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 2019.09.26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를! 낙태죄 폐지 투쟁 2라운드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오는 9월 28일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이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발족한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다. 9·28이라는 상징적인 날을 맞이하여 ‘낙태죄’ 폐지 투쟁 동향 및 ‘낙태죄’ 폐지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과제를 밝혀본다.
‘처벌과 낙인’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새벽부터 헌법재판소 앞에 집결해있던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소속 단체 회원들과 ‘낙태죄’ 위헌소원 결과를 노심초사 지켜보고 있던 전국의 여성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낙태죄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던 2012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이 뒤집히는 역사적인 순간이자, 대한민국 형법에서 ‘낙태죄’가 존치된 지 66년 만에 변화를 일궈낸 순간이었다. “특히 여성은 남성과 달리 임신, 출산을 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한 결정은 여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자기결정권에는 여성이 그의 존엄한 인격권을 바탕으로 하여 자율적으로 자신의 생활영역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고, 여기에는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임신상태로 유지하여 출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 2019년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여성 역시 헌법이 보장하는 존엄과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 나아가 임신·출산 여부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법적 주체임을 확실히 한다. 이로써 여성의 임신·출산은 국가와 가족의 ‘허락과 처벌’이 아닌 ‘권리 보장’의 문제로 전환된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즉각적인 낙태죄 폐지’에는 미달하는 것으로 분명한 한계는 있다. 임신중단 결정을 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료인을 처벌하는 형법상의 ‘자기낙태죄’(제269조 제1항)와 ‘의사낙태죄’(제270조 제1항)의 위헌성이 밝혀졌음에도 위 조항들은 2020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관련 법 개정이 있을 때까지 여전히 유효하다.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여성의 삶이 2020년 12월 31일까지 멈추어있는 것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헌법재판소의 판결 직후 여성의 자기 의사에 따른 모든 임신중지에 대해 일체의 수사와 기소를 즉각적으로 중단할 것을 정부에 요구한 바 있다.
‘낙태죄’ 폐지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투쟁 과제들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 이후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정부와 국회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정부는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전에도 유산유도제(미프진) 도입 국민청원과 같이 요구받은 역할이 있었음에도, 사법부 결정을 지켜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4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는 2020년 12월까지의 법 개정 경과를 봐야 한다며 또다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법 개정 역시 임신주수 및 사회경제적 사유 등 임신중지의 허용조건과 처벌 수준을 중심으로 협소하게 논의가 진행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2019년 4월 11일 여성의 임신·출산이 ‘권리와 존엄’의 문제로 비로소 전환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할 사안은 또 다른 ‘허락과 처벌’의 기준이 결코 아니라 바로 ‘낙태죄’가 억압해왔던 여성의 권리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여성이 온전한 삶의 주체이자 시민이 되기 위해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권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그것을 어떻게 지지할 것인지에 대한 성별·세대·계층을 아우르는 토론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사법 과정에만 의존하거나 포퓰리즘적으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절충하는 역할에 그치는 국가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적 결정과 집행의 책임을 다하는 정치의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기에 앞서 국가는 ‘낙태죄’를 왜 필요로 했는지를 먼저 질문해보자. 통상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해 ‘낙태’ 처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되지만, 이러한 주장의 허구성은 이번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서도 밝혀진 바이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국가는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한 사회적·제도적 개선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은 충분히 하지 않으면서 형법적 제재 및 이에 따른 형벌의 위하로써 임신한 여성에 대하여 전면적·일률적으로 낙태를 금지”해왔다고 비판하면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언명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며 태아의 생명은 임신한 여성에 대한 처벌과 낙인으로 보호될 수 없음을 시사했다. 오히려 ‘낙태죄’는 모성 이데올로기와 함께 ‘가족’을 매개로 하지 않은 여성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억압하는 기제로 활용되어왔다. 정상가족 범주에 속하는 기혼 여성의 임신중지는 제한적으로 묵인되어 왔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는 데에 있어서 여성이 결혼·가족 제도를 매개하지 않고서도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구조의 변화는 필수적 과제가 된다.
다음으로는 여성이 ‘가족’ 내로 유폐되지 않을 수 있게끔 하는 권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여성이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 어머니라는 가족을 매개로 한 지위를 통해서만 사회적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시민적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 노동자는 생계보조자의 위치에 놓인다. 70~80년대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은 오빠·남동생의 학비 마련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유연한 노동력으로서의 중·고령 여성 노동자들은 ‘반찬값 벌려고’ 혹은 ‘애들 학원비 마련을 위해’ 노동시장에 뛰어든 존재로 인식된다. 이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이 당연시되는 임시적 노동력으로 존재한다. 여성의 노동 역시 이처럼 ‘가족’을 매개로 하여 수행되는 현실에서 노동하는 여성이 온전한 ‘노동권’, 즉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의무로서의 노동과 재생산(임신·출산·양육) 양자 모두를 수행하는 동시에 가족 내에서의 역할(아내·며느리·어머니)을 헌신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조건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제위기와 저성장-고령화 문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불안정노동 문제와 임신·출산 등 재생산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따라서 여성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노동 조건과 임신·출산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여성이 처한 모순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낳는다. 시민적 권리로서의 ‘노동권’과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동시에 요구하며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주인공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것이 ‘낙태죄’ 폐지 투쟁에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자운동이 앞장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낙태죄’ 폐지 투쟁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2017년 9월 28일 발족한 이후로 ‘낙태죄’ 폐지를 위한 정책·선전 활동 및 대중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해왔다. 2016년 ‘검은 시위’에서 ‘낙태죄’ 폐지 요구가 처음으로 등장했다면, 그것을 활성화시키고 급진화한 것은 지난 2년간의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생명권 대 선택권(pro-life vs pro-choice)’의 왜곡된 구조를 상대화시키고 자유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흐름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는 위헌이다!”,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 “낙태죄 폐지! 우리는 처벌도 허락도 거부한다!”, “카운트다운! 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와 같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여성·노동·의료·장애·성소수자·청소년·청년학생 등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정당이 두루 함께하며 전국적 대중 사업을 꾸준히 펼치면서 ‘낙태죄 폐지’를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요구로 자리 잡게 했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전 세계 여성들과 국제 연대 활동도 진행하며 ‘낙태죄’ 폐지 투쟁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요구라는 사실 역시 알려 나갔다.
“집에서, 학교와 직장에서, 거리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나선 우리의 행동이 없었다면 이번 결정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온 이 역사적 변화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이제 우리는 결코 과거와 같은 처벌의 역사로 돌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선언한다.”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역사적인 전환을 이뤄냈음을 선언하고, 처벌과 낙인을 넘어 당당한 권리 보장을 위한 ‘낙태죄 폐지, 제2라운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9월 27일 “우리의 임신중지를 보장하라!”라는 제목의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형법상의 ‘낙태죄’ 위헌성이 밝혀졌고, 모욕과 치욕의 역사였던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역시 전면 개정이 불가피하지만,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는 비단 국회의 시간을 쫓아가지 않는다. ‘유산유도제 즉각 도입으로’, ‘안전한 의료접근성과 의료인 교육·훈련으로’, ‘피임접근권 확대와 포괄적 성교육으로’,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로’ 여성의 임신중지를 조속히 보장할 것을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정부에게 요구할 것이다. 또한 달라진 시대에 걸맞은 의료인의 역할과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를 지지하는 용기 있는 의료인들의 행동을 호소할 예정이다.
기자회견에 앞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보건복지부에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적·행정적 조치를 어떻게 취하고자 하는지 관련 계획과 현재까지의 집행 경과를 질의한 바 있다. 보건복지부는 답변 기한이 짧다는 핑계로 지금 이 순간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 중이다. 임신유지와 출산 못지않게 여성의 임신중지 역시 안전하고 건강하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제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정부를 우리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 낙태죄 폐지 투쟁 2라운드!
처벌과 낙인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로 낙태죄 폐지 투쟁의 1라운드를 마무리하고, 나아가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를 위한 싸움을 본격화할 때다. 낙태죄 폐지, 2라운드 투쟁도 승리할 수 있도록 힘차게 나아가자!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은 여성의 몸을 불법화하고 건강과 삶을 위협하는 국가와 법· 제도에 맞서 전 세계 여성들이 저항하고 연대하는 날이다. 2019년 9월 28일을 맞아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여성들은 #MyAbortionMyHealth 해시태그 온라인 액션을 비롯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연대와 저항의 행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임신중지를 매우 엄격하게 금지해 온 국가 중의 하나인 아르헨티나에서는 오는 27일 무상의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 법안을 촉구하는 대중 집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작년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초로 임신 14주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이 하원 의회를 통과한 후 안타깝게 상원 의회에서 부결되었지만,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외치며 여덟 번째 도전에 임하는 중이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낙태죄’ 전면 폐지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권리 쟁취를 위한 싸움에 함께하는 시민사회단체 및 노동조합, 정당으로 구성된 연대체이다. (건강과대안, 노동당, 녹색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불꽃페미액션,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성과재생산포럼, 여성환경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장애여성공감, 전국학생행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탁틴내일, 페미당당, 페미몬스터즈,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이상 총 23개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