제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현시기 자본의 위기. 이 위기가 가져오는 자본 재편의 방향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수세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재편의 최대 목표치인 노동자․민중의 보편적 생존권을 위해 최후의 보루로서 방어해야 할 ‘전술적’ 진지일 뿐이다. 즉, 공공성은 단지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기득권 형성을 위해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위해 외칠 근거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자본 재편의 방향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생존권과 최소 권리의 축소에 대한 방어와 진지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투쟁을 재건해내야 할 ‘영역’인 것이다.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전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공기업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은 생존권 사수, 구조조정 저지의 원칙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이 속에서 그 동안의 대응 방식에 대해 냉철히 평가하고 현장에서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동력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구조조정 저지 투쟁을 버겁게만 여기고 챙길 것이라도 챙기자는 식의 실리적 투쟁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에 공공부문 사유화와 구조조정 저지 투쟁은 시급히 생존권 쟁취와 현장통제 저지 투쟁과 결합해나가야 한다. 노사정위원회나 합의구조에 연연하면서 노동유연화를 위한 현장공세에 대해 무력하게 대응한다면 아래로부터의 동력 형성은 불가능하다. 현장에 기반한 교섭과 현장에 기반한 투쟁이 조직되지 않는다면 그 교섭은 양보와 타협으로 점철될 것이다. 이것의 결과는 노동조합의 무력화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한 신자유주의 관철 과정에서 공기업 노동자들이 공기업 자체의 생존권 확보를 넘어선 중장기적 측면에서의 자기 역할과 과제가 더욱 분명해져야만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양상에서 공공성의 후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 속에서 ‘어떠한’ 공공성을 쟁취해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관건이다. 최근 의료, 교육 등의 영역에서 분출하고 있는 공공성 쟁취 투쟁과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가, 단지 전력이 보편적으로 공급되고, 철도나 대중교통 수단의 요금이 값싸게 공급되는 것이 공공성의 쟁취인가. 국가, 그리고 공적영역에 대한 총체적 사고 속에서 공공성의 의미는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 속에서 공공성 쟁취 투쟁의 주체들은 새로운 연대의 스크럼을 짜나가야 한다. S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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