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지상중계 | 2021.04.06

핵무기가 불법화된 세계에서 맞은 첫 번째 비키니 데이

2021년 일본 3·1 비키니 데이 대회 참가기

사회진보연대
지난 2020년, 다양한 온라인 국제회의에 모인 활동가들은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대응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한 흐름의 일환으로, 일본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이하 ‘원수협’. 원수폭은 핵무기의 종류인 원자폭탄·수소폭탄의 줄임말)이 지난 2월 28일 주최한 ‘3·1 비키니 데이’ 온라인 대회에 사회진보연대를 포함하여 한국·미국·필리핀·영국 등의 활동가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올해는 지난 1월 22일, 핵무기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사상 최초의 국제조약인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성공적으로 발효한 만큼, ‘핵무기가 불법화된 시대’를 맞이하여 어떻게 전 세계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로 나아갈 것인지가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이 글은 비키니 핵실험이 촉발한 반핵평화운동의 역사와, 2021년 비키니 데이 대회에서 논의된 국제 반핵평화운동의 현 시기 의제를 소개한다.
 

비키니, 수영복이 아니라 비극적인 핵실험의 역사

 
‘비키니’(Biniki)라고 하면 보통 수영복을 떠올린다. 이 명칭이 사실 반핵평화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던 ‘비키니 핵실험 사건’에서 나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원수협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비키니 데이의 유래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1954년 3월 1일 미국은 서태평양 마셜제도 비키니 환초에서 실전용 수소폭탄 실험(일명 ‘브라보’ 실험)을 실시했다. 수소폭탄은 수소를 재료로 한 핵융합을 이용한 핵무기로, 우라늄·플루토늄에 의한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폭탄에 비해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인다. 브라보 실험에 쓰인 수소폭탄의 위력은 15메가톤으로, 불과 9년 전인 히로시마 원폭의 1000배가 넘었다. (그래서 이 실험만큼 ‘충격적’이란 의미에서 당시 새롭게 등장한, 노출이 많은 수영복에 ‘비키니’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인근 섬의 주민들은 대거 피폭되어 평생 고통 속에 살았고, 비키니 환초는 아직도 방사능이 너무 강해 인간이 주거할 수 없다.
 
1954년 3월 1일 비키니 핵실험의 사진. 이때의 폭발 위력은 그때까지 인류가 목격한 것 중에 가장 컸고, 오늘날까지도 역대 5번째, 미국의 핵실험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남아있다.
 
이때 실험으로 생긴 ‘죽음의 재’, 즉 고방사능 낙진이 폭심지로부터 160km 가량 떨어진 일본 어선 제5 후쿠류마루 호에 탄 23명의 선원을 피폭시켰다. 2주 후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모든 선원이 급성 피폭 증상을 보였다. 죽음의 재는 기류를 타고 북반구 전역으로 퍼졌고, 해양의 방사능 오염은 해류를 통해 태평양 전역으로 퍼졌다.
 
이 실험의 배경은 핵무기 경쟁에서 소련에 뒤쳐졌다고 오인한 미국이 수소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한 데 있다. 미국은 1954년 3~5월 ‘캐슬 작전’(Operation Castle)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수소폭탄 실험(총 6회)을 마셜제도에서 실시했다. 그 시작이 바로 1954년 3월 1일의 실험이었다.
 
일본 정부는 비키니 사건의 여파를 빠르게 종결하길 원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실태 조사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67년이 지난 오늘에도 구체적인 피해 규모 해명은 요원한 상태에 있다. 당시 이는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 내에 이미 수십 만 명의 피폭자가 있었으나, 비키니 사건이 일어난 1950년대 중반까지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공개적인 피해 조사를 받지 못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키니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된 일본 반핵평화운동

 
비키니 핵실험을 포함해 당시 연달아 일어난 강대국들의 핵실험은 핵전쟁 발발로 인해 인류가 절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높였고, 핵실험으로 인한 민간인 피폭과 환경 파괴 문제를 중대한 이슈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반핵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했다.
 
비키니 사건은 특히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에 전환점이 된다. 미군정과 일본 정부가 원폭 투하 문제를 덮고자 한 까닭에, 원폭의 참혹함과 피폭자들이 받은 고통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내에서도 널리, 상세히 알려진 상황이 아니었다. 생존 피폭자들은 생활고와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었다. 피폭의 실태를 알리거나 ‘반전’ ‘반핵’을 요구하는 활동은 ‘빨갱이’로 찍혀 탄압받았다.
 
비키니 사건은 이렇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10년 가까이 억눌려있던 피폭자들의 목소리와 반핵평화 요구가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원수폭 금지 운동이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조직되어, 당시 유권자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3158만 여 명이 원수폭금지전국서명에 참여했다. 1955년 8월,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개최되었고, 9월에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일본원수협)가 결성되었다. 이듬해 제2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는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일본피단협)가 결성되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3월 1일 비키니 데이를 전후로 한 대회 주간은 일본 반핵평화운동에서 8월 원수폭금지세계대회와 더불어 중요한 주간으로서, 활동가들이 상반기 활동 방향을 논의하고 기획하는 장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에도 비키니 데이 대회 자체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지만, 대회 전후로 원폭 사진·그림 전시회, 피폭 체험 듣기·이야기 전하기 등 다양한 활동이 각지에서 진행되었다.
 

핵무기금지조약이 발효된 지금, 반핵평화운동의 과제

 
올해 비키니 데이 대회의 전반적인 기조는 일본원수협 야스이 마사카즈 사무국장의 기조 발제에 잘 담겨있다. 핵심은 ‘핵무기금지조약이 발효된 지금, 반핵평화운동의 과제는 무엇인가’다. 발제는 이번 비키니 데이 대회는 핵무기금지조약의 발효라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을 되새기며 시작되었다. 핵무기금지조약의 발효는 인류가 처음으로 핵무기를 불법화하는 국제법을 손에 넣게 되었다는 의미다.
 
미국을 비롯한 핵무기 보유국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핵무기금지조약은 세계의 보편적 규범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에만도 캄보디아, 필리핀, 코모로가 핵무기금지조약을 비준하여 지금까지 54개국에서 비준되었다. 지난해 제75차 UN총회는 UN 회원국의 3분의 2를 웃도는 130개국의 찬성으로, 핵무기금지조약의 서명·비준을 호소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비준국이 늘어날수록 핵무기금지조약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핵무기 보유국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야스이 사무국장은 핵무기가 없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계 반핵평화운동, 특히 (미국, 영국과 같은) 핵무기 보유국이나 (한국, 일본과 같은) 핵우산국에서 활동하는 반핵평화운동, 시민운동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각국에서 자국의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추진하는 연대행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특히 올해에는 작년 4월 개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발발로 올해 8월로 연기된 제10차 NPT(핵무기비확산조약) 평가회의와, 평가회의에 맞춰 뉴욕에서 열릴 국제 반핵평화운동의 공동행동에 결집하자고 제안했다. 목표는 핵무기금지조약이라는 새로운 국제규범을 축으로, 핵무기 보유국에 NPT 6조의 ‘핵군축’ 의무와 지난 NPT 평가회의의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결의 이행을 압박하는 것이다.
 
일본 내부 정세에 대해서는, 일본이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면 이를 지렛대로 하여 북한, 중국, 러시아에 핵능력 강화 정책 포기를 촉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원수협은 일본이 한시바삐 핵무기금지조약을 서명·비준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려는 노력은커녕 오히려 방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스가 총리는 정기국회 시정연설에서 한 마디도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고, 조약 참여 의사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 서명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일본 정부가 제안한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한 공동 행동과 미래지향 대화 결의안’이 작년 12월 7일 UN총회에서 채택되었으나, 찬성국(150개국)은 전해보다 10개국이 줄어든 반면 기권은 14개국 증가했고, 공동 제안국도 56개국에서 26개국으로 격감했다. 결의안에 핵무기금지조약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발제는 일본 정부가 핵무기 철폐를 이야기하면서 자국은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논리의 파탄이며, 실상은 핵무기 보유국의 대변자일 뿐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에 ‘일본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의 서명·비준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으로 압도적인 조약 가입 추진 여론을 조성하는 것,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요구하는 지자체 의견서 채택을 전체의 과반수(364개가 더 필요)로 확대할 것을 올해 핵심 활동 계획으로 밝혔다. (설문조사에서 일본 시민의 72퍼센트가 일본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참여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지금까지 일본 내 556개 지자체가 정부에 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했다.)
 

한일 반핵평화운동의 공동 과제

 
사회진보연대는 핵무기금지조약 발효 시대의 한일 양국 반핵평화운동의 공동 과제를 중심으로 발표했다. 최근 미국은 미중관계를 ‘전략적 경쟁 상태’로 공식화했다. 이와 같이 미중관계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어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인데, 이는 ‘미국 군사주의 비판’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다. 중국이 국가발전전략으로 제시하는 ‘중국몽’, 이를 뒷받침하는 ‘강군몽’(强軍夢)과 ‘일대일로’ 정책이 중국의 군사적 패권 강화의 의도를 명확히 띄고 있다는 것을 비판해야 한다. 미러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이 폐기된 지금, 미국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포괄하는 핵군축 논의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축소·중단과 북한의 핵·장거리 미사일 실험 중단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다. 따라서 군사적,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킬 뿐인 대규모 한미연합군사훈련 재개 시도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2월 28일 발표 이후 한미군사훈련은 규모를 축소하여 진행되었다.)
 
한편 북한의 핵능력은 남북, 북미대화가 시작된 2018년 이래로도 계속 강화하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8차 당 대회에서, 전술핵무기 개발을 최초로 지시했다. 전술핵무기는 미국을 목표로 하는 전략핵무기와 구별되는 것으로, 한국과 일본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북한이 최근 공개한 전술 미사일이나 방사포 등에 핵탄두를 탑재하는 것이 전술핵무기 개발이다.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 시민을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실험 중단은 대단히 시급한 요구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진보연대는 한일 사회운동이 모든 핵무기에 대한 단호한 반대를 원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 일본의 평화헌법과 비핵3원칙을 축으로 하여, 미국과 중국에 갈등 고조와 군비경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고, 북한에 담대한 비핵화를 촉구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한 조치들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지렛대로서 한국과 일본의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추진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외에도 일본 각지의 활동가들의 다양한 활동 보고와 해외 활동가들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 중 미국, 영국, 필리핀 활동가의 발표 내용을 소개한다.
 

핵무기 불법화를 환영하는 미국 전역의 노란 현수막 물결

 
미국 오크리지환경평화연합(OREPA)의 랠프 허치슨 코디네이터는 핵무기금지조약 발효 후 미국의 상황을 소개했다. 테네시 주 오크리지는 미국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우라늄 농축이 이루어진 곳으로, 현재에도 핵무기 생산 시설(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이 가동되고 있다. 오크리지환경평화연합은 이 시설에 반대하는 풀뿌리 활동을 바탕으로, 핵무기 철폐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핵무기금지조약이 발효한 날, 미국 전역에서 "2021년 1월 22일부터, 핵무기는 불법이다"란 현수막과 함께 실천행동이 있었다. 핵무기를 연구하는 로스 앨러모스, 로렌스 리버모어,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와, 한국에 배치된 사드 미사일을 만든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 앞에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오크리지환경평화연합 페이스북)]
 
핵무기금지조약이 발효된 1월 22일, 미국 반핵평화운동은 미국 전역 100군데 이상에서 거리 행동을 조직했다. 곳곳에 “핵무기는 불법이다”라는 문구를 담은 노란색 현수막이 걸렸다. 시민들은 이 현수막을 들고 핵무기 생산 시설, 군사 기지, 군수업체 본부, 대학, 은행, 시청 등으로 행진하며 핵무기가 불법화된 역사적 순간을 환영했다. 핵무기를 만들어 돈을 버는 기업과 대학에 항의하고, 지자체들에 핵무기금지조약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편 트럼프의 낙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핵무기 정책은 장기적으로는 거의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뉴스타트’ 조약(신전략무기감축협정, 미러 간 핵통제조약)을 연장한 것은 좋은 일이나, 새 행정부는 핵군비 ‘현대화’란 명목으로 향후 25년간 새로운 무기 공장, 신형폭탄, 핵잠수함, 미사일을 만드는 데 2조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러시아와 중국도 미국 따라잡기에 나서면서, 세계는 새로운 핵군비 경쟁에 직면하고 있다.
 

노동당, 노동조합과 함께 하는 영국 반핵평화운동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의장 데이브 웹은 영국의 상황을 소개했다. 영국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은 NPT를 약화시킬 것이라며, 핵무기금지조약에 결코 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CND 부의장이기도 한 제러미 코빈이 야당인 노동당의 당수 자리에서 밀려나, 노동당의 핵무기 지지 방침을 바꾸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노동당 국회의원과 당원의 과반수는 여전히 핵무기 반대를 고수하고 있고, 많은 지구당이 이미 핵무기금지조약 지지를 결의했다. 영국 반핵평화운동은 이러한 노동당원들과 함께 영국 트라이던트 핵잠수함 시스템의 갱신을 막기 위해 의회 내 지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방위산업 노동자의 일자리가 군축에 의해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산업 다양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헌법, 동남아 비핵지대, 핵무기금지조약을 통해 비핵국가가 된 필리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핵무기를 보유했거나(미국, 영국) 그런 국가의 핵우산에 포함된(한국, 일본) 국가의 이야기였다면, 롤랜드 심불란 필리핀대학 교수가 소개한 필리핀의 사례는 다르다. 심불란 교수는 비핵필리핀연합(NFPC)의 전 의장이다.
 
2021년 2월 1일 필리핀 의회 상원이 핵무기금지조약 비준 절차를 완료하여, 필리핀은 이 역사적인 조약의 53번째 비준국이 되었다. 1987년, 민중의 힘으로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린 뒤, 필리핀은 국토 어느 곳에서든 핵무기를 금지하는 헌법을 확립했다.
 
세계의 비핵무기지대. 주황색으로 표시된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은 비핵무기지대로, 해당 지역 내 국가들의 합의로 비핵무기지대조약을 체결한 곳이다. [출처: UN]
 
필리핀이 위치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비핵무기지대화 또한 ‘핵무기 금지’를 명시한 필리핀 헌법에 자극 받은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이 1995년 12월 15일 동남아시아비핵무기지대조약(SEA-NWFZT. 일명 ‘방콕 조약’)에 서명하여, 조약이 1997년 3월 28일에 발효되었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 비핵무기지대조약이 존재하지만, 방콕 조약은 지역비핵화의 모범적 모델로 여겨지고 있다. 이 조약은 단순히 국가의 영토뿐만 아니라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대륙붕까지 포함하고 있다. 방사성 물질이나 핵폐기물을 투기하거나 배출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심불란 교수는 동남아시아비핵무기지대조약을 실질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 핵무기금지조약이 세계의 보편적인 규범이 될 수 있도록 추동하는 것이 아세안 국가들의 과제라고 밝혔다.
 

핵무기가 없다면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올해 1월 27일, 핵과학자회보(BAS)는 지구종말시계의 바늘을 자정까지 100초 남겨둔 상태로 1년 더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앞당기지 않은 것이다. 바이든 신임 미국 대통령이 미국과 러시아 간 핵통제조약인 뉴스타트조약을 연장하고,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세계보건기구(WHO) 복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구종말시계 성명은 “코로나19는 대규모의 치명적 결과를 낳았지만, 인류에게 실존적 위협은 아니다. 문명을 말살하지는 않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그러들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는 그 자체로 인류에 치명적이라기보다는,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가 인류에게 실존적 위협을 제기하고 있는 핵무기, 기후변화, 더 강력한 전염병 대유행, 새로운 전쟁 등 다른 위험을 관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경종이라는 것이다.
 
반면 핵무기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문명을 말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종말시계에도 핵통제와 핵군비경쟁 상황이 가장 중요하게 반영된다. 핵무기로 인한 종말 가능성을 제거하는, 가장 간단한 동시에 궁극적인 방법은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다. 핵무기금지조약의 발효는 아직은 인류가 함께 이 절멸의 무기를 통제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운동도 여기에 주목하고 한국의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주제어
평화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