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인터뷰 | 2019.11.07

금속노조 서울지부 신영프레시젼 분회 이희태 분회장을 만나다

: 함께 투쟁한 기억, 앞으로도 이어가겠습니다!

사회진보연대
“미래는 바뀔 수 있을까요”
“지금보다 멀리 있는 미래는 지금부터 하는 행동에 따라 정해진다고 합니다.”
(6월 26일 서울남부노동열사문화제 카드섹션 공연 중)
 
신영프레시젼 투쟁을 접하면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문구다. 그 누구보다 미래가 불안했을 이들이,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해고되고 나면 자연스레 흩어졌을 이들이, 노조 깃발 아래 뭉쳐서 외친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겠다고.
 
그들이 다니던 회사, 신영프레시젼은 LG전자에 휴대폰 케이스를 납품하며 한때는 500명이 넘는 노동자의 밥벌이를 책임지던 견실한 회사였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 회장님은 춘천 산골에 으리으리한 골프장을 지었다. 가족 같다던 노동자들은 회사에서 쫓겨났다. 견실하던 회사는 한순간에 제조업 고용위기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버렸다.
 
일자리를 잃은 대부분의 이들은 40~50대 여성노동자였다. 그래도 그녀들은 암담해하지만은 않았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단 ‘노동자의 미래’와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와 함께 고민을 나눴다. 그리고 2017년 12월, 신영프레시젼 분회의 깃발이 올려졌다. 신영프레시젼 분회는 회장 일가의 부적절한 사익추구와 그로 인한 고용위기의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회사의 발전 전략을 같이 고민하자고 외쳤다. 처음에는 호의적이던 사측도 나중에는 명예퇴직, 정리해고라는 매몰찬 답을 보내왔다. 복직투쟁이 이어지자 사측은 급기야 법인 자체를 청산해버렸다.
 
그렇게 440일이라는 투쟁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노조는 회사 안에 농성장을 차리고, 회장 집 앞에서 집회도 하고, 골프장 앞에도 농성장을 차렸다. 이외에도 셀 수 없는 많은 실천이 있었다. 그리고 8월 29일, 드디어 노사가 합의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합원들의 고용 문제 해결을 위한 ‘일자리기금’을 출연하라는 노조의 요구를 사측이 수용한 것이다. 곧이어 9월 3일, 투쟁승리보고대회가 열렸다. 41명의 조합원과 연대해온 동지들의 표정에는 온갖 희비가 교차하는 듯 보였다.
 
그 투쟁승리보고대회로부터도 두어 달이 지났다. 뜨거웠던 투쟁이 지나고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 지금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까.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날 저녁,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신영프레시젼 분회 이희태 분회장을 만났다.
 
(▲ 금속노조 서울지부 신영프레시젼 분회 이희태 분회장)
 
(사회진보연대) “투쟁이 끝나고 나서도 2달이 지났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희태 분회장) “투쟁이 끝나고 나서요 … 사실 좀 힘들었습니다.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또 만족스럽게 투쟁을 마무리한다는 게 어렵기도 하고. 스스로 덜어내려고, 내려놓으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뜨거웠던 투쟁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일상의 시공간으로 돌아온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했다. 팔팔 끓었던 물이 다시 식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것처럼.
 
 
“우리는 준비가 잘 안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투쟁을 마무리하는 것도, 신영과 이별하는 것도”
 
(이희태 분회장) “그래서 그런가, 인터뷰 요청을 받고 사실 좀 막막했어요. 신영 투쟁을 기억하시는 많은 분들은 한창 투쟁을 하던 때를 기억하실 것 같은데. 투쟁할 당시였다면 버튼 누르면 나오듯이 술술 얘기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투쟁이 마무리된 후 그때의 온도를 많이 식히려고 노력을 해서. 독자분들이 원하시는 내용과 간극이 심할까 걱정이 되네요.”
 
뒤이어 이희태 분회장은 가장 아쉬웠던 점이 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희태 분회장) “사실 사측과 타결을 했을 때(8월 말)만 해도 골프장 앞 투쟁이 길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대비하던 시점이었어요. 사측에 대한 배신감, 사측의 거듭된 말 바꾸기로 인한 분노나 앞으로의 투쟁에 대한 막막함 … 그런 감정들이 우리를 휘감고 있을 때였죠. 저 개인적으로도 그때는 어떻게든 빨리 사측을 협상자리로 끌어내서 합의를 받아내자, 이 생각만 하고 살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극적으로, 예상보다 급작스레 투쟁이 마무리된 거죠. 그러다보니 감정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모두가 꿈꿔온 합의의 순간이었지만 또 그게 어떤 모습으로 언제 찾아올지 예상할 수는 없었던 거죠.”
“그러다보니 회사에 있던 농성장을 접을 때도 너무 급하게 나왔어요. 우리들이 10년 20년 일했던 회사잖아요. 회사 앞, 골목 어귀, 담장에 핀 장미 … 이 모든 게 우리 것이었고 또 추억이 깃든 곳이었는데. 나중에 한 조합원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우리 사진 한 장도 못 찍고 나왔다고. 이제 들어갈 수도 없는데. 뒤돌아 생각해보니 우리는 준비가 잘 안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투쟁을 마무리하는 것도, 신영과 이별하는 것도.”
 
 
제조업 고용대란,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사회진보연대) “지난 1년 동안 투쟁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같은 건 있었나요?”
 
(이희태 분회장) “올해 5월 1일 노동절 때 광화문 일자리위원회 앞에서 집회했던 게 기억에 남네요. 신영, 성진씨에스, 레이테크 등 서울의 여성노동자들에게 벌어지는 고용참사 문제를 부각하면서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라고 했죠. 너희가 ‘일자리 정부’면 일자리를 만드는 것만 말고 지금 있는 일자리를 지키는 것,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냐고 외쳤어요. 그게 일자리위원회의 역할이라고. 그래서 일자리위원회에 면담도 요구하고 시민분들께 선전전도 했죠.”
 
성진씨에스는 신영의 바로 옆 동네인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 있는 자동차 카시트 커버를 만드는 봉제업체다. 이 회사는 그야말로 ‘최저임금 꼼수의 전형’이었다. 덕분에 20년 이상 일해 온 여성노동자들은 언제나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인 줄 알고 살아왔다. 노조 설립을 신고하니 물량이 줄었다며 폐업 신고를 해버렸다.
 
한편 레이테크코리아는 폭행과 성희롱으로 얼룩진 대표적인 ‘블랙기업’이다. 문구용 스티커를 포장하던 여성노동자들은 사장으로부터 “시간당 1000원 가치밖에 없는 일” 따위의 폭언을 들어가며 일해야만 했다. 직장갑질을 없애려고 노조를 만들었더니 돌아온 건 문자해고였다.
 
두 사업장의 사연 역시 신영의 상황과 많이 닮아있다. 대부분이 여성노동자고, 또 제조업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12년에서 2017년 사이 비(非)반도체 제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여성노동자의 숫자는 19,787명에 달한다고 한다. (같은 기간 감소한 남성노동자 숫자는 3,821명이다. 이 수치는 통계청 사업체조사에서 재구성하였다.) 제조업 고용위기는 특히 여성노동자에게 더 잔인한 면모를 드러냈다.
 
(이희태 분회장) “세 회사 합치면 조합원만 100명이 넘는데, 조합에 미처 가입하지 못하고 해고된 분들까지 치면 (일자리를 잃은 분이) 얼마나 더 많겠어요. 그 여성노동자들이 다 같이 광화문 광장에 모였어요. 그래서 우리의 요구를 이야기하고 또 광장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우리의 사연을 전달했죠. 조합원분들이 많이들 뿌듯해하셨어요. 저도 참 의미가 깊었던 투쟁이었던 것 같아요. 비록 일자리위원회랑 면담에서는 별 성과가 없었지만요. (웃음)”
 
 
우리들의 장미축제
 
광화문에서 한바탕 판을 벌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희태 분회장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투쟁하면서 즐거웠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희태 분회장) “즐거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원래 회사에서 여름이면 장미축제라는 걸 했어요. 회사 건물 담장에 5~6월 되면 장미가 피어요. 그때 점심시간 이용해서 부서별 운동회도 하고 출장뷔페 불러서 밥도 먹고. 그런 축제를 거의 매년 해왔어요. 올해도 장미가 피기는 피었죠. 그런데 막상 예전 모습은 없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다 떠났고 … 너무 휑한 느낌이 났죠. 누나들도 옛날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 하면서 많이 우울해하셨어요. 그러다 이야기가 나왔어요. 우리끼리 장미축제를 해보자고.
그래서 6월 13일인가, ‘우리들의 장미축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열었죠. 막상 하고 보니 기존에 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어요. 사실 예전에는 제대로 참여하기도 어려웠거든요. 점심시간에만 딱 잠깐 하는 거라, 운동회고 뭐고 대다수는 현장 가서 일 준비하기 바빴거든요. ‘우리’들의 장미축제를 만들기 위해 모두 한 종목 이상은 꼭 참가하자고 했어요. 제기차기, 훌라후프, 배드민턴, 탁구, 링 던지기 … 다 같이 열심히 준비했어요. 지금까지 연대해주신 분들도 초대해서 같이 즐겼죠. 이번에는 진짜 우리가 주인인 장미축제를 한 거죠.”
 
(▲ 신영프레시젼의 장미축제 홍보물 / 사진출처 : 페이스북 "투쟁하는 여성노동자")
 
“우리의 성취는 단결하고 싸우고 승리하는 모습 자체입니다”
 
(사회진보연대) “지금까지 지난 투쟁에 대한 소회, 과정에 대한 말씀 잘 들어봤습니다. 그럼 조합원분들은 그 지난 투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까요. 함께 평가도 하고 정리도 하셨는지요.”
 
(이희태 분회장) “그간의 투쟁을 어떻게 정리할지 조합원들과 얘기를 나눠보았어요. 저도 그렇고 조합원들도 그렇고 마음속에 많은 아쉬움, 또 기쁨, 또 속상함 이런 것들이 있죠. 그래도 우리 40~50대 여성노동자들 수십 명이 흔들림 없이 오랜 시간 한데 뭉쳐서 끈끈하게 투쟁해왔다는 거는 다들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대를 오시는 많은 지역의 선배님들이나 동지들이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투쟁이 길어지면 지쳐서 싸우거나 안에서 패가 갈리거나 그럴 법도 한데. 신영분회는 올 때마다 즐겁게 투쟁하고 분임조 별로 탄탄하게 신뢰를 가지고 운영되고, 또 그게 분회 전체가 하나로 뭉쳐서 잘 투쟁하는 것 같다고. 그런 게 참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우리의 성취가 물질적인 돈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조를 만들기 전에는 진짜 호구처럼 살았잖아요. 회장은 우리가 열심히 일한 돈을 골프장에 쏟아 붓고, 그러면서 우리한테는 허리띠 졸라매라고 하고. 차별이나 인격모독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어요.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이렇게 잘 단결하고, 또 싸우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자체가 우리의 성취다, 어디서든 자부심을 가질만한 성취다, 어깨 펴고 당당히 살자, 이런 얘기를 서로 했던 것 같아요.
물론 남은 과제는 여전히 많지만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름 (우리의 투쟁이) 의미가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진보연대) “남은 과제라고 하시면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이희태 분회장) “무엇보다 앞으로 투쟁의 기억을 가지면서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농성투쟁하면서 매일 만나던 우리가 투쟁승리보고대회 후에는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어요. 그러다 10월 중순에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어요. 다 같이 모여서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우리가 왜 투쟁을 했고, 어떻게 투쟁을 했고, 또 우리가 얻은 성취는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에 가든 신영프레시젼 분회로서, 또 함께 싸워온 사람으로서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투쟁이 끝나고 회사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조합원들이 앞으로도 개별조합원으로 남아 있으려 합니다. 우리 분회가 소속된 남부지역지회에서 우리 인연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앞으로 인연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투쟁이 중요한 만큼 앞으로 펼쳐질 ‘투쟁 이후의 삶’도 매우 중요할 터. 하지만 이희태 분회장의 고민대로 투쟁 뒤에도 인연을 이어간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서 구체적인 방안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희태 분회장) “사측에게 받은 일자리기금을 바탕으로 협동조합을 준비하기로 했어요. 기사도 보도되기도 했죠. 그것과 별개로 두 달에 한 번은 꼭 조합원들 ‘다 모이는 날’을 하기로 했어요. 협동조합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포함해서요. 정기적으로 모여서 식사도 하고 서로 살아가는 것도 들어보려고 해요. 마침 10월에는 이런저런 노동조합에서 역사기행을 가거나, 여성조합원대회, 걷기대회 같은 일정이 많아서 모이는 날이 제법 되더라고요. 이런 일정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함께해온 것 잊지 말고 앞으로도 이어가자고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번 11월 노동자대회에도 조합원분들과 함께 참가하려고 합니다. 많이 오셨으면 좋겠네요.”
 
(사회진보연대) “노동조합이 투쟁하고 나서 협동조합을 준비하는 건 조금 생소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것도 앞으로 조합원분들과 인연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생각하시게 된 것 같은데요.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희태 분회장) “40~50대 여성노동자들이 앞으로도 안정적인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 이걸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보자는 문제의식이었어요. 협동조합을 고민하게 된 것이. 그러다보니 굉장히 진지해지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정말 안정적으로 지속 가능하게끔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 조합원 분들이 바라는, 스스로가 존중받을 수 있는 일자리여야 하기도하고. 몇 가지 경우의 수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분이 협동조합으로 가는 것에 대해 우려를 하고 계시고, 저희도 그런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투쟁이 끝나면 고용이나 생계 등의 문제가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되고 결국 몇몇 개인 관계로 앙상하게 남는 경우가 많은데, 이 조합원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그릇’으로 고민한 겁니다.”
 
다소 조심스럽게 말을 옮기는 이희태 분회장. 그만큼 지난 투쟁의 기억을 ‘좋았던’ 아니면 ‘힘들었던 한때’로만 남기지 말고 앞으로도 어떻게 다른 활동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기울였을 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다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사회진보연대, 그리고 다른 연대해주신 많은 동지께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지 물었다.
 
(이희태 분회장) “마음 한편에서는 부채감 같은 게 있어요. 우리가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전부터 ‘노동자의 미래’를 비롯한 지역의 동지들이 꾸준히 선전전을 해주셨죠. <독산바지락>(‘노동자의 미래’가 배포했던 선전물)에서 신영 문제가 다뤄질 때는 회사 분위기도 많이 바뀌고 그랬어요. 노조 결성 뒤에도 지역의 많은 연대단위나 노동조합이 헌신적으로 연대해주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해주셨어요. 그렇기에 저희가 부족하나마 이런 성과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진보연대 동지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저희가 준비하는 길이 성공할 수 있을지, 혹여나 위기에 빠지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살피면서 조합원들과 함께 걸어가고자 합니다. 그 과정도 지켜봐 주시고 또 응원해주시고 함께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미래를 열어가는 건 다름 아닌 ‘지금부터 하는 행동’이다. 뜨거운 시간을 투쟁으로 보낸 신영프레시젼 분회는 이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즐겁고 또 끈끈한 투쟁을 보여준 그들이라면, 거뜬하게 넘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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