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건강과 사회
| 2019.12.16
의료전달체계 개선 위한 단기대책,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2019년 9월 4일, 보건복지부가 의료전달체계 개선 단기대책을 발표했다. 의료기관의 종별 성격에 맞지 않는 의료 이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그에 따라 의료비도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 이번 정책이 나온 배경이다. 그간 한국은 의료기관의 기능에 맞는 의료 제공체계가 확립되지 않아 수도권의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계속 몰렸다.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정부는 2011년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기본계획’을 통해 의원, 병원, 상급종합병원의 기능을 재정립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혀 실현되지 않았는데, 그 결과 10년간 상급종합병원 중심의 의료이용은 오히려 증가했다. 그 중 상급종합병원의 기능과 맞지 않는 외래, 경증진료가 특히 많이 증가했다.
이 글에서는 의료전달체계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한국 의료전달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번에 발표된 단기대책을 평가하고 한계를 지적한다.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면, 일차의료 강화 없이 의료전달체계의 구조적 개선은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바람직한 일차의료 모델로 쿠바 사례를 제시한다.
이상적인 의료전달체계란
의료 전달체계는 ‘인구집단의 다양한 수준의 의료서비스 필요(needs)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구성된 서비스의 조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받길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내용의 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의료전달체계를 의료의 지역화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로 정의하는데, 합리적인 지역화를 위해서는 진료권의 설정, 필요한 의료자원의 공급, 의료기관간 기능의 분담과 연계, 환자이송 및 의뢰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단순한 수준의 보건의료 필요는 양적으로 많기 때문에 공급량이 충분하고 지역적으로도 촘촘히 분포되어야 한다. 반면 복잡한 수준의 필요는 고도의 인력, 시설, 장비, 기술을 통해 충족해야 하며, 이 자원들은 일부 기관에 집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요의 크기와 복잡성에 따라 보건의료 자원의 구성과 배치가 단계화되고 그 단계별로 기능이 적절하게 분화될 필요가 있다.
전달체계 개념은 1920년대에 영국의 도슨 보고서에서 등장했고, 그 중요성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보건의료 인력과 기술이 전문화, 고급화되면서 의료비가 증가하고, 의료기관들이 의뢰 기반의 협력이 아니라 경쟁을 하면서 인력, 시설 등 의료자원의 과잉과 불균형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성과 공급자 유인 수요가 발생한다는 의료의 특성상 이렇게 불균등한 자원과 서비스의 집중은 한쪽에서는 의료의 남용을, 반대쪽에서는 의료서비스의 결핍을 낳는다.
도슨 보고서는 보건의료 서비스가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일차의료-이차의료-교육병원’으로 단계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개념은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개인과 가정-지역사회-일차의료-이차의료-삼차의료’로 한층 구체화되었다.
일차의료기관은 지역의 동네 의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읍, 면, 동과 같은 소진료권에 해당하는 지역 범위이다. 이 단계는 환자가 최초로 보건의료 전문인과 접촉하고 기본적 의료 필요를 해결하는 단계이다. 감기, 고혈압, 당뇨 등 비교적 단순하지만, 양적으로 불건강 상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질병을 다룬다. 그리고 일차의료는 질병 치료뿐 아니라 질병 발생 위험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건강증진과 예방도 담당해야 한다.
이차의료는 기본 보건의료 단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건강 문제를 다루는, 단과 전문의들로 구성되는 지역 병원이다. 시, 군, 구와 같은 중진료권에 해당한다. 삼차의료는 주로 대진료권을 포괄하는 대형 병원으로, 광역시/도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는 세부 전문의를 갖추고 거의 모든 질병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보다 높은 단계의 의료기관은 국가중앙병원으로, 국가에 따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매우 특수한 경우를 다루는 병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본 단계에서부터 상위 단계의 의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의뢰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의뢰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계별 의료기관의 기능 분화가 필요한데, 분화의 단계가 올라가더라도 좋은 보건의료 서비스가 되기 위해서는 포괄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보건의료 제공체계의 구성에는 분화와 통합의 동시 추구가 주요 과제이다.
대형병원이 경증환자를 빨아들이면서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 의료기관 종류별 진료비 점유율을 보면 의원급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으나, 종합병원 및 상급종합병원은 증가했다. 외래내원일수를 보더라도 의원에 비해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점유율은 매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병원급 기관은 외래환자뿐 아니라 입원환자 중에서도 경증환자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문지기 역할을 해야 할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중증환자의 입원진료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일차, 이차 의료기관의 경증환자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료이용 불균형은 병원-의원의 수익 불균형을 가져오며, 건강보험 재정과 전체 의료비 측면에서도 낭비다. 현행 수가제도에서는 의료기관 종별로 가산율을 적용해 수가를 지급하는데, 의원은 15%이고 순차적으로 높아져 상급종합병원은 30%의 가산율을 적용받는다. 거기에 추가로 의료기관 등급에 따라 ‘의료질평가 지원금’이라는 수가 가산을 더 해준다. 상급 의료기관일수록 어떤 환자를 보든 관계없이 진료비가 더 높게 책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경증환자가 상급 기관에 몰릴수록 건강보험 재정의 낭비는 심해진다.
전체 요양급여비용 중 환자 본인부담률 역시 의원에서는 최소 10%이지만 상위 기관으로 갈수록 최대 60%까지 늘어나는 구조다. 경증환자가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을수록 전체 의료비 지출은 증가하게 된다. 다만 실손보험이 있어서 높은 본인부담률이 상급종합병원 이용의 실질적인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효율적인 의료이용이 더욱 늘어나기 쉽다.
그 결과 중증, 경증환자 모두 적정한 진료를 보장받기 어렵고, 의료비 상승이 가속화되며 의료자원의 분배도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의료정책연구소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2015년에 의료전달체계 개선 방안을 제시하였다. 2016년에는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민관 합동으로 ‘의료전달체계 개선 협의체’가 구성되었다. 이 협의체는 주요 과제에 대해 토의를 거쳐 2018년 1월 의료전달체계 권고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의료공급자 단체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국 무효화되었다. 이번 단기대책은 2018년 권고안의 내용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어 의료전달체계의 개편이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시사한다.
의료전달체계 개선 단기대책의 내용과 평가
이번 ‘의료전달체계 개선 단기대책’의 내용은 크게 5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1) 상급종합병원의 평가, 보상기준 조정
상급종합병원의 지정 및 평가 기준에서 중증환자의 비율을 늘리고, 경증환자의 비율은 낮춘다. 나아가 경증환자의 외래진료에 대해서는 의료질평가 수가를 산정하지 않고 외래 경증 100개 질환에 대해서는 종별가산에서도 제외할 예정이다. 대신 수가 감소분만큼 중증환자 진료 수가를 상향조정할 계획이다. 그 동안은 질병 중증도와 외래/입원 진료형태에 상관없이 상급종합병원이면 종별가산과 의료질평가 수가를 적용했다. 때문에 의료기관이 경증환자의 진료를 억제하고자 하는 기전이 없었는데, 실질적인 경제적 동기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의료기관 간의 의뢰 내실화
그동안은 의료인의 의학적 판단에 따르지 않더라도 환자의 선호와 선택에 따라 요양급여 의뢰서를 받아 상급종합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경증환자의 무분별한 상급종합병원 이용을 가능하게 했고, 공유된 의료기록이 없는 경우 검사 또한 중복되어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의뢰, 회송시스템을 만들어 이용을 유도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기존의 의뢰 방식은 폐지하고 의료기관 간의 직접적인 의뢰만 인정하기로 했다. 진료정보교류 수가도 새롭게 마련해 의료기관 간 의료기록 공유를 촉진하고, 지역 내 일차의료기관 간 의뢰 활성화를 위한 인정기준도 마련할 계획이다.
3) 지역 병의원으로의 경증환자의 회송 활성화
상급종합병원에서 의뢰를 받아 치료를 하고 상태가 안정화된 환자를 다시 병/의원으로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환자의 회송률을 상급종합병원 평가의 예비기준으로 신설하고, 진료협력센터를 통해 회송 이후 추적관찰을 하여 필요시 후속진료를 용이하게 한다.
4) 환자의 적정 의료이용 유도
상급종합병원 외래 진료시 본인부담금이 60%로 높은 수준이나, 실손보험으로 인해 실 부담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상급종합병원의 경증환자 또는 회송할 필요가 있는 장기입원 환자에 대해서는 실손보험의 보장범위를 축소한다. 경증환자의 외래 이용에 대한 본인부담 비율도 60%보다 상향 조정한다. 장기적으로는 실손보험의 보장 내용 역시 의료전달체계의 취지에 맞게 조정하고, 공·사보험 연계로까지 나아갈 계획이다.
5) 의료의 지역화를 위해 지역 병의원 역량 강화
서울, 수도권의 상급종합병원을 찾지 않고도 지역 내에서 적정한 의료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각 지역 내의 지역우수병원을 선정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의료 질을 갖추도록 하며, 전문병원의 지정/평가 제도를 점검한다. 지역 내의 필수의료 제공, 연계를 위해 지역책임의료기관을 지정하고 권역책임의료기관을 통해 지역 간의 협력체계도 구축할 예정이다.
이번 정책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의료전달체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고무적이다.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민간이기 때문에, 국가가 의료제공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환자의 의료이용을 제한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개편된 보상체계는 의료기관의 종별 기능에 적합한 보상체계를 통해 경제적인 유인을 준다. 이런 방법으로 합리적인 의료전달체계를 유도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상급병원 진료비 할인권 정도로 기능하던 진료의뢰 제도를 의료인 간의 협력에 기반한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 역시 의료의 지역화, 단계화에 조금 더 부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급종합병원의 경증환자 억제만으로는 현재 두드러진 상급종합병원 환자 쏠림 현상과 그에 따른 의료비 상승만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뿐이다.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의료’라는 명확한 기조에 기반한 수직적 단계화, 지역화 및 일차의료 강화 계획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번 단기대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를 뒷받침할 중장기 대책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 2020년 상반기에 상급종합병원 지정기준에 대한 규정 및 수가가 개편될 예정이고, 2021년 1월에는 해당 규정에 따라 상급종합병원 지정이 완료된다. 앞으로 상급종합병원에서 돌아올 환자들을 병원/의원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는 포괄적인 전달체계에 대해 충분히 논의가 되고 변화가 시작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서야 협의체를 구성해 중장기 대책을 논의하겠다는 계획이다. 단기적으로는 의료의 지역화를 위해 지역우수병원, 전문병원, 책임의료기관을 지정해 지역 의료를 제고하겠다고 하지만, 지역우수병원을 하나 세운다고 의료체계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정부가 대형병원의 독식 현상을 해소하는 것 이상으로 의료체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의료전달체계는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함이고, 이번 단기대책은 우선 의료서비스 제공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정부는 효과가 불분명한 비급여 서비스까지 모두 급여화하는 예비급여와 더불어 의료기기 및 제약산업의 시장 진입을 위한 규제완화를 지속적으로 단행하고 있다. 혁신성장을 위해 건강보험 재정을 제약과 의료기기 자본에게 낭비하면서, 한편으로는 의료비 감축과 의료의 효율화를 위해 전달체계를 개선하겠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예비급여 정책이 재정의 효율적인 사용에 부합한지에 대해서도 반성과 검토가 필요하다.
병상과 특수의료장비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
이번 단기대책의 또 다른 한계는 병상과 고가의 특수의료장비 규제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과다한 병상 및 특수장비는 공급자 유발 수요를 통해 과잉의료를 유발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중소병원들이 난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된다. 한 지역에 세워진 여러 크고 작은 규모의 병원들은 각자 특수장비들을 들여놓으려고 하는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자원 이용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 비효율을 상쇄하기 위해 의료기관들은 서비스 제공을 과다하게 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는다. 현재의 의료체계는 의료서비스 건당, 항목당 수입이 증가하는 구조이고, 과잉의료에 대한 규제도 부족해 의료비의 상승을 야기한다.
특히 곧 예비급여 제도와 더불어 신의료기술 신속평가가 시행된다. 앞으로 고가 신의료기기를 도입하고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커질 것이고, 해당 장비를 도입한 의료기관들은 경쟁적으로 이를 홍보해 환자들을 유치하려고 할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술로 인해 환자들의 건강이 위협받을 것은 당연하다. 과잉 상태의 병상과 장비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 대책이 필요하다. 특히 공급자가 고가장비 경쟁으로 제한 없는 수익을 내지 못하도록 과잉의료 행위를 억제할 방법이 필요하다.
한국의 2016년 기준 인구 1천 명당 병상수는 13병상으로 OECD 평균인 4.7병상의 2.8배 수준이다. 지금과 같은 증가 추세라면 2023년경에는 24만 개의 병상이 과잉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각 지역별 불균형이 존재해 오히려 수요에 비해 병상 공급이 부족한 지역들도 있다. 따라서 설비 총량의 증가는 억제하되 지역 간 불균형을 완화하는 방향의 정책이 필요하다. 의료 수요를 예측하여 적정 수준의 병상이 각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현재 병상 수가 과잉인 지역은 신설 혹은 증축을 제한하는 지역별 병상 총량제를 강력하게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인구 100만 명당 특수의료장비 보유대수 역시 각각 CT 37.2대, MRI 27.2대, PET 4.0대로 OECD 평균인 CT 25.6대, MRI 15.5대, PET 2.0대에 비교하면 과잉이다. 동시에 지역별 장비 불균형 현상이 존재한다. 특수의료장비의 관리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 수요가 아닌 병상 수를 기준으로 하는 비합리적인 장비 도입 규정이다. 현재 특수의료장비 도입 규정은 CT와 MRI에 대해서만 존재하며 상세한 시설 기준은 다음과 같다.
구체적인 문제를 살펴보면 우선 CT의 도입 규정은 100병상 이상의 종합병원에는 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병원들이 앞다투어 CT 장비를 사들여 과잉이 가속화되었다. 반면 이미 병상 기준을 채운 병원이 주변의 병상을 더 확보하여 자기 것으로 등록해 놓으면서 경쟁 병원들이 병상을 확보하지 못해 필요한 특수장비를 설치하지 못하기도 한다. 특히 병상 확보가 어려운 의료 취약지는 공동 활용 병상 확보를 위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병상을 확보해야만 하는데 이는 의료장비 공급의 지역 간 불균형을 야기한다.
기기 설치를 위한 병상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서류상 필요한 병상을 돈으로 사고 판다는 문제도 있다. 병원들끼리 병상을 거래하기도 하지만, 몇몇 특수의료기기 판매회사들이 미리 서류 병상을 사 놓은 후 기기 주문이 들어오면 설치 허가에 필요한 병상으로 꺼내 쓰는 경우도 있다. 200병상 기준이 독과점의 수단이 되고, 기기의 신규 설치를 원하는 의료기관들이 기기의 성능보다는 설치 기준을 만족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의료기기 회사를 선택하고 있다.
장비의 도입 경쟁도, 의료자원의 지역 간 불균형도 해소하지도 못하고 효율적인 의료자원 사용에 기여하지도 못하는 이 규정은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 특수장비의 설치는 지역별 전체 의료기관수 또는 환자군의 특성에 따른 실제 수요를 예측해 공급규모를 지역별로 차등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차의료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의료전달체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건강 증진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치료 위주로 과다하게 행해지는 의료를 건강 관리와 예방 중심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 보건기관에서 건강관리 및 예방 서비스가 이루어지고는 있다. 하지만 미충족 수요가 상당히 발생하고 있고 주변 의료기관과의 연계가 부족해 의료기관 차원에서의 건강 관리는 부분적인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으로 그치고 있다. 관리 중심의 의료를 위해서는 통합적인 일차의료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일차의료 시스템을 자랑하는 쿠바는 1960년대부터 일차의료를 강조해 왔다. 오늘날 97%의 의대 졸업생들이 2년의 일차의료 수련을 의무적으로 받는다. 후에 그들 중 일부가 전문과목 수련을 받고 나머지는 지역 일차의료에 종사한다. 이들은 의사-간호사 팀을 이루어 일차의료의 기본 단위가 되는 진료소(consultorio)에서 지역 주치의로 기능한다. 진료소는 각 동네마다 배치되어 있어서 접근성이 매우 뛰어나고, 하나의 진료소는 보통 1000~1500명의 주민을 담당하고 있다. 그보다 상위의 종합진료소(polyclinic)는 다수의 진료소를 감독하고 지원하는데, 15~30개의 진료소와 하나의 종합진료소가 짝을 이루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종합진료소에는 일차의료에 필요한 전문 분야인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전문의가 배치된다. 실험실 검사를 포함한 진단, 재활과 의과대학생 교육의 기능도 수행한다. 이를 통해 일차의료 단계에서도 전문화된 의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상위 단계에는 지역병원, 3차 전문병원이 존재해 진료 수준에 따른 수직적인 의료전달체계를 갖추고 있다.
쿠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역사회 기반의 일차의료가 건강 관리와 예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쿠바는 지역별로 질병상태와 건강위험요인들을 평가해 건강증진, 질병예방, 치료 등에 대한 지역별 우선순위를 매겨 접근하고 있다. 이것을 지역건강진단(Neighborhood Health Diagnosis)이라고 하는데, 매년 2회씩 시행한다. 의료진은 주기적으로 각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개개인의 건강을 평가하여 위험도를 관리하는 지속적 건강 위험 평가(Continuous Assessment and Risk Evaluation, CARE)’ 전략도 병행한다. 이 평가를 바탕으로 주민 건강위험을 4단계로 분류하고, 이에 따라 정기 방문 및 진찰 횟수 등을 계획하여 질병을 관리하고 예방한다. 이 때 개인의 건강 상태만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질병 상태나 주거 및 가족 환경, 정신질환을 비롯한 다양한 질환의 가족력까지도 조사해 의무기록으로 남긴다. 쿠바의 의사들은 환자를 의뢰하고 의무기록을 공유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 전문 입원 진료가 필요한 환자가 있으면 상위의 종합의료기관으로 환자를 입원시키고 이후에 해당 병원을 방문하여 의무기록을 공유하고 퇴원 후 의료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관리와 예방 중심의 일차의료 덕분에 쿠바는 경제위기와 제한된 자원 조건에서도 선진국 수준의 건강 지표들을 달성했다. 98%의 소아가 필수적인 13개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2세 이전에 완료한다. 95%의 산모가 임신 첫 분기에 필수 산전진찰을 받으며 총 12회의 산전관리를 받고 있다. 또 천 명당 5명 수준의 영아사망률은 미국보다 나은 수준이다. 여기에는 기초적이지만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일차의료 전문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는 쿠바의 인구 천 명당 의사 수가 8.2명으로 한국에 비해 3배 이상 많아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은 인적자원의 한계로 인해 가족 주치의 수준의 제도까지는 아직 현실화하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다수의 의원과 병원, 보건기관들이 지역 내 하나의 의료제공 단위에 포함되어 예방, 치료, 재활, 위험요인 관리를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의료의 지역화 모델을 고민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일차의료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종별 재정립을 통해 의료기관들을 기능적으로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2018년에 발표된 의료전달체계 개선 권고안에서는 일차의료기관의 입원병상을 폐지하자고 제안하였다. 또 입원이 가능한 외과계 의원은 이차의료기관으로 분류해 시설, 인력, 장비 운영기준 등을 재정비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결국 의사협회와 병원협회가 합의하지 못하면서 권고안 채택 자체가 무산되었으나, 의료기관의 종별 재정립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인적 자원에 있어서는 전문의와 일차의료의 간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 10년간 한국의 전문의 비율은 꾸준히 70%를 상회했는데, 최근 점점 증가해 2017년 기준 78%에 달하고 있다. 이 전문의들 중 절반 이상이 개원가에서 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단과 전문의들은 일차의료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일차의료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 부족하고 역량 강화에 대해 소홀한 경우가 많다. 가정의학 수련을 받지 못한 대다수의 일반의들은 일차의료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훈련받지 않은 채 개원한다. 현재 한국에서 일차의료 서비스와 관련된 역량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만 맡겨져 있다. 전문의 과잉 및 일차의료의 부족 현상은 한국 수련 과정의 문제점으로 반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으로, 자격과잉(overqualification)이면서 자격이상(mismatched qualification)이다. 의과대학 졸업 후 일차의료 수련을 먼저 받고 선택에 따라 추가로 전문의 수련을 받도록 하거나, 일차의료의들이 가정의학 수련을 폭넓게 받을 수 있도록 교육 및 수련과정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행위별 수가제를 벗어난 새로운 지불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현행 의료비 지불제도에서는 예방보다는 치료행위를 자주 하도록 하는 경제적 유인이 커서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관리하도록 하는 동기가 매우 부족하다. 일부 만성질환에 대한 질병관리 성과 보상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의원의 전체 수입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예방의료에 대한 수가를 새로이 책정하거나 기존 질병관리 수가를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행위별 수가제의 특성상 결국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는 환자가 많아야 수입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 또한 분명 한계가 있다. 궁극적으로 인두제나 총액계약제 등 포괄적인 방식을 같이 고려하여 환자가 건강하고 질병을 예방할수록 의료공급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지불제도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문제 해결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했지만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
한국의 의료제도 발전 과정에서 정부는 공공적 성격인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하면서도 대부분의 병상공급 및 서비스 제공의 책임은 민간에 부여함으로써 기형적인 의료체계를 낳았다. 그런데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려는 여러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간 중심 의료의 영리화 경향으로 인해 공급자 통제가 잘 되지 않았다. 때문에 과잉의료와 그에 따른 의료비 상승이 심각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칼을 뽑아든 것은 분명 큰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다만 단기대책은 현상에 대한 대증요법일 뿐으로 중장기적 대책이 훨씬 더 중요하다.
특히 이번 단기대책은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에게 기존 방식의 의료 이용에 대해서 벌칙을 주는 정책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이때 상급종합병원의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경증환자 억제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보전하는 데만 급급하면 안 된다. 그 이하 단계의 의료, 특히 일차의료의 기능적 발전이 더 중요하다. 환자들에게도 이번 정책이 의료이용 선택권을 제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적절한 내용의 의료서비스를 적절한 때에 적절한 곳에서 더 잘 제공받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의료체계의 분화와 통합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장기적인 정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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