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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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 연대 파업에 즈음한 지배세력의 반동

편집팀
3사 연대 파업투쟁의 의미

지난 호에서 우리는 3사 연대 파업투쟁이 기층 조합원들의 요구와 압박 속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매각 시기와 방법이 정해진 뒤, 매각일정 혹은 국회일정에 발맞추는 식의 투쟁과 기층 대중 조합원이 실리적이며, 타협적인 지도부를 압박하는 투쟁은 질적으로 다른데, 전자가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투쟁이 될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가능케 했을지 곰곰이 따져보아야겠으나, 지난 호에서 지적한 것처럼 노동조건 악화와 노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노동조합원들을 압도했다는 것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공기업 민영화가 본 궤도에 오르면서, 공기업에 대한 관리 전략이 바뀌고, 상업주의적인 방식이 적용되면서, 작업장에 대한 노동통제가 강화되고, 노동 경쟁이 격화된 것이다. 철도 노동자의 과로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처럼, 현장의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하지만, 어용 지도부는 이를 방기하거나, 개선하겠다고 약속한 투쟁마저 배신하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 민주화와 함께 민영화저지투쟁(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열망이 분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3사 연대 파업에 대한 신의가 국회일정이나 단위 사업장별 실리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정치적 각성으로 드러났다. 이 투쟁의 파괴적인 성과가 이어지기만 하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노동자 계급이 벌이는 투쟁을 일대 도약시킬 것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쟁의대상에서 민영화-사유화를 제외시키기

부르주아들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조되는 것을 가만 놓아둘 리 만무하다. 애시 당초 정부는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해외매각저지를 위한 범국민 대책위'가 결성될 때부터 민영화가 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법적으로는 민영화에 맞선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를 불법으로 단정하겠다는 말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민영화가 대세임을 확인시키겠다는 속셈이다. 총파업 직전 노사간 자율(?)적인 협상과정에서도 이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것은 유효한데, 앞뒤 적절한 해명도 없는, 정부의 일방적 공언에 불과한 이 말에 대법원은 법적 권위를 부여하였다. 총파업 다음날인 26일 대법원은 정리해고나 사업조직 통-폐합 등 기업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노조의 쟁의행위를 단체교섭 대상으로 볼 수 없으므로, (단체협약에 노사합의 전제가 있다 할지라도) 조폐창의 시위와 파업에 따른 업무방해는 불법이라며 원심을 깨고 대전지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쟁의 대상으로 하는 일체의 행동을 금하는 판례로 남을 텐데, 이는 헌법에 명시된 단체행동권을 정면 부정하는 것일 뿐더러, 노동법에 명시된 정리해고에 대한 제한 규정마저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노동자의 권익을 밝힌 경우) 노동법보다 우선하는 노사간 단체협약마저 무시한 대목에서는 아무리 법이 부르주아의 정당화 기제라 하지만 해도 너무한 것이다. 대법원이 법보다 정치적 판단을 앞세운 것이다.

3사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붙이는 책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1일 가스노조, 25일 발전노조에 대해서 곧바로 직권중재에 회부하고는 15일간 쟁의행위를 금지시켰다. 직권중재제도가 노동3권을 명백하게 침해하고 있어서 위헌 제청으로 심리 중이지만, 그렇다고 효력이 중지된 것도 아니다. 이 마당에, 그들이 고상하게 법적 체면을 따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한편, 민영화를 쟁의대상에서 제쳐놓고 '자율'이라는 명목으로 노사간 자율 협상을 강조했는데, 이는 민영화 쟁점을 '물타기'하여, 단위사업장간의 실리적 조합주의를 부추기겠다는 의도이다. 노동조합의 투쟁목표가 단위사업장의 실리적 목표에 한정시키는 것은 공공부문 노동자의 연대 투쟁을 무너뜨리고, 대외적으로는 집단이기주의로 내몰려는 속셈인 것이다.


공공부문 노동을 공적 서비스로 환원시키기

그러나 법적 강제 조치보다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 것은 '국민·시민을 볼모로 하는 파업'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99년 지하철 파업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었던 이 이데올로기의 핵심 쟁점은 공공 기능을 공적 서비스/공적 부조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복지의 부재는 공적 서비스의 불균등성을 낳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회 복지를 베풀 물적 토대가 취약한 한국의 경우, 복지란 여성과 공적 기능을 담당하는 노동자에게 공적 서비스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다. 부르주아 언론은 이 같은 방식을 오늘날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들이밀고 있다.

한 술 더 떠서, 국가의 비효율성을 공공부문 노동력의 비효율성 탓으로 돌리고, 그리하여 민영화만 이루면 대국민 서비스가 향상될 것처럼 한다. 결국, 공공부문 노동자가 파업을 한다는 것은 공적 서비스 제공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고, 공적 서비스를 삭감하는 당사자가 노동자라는 본말이 뒤집힌 상황을 연출한다. 정부는 물론 시민마저도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의 노동3권(특히 단체행동권)을 부정하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공적 서비스를 둘러싸고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것도 바로 이 탓이다.

이것이 얻고자하는 목표는 간단하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공익·공적 서비스의 제공자라는 인식 속에서 이 같은 악순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르주아는 사소한 농간으로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파업저지, 민영화지지)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자중지란에 빠지게 한 것이다.


사유화-민영화와 3사 연대 파업투쟁

구조조정으로 혹은 민영화로 경제위기를 돌파해보겠다는 그들의 야심 찬 계획이란 경기회복도 아니고, 경제 부흥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민영화의 쟁점이란, 그들이 선전해대는 공기업의 비효율성도 아니요, 막대한 정부재정적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거시적으로 노리는 것은 매각조건의 충족에 따른 국가 신인도의 향상과 그에 따른 주식시장 부양이고, 주식시장의 부양에 따라 매각 조건을 좀더 유리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노동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통해 각종 시세차액을 노리는 것이다.

3사 연대파업·노동조건 악화를 둘러싼 투쟁과 결합된 사유화 저지 투쟁으로 인해, 부르주아들의 목표는 곤란에 빠질 것이 틀림없다. 불행한 일은 노동조합 지도부보다 부르주아들이 이를 먼저 깨닫고 조직적으로 방해한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조합원이 24일 가스, 27일 철도의 노사합의를 속임수로 보고, 위원장 이하 지도부 및 집행부를 불신임하게 된다면, 3사 연대 파업이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흐름이 멈추지 않는 한, 사유화(민영화) 저지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S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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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재생산 박근혜 여성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