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보다
| 2020.04.30
코로나19 사태와 노동운동의 역할
2020년 세계노동절을 맞이하여
노동절은 노동운동의 의미와 당면 과제를 되새기는 날이다. 올해 노동절은 특히나 그 의미가 각별하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이다. 4월 말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세계에서 20만 명이 넘는다. 감염자는 확인된 숫자가 3백만 명이다. 방역 과정에서 수억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있고, 그보다 몇 배 더 많은 인구가 빈곤층으로 추락 중이다. 미국은 봉쇄 조치 이후 단 5주 만에 우리나라 전체 취업자 숫자와 같은 2천7백만 명이 실업자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3월부터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시국에 노동운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노동자의 삶은 더욱더 위태로워진다. 노동운동이 제 역할을 분명하게 해야 할 시간이다.
2020년 세계노동절 행사는 방역 탓에 소규모 집회와 소셜미디어 활동으로 대체된다. 어쩔 수 없지만 아쉽다. 거리에 나와 투쟁할 수 없다면 지혜를 모아 토론이라도 해야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본 글에서 두 가지 토론 주제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정부 재정에 대한 노동운동의 태도이다. 위기가 심각한 탓에 방역과 경제 안정에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소위 진보진영은 지금보다 더 많은 재정을 사용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국가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재정의 토대는 노동자의 세금이다. 노동운동은 코로나19 위기가 얼마나 어떻게 이어질지 고려하여 정부 재정정책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 스스로가 할 역할에 관한 것이다. 노동조합은 요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책임의 주체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삶을 위협하는 국가적 재난 사태 속에서 노동조합 스스로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특히 민주노총과 산별노조가 이 재난에 어떤 역할을 자처할지가 중요하다. 사업장 울타리 안에서 대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기업 단위의 노동조합 투쟁으로는 사회적 재난에 대처할 수가 없다.
위기의 성격
코로나19 위기는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는다.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정부의 재정 지출 여력을 최대한 길게 유지하면서 치료제와 백신 개발 전까지 피해자 지원을 효과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다. 비유하자면, 코로나19 대응은 100m 달리기 같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체력 안배가 필요한 42km 마라톤 경주이다. 짧은 시간에 모든 화력을 쏟아붓는 총력전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전투와 생산을 병행하는 지구전이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핵심으로 하는 코로나19 방역에는 엄청난 경제적 비용이 들어간다. 방역이 건강과 경제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어서다. 감염병 창궐을 막자면 거리두기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경제를 침체시킨다. 경제침체를 막겠다고 거리두기를 완화하면 감염병이 다시 빠르게 퍼진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올 때까지 방역도 하면서 경제도 살릴 수는 없다. 국민 건강을 지키려면 국민경제 전체가 큰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한 번의 확산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이 많다. 국민경제가 감당해야 할 방역 비용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다.
코로나19 경제 대책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비용을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 핵심이다. 방역으로 매출이 급감한 기업에 특별대출을 제공하고,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감소한 노동자에게 소득과 보험을 지원한다. 한국 정부는 다섯 차례에 걸쳐 약 200조 원 가까운 대책을 발표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다. 코로나19 사망자가 치솟고 있는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재정을 지출하고 있다. 현재의 정부 지출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탱하기 위해 피해에 대한 지원, 구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기 전까지 경기부양은 언감생심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노동조합의 역할
그런데 이런 정부 대책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부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란 점이다. 경제침체로 세입은 감소하는데, 방역 피해 지원은 급증한다. 이 차이가 재정적자가 되어 정부의 빚으로 남는다. 정부의 채무 상환과 이자 비용은 당연히 세금을 통해서 조달된다. 만약 세금을 더 많이 걷지 못하면 새로 빚을 내서 이전 빚을 갚아야 한다. 경제 규모 대비 정부 빚의 비중이 증가할 것이다. 물론 정부는 민간보다 빚으로 빚을 상환하는데 제약이 덜하긴 하다. 민간과 달리 돈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무한정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막무가내로 돈을 찍어 빚을 갚으면 돈의 가치가 폭락할 수 있다. 화폐경제에서 화폐가 무너진다는 것은 경제가 무너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한국처럼 화폐 가치의 변동성이 큰 국가들은 정부 빚의 상한선이 낮다. 세계적으로 자국 화폐가 사용되어 가치 폭락의 위험이 낮은 국가들(기축통화 사용국)은 빚의 상한선이 높다. 기축통화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의 국내총생산 대비 정부 채무 비율은 30~50% 정도이다. 기축통화 국가의 채무 비중은 이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현재 한국의 국가 채무 비율은 약 40%인데, 선진국 사이에서 지난 5년간 가장 빠르게 상승했고,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고령화와 저성장으로 앞으로 가장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었다.
둘째, 사회적 거리두기의 효과는 모두가 누리는 데 반해 그 피해를 모두가 똑같이 당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정부의 지원은 당연히 사회적 거리두기로 피해를 크게 입는 시민들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피해를 누가 보고 있는지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은 사회적 피해를 확인하는 데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필요하다.
노동조합 운동은 이 둘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민주노총은 국가 재정의 제약을 고려하면서 가장 필요한 곳에 경제적 지원이 효과적으로 집중되도록 정부에 요구하고, 또 스스로가 피해를 당하는 노동자를 찾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사실 어떤 노동자가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본령이다. 정부 기관보다 민주노총이 앞서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최근 주목할 사례는 공공운수노조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직접적 타격을 입은 항공운수 노동자의 상태를 조사하고, 그들을 조직하기 위해 만든 영종특별지부이다. 민주노총은 이런 사례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피해를 보는 노동자에게는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꼼꼼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방역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체감하는 노동 현장의 제도인 노동조합이 그 방법을 찾아야 하는 책임자다. 노총 지역본부와 가맹 산별노조, 그리고 단위노조가 지역과 사업장의 구체적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조사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제1노총이란 지위는 조합원의 숫자가 아니라 노총이 하는 역할로 정해진다. 지금이 바로 그 역할을 할 때이다. 그야말로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이 절실하다.
코로나19 사태, 노동조합 혁신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민주노총은 코로나19 사태를 장기전으로 생각하고 이에 걸맞은 요구와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 공공의료 확충,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고용 극대화 등이 그런 요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장기간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다방면의 제도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 요구들은 구호를 외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보험 확대와 의료시설 확충을 위해서는 사회보험료 인상을 노동조합이 결단할 수 있어야 하고,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 고용을 대폭 늘리려면 이 부분의 노동조합들이 임금체계를 개혁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 내 임금 극대화와 조합원만의 고용안정에 주력했던 현재의 노동조합 운동은 혁신되어야 한다. 투쟁의 전투성 이전에 투쟁의 보편성이 절실하다. 노총과 산별노조보다 기업별 임단협이 우위에 있는 현재 노동조합 운동으로는 장기간의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할 수 없다.
5월 1일은 한국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후 102일이 지난 날이다. 1백일 남짓한 시간 동안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되돌아보자. 그리고 이 사태가 200일, 400일 길어졌을 경우 발생할 일들도 상상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지 토론해보자. 그리고 노동조합 운동은 그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자. 2020년 노동절, 대규모 거리 집회는 하지 못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토론과 고민이 필요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