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보다
| 2020.11.02
(전태일50) ① 한국사회 모순의 뿌리: 1970년의 위기와 전태일
(전태일 이후의 노동‧경제 50년 -우리가 풀지 못한 역사적 난제와 노동자운동의 현재적 과제) 소책자의 글들을 네 차례에 걸쳐 온라인 버전으로 공개합니다.
1970년은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 중 하나였습니다. 반공, 독재, 경제개발이라는 해방 이후 체제의 핵심 요소가 모두 위기에 빠졌던 탓이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후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는데요. 11월의 전태일 열사 항거도 이 분기점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먼저, 한국전쟁 이후 국시로 불린 ‘반공’ 체제가 큰 위기에 닥쳤습니다. 1969년 7월 발표된 닉슨 독트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당시 늪에 빠진 베트남 전쟁의 출구 전략을 찾고 있었는데요. 1969년 취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각국은 내란이 발생하거나 침략을 받으면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라며 아시아로부터의 철수를 언급합니다. 이는 주한미군의 감축도 함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주한미군을 국방력의 핵심으로 삼았던 박정희 정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이런 변화에 ‘자주국방’ 강화로 대응했습니다. 미국의 냉전 완화 전략에 남북 간 긴장 완화로 적응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러면 정권의 안위가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 장면 정부를 무너뜨릴 때 박정희 군부가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 반공에 유능한 정부였기 때문이죠. 장준하 같은 재야인사조차 반공에 필요하다며 군부 쿠데타를 지지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박정희의 자주국방 노선은 세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초래했습니다.
첫째, 산업고도화 차원에서 추진되던 1960년 후반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군수산업에 필요한 중화학공업화 전략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철강, 화학, 기계, 조선, 자동차 같은 중후장대 산업이 동시에 육성된 것인데요. 이들은 엄청난 자본투자가 필요한 데다, 선진국 기술추격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수출이 필수적인데 1970년대는 세계적 경제침체 국면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패착이었죠. 이로 인해 1979-80년 국가 경제가 한꺼번에 침몰할 뻔한 심각한 경제침체와 1997년 한국경제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국가 부도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중화학공업은 이때부터 육성된 것입니다.
둘째, 군수 주도 경제에서 정경유착이 더 심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업들은 정부가 정해준 군수 관련 산업에 투자하면 거의 공짜로 정책자금을 가져다 쓸 수 있었습니다. 기업들은 정책자금을 빌리기 위해 정권 핵심에 정치자금을 제공했습니다. 묻지마 투자를 하니 중복 과잉투자와 비리가 만연했습니다. 기업 부실도 당연히 커졌습니다. 적산불하로 시작된 정경유착이 이때부터 더욱 심화했는데요. 특히 중화학공업을 전담한 재벌의 정경유착이 지금까지도 한국경제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셋째, 저임금 노동착취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박정희의 빛나는 업적처럼 과장되어 있지만, 중화학공업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경제의 큰 결함이었습니다. 정책자금으로 덩치만 커졌지, 수익성이 높지도 않았고 국제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3저 호황 전까지는 가동률이 70%를 넘는 업종이 소수일 정도로 제대로 작동되지도 못했는데요. 박정희 정권은 이런 중화학공업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에서 노동자를 더욱 쥐어짰습니다. 1970년은 물론이거니와 1970년대 말까지도 한국의 5대 수출품 중 4개가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던 경공업이었습니다. 이들이 벌어온 수출 달러로 중화학공업 손실을 메우는 게 1970년대의 경제였던 셈입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관행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깁니다.
군수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박정희 정권은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성장에 적합한 변화보단 군사 정권의 특기인 대국민 억압을 선택한 것인데요. 1969년 9월 3선 개헌을 밀어붙였고, 1971년 12월에 ‘국가보위에관한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10월에는 유신 개헌으로 항구적 독재의 길로 나갔습니다. 전태일이 ‘바보회’를 결성하고 근로조건 개선에 목소리를 높였던 시기는 박정희가 역으로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군수산업과 독재라는 최악의 방법을 선택한 박정희 정권은 1970년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 사업을 여럿 벌입니다. 4월에는 선진국 경제기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포항제철 착공을 시작했습니다. 7월에는 경부고속도로도 착공했지요.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는 한국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후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상 당시의 정책은 1979-80년 경제 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면, 경향신문이 보도해 화제가 됐던 전태일 열사의 1970년 9월 근로조건 개선을 요청하는 노동청 진정서는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경고하는 알림음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한편, 당면 사회의 문제에 대해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것보다 자신의 정당성이나 의지를 앞세워 정책을 추진하는 행태는 문재인 정권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소득주도성장’이니, ‘한국형 뉴딜’이니 하는 정책이 그런 사례라 하겠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은 그들 스스로가 더는 말도 꺼내지 않는데요. 한국형 뉴딜도 곧 그런 운명에 처할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와 그 후예들을 정적으로 여기는 현 집권세력은, 역설적이지만, 박정희의 1970년대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태일이 분신으로 폭로했던 1970년은 반공체제, 군부독재, 경제개발 모두가 위기에 빠진 퍼펙트스톰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당시의 모순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반복해서 위기에 빠지는 중화학공업, 재벌의 정경유착,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행, 비과학적 정부 정책 등이 그러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이란 그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해결할 수는 없었던 이 문제들을 오늘날의 노동운동이 해결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책자의 뒷부분에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