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지상중계 | 2019.08.28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로!

원수폭금지2019년세계대회 참가기①

김진영(반전팀장)
8월 2일, 후쿠오카에서 히로시마로 가는 신칸센 안에는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 … 각료회의 의결” 뉴스 단신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로 결정한 6월만 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과연 적당한 때 온 것일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정을 거치면서 이 걱정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왔구나. 오기 정말 잘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원수폭금지2019년세계대회 공식 포스터
 
사회진보연대는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원수협)의 초청을 받아, 해마다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추모주간을 맞아 열리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8월 3일~9일 간 참가했다. 원수협은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과 함께 일본의 양대 반핵운동 조직이다. 원수협은 일본공산당 계열, 원수금은 구 사회당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원수폭은 원자폭탄·수소폭탄을 일컫는 말이다. 
올해 세계대회는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로!"라는 슬로건 하에, 3~6일은 히로시마에서, 7~9일은 나가사키에서 일정이 진행되었다. 원수협과의 인연은 지난 5월 시작되었다.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일본 아베 정권의 반평화·반노동 정책 강화에 한일 사회운동이 공동으로 맞서자는 원수협의 제안으로, 원수협 및 일본의 시민사회단체와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5월 30~31일 서울에서 <비핵·평화를 위한 한일 국제포럼>을 개최했다. 이 일을 계기로 국제포럼 준비에 참여했던 사회진보연대, 민주노총, 한국여성단체연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등의 활동가들이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가게 되었다.
(참고 기사: 비핵·평화를 위한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와 공동행동 - <비핵·평화를 위한 한일 국제포럼> 보고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focus&nid=7831&page=2)
 
히로시마에 모인 전 세계 사람들
 
히로시마에 도착한 첫 날, 해외 참가자들을 모아놓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외 연대 사업이라면 이전에도 몇 번 가보았지만 이렇게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필리핀, 베트남, 네팔, 인도, 스페인, 노르웨이 등등 세계 각지에서 모인 활동가들과 한 자리에서 만날 상황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세계대회에는 일본을 제외하고 총 21개국 84명의 국제 활동가가 참가했다. 이들과 1주일간의 일정을 함께 하면서, 서로의 활동에 대해 알아가고 감상을 나눈 것만으로도 이번 대회 참가는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아무리 먼 나라의 소식도 어렵지 않게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렇지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과의 만남이 상호 이해와 시야 확장에 기여하는 바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마운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나에게 히로시마에 있는 동안 숙소를 제공해준 홈스테이 호스트, 오카 사츠미 씨와, 오카 씨 댁에 함께 묵은 영국 CND(핵군축캠페인;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런던 지부 한나 켐프-웰치 부지부장이다. 어떤 단체에 속한 활동가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뭐라도 하고 싶어서” 세계대회 참가자 홈스테이 호스트로 자원했다는 오카 씨는 무척 친절했을 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를 포함하여 인근에 사는 전 가족 구성원을 불러서 소개시키며 매일 저녁 우리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에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본 시민들의 생각을 듣고,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악화되는 현 상황 속에서도 한일 시민 사이에서는 따뜻한 호의가 오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CND와 영국 노동당에서 활동하는 한나와 일주일간의 일정 내내 한국과 영국의 여러 국내 정세에 대한 의견, 비슷한 나이 또래의 청년 여성 활동가로서 겪는 비슷한 고민들, 일본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처음 참가한 해외 참가자로서의 감상 등을 나눈 덕분에 이번 일정으로부터 더욱 풍부한 고민을 얻어올 수 있었다.
 
오카 사츠미 씨, 한나 켐프-웰치, 필자
 
우리 셋은 첫 날 밤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본적인 자기소개를 하고, 세계대회에 온 소감을 이야기하고, 각국의 현안에 대한 설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카 씨가 최근 한일관계와 반일 불매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 활동가들과의 연대 사업을 취소한 한국 활동가들도 있다고 들었다는 말도 조심스레 덧붙였다. 나 역시 일본 시민들이 이 사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국 시민들이 보이콧 재팬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 시민들은 과연 어떻게 느낄까? 내가 원래 세계대회에 초청된 목적은 한반도 비핵화와 동아시아 평화에 대해 발표하는 것이었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이후의 일정에서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첫 날부터 느끼게 되었다.
 
일단 오카 씨와 한나에게는 역사 문제는 장기적으로 한일 시민들이 함께 풀어갈 문제지만, 일본 보이콧 운동은 한일민중을 대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반대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생각은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도 하고 있던 것이지만, 일본에서의 시간은 이러한 판단을 확신하게 했다. 이 대화 이후의 일이고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한국인이라서 싫다”는 반응을 들은 일이 있다. 이러한 경험은 실제로 맞부딪히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기분이 나쁘다. 과거 식민 지배국 국민의 입장과 식민지 국민 입장을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겠지만, ‘미움 받는 느낌’은 서로가 감정을 터놓고 신뢰를 만들어 가는 데에 크나큰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민지배 시기의 만행을 부정하고 일본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을 추진하는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미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거부와 검열로 비화된 현실은 이러한 의미에서 크게 우려된다.
 
물론 감정이라는 것은 간단치 않다. 나도 직접 만나는 경험을 쌓기 이전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해온 소위 '강대국' 사람들에 대해 뭔가 못미더움을 떨치기가 어려웠었다.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미 대사관 앞에서 피케팅을 하고 아베 정권의 평화헌법 개헌 야욕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는 나날 속에서, ‘미국과 일본에도 군사주의를 규탄하고 역사를 반성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기는 하지만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명제였다. 그러나 2년 전부터 미국 평화운동가들과 교류·연대 사업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느낀 바가 많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계급과 인종과 이념의 문제를 제쳐놓고 추상적인 '미국인' '일본인' '서구 백인' 같은 덩어리로 묶어놓고 판단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이라는 우리의 지향을 차치하고서라도 실제로 현실에 별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 역시 이번 일본 방문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히로시마 국제회의 보고
 
8월 3일부터는 일정이 빡빡하게 진행되었다. 3일부터 5일까지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국제회의 기간이었다. 국제회의에서는 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와 고통: 핵무기의 비인도성; 피폭자의 투쟁 ② 핵무기 금지와 철폐에 대한 시민과 평화운동의 역할 – 피폭 75주년, 2020년 과제와 전망 ③ 핵무기 철폐를 위한 협력과 연대 – 전쟁 반대, 평화 확립, 핵발전 반대, 환경과 인권 보호를 위한 운동, 이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총회와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회진보연대는 3일 총회 두 번째 세션 <핵무기 금지와 철폐에 대한 시민과 평화운동의 역할 – 피폭 75주년, 2020년 과제와 전망> 토론회에서 미국 평화군축안보캠페인(Campaign for Peace Disarmament and Common Security) 조셉 거슨 대표,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의 한나 켐프-웰치 런던 지부 부지부장, 일본 원수협 야스이 마사카즈 사무국장과 함께 발표 패널을 맡았다. 8월 5일 저녁 열린 부대행사 <시민과 해외대표의 교류>에서도 한나 켐프-웰치, 미국 평화행동(Peace Action) 뉴욕 주 지부의 에밀리 루비노, 필리핀 DAKILA의 니턀릴라 사울로, 일본 민주청년동맹 히로나카 타카에 히로시마 지부장과 발표 패널을 맡았다.
 
① 세계대회 국제회의 슬로건 ② 국제회의 참가자들
③ 발표 중인 필자 ④ 회의장 입구
 
일본과 한국의 원폭피해당사자 증언과 피폭의 무서움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보고를 듣는 것으로 히로시마 국제회의가 시작되었다. 이후 3일 간 일본 활동가들이 일본과 한국 및 전 세계 피폭자의 고통에 연대를 밝히며 핵무기 폐기 촉구 피폭자 국제서명 운동, 2020년도 NPT재검토회의에서 핵무기금지조약(TPNW; 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의 비준을 촉구하는 활동을 세계적 차원으로 벌일 것을 결의하는 가운데, 세계 각국에서 온 활동가들이 자국 내에서의 반핵·평화운동의 현황과 쟁점,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전 세계의 핵무기 철폐와 연결될 수 있을지 밝히는 발표와 발언들이 이어졌다. 여기에서는 3일 간의 다양한 발표와 토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들을 소개한다. 언급한 발표들은 발표자의 동의하에, 각각 발표문 전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사회운동포커스로 소개할 예정이다.
 
핵무기금지조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 TPNW)은 2017년 7월 7일 유엔 총회에서 122개국의 찬성(반대 1, 기권 1)으로 통과됐다. 핵무기금지조약은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로 나아간다는 목표로 핵무기를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첫 번째 국제적 합의다. 가입국은 핵무기의 개발, 시험, 생산, 비축, 배치 전달, 사용, 사용 위협을 금지한다.
핵무기금지조약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50개국의 서명과 발효가 필요한데, 2019년 8월 30일 현재 서명국은 70개국이며 발효국은 26개국이다. 핵무기를 공식적으로 보유한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과 실질적인 핵무기 보유국으로 평가되는 4개국(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 9개국은 서명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또한 한국, 일본 등 미국의 핵우산에 포함된 국가도 불참을 선언했다. 한국 정부는 2017년 10월 10일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핵무기 금지조약에 관해 “핵군축이 개별국가의 안보 현실을 고려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일본 원수협의 야스이 마사카즈 사무국장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75주년, 핵확산금지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발효 50주년을 맞는 내년 2020년을 맞아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하자고 호소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2017년 7월 UN총회에서 핵무기금지조약이 채택되었으나, 핵보유국들은 이 조약을 반대하고 있을뿐더러 핵무기의 실제적 사용을 준비하고 있다. 미 트럼프 행정부가 작년 발표한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는 핵무기의 소형화·현대화를 통해 핵무기의 실전 사용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 푸틴 정부 역시 신형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술 핵무기의 선제 사용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 간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은 폐기 위기에 처했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핵경쟁 위기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원수협은 전 세계의 모든 정부가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고 핵무기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피폭자 국제서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년 간 600만 명의 서명을 추가로 받아 총 10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2020년까지 국제서명을 확대해나가 모든 핵무기를 철폐시키는 것은 피폭의 아픔과 평화헌법을 지닌 일본 평화운동의 책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오키나와 헤노코 신기지 건설 중지, 후텐마 기지 반환, 아키타 현·야마구치 현에 배치 논의되고 있는 지상배치형 미사일 요격 시스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도입 반대 투쟁 등을 소개했다.
 
일명 '평화헌법'은 일본국 헌법 제9조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외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미국 평화군축안보캠페인의 조셉 거슨과 평화행동의 에밀리 루비노는 세계 정치와 핵 군비 경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국가인 미국의 활동가로서, 미국이 이라크·아프가니스탄·이란·예멘 등지에서 벌이고 있는 군사적 개입을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각국 활동가들이 2020년 뉴욕에서 열리는 NPT재검토회의에 대응하여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추진하는데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미국 내 단체들이 세계의 평화운동과 협력하여, 내년에 최초로 뉴욕에서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황을 공유하였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영향력이 동아시아로 확대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역사를 직시하기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핵무기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또한 2020년 NPT재검토회의(5년마다 개최)는 이미 평균 82세에 접어든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2020년 미국 뉴욕에서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상당한 상징성을 갖게 될 것이다.
 
러시아 핀란드만남부해안의회 회장(the Public Council of the South Coast of the Gulf of Finland) 올렉 보드로프는 체르노빌 참사 직후 조사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던 소련 과학자 출신으로서, 소련에서의 핵실험들이 낳은 민간인 피폭과 환경오염의 참극에 대해 증언했다. 실험들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인근 지역 주민이 전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규모로 피폭당하기도 하였으며, 1957년 9월 29일 마야크(Mayak)의 플루토늄 생산 공장에서 액체 고준위 핵폐기물 보관 탱크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사고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피폭 피해자만 50여 만 명에 달했다. 사고의 수습 과정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까지 동원되었다. 그는 핵 개발은 절대 ‘위험하고 군사적인 용도’와 ‘안전하고 평화적인 용도’로 나눠질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보드로프의 발표를 듣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핵 개발이라고 해서 정당하다거나 자본주의 국가의 핵 개발보다 문제가 적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 언급한 조셉 거슨, 에밀리 루비노, 올렉 보드로프를 포함하여 이 대회에 참여하는 미국과 러시아의 활동가들은 특별히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반세기 이상의 냉전과 핵 군비 경쟁을 주도했고, 현재도 합쳐서 전 세계 핵무기의 90%를 보유하고 있는 두 나라의 활동가들이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이들은 핵무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미국과 러시아 양국이 각각 북한·이란과 크림반도에 가하는 핵 위협을 중단하고, 미중갈등과 북한·이란 핵 위기 등의 불안정한 세계 정세가 핵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 방안으로 위기에 놓인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 Treaty on Conventional Armed Forces in Europe)과 중거리핵전력조약을 갱신하고 2021년에 종료될 예정인 미러 간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 New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을 연장할 것과. 중국을 포함한 새로운 핵 군축 협정 체결, 중동·동북아시아 비핵지대화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선언문이 발표되던 바로 그 날, 미국과 러시아 정부는 1987년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을 끝내 폐기했다. 이로서 미러 간 우발적 핵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30여 년 간 금지되었던 단거리·중거리 지상 발사 핵미사일의 생산·실험이 다시 가능해졌다.
 
미국-러시아 사회운동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 러시아의 올렉 보드로프와 미국의 조셉 거슨
 
영국 핵군축캠페인의 한나 켐프-웰치는 영국 정부가 추진하는 트라이던트(Trident) 미사일 시스템(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과 핵탄두, 핵잠수함)의 현대화 계획을 비판하며, 평생 핵무기 반대론자로 활동하며 핵군축캠페인의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한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를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노동당 의원의 다수가 여기에 찬성한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영국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에도 반대했는데, 핵군축캠페인은 이를 묵과할 수 없으며 영국 정부와 모든 정당이 일방적 군축 정책으로 선회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박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CND는 올해 12월 런던에서 열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이 NATO의 핵 공유 정책을 강화하는 것을 저지하는 유럽 차원의 저항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정치 시위 조직뿐만 아니라 풀뿌리 평화운동의 확대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교육과 노동조합을 통한 조직화를 설명했다. 현재 군수기업들이 영국 교육 시스템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데, 한 예로 세계 4위 군수기업 BAE 시스템스가 후원하는 학교에서는 11세 학생들에게 ‘수중 무기를 디자인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의 목록 써오기’ 같은 것을 시킨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이 전쟁과 무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위한 평화교육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하다. 교육이 효과적이려면 학생들의 가족들에게도 동의지반을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핵무기 철폐 요구가 군수산업에서 일하는 부모들의 일자리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트라이던트 반대와 같이 평화를 위한 투쟁과 군수기업의 업종 전환을 통한 일자리 유지 둘 다를 요구할 수 있는 조직이다. 2017년, 영국노총(Trade Union Congress)은 노동당에 국가 산업 전략의 차원에서 군수사업의 업종 전환 문제를 다루는 기관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후쿠시마대학교 행정정책학과의 사카모토 메구미 교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8년이 지난 현재 후쿠시마 이재민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지역에 사고 이후 내려진 대피령을 해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여전히 방사능 수치가 대단히 높은, ‘귀환하기 부적당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귀환 의사를 밝히는 주민의 비율은 10%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지자체들이 초등학교·중학교 수업을 무리하게 재개했다가, 등록한 학생이 채 10명도 되지 않아 다시 학교 문을 닫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극심한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처한 사고 지역 지자체들과 일본 중앙 정부의 선택은 이재민들을 비난하고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들을 ‘자발적 피난민’으로 부르며, 이들이 타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사능 오염에서 벗어나는 것을 돕기 위해 지급되던 특별 주거 수당을 끊었다. 대피령이 해제된 뒤에도 귀환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니 개인이 책임지라는 것이다. 이재민들에게 배정되었던 공공 주택의 임대료를 2배~6배 가량 인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이재민들은 여전히 사고와 갑작스러운 타 지역 이주로 인한 정신적·경제적 어려움을 크게 겪고 있다. 방사능 피폭을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사고 지역의 공공교통, 상업·유통망, 의료·복지 인프라가 거의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 거주 지역으로 돌아가서 살래야 살 수가 없다.
 
사회진보연대의 발표는 한반도 비핵화와 동아시아 평화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동아시아의 핵 경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일 평화운동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주제였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한반도 평화정세를 견인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실상은 1991년의 한반도비핵화선언과 2005년의 9·19 공동성명을 근거로 평화운동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뿐만 아니라 미군 핵전력의 한반도 배치, 일본의 핵연료 재처리, 한국 우익들의 핵무기 개발 주장 등을 비판할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북한의 핵 보유와 함께 가는 동아시아 비핵·평화의 전망은 불가능하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대접하면 일본과 남한도 핵 개발 쪽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군사주의적 개입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북한, 혹은 남한의 (핵)군비증강을 옹호할 수는 없다. 핵무기를 개발·보유함으로써 강대국의 핵독점과 핵위협을 억지하고 궁극적으로 ‘전 세계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핵무기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선도적으로 핵무기 금지를 선언하고 강대국의 핵군축 노력을 압박해야 한다. 2017년 7월 UN에서 채택된 핵무기금지조약(TPNW)은, 핵에 반대하는 국가의 시민들이 핵보유국들에게 핵군축을 압박하는 틀이 될 수 있다. 한일 평화운동은 양국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요구하면서, 북한에도 과감한 비핵화 결단을 촉구해야 한다.
핵전쟁 위기를 막기 위한 노력은 ‘핵무기’ 그 자체를 철폐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국, 일본. 미국 3자 군사동맹과 무기 체계를 철폐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한 예로, 현재 한국 성주 소성리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되어 있는 사드(THAAD, 종말단계 고고도 지역방어) 미사일 시스템은 핵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초점을 맞춘 무기체계로, 한국-일본(일본의 교가미사키에도 사드 레이더가 배치되어 있다)-대만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동아시아 미사일방어망(Missile Defense, MD)의 일환이다.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한 것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상정하고 ‘승리하는 핵전쟁’을 준비하겠다는 확고한 의사 표현이다. 나아가 ‘완벽한’ 방어체계 개발은 항상 공격적·선제적 핵무기 정책과 쌍을 이뤄왔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와 같이 동아시아 동맹국의 군사화를 강력하게 추동하는데, 이는 주변국들 역시 이에 대응하게 하여 항구적인 군사비 경쟁을 촉발한다. 현재로서는 ‘대규모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북핵·미사일 실험 중단’(Freeze for freeze)의 모멘텀을 유지하면서, 동아시아를 둘러싼 모든 적대적 군사행위와 군비증강을 막아내는 것이 절실하다. 사드(THAAD) 철회 투쟁, 일본 평화헌법 개헌 반대 투쟁,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투쟁 등에 한일 평화운동이 지속적으로 연대하여 군비대결의 악순환이 아닌 선제적 군축 조치의 선순환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한일 사회운동은 지속적으로 연대를 해왔으나, 2010년대의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공동대응은 아직 부족하다. 한반도 핵전쟁 위기와 세계 최대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 각국의 군비경쟁이라는 현실에 공동으로 대응해나가는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핵무기 철폐와 평화 구축에서도 매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나아가 평화 확립만이 아닌, 민주주의와 노동권, 평등 확대에 있어서도 한일 사회운동 연대의 강화가 필요하다.
 
원래 제출한 발표문은 위의 내용이 중심이었지만, 전날 밤 오카 씨와 한 이야기가 생각나 발표를 시작하기 전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준비한 발표를 시작하기 전에 일본의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일본 보이콧 운동이나, 문재인 정부의 호전적인 한일관계 대응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한일관계 악화 국면을 한일 시민이 어떻게 해결해 나갈 지에 대해서 앞으로의 일정 동안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회 참가자들이 이 말에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때를 시작으로 이후 일본 활동가들과 공식행사 및 사석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많은 토론을 나누게 되었다.
 
국제회의의 일본 및 해외 참가자들과 함께
 
히로시마 국제회의는 3일에 걸친 토론을 종합한 <국제회의 선언>의 채택을 끝으로 8월 5일에 막을 내렸다. <국제회의 선언>의 한국어 번역본을 맨 아래에 첨부했다. 히로시마 국제회의의 주된 테마와 결의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의 발표와 질의응답에 대해서는 원수폭금지2019년세계대회 참가기②에서 다시 다룹니다.)
 
8.6. 히로시마 데이
 
74년 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8월 6일에는 해 뜰 무렵부터 일정이 시작되었다. 6일 오전에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히로시마 시 차원의 공식 기념행사가 있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도 참석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나라 대통령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아베 총리의 발언을 듣게 되었다.
 
기념식 자체는 지자체장 발언, 정부 발언, 추모 발언, 합창, 어린이 발언, 헌화 등 공식 기념식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릴 순서대로 진행되었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그 내용이다. 보통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공식 행사라고 하면, 첨예한 쟁점들은 밀려나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내용 위주로 짜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총리도 참석한 히로시마 데이 기념식에서 히로시마 시장과 시민들은 “일본 정부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며, 핵무기금지조약에 불참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일본도 하루 빨리 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전에도 ‘피폭자 국제서명’에 일본 전체 지자체 중 70% 이상이 지자체 수장 명의로 참여했으며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조인 및 비준을 요구하는 지자체 결의도 전체 지자체의 20% 이상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기해했었다.
 
원폭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헌화하는 시민들
 
그 비결은 이 날 오후 열린 히로시마 데이 집회와, 이후 나가사키에서의 본대회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해마다 히로시마·나가사키를 번갈아가면서 본대회를 치르는데, 올해는 나가사키에서 본대회가 열리는 해였다. 올해는 히로시마 대회에 1300여 명, 나가사키 대회에 5000여 명이 참가했다.) 원수협이 주최한 히로시마 데이 집회에 모여든, 최북단 홋카이도에서부터 최남단 오키나와까지 전국 각지의 모든 시와 현에서 튼튼한 풀뿌리 운동을 일구고 있는 참가자들을 보면서 전후 이래 긴 역사를 지켜온 일본 평화운동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이 핵 군비 경쟁과 상호 갈등으로 빠져들고 있는 오늘날, 전쟁 위기에 맞서 미래를 함께 지켜나갈 수 있는 든든한 방파제를 만난 것 같아 참으로 기뻤다. “내가 겪은 것과 같은 일을 인류가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됩니다. 내 생전에 핵 없는 세상을 보고 죽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는 피폭자들, “피폭자 분들이 살아 계신 동안에 그 경험을 최대한 듣겠습니다. 이후에 이 비극을 잊지 않고 미래로 전하는 것이 저희의 몫입니다.”라고 말하는 청소년들, 각 지역에서 모아온 피폭자 국제서명 개수와 평화 투쟁(이지스 어쇼어 반대 등)을 보고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이들과 함께 하는 운동을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히로시마 데이 집회장 입구. 평화박물관 건립 기금 모금, "없애자! 핵무기" 부채 판매, 원폭 투하 당시 영상 DVD 판매 등 다양한 부스가 진행되고 있다.
히로시마 데이 집회. 일본 활동가들이 "누구의 아이도 죽게 할 수 없다!" "이지스 (미사일 시스템 도입) 하지 말라! 생명과 삶을 지키자! 주민의 목소리를 들어라!" "(헌법) 9조를 지키자! 전쟁은 안 된다!" 등이 쓰인 현수막을 들고 있다.
"피폭자 국제서명 - 이제, 핵무기의 철폐를" 현수막을 든 히로시마피폭자단체연락회의 대표들
히로시마 데이 집회의 모습들
 
마지막 일정은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원폭 돔을 둘러싼 모토야스 강에 종이 등을 띄우는 행사였다. 대회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히로시마 시민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나도 “한반도의 비핵·평화를!”이라고 적은 등을 세계대회에서 사귄 해외 활동가 친구들, 홈스테이 중인 오카 씨 가족들과 함께 띄웠다. 히로시마에서의 마지막 밤,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종이 등들을 보면서,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생전에는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꼭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시키겠다는 다짐을 했다.
 
① 모토야스 강 위를 흘러가는 종이 등들 ② 오카 씨의 손자와 함께
③ 피폭74년 히로시마 데이 등 띄우기 - "핵무기금지조약의 조기발효를!" ④ 등을 띄우는 히로시마 시민들
 
핵무기의 참상을 잊지 않은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
 
히로시마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보다 히로시마라는 도시 그 자체였다. 인류 최초로 핵폭탄 투하의 참화를 겪고 초토화되었던 도시는, 74년이 지난 지금 일본 내에서도 인구 순위 10위권에 드는, 백 만 명이 넘는 시민이 사는 아름다운 도시로 완전히 재건되었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핵무기의 참상을 잊지 않았다. 히로시마 시 어디에서나 쉽게 피폭자의 고통과 핵 없는 세계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는 종이학(折り鶴, 오리즈루)을 볼 수 있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 평화기념공원이 위치하고, 원폭 돔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원폭 돔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히로시마 시의 대표적인 번화가 혼도리 상점가가 있다. 폭심지(爆心地, Ground Zero)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위에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바로 옆의 오리즈루 타워에는 그날의 아픔을 안내하는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히로시마 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오리즈루 타워는 그 이름과 테마 자체가 종이학으로, 원폭의 아픔을 상징하는 명소이지만, 한편으로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편하게 휴식을 취하러 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대회 참가자뿐만 아니라 참가하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의 각양각색의 단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히로시마를 찾았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평화공원으로 모여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망자들을 기리며 꽃을 바치고, 저녁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평화공원을 둘러싼 강물에 등을 띄워 보낸다. 이렇게 히로시마에서 과거는 잊히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있다.
 
핵무기의 참상을 잊지 않은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에서 마음 한 구석의 무거움을 느꼈다. 한국갤럽이 2017년 9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60%가 “찬성”, 35%가 “반대”라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의 경우 그 비율은 10% 미만인데, 2차례 원폭 투하의 비극을 겪은 일본 사회와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는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매우 둔감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오늘날 북한의 핵무기를 둘러싼 한국 사회운동 내 논쟁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북핵의 존재는 한국의 핵무장 필요성을 옹호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일제의 항복과 직접적인 인과 관계로 연결시키는 관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이 준 환희와, 인류 역사에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원폭의 참극은 구별되어야 한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자리 잡은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보여주듯, 핵무기는 국적을 따지지 않고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사망한 조선인의 수는 2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체 희생자의 무려 10%에 달한다. 원폭의 책임은 미국과 일본으로 돌릴 수 있더라도,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감히 말하건대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핵 공격을 ‘받아도 싸지’ 않다. 이미 세계 곳곳에 너무나 많은 핵무기가 존재해 한 번의 충돌도 인류 전체의 절멸로 이어질 수 있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거리에서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캠페인을 펼치는 일본 시민들과 히로시마 시의 풍경들로 글을 마친다.
 
- 나가사키에서의 일정은 원수폭금지2019년세계대회 참가기②로 이어집니다.
 
① 원폭 돔 ② 원폭피해자위령식·평화기념식장
③ 원폭의 어린이 상 ④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접은 종이학으로 만든 '평화'
① 오리즈루 타워에서 내려다 본 원폭 돔
② 히로시마 시 전경
③ '피폭 피아노'로 연주하는 '평화 콘서트'
④ "평화헌법을 지키자" 깃발을 들고 히로시마 시내를 행진하는 시민들
① 종이학 목걸이를 걸고 '평화의 버스킹'
② 원폭 돔 앞에서 "아이들에게 핵 없는 미래를" 1인 시위 중인 원폭피해자
③ '피폭자 국제서명' 거리 캠페인
④ 후쿠시마 핵발전소 재가동 추진을 비판하는 신문 배포
 
※ 참고: 원수폭금지 2019년 세계대회 국제회의 선언

국제회의 선언

우리는 피폭 75주년이 되는 2020년을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로의 역사적 전환기로 만들기 위해서 원폭 피해자와 함께 나서겠다고 호소한다. 세계에는 아직도 약 1만 4000여 기의 핵무기가 존재한다. 핵무기의 위협을 근절하는 것은 세계의 안전과 인류의 미래가 걸린 긴급 과제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피폭자들의 체험을 깊이 받아들이고 핵무기 폐기를 위해 일어서고 있다. 기후 변화 등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과제들의 해결을 위해, 청년들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시민이 행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과 함께 세계적인 운동을 만들자.

74년 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 폭탄은 순식간에 두 도시를 파괴하고 그 해 말까지 2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원폭은 인간으로서 죽는 것도, 인간답게 사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원폭으로 인한 질병과 사회적 차별에 시달렸다. 핵무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짓밟는, 유례를 찾기 힘든 악마의 무기이다.

핵보유국들은 「핵억지」 정책을 고집하며 핵무기 사용 위험을 증대시키고 있다.
미국은 핵무기 사용 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핵미사일 개발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일방적으로 이탈하여 폐기시키는 등 핵전력의 우위를 점하려 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항하여 지역 분쟁에서 전술핵무기의 선제사용과 신형 핵무기 개발을 공언하고 있다. 새로운 핵 군비 경쟁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핵보유 5개국(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은 합심하여 핵무기금지조약(TPNW)에 강력 반대하며 핵무기 폐기의 국제적 흐름에 적대심을 드러내고 있다. 핵확산방지조약(NPT)의 핵 군축 협상 의무(제6조), 「핵무기 없는 세계」의 실현을 목표로 한 종래의 서약과 합의까지 깨려 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트럼프 정권이 제창하는 「핵군축을 위한 환경 만들기」(CEND)는 「전제조건」을 붙여 핵군축을 미루는 것이나 다름없다.
핵보유국들과 핵의존국들은 핵무기는 자국의 안전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핵억지」 정책은 핵무기의 사용을 전제로 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나라의 시민에 대해서든 핵무기에 의한 파멸적 귀결을 가져오는 것은 인도적으로 절대 용납될 수 없다. 핵무기 없는 세상이야말로 모든 나라에 핵 위협 없는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핵무기 없는 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국제정치와 시민들 사이에서 압도적 다수다. 핵보유국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동떨어져, 모순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핵전력의 유지 강화를 위해 결속돼 있다. 핵무기 보유를 고수하는 세력과 폐기를 노리는 세력의 대립이야말로 오늘의 핵군축을 둘러싼 세계의 구도다.
핵무기금지조약(TPNW)은 핵무기를 전면적으로 위법화하는 규범을 세워 핵무기 폐기의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핵보유국에 대한 큰 정치적 도의적 압력이 되고 있다. 핵보유국의 저항과 방해는 수세의 발로다. 핵무기금지조약에는 이미 70개국이 서명했고 비준은 24개국에 달한다. 발효는 시간문제이다. 이 조약이 발효되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내년은 NPT 발효 50주년이다. 5개 강대국에만 핵 보유를 인정한 불평등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가 NPT를 지지하는 것은 핵 군축·철폐 협상 의무(제6조)를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보유 5개국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세계는 핵보유국들이 과연 조약의 의무를 다할 계획이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2000년 이후의 NPT평가 회의에서의 합의, 핵무기금지조약의 성립 등 중요한 국면의 전진을 이끌어 낸 것은 세계의 여론과 운동이다. 지금이야말로 세계의 반핵운동과 시민사회가 그러한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란핵합의(JCPOA)로부터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탈한 후, 무력 충돌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파키스탄의 긴장 격화도 중대한 사안이다. 핵을 포함한 무력행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UN헌장의 평화원칙을 준수하고 대화와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북미는 협상을 가속시키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 구축, 북미 관계 정상화 등 싱가포르 공동 성명(2018년)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모든 관련국에 무력에 의한 위협과 도발을 중단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더욱 강화할 것을 촉구한다. 강대국이 「자국 제일」을 내세우며, 여러 국가 간의 합의를 경시, 무시하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세계를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기후변화, 자원, 빈곤과 격차 등 글로벌 이슈들도, 시민사회도 참여하는 다자간 공동노력에서 해결할 수 있다.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증강은 엄청난 자원의 낭비이며 이들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는 평화롭고 공정한 미래를 위해 UN헌장의 평화원칙과 다자주의에 입각한 세계질서의 확립을 요구한다.

우리는 피폭국에 걸맞은 역할을 정부에 요구하는 일본의 평화운동에 연대한다. 400개가 넘는 일본의 지자체가 의견서를 채택한 것처럼 일본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서명 비준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체험한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에서 이탈해 금지조약을 지지하고 참가해야 한다. 우리는 오키나와 현민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다. 다수의 현민이 재차 거부를 표명하고 있는 오키나와 현 나고 시 헤노코에의 미군 신기지 건설 계획을 철회하고, 후텐마 미군 기지를 즉시 반환해야 한다. 악화되고 있는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침략과 식민지 지배 역사의 직시와 반성에 입각한 이성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군비 확대와 미일 군사 동맹 강화가 아닌 제9조 등 헌법의 평화 원칙을 살린 외교야말로 일본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다.

피폭 75주년을 향해 핵 고수 세력을 비판하는 여론을 세계와 각국에서 만들자.
가장 중요한 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 실상을 비롯해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호소하는 활동의 강화다.
'핵억지력'론을 무찌르는 최대의 힘은 핵무기 사용의 파멸적 결말, 비인도성 고발에 있다.
모든 나라, 특히 핵보유국과 핵의존국에서 핵무기금지조약의 서명과 비준을 요구하는 다수의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의원, 정당, 지자체와의 협력을 한층 강화할 필요가 있다.
2020년은 UN 창설 75주년이기도 하다. UN의 제1호 결의였던 "원자무기의 폐기"가 전후 국제 정치의 원점이었음을 상기할 때다. UN총회, NPT재검토회의를 계기로 시민사회와 국가정부의 공동의 대응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아래의 행동을 호소한다.
― 피폭 증언과 원폭사진 전시 행사를 조직하면서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다양한 행동을 전개하자.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자가 호소하는 핵무기 폐기 국제 서명」(피폭자 국제 서명) 서명자가 곧 1000만 명에 도달할 전망이다. 내년의 NPT재검토회의와 UN총회를 향해서 이 서명운동을 발전시켜 나가자.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자, 비키니 실험 피폭자들을 포함하여 세계 각지의 피폭자와 함께 싸우자.
― 뉴욕 원수폭금지세계대회와 2020년 NPT재검토회의에서 국제 공동행동을 성공시키자. 군사비 삭감, 분쟁의 평화적 해결, 외국군의 군사기지 강화 반대와 철거, 군사동맹 강화 반대와 해소, 고엽제 등 전쟁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지원, 평화교육 추진 등 반전평화 과제들을 토대로 한 운동과의 공동 발전을 이룩하자.
― 원전 제로(탈원전), 지구 환경 보호, 빈곤과 격차 해소, 생활 향상과 고용 확보, 사회보장 강화, 젠더평등의 실현, 민주주의와 인권의 옹호·발전, SDGs(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의 달성을 비롯해 다양한 과제에 목말라하는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발전시키자.

피폭자의 평균 연령은 82세를 넘어섰다. 「내 살아생전에 핵무기 폐기가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피폭자의 염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핵무기에 대한 저항은 세대와 국경을 초월해 공감을 넓히고 있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의 실현을 위해 힘쓰자.

2019년 8월 5일
원수폭금지2019년세계대회-국제회의

- 국제회의 선언의 일본어와 영어 원문을 참조하여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 일본어 원문은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www.antiatom.org/intro_activity/2019/wc/kokusaikaigi_sengen2019.pdf)
 
주제어
평화 국제
태그
기회주의 민주당 세월호 안전사회 특조위 심상정 중도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