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에 평화에 물들다” 안영민 평화활동가 초청강연

 

 

“팔레스타인에 평화에 물들다” 안영민 평화활동가 초청강연

 

○ 일시 _ 2010. 11. 4. 목. 저녁7시 /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6층 국제회의실
○ 준비하는 곳 _ 광주국제교류센터, 광주인권운동센터, 전남대공익인권법센터,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 문의 _ 070.8234.1319 /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 기획의도

반세기가 넘도록 삶과 죽음이 한데 뒤섞여 있는 곳
장벽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 같은 곳
늘 분쟁의 땅으로 기억되는 이 곳 “팔레스타인”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번 강연자인 안영민 씨도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본 사진 한 장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고 한다. 바로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숨진 팔레스타인 아이의 모습을 보고나서부터… 그 이후로 그는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 알고 싶어 2006년과 2009년 팔레스타인으로 떠난다. 마침내 그는 90일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지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물들다>라는 책으로 펴낸다. 미디어를 통한 간접 체험으로는 불가능한 생생함이 살아있는 내용들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구가 5,000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지내며 팔레스타인을 몸으로 배운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 주민들과 함께 농장 일을 하고, 저녁이면 모여서 놀고, 길을 지날 때마다 이스라엘이 만든 검문소에서 몸 검사와 신분증 검사를 받고, 늦은 밤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군인들 소리에 놀라 문을 걸어 잠그고, 이스라엘이 전기를 끊어버려 촛불 아래 밥을 먹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오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불법 점령한 이래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고 있는 ‘못된 나라’. 최근 5월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내)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가는 ‘생명 줄’같은 구호선마저 공격하며, 가자지구의 주민들은 물론 그 곳에서 생활하는 평화활동가들의 숨통까지 조이고 있다.

 

타국민까지 공격하는 이스라엘에게 국제사회가 거세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들의 압박은 더욱 강해져만 가고 있다. 일찍이 일제로부터 해방했던 한국이라면 급박한 상황을 절감하고 있을 테지만 ‘상대적강대국인 이스라엘과 미국 워싱턴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묻는 관행에 젖어 있다. 국민들도 교과서에서도 접하지 못한, 그래서 ‘지도 없는 국가’로 불리는 이 곳 상황을 간간히 해외토픽에서만 접하고 있을 뿐… 문제해결을 위한 관심과 지혜를 모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힘든 상황이다.  팔레스타인민이 중동의 테러리스트라고 오해할 정도이다.

그들은 오늘도 국제사회의 오해와 무관심로 슬퍼한다. 어느 누구도 약자의 편에는 서지 않고 권력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더 구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이고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강자를 더욱 진화 시켜왔다. 그렇다고 우리가 팔레스타인민에게 경제적 지원을 줄 없다. 국제적 지위 또한 올려줄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이 국제적 무관심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가 뉴스를 접했을 때 '이건 아닌데…'라고 말 할 정도의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 읽을꺼리

학교 체벌에 대하여 /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칼럼 / 2010. 8. 3

 

얼마 전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향해 구호물자를 싣고 가던 선박을 이스라엘군이 공격해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최소 19명이나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수십년 동안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야만을 볼 때마다 나는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곱씹게 된다.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그토록 집요하게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까닭은 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독일의 야만적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0년 전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저항했듯 나치 독일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렇게 야만적인 폭력을 무시로 행사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당한 폭력에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부당한 폭력에 저항할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끝까지 당하기만 했던 사람은 남들이 자신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폭력을 가하면 자기처럼 굴종하리라 생각한다.

 

-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낳아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자기보다 강한 자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폭력도 일종의 힘으로 관성의 법칙을 따른다. 그리하여 저항을 통해 멈추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계속 이어져 다른 곳으로 전달된다. 나치의 폭력에 유대인들이 저항하지 못했으니, 그 폭력은 멈추지 않고 다시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평화를 진심으로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에 연대하는 것이 하나의 도덕적 의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는 누구든 타인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져 있는 단계가 있다. 저항하고 싶어도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부모의 폭력이나 교사의 폭력 앞에서 어린이는 저항하고 싶어도 저항할 수 없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일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린이는 부모와 교사의 폭력 앞에 저항할 수 없는 상태, 전적인 무기력 상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집에서는 부모에게,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는 학생은 대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폭력을 가하듯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기가 받은 폭력을 보상받으려 한다. 희생자는 자기의 동생일 수도 있고 학교의 후배나 동급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아이가 어른이 되면 다시 자기 자식이나 가난한 이웃집 어린이가 폭력의 대상이 될 것이다. 어디서든 저항을 통해 부당한 폭력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폭력은 다른 폭력을 낳으면서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이 계속되면 전 사회적으로 폭력의 총량은 증폭되고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학교 체벌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이 조치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체벌이 없으면 학교가 통제 불능의 무질서 상태에 빠진다고 비판한다.

 

-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지만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폭력 없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 이를 통해 자율적인 질서를 수립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학교 교육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다. 대화와 설득이 아니라 오로지 강제와 폭력으로 학생들을 통제하는 교사들을 보고 자란 학생들이 어른이 되면, 그들도 배운 것이 그것뿐이니 다시 힘으로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겠는가.


공식적으로는 군대에서도 금지된 폭력이 학교에서 금지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까닭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교사들 자신이 품행이 방정한 모범생으로서 사범대학 시절부터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른 처신만을 강요받았던 까닭에 함석헌이 말한 ‘저항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장이든 선배 교사든 상급자의 부당한 모욕이나 유·무형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교사는 반드시 저항할 수 없는 약자인 학생들에게 그 폭력을 전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교사들 자신이 부당한 모욕과 폭력에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간곡히 권하노니, 적어도 수업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도록 하시라. 존댓말을 하면서 주먹을 쓰거나 상소리를 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