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 2020.10.28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 배제, 문민독재의 새로운 수법 아닌가
민주당의 음모론적 세계관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타락으로 이끄는가?
10월 22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 말과 10월 26일 국회 법사위 종합국감에서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한 말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윤 총장은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면서 검찰총장을 배제하는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 위법, 부당하다고 말했다. 반면 추 장관은 장관이 총장의 상급자이자 지휘감독관이며, 윤 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 박탈이 적법하고 필요하고 긴급했다고 말했다.
윤 총장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곧 추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위법, 부당하게 행사했고 이는 정치권력이 노골적으로 검찰 장악을 실행 중이라는 뜻이 된다. 이는 전형적으로 독재 정권이 검찰을 권력의 무기로 삼기 위해 취했던 수단과 다를 게 없게 된다. 반면, 추 장관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검찰이 법무부장관으로 대표되는 행정부의 민주적 통제를 거부하면서 검찰개혁에 저항하는 반개혁세력이 된다.
이러한 대립을 그저 법률 해석을 둘러싼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의견 충돌로 볼 수 없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무엇이냐에 대한 근본적 인식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을 둘러싼 논쟁은 격렬하고, 그 파장도 아주 오래갈 수밖에 없다.
이제 문재인 정부도 후반기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숱하게 보았던 것처럼 권력의 이완이 발생하면서 권력형 부패·비리 사건도 점차 빈도나 강도가 강해질 것이다. 이와 비례하여, 정부와 여당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를 강행하며 ‘검찰개혁’을 사활적 과제로 격상시킬 것이다. 이제 문 정부의 검찰개혁이라는 문제는 문 정부 후반기를 평가하는 가장 중대한 쟁점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다시 말해, 문 정부 전반기를 평가하는 쟁점이 소득주도 성장론이나 남북관계 문제였다면 후반기는 검찰개혁이 계속 전면을 차지할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이러한 쟁점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고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냐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검찰총장을 배제하는 추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관해 우리는 관련 조항의 입법 취지라는 측면에서나, 그것이 야기하는 정치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부적절하다고 본다. 이는 ‘문민독재’로 나아간다는 하나의 표지로 볼 수밖에 없다.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
지난 7월 5일,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채널 A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을 둘러싼 이른바 검언 유착 사건을 두고 지휘권 갈등이 벌어졌을 때 2011년에 문재인 대통령이 저자로 참여했던 책을 인용했다. 그 책은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 (이하 『검찰을 생각한다』)인데, 조국 장관이 빨간 펜으로 밑줄 친 내용은 이러했다. “검찰은 당연히 있어야 할 민주적 통제를 기존 정치권의 부당한 개입, 간섭과 의도적으로 혼동시키려고 했다”, “법무부장관이 헌법과 인권에 기초해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권한이다.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정치권력의 민주적 통제의 일환이다.”
확실히 이 책은 ‘검찰개혁’의 방향 전환을 공표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검찰개혁의 방향은 중립성과 독립성, 즉 정치적 중립성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로부터의 독립성이었다. (대표적으로 1988년 검찰총장 임기제(2년)가 도입되었는데, 이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뒷받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정치권력의 민주적 통제’가 핵심 방향으로 설정된다. 이 책에 따르면 검찰이 “정치권의 부당한 개입·간섭으로부터 검찰을 지킨다는 소극적 의미의 정치적 중립을 검찰의 기득권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거부하는 적극적 의미로 변질”시켰다는 게 그 논거가 된다.
그러면서 ‘정치권력의 민주적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검찰은 본질적으로 행정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검찰이 준사법기관이라는 입장을 비판한다. 검찰이 준사법기관론에 근거해서 독립성을 주장해왔기 때문에 『검찰을 생각한다』는 그러한 논리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따라서 “검찰에게 필요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정치적 중립이고 국민과 정치권력, 법원에 의한 견제와 감시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리에는 맹점이 있다. “정치인이 검찰을 통제해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실현”하는 일이 언제나 실현 가능하냐는 문제다. 이 말은 정치권력이 항상 선의를 갖고 있어서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려 할 때 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때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위배하는지 여부를 정치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심대한 공간이 열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다른 식으로 말하면, 어떤 조직이든 간에, 독립성이 없는데 어떻게 중립성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독립성과 중립성이 어울리는 짝인가, 정치적 통제와 중립성이 어울리는 짝인가? 『검찰을 생각한다』는 이러한 명백한 문제에 대해 답이 없다.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과 검찰총장 경유제
그렇다면 검찰이 행정부라는 주장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적으로 검찰제도는 판사가 수사, 기소, 심판을 모두 담당하던 전(前)현대적 제도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 판사가 수사도 하고 기소도 하면 심판도 유죄가 나올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피고인에게 너무 불리하다는 게 그 원인이었다. 그래서 소추 이전에 사실규명(수사)과 기소의 책임은 검사가 맡고, 그 후 사실확정(심판)은 판사에게 맡기는 검사제도가 등장했다. 그래서 검사와 법원이 서로 견제하는 사법권력의 분할이 실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검찰은 재판부로부터 독립했으나, 사법권력을 분점한다는 의미에서 (준)사법기관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무부와 검찰은 행정부의 상하관계로 단순히 볼 수 없다는 윤 총장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다.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 법원이 법무부 소속 기관으로 되어 있으나, 대법원장, 법원장, 판사가 법무부 장관의 부하(部下), 즉 직책상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수 없다는 사실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검찰, 또는 검찰총장의 전횡이라는 것도 당연히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견제수단이 필요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이 검찰(총장)에 대한 최후의 견제수단으로 존재한다. 검찰의 독립성이 원칙이고,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예외인 것인데, 현재 민주당은 예외가 원칙이라고 강변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검찰청법 8조,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는 조항은 1949년의 (제정) 검찰청법에 뿌리를 둔다. (그 이전인 1947년의 검찰청조직법안은 “검사총장은 검찰권행사의 최고책임자”라고 하여 사법부장(법무부장관)이 구체적 사건을 지시하는 권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총장 경유제’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제도는 전후 일본의 새로운 검찰청법을 모델로 삼았다. 일본의 경우 책임정치의 원칙상 법무대신의 지휘권을 인정하되, 지휘권이 발동될 경우에 검찰총장이 반드시 개입하여 정당내각의 일원인 법무대신이 개별 검사를 지휘하는 식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한다는 게 입법 취지였다. 즉 책임정치와 검찰의 독립성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절충을 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자주 언급되듯이, 일본에서도 법무대신의 지휘권 발동은 오래 전인 1954년, 단 한 차례의 사례만 있다. 법무대신이 동경지검 특수부가 수사하던 뇌물 정치인의 사건을 불구속하도록 지휘했다. 하지만 당시 법무대신은 여론의 비난에 사퇴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법무대신의 지휘권 발동이 없었다.)
1949년에 한국에 이러한 모델이 도입될 때도 동일한 입법 취지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이 조항에 대한 인식을 보면, 특히 ‘오로지’ 법무부 장관만이 검찰을 감독한다는 의미가 크게 부각되었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나 다른 국무위원이 직접 검찰사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검찰이 정당의 당략에 이용되는 상황을 최대한 막아보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윤석열 총장이 추미애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 위법, 부당하다고 말한 것은,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바로 법무부장관이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검찰총장 경유제’를 무시했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도 겸임하는 셈이 되므로, 정치권력의 검찰장악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민주당의 음모론적 세계관
윤석열 총장은 대검 국정감사에서 신동근 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해 “영화 1987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신동근 의원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답변했을까?
신 의원은 김봉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옥중서신에 등장하는 A변호사와 ‘룸살롱 접대’ 의혹을 받는 검사 중 일부가 윤 총장의 측근으로 불리는 한동훈 검사장 밑에 있었다며 ‘윤석열 사단’이라고 주장했다. 윤 총장에게 라임 사건을 직접 보고해 ‘반부패부 패싱’ 논란에 휩싸인 송삼현 전 남부지검장도 “윤석열 라인이라 반부패부장을 패스하고 직접 보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윤 총장은 “도표를 보니 1987 영화가 생각난다. 라인이라는 게 뭔지 모른다. 검찰은 검찰 구성원의 비리에 대해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영화 1987에는 공안경찰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사 타깃을 미리 설정하고 도표를 만들어 라인을 먼저 그려놓고 짜맞추기 식으로 죄를 만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신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검찰권력을 지향하는 윤석열 사단이 암약하고 있고, 그들이야말로 한편으로는 검찰개혁에 저항하려고 여권을 표적수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범죄자와 향응을 즐기는 파렴치한 집단이다. 검찰집단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좀먹는 만악의 근원이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어떤 기억들을 조합하고 각색하여 민주당과 그 지지집단이 그려내는 가상적 이야기다. 악의 ‘끝판 왕’ 검찰, 이를 개혁하려다가 처절히 희생당한 노무현 대통령, 한명숙 총리, 조국 법무부장관, 그럼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영웅으로서의 청와대와 법무부장관, 여당 국회의원 등등. 이러한 이야기 모델은 가상의 적(특히 엘리트집단)을 만들어 내어 그들에 대한 원한을 이끌어 내어 이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는 인민주의 정치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가상적 이야기가 현재까지도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허상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권력과 법무부장관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검찰을 생각한다』에서도 분명히 지적하듯이, 노무현 정부에서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많은 수단이 도입되었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회가 도입되어 여론의 검증을 거치게 했다. 검찰총장을 제외한 모든 검사의 직급을 일원화고 검사동일체 원칙을 개정하여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상명하복 문화를 바꾸고자 했다. 검사보직은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대통령에게 제청하도록 했고, 검찰인사위원회를 자문기구에서 심의기구로 격상시키며, 모든 검사는 임명 후 7년마다 검사적격심사위원회를 거치도록 했다. 책은 이를 통해 검사의 중립성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과제’는 거의 모두 달성했다고 자평했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정치권력이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는 상당히 도입되었으나, 역으로 정치권력의 검찰장악을 견제할 수단이 무엇이 있냐는 문제를 심각하게 따져봐야 한다.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을 배제하는 수사지휘권 발동이 문민독재의 새로운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회운동이나 진보정당조차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정의당 대변인은 10월 27일 국회 브리핑에서 “코로나19 재난위기에서 시민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금 대한민국 국회의 국정감사가 온통 부하네 아니네 논란으로 뒤덮여 답답하다”, “대체 시민들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나”라고 말했다. 문제의 핵심을 완전히 회피하는 엉뚱한 논평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의 변질과 타락이 부패와 비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시민의 삶을 혼란과 궁핍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 무엇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타락으로 이끄는가, 사회운동은 분명한 인식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