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동향
| 2021.04.29
전염병처럼 번지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에는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다
[번역: 사회진보연대 국제이주팀]
* 이 글은 2021년 4월 12일 레이버노트(Labor Notes) 웹사이트에 발표된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레이버노트는 1979년 만들어진 미국 노동조합 활동가 네트워크이자 인터넷 언론으로, 노동자운동의 ‘운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 사우라브 사카르는 레이버노트의 부편집인이다.
“무서운 사람을 마주칠 것을 대비해서, 지금처럼 혼자 있을 때엔 늘 후추 스프레이를 손에 들고 다녀요.” 중국계 미국인인 뉴욕 시 교사 애니 탠 씨는 말했다. 2020년 2월에도 그녀의 친구들은 이미 지하철에서 언어적 괴롭힘을 당했다. 친구 한 명은 다른 사람이 고의적으로 기침을 해대는 일을 겪었다. 또 다른 친구는 너무 무서워 더는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과 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이 이와 유사한 사건들을 경험하고 있다.
한 이웃은 아 잉 씨를 가리키며 “중국 바이러스”라고 말했다. 그녀는 몇 해 전 중국 타이샨에서 이민 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방문요양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그녀가 사는 곳 인근에서 발생했다. 그녀는 딸에게 집밖에서 놀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안전해야 하고, [우리] 삶의 가치도 동등해야 해요.” 통역을 통해 그녀가 말했다.
‘유나이트 히어’(UNITE HERE, 미국 호텔 및 서비스노조) 8지부의 조직가인 유니스 호우 씨에 따르면, 아시아계인 한 호텔노동자는 시애틀 도심 길거리에서 거의 납치될 뻔 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안전하지 않아요.” 워싱턴대학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조지나 타바산이 말했다. 그녀는 워싱턴주공무원연맹 조합원이며 필리핀 출신이다. “저는 나이 드신 어머니 아버지가 있어요. 그분들은 밖에 나가면 스스로 보호할 수 없어요. 다른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요?”
가장 주목되는 사건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지역 세 곳의 스파에서 3월 16일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인데, 살해당한 8명 중 6명이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이고,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그 가운데 한 명만 미국 시민이었다. 한 명은 그린카드(영주권) 소지자였다. 그들이 미국에서 살았던 시간은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수십 년에 달한다. 2명은 중국계 이민자였고 4명은 한국 출신이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이주노동자연대(Koreatown Immigrant Workers Alliance, KIWA) 사무국장인 알렉산드라 서는 “그들의 이름은 우리의 엄마, 사촌, 자매들 같은 이름이었기에 한국계 커뮤니티 내에서 특별한 울림이 있다”면서,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너무나 인종주의적인 이 사회에서 다치고 살해당한 모든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폭력
애틀랜타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은 충격적이지만, 일상과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한 추계에 의하면 지난 해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해 적어도 3,795건의 증오 폭력행위가 기록되었다. 보고된 사건의 거의 절반이 하나의 주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실제보다 적게 집계된 것이 명확하다. 또한 여성에 대한 사건이 남성보다 2.3배 많았다.
반(反)아시아적 언행의 급증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중국 바이러스’, ‘쿵-플루’란 딱지를 붙이며 중국에 대해 험한 말을 쏟아냈던 팬데믹 초기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폭력이 생길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요. 이 폭력을 조장한 것은 전적으로 트럼프, 그리고 그의 말에 책임을 묻지 않은 언론입니다.”라고 탠 씨는 말했다. 차별의 물결은 깊은 경제침체와 불평등, 그리고 [민주당, 공화당] 양당의 중국을 향한 적대적 태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상황은 아니다
전염병의 확산이 차별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많은 노동자계급 아시아계 여성은 일하는 삶 내내 영어 구사력, 계급, 젠더, 인종, 비자 상태를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받아 왔다. 북미서비스노조(SEIU) 1199NW 조합원인 앤젤 셔번 씨는 시애틀의 스웨디시 메디컬센터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2012년 약혼 비자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지난 7년간 이 병원에서 일을 했다.
백인 가족은 그녀를 환영했지만, 그녀는 “일부 미국인들, 즉 고용주 같은 이들은 화장실 청소를 직업으로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다르게 대해요.”라고 말한다. 셔번 씨는 관리자가 “영어 능력을 향상시키라”고 말했을 때 상처 받았다. 또한 “내가 다시 결혼했을 때 관리자가 ‘남편하고는 어떻게 이야기해요?’라고 물었어요. 정말 못된 말이었죠.”라고 했다. “나도 내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걸 알아요. 난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람도 한 번 필리핀에 가서 타갈로그어로 말해보라고 하고 싶네요.”라고 덧붙였다.
아 잉 씨는 “이민자로서 가장 큰 문제는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인이고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선택지가 많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녀는 전에 식당과 식료품점에서 일했고, 지금은 노인을 돌보는, 약간 나은 급여를 받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은 일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준다고 했다.
타바산 씨는 전에 대학 내 세탁소에서 일했지만 세탁소는 폐쇄되고 외주화되었다. 그녀는 워싱턴대학이 세탁노동자 100명을 쉽게 외주화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이 아시아계이고 저학력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잉 성적대상화
애틀랜타 스파 살인사건에 있어 논쟁점은 “아시아 여성이 성적 집착대상이 되고 폭력을 당할 만 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아시아태평양계미국노동자연맹(Asian Pacific American Labor Alliance, APALA)은 말했다. “그러한 비인간화는 1875년 페이지법(Page Act)이 모든 아시아 여성을 성적으로 부도덕한 이들로 규정하며 이동과 자유를 제한했던 한 세기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이지법은 미국 최초로 이민을 제한한 법으로, 주로 아시아계 여성 이민자를 금지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술집에서 누군가 다가와 내가 ‘이국적이다’ ‘아름답다’며 ‘예쁜 혼혈 아이’를 낳을 것이고 틀림없이 ‘엄청나게 성적일’ 것이라고 했어요.” 탠 씨가 말했다.
APALA 시애틀 지부 의장인 호우 씨는 “텍사스 주의 아시안 식당에서 일했어요. 매니저는 특별히 아시아 여성들을 종업원으로 뽑은 거니까, 음식을 팔기 위해 예쁘게 보여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경험은 다음과 같다. “혼자 버스에 앉아 있었는데, 백인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갑자기 저한테 오더니 자기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국 사람들과 한국 문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기 시작했어요. 한국의 강 이름들을 읊고요...” 호우는 중국-말레이계 미국인이다. “당황스러웠어요. 그 사람이 딱히 명시적인 [차별적] 얘기를 한 건 아니지만,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었어요.”
언어도단의 역사
미국에서 아시아계 미국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의 시작은 거의 2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첫 번째 대규모 이민 물결은 1850년대였다. 중국 노동자들이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에 동참하려고 들어왔다.
1만 5천 명에서 2만 명의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들은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위험하고 등골 빠지는 노동조건에서 착취당했다. 같은 일을 해도 백인 노동자에 비해 임금을 30~50퍼센트 적게 받았다. 1853년에 이르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권리가 법으로 제한되었다.
19세기 후반기, 새롭게 획득한 권리를 흑인들이 박탈당했던 같은 시기에, 백인들은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항하는 조직도 만들었다. 인종주의적 언론은 부추겼다. 이는 대규모 린치 사태와, 아시아인의 이민을 실질적으로 거의 완전히 금지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앞서 언급한 페이지법은 중국인 성노동자가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중국 여성을 배제하는데 활용되었다. 중국 이민자들은 백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병균과 질병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졌다. 익숙한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가?
차별은 중국 이민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일본계 미국인은 2차 대전 중에 수용소에 강제수용 되었다. 그 후 상처입고 좌절한 일본계들은 [미국 주류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추구했다. 그 결과 한 때 미국 내 도시에 40여개에 달하던 재팬타운이 현재는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주한미군
미국은 또한 필리핀 식민지화부터 베트남 침공에 이르기까지, 1898년에서 1970년대 사이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대규모 폭력을 행사했다. 미국의 한반도 개입의 역사는 스파 총기난사에 살해당한 이들과 같은 아시아 여성노동자의 착취와 미군의 관계를 드러낸다.
2차 대전 후 1945년에서 1948년까지 미국은 남한을 점령했다. 일본군 성노예 시설을 기반으로, 미군은 미군기지나 그 근처에 성노동 시설을 재배치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을 정기적으로 검사하고 치료했다. 표면적인 목적은 미군의 성병과 기타 전염병 감염을 줄이려는 것이었지만, 이는 또한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한국 전쟁 휴전(전쟁은 공식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 2년 후인 1955년 이래로 미국은 남한에 늘 3만 명에서 7만 5천 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때로는 더 많기도 했다. 1958년에는 남한 인구 2천 2백만 명 중에 성노동자가 30만 명이었다. 태국, 베트남이나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미군은 남한 내 자국 군인의 성노동자에 대한 욕구를 가호했다. 이는 또한 1960년대 남한 경제에 있어 달러 확보의 원천으로, 한국정부의 노골적인 장려를 받았다. 연구자 캐서린 문은 성노동 관련 논의에서, 1960년대 당시 미군은 [성노동과 관련 없는 활동까지 포함해서] 남한경제의 거의 25퍼센트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와중에 성노동자들은 통제의 대상이 되어, 아프면 감금되어 팔이 축 처질 정도로 많은 항생제를 맞았다.
이런 [미군] 경제는 많은 한국 여성들이 미군 병사와의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런 사례는 1980년대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여성이 미국에서 성노동이나 그와 연관된 직업에서 일하게 된 경우들도 있다.
한국계 커뮤니티 안팎에서, 성노동자나 성노동자로 여겨지는 이들, 즉 애틀랜타 지역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들과 같은 이들에게는 낙인이 찍혀 있다. 살해당한 여성 중 한 명인 현정 그랜트는 아들에게,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마사지 업계가 아니라 메이크업 일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라고 말했다.
퀸즈 플러싱에 기반을 둔 풀뿌리 아시아계 및 이주 성노동자 단체인 ‘붉은 카나리아의 노래(Red Canary Song)’은 성명에서, “그들이 실제로 성노동자이든 아니든 혹은 그러한 꼬리표 하에서 자기규정을 하든 아니든, 우리는 그들이 마사지 노동자로서 성노동자, 아시아 여성, 노동자계급, 이주민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는 성적대상화된 폭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폭력으로 이어진 '희생양 만들기'
1960년대 말에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대규모 잔혹 행위를 자행하면서, 아시아로부터 대량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대개 고학력 전문가들을, 나중에는 노동자들의 이민을 허용했다. 이는 미국에서 아시아계의 증가로 이어졌고 그 결과로 아시아계의 운동이 만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별과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탠 씨는 이를 잘 알고 있다. 1982년 디트로이트에서 총각파티 날 밤에 야구방망이로 맞아 죽은 27살의 건축제도사 빈센트 친의 사촌이기 때문이다.
그를 살해한 로널드 에번스는 “우리가 일자리를 잃은 것은 너 같은 XX새끼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1980년대 당시 미국 자동차산업에서의 실업이 일본 때문이라는 만연한 인식이 만연했던 것을 반영한다. “우리는 내 사촌 빈센트 친의 살해사건에서 알게 되었지요. 아시아계에 대한 당시의 인종주의를 조장한 것은 경제적 불안이었다는 것을 말이에요.”라고 탠은 말했다. 그녀는 오늘날 폭력의 물결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그때와 같다고 보고 있다.
에번스는 자동차공장 매니저였고, 살해 공범이었던 그의 의붓아들은 해고당한 자동차 노동자였다. 그들은 3년 집행유예를 받았고 벌금 3,780달러를 내야 했다. 빈센트 친 살해사건은 아시아계 미국인 조직화와, 노동자뿐 아니라 흑인, 라틴계 등 다른 사회적 약자 그룹과의 연대가 급증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노동자의 역할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과 싸우기 위해 노동자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출발점은 이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힘을 구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을 얘기할 때, 나는 내가 ‘그들’을 비판한다는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는 노동자운동을 함께 행진해야 할 ‘우리’로 봅니다.”라고 알렉산드라 서 씨는 말했다. 다인종 노동자 센터인 KIWA는 주로 식당과 수퍼마켓의 한국계와 라티노 노동자들을 조직한다. “많은 이주노동자와 작은 가게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자신에게 단결권과 일터에서의 발언권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호우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하는 가장 강력한 일 가운데 하나는 임금과 수당에 대해 정말이지 놀라운 협약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 넓게 생각해야 하고 ‘사람들이 일터에서 안전하게 느끼기 위해 무엇을 더 필요로 할까?’를 물어야 한다.” 그녀는 8지부가 호텔객실 청소노동자를 위한 비상버튼을 비롯한 다른 안전 조치를 확보하기 위해 한 활동을 예로 들었다.
노동자운동은 유색인 간부들을 지원하고, 현장대의원이나 노조 간부가 되는 방법, 반(反)아시아계 증오행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법,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모국어로 말할 수 있고 이민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협약을 체결하는 법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셔번 씨는 “노조 조합원이 되자, 왜 인종 정의와 인종주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2019년 대규모 눈보라 사태 때, 그녀가 일하던 병원은 청소노동자에게 잠잘 수 있는 침대를 제공하지 않았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집에 갈 수 없었고, 다음 근무자들이 올 수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속한 근무 조는 다시 일해야 했다.
“인종 정의의 렌즈를 통해” 그녀는 노동조합의 일원으로서 싸웠고, “이제는 공평하게 대우를 받는다.” 노동자-경영진위원회에는 현재 객실청소 파트에서 적어도 한 명의 노동자가 포함된다. 객실청소 노동자들은 단체협약 논의에 참여한다. “당신의 피부색이 다르든 아니든, 혹은 이주민이든 아니든 아무도 공평하게 대우받지 못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