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1999.11.05

자료 읽기 - 프랑스 텔레콤 민영화저지 투쟁에서의 교훈

편집부
이 글은 프랑스 AC!(실업자행진) 활동가이자, ATTAC(금융거래과세연합)의 대변인인 크리스토프 아귀통(Christophe A guiton)이 1997년 10월 20일 작성한 글이다. 프랑스 텔레콤 민영화를 둘러싼 투쟁과 타협, 총파업과 분열의 과정은 민영화와 해외매각이라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1997년 10월 20일, 프랑스 텔레콤(France Telecom, 프랑스의 국영 전기통신사)의 주식이 파리와 뉴욕의 주식시장에서 동시에 매각되었고, 이것은 프랑스 텔레콤 자본의 거의 1/4에 해당된다. 지난 10년 이상 동안 민영화에 반대해왔던 투쟁의 일정한 패배를 의미했다.
프랑스 텔레콤은 PTT의 공공관리체계 안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고, 텔레콤 종사자들은 공공서비스 분야로 분류되어 공무원의 지위에 있었다. 민영화 반대 투쟁은 1987년에, 1993년에, 그리고 1997년에 촉발되었다. 민영화를 반대하는 근거는 크게 보아 두가지이다. 첫째, 노동자 지위의 방어이다. 공무원으로서의 지위는 고용 보장을 의미하며, 위로부터의 압력에 대한 자기보호 수단들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공공서비스 부문의 방어이다. 이 개념은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소득과는 상관없이 공공서비스 혜택을 공평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공공부문의 존재와 역할은 평등을 보장하는 수단인 것이다. 1987년, 1993년 10월 12일(모든 직종에서 75%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가했다), 1995년 5월 30일(65%가 참가했다), 그리고 1995년 11월과 12월, 많은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통해 민영화 반대투쟁이 전개되었다. 프랑스 텔레콤 노동자들은 이 속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정부는 민영화 실행 결정을 보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적 상황은 1995년 우파가 대선 및 총선 모두에서 승리한 이후 급격히 변화했다. 1996년 봄부터 프랑스 정부는 텔레콤의 부분 민영화 계획에 돌입했다. 이 상황을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프랑스 노조의 상황이었다.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조합이 다원적으로 존재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대다수의 기업에서 노동자들은 여러 노조들의 후보자 중 자신의 대표를 선임한다(이는 협상단 선거[profe ssional elections]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텔레콤에는 5개의 주요 노조가 존재한다. 첫째는 협상단 선거 1차 투표에서 29%의 득표를 기록한 노동총동맹(Confederation General du Travail, CGT)이다. CGT는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방어노선을 지닌 프랑스 최대의 노총이다. CGT는 1995년 11월-12월의 총파업에도 결합했으며, 강경한 반민영화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둘째는 독립 노조연합인 '연대/단결/민주주의'(Solidaires Unitaires Democratiques, SUD)로서, 이는 CF DT로부터 축출된 일부 좌익 노조 활동가들에 의해 1989년에 결성되었다. SUD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들(즉 실업에 대항하는 투쟁, 1997년 7월의 유럽 암스테르담 시위, 불법 체류자에 대한 지지 등등)과 결합되어 있다. SUD는 협상단 선거 결선투표에서 27%를 얻었다. SUD는 11월-12월 총파업에도 참여했으며, 어떤 형태의 민영화에도 강고하게 반대하고 있다. SUD는 PTTI에의 참가를 신청했지만 PTTI 회원단체인 CFDT와 FO는 이들의 참가에 반대하여 이를 동결했다. 셋째, 프랑스민주노동자연맹(Confederation Francaise Des Travailleurs, CFDT)으로서, 프랑스 제2의 노총이다. CFDT는 협상단 선거 결선투표에서 17%를 얻었다. 정치적으로 온건한 노조로 인식되고 있으며, 프랑스 텔레콤 경영진의 특권적 협상 상대였다(현재도 그렇다). 넷째는 '노동자의 힘'(Force Ouvr iere, FO)으로서, 프랑스 제 3의 노총이다. 이들은 프랑스 텔레콤에서 14%의 지지를 얻었다. 이들의 입장은 CFDT와 SUD 및 CGT의 중도노선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그리스도교 노동자연맹(Confederation Francaise des Travail leurs Chritiens, CFTC)으로서, 투표에서 5% 이하를 얻었다. 1996년 7월 정부와 프랑스 텔레콤 경영진은 이들 노조 중 하나와 "타협"에 도달했다. "거래(the deal)"를 받아들인 노조는 FO였다. 이들은 프랑스 텔레콤의 부분 민영화를 허용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법률상 정부 보유주식은 최소 51%로 규정되었고 기존 노동자들의 공무원으로서의 지위도 유지되었지만, 신규 노동자들이 민간부문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 결과로 인해 민영화 반대 투쟁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던 프랑스 텔레콤 노동자들은 급격한 사기저하를 보였고, 투쟁력이 감소되었다. 결국 정부의 중단기적일 뿐인 보장에 '만족'하는 노동자들과, 민영화라는 전지구적 경향에 대해(사실 1987년 이후 유럽과 전세계의 대다수 전기통신 기업들이 민영화되었다. 프랑스 텔레콤은 그들의 투쟁으로 인해 몇 안되는 공기업 중 하나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환멸을 느끼는 노동자들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또 FO의 행동에 대해 분노한 노조들(적극적으로 민영화 반대 투쟁을 전개했던)과 '타협'에 영합하던 노조들 사이에도 분열이 발생했다. 1996년 6월, 단지 노동자들의 1/3만이 파업을 벌였고, 장기 파업행 위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더 적었다. 이것이 바로 우익 정부가 의회를 통해 민영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1997년 6월 총선에서 좌파 정당들이 뜻밖의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고, 사회당은 민영화법을 폐기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이들의 약속은 붉은 장미(사회당 선거의 상징)가 시들 듯 급격히 수명을 다했다. 사회당은 1997년 9월에 민영화 계획을 재가동시켰고 입법화를 강행하여 주식매각을 완수했다. 이미 정부와의 '타협'이라는 악수로 자신의 생존권을 팔아먹은 노동자들은 그 이후 한 번도 공식적인 의견조차 개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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