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 2019.11.12
촛불 3년, 초심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 한계를 직시해야
지난 10월 28일 광화문광장에서 <응답하라, 적폐청산! 촛불대개혁!!>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문재인 정부에게 촛불의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이들이 말하는 초심은 “수구 적폐세력이 남겨놓은 반민주·반민생·반평화 적폐들을 일소”하고,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초심을 지키고 있지 못한가? 생각이 변했기 때문인가? 기자회견문에 따르면 촛불 초심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자유한국당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촛불 민의를 수용하여 그 죗값을 치르는 대신, 국회 의석을 방패삼아 촛불 민의의 실현을 가로막기에 여념”이 없었고, “학연과 지연, 기득권 의식으로 똘똘 뭉친 법관, 검사들의 저항이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재인 정부 탓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시민단체들의 이 기자회견이 촛불이 가졌던 근본적 한계를 평가하는 대신, 총선을 앞두고 다시금 ‘개혁/보수’라는 낡은 전선을 세우려는 전형적 시도가 아닌지 우려한다. 이는 지난 3년을 되풀이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현재 우리가 매일 매순간 확인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문제는 “적폐청산! 촛불대개혁!”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추진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운동이 직시할 바는 바로 ‘촛불’ 그 자체의 문제이다.
적폐청산은 무엇을 남겼나?
촛불의 요구는 ‘적폐청산’으로 상징된다. 민주당, 시민단체들은 적폐로 찍힌 과거 권력자들을 구속시키기 위해 3년 내내 총력전을 폈다. 그 결과 전직 두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적폐로 찍혀 구속되었다. 10월 28일 기자회견을 연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런 적폐청산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야권과 검찰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는 적폐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적폐청산의 결과가 과연 무엇인가? 가시적인 몇 가지 결과를 보자.
첫째, 핵심 적폐로 지목되었던 제왕적 대통령제가 역으로 강화됐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부터 청와대를 강화해 적폐청산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의회는 철저히 상대화됐다. 사회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대통령의 지시로 해결되는 것이 일상화됐고, 아예 시민의 청원도 대의제가 아니라 청와대 게시판을 통해 수렴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2018년 초 청와대가 발표한 개헌안은 대통령 권한은 그대로 둔 채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견제한다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역시 그 반대급부로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정치학자들 대부분은 문 정부의 권한 행사가 역대 그 어느 정부보다도 막강하다고 평가한다.
둘째, 제도개혁의 주체인 국회는 상대화되었고, 개혁의 대상이었던 검찰의 권력은 오히려 강화됐다. 20대 국회는 역대 어느 국회보다도 파국적인 여야 간 갈등을 보였다. 20대 국회에서 접수된 의안의 처리율은 31%로 `식물국회`로 불리며 역대 최저 의안 처리율(43%)을 기록한 19대 국회와 비교해도 암담했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단지 야당의 발목잡기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집권세력이 제1야당 원내대표를 비하하고, 청와대 2인자였던 민정수석이 야당을 친일파로 규정하면서 ‘죽창가’를 SNS에 올리는 상황에서, 여야 간 제도개혁 협상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청와대의 관점에서 국회가 적폐들의 소굴이었을 것이다. 청와대는 3년 내내 국회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 투쟁의 도구가 검찰이었는데, 조국 수사에서도 드러났듯 이는 결과적으로 개혁의 대상이었던 검찰의 힘을 더욱 키웠다.
셋째, 적폐와 싸웠다고 평가받는 촛불집회 주도 세력들이 정부에 대거 등용했다. 따져보면 문재인 정부는 촛불을 이끌었던 세력들의 연합정부라 평가받을만하다. 여당인 민주당은 당연하고, 386정치인, 참여연대, 민변 출신들이 대거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권력감시를 주업으로 삼았던 시민단체들이 권력에 참여하다보니 부작용이 만만치 않게 나타났다. 예로 권력남용·권력유착을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그 모든 부정의의 종합판인 조국 장관 일가 부패에 침묵을 하고, 촛불3년을 기념한다는 시민단체들이 정부 대신 야당을 비판하며 아예 정부에 협조를 요구하기도 한다.
요컨대, 지난 3년 결산을 해보면 적폐청산은 과거 권력자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통해 새로운 권력자의 자리를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적폐를 재생산했던 제도는 그 어떤 것도 개혁되지 못했다. 제왕적 대통령은 더 강한 제왕이 되었고, 대의제 기구는 무력화됐으며, 검찰은 더 강한 칼이 되어 정적들을 겨누는 가운데, 권력감시를 자처했던 시민단체들이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했다.
방향부터 잘못된 촛불대개혁
기자회견 참여자들이 요구한 촛불대개혁의 과제는 재벌개혁, 소득주도성장, 검찰개혁, 남북관계 강화, 강경한 대일정책 등이다. 이들은 정부에게 좌고우면하지 말고 개혁을 더 과감하게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이 의제들은 2010년대 내내 관행적으로 개혁 의제라고 일컬어지던 것들이다. 그리고 3년 전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을 거치며 민주당 집권세력의 과제로 자리를 잡아 ‘초심’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촛불대개혁 과제들은 하나하나 따져보면 실은 문제가 많은 것들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여러 글들을 통해 이를 비판해왔다. 여기서는 짧게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먼저, 재벌개혁. 장하성, 김상조로 대표되는 경제정책 책임자들은 재벌개혁과제로 주주행동주의와 불공정거래 규제를 제시한 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주주행동주의는 세계금융위기 이후 그 원조 격인 미국에서조차 비판받고 있는 실정이다. 몇 년 전 엘리엇 같은 초국적투기자본이 재벌개혁론을 명분으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에서 막대한 배당을 챙겨가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와대는 주주행동주의 개혁을 추진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불공정 거래 규제는 어땠을까? 공정거래위원회는 불공정거래를 규제하겠다며 프랜차이즈 업체 몇 개를 쇼케이스로 규제했다. 진짜 재벌들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이것이 불공정거래 정책의 전부였다. 현 정부는 공정한 시장의 힘으로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했으나,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정책적 무능으로 증명했다. 이런 재벌개혁을 시민단체들은 초심이라며 현재도 요구한다.
다음으로, 소득주도성장. 문재인 정부마저 버린 정책을 부여잡고 시민단체들이 하소연하는 꼴이다. 소주성 핵심 정책이었던 최저임금1만원은 해고, 꼼수임금인상 같은 시장의 반격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 결과 최저임금인상이 오히려 고용과 임금을 위협하는 반대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소주성의 또 다른 노동정책이었던 공공부문 정규직화는 대다수 비정규직과 거리가 먼 극소수의 비정규직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주성의 두 정책은 최저임금인상을 되돌리는 산입범위 확대와 꼼수 정규직화로 그나마도 엉망진창으로 추진 중이다. 사실 임금 및 자영업 소득을 높여 경제를 장기간 성장시킨다는 소주성은 경제학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참고로, 거시정책의 책임자였던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미시를 전공한 학자로 참여연대에서 (소주성이 가장 비판한!)미국식 주주행동주의를 한국사회 개혁과제라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소주성은 이론도, 사람도, 정책도 실패였다.
마지막으로 대외관계. 남북관계부터 한일관계까지 문 정부의 대외정책은 무엇 하나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이 없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갈등은 정부의 무책임한 외교대응과 왜곡된 역사인식이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집권세력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불을 붙인 반일 민족주의 운동은 경제적 측면에서나 민주주의 측면에서나 한국사회를 오히려 퇴행시키고 있다. 아베 정권을 군국주의 정권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북한의 핵보유는 비판하지 않는 정권과 개혁세력의 태도나,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 분석하는 민주당 연구소의 보고서는 이들의 지향이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장기집권 전략일 뿐임을 말해준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퇴행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반일을 더 열심히 하자고, 핵무기로 달려가는 북한과 더 협력하자고 주장한다.
또 다시 반보수 연합인가
<응답하라, 적폐청산! 촛불대개혁!!>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적폐세력과의 ‘협치’는 그들이 발호할 기회만 줄 뿐”이란 점을 정부가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직설적으로 말해 자유한국당 눈치 보지 말고, 3년 전 촛불연합을 다시 꾸리자는 제안이다.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인 이태호는 “촛불을 든 시민들과 정부가 초심으로 돌아가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며 시민운동진영이 정부의 파트너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집권’시민단체, ‘권력’참여연대임을 이제 부정하지도 않는다.
개혁 실패가 보수세력과의 협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은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민주연합’을 예비하는 포석이다. 지금껏 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시민운동진영은 광우병촛불·세월호투쟁·박근혜퇴진촛불 등 주요 대중운동을 보수세력에 대한 반대로 몰아갔다. 그리고 주요 선거 때마다 민주당 중심의 선거연합을 지원했고, 민주당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했다. 박원순, 김기식, 조국, 박주민 등 참여연대 출신들은 민주당을 기반으로 행정부, 지방정부, 의회 등에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시민운동진영은 민주당에 대한 평가를 회피하면서 촛불 초심을 근거로 민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기자회견에는 민주노총, 전농, 한국진보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상당수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총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방증이다. ‘촛불 3주년’은 2020년 총선으로 나가는 명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촛불 3년을 맞이한 노동자운동의 과제는 촛불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촛불 그 자체에 문제가 없었는지 평가하고 반성하는 것, 현재의 경제·정치 위기를 분명히 인식하고 장기적인 대안을 준비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는 민주당의 포퓰리즘 정치에 의탁하는 관성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