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0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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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버그 교차로

사회진보연대
[편집자 주]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WSSD·지구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8월 26일 개막해 9월 4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회담은 지금까지 발전을 위해서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의 문제를 무시했던 자본주의의 생산, 소비 패턴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인식 하에 유엔에서 주최하고 있다. 출발은 지난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회의였으며, 거기서 세계 정상들은 '의제 21(Agenda 21)'을 채택하고, 환경 및 자연 보존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요하네스버그 회의는 리우 선언 10년을 맞이하여, '의제 21'의 성과를 평가하고 미래의 실천목표와 실천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그 결과를 담은 '정상회의 선언문'을 채택할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 회의를 둘러싼 의견은 매우 분분하다. 회의에 참가하는 국가들 사이의 의견 차이(북반구 부국들과 남반구 빈국 사이, 유럽연합과 미국 사이 등등)도 팽팽할 뿐만 아니라, 회의 자체가 결국은 초민족적 기업들과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의 이해에 복무하고, 그것의 들러리로 기능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번 「사회화와 노동」 148호 자료글에 월든 벨로가 요하네스버그 회의에 대해 평한 짧은 글을 싣는다. 이 글이 요하네스버그 회의의 불가능성과 기만성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지는 않지만, 글을 통해 미국과 유럽을 위시로 한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과 초국적 기업의 협상장이 될 것이 분명한 요하네스버그 회의의 모습은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교차로Johannesburg Junction
-Walden Bello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있었던 환경과 발전에 관한 회의 이후 10년 동안 지구의 환경 상황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더 나빠졌다. 이 주된 범인은 자연의 하사품을 끊임없이 상품으로 변형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통제 불가능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다. 자본주의는 남성과 여성들의 자연적인 생명과 사회적인 생명을 지속적으로 침식한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인간들의 생명 에너지를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고갈시켜왔으며, 동시에 그들의 의식을 단 하나의 역할에 고정시킨다: 소비자라는 역할. 자본주의는 수많은 "운동 법칙"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 환경에 대해 가장 파괴적인 것은 Say의 법칙, 즉 공급이 소비를 창출한다는 법칙이다. 자본주의는 살아있는 자연을 죽은 상품으로, 천연자원을 죽은 자본으로 변형시키는 수요 창출 기계다.

자본주의는 불균등하게 확장되어왔다. 현재 북반구의 중심지는 과잉발전을 하고 있으며, 주변부는 저발전 상태이다. 따라서 이 불균등 발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 역시 차별적으로 분배되었다. 1인당 온실가스 방출량의 차이를 살펴보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미국인 1인은 몰디브인 17명이 방출하는 온실 가스를 방출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19명의 인도인, 30명의 파키스탄인, 49명의 스리랑카인, 107명의 방글라데시인, 134명의 부탄인, 269명의 네팔인.

사실, 북반구 자본가들의 과잉발전이 미치는 세계적인 영향은 통계에서 폭로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할 것이다. 북반구 국가들은 자국 내에서 환경운동이 성장하자 환경의 불안정을 남반구로 옮겨놓았다. 아마도 일본 자본이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을텐데, 일본 자본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자연 소비와 폐기물 생산을 늘림으로써 본국에서 환경 기준을 맞추어왔다.
환경운동의 성장에 대응하기 위하여, 북반구는 환경적 불균형을 남반구로 옮겨놓았다. 아마도 일본 자본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자연 소비와 폐기물 생산을 늘림으로써 본국에서 환경 기준을 맞추어왔던 것이 이에 관한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소비는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필리핀 목재 벌채의 70%―이 대부분이 불법적인 것이다―에 달한다. 일본의 상품 소비는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오염-집약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생산시설의 대량 이전에 동반된 제어할 수 없는 독극물 오염화를 몰고 왔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 자본은 저임금 노동, 오염-친화적인 중국을 세계의 작업장과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있는 일본 자본에 동참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세계적 자본주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환경 비용을 세계 경제의 중심에서 주변의 부분으로 이동시켰던 자본주의 세계화의 150년의 과정에서 최후의 단계일 뿐이다.

10년 전, 조지 부시 전(前) 대통령은 "미국의 생활 양식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리우 회의를 무력화시켰다. 유럽과 일본은 (리우 회의에 대해) 겁먹은 체 했지만, 그 후 10년은 소비가 그들에게도 최고의 가치임을, 그리고 증가하는 소비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지탱하기 위한 일반화된 영수증임을 보여준다. G7은 핵심적으로 자본주의의 중심이 어떻게 세계 경제에 있어서 소비촉진의 기능을 할 것인가를 협상하는 포럼으로 기능해왔다. 흔히 국제 경제의 관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중심부가 자연을 상품으로, 상품을 쓰레기로 전화시키는 것을 가속화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요하네스버그 정상회의는 처음부터 실패한 것이며,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권력을 교토의정서에 가담하는 것에서 철수시켰던 1년 전 조지 부시의 결정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얼굴을 벗은 자본주의이며, 자연의 적(敵)이라는 그 본질적인 성격을 드러낸 자본주의이다. 일본과 유럽의 엘리트들은 당황한 척 했지만, 그들이 가장 당황한 것은 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생산 체계의 기본적인 역학에 대한 미국의 솔직한 시인이다: 즉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확장은 자연을 소비하고 오염시키는 것을 가속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는 기본적인 역학.

요하네스버그는 기업들의 그린 워싱의 혼합물이 될 것이다. 미국의 협박과 유럽의 '너보다는 숭고하다'는 자세, 제3세계 지도자들의 보다 親기업적인 자유화에 대한 보상으로서 원조 구걸, 세계무역기구의 자유무역에 복무하기 위한 환경 납치. 그것은 불명예스러운 실패로 가는 또 하나의 UN 회의이다.
이 실패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에 대항한 라틴 아메리카의 반역이 폭발하고, 책임성의 부족과 구조적인 기업 범죄가 미국 법인 자본주의의 신뢰성을 침식해 온(72%의 미국인들이 법인 기업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너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시점과 동시에 온다.
이 위기는 과잉생산, 과잉설비의 위기 때문에, 위기를 벗어나 자체의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능력이 방해받고 있는 때와 동시에 온다. 미국, 일본, 유럽 그리고 동아시아―소비 중심의 성장 엔진―는 현재 동시적인 급락의 유령에 직면하고 있다. 자연의 반란이 점점 명확해짐에 따라, 전세계의 소비자들이 공동체를 복원하고 자본주의가 손상시켜 온 사회적 연대를 복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맑스에서 슘페터까지 이르는 분석가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자기파괴의 역학이라 인식해왔던 것이 발전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는 자본주의와 환경, 자본주의와 공동체 사이의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표지로 기억될 것임이 분명하다. 어느 쪽이 우세할 것인가는 남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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