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보다
| 2021.02.05
민주노총 2021년 사업계획, 전면 조정이 필요하다.
75차 정기대의원대회 사업계획안의 문제점
오늘 10기 민주노총의 첫 대의원대회가 개최된다. 대회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당연히 사업계획을 확정하는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민생 위기가 극심한데,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실정은 눈뜨고 지켜보기 어려울 정도다. 모든 노동자의 노동조합을 자임하는 제1노총의 역할이 필요할 때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 제출된 사업계획안(이하 계획안)은 매우 실망스럽다. 정세 인식에는 오류가 많고, 투쟁 방향은 모호하며, 사업계획에는 냉철한 판단 대신 의지만 넘쳐흐른다. 계획안은 일부 수정이 아니라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계획안의 정세 인식부터 보자. 계획안의 정세를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은 코로나19 대응 실패와 경제성장 둔화로 세계 패권을 잃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고도성장을 재개하며 힘을 키우고 있고, 북한은 자력갱생과 핵무력 완성으로 미국에 맞서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개혁에 매진하지 못해 수구보수세력이 재집권을 넘볼 여지를 줬다. 한국 사회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자산 거품과 투기가 커지고 있는데, 민주노총은 현 정세가 기존 세력의 한계가 드러나는 전환적 시기이므로 진보적 정치세력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민중적 항쟁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정세 인식은 현 집행부의 반미자주 세계관에 맞춰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췄다는 점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중국과 북한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없다는 점이 단적인 예다.
경제, 사회 개혁 대신 시진핑 독재 권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은 겉으로는 고도성장을 재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부채 위기, 불평등 심화, 시민 억압, 배타적 민족주의 등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태다. 북한은 김정은 독재 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고집하다가 나라 전체가 붕괴 위기에 처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북한의 무역이 제로에 가까워질 정도로 고립이 심각해진 상태이다. 이렇게 중국과 북한은 미국 패권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에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지속 가능한 체제도 아니다. 계획안은 북한 핵무장을 은연중에 가치 중립적으로 인정하고 있기도 한데, 남북한의 공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핵무기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모호한 태도 역시 문제이다. 계획안은 문재인 정부가 개혁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사실 문 정부 4년은 열심히 개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개혁의 방향과 목표 자체가 틀려서 실패한 것이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개혁을 자처하는 현 정부가 보수 정부만도 못한 점도 많았다.
집권세력은 시민 모두에게 공정한 사법을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법개혁을 추진했다. 선거 개입, 검찰 사법 방해, 공공기관 낙하산, 부동산 투기, 사모펀드 비리 등 보수세력 이상으로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모습도 보였다. 최저임금1만원과 공공부문 정규직화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으로 ‘을’들 간의 갈등만 키웠다. 북한 핵 폐기를 우회하면서 겉만 화려한 대북정책을 쏟아내다 남북관계를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만든 것도 대표적 실패 사례이다. 정부와 여당이 하려던 것은 애초부터 실패가 예정되어 있던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2021년의 정세 인식은 문재인 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국 사회 개혁의 방향과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계획안은 마치 문재인 집권 첫해의 복권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계획안의 진보정당 또는 대안적 세력은 문 정부 첫해 과제를 잘 추진하는 세력이다. 그리고 이러다 보니 ‘민중 항쟁’을 조직하자면서,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는 항쟁을 만들자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계획안의 요구는 문 정부의 ‘노동존중’ 공약의 실행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계획안의 이러한 정세 인식 오류와 모호함은 핵심사업계획의 부실함으로 이어진다. 2021년 계획의 핵심은 ‘110만 총파업’이다. 그런데 2022년 3월 대선을 앞두고 판을 흔들어보자는 의지만 있지,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지금까지 투쟁이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판을 흔들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민주노총이 지금까지 해왔던 요구들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총파업 계획은 대선 반년 전이라는 시기적 필요만 있지 “왜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욱이 총파업의 핵심 과제인 ‘불평등 체제 타파’에서 민주노총 스스로가 변화해야 할 부분이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은 점도 치명적 결함이다. 한국 사회 불평등은 서울 아파트로 대표되는 자산 격차도 원인이지만, 이중노동시장으로 이야기되는 임금과 고용의 양극화도 중요한 원인이다. 민주노총 조합원 상당수는 양극화의 상위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재벌과 정부에 요구하는 것과 함께 조직 노동자 스스로가 임금과 고용의 연대를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 민주노총이 이중노동시장 해소를 위해 전체 노동자의 임금 테이블을 만든다고 상상해보라. 현 조합원의 임금이 평균 또는 표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평등한 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위 계층의 노동자 역시 일정 부분 성찰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계획안은 청년 사업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는데, 노동운동 혁신을 고려하지 못하는 결함은 이 사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청년들이 노동조합을 외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조직 노동자가 의도하지 않게 청년의 좋은 일자리를 제한하는 기득권으로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의 분단선은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 간의 분단과도 겹쳐져 있다. 청년을 상대로 조직화와 선전만 강화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기존의 조직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청년 조직화는 임금과 고용을 세대에 걸쳐 연대할 제도적 개선책을 찾는 노력과 함께 가야 한다. 하지만 계획안은 어떤 구석에서도 이런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
이번 정기대의원대회에서는 부위원장 선거가 있어 계획안은 대략의 방향만 검토되고 나머지는 중앙위원회로 위임된다. 이런 까닭에 자칫 대의원대회에서 계획안이 졸속으로 토론될까 우려된다. 대의원들은 계획안을 철저하게 심사해야 한다. 계획안은 그 대략의 방향조차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대의원들은 정세 인식, 투쟁 방향, 사업계획 모든 부분에 있어 대대적 변경을 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