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 2021.03.26
파리 코뮌, 다시 생각해보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타락한 민주정
파리 코뮌 150년에 부쳐
파리 코뮌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 존재했던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였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만 유지됐지만, 파리 코뮌이 역사에 남긴 흔적은 깊고 넓다. 150년이 지난 지금도 대안적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마다 사례로 소개될 정도이니 말이다. 더욱이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표현되는 사회주의 모델의 원형이기도 하다. 파리 코뮌 150년을 맞아 그 교훈을 짧게 되새겨보고자 한다.
왜 프랑스에서는 백 년 가까이 혼돈이 이어졌나?
파리 코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혁명의 맥락을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지속 가능한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프랑스혁명은 인권선언이 낭독된 1789년 대혁명에서 시작해 제3공화정 정부가 수만 명의 파리 시민을 학살한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끝났다. 파리 코뮌은 백여 년간 진행된 프랑스혁명의 참혹한 마침표였다.
프랑스혁명의 시작은 루이 16세 정부의 재정파탄이 계기가 된 1789년 대혁명이었다. 그런데 혁명의 결과로 건설된 제1공화국은 자코뱅 독재를 거쳐 빨간 모자를 쓴 황제(나폴레옹 1세)의 등극(제1제정)으로 귀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왕정복고가 이뤄졌고,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이 또 타도되어 다시 공화국(제2공화국)이 건설됐다. 하지만, 제2공화국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제2제정)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1870년 7월 정부 실정으로 악화한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즉흥적으로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전쟁 2개월 만에 자신이 포로로 붙잡히고 만다. 분노한 파리 시민이 들고일어나 제정을 타도하고 또다시 제3공화국을 세웠다.
그렇지만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부패와 무능 속에서 파리 시민은 130여 일을 포위된 상태로 싸워야 했으니 말이다. 파리가 굶주림에 지쳐 항복한 후 1871년 2월 제3공화국의 정식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에서는 왕당파가 대승을 거뒀고, 왕정 시절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티에르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왕당파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독일과 굴욕적인 강화협약을 체결했다. 당연히 무장을 풀지 않았던 파리 시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시민들의 항의가 폭발하자 티에르는 파리를 포기하고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독일의 방위권에 있던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왕당파, 부르주아 공화파 가릴 것 없이 지배계급 모두가 도망가버린 파리는 무정부 상태였다. 이런 악조건에서 3월 18일 노동자들이 주도하여 파리에 새로운 정부를 건설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다. 코뮌은 지배계급이 망쳐놓은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민주적 제도들을 만들어 냈다. 또한 지배자들이 포기한 조국을 방위하기 위해 총도 들었다. 하지만, 조직된 군대의 공격을 의지로만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 베르사유 군대는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총공세를 퍼부었고 2만 명 사살, 4만 명 구속, 1만 명을 추방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제3공화국 정부는 이렇게 자국의 시민을 학살한 후 프랑스 GDP의 20% 가까이나 되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독일에 지급했다.
파리 코뮌은 프랑스 근대화의 결함을 폭로한다. 앞서 봤듯 파리 코뮌은 혁명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에서의 선택이었다. 19세기 내내 프랑스 정부는 반복해서 무능, 전쟁, 부패로 국가 재정을 고갈시켰다. 더욱이 지배계급은 보수파(군주제), 중도파(입헌군주제), 급진파(공화제)로 나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권력 쟁투에만 집중했을 뿐, 정부의 권력을 나누고 통제하고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제도 개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근대적 정치체제를 꾸준하게 발전시킨 영국과 비교해봐도 프랑스 지배계급의 무능은 도드라져 보인다. 영국의 경우 의회주권,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투표권 확대 등을 반혁명이나 숙청 없이도 점진적으로 이뤄냈다. 심지어 프랑스 제1공화국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미국 공화정도 위태로웠던 적은 있었지만 뒤집힌 적은 없었다. 프랑스의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기준에서도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던 셈이다. 이런 정치체제의 불안정은 프랑스의 경제적 발전을 더디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1688년 대비 1871년 1인당 GDP를 보면, 영국은 160% 증가했는데 프랑스는 77% 증가에 그쳤을 뿐이었다. 프랑스 경제는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독일에도 뒤처졌다. 파리 코뮌의 배경이었던 독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패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대안적 정부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파리 코뮌
한편, 파리 코뮌은 “노동자들의 파리는 그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된 선구자로서 영구히 찬양될 것입니다.”라고 마르크스가 상찬했듯,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시민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 제도들을 여럿 만들어 냈다. 무능한 부르주아를 대신해 노동계급이 얼마든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먼저, 파리 코뮌에서는 정부의 상비군이 폐지되고 인민 무장이 시행됐다. 이제까지 정부의 군대는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을 억압하는 강력한 억압적 장치였다. 인민 무장(보편적 병역의무제와 다르다)은 계급 지배를 재생산했던 폭력적 국가 장치를 해체해 보려는 시도였다. 다음으로 정부의 거의 모든 공무원이 선거로 선출됐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다. 또한 인민의 대표들은 법을 만들고, 집행하며, 위법을 처벌하는 과정을 하나의 활동하는 기구로 통합했는데, 말하자면 시민의 광범위한 참여가 보장되는 실질적 대의제를 통해 관료와 엘리트의 지배를 보장할 뿐인 형식적 삼권분립을 넘어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뮌의 경험을 《프랑스 내전》과 《공산주의자 선언》(1872년 신판)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구체적 형태로 정식화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국가 장치들을 파괴하는 권력이다. 즉 진정한 다수(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를 확립하는 권력이다. 파리 코뮌은 부르주아 독재를 위한 대표적 국가 장치였던 상비군과 관료를 인민 무장과 인민 대표자들로 대체했다.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에 《국가와 혁명》을 발표해, 러시아혁명이 파리 코뮌을 뒤따를 것임을 천명했다. “코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시도된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타도하려는 최초의 시도이며, 타도된 국가기구를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해야 하는 ‘최종적으로 발견된’ 정치형태이다.” 레닌 이후 파리 코뮌은 역사적 사례나 이론적 대상을 넘어 현실의 사회주의가 추구해야 하는 혁명 모델로 이해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0세기 사회주의의 발전 과정은 파리 코뮌의 이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인민 무장은 인민군이란 이름의 거대한 정부군으로 대체됐고, 인민 무장이란 명분을 가진 군대가 역설적으로 계엄 상태 비슷하게 평상시에도 국내에서 인민을 통제했다. 인민 대의제는 노동자계급의 대표를 자임한 공산당의 대의로 대체됐고, 공산당은 삼권과 관료 모두를 장악하여 역설적으로 거대한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어 냈다. 부르주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당 독재라는 퇴행적 형태로 강화된 것이었다. 196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는 파리 코뮌이 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했던 의미로 부활해 국가 장치화된 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후기의 핵심이었던 상하이인민공사는 파리 코뮌의 재현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런 문화대혁명조차 군대의 개입, 공산당의 강화, 도시 노동자 조직의 와해라는 역설적 결과로 끝나고 말았고, 이후 파리 코뮌은 역사의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20세기의 파리 코뮌의 후예들은 부르주아 독재라고 비판받은 자유민주주의보다도 못한 결과를 낳았을까? 두 가지 정도를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수임자를 자처했던 20세기 공산당들의 문제이다. 소련부터 중국까지 각국의 공산당들은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 장치의 파괴가 아니라 강화를 선택했다. 내전, 외세의 압력, 식량 부족 같은 혁명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급한 상황이 기존의 군대와 관료제를 강화했고, 이렇게 강화된 국가 장치 속에서 이를 지배하던 공산당이 국가와 하나가 되어 독재를 재생산했다. 사실 짧은 기간 존재했던 파리 코뮌에는 이행을 지속하며 동시에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예로 입법, 행정, 사법을 통합하는 인민 대의제 기관이 독재 또는 대중 영합적으로 타락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제도는 무엇인지, 소환제의 오남용이 초래할 혼돈을 방지할 제도는 무엇인지 파리 코뮌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공백은 마르크스와 레닌에게서도 채워지지 않았고, 현실의 사회주의 혁명은 이 공백은 당의 독재로 채워 버렸다.
둘째,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토대에 관한 문제이다.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서문에서 코뮌에서의 경제적 대안이 확실하지 않았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경제적 토대가 국유화-계획경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공산당 독재라는 정치체제에 적합한 경제였을 뿐인데, 생산에서 인민의 참여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단지 공산당이 대주주인 국유기업이 노동자 모두를 고용하는 체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공산당 독재-국유화-계획경제의 조합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법인기업-시장경제보다도 열등한 것이었다. 미국과 체제 경쟁하던 소련의 몰락과 21세기에도 이어지는 러시아 경제의 낙후성이 이를 방증한다.
2021년의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
지금까지 파리 코뮌의 교훈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봤다. 하나는 프랑스혁명이란 맥락에서,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원형이란 의미에서. 두 가지 모두 오늘날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이 있다.
첫째, 전임 대통령이 초법적 권력 남용으로 탄핵을 당한 후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마저 ‘적폐청산’이란 명분 아래서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어서다. 프랑스혁명이 혼돈을 계속한 이유는 로베스피에르, 루이 나폴레옹, 부르봉 왕가, 루이 보나파르트, 티에르에 이르기까지, 공화정, 제정, 왕정을 가리지 않고 절대적 권력에 집착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2021년의 한국 사회는 프랑스혁명의 결함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식이라면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1871년 파리의 대학살로 마무리됐듯, 2016년 촛불시위가 어떤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둘째, 사회운동 세력들이 집권 정당, 전지전능한 정부, 국유화 프로그램 같은 실패한 전략을 반복하고 있어서다. 국가 장치의 파괴를 도모했던 파리 코뮌의 후예들은 결과적으로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고 말았다. 계급 지배를 재생산하는 국가 장치의 파괴가 옳다고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어떻게 당 또는 특정 개인(가문)의 독재로 타락하지 않을지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국가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를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21세기의 사회운동은 여전히 각종 상황을 이유로(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가 그러했듯) 거대한 국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파리 코뮌 150년, 사회운동은 지배계급의 무능이 초래할 비극을 방지하며, 동시에 코뮌이 가진 공백 역시 해결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떠안고 있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해는 길은 세계를 변혁하는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21년의 한국 사회는 1871년의 파리 코뮌과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