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2019.07.19
[계간 사회진보연대 발간 기념 인터뷰] ‘반MB투쟁’ 몰두하며 노동자운동이 잃어버린 것
계간 사회진보연대 발간 기념
<반보수전선이라는 막다른 길> 필자 김동근 인터뷰②
‘이명박 반대’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과오를 평가"할 수 없었다. 또 ‘이명박 반대’만으론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본질적인 쟁점"을 지적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광우병 촛불은 오직 ‘이명박 반대’만을 외쳤다. 김동근 조직국장이 광우병 촛불의 실패를 다시 한번 지적하는 이유다.
김동근 조직국장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19 여름호에 <반보수전선이라는 막다른 길>을 발표했다. (글 전문은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j2019&category1=1&nid=7855 )이 글에서 그는 광우병 촛불,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시작된 반보수선거연합, 세월호 투쟁, 박근혜 퇴진 촛불 등 지난 10년의 주요한 투쟁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인식과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 이번 글에서는 반보수전선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다룬다.
글의 본론 격인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운동에 대한 평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광우병 촛불이 “노빠(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에 의해 조작된 거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광우병 촛불이 소위 “노빠”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은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주장되었던 것인데요, 이러한 질문에 갇히면 평가가 불가능해집니다. 한두 마디로 광우병 촛불을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광우병 촛불은 실제보다 과장·왜곡된 광우병 위험에 대한 공포에 의해 폭발했고, 다른 한 편으로 근본적·구조적 문제인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광우병 위험에 대한 공포에만 갇혔던 한계가 있습니다.
광우병 위험이 실제보다 과장·왜곡된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제가 글에서 자세히 정리했으므로 전부를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돌이켜보면 광우병 촛불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던 서울대 수의학과 이영순 교수의 견해가 옳았습니다. 당시 이 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광우병이 사람에게서 발생한 통계를 살펴보면 광우병은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광우병의 원인이 육골분사료에 섞여 들어간 변형 프리온임을 알고 육골분의 소 사료 투여를 금지한 후 1992년 한해만 37,316마리가 광우병에 걸렸던 것이 1996년에는 8,310마리, 2004년 878마리, 2007년 141마리로 줄었고 2008년 3월 현재는 겨우 5마리만 광우병에 걸렸다. 뇌, 척수 등이 SRM(특정위험물질)으로 지목된 후 이 부위를 먹지 못하게 엄격히 규제한 후에는 인간 광우병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1999년 29명 발병을 정점으로 2006년에 3명으로 줄었고, 2007년에는 한 사람의 환자도 없었다.” “내장 가운데서 광우병 위험 물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회장원위부 그러니까 소장의 제일 끝부분이며, 미국도 30개월 이상이나 이하의 모든 소의 도축과정에서 이 위험부위를 제거하는 것이 법적으로 규정돼 있어 그것이 실제 이루어진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러한 견해가 옳았다는 것을 10년의 시간이 입증해주고 있지요. 안타깝지만 “비전문가들이 퍼뜨린 괴담이 국민을 선동하고 오도했다”는 이영순 교수의 평가에 대해, 현재 시점에서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광우병 촛불이 근거가 없는 운동이었다면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요?
광우병 촛불이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 역시 새누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주장되었죠.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 전 언급했던 기사를 다시 언급하자면, 이영순 교수는 2008년 4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전 “모든 연령의 쇠고기를 다 수입하는 것은 안 된다”는 입장을 이명박 정부에 전달했다고 해요. 다른 나라들이 쇠고기 수입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상황, 그리고 “식품 안심”이라는 국민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글에서 “물론 이명박 정권이 맺은 쇠고기 협상의 수입 조건이 과도하게 미국에 유리한 것이었는가, 한미FTA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협상을 통해서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썼는데요, 그런 점에서 광우병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분노한 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광우병 촛불이 끝까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단일 쟁점에 갇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대책회의는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반대 국민대책회의”였고, 일관되게 (한미FTA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재협상” 요구만을 내걸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한미FTA 비준의 전제조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미FTA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으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기는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노무현 정권은 한미FTA 협상 타결과 함께 국제수역사무국(OIE)로부터 미국이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획득하면 미국산 쇠고기를 뼈를 포함하여 전면 수입할 것을 구두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타결 이후 미국은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한미FTA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광우병 촛불이 단일 쟁점에 갇히게 된 것일까요?
복잡한 대중운동의 양상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만, 광우병 촛불의 몇 가지 중요한 양상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광우병 촛불의 초기 성격에 대해서입니다. 1차 광우병 촛불집회는 2008년 5월 2일 열렸는데요, 사실 1차 광우병 촛불집회라는 이름은 사후적으로 명명된 것입니다. 5월 2일 촛불집회의 이름은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였습니다. 여기서 “너”는 당연히 이명박 대통령인데, 주최한 단체가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라는 점에서 보면 적절하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는 17대 대선 투표가 끝난 2017년 12월 19일 오후 7시에 만들어졌고, 22일부터 이명박 탄핵을 목표로 한 촛불집회를 꾸준히 개최했습니다. 그러다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 집회를 계기로 큰 주목을 받게 되지요. 당시 해당 인터넷 카페는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토론의 장이 되었고 언론의 주목을 상당히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번에 당시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만, 심하게 말하면 최근 우리공화당 세력이 주도하는 가짜뉴스의 원형이 당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한 각종 음모론이 근거가 불분명한 채 유통되었더군요.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는 이후 <이명박 심판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이명박근혜 심판 범국민행동본부>, <적폐청산 의열행동본부>로 전환하면서 일관된 활동을 보여줍니다. 대표인 백은종 씨는 2004년 노무현 탄핵 가결 당시 분신했던 인물로, 2009년 강한 친민주당 성향의 인터넷 언론 <서울의 소리>를 설립해서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류적 흐름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소위 “노빠”, “문빠”로 칭해지는 흐름의 극단적인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자유한국당 세력의 극단적 스펙트럼으로 우리공화당이나 뉴데일리가 존재한다는 점과 유비해볼 수 있겠지요.
정리하자면, 광우병 촛불의 시작은 반이명박이라는 선명한 목표를 바탕에 두고 있었던 세력과 당시 이명박 정권과 각을 세우고 있던 PD수첩 보도가 맞물리면서 폭발력을 얻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광우병 촛불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평가와 분리된 채, 그리고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본질적 쟁점을 우회한 채 반이명박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 데에는 이러한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광우병 촛불의 이후 진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광우병 촛불 당시 국민대책회의 내부 논의 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 부분보다는 지금부터 말씀드리려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국민대책회의 내부에서 일부 단체들은 실제로 미국산 쇠고기 쟁점이 한미FTA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져야 하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개혁정책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 신자유주의와 국제자유무역 규범 등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광우병 촛불과 국민대책회의 내부의 지배적 흐름은 광우병 문제를 “괴담”으로 환원하거나 이명박 전 대통령 개인을 조롱하고 악마화하는 것이었고, 한미FTA 문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개혁정책과 이명박 대선공약의 연관성 문제, 신자유주의와 국제자유무역 규범 등의 문제는 제기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촛불집회 후반기에 국민건강보험민영화, 공공부문 민영화, 학교자율화, 한반도 대운하, 공영방송 사수 등 다섯 가지 의제가 추가되었지만 이는 모두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정책으로 상징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가장 핵심적 의제인 한미FTA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구요.
요컨대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한미FTA, 즉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유산과 분리되면서도 반이명박전선을 펼칠 수 있는 사안이었고, 실제 운동의 진행도 그러했습니다. 시민운동진영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는데, 촛불 집회의 관심사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제반 정책에 대한 반대로 확장되어 가고, “이명박 퇴진” 구호가 집회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국민대책회의에 속한 일부 단체들은 촛불집회를 “쇠고기 재협상”으로 국한하고, 야3당 공조 흐름과 호흡을 맞추려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이명박 반대’만 강조되었다는 거죠?
그렇죠. 결국 광우병 촛불은 이후 소위 “MB악법” 저지를 명분으로 한 민주당 주도의 반이명박 전선 구축,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대연합전선” 본격화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사건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는 반보수전선이 선거라는 계기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보정치운동,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이 형해화되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에 대해서도 글에서 자세히 평가했으므로, 지금은 2008년 이명박 집권 이후 2010년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시민운동진영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참여연대의 입장 변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 참여연대는 노무현 정권에 깊숙이 참여한 것을 반성적으로 평가합니다. 노무현 정권이 보수 세력과 구분되지 않는 정체성을 보여주었으며, 시민운동은 보수화되어 가는 노무현 정부와 구분되는 독자적 사회비전을 갖춘 독립적 주체임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우병 촛불을 계기로 이러한 반성적 평가는 사라지고 반이명박전선과 “MB악법” 저지가 모든 쟁점을 압도합니다. 급기야 노무현 죽음 이후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수레바퀴는 ‘바보 노무현’이 흘린 피를 먹고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며, 노무현의 죽음은 자신의 부활과 함께 민주 진보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평가하면서, “진보 개혁 세력이 거듭나려면 노무현에게 배우고 노무현가 함께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후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민주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개혁의 성과를 쌓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며, “현안과 이슈를 좇아 반대 투쟁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상황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진보와 개혁세력, 촛불 항쟁에 나선 세력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비전, 정책을 만들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중심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에 함께 나서지 않고서는 사회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아내기도, 각 분야의 작은 개혁을 이뤄내기도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민주대연합전선”을 구축해서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노골적인 주문인 셈입니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 이후에 참여연대는 선거결과를 놓고 “6.2 시민선택”, “제2의 6월 항쟁”으로 명명합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 시인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평가가 2년 만에 사라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